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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문서: 정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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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구 | 전주시 병 | ||
가족 | 배우자 민혜경 | ||
대선 경력 | 제17대 대통령 선거 | ||
비판 및 논란 | 비판 및 논란 정동영 노인 비하 발언 논란 ·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 경선 박스떼기 논란 | ||
관련 사고 | 민청학련 사건 · 5.18 민주화운동 | ||
기타 | 별명 · 정동영계 · 정동영과 통하는 사람들 · 호남 대망론 · 천신정 · 천정박 · DJ키즈 · 정동영 폭행녀 · 열린우리당 · 대통합민주신당 · 민주평화당 · 호남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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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1대 통일부 장관을 지낸 정동영의 생애를 서술한 문서.2. 정치 입문 전
2.1. 유년 시절
△ 전주고등학교 재학시절 |
친증조부[2] 정인평(鄭寅平, 1859. 7. 5 ~ 1920. 7. 24)은 천석꾼의 대지주였고, 조부 어석(漁石) 정현모(鄭賢謨, 1900. 1. 11 ~ 1940. 4. 19)는 증조부로부터 30마지기의 농토를 물려 받았고, 순창군 구림면 율북리에 2년제 간이학교를 설립했다.[3] 아버지 정진철은 남원농업전수학교(現 남원용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구림면 금융조합 서기로 5년간 근무했으며, 8.15 광복 후 1946년 12월 관선 구림면장에 임명되었고, 민선 면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고향에서 율북국민학교를 다니다가 5학년 때 전라북도 전주시로 유학하여 전주국민학교에 전학해 졸업했다. 이후 전주북중학교, 전주고등학교(48회)를 졸업하고 재수를 통해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국사학과에 입학해 졸업했다.[4]
아버지를 여의고 대학시절에는 서울에서 옷을 팔며 힘든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5] 당시 운동권으로 지내며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금된 적이 있었으며, 이후 강제징집되어 1974년 10월 11일 육군에 입대했다. 이후 제33보병사단(현 제17보병사단) 본부대에서 행정병(일반행정 특기)으로 복무했고, 1977년 6월 14일 병장으로 만기전역했다. 우여곡절의 학업 끝에 1978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뒤 대학까지 졸업하여 언론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2.2. 언론인 시절
△ 추억이 되어버린 정동영의 앵커 시절 |
기자 시절에는 5.18 민주화운동에 현장 특파원으로 취재한 적이 있었지만, 취재 내용은 보도되지 못했다.[7] 주미 특파원으로 지내는 동안 1984년 웨일스 대학교 언론학 대학원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걸프전과 독일 통일 등 굵직한 사건을 현장취재한 적도 있었다. 물론 전두환을 찬양하는 흑역사도 있었지만, 이 때는 위에서 까라면 까야했기에 전두환을 비판하는 기사를 내는 자체가 불가능했던 시절이어서 이 사안으로 정동영을 비난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참고로 1995년 12월 3일 전두환 구속 당시 MBC 뉴스데스크의 진행을 맡기도 했다. # 2007년 대선때는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당시 취재하던 도중에 구조활동을 방해했던 일로 후배 기자였던 한나라당 심재철[8]에게 도덕성을 비판받은 적도 있다.#
△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현장에서 |
귀국 후에는 뉴스 앵커로 지내면서 억압받는 언론 상황에서도 소신있는 보도로 언론인으로서의 자세를 보여주며 명품 앵커라는 별칭이 생겨났다.[9][10]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마감뉴스인 0시 뉴스 앵커로 재직했는데 언론인 인생을 좌우할 수도 있는 정권에 반하는 보도를 하여 '여소야대' 정국에 기여한 일은 유명한 일화. 총선을 이틀 앞두고 안동에서 민주정의당의 금품 선거가 적발당한 걸 보도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앵커에서는 잘렸지만,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3. 정치 활동
3.1.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절
김대중 총재의 권유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한 뒤로는 정치인으로 완전히 전업하였다.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현역 국회의원 오탄 대신 전주시 덕진구 지역구로 출마하여 전국 최다 득표(97,858표)를 달성하며 국회에 입성했다.[11]제16대 국회의원 선거로 재선에 성공했는데, 16대 국회 당시 천정배, 신기남[12]과 더불어 새천년민주당의 정풍 운동을 이끌었다. 당시 민주당 최고위원이자 동교동계 좌장이었던 권노갑 의원을 비판하며 퇴진 요구를 한 것이다.[13] 이 사건으로 정동영은 일약 민주당 내 개혁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게 된다.
△ 제2대 열린우리당 의장 당선 직후 |
미래는 20대, 30대들의 무대라구요. 그런 의미에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면 60대 이상 70대는 투표 안 해도 괜찮아요. 꼭 그분들이 미래를 결정해놓을 필요는 없단 말이에요. 그분들은 어쩌면 이제 무대에서 퇴장하실 분이니까... 그분들은 집에서 쉬셔도 되고 20대, 30대는 지금 뭔가 결정하면 미래를 결정하는데 자기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잖아요.
- 국민일보 인터뷰 도중 발언
이 발언은 청년층이 정치에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의도였으나 세대 갈등을 부추긴다는 오해를 살 수 있는 부적절한 표현이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16]- 국민일보 인터뷰 도중 발언
결국 저 발언의 여파로 비례대표 후보에서 사퇴하였다. 선거 결과는 열린우리당의 과반 의석 확보로 끝났으나, 개헌선까지 가능하다는 전망에 비해서는 다소 미미한 결과였다.[17][18][19]
이후 통일부 장관을 맡으면서[20] 열린우리당 의장에서 물러난다.
2006년 다시 열린우리당 의장을 맡으며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지휘했으나 한나라당에게 참패를 당했고, 이에 대한 책임으로 사임했다.
3.2. 제17대 대통령 선거
△ 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 후보 정동영 |
"중산층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가족이 행복한 나라"
- 대선 당시 슬로건
"가족이 행복한 나라"
- 대선 당시 슬로건
"국민 여러분 존경합니다."
"국민 여러분 사랑합니다."
- 대선 당시 방송 연설 中 시작 멘트
2007년 대선시즌이 임박하자 당초 여당 후보가 될 가능성이 높던 고건은 불출마 선언을 하고 대통합민주신당 경선에는 치열한 경쟁 끝에 이해찬과 손학규를 밀어내고 대선후보로 확정되었다.[21][22] 참고로 노무현 정부의 내각에 있었던 이력 때문인지 친노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정동영은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위한 경선 시즌 때까지도 노무현 전 대통령과 경쟁하던 관계였다. 이회창이 노무현과 당외경쟁을 했다면 정동영은 노무현과 당내경쟁을 했다."국민 여러분 사랑합니다."
- 대선 당시 방송 연설 中 시작 멘트
다만, 경선 결과를 승복했고, 노무현 정권 탄생의 주역이기도 했으며, 노무현 정부가 정동영 장관을 다음 대권주자로 푸쉬를 해주고자 'NSC 상임위원장을 겸직하는 부총리급 통일부 장관'을 시켰다. 친노라고 하긴 좀 그래도 노무현 정부와 연합하고 지원을 받은 케이스다.
