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03:33:59

타치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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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사성(四姓) 『겐페이토키츠(源平藤橘)』
파일:미나모토씨 가몬.svg
파일:타이라씨 가몬.svg
파일:후지와라씨 가몬.svg
파일:타치바나씨 가몬.svg

<colbgcolor=#000><colcolor=#fff> [ruby(橘,ruby=たちばな)][ruby(氏,ruby=し)]
타치바나씨
파일:타치바나씨 가몬.svg
타치바나 가문의 가몬
귤문
橘紋
씨성 타치바나노 스쿠네(橘宿禰)
→ 타치바나노 아손(橘朝臣)
본가 황실(皇室)
씨조 타치바나노 미치요(橘三千代)
타치바나노 모로에(橘諸兄)
종별 황별(皇別)
후예 아리요시씨(有良氏)
히로오카씨(広岡氏)
스스키가(薄家)
쿠스노키씨(楠木氏)? 등

1. 개요2. 역사3. 인물
3.1. 실존 인물3.2. 가상 인물
4. 상대적으로 낮은 인지도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씨족. 미나모토 (源), 타이라 (平), 후지와라 (藤原)와 함께 일본 4대 본성 중 하나. 이 일족이 담당한 분야는 사건의 기록과 그 문헌의 보관이었다.

와도 원년 (708년) 11월 25일 창건되었다.

한자 을 의미하나, 먹는 귤을 말할 때는 미캉(蜜柑)을 더 많이 쓰고, 橘은 보통 성씨에 쓰인다.

2. 역사

아스카 시대 말기의 궁녀였던 아가타노 이누카이노 미치요([ruby(縣,ruby=あがたノ)][ruby(犬,ruby=いぬ)][ruby(養,ruby=かひ)][ruby(宿,ruby=ノすく)][ruby(禰,ruby=ね)][ruby(三,ruby=み)][ruby(千,ruby=ち)][ruby(代,ruby=よ)] )[1]겐메이 덴노로부터 귤나무 가지가 장식된 잔을 하사받았던 것에서 유래한 으로, 미치요의 두 아들인 가쓰라기 왕과 사이 왕이 신적강하를 하면서 조정에 청원해서 어머니의 타치바나 성을 이어받아 각기 타치바나노 모로에(橘 諸兄)와 타치바나노 사이(橘 佐爲)로 이름을 바꾸었다. 타치바나의 기원은 모계로부터 물려진 성씨인 것이다.

타치바나 중에 유명한 인물로는 헤이안 시대 극초기 일본 역사상 유일한 타치바나 출신의 황후였던 단린황후 타치바나노 카치코가 있다.[2] 헤이안 시대 초기에 후지와라씨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등용되었으나, 곧바로 후지와라의 전성기가 열리자 쇠퇴를 거듭해 지금은 뚜렷한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이때문에 국내 교육과정(세계사, 동아시아사)에서도 헤이안 시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후지와라씨, 막부 성립 과정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미나모토씨와 타이라씨에 비해 비중이 매우 낮은 편이다.

타치바나씨의 후손이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징비록에 나오는 귤강광(橘 康廣)[3]이나 귤진중(橘 眞重),[4] 남북조 시대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고, 고다이고 덴노에게 끝까지 충성을 바쳐 충의의 상징이 된 구스노키 마사시게도 타치바나를 본성(本姓)으로 자처했다. 현재도 타치바나씨 성을 쓰는 사람이 많다.

3. 인물

3.1. 실존 인물

3.2. 가상 인물

4. 상대적으로 낮은 인지도

'4대 본성'은 역사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다른 세 가문은 각각 연상되는 역사상의 인물이 너무 많은 반면에, 타치바나는 빨리 몰락한 탓에 유명세에 비해서 이미지가 희박한 탓이다. 겐페이토키쓰 4대 혼세의 경우 헤이안 시대에 일어난 타이라노 마사카도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을 진압하면서 성립된 무문(武門)인데, 타치바나가 여기에 끼이는 것은 이요노쿠니(지금의 일본 에히메 현)의 경고사였던 타치바나노 토야스(橘遠保)라는 인물이 후지와라노 스미토모를 잡아 죽이는 공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타치바나노 토야스는 포상으로 미노노스케가 되고 얼마 안 되어 의문의 피살을 당했는데, 밤중에 길을 가다 습격을 당하고 다음날 죽은 채로 발견된 것. 이 점도 타치바나 가문이 다른 세 혼세/본성과 달리 무사 가문으로써 성장하지 못한 원인이 아닐까 추정되기도 한다.[6] 그리고 타치바나노 토야스가 왜 누구한테 살해를 당한 건지는 현재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히이라기(柊, ひいらぎ, 종엽, 호랑가시나무), 카츠라(桂, かつら, 계수나무), 쿠스노키(楠, くすのき, 녹나무) 등이 있지만 타치바나 쪽이 압도적으로 많다. 여기서 쿠스노키 씨의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경우는 타치바나 씨를 혼세로 한다는 설도 있다. 상술한 타치바나노 토야스가 마사시게의 선조라는 것.

[1] 비다츠 덴노의 후손으로 알려진 미누 왕과 결혼해 가쓰라기 왕과 사이 왕 두 아들을 두었고, 나중에 후지와라노 후히토에게 재취해서 후지와라노 고묘시를 낳았는데 이 고묘시가 쇼무 덴노의 황후가 된다.[2]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정적이었던 타치바나노 나라마로의 손녀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라마로가 죽고 난 후에 카치코가 사가 덴노의 황후가 되었고, 후지와라노 나카마로는 몰락하여 나카마로가 박탈당한 정1품의 직위가 죽은 나라마로에게 주어졌다.[3] 유즈야 야스히로. 쓰시마에서 온 일본의 사신으로 "조선의 창은 참 짧군요"라고 비웃었다고 한다. 또 연회에서는 술에 취한 척 후추를 마구 바닥에 뿌려댔는데 이에 사람들이 허둥지둥 주워대는 모습을 보며 "니네 나라는 곧 재난이 닥치겠다. 정신 상태가 이 꼬라지니까" 라고 했다. 하지만 조선이 사신 파견을 거부하는 바람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서 일본으로 귀국한 후 일가족과 함께 처형되었다.[4] 다다 요자에몬. 쓰시마 도주의 명을 받아 조선에 와서 울릉도가 일본의 ‘다케시마’라고 주장하면서 조선 어민들의 출어를 금지해 달라는 요구했다.[5] 성씨 표기가 '橘花'로 살짝 좀 다르다.[6] 참고로 후지와라타와라노 토타오슈 후지와라씨 같은 무가 집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