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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자 샤 팔라비 |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 |||
사파비 왕조 · 아프샤르 왕조 · 잔드 왕조 · 카자르 왕조 · 이란 라흐바르 · 이란 대통령 | }}}}}}}}}}}} |
<colbgcolor=#239f40><colcolor=#fff> 이란 제국 팔라비 왕조 제2대 샤한샤 모하마드 레자 샤 팔라비 محمدرضا شاه پهلوی | Mohammad Reza Pahlavi | ||||
출생 | <colbgcolor=#ffffff,#191919>1919년 10월 26일 | |||
이란 숭고국 테헤란 | ||||
사망 | 1980년 7월 27일 (향년 60세) | |||
이집트 카이로 | ||||
재임기간 | 이란 제국 샤한샤 | |||
1941년 9월 16일 ~ 1979년 2월 11일[1]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6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DB0000><colcolor=#fff> 황명 | 모하마드 레자 샤 (محمدرضا شاه) | ||
신장 | 178cm[2] | |||
아버지 | 레자 샤 팔라비 | |||
어머니 | 님타즈 카눔(생모) | |||
배우자 | 파우지아 빈트 푸아드(1939년 결혼, 1948년 이혼) 소라야 에스판디아리-바흐티아리 (1951년 결혼, 1958년 이혼) 파라 디바(1959년 결혼) | |||
자녀 | 슬하 2남 3녀 장녀 샤나즈(1940년생) 장남 레자 팔라비(1960년생) 차녀 파라나즈(1963년생) 차남 알리 레자(1966 ~ 2011) 삼녀 레일라(1970 ~ 2001) | |||
종교 | 시아파 이슬람 (세속주의) | |||
정당 | 부활당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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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
2. 생애
2.1. 어린 시절
1919년 이란(페르시아)의 수도인 테헤란에서 카자르 왕조의 군인이던 레자 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5년 수상이였던 아버지가 카자르 왕조를 쿠데타로 뒤엎고 레자 샤로 즉위하면서 팔라비 왕조를 열었고, 이후 자신도 황태자가 되었다.팔라비는 1930년 스위스로 유학을 떠나 당시 유럽의 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던 불어권 사립 기숙학교 르 로제에서 공부하게 된다. 유학 시절 그는 수행원들과 함께 프랑스를 포함한 여러 유럽 국가들을 오가며 선진화된 서구 사회를 몸소 체험했고, 이러한 어린 시절의 경험은 그로 하여금 후일 자신이 추진할 급진적 서구화의 사상적 근간인 모종의 탈아입구적 사상에 눈을 뜨게 했다.[4] 이후 1936년 이란으로 귀국하여 테헤란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 소위로 임관한 팔라비는 사다바드 조약의 체결 직후 서아시아 이슬람권의 단합이라는 명분 아래 이집트 왕 푸아드 1세의 장녀 파우지아 빈트 푸아드 공주와 정혼한다. 이들은 1939년 봄 결혼하여 이듬해 가을 외동딸인 샤나즈 공주를 보았다.
한편 황태자의 아버지인 레자 샤 팔라비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을 위시한 연합국을 노골적으로 경계하여 이란 국내의 독일인을 추방하라는 요구와 연합국의 철도 사용 허가 요구를 모두 거절해 버리는 실책을 저지르게 된다. 1941년 9월 17일, 영국과 소련은 페르시아의 자원과 교통로 확보를 위해 이란 제국을 침공하는데, 이 사건이 바로 페르시아 침공이다. 당시 신생이나 다름없던 이란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5], 레자 샤로부터 중재를 요청받은 루즈벨트 대통령마저 그를 거부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레자 샤는 급하게 퇴위하여 당시 영국령이었던 모리셔스로 망명을[6] 떠났으며, 황태자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새롭게 제위에 오르게 된다.