물론 이건 정권 중반까지의 이야기고, 정권 후반부에는 노무현 정부의 실책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면서[23] 친노 세력과는 거리가 벌어지게 되었다.[24][25] 그 결과 노무현은 정권 말기에 여당에서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치달으면서 완전히 새가 되었으며[26], 이후로 정동영은 친노가 아닌 소위 비노 내지는 반노로 분류되고 있다. 이에 대해 정동영은 2007년 자신을 둘러싼 비노 논란에 대해 "공과 과를 모두 안고 갈 것이며, 구분은 무의미하다"라고 한 바 있다.해당 인터뷰. 그래서 유시민은 정동영은 곶감 항아리 같은 표현을 쓰면서 정동영을 비판했을 정도.
경선을 통해 대통합민주신당 후보가 되면서대선후보 확정 뉴스 본선에서는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와 경쟁을 하게 되었으나, 정부 여당의 지지부진한 지지율[27], 노무현 정권의 오만 및 실정과 범여권에 대한 국민들의 거부감, 이인제 등과 범여권 후보 단일화 실패, 뚜렷하지도 않았던 정책비전, 유세 및 TV토론에서 BBK 주가조작 사건만 앵무새처럼 읊어대는 통에 전술한 모든 악조건들과 저놈의 지긋지긋한 BBK 주가조작 사건 소리 좀 안나게 하라는 유권자들의 요구 등 나쁜 쪽으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면서 이명박의 절반도 채 되지않는 지지율을 기록하는 등 부진을 면치 못했다. 사실 한나라당 대선 경선 당시에 드러난 이명박 개인의 비리[28] 때문에 대통령 자격상으로는 정동영이 이명박보다 훨씬 나아보이는 듯 했지만[29] 노무현과 당시 정부 여당의 독선과 거듭된 실정 및 범여권 자체에 대한 국민들의 거부감때문에 민심이 이명박으로 가게 만든시각이 있다.
△ 정동영 대선 승복 직후 |
그리고 대선용으로 만들어졌던 정당인 대통합민주신당은 얼마 안 가 친노 계열인 유시민, 이해찬 등이 탈당하는 등 이미 예상 가능권 안이었던 시나리오를 맞게 되었고, 18대 총선의 참패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후신이던 통합민주당에서 여러 계파가 범람하는 단초가 되어버린다.
3.2.1. 17대 대선 당시 수도권 이명박-정동영 격전 지역
17대 대선 당시 대통합민주신당이 유세 중 정동영 후보가 이명박을 오차범위 내에서 따라잡았다고 발표할 정도로 호남 상경민이 많은 서울과 경기도 일부 지역의 지지세를 전년도 지방선거에 비해 상당히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서울 25개 구와 모든 동에서 패배하기는 했지만[34], 이명박이 서울시장 출신이었다는 점과 당시 정부여당이 워낙 인기가 없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서울시내 이명박-정동영 간 득표율 격차 10%p 이내 지역 | |||
동명 | 이명박 후보 득표율 | 정동영 후보 득표율 | 차이 |
종로구 창신2동[35] | 44.23% | 38.72% | 5.51%p |
구로구 구로2동 | 42.48% | 34.77% | 7.71%p |
구로구 구로4동[36] | 39.06% | 35.10% | 3.96%p |
구로구 구로6동 | 42.48% | 32.61% | 9.87%p |
구로구 가리봉2동 | 43.21% | 36.08% | 7.13%p |
관악구 신림6동 | 43.08% | 35.03% | 8.03%p |
관악구 봉천8동 | 42.24% | 34.54% | 5.87%p |
관악구 봉천10동 | 40.41% | 34.88% | 5.53%p |
경기도내 이명박-정동영 간 득표율 격차 10%p 이내 지역 | |||
동명 | 이명박 후보 득표율 | 정동영 후보 득표율 | 차이 |
성남시 수정구 태평2동 | 41.54% | 34.07% | 7.47%p |
성남시 수정구 태평4동 | 41.72% | 34.29% | 7.43%p |
성남시 수정구 수진1동 | 42.41% | 33.71% | 7.43%p |
성남시 수정구 산성동 | 42.39% | 32.75% | 9.64%p |
안산시 단원구 와동 | 41.31% | 33.69% | 7.62%p |
안산시 단원구 고잔1동 | 41.56% | 31.95% | 9.61%p |
안산시 상록구 사1동 | 41.93% | 32.40% | 9.53%p |
이러한 결과는 민주당계 정당이 18대 총선 이후 수도권의 민심을 회복하는 데 있어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3.3. 제18대 국회의원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역구를 서울특별시 동작구 을로 옮겨 출마하였으나, 뉴타운 광풍 속에 한나라당 정몽준 후보에 밀려 패배했다. 총선 당시 서대문구 홍은동에 거주하고 있어서 서대문구 을 출마설이 나돌았었다. 서대문구 을에는 이명박의 대통령 취임으로 일약 정권실세로 떠오른 한나라당 정두언이 버티고 있었기에 당시 민주당에서 서대문구 을 공천신청을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정동영이 서대문구 을에 전략공천되는 게 아니냐는 전망도 만만치 않았지만 동작구 을에 공천되었다. 그러자 한나라당은 당초 이 지역구에 공천할 예정이던 이군현을 경남 통영 고성에 공천하고 정몽준을 울산 동구에서 차출하여 동작구 을에 공천하는 배수진을 쳤다. 결국 정동영에게 있어서는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격이 되고 말았다.[37]△ 2009년 재보궐선거 당시 슬로건 |
사실 공천 문제로 탈당했을 뿐 무소속으로 남아버리고 싶진 않았는지 당선된 뒤 복당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왔고, 공언한 대로 이듬해 복당했다. 참고로 정동영 폭행녀는 이 때의 임기 말기에 벌어진 사건. 이 사건을 전후하여 이름하여 "정동영 죽이기" 논란이 불거졌다. 용산 참사 이후 정동영은 "현장왕"이라는 별명이 붙으며 진보적인 성향을 보였다. SOFA 개정안 발의, ISD 반대 등의 행보를 보였다.[42][43] 대체로 노무현 정권의 정책과 친노인사들에 비판적인 진보진영에서도 정동영을 우호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 각종 집회며 이슈마다 현장에서 발로 뛰는 모습을 보인 덕분이다. 특히 정치 개혁에 대한 열망이 강한 야권 지지층에게 정동영이 가지고 있는 무게감과 사회적 불평등 해소를 위한 강력한 개혁적 성향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온 면이 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지역구였던 전주시와 전라북도의 중요사업이었던 한국토지주택공사 유치와 10구단 유치에 실패하면서 지역 민심을 악화시켰다. 물론, 집권 여당과 청와대가 영남바라기였던 이명박 정부였고, 정동영 본인이 정부를 상대로 궐기대회를 열고 시위를 했다고 하지만 한국토지주택공사를 통으로 털리고, 10구단 유치마저도 실패하는 바람[44]에 두고두고 비판 받을 정치적인 실책이 된 셈. 실제로 당시 전라북도와 전주의 분위기는 완전히 초상집 분위기였고, 다들 지역 내 정치인들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찌르던 판국이었다. 더군다나 당시 LH 본사 유치를 두고 경쟁했던 경상남도 도지사가 같은 야당 소속의 김두관 지사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참작의 여지가 더더욱 좁아진다. 이를 두고 당시 전북사람들은 민주당 대선후보를 지냈던 정동영과 민주당 대표를 지냈던 정세균은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45][46]
3.4.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통합당 내에선 당 원내 지도부를 해체하라고 압박하던[47] 정동영에게 험지 출마를 요구하는 여론이 있었고 이에 전주 불출마 선언을 하고 서울특별시 강남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기로 결정했다. 그 후 당내 예비후보였던 전현희(당시 제18대 국회 비례대표 의원)와의 경선에서 승리하여 민주통합당 후보로 확정되었지만, 낙선했다.[48][49]본선에서 40%에 달하는 득표력을 보여주었지만, 지역 관련 공약보다는 경쟁자였던 김종훈 후보와 한미 FTA나 북한 인권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데 집중한 게 패인이었다.# 때문에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지역 밀착 공약을 보강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더군다나 김종훈은 국회의원 당선 이후 뭐 하나 제대로 한 것이 없어서 존재감들이 없던 당시 새누리당 강남권 초선 중에서도 가장 존재감이 없었다.[50]상술한 대로 이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노원구 갑에 출마한 김용민의 8년 전 막말파문이 터지면서 그와 비슷한 시기에 노인 비하 논란을 일으켰던 정동영에게 불똥이 튀었던 측면도 있다.[51]
3.5.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 4.29 재보선 출마선언 |
결과는 새누리당 오신환 후보가 43.9%의 득표율로 당선되었고, 정동영은 새정치민주연합의 정태호 후보(34.2%)에 이어 20.2%의 득표율에 머물면서 3위로 낙선했다. 선거 구도를 불리하게끔 만들어버린 참모진의 삽질 등 불리한 요소가 많았다지만, 여당대표와 대선후보를 지낸 거물급 정치인이 3위를 했다는 것은 큰 타격이다.
