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8 02:43:46

장바티스트 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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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음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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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바티스트 륄리
Jean-Baptiste Lully
파일:륄리.jpg

초상화, 폴 미냐르 작
출생 1632년 11월 28일
토스카나 대공국 피렌체
사망 1687년 3월 22일 (향년 54세)
프랑스 왕국 파리
직업 작곡가, 무용수, 바이올리니스트
서명 파일:륄리 싸인.png

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2.2. 출세2.3. 륄리의 오페라 월드2.4. 죽음
3. 비판4. 작품세계5. 여담6. 관련 문서

[clearfix]
러시아 고음악(Musica Antiqua Russica) 연주
블라디미르 슐야코브스키(Vladimir Shulyakovskiy) 지휘
고식(Modo Antiquo) 연주
페데리코 마리아 사르델리(Federico Maria Sardelli) 지휘
▲ 『사은찬미가(Te Deum, LWV 55)』.
지휘자 어떻게 지휘를 하는지 주목. 후술할 사인(死因)을 이해할 수 있다.
텔 아비브 독주자 합주단(אנסמבל סולני תל אביב) 연주
벤자민 유수포프(Benjamin Yusupov) 지휘
여러 세기(Les Siècles) 연주
프랑수아-자비에르 로스(François-Xavier Paul Roth) 지휘
중서부 청년 예술가 음악학교(Midwest Young Artists Conservatory) 연주 오슬로 필하모니 관현악단(Oslo-Filharmonien) 연주
클라우스 메켈레(Klaus Mäkelä) 지휘
데이비스 고등학교 관현악부(Davis High School Orchestras) 연주
안젤로 모레노(Angelo Moreno) 지휘
코미디 발레 『부르주아 귀족(Le bourgeois gentilhomme, LWV 43)』
지휘도 시대연주여서 지휘봉(Baton)을 휘두르는 대신 지휘장(指揮杖, Staff)을 내리찍는다.
륄리는 프랑스 음악의 왕자라 불릴 자격이 충분하다. 그는 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프랑스 음악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 『프랑스의 문원(Le Parnasse François)』(1732), 에브라르 티통 뒤 티예(Évrard Titon du Tillet)
이 눈부시고 장중한 교향악이
고귀한 화음으로 모든 감각을 황홀케 하네
이 처음 순간에 가장 무정한 자도
온몸으로 달콤한 전율을 느끼도다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
음악가들은 시인의 인도에 따라야 하지만 단 한 사람 예외가 있다면 바로 륄리이다. 그는 열정이 무엇인지 알고, 어느 작가보다도 더 깊이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이이기 때문이다.
―샤를 드 생테브르몽 경(Charles de Saint-Évremond)

1. 개요

바로크 시대의 프랑스 무용가이자 음악가. 이탈리아 태생이나, 루이 14세 치하에서 궁정 음악가로 일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음악적으로는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이었으며, 당대의 이탈리아 오페라 양식을 프랑스에 이식하여 프랑스 오페라의 기틀을 잡았고, 루이 14세의 궁정용 무용 음악과 발레 안무를 다수 창작하였다. 마랭 마레 등 걸출한 후배들에게 작곡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탈리아 출신이지만, 누구보다도 프랑스적인 인물이 되었고, 이탈리아 음악을 상당히 배격하였다. 예를 들어 그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특징인, 대화인 레치타티보와 노래인 아리아로 나뉘어지는 걸 배격하고, 이 둘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음악 비극(Tragedie lyrique)이라는 형식을 만들었으며, 이 오페라는 프랑스식 오페라의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형식은 쟝 필리프 라모와 그 후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로 이어지며, 글루크빠였던 리하르트 바그너의 악극에까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본명은 '조반니 바티스타 룰리'로 이탈리아인이었다. 피렌체에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고 일찍이 천재성으로 주목받았다. 열두 살 때 륄리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기즈 대공의 눈에 띄어 대공은 어린 그를 1646년 파리로 데려가게 된다. 당시 왕국의 수도였던 파리에서 루이 13세의 조카딸이었던 몽팡시에 공작 부인의 시종으로 일하는 한편 니콜라 메트뤼(Nicolas Metru)에게 음악을 배운다. 몽팡시에는 용감하게 프롱드의 난에 참가했지만, 난이 실패로 끝난 1652년에 파리에서 추방되고, 그에 따라 륄리는 시종직을 사직하고 파리에 머무르게 된다. 파리의 일꾼이 된 륄리는 빠른 적응으로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바꿨다.