2.2. 재위 초반
1941년 9월 17일 즉위식을 치르고 정식으로 이란의 왕위에 오른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는 원로 정치인인 모하마드 알리 포루히를 수상으로 임명하고 아버지 시대의 철권통치에 숙청된 인사들을 복권, 머리쓰개 착용 금지 조치를 완화하는 등 유화책을 펼쳤다. 포루히의 조율을 통해 큰 차질 없이 선대의 권력을 승계받은 그였지만, 바로 머리 위에 들어앉은 소련과 그 후원을 등에 업은 아제르바이잔, 쿠르디스탄의 공산당 계열 분리주의자들은 종전 이후에도 여전히 큰 위협으로 남아있었다.그러던 1946년 6월, 그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이란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 육군이 국공내전 지원을 빌미로 철수했다. 샤는 이 기회를 틈타 이란령 남부 아제르바이잔 타브리즈 지역에 웅거하고 있던 소련의 괴뢰국 아제르바이잔 인민정부를 소탕했고, 대중의 지지와 서방의 신임 모두를 얻게 된다. 한편 1945년 무렵은 그의 개인사에서 썩 좋지 않은 시기이기도 했는데, 아내 파우지아 왕후가 이란 궁정에서의 생활과 모하마드 레자 본인의 냉대를 이기지 못하고 고국 이집트로 출국, 이혼 선언을 했기 때문이었다.
1950년, 총선거를 통해 온건 사회민주주의자 모하마드 모사데크가 총리로 선출되었다. 모사데크는 취임 직후 이란의 석유를 국유화하기로 결정했고, 당시 이란의 지하자원을 쥐락펴락하는 실세였던 앵글로-페르시안 석유회사를 폐쇄시켰다. 영국은 서아시아에서 자국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 한 축이자 재정수입의 큰 원천이었던 회사가 축출된 이 조치에 크게 반발했으며, 반공을 빌미로 미국에 협조를 요청한다. 그러나 트루먼 행정부 당시 미국 정계의 이란과 모사데크 내각에 대한 주된 입장은 '자원 침탈의 피해자와 그에서 탈피하기 위한 움직임'이었기 때문에 영국의 제안은 무시될 수 있었다.
그러던 1952년, 공화당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정권이 교체되자 미국의 대이란 정책도 급변하기 시작했다. 공화당 행정부는 이란 왕정의 전복 가능성과 소련의 개입에 대해 염려하기 시작했고, 영국과 모사데크 축출 계획을 재논의하는 데 이른다. 1953년 7월, 이란을 방문한 CIA 공작원 커밋 루즈벨트 주니어는 샤와 비밀리에 만남을 갖고 미국과 영국의 모사데크 축출 계획에 대해 보고, 샤의 재가를 받아내기에 이른다.[7] 샤가 가장 사랑했던 부인 소라야 왕후의 회고에 따르면 샤는 모사데크의 집권기간 내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무척 괴로워했다고 하는데, 자기주관이 뚜렷하고 정세를 읽는 나름의 시각이 잘 잡혀있던 그가 전형적인 입헌군주국의 국왕이 되는 것에 느꼈을 회의감도 쿠데타의 촉발에 한 몫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53년 8월 16일, MI6와 CIA의 지원을 등에 업은 파즈롤라 자헤디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키며 모사데크 내각은 실각한다.
2.3. '백색혁명'의 추진
팔라비는 1960년대부터는 이른바 백색혁명을 통해 이란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광범위한 형태의 개혁을 시도했다. 일본의 경제성장에 주목하여, 1963년부터 석유를 팔면서 획득한 외화와 미국에 의한 경제원조를 기반으로 '백색혁명'에 착수했는데, 팔라비는 토지개혁과 국영기업의 민영화, 노사문제 해결, 여성 참정권의 확립과 아동결혼 금지, 교육개혁, 농촌개발, 문맹 퇴치로 이란의 근대화를 추진했으며, 친미노선을 추구하면서 서방세계의 자본이 이란에 투자하게 만들려고했다. 실제로 팔라비는 예전부터 영어와 프랑스어를 배워놓아서 외교에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또한 팔라비는 1960년대에 비밀경찰인 사바크(SAVAK)를 이용해서 반체제 운동을 탄압하며 권위주의 독재체제를 구축하는 한편 개발독재에 나섰다.특히 팔라비는 미국과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때 이란은 미국의 중요한 동맹국이었다. 실제로 미국은 1970년대 중반에 다른 동맹국들에게는 팔지 않던 당시 최신예 전투기인 F-14를 이란에 제공했으며 당시 최신예 여객기인 보잉 747SP 여객기도 이란항공에 판매하는 등 이란과 밀접한 동맹관계를 유지했다.[8] 또한 미국과 친한 관계로 자연히 미국의 우방이며 반공 국가인 대한민국과도 밀접한 관계가 되었고, 당시 한국-이란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다.[9] 테헤란로도 이 시기에 생긴 거리명이다. 이스라엘과도 우호적인 관계라서 이란과 이스라엘은 서로 많은 교류를 했을 정도로 친밀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한 다른 아랍 국가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사우디와는 팔라비와 사우디 국왕이 서로 친서를 주고받을 정도로 우호적인 관계였다.