그 후 국민모임과의 관계는 국민모임이 정의당과 통합하는 과정에서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정의당의 주요 계파인 참여계의 정동영 전 의원에 대한 비토는 상당했다. 자세한 내막은 노동당 진보결집 기획단 간담회 7페이지 참고[57]
3.6. 정치재개 임박 (2015.12. ~ 2016. 1.)
△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의 복당요청 |
12월 29일, 한 때 행보를 같이하던 이종걸 원내대표와 회동했다. # 이종걸 의원은 정 전 의원과의 회동에 대해 '(정 전 의원과) 전반적인 사회 개혁 문제들에 대해 얘기했다'면서 "(정 전 의원이) 대여 전선에서 새누리당의 '반 개혁'을 우리 당의 개혁정신으로 막아내는 게 야권 전체의 통합에도 큰 도움이 될 거란 긍정적인 얘기를 해줬다"고 밝혔다.
1월 2일, 천정배 의원과 회동했다. 천 의원은 이날 정 전 의원에게 이제는 호남개혁정치 복원에 적극 나서달라"고 요청했고, 정 전 의원은 이를 경청한 후 "숙고해보겠다"고 답했다. #
1월 9일, "통일국가·복지국가를 염원하는 시민 모임"에서 정 전 의원이 머물고 있는 순창군 복흥면을 찾아 "정동영 전 의장의 정계복귀를 촉구하며, 정동영은 국민의 요구에 응답해야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1996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요청으로 정계에 진출했지만 2016년에는 국민의 명령으로 정계에 복귀해야 한다" 면서 정 전 의원의 정계복귀를 거듭 촉구했다. # 성명서 전문 이에 대해 정동영 전 의원은 대안야당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정계복귀가 임박했음을 시사했다. #[58]
3.7. 정치재개 이후 (2016.2. ~ )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합니다.
- 정치재개 선언에서
2월 18일 국민의당에 합류했다. 20대 총선에서 국민의당 소속으로 전주 덕진구에 출마할 듯.#- 정치재개 선언에서
2월 2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테러방지법 강행, 제2의 유신독재 꿈꾸나"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국민들이 가장 불신하는 국정원이 아니라 사후 통제가 가능한 부처에서 대테러 업무를 관장하게 해야 한다. 이것은 당연하고 상식적인 요구”라고 주장하며 테러방지법 반대의사를 명확히 밝혔다.
어느 정도 예상대로 전주시 덕진구 선거구에 출마하였다. 상대는 자신의 정책 참모를 맡은 바 있었던 김성주 현 국회의원이다. 김성주 의원과는 정치적으로도 동지'였'으나, 같은 전주고등학교 - 서울대학교, 거기다가 학과까지 선후배 관계여서 더욱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이로 인하여 그동안 큰 관심이 모이지 않았던 전주시 덕진구가 2016년 총선 최대 관심 지역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 20대 총선 당선확정 직후 |
하지만 노무현 정권 때 열린우리당 의장이자 최대 계파의 수장, 부총리급 통일부 장관을 거치며 노무현 정권의 최고 실세 중 한 사람이었던 그가 선거 기간 중에 '친노 패권주의'와 '영남 패권주의'를 거론[59]하며 친노 세력, 특히 노무현 정권 비판에 앞장 서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일부 비판이 있기도 하였다. FTA반성문을 쓸 정도로 노무현 정권의 실책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반성했음에도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측면이 없지는 않다.
△ 정동영 국민의당 의원 |
또한 정동영이 출사표를 던진 전주병 지역구를 더불어민주당이 꼭 이겨야 할 전략지역으로 선정하고 맹비난을 퍼부었음에도 거둔 승리이기에 더욱 의미가 크다.
3.8. 제20대 국회
매일경제신문이 7월 1일 정동영 의원이 부인의 7촌 조카(...)를근데 7촌 조카를 채용한 사실이 또 언론에 보도됐다. 아무리 멀다해도 2명 씩이나 채용했으면 문제가 되는 게 보통이지만, 7촌 조카도 충분히 멀 뿐더러(...) 독립운동가의 손자[61]여서 친인척 채용 논란에서는 까임방지권을 획득했다.
한편으로 아내의 7촌 조카 채용이 논란이 된 것에 대해, 국민의당이 기존 양대 정당들을 비판한 것에 대한 부메랑이라는 의견이 일각에서 있다.
7월 19일, 4년 8개월 만에 본회의장에 올라 정부의 독단적 사드배치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정동영, 4년 8개월 만 본회의장 단상 올라 사드 배치 맹폭
이날 정동영 의원은 안보가 목적이라는 사드 배치로 인해 안보와 국익의 '두 마리 토끼'를 놓쳐버린 박근혜정부에 맹공을 퍼부으면서, '사드는 하나의 무기체계가 아니라 국민의 삶을 겹겹이 둘러싼 국제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구조를 뒤흔드는 문제"라며 '사드배치 이후 경제가 흔들리고 북한 비핵화의 문이 닫히고 평화통일의 길은 영영 멀어지게 된다면 아무리 대통령이 결정했다 해도 국민 대표인 국회가 초당적으로 지혜를 모아야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시대착오적 대결구도가 다시 한반도 주변으로 형성되는 것"이라며 "미래로 가야 하는데 왜 지구 상에서 한반도만 후퇴하는가"라고 박근혜정부의 이번 결정을 비판하며 사드 배치 철회를 적극 촉구했다. 이런 정 의원의 논리적이고 날카로운 질문에 황교안 국무총리는 한때 답을 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고.
2017년 들어서는 전주시와 김제시의 통합을 추진했으나, 현재는 잠정 보류한 상태다. 전주시 문서 참고.
