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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6월 15일 제3차 개헌으로 부통령직 폐지 ** 2014년 7월 24일 헌법재판소가 국민투표법 제14조 제1항 내용 중 일부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으나 이후 법률 개정이 이뤄지지 않아 2016년 1월 1일자로 효력을 상실하여 시행 불가능 | }}}}}}}}} |
대한민국 제3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제4대 부통령 선거 | |||||||||
후보자들의 선거 벽보 | |||||||||
{{{#!wiki style="margin: -7px -12px;" | 1952년 8월 5일 2대 대선 3대 부선 | → | 1956년 5월 15일 3대 대선 4대 부선 | → | 1960년 3월 15일 4대 대선 5대 부선 | }}} | |||
투표율 | 94.38%▲ 6.29%p | ||||||||
대통령 선거 결과 | |||||||||
후보 | [[무소속| 무소속 ]]조봉암 | [[자유당(1951년)| 자유당 ]]이승만 | |||||||
득표율 | |||||||||
30.01% | 69.98% | ||||||||
득표수 | 2,163,808 | 5,046,437 | |||||||
부통령 선거 결과 | |||||||||
후보 | [[민주당(1955년)| 민주당 ]]장면 | [[자유당(1951년)| 자유당 ]]이기붕 | |||||||
득표율 | |||||||||
46.43% | 44.03% | ||||||||
득표수 | 4,012,654 | 3,805,502 | |||||||
대통령 당선인 | 부통령 당선인 | ||||||||
자유당 이승만 | 민주당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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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제3대 대통령 취임식 사진 |
대통령, 부통령 당선 확정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 |
1956년 5월 15일에 있었던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로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 무소속의 조봉암 후보, 자유당의 이승만 후보가 맞붙었다. 제4대 부통령 선거도 동시에 치러졌다.
유권자 9,606,870명 중 9,067,063명 선거 참여(투표율 94.38%)라는 기록을 세웠으며 초대 대통령의 3선이라는 기록까지 세우게 되었다. 덤으로 최초로 TV를 통해 보도된 선거이기도 하다.[1]
2. 배경
해당 문단의 내용에 대한 내용은 사사오입 개헌 문서 참고하십시오.
이승만 대통령은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3선에 도전하게 된다.
3. 후보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 처리할 정도로 비대해진 여당 자유당을 견제하기 위해 민주국민당, 흥사단계 등은 야권 대통합을 결의, 결국 최초의 거대 야당인 민주당을 탄생시켰다. 이후 자유당은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민의원의장을, 민주당은 신익희 전 민의원의장과 장면 전 국무총리를 각각 대통령 후보와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2] 이로써 제3대 대선은 역대 처음으로 양당제가 확립된 가운데 치러지게 되었다.이승만 대통령은 제2대 대선에서 스스로를 특정 정당이 아닌 모든 국민의 후보라며 자유당과 선을 그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자유당 기반의 선거 운동을 펼쳤으며, 이기붕 민의원의장을 러닝메이트로 적극 지지하였다.
한편 양대 보수 정당 외에 진보적인 제3당을 표방한 진보당 창당추진위원회는 조봉암 전 민의원부의장을 대통령 후보, 박기출 전 경상남도체육회장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3]
물론 여전히 정당 공천제가 도입되지 않아 모든 후보는 무소속 후보와 마찬가지로 개인 자격으로 입후보했으며, 정당의 후보 선출은 상징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4년 전과 달리 한 정당에서 여러 명의 후보가 입후보하는 일은 없었던 것으로 보아 그새 정당 정치 문화가 보다 확고해진 듯하다.
4. 과정
보수 성향의 신익희와 진보 성향의 조봉암 간 야권 단일화를 시도했으나 이념 차이 탓에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그런 와중에 신익희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5월 5일 전남지역 유세를 위해 기차로 이동하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조봉암이 야권 단일 후보가 되었다. 진보당 창당추진위원회는 민주당 측에 조봉암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였고 대신 부통령 후보 자리는 민주당 장면 후보에게 양보한다며 5월 10일 박기출 부통령 후보를 사퇴시켰다.그러나 민주당은 조봉암의 정치적 사상을 문제삼아 끝내 조봉암 지지를 거부하고 오히려 지지자들에게 이승만, 조봉암 둘 다 찍지 말고 신익희에 대한 추모의 의미로 무효표를 던지라고 홍보하였다.[4]
5. 결과
5.1. 대선 결과
지역별 결과에 대한 내용은 제3대 대통령 선거/지역별 결과 문서 참고하십시오.
