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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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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5대 국왕
파사 이사금 | 婆娑 尼師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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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릉(蛇陵) 전경.
출생
(음력)
45년 이후(?)
사로국 서라벌
사망
(음력)
112년 10월 (향년 60~70대)[1]
사로국 서라벌
능묘 사릉(蛇陵)
재위기간
(음력)
신라 왕태자[2]
연대 미상 ~ 80년 9월
신라 제5대 국왕
80년 9월 ~ 112년 10월 (3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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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婆娑) / 지고(知古)(?)[3]
부모 부왕 유리 이사금
모후 사요왕의 딸
형제자매 이복 형 일성 이사금
왕후 사성부인 김씨
태자 박지마
왕호 파사 이사금(婆娑 尼師今) }}}}}}}}}

1. 개요2. 생애
2.1. 파사 이사금 시기 연대조정 문제
3. 기타4. 파사이사금 대의 인물5. 《삼국사기》 기록6. 참고 항목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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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제5대 국왕. 칭호는 이사금.

기록상 파사 이사금 시대에 신라가 본격적으로 경주 바깥 영토를 얻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실질적인 고대 국가 신라의 시초를 파사 이사금 재위기로 보기도 한다.

파사 이사금의 '파사'(婆娑)는 불교적인 이름으로, 범어(산스크리트어)에서 '유제'(bhasa, 有諦, 진리가 모습을 드러냄)를 뜻하는 단어이다. 《삼국유사》 <탑상>에 나오는 -금관성파사석탑- 설화도 이와 똑같은 한자를 쓴다. 단 아직 신라에 불교가 도입되기 한참 전이기 때문에 음차일 뿐 한자 의미는 나중에 붙였을 가능성이 높다.[4] 불교적이지 않은 뜻으로는 춤추는 소매가 나부끼는 모양, 즉 현대 국어의 바스락에 해당하는 뜻이 있다.

2. 생애

삼국사기》에서는 제3대 유리 이사금의 둘째 아들 혹은 《삼국사기》의 주석에 유리 이사금의 동생인 나로(柰老)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왕비는 허루(許婁) 갈문왕의 딸인 사성부인(史省夫人) 김씨이다. 《삼국유사》에서는 사초부인(史肖夫人)이라고 했는데 자형이 비슷해서 둘 중 하나가 다른 쪽으로 와전된 것이 확실시된다.

앞서 유리 이사금은 유언으로 자신의 두 아들보다도 남해 차차웅(제2대)의 사위이자 자신에게는 매제가 되는 석탈해가 재능이 있다고 해서 왕위는 일단 탈해 이사금(제4대)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탈해는 석씨라도 일단 박씨의 사위로서 즉위한 것이기 때문에[5] 탈해 다음은 다시 원래대로 박씨가 즉위할 차례여서 유리 이사금의 장남 일성(逸聖)이 즉위하게 되어 있었으나 《삼국사기》에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일성이 비록 적자지만 위엄과 총명이 파사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여 마침내 차남 파사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라고 언급되어 있는 걸로 보아[6] 파사와 일성 사이에 권력 다툼이 있었던 걸로 보인다.

결국 일성은 먼 훗날에 제7대 국왕 일성 이사금이 되지만 그가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일본서기》 등에 언급되는 신라의 아메노히보코 왕자가 일성 이사금이 아닌가 하는 설이 있다. 아메노히보코는 기록에서 자신은 신라의 왕자인데 남동생에게 왕위를 넘기고 왜로 이주했다고 하는데 신라 왕사 전체를 봐도 이 말과 정확히 일치하는 사람이 일성 이사금뿐이며 젊은 시절 행적이 아예 기록에 없기 때문이다. 아메노히보코는 많은 신라 도래인 씨족의 시조로 전해지기에 신라 도래인 내에서의 위상이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이며[7] 전설에서 상당한 세력을 거느리고 있던 걸로 나오기에 아메노히보코가 일성이 맞을 경우 일성은 왕위계승에서 밀려난 뒤 자기 세력을 이끌고 왜로 이주한 것으로 추측된다.[8]

