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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구 | 전주시 병 | ||
가족 | 배우자 민혜경 | ||
대선 경력 | 제17대 대통령 선거 | ||
비판 및 논란 | 비판 및 논란 정동영 노인 비하 발언 논란 ·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 경선 박스떼기 논란 | ||
관련 사고 | 민청학련 사건 · 5.18 민주화운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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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정국에서 정동영이 노인 비하 발언을 하여 일어난 논란.2. 경위
17대 총선 시즌이었던 2004년 3월 26일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1]이었던 정동영은 국민일보 대학생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정치에 무관심한 젊은 유권자에게 한마디 해달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미래는 20대, 30대들의 무대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한걸음만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60대 이상 70대는 투표 안 해도 괜찮아요.
그분들이 꼭 미래를 결정해 줄 필요는 없단 말이에요.
그분들은 어쩌면 곧 무대에서 퇴장하실 분들이니까 그분들은 집에서 쉬셔도 되고...
2004년 3월,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의 발언
그런 의미에서 한걸음만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60대 이상 70대는 투표 안 해도 괜찮아요.
그분들이 꼭 미래를 결정해 줄 필요는 없단 말이에요.
그분들은 어쩌면 곧 무대에서 퇴장하실 분들이니까 그분들은 집에서 쉬셔도 되고...
2004년 3월,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의 발언
3. 반응
한나라당 등 다른 야당들은 '여러 어려움 속에서 국가발전을 이룬 세대에 대한 정말 잘못된 발언이다.', '어떻게 60세 이상 노인분들에게 투표하지 말라고 할 수 있나? 천인공노할 망언이다.' 라고 비판하였다.파문이 커지자 박영선 대변인을 통해 “20, 30대 유권자가 정치적 관심은 높지만 투표를 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 투표 독려 차원에서 얘기한 것”이라며 “내 얘기로 인해 오해가 생겼거나 불편함을 느끼신 분이 있었다면 정말 사죄드린다”고 즉시 사과했고 전남 장흥을 방문 중이던 정 의장은 인근 경로당을 급히 찾아 노인들에게 큰 절을 올린 뒤 “20·30대가 투표에 무관심해 투표 참여를 강조하려다 말실수를 했다”며 “잘못했으니 용서해달라”고 사죄했다.
4. 여파
한나라당은 노무현 탄핵정국의 후폭풍으로 총선에서 폭망할 뻔했으나 이 사건으로 영남&강원권&강남3구 중심으로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결과를 일으켜 121석을 획득해 구사일생했다. #1 #2 #3 #4 반대로 여론조사상 최대 200석으로 예측되던 열린우리당은 152석에 그쳤다.이 사건은 대한민국 정치인들이 아동청소년 및 청장년 세대보다 노인 세대를 더욱 각별히 신경쓰게 되는 신호탄이 되었다. 17대 총선 이후에 치러지는 선거들의 선거공보에는 노인들을 위한 공약이 반드시 들어가는 것과 선거철마다 정치인들이 경로당 등 노인시설을 필수적으로 방문하는 것이 불문율이 되었다. 더욱이 고령화가 심화된 2010년대 이후로는 정치인들의 노년층을 향한 관심이 더욱 심해졌다. 반대로 노인들도 정치적 결집력이 예전보다 한층 더 강화되어 노인들의 투표율이 더 올라가는 데 크게 기여했다.
대한민국에서 청년 정치인들이 뿌리를 잡지 못한 것과 아동·학생 인권 신장이 늦어지고 둔화된 것도 이 발언이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2020년대에도 대한민국은 굳이 서구 선진국까지 가지 않더라도 동남아, 중남미 등에 비해서도 유독 청년 정치인들의 영향력이 크게 딸리는데 전술했듯이 정치인들이 노인들에게 유독 신경을 쓰게 되고 노인들이 유독 정치적으로 강한 결집력을 갖게 되면서 주요 정당에서 청년들이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되었고 그나마 좀 나오다 싶으면 죄다 실패로 돌아가는 것도 일종의 징크스가 되었다. 아동 학대 문제 등도 쉽게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데 가령 비속범죄는 일반범죄와 동일하게 처벌하면서 존속범죄만 유독 가중처벌하는 등 지나치게 부모 위주로 편향된 악법들이 지금까지 고쳐지지 못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사실 이런 문제는 수차례 이슈화되었고 정치인들이 작정만 하면 법을 개정하는 것도 어렵지는 않지만 노인들의 눈치를 보게 되면서 매우 어려워졌는데 그도 그럴 것이 노인들 상당수가 구시대적인 마인드[2]를 갖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과 반대되는 법을 제정·개정하려고 한다면 그들에게 낙선운동의 대상으로 찍힐 가능성 또한 높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한 마디의 말실수는 정동영 자신의 정치인 커리어도 크게 뒤틀어놓았다. 노인 발언의 후폭풍이 커지자 정동영은 비례대표 후보직까지 내려놓으며 백의종군을 해야 했고 열린우리당 당 의장직에 복귀한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참패했다.[3]
절정은 본인이 출마했던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1987년 직선제 부활 이후 민주당계 정당 후보로서는 최악의 참패[4]를 당했다.
