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 [[인도|]] |
중화인민공화국 中华人民共和国 People's Republic of China | 인도 공화국 भारत गणराज्य Republic of India |
中印關係 (간체: 中印关系)
भारत-चीन सम्बन्ध (바라트-친 삼반드)
1. 개요
또한 미국에게 인도는 중국을 견제하는 데 있어 일본, 호주와 함께 가장 중요한 파트너이다.
참고로 최근 통계를 기반으로 해서 두 나라를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 | 인도 | |
인구 | 14.09억명 | 14.29억 명 |
중위연령 | 37.6세 | 27.1세 |
GDP | 14조 8,607억 달러 | 2조 5,925억 달러 |
수출액 | 2.26조 달러 | 0.30조 달러 |
수입액 | 1.84조 달러 | 0.46조 달러 |
문해율 | 96% | 74% |
인터넷 사용자 수 | 7.21억 명 | 4.62억 명 |
경제 활동 인구 | 8.07억 명 | 5.11억 명 |
GDP 대비 군사비 | 1.9% | 2.5% |
연간 인플레이션율 | -1.4% | -1.5% |
외환보유고 및 금 보유고 | 3.00조 달러 | 0.42조 달러 |
2. 역사적 관계
중국과 인도 모두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황하 문명, 인더스 문명)에 속하였다.[2]2.1. 고대
기원전에 인도는 서양보다 먼저 중국의 존재를 알았고 이 때 인도인들은 중국을 당시 인도와 가장 가까웠던 진나라의 이름을 따 산스크리트어로 치나(Cina चीन IPA: [tɕiːnɐ])로 불렀다.[3] 인도의 고대 서사시인 마하바라타나 라마야나에는 인도에 들어온 중국인들이 브라흐민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아 계급이 수드라로 강등되었다는 언급도 있다.비록 히말라야산맥이라는 지형적 방벽 때문에 직접적인 교류는 어려웠지만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해당하는 토하리스탄을 통한 간접 무역이나, 동남아시아를 거쳐가는 해상 무역을 통해서 많은 교류가 이루어졌다. 다만 중국이 토하리스탄 일대를 침략했던 시점은 진나라 이후 전한 시대이고, 중국과 인도를 잇는 중계 무역에 참여한 것은 중국인이 아니라 소그드인들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진나라를 뜻하는 치나로 불리게 되었는지는 불명.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추론할 수 있는 사료는 하나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장건이 서역 각국을 탐방하고 이미 중국이 서역에 대해 알기 이전부터 파촉(오늘날의 쓰촨성 일대) 지역에서 생산된 제품들이 서역 각국에 유통되고 있다는 보고를 남겼는데 윈난이나 미얀마 지역의 원주민들이 물물교환을 통해 중국산 물산을 인도산 물산과 교환하면서 진나라라는 명칭이 퍼졌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신이 대하(박트리아)에 있을 때 공(邛)에서 생산되는 죽장(竹杖)과 촉(蜀)에서 나는 베를 보고 어디서 얻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대하 사람들이 대답했습니다. 『우리 나라 상인들이 신독(身毒; 신드)의 시장에서 사온 것입니다. 신독은 대하의 동남쪽으로 수천 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 풍속은 정착생활을 하고 대체적으로 우리 대하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날씨는 불순하고 습하며 여름에는 몹시 덥다고 했습니다. 그 백성들은 코끼리를 타고 싸웁니다. 그 나라에는 아주 큰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신 건(騫)이 추측해본 바, 대하는 우리 한나라에서 서남쪽으로 1만 2천 리 정도 떨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신독국은 대하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수천 리 떨어져 있고 또 촉에서 만든 물품들이 있으니 아마도 촉에서는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 바로 대하로 사자를 보낸다면 강(羌) 족의 영토를 지나야 하는데 길이 험할 뿐 아니라 강족이 매우 싫어할 것입니다. 또 북쪽으로 조금 돌아간다면 흉노에게 잡히고 말 것입니다. 촉으로 곧바로 간다면 길도 가깝고 도중에 도둑 걱정도 없을 것입니다."- 사기 대완열전 |
장건으로부터 2세기 이후 서기 70년경 당시 로마 제국 이집트 속주의 알렉산드리아의 한 그리스인 선원은 인도를 오가면서 견문한 내용을 바탕으로 <주항기>라는 이름의 책을 남기는데 이 책에는 당시 그리스 로마인들이 인도인들로부터 중국에 관해 접했던 내용이 담겨 있다.