7월 11일에는 기자회견을 열어 2017년 8월 27일에 열리는 국민의당 전당대회의 당대표 경선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8월 27일, 국민의당 전당대회 당대표 경선 내내 안철수 후보의 가장 강력한 당권 경쟁자로 거론되었으나 안철수 후보가 약 700여표 차이로 가까스로 결선투표 없이 당대표로 선출되면서 28.4%(2위)로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광주에 지역구를 둔 천정배 후보(16.6%, 3위)에게 거의 더블 스코어에 달하는 표차를 냈고, 국민의당의 지지 기반인 호남권, 특히 전북을 싹쓸이했다고 한다. 노선이 유사했던 천정배 후보의 득표율까지 합하면 45.0%에 달해 당내 非안철수 성향의 호남계의 새로운 얼굴이 될 가능성이 점쳐지는 중이다.
10월에는 안철수 대표가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의 합당이 어그러지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공개적으로 안철수 대표를 비판했다. 박지원 의원과 더불어 바른정당과의 합당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걸로 알려진 정동영 의원은 10월 26일 오전 가톨릭평화방송의 '열린세상 오늘! 김혜영입니다'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 안철수 대표가 바른정당과의 합당과 국민의당 소속 시도당 지역위원장들의 일괄 사퇴를 무리하게 추진했다는 지적에 대해서 "여기에 대해서는 (안철수 대표가) 일정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안철수 대표가 혹시 사퇴까지도 검토해야 한다고 보느냐는 질문에는 "일각에서는 이런 리더십으로 지방선거를 치르겠느냐. 대표직을 물러나고 비상대책위를 꾸리라는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했지만 애초부터 안 대표가 등장한 것이 무리한 등판이었다고 생각한다"며 안철수 대표의 사퇴를 우회적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인터뷰 전문
11월 3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하 경실련)이 뽑은 '2017 국정감사' 우수의원 20인에 선정됐다.[62] 경실련은 선정이유로 정동영 의원은 국토위 국정감사에서 후분양제 도입과 공공택지 매각 금지, 부영 특혜, 인천공항 헐값 매각 문제 등을 집중 제기했다"면서 "정책국감 속 빛난 우수의원 20인에 선정했다"고 설명했다. 국정감사기간 중 박근혜 정부와 이명박 정부 당시 문제를 밝히고, 적폐청산을 요구하는데 앞장서며 최근 부실시공으로 논란이 된 부영주택이 박근혜 정부 시절 주택도시기금을 독식한 것과 이명박 정부의 인천국제공항 헐값 매각 시도 등을 밝히며 언론과 국민의 큰 주목을 받았다. #
2018년 2월 6일, 통합신당의 합류를 거부하며 국민의당을 탈당, 국민의당 개혁파가 추진하는 민주평화당에 합류했다. # 이날 공식 출범한 민평당은 창당선언을 통해 최저임금 ·비정규직·청년실업과 노인빈곤 등 민생현안 해결에 집중, 햇볕정책 계승·발전을 통한 남북화해와 한반도 평화 실현, 다당제 민주주의 실현 및 분권형 개헌 추진, 철저한 적폐청산과 국가대개혁으로 촛불시민혁명 완성, 지역·세대·성별·인종 등 차별없는 평등 사회 구현 등을 약속했다. # 초대 지도부 전면에 나서지는 않지만 민주평화당의 대표급 간판인사로서 활약할 것으로 보인다.
2018년 2월 7일,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인터넷 댓글을 통한 여론조작에 정동영 의원이 정치적 희생양이 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국가 권력으로부터 정동영 죽이기 작업은 18대 대통령 선거를 불과 6개월 앞둔 지난 2012년 총선 때 진행됐다. 실제 정동영 의원은 8일 국회에서 전북기자 간담회에서 “MB 정부 당시 국군 기무사령부가 선거에 개입하고 노골적인 ‘정동영 죽이기’를 한 사실이 어제 한 언론을 통해 밝혀졌다”며 “국민 세금으로 국내 정치에 개입한 것은 참으로 경악할 일”이라고 말했다. 또 정 의원은 “2012년 기무사 요원이 사용한 것으로 확인된 계정에서 나를 비롯한 야권 정치인사들을 비난하는 댓글 3만 개가 확인됐다.”라며 아쉬움을 표시했다. 2012년 총선 때 ‘정동영 죽이기’ 댓글 공작
△ 정동영 민주평화당 의원 |
민주평화당의 새 지도부를 선출하는 전당대회를 앞두고 평화당 당권에 도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대표적인 민주평화당 간판인사로 손꼽히는 현역 의원이고, 지난 국민의당 전당대회에서 당권도전에 실패했지만 건실한 2위 득표를 기록했으며, 제 17대 대선에서 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 후보를 역임해 대중적 인지도와 영향력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이번에 선출되는 대표의 임기가 21대 총선에 걸쳐져 있고, 민주평화당의 인지도가 낮은 상태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정동영처럼 무게감 있고 대중 인지도가 높은 거물급 인사가 당 대표로 선출되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3.8.1. 민주평화당 대표
△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 |
이날 정 대표는 당대표 수락연설에서 “생사 기로에 서 있는 평화당을 살리고, 힘없고, 돈 없고, 의지할 곳 없는 약자 편에 서라고 정동영에게 기회를 주셨다고 믿는다”며 선명 야당을 공언했다. “정의당보다 더 정의롭게 가는 것이 평화당의 목표” “민주당의 우클릭을 지켜보고만 있지 않겠다”라고도 했다. 정동영, 평화당 대표로 ‘11년 만의 귀환 돌아온 정동영 “10년 만에 국민이 준 기회”
당 대표 선출 다음날인 8월 6일에도 파격적인 '현장 행보'를 펼쳤다. 정 대표는 공약으로 내걸은 현장으로 달려가는 민주평화당이라는 구호에 걸맞게 6일 오전 희망버스 사건이 터진 지 7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당시를 잊지 않고 부산 한진중공업 현장 최고위원회로 첫 공식 일정을 시작한 후 한진가족대책위 관계자들과 오찬을 가진 뒤, 인근 김해 봉하마을로 이동해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에 참배했다. 저녁에는 상경해 덕수궁 대한문 앞 쌍용차 시민분향소에 조문까지 마쳤다.
이날 정 대표의 행보에는 과거 야인시절 '현장왕'이라는 별명처럼 "현장으로 가겠다. 힘없는 사람의 편에 서겠다"는 자신의 말이 헛말이 아니라는 듯, 쌍용차 시민분향소에서 헌화·묵념한 뒤, 겉옷을 벗고 팔을 걷어부친 채 돗자리 위에 주저앉아 김득중 전국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과 40분 이상 대화를 나눴다. 정 대표는 40여 분 내내 주로 김 지부장, 이 위원장의 말을 경청했다. 시종 심각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들었으며, 간간히 물을 마시는 외에 자신의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대중정치인의 현장행보와는 온도 차가 느껴졌다는 평가다.
