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12 14:24:17

인도-티베트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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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티베트
1. 개요2. 역사
2.1. 중세2.2. 근세2.3. 근대2.4. 20세기2.5. 21세기
3. 문화 교류4. 관련 문서

1. 개요

인도와 티베트의 관계를 정리한 문서. 오늘날 티베트 망명정부는 인도의 다람살라에 위치하며 현대 티베트의 독립 상실 이후 망명 티베트인들이 제일 많이 거주하는 국가가 바로 인도이다.

2. 역사

2.1. 중세

문헌상 기록으로 서기 7세기와 8세기에 북인도와 아프가니스탄에서 티베트로 불교가 전파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토번 제국의 전성기를 열였던 송찬간포는 중국 불교 대신에 인도 불교를 받아들였는데,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중국 불교는 인도 불교에 비해 승려의 권위가 낮았고,[1] 한문으로 된 불경을 티베트어로 번역하는 것보다 산스크리트어 같은 인도아리아어군 언어에서 티베트어로 번역하는 것이 더 간편했기 때문이다.[2] 세 번째로는 중세 인도의 대표적인 불교 대학이던 날란다 대학이 티베트와 인접한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토번 제국의 5번째 찬보였던 적송덕찬 치세에, 날란다 대학에서 수학한 파드마삼바바[3]가 토번 제국에 정착하여, 티베트 불교 교리 확립에 기여하였다. 이로서 티베트 불교 더 나아가서 티베트 문화 전반[4]에 산스크리트어를 비롯한 인도 문화의 영향이 남게 되었다.

물론 중세 인도와 티베트 사이의 우호적인 교류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티베트는 남쪽으로 팽창하여 아삼 지역과 갠지스 강 하류 지역을 정복하기도 했다. 다만 중국에서 토번과의 외교 관계 관련하여 이런저런 기록을 남겼던 것과 다르게 인도의 힌두교, 불교를 믿던 지역 왕조들은 종교 기록 이외에 자체적인 역사 기록을 구체적으로 남기는데 무관심했고, 토번 제국과 인도 힌두 혹은 불교 왕조들 사이의 외교 관계는 문헌 기록의 부족으로 인하여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2.2. 근세

중국에서 티베트를 거쳐 인도로 가는 경로가 매우 험난했음에도 불구 원나라가 윈난성 일대를 개척한 이래 인도와 티베트 라싸 그리고 중국의 시닝시를 잇는 교역은 나름 번창했다. 비교하자면 중국 쓰촨성윈난성에서 미얀마를 거쳐 방글라데시로 가는 경로는 거리야 훨씬 더 짧았지만 미얀마 밀림의 부족들이 지나치게 호전적이어서 무역 루트로 활용하기 어려웠다. 카슈미르아삼, 다르질링 등에서 출발한 인도 상인들은 라싸에 체류하면서 몽골인이나 중국인 상인들과 물건을 교환하였다.

17세기 말에는 달라이 라마 5세 치하 티베트와 라다크의 남걀 왕조 사이의 전쟁이 발발하는데, 남걀 왕조는 무굴 제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남걀 왕조는 호쇼트 몽골족들과 티베트인들의 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 직전까지 갔으나, 무굴 제국의 지원으로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 편 인도아대륙의 불교는 중세 말 이후로 이슬람과 힌두교의 교세 확장의 결과, 영향력이 대폭 축소되었던 상황이었고, 이에 따라 인도 지역과 티베트 사이의 활발했던 문화적 교류도 그만큼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5] 흥미로운 사례로 시크교 경전에 나오는 티베트인들에 대한 언급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서 티베트인들은 요기(Yogi)라고 언급된다. 종교 경전에서 언급되는 타 종교에 대한 묘사가 대개 그렇듯 시크교가 불교에 비해 우월하다는 내용이다.