인도 최대의 강인 갠지스 강은 나일 강처럼 계절에 따라 수위가 높아진다. 이 강에 똑같은 이름의 중요한 무역기지가 있다. 갠지스 시[4] 이곳을 통해 말라바르산 향신료, 감송, 배 그리고 갠지스산 최상급 모슬린이 수출된다. 이 지역 너머에는 아주 광대한 내륙 지방인 지나(중국)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서 생사, 견직물, 옷감이 육로로 들어온다. 이 지나라는 곳은 닿기가 쉽지 않다. 거기서 사람이 오는 경우는 거의 없고, 그리로 가는 사람도 많지 않다. 인도인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곳 너머의 땅 지나은 겨울이 혹독하여 추위가 심하다고 한다.
고대 당시에는 그리스 문화권과 인도와의 교류가 활발했던 것과는 반대로 중국과 인도 사이의 교류는 변변찮은 수준이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2.2. 중세
오호십육국 시대 들어서 중국에서 불교가 크게 유행하면서 이후 법현, 현장 같은 중국 승려들이 인도를 여행하고 기행문을 남긴 바 있다. 중국에서 불교가 번성하면서 교류가 본격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는데, 당나라 시절에는 장안에 힌두교 사원 및 인도인들이 거주하는 구역이 따로 존재했다.인도아대륙에 이슬람 왕조들이 들어서면서 중국 불교계와 인도 불교계 사이의 교류는 대폭 축소되었으나, 인도와 중국 사이의 무역은 송나라 시대에도 상당한 규모로 진행되었다.
신종 희녕(熙寧) 연간(1068~1077)에 대식에서 온 자가 번장사(蕃長司)의 업무를 통할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여, 광주에서 일하도록 하였다. ... 도번수보순랑장(都蕃首保順郞將) 포타파리자(蒲陀婆離慈)가 아들인 마물(麻勿)로 하여금 공물을 바치며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자신의 직위를 대신하게 해 달라고 하고 또 장군으로 임명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마물을 낭장으로 삼았다. ... 대식의 각 부족은 각각 이름이 달라서, 물순(勿巡),[5] 타브리즈(阤婆離), 유로화지(俞盧和地),[6] 말라바르(麻囉跋) 등의 나라가 있지만, 모두 대식이란 이름으로 대표되었다.
- 『송사』 번역출처
- 『송사』 번역출처
해당 사료에서 언급되는 말라바르는 오늘날 남인도 해안지대 케랄라 주의 이명이다. 즉 중국인들은 이들을 별개의 인도인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무슬림으로 인식하였고, 인도에서 온 무슬림 상인들을 따로 불교용어 대로 천축국에 왔다고 기록하지는 않았다.
2.3. 근세
정화의 대원정 당시 정화가 이끄는 명나라 대함대가 케랄라의 코친과 캘리컷에 기항하고 사절단을 남경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정화의 대원정 이후 중국과 인도의 직접 교류는 대폭 감소하게 되는데, 포르투갈 제국이 인도의 고아 등 해안 지역에 요새를 세우고, 고아와 마카오를 중심으로 중국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 해양 세력은 기존 중국과 인도 무역을 운영하던 무슬림 상인들을 학살하고 축출하였다.포르투갈의 아시아 식민지 경영의 중심은 고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마카오는 고아에 체류하는 총독의 관할 하에 있었다. 마카오와 고아 사이의 교류는 상당한 수준이었지만, 명나라 조정에서는 마카오를 통해 인도와 간접 교류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2.4. 근대
오늘날 중국과 인도가 국경을 접하게 된 이유는 청나라가 티베트를 병합한 데 있다. 청나라와 대치하던 준가르족들은 티베트 불교를 믿었으나, 달라이 라마들과 권력 승계 문제로 다투는 과정에서 준가르 전사들이 라싸를 약탈하고 포탈라궁에 불을 질렀다. 명색이 티베트 불교 신도라는 준가르족들이 포탈라궁을 약탈하자, 티베트인들은 경악할 수 밖에 없었고 티베트인은 청나라 군대가 라싸에 입성하자 청군을 해방자로 맞이하였다. 또한 청나라 황실은 티베트 불교를 믿는 몽골인들을 회유하기 위해서 포탈라궁의 재건을 지원하고 달라이 라마를 극진히 대접하였다.그러나 청나라가 신해혁명으로 멸망하고 중국 내 몽골족들도 쩌리 비슷한 처지로 전락하면서 달라이 라마들은 중국 위정자들 입장에서 그닥 필요가 없어진 이유로 찬밥 대접을 받게 되었다.[7] 이는 후술하는 현대 중국과 인도 간의 분쟁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이다.