또한 정 대표는 중진대표의 노련함을 과시하며 현장행보 도중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축하 전화를 받은 사실을 전격 공개했다. 통화는 5분 정도였지만, 청와대보다 앞서 통화 내용을 공개하면서 정치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정 대표와 문 대통령 간의 통화는 선거제도 개혁, 협치내각, 개혁입법연대 등과 관련해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
8월 29일 최저임금 개선 촉구 소상공인운동연대 집회에 김병준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 김동철 바른미래당 비대위원장 등 야당 대표들과 함께 참석해 현 정부의 최저임금 정책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의견을 밝혔다. #
2018년 9월에 3차 남북정상회담에서 정당 대표로 참가해 방북을 했으나, 이해찬, 이정미와 함께 북한 측과 잡아둔 회담 일정을 별도의 언질도 없이 일방적으로 어기게 되어 국민적인 비난을 사게 되었다. 이에 3당 대표측은 '일정에 착오가 있었다'며 해명했지만, 기자들도 이미 다 대기 하고 있었던 상황이고, 윤영찬 홍보수석이 이전에 직접 면담 일정[63]을 브리핑 하기도 해서, 1시간이 넘게 상대방을 기다리게 한 것은 일정 착오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스케줄 상 오해가 있었어도 차로 7~8분 정도면 오가는 거리에 3당 대표와 그 수행원들까지 시간에 대한 아무런 의사 전달도 하지 않았단 얘기도 돼서 의도적인 무시가 아니었냔 의심을 샀다. 실제로 이해찬 대표의 해명[64]을 보면 안동춘 부의장이 아니라 김영남 위원장과의 면담을 원했다고 하는데 김영남 위원장은 그 날 문정인 특보, 박지원 의원과의 스케줄이 잡혀 있었기 때문에 3당 대표와의 면담은 어려웠다는 모양이다. 물론 회담 전체적으로 보면 분위기가 좋으니 회담 자체가 파토날 정도는 아니지만 다른 두 당 대표들과 마찬가지로 비판을 받고 있다.
위와 같은 불상사가 있기는 하였지만, 이 날 회담에서 정 대표가 김 위원장도 서울에 오시면 환영받을 것이라 환담을 건네자 김정은 역시 정동영 대표에게 '아직 서울에서 환영받을 만큼 일을 하진 못했다'고
대표직에 오른 뒤 처음으로 치른 선거인 2019년 재보궐선거에서 최명철 후보가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전주시의원에 당선되는 성과를 냈다. 당 대표로서 선거전략도 잘 짰지만 그의 지역구인 전주 지역이었던만큼 전주에서의 그의 영향력도 도움을 주었다는 평가다. 이후 정의당과 교섭단체를 재구성하자는 입장이었으나 당 내 논쟁 끝에 바른미래당 내 호남계와의 통합을 추진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성공만 한다면 호남 내에서는 확고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나 당 내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인해 호남 의석이 줄어들어 민주평화당에는 오히려 손해가 아니냐는 논란이 일면서 다시 당내 분란이 일어났고, 결국 8월 12일부로 반당권파가 변화와 희망의 대안정치연대란 이름으로 분당수순에 들어가게 되었다. 게다가 그 비당권파가 소수도 아닌 10명이라 정동영을 포함한 4명만의 정당이 되어 정의당보다 작은 당이 되었다.
2019년 8월 15일 문재인 타도 집회를 하던 안정권이 우연히 카페에 있던 정동영을 발견하게 되며 소란을 일으킨다.#
2019년 10월 25일에는 전북대 대운동장에서 개최된 열린음악회에 방문했다.
3.9. 21대 총선 출마
기호 3번을 달고 21대 총선에 출마했다.3월 26일, 정동영 의원이 사실상의 공약으로 내걸고 집중적으로 중재하던 이마트 전주 에코시티점 입점이 확정되었다.# 특히 이마트가 경기부진으로 오프라인 매장을 축소하는 상황에서 입점을 이끌어낸 것은 정 의원의 강한 추진력 때문에 가능했다는 평가가 있다.#
공약으로 내건 전주시청/생명과학고 이전 관련해서 생명과학고 동창회 비대위측과 생명과학고 100주년 기념사업회, 전 동창회장간, 덕진구민간의 입장이 엇갈리고 있다. 생과고 동창회 비대위측은 생명과학고 이전에 찬성한적이 없다며 반대하고 있지만, 생명과학고 100주년 기념사업회, 전 동창회장, 일부 덕진구민은 찬성하는 입장으로 보인다. 덕진구 인후동, 호송동, 진북동, 금암동 이들 주민들은 31일 전북도의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전주 시청사가 현재의 생명과학고 부지로 이전하게 되면 낙후된 인후동을 비롯한 금암동과 진북동, 호성동을 살리고 침체된 주민들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 한편 생명고 동창회 비대위측의 반대성명에 일부 민주당 시도의원이 개입한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되었다. # 또, 제시한 전주시청 조감도가 경북도청과 유사해 표절 아니냐는 주장에 대해서는 경북도청사를 참고했다고 홍보물에 분명히 기재했다고 밝힌 뒤 공론화 과정이 이제 시작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
공식선거운동 첫날인 4월 2일,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가족이 “국민이 있어야 나라가 있다. 그 나라에서 피해자를 위하고 국민을 위하는 정동영 후보를 꼭 지지해주기 바란다”며 정동영 후보의 지지를 호소하였다. #
그러나, 더불어민주당 김성주 후보에 54,017표차(34.61%)로 밀리며 2위로 낙선하였다. 에코시티 쪽 투표소에서만 앞서고 나머지 지역에서 밀렸다. 전북을 지지기반으로 둔 정치인 중 유일하게 집권여당 대선 후보를 지냈던 정 의원이 자신의 텃밭에서 패배[65]한 만큼 그 의미는 더욱 남다르다는 주장이 있다. 정 의원은 낙선 후 자신의 SNS를 통해 “전주시민에게 진 빚을 다 갚지 못하고 멈추게 된 점 가슴아프고 송구스럽다”고 밝혔으나 명시적으로 정계은퇴의 뜻을 표명하지는 않는 등 향후 행보에 대해 묘한 여운을 남겼다. #
3.10. 21대 총선 낙선 이후
4월 20일, 20대 국회의원 임기를 마치면서 그 동안의 소회를 밝혔다. # 페이스북에 작성한 글이 정계은퇴를 암시하는 듯한 내용이어서 큰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4시간 이후 정계은퇴는 아니라고 정정하는 해프닝이 일어났었다.##2021년 2월, 정동영은 2003년 다보스포럼에서 당시 조 바이든 의원과 한반도 위기에 대한 토론과 경험을 바탕으로 ‘바이든 시대는 한반도에 냉전해체 기회다’면서 포괄적 해법을 통한 북핵문제 해결과 바이든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제안하는 책 '바이든 시대 한반도의 길'을 출간했다.#
이후 2021년 3월, 조수진 국민의힘 의원은 윤석열이 정동영, 김한길과 접촉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정동영 본인은 고발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사실이 아님을 말했다. 다만 이후 이재명 지지를 선언하고 더불어민주당에 복당한 것을 봐선 더불어민주당 복당을 위해 윤석열과 거리를 두었을 가능성도 있다. 반대로 김한길은 윤석열 캠프로 갔다.
4.7 재보궐선거 당시 박영선 서울시장 후보를 지지했다.
2021년 11월 1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여권 대통합을 주장하며 과거 국민의당으로 탈당했던 인사들과 열린민주당 이탈파의 통합을 주장하면서 정동영의 더불어민주당의 복귀가 점쳐지고 있다. 이재명은 과거 정동영과 통하는 사람들의 대표를 지낸 정동영계 출신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정동영도 이재명의 성남시장 출마 때 유세를 돕거나 세월호 캠프에 있는 이재명에게 방문하는 등 매우 가까운 관계였다.
