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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29호 | |
<colbgcolor=#315288> 성덕대왕신종 聖德大王神鐘 | |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일정로 186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 |
분류 | 유물 / 불교공예 / 의식법구 / 의식법구 |
수량/면적 | 1구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제작시기 | 통일신라 혜공왕 7년(7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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夫至道包含於形象之外 視之不能見其原 大音震動於天地之間 廳之不能聞其響 是故憑開假說 觀三眞之奧載 懸擧神鐘 悟一乘之圓音
무릇 지극한 도는 형상의 밖을 둘러싸고 있어서 보아도 그 근원을 볼 수가 없고, 아주 큰 소리는 천지 사이에 진동하고 있어서 들어서는 그 울림을 들을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가설[1]을 세워 세 가지 진실의 오묘함을 보듯이, 신종을 매달아 놓아 일승의 원음을 깨닫고자 하니라.[2]
성덕대왕신종 명문 中
무릇 지극한 도는 형상의 밖을 둘러싸고 있어서 보아도 그 근원을 볼 수가 없고, 아주 큰 소리는 천지 사이에 진동하고 있어서 들어서는 그 울림을 들을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가설[1]을 세워 세 가지 진실의 오묘함을 보듯이, 신종을 매달아 놓아 일승의 원음을 깨닫고자 하니라.[2]
성덕대왕신종 명문 中
1. 개요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또는 에밀레종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에서 제작된 동종(銅鍾)으로, 성덕왕을 기리고자 경덕왕 시기 주조를 시작하여 손자인 혜공왕 7년(771년) 12월 14일에 완성된 대종이다.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29호로 지정되었다. 전근대에 만들어 국내에 실물이 현존하는 범종 중 가장 크며 그 높이는 3.75 m, 지름은 2.27 m, 두께는 11∼25 cm이다.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측정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20세기 전까지 한국 최대의 종이었지만, 2008년에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동촌리 평화의 댐에 위치한 세계평화의종공원에 '세계평화의 종[3]'이 설치되면서 밀렸다.[4] 그러나 여전히 성덕대왕신종이 한국을 대표하는 범종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2. 역사
성덕대왕신종에 양각된 비천상 문양 사진 출처: 문화재청 |
하지만 이 종이 완성되기 이전에 경덕왕은 세상을 떠났고 결국 경덕왕의 아들, 즉 성덕왕의 손자인 혜공왕이 재위하던 771년에야 주조를 끝마쳤다. 그리하여 현재의 경주세무서 자리에 있었던,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찰 봉덕사에 걸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성덕대왕신종 표면에 새겨진 명문 덕에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서 절의 범종이나 불상을 떼어 녹여버리고 동전이나 화포를 제작하곤 했는데,# 봉덕사의 성덕대왕신종도 녹여 없애버리자는 여론이 있었으나, 세종이 재위 6년(1424)에 따로 지시해서 막았다.실록 기사
봉덕사는 이후 조선시대에 북천에 큰 홍수가 나면서 절은 없어지고 종은 조선시대 한동안 빈 들판 풀 속에 덩그러니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1460년 영묘사(靈妙寺)[6]에 옮겨서 걸었다가, 이후 1506년에 경주읍성 남문 밖 봉황대 밑에 종각을 짓고 거기에 걸어서 성문의 열고 닫는 시간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했다. 현대에는 1915년 옛 경주박물관[7] 자리로 옮긴 후 경주고적보존회를 거쳐 1975년에 새로 지은 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당시 이 거대한 종을 옮기는데 상당한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이 종을 트레일러에 실으니 무게는 50톤이 넘어서 최단거리인 월성로를 통과하면 중간에 있는 작은 다리가 50톤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경주 시내를 관통해서 멀리 있는 다리를 타야 했는데, 그러면 트레일러에 실린 종의 높이가 6미터가 넘어서 경주시내 전깃줄이 모두 걸리는 것이었다. 결국 한국전력공사에서 전공들이 다수 동원되어 에밀레종을 실은 트레일러가 지나갈 때마다 전깃줄을 끊어주고 지나간 다음에 다시 이어주는 식으로 했고, 성덕대왕신종이 경주 시내를 지나가는 동안 10만 시민들이 종이 옮겨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모여서 천천히 가는 트레일러를 따라가는 진풍경이 벌어졌다.[8]
3. 전설
현존하는 종들 중 가장 유명한 전설은 인신공양 전설이다.