오늘날 중국과 인도의 국경 분쟁 배경은 중국이 과거 청나라 시절 국경 그대로의 영토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청나라 시절 티베트인들이 청군을 환영하였던 것과 반대로, 오늘날 티베트계 민족들은 중국 대신에 차라리 인도의 지배를 받는 것을 선호하면서 국경 분쟁은 복잡한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이밖에도 아편전쟁과 의화단 운동 당시 인도인들이 영국군에 소속되어 참전한 바 있다.
2.5. 현대
인도 독립 직후 중국과 인도의 관계는 식민지와 반식민지 경험을 당한 동병상련의 경험 때문에, 양국의 건국 직후에는 상당히 좋았다. 1949년 장제스 정권을 대만으로 패퇴시키고 베이징에 세운 중국을 세계에서 첫번째로 승인한 것은 바로 1947년 영국에서 갓 독립한 인도였다. 한국 전쟁에서도 인도는 남북 모두 똑같이 의료지원하는 방식으로 중립을 지켰지만, 그 밖의 문제에서 중인 양국은 매우 가까웠다. 중국이 미국과 수교가 되어 있지 않았을 때인 1950년대, 장제스의 대만이 아니라 중국을 자신의 조국으로 생각하는 미국내 중국 교민의 비자-여권 업무는 주미 인도 대사관이 대리했다.하지만 이렇게 좋았던 관계는 1951년 중국이 티베트를 병합하며 국경을 맞닿게 되자 갑자기 껄끄러워진다. 중국이 티베트를 합병하자,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 총리는 망명 티베트인들을 다람살라에 정착시켰으며[8], 독립후 1950년대 영연방 인도령 내에 반독립 상태로 있던 히말라야 방면의 여러 소국들(시킴, 아삼)을 합병하면서 부탄을 경계로 중인 양국은 군사적으로 대치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서로 급격히 사이가 나빠졌으며, 결과적으로 1962년 중인전쟁이 발발하여 총칼을 맞대게 된다. 이후 인도는 중국과 사이가 나쁜 소련과, 중국은 인도와 사이가 나쁜 파키스탄과 편을 갈라 대치했고, 교류가 사실상 중단되었다.