1967년 10월 26일에 대관식을 치렀고[10] 1971년 10월 12~16일에는 공식 추산으로만 1700만 달러를 들여[11] 키루스 대제의 아케메네스 왕조 때부터 따진 이란 군주제 2,500주년을 기념하는 이벤트를 열기도 했으며,[12][13][14] 1974년에는 아시안 게임을 개최하기도 했다.
한편 모사데크 실각 후에는 샤를 지지하는 두 정당 신이란당(حزب ایران نوین, Novin)[15]과 인민당(حزب مردم, Mardom)[16]만 남겨놓았으며, 이마저도 통치를 수월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1975년에 부활당(حزب رستاخیز ملت ایران, Rastakhiz)으로 통합시켰다.
2.4. 몰락
그러나 세속적 무슬림이었던 팔라비는 이란의 시아파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노동계급, 특히 이란의 전통적 상인 계급인 '바자리'들의 지지를 서서히 잃게 되었다. 게다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한 것도 많은 사람들의 반발이 심해졌으며[17], 황실과 그 측근들이 부정부패를 일삼아서 그에 대한 불만들이 가득한 상황이 되었다. 이란의 공산주의 정당인 민중당[18]의 활동을 금지시켰으며, 자신의 정보기관이였던 SAVAK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당하거나 심각한 인권침해를 겪었는데 1978년 당시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잡혀온 이란의 정치범의 숫자가 최소 2,200명이었다고 하며 이 정치범 숫자들은 팔라비의 개혁이라는 '백색혁명'이 진행될수록 계속해서 증가했다. 특히 팔라비는 히잡 착용의 금지[19] 및 사원의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하는 등 이슬람의 세속화 정책을 실시했는데, 이는 되려 도시에 슬럼가가 형성되는 결과를 불렀고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같은 이슬람 율법자들의 거센 반발을 초래하게 되었다.이러한 팔라비의 폭압정치와 부정부패, 백성 대부분은 가난하게 살고 있는데 위에서는 상술한 1971년 행사에서 보이는 것처럼 호화롭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안 것에 대한 분노, 그리고 여러 정책들로 인해 이란의 이슬람 근본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은 팔라비를 지지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이란에서는 심각한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편 호메이니는 이슬람 세속화 정책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반체제 운동가로 찍혀서 이란에서 추방되어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오히려 이란 국내의 반체제 인사들이 크게 반발하는 원인이 되었다.
냉전 하에 석유에서 얻은 돈을 바탕으로 근대화 추진정책을 펴던 이란은 오일 쇼크로 막대한 돈을 벌여들였고, 1인당 국민소득도 급속히 올라갔지만 오일쇼크로 얻은 돈은 골고루 배분되지 않아 빈부격차를 확대시켰고 계층간 위화감도 심해졌다. 또한 타 걸프 국가도 빈부격차는 심하기는 했지만 각 가정마다 가정부를 한둘씩은 기본적으로 두고 노동력을 대대적으로 수입하기까지 할 정도로 매우 부유해졌지만 이란은 타 걸프만 국가와는 다르게 이미 인구가 3천만에 달했기에 이란의 서민들은 이러한 혜택을 누릴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란의 산업 부문은 갑자기 늘어난 소비력을 감당하기에 부족했고 수입품들이 이란 시장을 휩쓸면서 산업 경쟁력은 크게 악화되었는데 이를 메꾸려고 통화량을 증가시켰지만 이러한 통화량 증가는 물가상승으로 이어지면서 중소상인들과 농민들이 몰락하여 팔라비의 입지는 좁아져 갔다. 팔라비가 미국을 방패로 개발독재정책을 펴는 것에 염증을 느낀 이슬람 운동권은 반체제운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여기에 소련의 지원을 받는 이란 공산당도 합세하면서 사태는 악화되어 간다.