대한민국 제3대 대통령 선거 | |||
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정당 | 득표율 | 비고 | |
<colcolor=#fff> 1 | 조봉암(曺奉岩) | 2,163,808 | 2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30.01% | 낙선 | |
| | 사망 | |
| |||
3 | 이승만(李承晩) | 5,046,437 | 1위 |
[[자유당(1951년)|]] | 69.98% | 당선 | |
계 | 선거인 수 | 9,606,870 | 투표율 94.38% |
투표 수 | 9,067,063 | ||
무효표 수 | 1,856,818 |
대한민국 제3대 대통령 선거 지역별 개표 결과 | ||
지역 | <colbgcolor=#254170> 자유당 이승만 | 무소속 조봉암 |
전국 | 5,046,437 (69.98%) | 2,163,808 (30.01%) |
서울 | 205,253 (63.3%) | 119,129 (36.7%) |
경기 | 607,757 (77.1%) | 180,150 (22.9%) |
강원 | 644,693 (90.8%) | 65,270 (9.2%) |
충남 | 530,531 (77.1%) | 157,973 (22.9%) |
충북 | 353,201 (86.1%) | 57,026 (13.9%) |
전남 | 741,623 (72.1%) | 286,787 (27.9%) |
전북 | 424,674 (60.2%) | 281,068 (39.8%) |
경남 | 830,492 (62.3%) | 502,507 (37.7%) |
경북 | 621,530 (55.3%) | 501,917 (44.7%) |
제주 | 86,683 (87.9%) | 11,981 (12.1%) |
서울특별시에서는 이렇게 민주당 측에서 무효표를 던지자는 홍보가 먹혀들었다. 대통령 선거 유효투표 비율이 53.8%밖에 되지 않았는 데, 같은 날 치러진 부통령 선거에서의 서울 유효투표 비율이 96.4%에 이른 것과 비교해보자. 경상도 일부 지역에서 조봉암 후보는 승리를 거두었다. 구체적으로는 대구광역시 일대[5]와 경주 일대[6], 진주시 일대[7], 울릉도에서 그러하였다. 또한 지역별 투표율에서 대구경북이 가장 많은 지지세를 보여줬다. 이렇게 당시 경북 일대에서 높은 지지세를 보여준 이유는 이 지역은 당시 조선의 모스크바라 할 정도로 사회주의 성향이 강하였으며, 6.25 전쟁에서 상대적으로 타 지역에 비해 피해를 덜 입어서 북한에 대한 적대감도 다른 도에 비해 약했다는 점도 상대적 우세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반대로 6.25 때 격전지였던 경북 북부, 포항 일대는 이승만의 손을 들어주었다. 경상도의 이같은 정치 구도는 제5대 대통령 선거 때 그대로 재연되어, 사상 논란에 휩싸인 박정희는 혁신 세력의 지지를 받아 포항 등을 제외한 영남 지역 대부분을 석권했다.
반대로 강원도 일대에서 이승만 후보가 가장 많은 압승을 거두었는데 그 이유는 6.25 전쟁으로 인해 북한에 대한 적대감이 타 지역에 비해 강했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몇몇 지역에서는 투표율과 이승만 득표율에 있어서 그야말로 진기록이 세워졌다. 예를 들면 강원도 정선에서는 이승만 후보가 25,230표(무효표 포함) 중 25,122표(99.57%, 무효표 제외시 99.86%)를 득표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정선군에서는 투표율 또한 99.65%를 기록했다.