2017년에는 국경분쟁으로 갈등을 빚자 중국 국영매체에선 인도의 7가지 죄라는 영상을 올렸으나 이 영상에서 시크교도 터번과 턱수염을 쓰고 인도식 영어 억양을 어설프게 흉내내는 중국인이 나오자 인도에서는 인도인을 조롱하는 인종차별적이라는 반응을 내세우며 비난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도의 국영매체 유튜브 채널인 SoSorry에서 시진핑의 곰돌이 푸를 검열한 사례를 이에 대해 풍자하는 영상이 등장하였다. 이후 2020에도 이 국영매체에선 코로나19에 관하여 몇 차례 영상을 업로드하여 중국을 비난하고 있다.#1#2
2023년 6월 9일, 중국과 인도 양국이 상대국 기자들을 추방하는 등 갈등이 커지기 시작했다.#
3. 교류
코로나 이전에는 중국-인도 간의 항공기 직항편이 존재하였으나 코로나로 직항이 중단되었다. 이후 양국 관계가 계속 좋지 않아 코로나 사태가 진정된 현재까지도 양국 간 직항편이 없다. 그나마 중국 본토가 아닌 특별행정구여서 비교적 자유로운 홍콩으로 가는 노선이 유일하다. 그래서 수출 / 수입도 홍콩을 중재지로 쓸 뿐 상호 간 직교역은 그다지 많지 않았으나, 중국이 경제적 투자가 많아지면서 인도 시장에 군침을 흘리고 있다. 세계 인구 2위에 막대한 부유층이라든지 중국 못지 않은 황금시장인 인도를 구경만 할 리가 없다. 샤오미 제품이 중국도 놀랄 정도로 인도에서 단기간에 막대한 판매량을 보이자 인도에서 제품 판매를 일시 금지해버렸듯이 중국 기업들도 인도 시장에 대하여 이젠 무시 못한다.[9]영토 문제로 둘이 서먹서먹하여 아직 제대로 된 통계가 없으나 인도라고 마냥 중국을 무시할 수도 없는데 상임이사국 항목에도 나오듯이 2014년 일본을 방문한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상임이사국 선정에 협조를 부탁한 아베 신조에게 말을 피하며 비협조로 나섰고 일본 언론도 인도조차도 중국에만 신경 쓰며 홀로 중국을 달래고 있다고 한탄했다. 인도 입장에선 오히려 일본과 손 잡았다가 러시아와의 관계도 나빠질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안 하니만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상임이사국 항목에 나오듯이 일본, 인도, 브라질, 독일의 상임이사국 반대를 부르짖는 나라들인 커피 클럽의 협동만 높이기 때문. 게다가 인도의 대외정책은 현재 친서방 성향이긴 하지만 중립에 가깝기에 더욱 그렇다.
서로 브릭스와 상하이협력기구 그리고 AIIB로 연관성이 있다. 물론 상하이협력기구는 인도가 러시아와의 친교로 가입한 면이 있는 편이다.
중국이 주도하는 AIIB 지분율 2위가 바로 인도이다 연합뉴스
인도는 중국을 대하는 입장이 일본이랑 미국, 호주의 입장과는 조금 다르다. 중국의 팽창은 단호히 반대하지만, 어느 정도의 협조를 유지하는 편이다.
인도는 냉전시절에도 기본적으로 제3세계의 맹주로서 미국-소련과도 양다리를 걸쳐왔으며, 인도는 G7에 맞서 중러가 주도하는 상하이 협력기구에 가입했다.
2018년에는 중국의 눈치를 봐서 자국내에 망명한 달라이 라마의 활동도 규제하기 시작했다. #
2022년, 러시아, 인도, 중국이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기로 했다.#
사실 중국이 압도적으로 국력이 강하다 해도 두 나라가 모두 군사강국이며, 경제대국이기도 한 현실을 감안하면 직접적인 대결은 불가능하며, 중국과 인도 두 나라의 대국관계는 장차 미중관계, 미러관계, 중러관계와 같은 적대적 공생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와 별개로 양국간의 사이는 안 좋지만 일부 인도인들은 중국의 이슬람 탄압정책을 옹호한다. 다만 인도 내 티베트계 소수민족들은 이슬람 탄압정책에는 무관심하더라도 티베트 불교 탄압정책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중국을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중국인들의 재중인도인 차별과 인도인들의 화교 차별에 대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비판한다.