파사 이사금 왕후의 성씨로 김씨가 처음 등장하는데 이는 당시 김알지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는 것을 암시한다.[9] 다만 파사-지마 시절 김씨 왕후는 한기부 갈문왕가 출신인데, 한기부 갈문왕가는 구도-미추-내물에서 이어지는 김씨 왕조와는 다소 상이한 가계로 추정된다. 신라시대 건설한 금석문에 '태조 성한왕'이 김씨 왕조의 시조라 명시한 것과 달리, 고려 중기에는 성한왕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김알지의 전승만 남은 걸 고려하면 한기부 김씨는 아예 성한왕이 아니라 성한왕 아버지 대에 갈라진 일족일 수도 있다.

파사 이사금의 정치력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서기 81년 왕위에 오르자마자 시조묘(나정)에 제사를 지낸 뒤 국내를 순행하며 백성을 구제하고, 사형수가 아닌 죄수들은 모두 용서해주는 대대적인 사면을 실행했다. 82년 각지의 관리들에게 농사와 양잠[10]을 장려하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라는 명을 내렸다. 87년 재차 성과 보루를 수비해 백제와 가야의 침공에 대비하고, 가소성(加召城)과 마두성(馬頭城)을 새로 지었는데 이 기록은 경주 지역을 벗어난 첫 축성 기록이다. 90년 10인을 파견해 주군의 관리를 감독하게 하고, 93년 고소부리군(古所夫里郡)에 직접 행차하여 나이많은 백성을 위문하며 곡식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노동력 확충을 통해 농업 생산력을 증강시키고 이를 기반으로 한 군사력 증강을 꾀하였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파사 이사금은 군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다.

85년 백제의 침입과 94년 가야의 침입을 격퇴했고, 84년 고타야국이 조공했다고 되어 있다. 조공받은 진한 거수국이 있었다고 직접 지배화 진도가 늦었을 거라는 추측이 있으나, 백제 또한 처음에는 경기도 일대만 직접 지배화한 다음 목지국과 본격적으로 전면전을 벌이기 전엔 충남 남부와 이와 같은 관계였다. 신라도 가장 가까운 부분은 직접 지배화한 반면 그보다 약간 먼 거수국들은 백제가 그랬듯 일단은 간접 지배화 단계부터 거쳤을 개연성이 높다. 고구려 또한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발전한 게 규명되어 있다. 96년 가야가 침입해왔을 때는 오히려 역관광시켜 97년 화친을 받아냈다.

이후 신라는 맹주로서 본격적으로 각국 분쟁 해결을 주선하거나 말 안 듣는 국가를 공격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로국이 실은 이 시기부터 진한의 맹주 아니었을까 하는 의견이 있으나, 진한 일대에서 딱히 사로국보다 발전이 앞서는 거수국들은 고고학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충주 금릉동 일대에 소재한 삼한 거수국이 진한 맹주국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한때 있었으나, 충주 금릉동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들은 전형적인 마한계라 현재로선 사로국 외에 맹주국이었을 다른 진한 거수국은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다. 다만 금릉동 마한 소국이 4세기 백제에게 멸망당해 김씨 족단이 된 것이 확인되는데, 석씨 족단과 김씨 족단이 일부러 사로국으로 찾아와 망명했을 정도면 사로국 자체가 혁거세가 등극한 초반부터 다른 곳보다 실력이 우월했거나 형식적 맹주로서 이름이 더 알려져 있었을 개연성은 있다.