3.1. 내용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고 '에밀레'하고 울린다고 해서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성덕대왕신종에 대한 전설은 매우 유명하다.혜공왕이 자신의 할아버지인 성덕대왕신종을 만들 때 종을 만들기 위한 돈을 시주받았는데, 시주하러 다니던 스님이 들른 어떤 한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그 집에서는 과부 아낙이 아기와 같이 있었는데 '마음 같아서는 시주하고 싶지만 있는 건 갓난아기뿐이네요'라고 아기라도 시주받아 가겠냐는 투로 말했다.[9] 스님은 이 말을 듣고 다른 곳으로 떠나 열심히 시주를 받아 종 주조에 보탰다.
그런데 종이 도무지 완성되질 않아 점을 쳐 보니 '받아올 시주를 받아오지 않았다'라는 게 아닌가? 살펴보니 저 아기를 시주하겠다던 집밖에 안 남기에 그 아이를 받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10] 그래서 스님은 아이를 시주한다던 그 집을 찾아가 여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움속에 결국 아이를 빼앗듯이 강제로 데려왔고[11] 울음을 삼키며 아이를 쇳물에 던진 뒤[12] 종은 무사히 완성되었다. 이후 종은 어미를 그리워하는 아이의 소리처럼 에미일레라('어미의 탓이다'라고 원망한다는 해석도 있다.)하고 울렸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어머니의 말실수로 인해 아이가 시주로 바쳐졌다는 이 이야기가 제일 잘 알려져 있으며 다른 내용의 전설도 존재한다.그런데 종이 도무지 완성되질 않아 점을 쳐 보니 '받아올 시주를 받아오지 않았다'라는 게 아닌가? 살펴보니 저 아기를 시주하겠다던 집밖에 안 남기에 그 아이를 받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10] 그래서 스님은 아이를 시주한다던 그 집을 찾아가 여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움속에 결국 아이를 빼앗듯이 강제로 데려왔고[11] 울음을 삼키며 아이를 쇳물에 던진 뒤[12] 종은 무사히 완성되었다. 이후 종은 어미를 그리워하는 아이의 소리처럼 에미일레라('어미의 탓이다'라고 원망한다는 해석도 있다.)하고 울렸다고 한다.
봉덕사에서 성덕대왕신종을 만들었으나 실패를 거듭했다. 일전(一典)이라는 이름의 종장이 이 때문에 주위의 비난을 엄청 받았고 고심에 빠져 있었다. 당시 일전에게는 과부의 몸으로 그 집에 얹혀살던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녀가 오빠의 실패를 자신의 실덕으로 여겨서 고뇌 끝에 자신의 아이를 바쳐서 종의 제조를 완성하기로 결심하고 일전에게 이를 알린다. 일전은 처음에는 이를 망설였지만 결국 부처의 뜻으로 여겨 그 청을 받아들인다. 결국 아이는 도가니에 던져지고 종이 완성되었고, 종소리는 아이가 어미를 원망하는 '에밀레'로 들린다고 한다. (최상수, <경주의 고적전설>에서 발췌)
성덕대왕신종을 만들던 당시, 계속해서 종이 망가지자 책임자였던 대장장이는 머리를 썩혔다. 여태껏 열심히 만들었는데도 계속해서 실패만 하니 골치가 아픈 상황이었다. 그에게는 과부 여동생이 어린 아이와 같이 살고 있었는데 오빠의 고민을 눈치채고 자신의 아이를 대신 바치겠다고 얘기했다. 여동생의 대답에 오빠는 깜짝 놀라 절대 하지 말라고 말렸고 사찰로 가서 부처님에게 조카의 목숨을 살릴 방도를 알려달라고 기도했다. 그날 저녁 대장장이의 꿈에 부처가 보살들과 나타나 아이의 목숨을 살릴 방도를 알려주었다. 바로 목침을 용광로에 넣으란 것이었다. 자신들이 이적을 일으켜서 목침을 아이의 모습으로 보이게 할 것이라고 당부하면서 말이다. 대장장이는 꿈에 깨서 서둘러 목침을 용광로에 넣었다. 부처의 이적으로 아이의 모습을 한 목침이었지만 그는 아이가 떨어지는 것 같아 슬피 울었다. 너무 울어서 눈이 멀 정도였지만 그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는 무사했고 이 아이는 훗날 명승이 되었다고 한다.