2021년 11월 11일 북 콘서트 이후 일부 정통들이 윤석열을 지지하는것에 대해 "나로선 이재명과 같은 길을 걸어왔고 앞으로도 같은 길을 걸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 윤석열이 하는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일부가 일탈을 해서 지지하는 것은 자기들이 알아서 하는 것이고 일부가 지지하는 걸 정통 전부가 지지하는 것 처럼 말하는 건 옳지 못하다. 누군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적해달라"고 전했다. #
2021년 11월 26일 정대철, 천정배 전 의원과 함께 이재명 후보 측에서 러브콜이 들어왔다고 한다 이르면 이달 말 회동을 가질 예정이라고 한다. # 정동영 측은 "민주당 경선 때 이재명을 뒤에서 도왔다"며 "가더라도 뒤에서 조용히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2022년 1월 17일 더불어민주당에 복당했다. 천정배, 김관영 등 복당식을 치른 다른 국민의당 출신 복당 인사들과는 달리 별도의 복당식을 열지 않고 복당했는데, 선대위의 선거운동에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취지라고 밝혔다. #
2022년 지방선거에서 차기 전라북도지사 후보로 꼽혔지만 결국 출마하지 않았고, 대신 2022년 5월 9일 더불어민주당 전라북도지사 후보로 선출된 김관영 후보 캠프의 상임고문으로 활동했다. #
무소속[66] 이상직 의원의 선거법 위반으로 상실된 2023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전주시 을 지역구에 출마설이 나돌고 있다. 만약 출마해서 당선된다면 전주에서만 5선의원이 된다. 다만 민주당이 무공천을 결정할 경우 탈당 후 무소속으로 출마할 수도 있다.
2022년 10월 25일 윤석열 정부를 향해 이대로 가면 국가대혼란이라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당내에서 2023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전주시 을 지역구에 정동영 전략공천이 제기가 되었으나 지도부에서 무공천으로 결정을 내리면서 무산되었다.[67]
이재명이 더불어민주당 당대표로 선출된 이후 간간이 라디오에 나와 박지원과 더불어서 이재명 대표에 힘을 싣는 발언을 하고 있다.
오는 2024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에서는 과거 본인이 4선을 했던 전주시 병 지역구에 출마 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 다만 이 지역구의 현역의원이자 지난 총선에서 상대후보였던 김성주가 전임자였던 본인 못지않게 지역기반이 상당히 탄탄한지라, 현역 의원을 뚫고 공천을 받을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또는 본인의 고향인 순창군이 포함된 남원시·임실군·순창군 선거구로 옮겨 출마할 가능성도 있다.[68] # 또한 전주시와 완주군에서 행정구역 통합에 먼저 앞서 정치적 통합을 우선으로 전주완주 갑~정으로 국회의원 선거구 통합론까지 나오고 있는 만큼 나름대로 출마 변수는 있다.
2024년 1월 2일, 전주시 병에 공식 출마 선언을 했으며 당내 경선에서 현역인 김성주 의원과 맞대결하게 되었다.
3.11. 제22대 국회의원
2024년 3월 13일, 지난 총선에서 본인을 낙선시켰던 현역 김성주 의원을 경선에서 꺾고 전주시 병 지역구 공천을 받는 데 성공하여 5선에 도전하게 됐다. # 결과는 당선되면서 5선 성공.2024년 6월 23일 야당 외교를 목적으로 5박 6일간 미국에 다녀왔다, 정동영은 총선 직후 이재명에게 방미를 강력히 권유했고 관심을 보였다"면서도 "우리 방미가 늦어지면서, 미 대선 전에 이 대표가 미국을 방문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 같다"고 밝혔다.#
[1] 재임기간은 1956년 9월 5일부터 1960년 8월 13일까지.[2] 조부 어석(漁石) 정현모(鄭賢謨, 1900. 1. 11 ~ 1940. 4. 19)는 정인평(鄭寅平, 1859. 7. 5 ~ 1920. 7. 24)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출생 이후 큰아버지 정인의(鄭寅儀, 1857 ~ 1919. 4. 15)에게 입양되었다.[3] 이 간이학교는 광복 후 율북국민학교로 승격되나, 1994년 폐교되어 구림초등학교에 통합되었다.[4] 부친의 친일 의혹이 있었으나, 대선 당시 등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지금도 이에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5] 과거 언론사 인터뷰에서 이 20대 초반 시절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당시 운동권 생활 중에 잠깐 연애를 하다가 가난 때문에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져, 울면서 집으로 뛰쳐나온 적이 있다고 한다. 근데 집에 들어온 뒤, 계속 눈물 흘리며 자본론을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참고로 그 시대에 이 책은 금서였다. 물론 운동권에서는 다들 읽었지만. 참고로 정동영의 부인은 군대를 갔다 와서 만나 연애하다가 결혼한 것이니 이때와 무관하다.[6] 1994년 9월 ~ 1996년 1월 주말 MBC 뉴스데스크 앵커.[7] 2007년 대선을 계기로 알려지긴 했다. 몇 안 되는 당시 상황을 제대로 담은 자료 중 하나다.[8] 심재철과 정동영은 모두 MBC 기자 출신이었다.[9] 실제 연설과 토론에 상당히 달변이다. 언론인 경력이 정치인으로서의 커리어에 좋은 영향을 준 셈이다. 반면 평일 앵커였던 선배 엄기영은 앵커로서의 실력과는 별개로 상당한 눌변이다.[10] 뉴스 앵커를 좀 더 했으면 주중 앵커 자리에 올랐울지도 모른다.[11] 시내를 직접 누비며 유권자들을 만나는 전례없는 방식을 취했다지만, 전주시에서 학력을 지낸 지역적 연고도 있었던 데다 호남이 민주당에게 몰표를 쏟는다는 사실도 감안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본인 경쟁력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2009년 보궐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나와 12%에 그친 민주당 김근식 후보를 72.3% 득표로 크게 앞질렀다. 이어서 출마한 16대 총선에서도 같은 기록을 달성했다.[12] 속칭 천신정.[13] 이 일로 악연이 생겨 십수 년 뒤 정동영이 새정연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관악구에 출마할 때 역으로 권노갑이 야권을 분열시킨다며 강하게 비난하기도 한다.[14] 한화갑이 주 타겟이었는데, 재미있게도 한화갑은 정풍운동 당시에는 천신정에 동조했고, 이 때문에 정풍운동의 배후가 아니냐는 의혹을 사기도 했다. 다만 한화갑의 참여는 권노갑과의 개인적 갈등도 어느 정도 있었고, 천신정이 한화갑을 공격한 것은 당 대표인 한화갑이 후단협 사태에 수수방관하는 한심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15] 이른바 정동영 효과.[16] 정동영 본인이 60대가 된 지금도 정치를 하면서 정동영을 비꼬는 표현으로도 종종 등장한다. 다만 몇몇 웹사이트에서 정몽주니어처럼 정게할배, 노슬아치에 대한 글이 나올 때마다 '정동영 1승 추가'라는 밈으로 쓰이게 되고 있기도 하다.[17] 당시 추측엔 155석에서 180석. 최대는 200석까지도 전망하고 있었으며, 한나라당은 50석에서 120석으로 예상되었다.