2.3. 근대

1779년부로 청나라 치하 티베트는 독자적으로 영국령 인도 제국과 서로 사절을 교환했는데 이는 청나라에서 오늘날과 다르게 당시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의 권리를 상당부분 보장했기 때문이었다. 청말에 해당하는 1880년대가 되면 티베트 왕국과 대영제국은 사절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청말 만주족들의 권위가 약화되고 청나라가 한족의 민족주의 국가로 변모하면서 티베트에 대한 청나라의 입장도 훨씬 더 강경해지는데, 그 여파로 1910년 청군이 다시 티베트를 침공하여 라싸를 점령하면서 당시 달라이 라마는 영국령 인도 제국으로 망명하여 3년간 체류하기도 했다.

2.4. 20세기

인도는 1947년 독립 이후 인접국이자 당시에는 독립국이던 티베트와 상호간 외교 공관을 수립했다. 1952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티베트를 침공하면서 총영사관으로 강등되었고, 1962년 중인전쟁을 계기로 총영사관은 폐지되었다.

1959년 티베트의 봉기가 실패하면서 달라이 라마 14세는 인도로 망명하였고, 중인전쟁이 1961년 벌어지는 등 당시 인도는 중국과 국경에서 민감하게 대치하는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달라이 라마를 환영하며 다람살라에 망명 정부가 자리할 땅을 제공했다. 원래 이곳은 살짝 고산지대로 인도치고는 덥지 않고 시원해 영국의 식민지배 당시 영국인들의 휴양지였으나 1906년 대지진으로 파괴되고 비어있는 땅이었다. 한편 중국과 인도 국경 사이에 위치한 부탄은 티베트가 중국에 강점되는 상황 그리고 티베트 망명정부가 다람살라에 들어서는 상황에서 국가 생존을 위해 강경 반중-친인도 외교 정책을 펼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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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1세기

티베트 망명정부에 등록한 해외 망명 티베트인 인구 규모는 15만여 명 정도로, 이들 중 상당수가 인도나 네팔을 거쳐 해외로 망명한 경우이다. 다람살라에 위치한 티베트 망명 정부는 오늘날에도 인도군의 보호를 받고 있다.[6]

오늘날 티베트 망명 정부에서는 인도로 망명한 티베트인들에게 티베트어와 티베트 역사를 포함한 티베트 민족 교육을 가르치고 있다. 티베트 망명 정부의 지원으로 고등교육을 받은 인구는 많지만, 인도에서 이들은 외국인으로 분류되어 공무원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즉 일자리에 제한이 많다. 따라서 인도의 티베트 난민 인구는 다시 미국이나 독일, 캐나다로 이민이나 유학을 가는 경우가 많다. 이를 두고 인도 체류 티베트인 내부에서는 인도 정부의 티베트 난민 지원 소홀을,# 중국에서는 인도의 경제 빈곤 문제를 지적하는데 반대로 생각해보면 인도 내 티베트인들이 해외 이민이 활발하다는 것은 한 편 그만큼 티베트 망명 정부의 교육 시스템이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직 개발도상국인 인도에서 티베트 난민들이 해외로 재이민을 간다는 것은 적어도 교육 시스템이 외국어 한두가지 이상은 유창하게 구사가 가능하도록 정상적으로 운영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대조적으로 인도를 거치지 않고 중국 티베트 자치구 등에서 프랑스 등으로 망명한 티베트계 이민자들은 중국의 우민화 정책[7] 및 언어 문제로 이민 간 사회 내에서도 중국계 이민자들에게 심각한 차별을 받고 있다.티베트인 노동자가 중국인 사장에게 살해당하자 중국 네티즌들이 우르르 몰려와 티베트인 피해자들을 조롱한 것을 계기로,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티베트인들이 대대적으로 시위를 벌였을 정도였다.

현재 티베트 망명정부의 총리 롭상 셍게 역시 인도 다르질링에서 출생하여 미국에서 수학한 경우이다.[8]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롭상 셍게와 정기적으로 만남을 가지는 등 서로간의 친분을 과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도에서도 중국을 견제하고 대외 이미지를 개선할 목적으로 티베트 망명 정부를 보호하고 있다. 특히 인도는 티베트 망명정부를 적극 보호하면서 아루나찰프라데시 관련한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경 분쟁에서 국제 여론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9][10] 망명 티베트인들이 인도군에 들어가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이에 맞서 중국은 티베트의 역사와 문화를 자국 역사 내 편입시키는 역사 조작 공정인 서남공정을 시행 중이다.