전국에서 신익희를 찍은 무효표가 넘쳤지만, 민주당의 세가 약했던 영/호남 4개 도에서는 신익희의 사망으로 붕 뜬 야권표를 확실히 조봉암이 흡수했다. 조봉암을 찍은 표가 무효표보다 많을 뿐 아니라 영남 20개 시군(대구 포함), 호남 4개 시군에서는 조봉암이 이승만을 이겼다. 일부 지역에서 조봉암의 득표율이 75%까지 치솟았다. 결과만 보면 직전 선거 때보다 득표율이 올랐고 때의 선전을 기반으로 조봉암은 최초의 진보계열 정당인 진보당을 조직하고 의욕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5.2. 부선 결과
대한민국 제4대 부통령 선거 | |||
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정당 | 득표율 | 비고 | |
<colcolor=#fff> 1 | 장면(張勉) | 4,012,654 | 1위 |
| 46.42% | 당선 | |
2 | 이기붕(李起鵬) | 3,805,502 | 2위 |
[[자유당(1951년)|]] | 44.03% | 낙선 | |
3 | 윤치영(尹致暎) | 241,278 | 4위 |
[[대한국민당(1949년)| 대한국민당 ]] | 2.79% | 낙선 | |
4 | 이윤영(李允榮) | 34,926 | 6위 |
[[조선민주당| 조선민주당 ]] | 0.40% | 낙선 | |
5 | 백성욱(白性郁) | 230,555 | 5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66% | 낙선 | |
6 | 이범석(李範奭) | 317,579 | 3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3.67% | 낙선 | |
계 | 선거인 수 | 9,606,870 | 투표율 94.38% |
투표 수 | 9,064,194 | ||
무효표 수 | 421,790 |
대한민국 제4대 부통령 선거 지역별 개표 결과 | ||
지역 | 자유당 이기붕 | 민주당 장면 |
전국 | 3,805,502 (44.03%) | 4,012,654 (46.42%) |
서울 | 95,454 (16.3%) | 451,037 (76.9%) |
경기 | 424,104 (42.3%) | 450,140 (44.9%) |
강원 | 611,704 (80.2%) | 103,493 (13.6%) |
충남 | 364,750 (42.6%) | 374,209 (43.7%) |
충북 | 245,218 (51.8%) | 159,310 (33.7%) |
전남 | 549,279 (45.3%) | 529,341 (43.7%) |
전북 | 338,283 (40.3%) | 428,410 (51.0%) |
경남 | 623,409 (42.0%) | 778,903 (52.5%) |
경북 | 475,754 (36.2%) | 715,342 (54.4%) |
제주 | 77,547 (68.7%) | 22,469 (19.9%) |
5.3. 격전지역
전국 시, 군, 구 단위에서 1, 2위 후보 간 표 차가 1,000표 미만이고 득표율 차가 5% 미만[8]이었던 곳은 다음과 같이 5곳이다.- 전라남도 완도군: 113표 차 조봉암 승
- 경상북도 울릉군: 157표 차 조봉암 승
- 전라북도 완주군: 515표 차 이승만 승
- 충청남도 대전시: 681표 차 이승만 승
- 경상북도 고령군: 722표 차 이승만 승
6. 부정선거 의혹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지는구나."
- 조봉암 후보가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이후 탄식하는 발언을 하면서.
- 조봉암 후보가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이후 탄식하는 발언을 하면서.
진보당 부통령 후보 박기출은 1975년 저서 <한국정치사(韓國政治史)>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당시의 실정은 부산 시내의 전투 개표소와 진해의 개표소에서 필자가 직접 목격했고, 그 밖의 각 선거구에 관해서도 후일 필자가 신민당에 관계되었을 때 동 당의 관계자로부터 전해들은 바 있다. 부산시 영도구의 자유당위원장 이영언씨는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개표 상황을 본 순간 너무가 큰 차가 나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 표 저 표 할 것 없이 모두 죽산 표뿐이었다. 공무원들도 이승만에게 투표하지 않은 것 같다. 조봉암 표를 가운데 넣고 위·아래에 이 박사 표를 한 장씩 붙여 100표 한 묶음의 샌드위치표를 만들었는데, 이 박사 표는 그 위·아래에 붙이기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이같은 실정으로 미루어 볼 때 죽산은 유효 투표의 70~80%는 틀림없이 획득했던 것으로 생각되며 조 씨의 총득표는 아마 600만을 넘고 이승만의 득표는 100만 전후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강화문화원 이사를 지낸 조석묵 씨는 당시 조봉암의 표가 무더기로 이승만으로 바뀌었다고 증언했다. "강화군청의 비밀장소에서 공무원 1명이 밤을 새서 '이승만 대통령란'에 기표하는 방식으로 2만 표를 바꿔치기 했다"는 것이다.[9]
상기 증언들은 진보당 측 인사들의 개인 증언이니 신뢰성이 다소 부족할 수 있지만 더욱 중요한 증언도 있다. 바로 3.15 부정선거를 주도한 인물 중 하나인 최인규 전 내무부장관의 증언이다.