여기서 김해 금관국수로왕이 나온다. 음즙벌국(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과 실직국(지금의 강원도 삼척시) 사이에 영토 분쟁이 일어났는데 두 나라는 먼저 파사 이사금에게 와서 중재해 달라고 청했지만 일단 파사 이사금은 나이가 많고 지식도 많은 김해 수로왕에게 묻자고 떠넘겼다. 왜 수로왕에게 떠넘긴 건지는 불명이나, 수로왕이 금관국을 건국하고 고속성장한 것은 고고학적으로도 확인되고 수로왕이 적게 잡아도 파사의 아버지뻘이라는 걸 감안하면[11] 수로왕이 영토 분쟁을 조정하는데 있어 강국으로 성장하던 금관국의 건국자이자 고령의 왕인 수로왕이 파사 이사금보다 이름값이 높았던 건 사실이고 수로왕과 탈해와의 악연을 감안하면 일종의 화해표시였을 수도 있다.[12]

파사 이사금의 요청을 받은 수로왕은 신라 서라벌에 방문하여 파사 이사금이 맡은 영토 문제를 대신 지혜롭게 해결해 음즙벌국의 손을 들어줬다고 한다. 그렇게 잘 끝나는 줄 알았지만, 이후 열린 연회에서 신라 6부 중 한기부의 대접이 시원치 않았다. 신라 6부의 다른 부는 이찬[13](장관급)으로 수로왕에 대한 의전을 행했는데 한기부는 수로왕을 하찮게 보고 낮은 등급의 인사를 의전이랍시고 보냈기 때문이다. 이건 신라가 맞을 짓한 게 맞다. 파사 이사금이 수로왕한테 분쟁 해결을 떠밀고 신라로 초청했으면 외국 국왕에 걸맞은 의전 대우를 해야 했다. 쉽게 말해 옆 나라 대통령이 분쟁 해결을 위해 한 나라에 방문했는데 방문한 나라에서 만찬장에 각 부 장관급이 아닌 5급 사무관을 의전이랍시고 들이밀면 회담장이 개판나지 않겠는가?[14] 참고로 한기부는 당시 김씨 족단의 거주지로 추정되므로 범인이 김씨 족단일 가능성이 높다.(...)

한기부의 대우에 당연히 열이 받은 수로왕은 자객을 보내 한기부의 우두머리를 죽였는데 자객이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음즙벌국에 숨었고, 군주인 타추간(陀鄒干)이 자객을 보호했다. 이에 파사 이사금이 102년 음즙벌국에 침공해 타추간이 항복했고, 신라의 실력 행사에 겁을 먹은 삼척시(혹은 울진군, 태백시, 동해시)의 실직국과 경산시압독국이 잇따라 항복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정작 주범인 금관국은 아직 공격하지 못하고 화풀이나 했다고 볼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신라도 금관국을 치기에는 명분이 쫄렸는데, 먼저 수로왕을 경주로 초청한 게 파사 이사금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외국 국왕이 방문한다 그러면 파사 이사금이 신하들에게 명령해서 적절한 의전 조치를 했어야 하지만 파사 이사금은 의전 대접에 실패한 책임이 있었기에 수로왕을 공격하지 못한 것이다. 이때 그냥 항복한 실직국과 압독국은 완전하게 병합된 건 아니고 그냥 신라에 종속된 명목상 속국 정도로만 된 듯하며 싸워보지도 않고 허무하게 항복한 게 못내 아쉬웠는지 나중에 각자 신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다. 그러나 둘 다 참패했고 주민들은 모두 경주에 가까운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어 멸망했다.

6년 뒤에는 경상북도 내륙으로 진출해 다벌국(대구광역시), 비지국(창녕군), 초팔국(합천군)까지 공격해 병합했다. 북으로는 반파국(후의 대가야), 남으로는 안라국(후의 아라가야) 등이 있는 요충지인 이 지역은 이후 신라가 가야 계열 국가들과의 본격적인 힘싸움을 위해 교두보로써 점령한 듯하다. 105년 백제와 화친하고 106년 가야를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아들로 지마 이사금이 있다. 《삼국사기》 <박제상 열전>에 따르면 아도 갈문왕이 파사 이사금의 3세손(손자)이라고 한다.