### 한편으론 저 발언이 없었어도 한나라당에 표를 주지 열린우리당에 표를 줄 일이 없는 노인층이 일찍 결집한 것뿐이라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2017년, 제19대 대선에서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의 장인 영감탱이 발언에도 불구하고 60대 이상 연령층에서의 지지도 1위가 자유한국당인 것을 보면 정동영의 노인 발언도 단지 한나라당의 정치적 공격 빌미를 줬을 뿐 노인층의 투표에는 별 영향이 없었다는 게 증명됐다. 다만 영남권의 표심이 어느 정도 이탈한 것은 사실이었다.[18] 2012년 19대 총선에서도 민주당계 정당은 막말 파문으로 인한 큰 상해를 입었다. 열린우리당의 후신인 민주통합당은 김용민을 노원구 갑 후보로 공천했는데, 그의 8년 전 성인 인터넷방송에서의 막말(결정타는 노인들이 시위를 못하게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를 없애버리자는 발언이었다.)에 발목을 잡혀 전국적으로 지지율이 요동쳤고, 이명박 정부 심판 여론으로 단독으로 과반을 달성할 것이라는 기대에 크게 못미친 127석에 그쳤다. 김용민 자신도 노원구 갑에서 낙선하여 서울 동북부 권역(성북, 강북, 도봉, 노원)에서 유일하게 패배한 민주통합당 후보가 되었고, 그의 노인 폄하성 발언 논란이 19대 총선 당시 강남구 을에 출마했던 정동영에게까지 불똥이 튀어 정동영은 4년 전 동작구 을에 이어 서울지역 총선에서 또다시 참패하고 말았다. 물론 강남구는 보수정당이 대경권 못지않게 초강세를 보이는 지역이라는 것을 감안하기는 해야 한다.[19] 그리고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노인 폄하 논란을 일으킨 미래통합당이 역대급 참패를 당했다. 보수정당과 민주당계 정당을 불문하고 총선에서 노인 폄하 논란을 일으킨 정당은 어김없이 국민의 혹독한 심판을 받았다.[20] NSC 상임의장을 겸직하는 통일부 장관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위상은 장관이 아니라 부총리급이었다.[21] 다만 이 때 박스떼기 논란이 생기기도 하였다.[22] 그리고, 대선 사상 최초로 민주당계 정당에서 기호 1번을 달고 대선에 출마한 후보가 되었다.[23] 노 전 대통령이 고건에 이어 정동영을 저격한 데다 경선확정 후에도 지원에 소극적이었다. 애초에 당시 노무현 이미지 때문에 당에서도 지원을 꺼리기도 했지만.[24] 이후 노 전 대통령의 서거 당시 조문하러 갔다가 배신자 소리를 들으며 절은커녕 진입도 못 하고 쫓겨난 일을 보면 정동영이 친노가 아니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이후 정동영은 바로 그 다음 날 다시 방문하여 조문을 하긴 했다.[25] 2007년 10월에 있었던 인터뷰에서 노무현은 정동영과 감정적인 충돌 외에도 정치인으로서 '스스로 만든 당을 깨고 정치 지도자에게 무슨 하자가 있어서 탈당을 시켜야 했느냐'며 원칙마저도 없었던 사람이라고 정동영을 비난하기도 했다. 이 인터뷰에서 노무현은 자신이 탈당한 것처럼 비쳐졌겠지만 실상은 당권파에게 쫓겨난 것임을 말하기도 했다.[26] 2007년 11월에 남북정상회담을 했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만 올랐을 뿐 여당의 지지율에는 영향이 거의 없었다.[27] 이 당시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지지율은 10% 남짓,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당지지율은 11%밖에 안됐다.[28] 다스 실소유주 의혹, BBK 논란 등.[29] 나이상으로도 정동영후보는 이명박보다 12살이나 젊었을 뿐더러 온갓 비리로 비난받는 이명박에 비교하면 비리도 별로 없었고 군필인 정동영에 비해서 면제인 이명박은 비난을 받고있는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명박 정부 중반인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과 연평도 포격전 등 북한의 도발이 연달아 터지자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은 군면제자인 이명박의 안보무능이 이런 사건을 불러일으켰다고 주장했다.[30] 531만 7708표차로 이명박에게 17대 대통령을 내줬다[31] 이명박의 경우 그의 서울시장 재직 시절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발언이 이슈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선거 초반 정동영 후보의 지지율은 전혀 오르지 않고 이회창의 지지율만 오르는 기현상 때문에 이명박의 서울 봉헌 발언 이슈화를 포기해버리고 만다. 정동영 측이 이명박의 서울 봉헌 발언을 이슈화해 보았자 이명박 측이 17대 총선에서의 노인 비하성 발언을 물고 늘어지면 끝이니까. 오히려 그렇게 했다면 전광훈을 위시한 기독교 우파 세력이 이명박에게로 더욱 결집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단, 그 당시의 전광훈은 이른바 빤스 망언으로 구설수에 오르내리기는 했지만 훗날 박근혜 탄핵 정국 이후만큼 정치색이 강하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대신 선택한 것이 BBK였으나 대선결과를 바꾸지는 못했고 531만 7708표차, 22.6%p 차이의 큰 득표율 격차로 이명박에게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최저투표율속 이명박 압승[32] 대선에서 서울에서 가장 압도적 격차로 패배한 후보가 되었다.[33] 반면에 역대 대선에서 최다표차로(약 557만표차) 패배한 보수정당 후보는 10년뒤인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홍준표 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그 당시 집권여당이고(다만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합민주신당 전신인 열린우리당을 탈당해서 엄밀히 말하자면 여당은 아니었고, 반면 박근혜는 탄핵으로 인한 대통령직 파면으로 집권여당지위가 상실된 상태로 대선이 치러졌다.) 본인이 속한 소속정당이 침체기인것도 같고, 20%대 초중반때 득표한것도 비슷하다.(정동영은 26.14%, 홍준표는 24.03%) 또 초중반 여론조사때도 두 사람 모두 다 3위로 시작했다.(정동영은 당시 한나라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한 이회창에게 밀렸고, 홍준표는 국민의당의 안철수에게 밀렸다.) 그리고 극후반 여론조사때는 제3후보가(이회창, 안철수)가 지지세가 주춤해져 두 사람이 2위로 올라섰고 실제 출구조사와 개표결과때 그대로 나왔다. 당시 두 사람이 나왔을때 당선자(1위(이명박, 문재인))와 표차는 500만표 이상으로 컸고, 본인(2위(정동영, 홍준표))-제3후보(3위(이회창, 안철수)) 표차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 다만 차이점은 정동영은 그래도 민주당 텃밭인 호남지역을 지키는데에 성공했지만, 홍준표는 보수정당 텃밭인 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강원도도 털리고, 경남지사를 지낸 경남에서는 고작 0.5%차이로 신승하였다. 득표수와 득표율도 재미있는데 정동영은 홍준표보다 2%가량 더 득표했지만, 득표수는 약 600만표에 그친반면 홍준표는 정동영보다도 약 200만표 가량 더 얻어 약 800만표 가까이 득표하였다.[34] 뿐만 아니라 경기도와 인천의 모든 읍면동에서도 패배했다. 다만 당시에는 서울의 민주당세가 경인지역보다 강했기 때문에 서울에서의 완패가 범여권에겐 매우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생전 처음겪는 서울 수도권에서의 완패였으니 말이다.[35] 정동영 후보 수도권 및 비호남 최고 득표율 기록 지역[36] 이명박 후보 수도권 최저 득표율 기록 지역[37] 당시 통합민주당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갑에서 내리 3선을 한 김상현 고문의 아들인 김영호를 급하게 공천한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공천이라 주민들에게 자신의 이름과 얼굴과 공약을 알릴 시간적 여유가 부족했고, 결국 정두언이 서울 한강 이북지역 최고 득표율로 압승하는 것을 손가락만 빨고 지켜봐야 했었다.