때마침 륄리는 1653년 2월 23일 18시부터 24일 일곱 시까지 장 드 캉베포르(Jean de Cambefort)·장-밥티스트 보에세(Jean-Baptiste Boësset)·미셸 랑베르(Michel Lambert)가 작곡하고 이삭 드 뱅세라드(Issac de Benserade)가 안무를 맡은 『밤의 장엄한 발레(Ballet Royal de La Nuict)』에서 어린 루이 14세와 같이 춤을 추게 된다. 륄리보다 여섯 살 어린 루이 14세는 륄리를 점점 좋아하게 되었으며, 한 달 뒤 륄리를 '왕의 기악곡 작곡가'로 임명한다.
『밤의 장엄한 발레(Ballet Royal de La Nuict)』 전곡 연주

2.2. 출세

파일:731px-Jean-Baptiste_Lully_Bonnart.jpg
륄리 사후 1711년에 만들어진 판화.
surintendant de la musique du roy(왕의 음악감독)이라 쓰여 있다.
륄리는 사후에도 후대 프랑스 음악가들의 귀감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야망과 출세욕이 강했던 륄리는 많은 발레곡들을 써내면서 왕의 환심을 산다. 1661년에는 대담하게도 자신을 피렌체귀족 로랑 드 륄리[1]의 아들 장바티스트 드 륄리라고 소개하는 구라를 시전했으며, 왕에게 신나게 아부를 떤 결과로 루이 14세는 1661년 륄리를 왕실 작곡가이자 음악 감독으로 임명하며, 그 해 12월 귀화 허가를 받고 왕의 관현악단의 지휘자이자 작곡가였던 미셸 랑베르(Michel Lambert, 1610~1696)의[2] 딸이었던 마들렌 랑베르(Madeleine Lambert)와 결혼했다.[3] 후에 자신의 딸을 왕세자와 연관된 궁정 집사와 결혼시키는 등 궁정 내에서 인맥을 계속해서 넓혀나간다.

1664년부터는 유명한 희극 작가인 장 바티스트 몰리에르와 일하기 시작했으며 당대의 인기있는 장르였던 코미디 발레(Comedie-ballet) 몇 편을 작곡한다. 하지만 륄리 자신의 욕망과 루이 14세의 발레에 대한 사랑이 작가였던 몰리에르와 대립하게 된 계기가 되어 몰리에르와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고, 발레 『부르주아 귀족(Le Bourgeois Gentilhomme, LWV 43)』을 끝으로 결별하게 된다.

2.3. 륄리의 오페라 월드

이후 륄리는 발레뿐 아니라 오페라에 주목하게 된다. 당시 재정장관 콜베르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오페라로 큰 성공을 거두었던 로베르 캉베르(Robert Cambert)가 동업자들의 횡령으로 졸지에 파산해 투옥되자, 영리한 륄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1672년 3월 페렝으로부터 오페라 독점권을 따내고 그 해 8월에 '왕립 음악 아카데미'를 창립함으로써 자신만의 음악 월드를 구축한다. 몰리에르와 결별한 륄리는 극작가 필리프 키노와 합작하여 서정 비극 또는 음악 비극(Tragedie lyrique)이라 불리는 장르를 만들고, 《카드뮈와 에르미온(cadmus et hermione, LWV 49)》을 시작으로 해마다 수많은 서정 비극들을 써냈다.

1681년부터는 몇몇 귀족들에게만 허용되는 특권인 루이 14세비서라는 명예로운 직책을 수행하는 등, 17세기 유럽에서 음악가라는 위치로서는 몹시 보기 힘든 고위관직 독점을 시전한다. 이런 을 이용해 륄리는 프랑스의 모든 성악 작품들에 대한 독점권을 가지게 되었고, 심지어는 륄리가 설립한 음악 아카데미가 주최하지 않는 음악회에서는 성악가 두 명과 여섯 명의 연주자들만을 허용하는 칙령까지 내려지게 하는데, 사실상 다른 작곡가들은 짜져 있으라는 것. 이런 륄리의 권력에 대한 욕심이 륄리에 대한 비판의 가장 큰 원인이 된다.

2.4. 죽음

▲ 영화 《왕의 춤》에 나오는 륄리의 죽음. 륄리와의 관계가 서먹서먹해진 루이 14세가 연주회장에 오지 않자, 왕이 오지 않았다는 귀족들의 말을 무시하고 사은찬미가(Te Deum, LWV 55) 연주를 강행하는 장면이다.

1687년 1월 8일, 그는 자신의 사은찬미가를 연습하려고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박자를 맞추려고 철제 지휘봉, 아니 지휘장(指揮杖)으로[4] 바닥을 두드리다가 자신의 발가락을 찧고 말았다. 이 사고로 발가락에 생긴 상처는 곧 곪아들어갔다. 추운 겨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위생환경에서 이 상처는 급속히 괴저로 발전되어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결국 악화된 괴저의 합병증으로 동년 3월 22일 사망했다.
파일:륄리 흉상.jpg
륄리 흉상.
앙투안 쿠아즈보 作, 1687년

사실 이렇게 사소한(?) 상처로 인해 사망한 것은, 의사가 괴저가 생긴 발가락에 대해 절단수술을 권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륄리가 이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궁정 무용가를 겸하고 있었으므로, 발가락을 절단하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당시의 위생 환경상, 특히 더러운 것으로 유명했던 파리에서 사소한 상처가 곪아 사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비교적 흔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다.[5]

그는 프랑스 음악의 '지배자'답게 엄청난 재산을 남겼는데, 베르사유 노른자땅 위에 집을 네 채나 가지고 있었고, 그가 가지고 있던 옷들만 해도 800,000리브르(약 44억 8천만 원)[6]나 되었다고 한다. 1681년 당시 륄리의 연봉이 100,000리브르(약 5억 6천만 원)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가격인 셈.[7] 륄리의 유산을 환산하면 금화 33,000루이 도르(약 22억 1천만 원)[8]로, 재산은 유언에 따라 수녀회에 기증되었다고 한다.
[clearfix]