2.1. 파사 이사금 시기 연대조정 문제

사실 이와 같은 삼국사기 상 기년들은 고고학적 기년 및 중국측 역사기록과 부합되지 않아 신뢰할 수 없다는 게 중론이다. 백제는 그 시기엔 아예 각기 경기도에 나타나기도 전이고 가야 또한 어떤 유의미한 세력으로 규합되기도 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파사 이사금의 주요 치적 중 하나인 월성은 2020년 이전엔 고고학적으로 최초 축조 시기가 최대 상한이 겨우 3세기였고, 2021년 서쪽 성벽 조사 때 4세기 중반에 건립된 걸로 드러났다.[15] 4세기 중반이라면 백제가 목지국의 저항을 무력화하고 충북을 완전히 장악한 다음 경북까지 타 넘어 들어올 상황이 되고, 가야 역시 그 시기엔 고고학적으로 상당히 강성한 세력을 과시하기에 이와 같은 삼국사기상 기사들이 크게 신뢰를 획득하게 되는 상황이다.

따라서 상기 2020년대 최신 고고학 성과로 미루어보건대 파사 이사금이 실존한 연대는 삼국사기상 연대와는 달리 4세기 이전(더 정확히는 3세기 이후)[16]로 유력하게 추정된다. 신라사 전공 강종훈 교수를 비롯한 문헌사학계에서는 이미 2000년대부터 삼국사기 기록상 계보와 세대 연구를 근거로 파사 이사금의 재위 기년 수정론을 제시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추측이 고고학적 성과로 확증된 것이다.

3. 기타

  • 2019년 치러진 각종 공무원 시험에서 파사 이사금이 언급된 보기가 두 번이나 나왔다.(2019 기상직, 계리직). 두 시험에서 모두 수험생을 혼란하게 할만한 보기의 역할을 맡았다.
  • 신라의 초기 왕들은 역사 공부에서 크게 중요하진 않지만 공무원 시험같은 지엽적 문제에서 파사 이사금의 업적이 출제된 적이 있다. 2019 계리직 한국사 문제에서 가장 어려웠던 4번 문제 실직국과 압독국을 정복하였다. 이 선지 때문에 정답률이 가장 낮았다. 7급에서도 잘 언급을 안한 1세기 사건을 찾는 게 관건으로 나머지 선지도 4번(상복법, 지증왕)을 제외하면 지엽적 문제가 출제되었다.

4. 파사이사금 대의 인물

  • 길원
  • 보제
  • 사성부인
  • 윤량
  • 장세
  • 계기
  • 명선

5.삼국사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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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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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파사 이사금 본기>

一年秋九月 파사 이사금이 즉위하다
二年春二月 시조묘에 제사지내다
二年春三月 진휼을 베풀고 사면을 단행하다
三年春一月 농사를 권장하고 군사를 단련시키다
五年春二月 명선을 이찬으로 삼고 윤량을 파진찬으로 삼다
五年夏五月 풍년이 크게 들다
六年春一月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다
六年春二月 길원을 아찬으로 삼다
六年夏四月 객성이 자미에 들어가다
八年秋七月 성루를 수리하고, 가소성과 마두성을 쌓다
十一年秋七月 공적인 일과 전야 개척에 힘쓰지 않는 주주·군주를 내치다
十四年春一月 윤량을 이찬으로 삼고 계기를 파진찬으로 삼다
十四年春二月 고소부리군에 순행하다
十四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十五年春二月 마두성에서 가야군을 격퇴하다
十五年秋八月 알천에서 열병을 하다
十七年秋七月 금성 남쪽의 나무가 바람에 뽑히다
十七年秋九月 가야의 습격을 격퇴하다
十八年春一月 가야를 정벌하려다가 중지하다
十九年夏四月 가뭄이 들다
二十一年秋七月 우박이 내리다
二十一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二十二年春二月 경주 월성을 쌓다
二十二年秋七月 왕이 경주 월성으로 거처를 옮기다
二十三年秋八月 실직곡국압독국이 항복해 오다
二十三年冬十月 겨울에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다
二十五年春一月 운석이 비처럼 쏟아지다
二十五年秋七月 실직의 반란을 평정하다
二十六年春一月 백제가 화해를 청하다
二十六年春二月 눈이 3척이나 내리다
二十七年春一月 압독에 행차해 진휼하다
二十七年春三月 왕이 압독으로부터 돌아오다
二十七年秋八月 마두 성주가 가야를 정벌하다
二十九年夏五月 각 지를 진휼하고 여러 나라를 병합하다
三十年秋七月 메뚜기 피해를 막기 위해 제사지내다
三十二年夏四月 성문이 저절로 무너지다
三十二年夏五月 비가 오지 않다
三十三年冬十月 왕이 죽다