3.2. 역사학적 검토
이 이야기에 대한 기록은 놀랍게도 20세기가 되어서야 처음 등장했다.여기서 종을 주조할 당시 아이를 넣었다는 인신 공양 설화는 간장과 막야부터 시작해서 중국에서 이미 있었다. 그렇기에 이 설화가 보신각종에서 성덕대왕신종으로 넘어간 것일 뿐이란 주장도 나온다. 선교사 알렌과 헐버트 등은 1900년을 전후해 에밀레가 보신각 종이라고 기록한 것이 대표적이다.
1927년 성덕대왕신종에 대해서도 유아공양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는 글이 동아일보에 실렸음이 밝혀지면서 에밀레종이 성덕대왕신종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고 보기도 힘들게 되었다. 또한 조선 중기 평양 연광정 옆의 평양 종에도 비슷한 설화가 있음을 해당 기사에서 전하고 있다.# 고로 더 자세한 고증이 요구된다.
종이 운다는 이야기는 오호십육국시대 전량 때 세워진 중국 간쑤성 무위(武威)시 대운사(大雲寺)에 있는 종이 대표적. 여기는 '낭아娘呀, 낭娘'(여자 혹은 어머니) 또는 '응당應當, 응당應當' 하고 운다고 한다(황인덕의 연구). 당나라~오대십국시대 만들어진 종으로 추정되므로 이런 이야기가 번역되어 같은 시기 한반도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있다.
일각에서는 이 전설이 혜공왕대의 상황에 대한 은유라고 해석한다. 어린 아들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우고 전횡을 일삼던 혜공왕의 어머니 만월부인과, 혜공왕의 고종사촌이자 나이 어린 왕을 배반하고 왕위를 찬탈한[13] 상대등 김양상을 비꼬기 위해서 만들어낸 전설이라는 것. 이 견해에 따르면 어떤 유형의 전설에서든 아이의 아버지가 등장하지 않는데, 이것은 혜공왕의 아버지인 죽은 경덕왕을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런 게 사실이라면 왜 기록이 없느냐는 의문점이 있다. 물론 기록이 없어지는 경우가 있지만, 그렇다면 그 사실은 어떻게 전해졌으며, 전해졌다고 하더라도 사실이라고 믿을 근거가 무엇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역사학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 중 하나가 사료가 언제 작성되었가 하는 문제다. 몽골 제국의 침입과 14세기 왜구의 습격으로 구전 전승을 이어나갔을 지역 사회가 철저히 파괴되었기 때문에, 조선 시대 초기 작성된 자료만 되어도 이 기록의 신뢰성을 높게 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역사학계에서 이 에밀레종 설화를 신라 당대의 일로 보는 학자는 없다. 종합 자료집 같은 경우에야 '이런 얘기도 있긴 한데...' 하는 식으로, 하도 유명하니까 언급이야 해 주겠지만 학술 논문에서 이런 소리하면 역사 자료 방법론을 무엇으로 배웠냐면서 게재를 거부당할 것이 뻔하다. 다만 국문학과나 민속학과라면 자료의 신뢰성 문제보다 내러티브의 문제를 중시하고 구전 자료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때문에, 아주 가끔 이런 논문이 통과된다. 물론 앞서 말한 자료 방법론의 문제를 전혀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문학계나 민속학계에서 많이 차용이 되지 역사학계에서는 언급할 가치가 없는 논문으로 취급받는다.