「5.15 선거 후 정부는 조봉암 씨와 진보당 간부들을 형법의 간첩조항 및 국가보안법으로 구속기소하고 진보당을 반국가단체로 해산명령하였다. 나는 진보당의 강령 정책을 열독하지 않았으므로 자세한 것을 모르겠으나 반공을 제일의 국시로 하는 대한민국으로서 진보당은 합법적 정당으로 인정 등록케 한 것 자체가 우유부단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 후환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익희씨 서거 후에도 경찰은 전면적 선거 간섭을 게속하였다. 경찰의 선거 간섭을 불행한 일이나 당시 벌써 고질병처럼 되었다. 경찰간섭이 있으면 국민은 더 반발하는 법이다. 그러나 정부 여당은 경찰 없이는 선거를 치를 수 없게 되었었다. 5.15 당시 분위기로서는 대중소 도시에는 자유당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농촌에서도 힘을 쓰는 것은 경찰분이었다. 경찰 아닌 일반 공무원들은 공공연하게 반정부 반여당직이었다. 신익희 씨 생존시에는 경찰간부들도 대부분 민주당과 선을 대고 두 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서울을 위시하여 각 도청 소재지의 일반 공무원들은 대개 민주당으로 기울어지고 전주의 도청직원들은 신익희씨가 열차중에서 급서하셨다는 말을 듣고 통곡을 하고 근무까지 거부한 일이 있었다.
나는 3.15 선거시 공무원을 선거운동시켰다고 기소되었다. 나는 사실 그렇게 했다. 그것은 상기와 같은 5.15 선거 때 자극을 받은 것이 원인이었다. 물론 공무원이 선거운동을 하는 것은 공무원법 위반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도 이것이 국가 민족적인 죄악이라고 보지 않는다(...).
5.15 투표가 완료되었다. 밤 9시부터 서울 개표가 먼저 시작되었다. 나는 현재 각 도 혹은 각 개표구의 표수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서울 개표결과는 대통령표에 조봉암씨의 표와 신익희씨의 추모 투표 수가 이박사의 표보다 2배에 가깝고 이기붕 씨는 장면씨에게 40만표 리드당하였다. 강원도에서는 대통령과 부통령에 자유당 표가 90% 이상 나온 것으로 발표되었다.
그것은 실제 그렇게 나온 것은 아니다. 당시 강원도는 유권자의 대부분이 군인이었다. 군인들의 투표결과는 조봉암 씨가 70% 이상이었다고 한다.
… 5.15 선거 당시 강원도에서 있었던 일은 불행한 일이다. 실제의 투표결과는 전국이 대부분 대동소이하였을 것이다. 내 말을 믿기 어려우면 아직도 보관되어 있는 투표용지를 다시 검표하여 보면 될 것이다. 가공할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이 이 박사의 자유당이 실정을 한 데 기인한다고 일소해버릴 수 있을 것인가. 민주당이 또는 혁명정부가 집권하면 절대로 이런 일이 없을까.
한국의 반공을 논하고 민주주의를 논하는 사람이라면……[10] 아니 다소의 애국심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이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경우에 내무장관은 어떻게 하고 도지사, 경찰국장, 경찰서장은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물론, 법적으로 내무장관은 선거기간 중 치안과 질서유지 책임 외에 없다. 투표와 개표는 전적으로 각급 선거위원회의 책임이다. 그러면 5.15 선거 당시 내무장관은 전국적인 투표의 결과가 압도적으로 조봉암씨가 우세할 경우 당선을 선포하도록 묵인할 수 있는가.
…… 내가 내무장관 당시 1959년 11월 말경부터 군수서장을 내무장관실에 소환하여 강조한 것은 위와 같은 5.15 선거 때의 위험하고 쓰라린 경험을 상기시켜 그들로 하여금 반공국가의 일선 공무원으로 정신무장을 시키기 위함이었다.」
최인규, 『崔仁圭 獄中 自敍傳』, 中央日報社, 1984, 196-198
신익희씨 서거 후에도 경찰은 전면적 선거 간섭을 게속하였다. 경찰의 선거 간섭을 불행한 일이나 당시 벌써 고질병처럼 되었다. 경찰간섭이 있으면 국민은 더 반발하는 법이다. 그러나 정부 여당은 경찰 없이는 선거를 치를 수 없게 되었었다. 5.15 당시 분위기로서는 대중소 도시에는 자유당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농촌에서도 힘을 쓰는 것은 경찰분이었다. 경찰 아닌 일반 공무원들은 공공연하게 반정부 반여당직이었다. 신익희 씨 생존시에는 경찰간부들도 대부분 민주당과 선을 대고 두 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서울을 위시하여 각 도청 소재지의 일반 공무원들은 대개 민주당으로 기울어지고 전주의 도청직원들은 신익희씨가 열차중에서 급서하셨다는 말을 듣고 통곡을 하고 근무까지 거부한 일이 있었다.