그렇게 1978년 초부터 학생들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팔라비에 반대하는 시위가 시작되었는데, 암에 걸려 투병 생활을 하고 있었던 상황에도 샤는 테헤란 시내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이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하지만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 갔고 군대마저 등을 돌리게 되자 결국 팔라비는 "나는 지쳤다."라는 말과 함께 1979년 1월 16일 휴가라는 명목하에 전용 보잉 727기에 황후와 가족들, 측근들을 태우고 이집트로 망명했다.
그가 망명하고 난 이후 샤푸르 바크티아르 총리[20]가 섭정 체제로 국정을 운영하였으나 호메이니가 1979년 2월 1일, 15년만에 귀국한 뒤 10여일간의 격전을 거쳐 완전히 제압당했다. 호메이니는 바로 이슬람 혁명평의회를 조직한 뒤 메흐디 바르자간을 총리로 임명했고 (형식적인) 국민투표를 거쳐 이슬람 공화국을 선포했다. 망명중이던 팔라비는 이후 암 치료를 위해 황후와 함께 미국으로 갔지만 팔라비의 미국 입국에 반발한 이란 대학생들이 1979년 11월 4일에 테헤란의 미 대사관을 점거하고 팔라비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으나, 미국은 거부한다. 이 사건으로 미국과 이란과의 관계는 극도록 악화되었다.
이후 팔라비는 이집트에서 잠시 머물다가[21] 모로코[22], 미국[23], 멕시코[24], 파나마[25], 바하마 등을 떠돌다가 다시 이집트로 돌아왔고[26] 얼마 되지 않아 말 그대로 객사했다. 장례식은 사다트에 의해 특별히 국장으로 치러졌고 사다트도 직접 참석하여 애도했지만, 재위 시절 그가 믿던 서방에서는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이 개인 자격으로 참석한 것 외에는 참석한 사람이 없다시피했다고 한다.[27]
1952년 이집트 군주정이 폐지되었을 때 이집트의 실질적 마지막 왕이었던 파루크 1세[28]가 망명을 요청하자 거부한 바가 있다.[29] 이에 파루크 1세는 "너라고 황위를 영원히 지킬 줄 아느냐?"라고 비아냥거리며 유럽으로 망명했는데, 본인도 똑같은 꼴을 당한 걸 넘어 이집트로 망명을 갔으니 참 세상만사 새옹지마다.
3. 가정사
3.1.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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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공주 파우지아 |
- 파우지아 빈트 푸아드(1921년 11월 5일~2013년 7월 2일)
첫번째 부인인 이집트의 파우지아 공주는 이집트 왕국 초대 국왕 푸아드 1세의 장녀로, 모하마드 레자 샤와는 1938년 약혼하여 1939년 3월 15일 이집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는 신분 상 이집트의 공주였으나 부계에서 알바니아와 프랑스, 모계에서 체르케스인의 혈통을 이어받아 매우 서구적인 외모를 갖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궁정에서 서구식 교육을 받고 자란 그녀는 일찍이 외국어와 서양식 예의범절을 익혔으며, 장성한 뒤에는 비비안 리를 연상케 하는 뛰어난 미모로 자국 뿐만이 아니라 유럽과 미국에까지 이름을 알렸다. 샤와의 결혼 후 이란에 정착해 황태자비, 황후의 직위를 거치며 결혼 1년 만에 딸 샤나즈 공주를 낳는 등 순탄한 삶을 사는 듯 보였으나, 남편의 냉대와 외도, 시어머니인 태후의 혹독한 시집살이를 견디지 못하고 1945년 고국인 이집트로 귀환, 이혼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이후 모하마드 레자 샤는 지속적으로 파우지아에게 이란으로 돌아올 것을 요구했으나, 3년 뒤인 1948년 결국 이혼에 합의한다. 파우지아는 1949년 이집트 해군 장교인 이스마일 시린과 재혼하여 1남 1녀를 두었고, 왕정 폐지 이후로도 쭉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다 2013년 9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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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야 에스판디아리-바흐티아리 |
- 소라야 에스판디아리-바흐티아리(1932년 6월 22일~2001년 10월 25일)