동북공정이 한국/북한이나 러시아를 타깃으로 한 것처럼 서남공정은 티베트 역사에 대한 왜곡 이외에도 인도를 겨냥한 점이 없지 않다. 중국 측에서 내외에 티베트를 무조건 시짱이라는 생소한 어휘로 부르도록 우기거나 강요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1#2#3#4 중국이 김치공정 과정에서 파오차이와 김치 용어 혼란 전술을 사용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3. 문화 교류

고대부터 티베트는 인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티베트 문자의 경우, 데바나가리 문자에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티베트 불교는 7~8세기 인도 동부의 밀교화된 대승불교에서 유래되었다.

인도의 시킴, 라다크,레(도시)아루나찰프라데시 북부 주민들도 티베트 불교를 믿고 있으며, 달라이 라마 14세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자주 방문하고 있는 편이다.

티베트 망명 정부는 인도 정부의 지원 하에 티베트인 난민들을 대상으로 티베트어 및 민족사 교육을 실시하는 학교를 운영 중이다. 덕분에 인도에 망명한 티베트인들은 인도에서 티베트어를 배우고 티베트 문화를 보존하고 있다.#

4. 관련 문서



[1] 중국에 불교가 보급되던 초창기에는 불교가 외래 종교고 승려들 상당수가 호승(서역인 승려)이다보니, 한족이나 선비족 등 현지인들에게 포교할 때 부드러운 태도로 접근해야 했다. 불교가 동아시아에 전파되며 일어난 변화는 사찰 요리 문서 등 참조. 한편 티베트 불교가 자리잡기 이전 티베트인들은 나이든 부모가 병에 걸리면 바로 집 밖으로 갖다버렸다.라는 기록에서 보듯 다소 거친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성직자들이 국가적 지원을 받아가며 권위를 내세워야 포교가 이루어지기 쉬웠다.[2] 오호십육국 시대부터 당나라 때까지 여러 왕조에서 불교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사업에 엄청난 재정적 지원을 쏟아부었음에도 불구, 불경을 한문으로 온전히 번역하는데 수백여 년이 걸렸다. 쿠마라지바, 현장 법사 등등의 문서 참조[3] 오늘날 파키스탄 북부에 해당하는 스와트 지역 출신으로 알려졌다.[4] 티베트의 전통 종교였던 뵌교는 교세가 꺾이면서 티베트 불교로부터 탄압을 받고 티베트 불교의 시스템 상당수를 차용하게 되었다. 즉 인도 문화는 뵌교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5] 유사 사례로 일본이 견당사라고 해서 당나라 치세 당시 중국의 문물을 활발하게 수입하다가, 이후 교류 규모를 축소하면서 중세 당나라 문화를 보존 및 현지화한 사례를 들 수 있다. 일본 불교 문서 혹은 소한푸사건(烧汉服事件) 등 참조.[6] 몇 차례 달라이 라마 14세에 대한 중국의 암살 시도가 있어서 인도군이 경비를 서고 있다.[7] 2010년 통계 기준 티베트 자치구 인구 37.77%가 문맹이다.[8] 최종학력은 하버드 대학교 박사[9] 인도인의 주류인 인도아리아인들이 동북부 7개주의 티베트계 혹은 버마계 주민들을 상당히 심하게 차별하는 편인데, 주로 기독교로 개종한 나갈랜드 및 그 이남 지방에는 해당사항이 없겠지만 적어도 아루나찰프라데시와 시킴 지역의 주민들의 불만은 크게 누그러트질 수 있다.[10] 인도와 중국 국경 사이에 끼인 부탄 뿐만 아니라, 중국과 국경을 접하지 않은 스리랑카에서도 현지 불교계 인사들이 티베트 망명 정부의 입장을 지지하고, 인도 정부에게도 감사를 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