[38] 전북 도의원과 무주군수를 내리 3선을 지낸 인물. 정동영과는 동갑이지만 전주고 출신이 아닌 만큼 오히려 정세균과 더 가까울 법한 인물이다.[39] 경남대 교수. 이후 안철수계 정치인으로 변신했고,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송파구 병 지역구에 미래통합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현직 국회의원이었던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40] 이 당시 그가 내건 선거전 슬로건은 '어머니, 정동영입니다.'였는데 본인뿐만 아니라 무소속 연대를 결성했던 완산 선거구의 신건 후보까지 큰 표차로 당선시키며 압승에 성공했다. 사실 신건은 이력에서 볼 수 있듯이 구민주계에 가깝다.[41] 민주당 김근식 후보는 12.93%라는 다시 없는 호남 역대 최악의 지지율을 받았으며, 한나라당과 진보신당이 나머지 15.7%를 8:6으로 나눠가졌다.[42] SOFA 개정안 발의, ISD 반대 등은 3년 이른 행보였다.[43] 야권신당을 추진 중인 천정배 의원은 이를 두고 한국정치에 정동영 전 의원만한 분이 없다. 라고 밝히기도 했다.[44] 다만 이건 전북지역 프로야구 팜이 부족한 것을 감안해야 한다. 당장 1990년부터 1999년까지 존속한 전북 연고 구단인 쌍방울 레이더스도 전주고와 군산상고를 빼면 제대로 된 고교야구팀이 연고지에 없었다.[45] 다만, 지역구의 특성을 따진다면 정세균 의원은 전북 동부권인 무진장+임실이 지역구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책임이 덜하기는 하다.[46] 추락한 호남 정치권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당시 민주당 내에서는 민주당 주류였던 친노 진영을 중심으로 제기된 호남 후보 불가론과 PK 공략론이 강력한 공감대를 이루고있는 상황이었고, 그대로 호남정치권의 위상추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호남정치의 위상변화는 이후 20대 총선에서 호남정치복원론을 내세운 국민의당이 압승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47] 이 시기에 노영민 당시 원내수석부대표에게 정동영이 당을 망치고 있단 지적을 받자 '내려와, 이 새끼야'라고 욕설을 하며 싸움을 벌이려 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48] 경선의 경우, 전현희 측은 정동영이 전략공천을 시켜달라고 가족과 당 지도부를 압박했단 언급을 하였고, 정동영은 그런 적이 없다며 모멸적인 언사라고 반박하면서 결국 경선이 된 형태였다.[49] 전현희는 험지인 강남에서 수 년간을 지역구에 공들여왔으나, 당시 김어준과 주진우를 등에 업은데다 대선후보 등 여러 네임밸류를 가진 정동영이 초선의원을 압살하지 못하는 그게 더 말이 안 되는 상황이긴 했다. 여담으로 김어준과 주진우는 당시에 한 불법 선거활동으로 고소당해 1심에 유죄판결을 받았다.[50] 이 때 당선된 서울특별시 서초구 갑 김회선, 서울특별시 서초구 을 강석훈, 서울특별시 강남구 갑 심윤조는 전부 존재감이 없었고 결국 20대 총선에서 김종훈을 제외하고 전부 불출마한다.[51] 강남구는 전반적으로 새누리당 지지 성향이 강한 편이다. 지금까지의 전적을 보면 보수당이 자리를 내준 건 갑을 통틀어 3회뿐.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부터는, 의석을 내준 적이 전혀 없었지만.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전반적인 야권강세도 있었지만 18대 국회 때부터 강남 을을 지역구로 낙점하고 8년 내내 지역구 활동에 힘써왔던 전현희 후보가 당선됐다.그러나 전현희도 4년 뒤에 낙선했다.[52] 아직 국민모임이 창당을 안 했기 때문에 무소속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53] 여당이 승리한 전적은 대선, 총선, 지방선거, 보궐선거를 통틀어서 단 3번 밖에 없다. 하지만 이번 보궐선거 때는, 총선에 비해 새누리 후보 득표율이 10% 넘게 상승하고, 야권 후보 득표율이 10% 넘게 떨어졌다. 오신환의 공약 및 선거 전략이 상당히 먹혀서 이변이 생겨났지만, 야권 득표율을 합하면 54%가 넘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지역의 색깔까지 변하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54] 당내에서 험지출마를 요구하는 여론이 있었고 이에 지난번 선거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을 선거구에 이어 서울특별시 강남구 을 선거구에 출마한 것이기 때문. 하지만, 본인의 의사가 확고했다면 덕진구를 지켰을 수도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미묘한 입장 차가 생길 수 있다.[55] 후보 단일화를 해야 한다는 여론이 생겨났지만, 정동영이나 새정치민주연합의 정치적 입지가 달린 일이기에 양보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애초에 새정치 측에서 단일화는 없다고 선을 그은 이유도 있고...[56] 뒤에 서술할 득표율을 보면 단일화에 성공한다 해도 득표율이 5~6%만 새어나가도 오신환이 자력으로 당선될 수도 있을 터였다. 실제로 정동영 후보 출마 전의 여론조사에서도 새누리가 앞섰다 (...) 야권 후보 난립은 어찌보면 결과적으론 새정연의 핑계(?)라고 볼 수 있다.[57] 이유는 간단하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참여계는 유시민 개인 지분이고, 유시민이 정계 은퇴한 지금도 어쨌든 그 영향을 받는다고 봐야 하는데, 정동영과 유시민은 열린우리당 시절에 엄청나게 싸워댔기 때문.[58] 정계에서는 정 전 장관의 정계복귀가 늦어도 이 달은 넘기지 않을 것이고, 빠르면, 그 시점이 오는 14일에서 17일 전후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59] 열린우리당의 창당 명분을 '전국 정당 수립'으로 거론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6년 4월 12일 오후 3~5시에 전북대학교 구정문에서 했던 국민의당 전주시 출마자 합동유세에서 친노 패권주의와 영남 패권주의를 강하게 비판했으며, 자신의 홍보책자엔 친노지도부가 호남정치인을 죽이기 위해 자신을 강남에 출마시켰다는 이야기도 게재했다.[60] 선거 공약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공약한 대로 송천동 변전소 문제는 이전하기로 가닥이 잡혔다. 이를 두고 송천동 거주민들 사이에는 정동영이 확실히 힘이 있다는 평이 많다.[61] 정진호 지사의 손자.[62] 보수야당 소속 선정의원은 한 명도 없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63] 윤영찬/청와대 국민소통수석 : "정상의 움직임과 별도로 정당 3당 대표는 안동춘 최고인민회의부의장을 접견할 예정입니다."[64] "3당 대표만 별도로 (김영남 위원장을) 만나려고 했는데 스케줄이 안 잡혔다. #[65] 여기에는 관악구 갑에 미래통합당 후보로 출마했던 김대호의 노인 관련 발언이 이슈화되면서 16년 전 정동영의 발언이 다시 회자된 측면도 있다.[66] 탈당 전 소속 정당은 더불어민주당이었다.[67] 사실 당의 지침을 거부하고 탈당해서 무소속으로 출마하는거보다 1년만 참으면 공천받아 화려하게 출마가 가능한데 굳이 출마할 이유가 없다.[68] 현역 의원인 이용호가 2021년부로 민주당 복당을 포기하고 국민의힘으로 갔기 때문에 더불어민주당 입장에서도 새로운 인물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