나는 3.15 선거시 공무원을 선거운동시켰다고 기소되었다. 나는 사실 그렇게 했다. 그것은 상기와 같은 5.15 선거 때 자극을 받은 것이 원인이었다. 물론 공무원이 선거운동을 하는 것은 공무원법 위반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도 이것이 국가 민족적인 죄악이라고 보지 않는다(...).
5.15 투표가 완료되었다. 밤 9시부터 서울 개표가 먼저 시작되었다. 나는 현재 각 도 혹은 각 개표구의 표수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서울 개표결과는 대통령표에 조봉암씨의 표와 신익희씨의 추모 투표 수가 이박사의 표보다 2배에 가깝고 이기붕 씨는 장면씨에게 40만표 리드당하였다. 강원도에서는 대통령과 부통령에 자유당 표가 90% 이상 나온 것으로 발표되었다.
그것은 실제 그렇게 나온 것은 아니다. 당시 강원도는 유권자의 대부분이 군인이었다. 군인들의 투표결과는 조봉암 씨가 70% 이상이었다고 한다.
… 5.15 선거 당시 강원도에서 있었던 일은 불행한 일이다. 실제의 투표결과는 전국이 대부분 대동소이하였을 것이다. 내 말을 믿기 어려우면 아직도 보관되어 있는 투표용지를 다시 검표하여 보면 될 것이다. 가공할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이 이 박사의 자유당이 실정을 한 데 기인한다고 일소해버릴 수 있을 것인가. 민주당이 또는 혁명정부가 집권하면 절대로 이런 일이 없을까.
한국의 반공을 논하고 민주주의를 논하는 사람이라면……[10] 아니 다소의 애국심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이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경우에 내무장관은 어떻게 하고 도지사, 경찰국장, 경찰서장은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물론, 법적으로 내무장관은 선거기간 중 치안과 질서유지 책임 외에 없다. 투표와 개표는 전적으로 각급 선거위원회의 책임이다. 그러면 5.15 선거 당시 내무장관은 전국적인 투표의 결과가 압도적으로 조봉암씨가 우세할 경우 당선을 선포하도록 묵인할 수 있는가.
…… 내가 내무장관 당시 1959년 11월 말경부터 군수서장을 내무장관실에 소환하여 강조한 것은 위와 같은 5.15 선거 때의 위험하고 쓰라린 경험을 상기시켜 그들로 하여금 반공국가의 일선 공무원으로 정신무장을 시키기 위함이었다.」
최인규, 『崔仁圭 獄中 自敍傳』, 中央日報社, 1984, 196-198
최인규가 3.15 부정선거에 대해 변명하려다 보니 오히려 제3대 대선의 부정에 대해서 고백하는 회고가 되고 만 것이다. 또한 조봉암이 개표에서 이기더라도 반공 기조를 위해 "당선을 선포하도록 묵인할 수 있"겠냐는 대목은 엄중한 선거중립을 지켜야 하는 내무부가 부정선거에 오히려 앞장섰음을 방증한다.