당연히 진짜로 아이가 들어간 게 아니다. 성분 분석에 따르면 인간을 넣었을 경우에 당연히 있어야 할 성분(뼈의 칼슘, 인 등)이 없으므로 그냥 전설일 뿐이다.[14] 게다가 주조 과정에서 종의 균열을 막기 위해서는 신속한 공정이 요구되기 때문에 신종을 만들 때는 소형 도가니들로부터 동시에 주물을 붓는 방법을 사용했다. 여기에 아이를 넣으려면 아이를 균등하게 갈아버려서 도가니별로 넣어줘야 하는데 잔혹성도 문제이지만 제대로 된 종이 나올 리가 없다. 살생을 금기시하는 불교에서 종을 만들기 위해 생명을 희생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인신공양 전설은 워낙 흔하지만...
3.3. 재료공학적 검토
청동의 주 원료인 구리는 녹는점이 1,050℃로써 통일신라 시대에는 라면 물 끓이듯이 쇳물을 도가니에 모아서 녹는점까지 온도를 올리고 유지시킬 기술이 없었다.고대의 철과 구리의 주조기술은 광석과 연료탄(숯,석탄 등)을 용광로에 함께 장입하고 용광로 하단의 연료탄에 불 붙인 후 하단의 다른 통풍구에서 바람을 불어넣어 광석의 온도를 최대한 끌어올려서 아이스크림이 상온에서 녹아 떨어지듯이 광석에서 액상으로 변해 떨어지는 쇳물을 하부에서 모아 주형안에 주입하는 기술이었다. (현재도 광석에서 추출하는 기술은 이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음)
따라서 고대의 용광로 상부에는 끓는 쇳물이 있을 수 없으며 타기 전의 숯과 구리 광석으로 차 있는 상태이기에 아기를 쇳물에 집어넣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
어떻게든 쇳물 안에 생명체(유기물)를 넣은 경우 금속 조직중에 잔재하는 유기물은 강도와 피로수명을 치명적으로 줄이기 때문에 제조 공법적으로도 맞지 않는 이야기이며 현재의 주조공정에서도 품질관리를 위해 용해로 안에 작업자의 장갑에서 들어가는 섬유, 포장지에서 섞여 들어가는 플라스틱, 종이가 들어가지 않도록 쇳물의 청정도를 높여주기 위해서 노력한다.
설화와 같은 녹는점이 1,000℃가 넘는 금속을 도가니에서 액상으로 끓이는 기술은 통일신라시대 이후 천 년도 훨씬 더 지나고 나서 전기로 유도가열하는 방식이 개발되면서 비로소 가능해졌다.
진천 종 박물관에 있는 고대 주조법의 모형도에 이러한 내용이 잘 설명되었다.
4. 특징
현 소재지는 경북 경주시 인왕동 76번지에 위치한 국립경주박물관. 문화재청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한국의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유두를 사각형의 유곽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2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마름모의 모서리처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있다.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또한, 몸통에 남아있는 1,000여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새긴 수법도 뛰어나, 1천 3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상되지 않고 전해오고 있는 문화재.
이 종이 내는 음색의 특성으로, 밖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종의 안쪽을 대칭형 구조 속에 숨어 있는 미세한 비대칭성이 나타나도록 울퉁불퉁하게 만들어, 종을 치면 일정하지 않은 두께로 서로 다른 주파수의 소리가 주거니 받거니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반복되는 '맥놀이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성덕대왕신종의 아래에는 땅을 파서 울림통을 만들었는데, 종 위의 음관과 함께 한국 종의 고유한 특징이다. 울림통은 종이 울릴 때 나오는 간섭파를 효과적으로 유지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지금 설치된 울림통은 그 크기가 너무 작아 종의 진동수와 약 3Hz 정도 오차가 있다고 한다. 크기를 키워야 된다는 이야긴데, 연구된 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울릴 일이 없다 보니 아직까지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 종 위의 음관은 찢는 듯한 고주파음을 재빨리 밖으로 배출하는 역할을 한다.