3.1. 인도 내 화교
인도내에는 일부 화교가 거주하고 있다. 인도의 화교는 19세기에 인도가 영국의 지배를 받은 이후부터 청나라에서 건너왔다. 인도에 정착한 화교는 콜카타, 뉴델리 등에 정착했고 인도 요리에 영향을 받은 중국 요리가 생겨나기도 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양국의 교류가 많아지면서 인도 내에는 중국인 공동체가 생겨나기도 했다.4. 갈등
지금 중국과 인도의 관계와 달리 과거에는 양국의 사이가 의외로 좋았다. 영토 분쟁 지역이 겹치는 경우도 극히 드물었고 둘 다 교류할 내용들도 많았고 서로 도움되는 경우가 많았다. 당장 중국에 뿌리내린 불교의 원산지가 인도였으며 그 중화사상이 강했던 중국에서 인도를 천축국이라 부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에 이르러서 2천여년 만에 처음으로 문제가 생겼다. 물론 이는 인도가 진짜 통일국가를 만들어본 적이 없었고 과거 중국은 현재의 서쪽 영토를 보유하지 못했기에 충돌 소지가 없었기 때문이였다. 19세기 말, 인구 밀도나 국경 개념이 희박했던 지역에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영국 외무부가 임의로 그은 선이 화근이 되어 훗날 인도의 독립 이후 양국의 충돌을 불러온 것이다.1962년 아루나찰프라데시 주에서 이른바 중인전쟁으로 불리는 국경분쟁이 있었고, 이는 중국의 승리로 끝났다. 이는 청나라의 멸망 이후 인도 제국을 다스린 대영제국의 맥마흔 라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주요한 영토분쟁지역은 중국이 소유한 카슈미르 일부 아크사이친, 인도가 소유한 아루나찰프라데시가 있다. 물론 중국이 소유한 땅이 훨씬 쓸모가 없지만 그래도 영토 분쟁이기에 인도에서 돌려달라고 요구한다.
현재 중인관계는 1960년대 중인전쟁 이후 최악이다. 이는 2021년 4월 인도의 코로나 대유행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는데, 인도의 코로나가 확진자 수십만을 찍을 정도로 악화되자 서방권인 미국과 영국, EU는 물론, 반서방권인 중국과 러시아까지 인도를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지만 인도는 서방권과 러시아의 지원은 받은 것과 달리 중국의 지원손길은 외면해 버리는 모습을 보였다.관련 기사 그나마 온건한 성향이였던 장쩌민과 후진타오 집권기때는 그나마 나은 편이였다.
여기에는 중국 시진핑 정권과 소분홍 등으로 대표되는 극좌 성향 외에도 서방 측에서 인도를 부추기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아무리 서방 세계에서 중국을 견제하려고 해도 오늘날 세계 경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지분이 적지 않기 때문에, 혹여나 중국이 소련 해체 수준으로 몰락한다면 소련 해체 제2세계만 몰락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전 세계 경제가 안드로메다로 가는 수가 있다. 서방 세계 입장에서는 중국을 마음놓고 때리기 앞서서 세계 경제에서 인도가 차지하는 지분을 늘려야 할(다시 말해서 중국이 차지하는 지분을 줄여야 할) 필요가 있다.
4.1. 갈등 사례
2017년 중국이 부탄과 접한 도클람 지역에 도로를 건설하면서 부탄 측이 반발했고 인도 측도 중국을 비판했다.#2017년 7월 6일 기사에 따르면 국경 지역에 3,000명의 병력들이 대치 중이라고 한다. #
2017년 7월 13일 기사에 따르면 인도군은 이 지역에 20만 명의 병력을 배치하였다. 인도군, 중국과 대치 국경지역에 20만 병력 집결
2017년 7월 20일 중국 측에서는 이에 대응해 군수물자와 수술용 혈액을 티베트 자치구에 집결시키는 등 긴장이 고조되는 분위기이다. 중국군, 인도군과 대규모 무력충돌 임박 징후 결국 양측은 8월 말 대치 상태를 중단하는데 합의했다. 이와 관련된 이슈는 중국-인도 국경분쟁 항목 참고.
다만 양국 모두 군사강국으로 충돌은 승패에 관계없이 국제관계에 매우 부담되기 때문에 한 발자국씩 물러섰다.
인도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주변국과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중국은 RCEP를 추진하면서 인도를 배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2020년 6월 16일에 국경 분쟁이 발생하였다.