38 항목으로 기록이 꽤 많이 남아있는 편이다. 특히 비슷한 시기의 백제 왕들과 비교해보면 더욱 그렇고 전대나 후대와 비교해봐도 압도적인 양을 자랑한다,

6. 참고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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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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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추측할 뿐이다. 형인 일성 이사금의 생년이 불분명하므로 이도 추측이다.[2] 《삼국유사》에서 김알지로부터 태자 자리를 물려받았다는 기록이 있다.[3]일본서기》에서만 등장. 천일창의 동생으로써 국왕에 올랐다고 하며, 초창기 박씨 왕실에서 차남으로서 즉위한 사람은 파사 이사금 밖에 없다.[4] 일본 측 기록에 한자가 다른 '파사'(波沙)로 기록되어 있는 것도 음차다. 한자의 뜻보다는 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5] 왕의 성씨가 바뀌는 다른 사례인 후대의 미추 이사금(제13대) 김미추, 신덕왕(제53대) 박경휘도 일단 사위로서 왕위에 오른 것이다.[6] 이 때문에 일성과 파사가 이복형제였다는 설이 있다. 그래서 유리 이사금에게 다른 왕비나 후궁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정사에 일성과 파사의 어머니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 등의 이유로 역사학계에서는 가능성이 높다고 보지 않는다.[7] 심지어 신화적 존재인 진구 황후의 계보에서도 언급된다.[8] 다만 사서에서 일성이 파사-지마 이후 신라 왕이 되었다는 사서의 기록을 고려하면 일성 본인이 왜로 갔다가 훗날 귀국했거나, 일성의 아버지가 파사의 형이고 일성의 아버지가 왜로 갔지만 일성이 남아 신라의 왕이 되었을 수는 있다.[9] 신라시대 금석문에 따르면 김씨 족단의 태조는 성한왕인데 성한왕의 정체는 지금도 논란이다. 알지라고도 하고 족보에 나오는 알지의 아들 세한(勢漢)이라고도 하고 최초의 김씨 이사금인 미추 이사금이라고도 한다.[10] 누에를 길러 비단을 생산하는 일[11] 가락국기에 따르면 파사의 고모부인 탈해 이사금이 신라로 오기 전에 수로왕의 왕위를 뺏으려다 수로왕에게 역관광당하고 신라로 도망쳤다고 한다. 탈해가 남해 차차웅 대부터 실권을 장악한 걸 고려하면 수로왕이 나이가 많았던 건 사실로 보인다.[12] 여담으로 수로왕은 파사의 아들인 지마 이사금의 대에도 살아있던 게 확인되는데, 수로왕이 157세까지 살았다는 건 기년 오류가 확실하지만 수로왕이 상당히 장수한 것 자체는 사실로 보인다.[13] 당시 신라 최고위 관등. 파사 이사금 대에는 이벌찬이 없었다.[14] 독소 불가침조약모스크바를 방문한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장관급이었는데, 소련 최고 권력자인 스탈린이 직접 맞았다. 파사 이사금 입장에서 국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외국 국왕을 초청했으면 의전 대접은 나쁘지 않게 했어야 했다.[15] 관련 기사[16] 삼국사기 파사 이사금 23년조에 금관국의 시조 수로왕이 등장하는데, 금관국의 왕릉군으로 추정되는 대성동 고분군의 초축 시기가 기원후 3세기이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