경주박물관에서는 성덕대왕신종의 종소리를 녹음해서 매시 정각, 20분, 40분에 튼다. 1992년 제야(除夜)에 서른세 번 종을 친 뒤 한동안 타종을 중단했다가, 1996년 학술조사를 위해 시험으로 타종했다. 그 뒤 2001년 10월 9일, 2002년과 2003년 개천절(10월 3일)에 타종행사를 열었으나, 2004년 말에는 보존에 문제를 일으키는 금속 스트레스 누적을 억제하기 위해 더 이상 타종을 금한다. 금지 이후로도 관광객들이 종을 살짝이나마 쳐보는 일이 빈번해 당목도 떼서 바닥에 두었다. 주기적으로 쳐 주는 것과 안 치는 것 어느 쪽이 보존에 유리한지는 전문가만이 알 것이다. 다만 한국의 보존기술은 반쯤 망가진 종을 완전복원해 칠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정도라는 사실은 알아두자.
아침저녁으로 종치면서도 천 년이 넘도록 멀쩡했건만 나름대로 보존을 한답시고 최첨단 기술로 개발된 보존액을 발랐다가 되레 부식해서 이젠 치지도 못한다는 말도 있으나, 녹슬지도 않은 쇠에 보존액을 굳이 바를 리가 없으므로 이건 그냥 진짜 종소리를 듣지 못하는 데 대한 악담이나 억측이다. 이후 2021년에 종 완성 1250주년을 기념하며 입체음향을 채록하기 위해 수 차례 타종하였다. #
종 표면의 명문(銘文)이나 그림 등을 자세하게 보고 싶다면 국립중앙박물관 2층 서화 코너에 가자, 탁본이 전시되어 있다.
4.1. 종 고리가 로스트 테크놀로지라는 주장
예전에 유명했던 이야기로는, 종을 매달고 있는 고리는 현대 문명의 기술로도 재현하기 힘든 오파츠 수준의 강도를 자랑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의하면, 경주박물관 신관으로 옮겨 달면서 새로 종고리를 만들었는데, 종고리의 강도를 실험해보기 위해 강괴를 달아놓고 변화를 관찰해보았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종의 하중보다 더 가벼운 강괴를 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새로 만든 종고리가 늘어져버렸다고 하며, 이에 신품 제작을 시도했지만 종고리를 넣는 구멍의 크기가 너무 작아서 여기에 들어갈 만한 고리로는 종의 무게를 지탱할 강도를 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직경 15cm면 버텨낼 수 있는데 구멍의 직경이 9cm가 안 되었기 때문에, 와이어로 칭칭 감아버리면 무게가 분산되는 효과 때문에 버틸 수 있지만 그래서는 종을 달아둔 게 아니게 되므로 포기했다. 그런데 원래 달려 있던 고리는 여러 장의 철을 꼬아서 말아 제작한 것이기 때문에 무게를 견길 수 있어, 결국에는 본래 쓰던 고리를 찾아서 다시 끼워넣었다.'는 것이 해당 서적의 진술이다. 혹은 모 TV 프로그램에서 시험해 본답시고 원래 고리를 떼고 최첨단 합금으로 만든 고리로 실제 바꿔달자 하루도 채 안 돼서 엿가락처럼 늘어져서 도로 갈아끼워야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에 대한 정확한 출처는 알 수 없다.
이 고리 오파츠설에 대해선 부정적인 의견이 많다. 일단 산업현장에서 사용하는 50톤짜리 중량을 버티는 샤클의 지름이 2인치(5.08 cm)밖에 되지 않는다. 수십만 톤급 거대 선박을 띄우고 초거대 교량을 세워올리는 현대 재료공학 수준은 절대 만만하지 않다. 다음의 반박글도 참고해보자. 고로 유추해 보건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교과서에 실리기도 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이 베스트셀러에 실린 내용을 많은 사람들이 믿어버려서 만들어진 도시전설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당장 고리만 해도 위의 링크에 실린 것처럼 얇은 합금을 대장장이가 말아서 만들 필요조차 없이 그냥 적당한 철을 가져다가 쓰면 충분히 해결 가능한데다가, 그냥 사진만 확인해봐도 고리보다 더 공학적인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은 그 고리를 끼우는 틀 자체가 근대에 복원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해당 전문가들의 검증이 필요한 부분일듯.