7. 영향
비록 이승만이 정권 연장에서는 성공했으나 부통령 선거에서는[11] 민주당 후보 장면이 자유당 후보 이기붕을 꺾으면서 당선되었다. 이 결과는 1952년 2대 대선과 1954년 3대 총선에서의 압승으로 자신이 국부로 존경받는다고 믿고 있던 이승만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으며, 자유당 당원들조차도 신익희가 선거운동 중간에 죽지 않았으면 정권이 교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할 지경이었다. 이후 치러진 1956년 지방선거에서는 자유당이 승리하였지만, 역시 도시지역에서 참패한것은 매한가지였기 때문에 이 또한 이승만에게 마뜩치않는 결과였다.1956년 당시 이승만이 한국나이로 81세로 평균수명을 이미 훨씬 넘긴 나이였기 때문에 임기 중 사망할 확률이 높아 보였으며, 만약 이승만이 죽을 경우 당시 현행법상 부통령인 장면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기 때문에 민주당에게 정권이 넘어갈 판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 자유당에서는 부통령 자리를 공석으로 만들려고 했다. 결국 이승만이 85세까지 장수하면서 민주당 부통령에게 대권이 넘어가는 일은 결과적으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승만이 나이가 많아 부통령 자리가 대통령만큼 중요하다는 점은 여전했고 1960년에 치러진 다음 선거에서는 아예 부통령도 어거지로 당선시키려고 억지 부정선거를 강행, 결국 시민혁명으로 권좌에서 하야했다. 이후 이승만은 1965년까지 살았고 1964년까진 그럭저럭 대외활동을 할 수 있을 만큼 건강했다. 만약 1960년에 부정선거를 하지 않았어도 부통령에 대권이 넘어갈 일은 없었던 것이다. 다만 이건 4.19혁명 때문에 정치권에서 받아야 하는 극강의 스트레스가 없어진 상황에서 일어난 결과이기에 만약에 4.19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을 경우에도 이승만이 대통령 임기를 무사히 마쳤을련지는 의구심이 든다.
8. 기타
- 이 선거에서 민주당이 내세운 정권교체 구호인 '못살겠다 갈아보자'가 후대에도 회자된다. 이에 맞서는 자유당의 구호는 '가러봤자(갈아봤자) 더못산다'(...).
여담으로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의 후신 정당이자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총선 구호가 '못살겠다 심판하자'이다. #
- 창작물에선 야인시대 112회, 113회에 등장했다. 개표가 진행되자 장면 후보가 앞서나가는 상황에서 위기감을 느낀 이기붕은 대구 지역 개표가 늦어지자 소동을 일으켜 개표를 중단 시키고 투표용지를 바꿔치기하는 방법으로 투표결과를 조작하려고 한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자 아예 동대문파를 투입시켜 투표함을 불태우고 이를 빌미로 부정선거로 몰아 선거결과를 무효화시켜 재선거를 실시할 계획을 꾸민다. 워낙 엄청난 발상이라 시키는 대로 따르던 화랑영화사 식구들마저 역사에 개입하는 것 같아 꺼림직하다고 할 지경이었다. 민주당 당원들이 투표함을 지키고 있자 동대문파는 막걸리를 먹여 혼란스런 와중에 휘발유를 이용해[12] 투표함에 방화를 하려고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나서 개표 지연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고 개표 재개를 명령, 장면 후보의 부통령 당선을 공언해 방화시도는 미수에 그치고 만다.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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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당시에는 TV방송이 시작된 지 얼마되지 않아서 서울을 빼면 본 사람이 별로 없고, 서울에서도 주요거리에서 TV를 보던 사람들이나 재벌급 아니면 본 사람도 없었다.[2] 민주당은 민국당 출신 인사들인 구파와 비민국당 출신 인사들인 신파로 분열되어 있었고, 구파와 신파는 대통령 후보직을 놓고 각각 신익희 전 의장과 장면 전 총리를 지지하며 대립하였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신익희 전 의장이 대통령 후보, 장면 전 총리가 부통령 후보를 맡는 것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3] 원래 서상일 전 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으나 본인이 거부하여 급하게 박기출로 교체하였다.[4] 당시 민주당에서는 조봉암을 대통령 시키느니 차라리 이승만이 한번 더 하는게 낫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5] 칠곡군, 경산시, 창녕군, 김천시 포함[6] 영천시, 양산시, 울산광역시, 기장군 포함[7] 고성군(경상남도), 통영시, 진해구 포함.[8] 순천시의 경우, 760표차로 이승만 우세였지만 득표율은 5.7%나 차이가 났기때문에 격전지라고 볼 수 없다.[9] 前 강화문화원 이사 조석묵씨 경인일보 인터뷰… "죽산표 없애고 2만 표 교체" 당시 공무원에 들어 http://www.kyeongin.com/main/view.php?key=563534[10] 이 말줄임표는 원문에 있는 것임 - 인용자[11] 당시 대한민국 헌법에서는 부통령을 러닝메이트가 아니라 따로 선거를 해서 뽑도록 했다.[12] 원래는 다이너마이트(...)를 준비해 터트리려고 했지만, 너무 위험하다고 휘발유로 바꾼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