아루나찰 프라데시 주의 국경지대에서 인도인 남성 5명이 중국 인민해방군에 의해 납치됐다는 인도 언론의 보도가 나왔다.#
中국영매체 국경분쟁 동영상에 印 "인종차별" 발끈
인도-중국 국경 분쟁의 영향인지, 인도에서 중국어를 제2외국어 교육 과정에서 제외시키고, 한국어, 태국어, 포르투갈어, 러시아어를 추가시켰다고 한다. 기사
중국은 수입 냉동식품이 코로나19 바이러스 유입원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과학적 근거가 불충분하다”는 해외 과학자들의 성토가 잇따랐지만, 중국은 아랑곳 하지 않고 되려 중국 시민들은 "인도에서 시작한 델타 변이가 중국에까지 퍼졌는데, 바이러스 묻은 해산물을 수출하고 싶으냐, 양심이 없다"는 등 인도에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中 "포장지서 코로나" 막무가내 수입금지…인도와 '새우 전쟁'[10]
中 "포장지서 코로나" 막무가내 수입금지…인도와 '새우 전쟁'[10]
중국 공산당과 연계된 소셜 미디어에서 인도 코로나 사태를 조롱하는 게시물이 올라와 국제적인 논란으로 비화될 조짐이 보인다.#
인도 청년들이 가장 불신하는 나라가 중국이라는 설문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12월 7일, 스파이 혐의를 받는 중국 선박이 인도양에 진입하자 인도 해군이 동선 추적에 나섰다.#
중국의 국경 봉쇄 해제로 중국인 관광객이 많이 들어올 것으로 예상되자 미국, 일본, 인도, 방글라데시 등 세계 각국이 중국발 입국자 규제에 나섰다.#
중국 측이 인도 아루나찰프라데시 주(州)의 지명에 대해 중국어 표기를 붙이자 양국간의 갈등이 일어났다.#
5. 문화 교류
인도는 중국에 불교를 전래시켰다. 인도 문화권에서 발원한 불교는 중국에서 꽃을 피웠고, 인도에서는 거의 사그라들었다. 중국에서 외국 서적이 대규모로 번역된 경우는 아편전쟁 이전에는 불교 경전 번역, 원나라 때 이슬람 과학 서적 번역 정도가 있는데, 번역 규모와 기간 자체는 불교 서적 번역 사업이 더 컸다. 이 와중에 인도의 여러 학문과 과학이 중국에 유입된 것은 물론이다. 중국의 장기나 손오공도 인도에서 유래했다. 불교의 발상지는 네팔, 인도이지만 인도에서는 불교가 번성하던 고대 당시에도 농촌에서는 브라만교의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강했고, 인도 불교는 중국 불교가 사회 전반에서 유행한 것과 다르게 도회지 상인들을 중심으로 유행하는 편이었다. 고대 인도의 무역이 서기 3세기 이후 고대 로마의 구매력 약화로 쇠퇴하자 인도 불교는 인도 서부 도시들이 경제력이 약화되는 상황에 맞물려 서서히 붕괴하였다. 반면 중국에서는 한나라 붕괴 이후 오호십육국에서 한족 피지배층과 북방 유목민 정복자들 사이의 갈등을 줄이고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교리를 가진 불교 경전을 한문으로 적극적으로 번역하였고, 결국 불교는 중국의 사회 각층에 전파되며 중국 문화에 중요한 한 축을 이루게 되었다.인도는 중국에 14번이나 자이언트판다 임대를 요구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이렇게 되자 인도에서는 코끼리에 판다와 같은 색으로 칠해 판다라고 위장하기도 했다.
6. 주변국과의 관계
국제적으로 인도는 미국, 러시아와, 그리고 중국은 파키스탄, 러시아와 절친한 편이다. 양측 모두 인도를 견제하기 위한 의미가 크고 이는 실제로 효과가 나름 있어서 파키스탄은 대표 친중 국가로 꼽힐 정도. 사실 중국과 관계가 불편한 국가는 한둘이 아니긴 한데 그래도 보통은 국력 차이를 의식해서 한 쪽이 어느 정도 접어주는 수준으로 그치거나 거리상의 문제로 서로 간섭이 힘들기 때문에 의외로 충돌 가능성은 거의 없는 반면 중국-인도-파키스탄은 모두 핵보유국이라 서로가 서로에게 꿇릴 일이 전혀 없기 때문에 한반도 다음으로 위험한, 오히려 의외로 첫 전쟁 발생지가 될 수도 있는 곳이다. 그래서 세 나라 모두 정치적으로 서로와의 관계를 엄청나게 신경쓰는 편이다.파키스탄의 신드 주(州)에서는 중국어를 의무과목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 반면 부탄 같은 곳은 중국보다는 인도에 더 가깝다. 그래서 2017 국경분쟁때도 사실 원래 시작은 부탄-중국 문제였는데 인도가 거의 부탄의 대리분쟁국 수준으로 싸워줬다.