5. 당대 다른 종(鐘)과의 비교
동북아시아의 대종들은 대개 맑고 높은 소리보다는 진중하고 길게 울리는 소리를 내도록 만들어져 있는데, 그 기술의 정점에 있는 것이 성덕대왕신종이다. 앞서 말한 음통(음관)과 울림통도 그렇지만.다만 에밀레종도 대단한 물건이나 역사상으로 보면 신라 최대의 종은 아니다. 신라 최대의 종은 경덕왕 때 만들어진 황룡사의 황룡사 대종으로, 그 규모가 성덕대왕신종의 무려 4배에 달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몽전쟁으로 황룡사가 파괴될 때 소실되었다.
또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종도 아니다. 에밀레종보다 46년 빨리 만든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 725년 주조, 1.7 m)이 가장 오래된 종이다. 이 종은 성덕왕 때 만들었고 성덕대왕신종은 성덕왕이 죽은 뒤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6. 여담
- 특유의 인신공양 전설이 가히 충격적이어서, 2010년대 이후 국내에선 '에밀레'가 사람을 인신공양급으로 부려먹는 행위를 의미하는 은어로도 쓰인다. 예를 들면 공밀레와 번밀레가 있으며, 애니메이션 작화가 매번 극강이면 작화진을 갈았다면서 작밀레라 하기도 한다.
-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에 마련된 종각에 전시되었다. 가까이 가서 보면 종 표면을 긁어낸 흔적들을 볼 수 있는데, 이 종의 가루를 달여 마시면 낙태에 도움이 된다는 기이한 미신이 1930~40년대에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15] 물론 실제로는 녹물이나 다름없어 산모의 건강에 아주 해롭다. 씁슬하게도 산모의 건강이 나빠지면 유산될 위험이 커지므로 완전 거짓말은 아니라는 것. 현재는 박물관 내에서 전시 중이라 함부로 만지는 것도 불가능하다.
- 서울의 보신각에 원래 있던 종이 1985년에 본래의 보신각종이 노후화되어 이 종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옮기고 보신각에 걸 종을 새로 만들었는데 이때 성덕대왕신종을 복제했다. 그러나 이 역시 종소리가 진품에 한참 못미쳤다고 한다. 해마다 12월 31일에 제야의 종이 울리는데 옛날에는 성덕대왕신종도 자정에 쳤고, 그걸 새 보신각종(에밀레종 복제품) 치는 것과 교차해 TV에 생중계했다고 한다. 그런데 두 종의 소리가 아무리 소리에 둔한 사람이라도 진짜와 가짜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쉽게 알아차릴 만큼 수준 차이가 났다고 한다.
- 전통무용가 이애주가 이 종소리에 맞춘 춤을 만든 적이 있다. 춤 이름은 후천개벽무(後天開闢舞)로 본래는 1986년 개천절에 초연할 예정이었으나 여러가지 사정이 겹쳐서 같은 해 10월 9일 한글날에 공연을 했다고 한다. 장선우 감독이 영상 촬영을 할 예정이었으나 일정이 꼬이는 바람에 미처 촬영을 하지 못했다. 이후에도 이애주는 성덕대왕신종 타종행사 때 종에 대한 의미를 담은 춤을 추는 공연을 열었다.
사진에서 보이듯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인근 샌페드로(San pedro)에는 1976년 미국 독립 200주년 에밀레종을 본떠 만든 우정의 종각(Korean Bell of Friendship)이 있다. 태평양을 바라보고 있는 아름다운 경치와 종각의 모습이 어우러져, 근처에서 이 종을 배경으로 결혼사진을 찍기도 하는 일이 종종 있는 듯하다. 그리고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에서도 잠깐 나온다. 다만 형태는 흉내만 냈지 제대로 복제한 것은 아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의하면 이 종처럼 맑은 소리가 아니라 깡통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고 하는데, 실제로 들어보면 그렇게까지 못 들어줄 수준은 아니지만 성덕대왕신종의 맑고 깊은 울림에는 못 미치는 것이 사실이다.