3. 비판

하지만 륄리에 대한 비판으로, 그가 너무나 이탈리아 음악을 배격하고, 루이 14세의 비호하에 자신의 마음에 안 들거나 이탈리아식 음악을 작곡하는 작곡가들에게 훼방을 놓았다는 비판이 있다. 그와 함께 권력에 매달리는 2류 작곡가라는 혹평도 종종 있는 편이다. 실제로도 륄리가 쓴 여러 서정 비극들은 동시대 사람인 마르크앙투안 샤르팡티에의 엄청나게 후덜덜한 퀄리티인 《메데》 에 비하면 좀 뒤처진다는 평이 많다. 사실 프랑스 바로크 오페라 하면 이 샤르팡티에의 《메데》 와 바로크 후기인 장필리프 라모의 《이폴리트와 아리시》 나 《카스토르와 폴룩스》 등의 몇몇 오페라를 손에 꼽는 편.

4. 작품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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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초상화를 바탕으로 그린 판화.
장루이 룰레(Jean-Louis Roullet) 作.

륄리는 바로크 음악에 중요한 혁신을 불러왔다. 서정 비극(Tragedie lyrique)이라는 장르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이러한 무대 작품에 서곡을 붙인다는 발상은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다. 륄리가 만든 무대음악의 서곡은 장대하며, 도입부에 나타나는 부점 리듬이 특징이다. 이 느린 도입부가 바뀌면 음악이 빠른 푸가풍으로 바뀌며 춤이 시작된다. 이러한 서곡 양식은 후에 프랑스 풍 서곡이라 불리며 후기 바로크 시대에서 대부분 무대음악이나 기악곡의 서곡에서 쓰이게 된다.

륄리의 작품번호는 허버트 슈나이더(Herbert Schneider)가 1981년 만든 LWV(Lully-Werke-Verzeichnis)를 쓴다.

5. 여담

오케스트라를 훈련하는 데 지휘봉을 사용한 최초의 사람이다. 보통 이 업적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고, 또 자주 회자된다. 전술한 그의 죽음의 원인이기도 하였다.

젓가락 행진곡의 작곡가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이는 영국 소녀 유페미아 엘렌이 'Arthur de Lull'이라는 가명으로 출판한 것을 'Lull'을 'Lully'로 오해한 것이 널리 퍼진 것이다. 사실 젓가락 행진곡 자체가 륄리가 살던 시대 일반적 작곡 악풍이나 선법, 패턴과 비교하면 별 관계가 없는 음악이지만. 이건 륄리가 진짜로 만든 행진곡. 젓가락 행진곡의 악풍과 한번 비교해 보자.

륄리의 행진곡 중 Marche du régiment de Turenne의 경우 훗날 조르주 비제가 자신의 작품 《아를의 여인》 中 '파랑돌'(Farandole)의 핵심 멜로디로 사용하기도 했다. 륄리의 곡을 단조로 바꾸면 곧바로 파랑돌이 된다.

륄리와 루이 14세의 이야기를 다룬 유명한 영화가 있다. 바로 영화 《왕의 춤》이다. 고증도 세세하게 반영했고, 작품성도 뛰어나 호평을 받는 명작. 이런 유럽 영화에 관심이 있다면 보는 것이 좋다.

1994년에 다윈상을 받았다.

프랑수아 쿠프랭은 륄리를 기리어 '륄리 찬가'(Apothéose de Lully)라는 트리오소나타를 작곡했다.

영화 TAR 타르에서 리디아 타르(케이트 블란쳇 분)가 장비티스트 륄리 일화를 소개한다.

6. 관련 문서



[1] 정말로 피렌체의 귀족이 맞다면 '로렌초 디 룰리'여야 한다.[2] 미셸 랑베르의 대표작으로 Ombre de mon amant이 있는데, 이 곡은 륄리의 전기영화 <왕의 춤> OST에도 수록되어 있다.[3] 륄리는 동성애 취향이 있었는데 일부러 이것을 감추려 결혼했다고도 한다. 정확히는 양성애자라 봐야 할 듯.[4] 지휘봉을 영어로 Baton이라 쓰지만 륄리가 쓰던 건 Staff라고 쓴다.[5] 사실 200년 넘도록 서구권에서 흔했다. 미국 대통령인 제임스 가필드조차 암살범이 쏜 에 다쳤지만 목숨은 지장이 없었으나 수술 집도의가 손을 소독하지 않아 패혈증으로 재임 1년 만에 허무하게 죽었다.[6] 현대 환율에 대입해보면, 1리브르=한화 약 5,600원이다.[7] 궁정음악 감독 직책에 있을 때는 30,000리브르(약 1억 6천만 원)를 받았으나, 그 후 왕의 비서로 임명되어 70,000리브르(약 3억 9천만 원)를 추가로 받았다.[8] 1루이 도르는 12리브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