최근 남중국해 문제까지 있어 인도가 미국, 일본과 합동 군사 훈련을 벌였다. 기사 그리고 여기에 중국과 사이가 안 좋은 대만이 끼어들어 현재 미국을 중심으로 일본-대만-베트남-싱가포르-인도로 대중국 포위망이 구성되고 있다. 이에 중국도 질세라 미얀마-파키스탄-스리랑카와 연합해 대 인도 포위망을 만든 건 덤이다.
이런 인도 견제를 위해 중국은 파키스탄 및 스리랑카, 그리고 북아프리카 지부티에 해군기지를 마련해서 인도양에 출동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었다.
인도양의 중국 해군 기지 |
중국은 유라시아 대륙을 묶는데 선도적 역할을 하겠다는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개시했으며, 이때문에 육로로는 러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해로로는 인도양을 통해 아프리카까지 진출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렇게, 중국의 인도양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인도는 미국과 일본, 호주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대표적 해양 국가들과의 제휴 강화로 대응하고 있다. 이는 나렌드라 모디 현 수상의 '동방 개입'(Act East) 정책, 그리고 인도양과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단일 전략공간으로 규정하는 '인도-태평양'(Indo-Pacific) 개념으로 구체화되는 중이다.
7. 국력 비교(중국 vs 인도)
자세한 내용은 중국 vs 인도 문서 참고하십시오.8. 대사관
뉴델리시에 주 인도 중국 대사관, 베이징시에 주 중국 인도 대사관이 존재한다.9. 관련 기사
10. 관련 문서
- 중국/외교 / 중국/외교/비판
- 인도/외교
- BRICS
- 상하이 협력기구
- 중국/역사
- 인도/역사
- 중국-인도 국경분쟁
- 중국/경제
- 인도/경제
- 중국/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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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총 인구 수가 10억을 넘어가는 나라는 중국과 인도 외에는 없다. 심지어 기준을 4억으로 낮춰도 기준을 넘기는 나라는 이 둘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거대한 인구로 인해서 근래 130년 정도를 제외하고는 항상 둘 중 하나가 전세계 GDP 1위 국가였다. 링크[2] 단, 황하 문명은 인더스 문명보다 약 1,000년 더 늦게 발생하였다.[3] 후에 페르시아인들이나 그리스-로마인들이 이 cina를 sina 또는 sinae로 음역한다. 이것은 현대의 China로 이어졌다.[4] 현대 사학자들은 탐루크로 비정[5] 오만 동북부에 위치한 알 핫드 서안의 수르 항 인근을 가리킨다.[6]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 서안의 알 카티프[7] 티베트는 이 시기를 틈타 잠시 독립 왕국을 세우는데 당시는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 인도 제국 시절이라 티베트 측과 독자적으로 외교 관계를 맺지는 못했다.[8] 하지만 정작 네루는 1951년 중국의 티베트 합병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인도 정부는 현재까지도 티베트를 TIBET(CHINA)로 표기하며 중국의 일부로 간주하고 있다.[9] 스마트폰 시장의 경우도 샤오미가 삼성을 제치고 인도 스마트폰 시장 1위를 유지하고있다.#[10] 중국에서 냉동 수산물 포장지의 코로나 바이러스 운운하며 수입을 금지하는 전략은 중국-호주 무역 분쟁 당시에도 중국에서 즐겨쓰던 방식이었다. 당시 중국은 코로나 19의 기원이 호주라는 음모론까지 살포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