- 서양에도 에밀레종 설화와 비슷한 것이 있다.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도시 바인가르텐(Weingarten)에 있는 성 마르틴 바실리카 오르간은 제작자인 요제프 가블러(Joseph Gabler. 1700경-1771경)가 자신이 만들던 파이프오르간이 자신이 원한 대로 소리가 나게 하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7. 국보 제29호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 청주 운천동 출토 동종(보물 제1167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완형의 통일신라시대 범종 3구 중 하나이다. 높이 3.66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측정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설화로 인해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리운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연꽃봉우리를 사각형의 연곽(蓮廓)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앞,뒷면 두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꽃모양으로 굴곡진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있다.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또한, 몸통에 남아있는 1,000여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당시의 종교와 사상을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금석문 자료로 평가된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설화로 인해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리운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연꽃봉우리를 사각형의 연곽(蓮廓)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앞,뒷면 두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꽃모양으로 굴곡진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있다.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또한, 몸통에 남아있는 1,000여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당시의 종교와 사상을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금석문 자료로 평가된다.
8. 같이 보기
[1] 여기서는 hypothesis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개념을 언어로 임의로 표현한 것'을 뜻한다. 산스크리트 upacāra의 번역어다.[2] 이처럼 음성을 관해서 마음의 성품을 직관적으로 깨닫는다는 모티프는 능엄경과 같은 후기 대승 불교 문헌과 선불교 조사들의 일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3] 1만 관(37.5톤), 높이 4.67 m, 지름 2.76 m[4] 이전까지는 한국 범종 제작 기술이 실전되어 새로운 전통 대종이 나기 힘들었지만 현대에는 기술이 복원되어 새로운 종이 나온다. 대부분 진천군 덕산읍 성종사에서 제작한다.[5] 아이러니하게도 김양상은 혜공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 선덕왕이 된다. 종의 주인공인 성덕왕 입장에서는 손자를 죽인 원수의 이름이 자신을 칭송하는 종에 씐 셈이다.[6] 출토된 기와에 적혀있는 명문을 근거로 현재의 흥륜사지로 추측한다. 이 절도 당연히 조선조에 숭유억불 기조로 타격을 받아서 현대에야 절터 옆에 새 절을 만들었다.[7] 경주문화원에 있는 종각[8] 유홍준의 유명한 저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보면 당시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9] 다른 판본에는 정말로 미안해하는 이야기도 있다.[10] 이 부분은 여러 이본이 있다. 처음부터 아이를 집어넣어야 한다는 점괘가 나왔다든가, 어미가 아이 운운하며 시주를 거절함으로써 스님을 모욕했기에 부정 타서 종 완성이 안 되는 거였다든가.[11] 판본에 따라 여인이 결국 어쩔 수 없이 승려에게 아이를 전해주는 이야기도 있다.[12] 전설에는 스님과 대장장이들이 어린 아이가 안타까워 정말 울면서 던졌다고 한다.[13] 삼국사기에서는 주어 없이 김지정의 난이 일어난 직후 왕이 시해되었다고 전하지만, 삼국유사에서는 김양상과 김경신이 왕을 시해했다고 보다 명확하게 나온다. 실제로는 김경신이 반란을 주도하여 혜공왕을 시해하고 명분을 위해 김양상을 강제로 즉위시켰다는 학설이 있기는 하나, 어떤 경우든 당대 사람들에게 김양상은 반란의 주도자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14] 다만 이게 유일한 근거는 아니다. 불순물 제거 과정에서 사라질 가능성도 없지는 않기 때문. 물론 후술하는 다른 이유들이 겹쳐있으니 아이가 들어갔다는 것은 허구로 보인다.[15] 하마다 고사쿠(濱田耕策),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과 중대의 왕실」, 『신라국사의 연구[新羅國史の硏究\]』, 요시카와 고분칸[吉川弘文館\], 2002, 1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