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000, #000000 20%, #000000 80%, #000000); color: #fff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ffff>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제5대 |
율리우스 쉬렉 | 요제프 베르히톨트 | 에어하르트 하이덴 | 하인리히 힘러 | 카를 항케 | |
국가지도자 외 장성급 지도자 |
제5대 슈츠슈타펠 국가지도자 카를 아우구스트 항케 Karl August Hanke | |
| |
<colbgcolor=#000><colcolor=white> 출생 | 1903년 8월 24일 |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슐레지엔주 라우반 (現 폴란드 루반) | |
사망 | 1945년 6월 8일 (향년 41세) |
체코슬로바키아 제3공화국 우스티주 | |
정당 | |
시민권 | 독일인 |
[clearfix]
1. 개요
|
|
국방군 복무 당시의 카를 항케. 4호 전차의 전차장이었다.[1] |
2. 생애
슐레지엔 주의 라우반에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은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중 전사하였다. 1920년부터 1921년까지 국가방위군(Reichswehr, 라이히스베어) 제19보병연대의 임시의용병으로 복무했다. 전역 이후 독일 제분 학교를 다니며 제분 기술을 배운 그는 1년 동안은 철도 작업장 도제로서 실습 경험을 쌓았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21년부터 1926년까지 항케는 독일 남부 지역에서 비즈니스 매니저로 제분업계에서 일했다. 그 후 그는 베를린에 있는 직업교육 전문학교에 다녔고 1928년 제분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취득했다. 이후 베를린 슈테글리츠에서 제분업 장인으로 일한 그는 베를린에 있는 기술 학교의 직업 교사가 됐다.2.1. 나치당 입당
|
항케(가운데)와 나치 관료들[2] |
2.2.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괴벨스와의 악연이 있던 항케는 1939년 예비군 동원령을 받고 전쟁에 참전했다. 1939년 7월부터 10월까지 독일 3 기갑사단에서 복무하면서 폴란드 침공에 참전했다. 1940년 5~6월에는 에르빈 롬멜의 독일 7 기갑사단에서 복무하면서 프랑스 침공에 참전했고 1, 2급 철십자장을 수여받았다. 육군 중위로 1941년 제대했다. 문서 맨 위에 있는 사진은 이 짧은 참전 기간 동안 찍은 사진이다.2.3. 제대 이후의 활동과 최후
|
친위대 집단지도자 시절의 항케, 항케 왼쪽에는 하인리히 뮐러가 있다. |
3. 진급 내역
- 1934. 2.15 : SS 의용병
- 1934. 7. 1 : SS 소령(SS-Sturmbannführer)
- 1935. 4. 20 : SS 중령(SS-Obersturmbannführer)
- 1935. 9. 15 : SS 대령(SS-Standartenführer)
- 1937. 4. 20 : SS 상급대령(SS-Oberführer)
- 1941. 1. 30 : SS 소장(SS-Brigadeführer)
- 1941. 4. 20 : SS 중장(SS-Gruppenführer)
- 1944. 1. 30 : SS 대장(SS-Obergruppenführer)
- 1945. 4. 29 : SS 국가지도자(Reichsführe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