시련은 계속 이어져 이듬해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동작구 을에 출마했다가[5] 정몽준에게 대패했고[6][7] 이듬해 2009년 재보궐선거에서 자신의 옛 지역구이던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에서 민주당의 공천을 받지 못하자 무소속으로 출마해 기사회생했다.
하지만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계)의 오랜 험지인 강남구 을에 출마했다가 한낱 정치신인이던 김종훈 후보에게 힘 한 번 못 써보고 참패했다.[8] 대선을 앞두고는 노년층 적대를 부추기는 듯한 발언을 해 구설수에 올랐으며 2004년의 발언이 재조명되기도 했다.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계 정당의 텃밭인 관악구 을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새정치민주연합 정태호 후보와 표가 분산되어 이 지역구를 1988년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최초로 보수세력인 새누리당 오신환 후보에게 내주고 말았다.
국민의당으로 갈아탄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전북 전주시 병에 출마하여 전북 지역에서 국민의당 돌풍을 일으키며 본인도 당선되었지만 겨우 0.76%p 차로 아슬아슬하게 이겼고 4년 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같은 지역구에 민생당 후보로 나와 자신의 안방에서 처음으로 완패하고 말았다.
[1] 열린우리당은 대표라는 직함 대신 의장이라는 직함을 사용했다.[2] 노인들은 아동 학대에 대한 개념이 전무하다. 부모가 자녀를, 교사가 학생을 체벌하는 행위를 아동 학대라고 주장하면 많은 노인들이 말도 안된다는 반응을 보인다.[3] 광역자치단체장 16명 중 정동영의 출신지인 전북지사(김완주) 딱 한 명만 건졌고 기초자치단체장과 광역의회의원은 17대 총선 이후로 당세가 크게 쪼그라든 민주당만도 못한 성과에 그쳤다. 그나마 당시 투표일이 1주일만 연기되었다면 전북지사마저 민주당에게 내줬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분석이 많았었다.[4] 동시에 직선제 부활 이후 대선 역사상 수도권에서 가장 큰 격차로 패배한 2위 후보 + 서울에서 최초로 패배한 민주당계 정당 후보로서 대한민국 정치사에 남게 되었다. 무엇보다 호남 이외의 지역에서 정동영이 승리한 곳은 충청북도 보은군이 유일무이했는데 이마저도 단 98표 차이였다.[5] 당시 서대문구 홍은동에 거주하고 있어서 서대문구 을 출마설이 나돌았지만 그 곳에서는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일약 정권실세로 떠올랐던 정두언이 강력하게 버티고 있었다. 결국 한강 이남지역에서 바람을 일으킨다는 구실로 동작구 을에 출마했는데 한나라당은 울산광역시가 기반인 정몽준을 동작구 을에 자객공천한 것이다.[6] 이 선거에서는 정동영보다 정치경력도 일천하고 당세도 약했던 창조한국당 문국현도 은평구 을에서 당선되었기 때문에 정동영의 참패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 문국현도 듣보잡 정치신인이 아닌 친이의 좌장이자 은평구 을의 터줏대감 이재오를 간발의 차도 아닌 1만 표 정도 차로 크게 이겼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7] 18대 총선에서 정동영에게 압승한 정몽준도 6년 후 서울시장 선거에서 박원순에게 털리고 사실상 정계은퇴했다.[8] 대선후보까지 지낸 정동영을 꺾은 김종훈도 4년 후 같은 지역구에서 정동영보다 훨씬 체급이 낮은 전현희에게 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