두번째 부인인 소라야 에스판디아리-바흐티아리 황후는 주서독 이란 대사였던 할릴 에스판디아리-바흐티아리의 장녀로, 이란 중부 쿠제스탄과 이스파한 일대의 귀족가인 바흐티아리 가문 출신이었다. 1932년 이스파한에서 독일 혼혈 이란인으로 태어난 그녀는 2차대전 기간 동안 잠시 귀국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줄곧 독일과 스위스에서 독일식 교육을 받으며 자랐으며, 이란과 이란 문화에는 상당히 익숙치 않았다고 한다. 1948년 친척의 주선에 의해 샤와 처음 만난 그녀는 19살이 된 1951년 2월 12일 테헤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소라야는 소피아 로렌을 연상케 하는 수려한 미모의 소유자로, 독일어, 프랑스어 등 외국어에 능통해 샤의 서독 순방 때 통역을 맡기도 했다. 남편인 모하마드 레자 샤 또한 그녀를 매우 사랑하여 정신적으로 많이 의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소라야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못했는데, 첫번째 이유는 혹독한 시집살이[30]였고, 두번째는 불임 문제였다. 1954년 미국 순방에서 샤와 소라야 부부는 비밀리에 뉴욕의 유명 불임 클리닉을 방문했는데, 소라야는 이곳에서 22살의 나이로 불임 진단을 받게 된다. 부부는 그 후로도 결혼 생활을 이어갔지만 후계자의 부재라는 큰 문제는 결국 7년 만의 이혼으로 이어졌다. 이혼과 함께 거액의 위자료를 받으며 다시 부모님이 있는 독일로 떠난 그녀는 이후 재혼하지 않고 파리에 정착해 파리 사교계의 명사가 되었고, 60년대에는 잠시 영화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소라야는 제정의 붕괴 이후로도 줄곧 파리에서 살다 2001년 6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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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 디바 팔라비 |
3.2.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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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나즈 팔라비 |
- 샤나즈 팔라비(1940년 10월 27일~)
샤와 이집트의 파우지아 사이의 외동딸. 부모의 이혼 이후에는 샤의 유일한 자녀로 고모인 샴스 공주의 지도 아래 테헤란의 궁정에서 길러졌다. 청소년기에는 아버지처럼 벨기에와 스위스, 미국에서 학교생활을 했으며, 1957년 17세의 나이로 13살 연상의 외교관인 아르다시르 자헤디[31]와 결혼했다. 당초 샤의 계획은 샤나즈를 이라크 왕국의 파이살 2세와 정략결혼시키는 것이었으나, 샤나즈 본인의 반발로 불발되었다. 공주는 자헤디와의 사이에서 딸 마나즈를 두었으나 결혼 7년 만인 1964년 불화로 이혼했다. 24살의 어린 나이에 이혼한 샤나즈는 이혼 이후 이란 공군의 실력자이자 샤의 최측근 집안이었던 자한바니 가 출신의 호스로 자한바니와 교제했는데, 전형적인 히피였던 그의 영향을 받아 수년 간 마약 중독에 빠졌다. 둘은 아버지인 모하마드 레자 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71년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다. 2024년 현재 84세인 그녀는 현재 스위스 시민권을 얻어 스위스에 거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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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자 팔라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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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나즈 팔라비 |
- 파라나즈 팔라비(1963년 3월 12일~)
샤와 파라 황후 사이의 장녀. 제정의 붕괴 이전까지 재혼 이후 스위스에 정착한 이복 언니 샤나즈 공주를 대신하여 사실상 황가의 장녀 노릇을 했다. 망명과 미국 정착 이후에는 베닝턴 칼리지와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현재는 망명 황실의 자선사업에 종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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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 레자 팔라비 |
- 알리 레자 팔라비(1966년 4월 28일~2011년 1월 4일)
샤와 파라 황후 사이의 차남. 이란 혁명의 발발과 함께 13살의 나이로 망명을 떠나 이후 미국에서 공부했다. 생전 직업은 중동사학자로, 프린스턴 대학교와 컬럼비아 대학교를 졸업한 뒤 하버드 대학교 산하 이란학 연구소에서 고대 페르시아 문명사를 연구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 겪은 냉혹한 망명 생활과 여동생 레일라 공주의 때이른 죽음 때문인지 그 또한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고, 2011년 보스턴의 자택에서 권총자살했다. 향년 44세. 자녀로는 사후 6개월 뒤 태어난 외동딸 이리아나 레일라 팔라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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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일라 팔라비 |
- 레일라 팔라비(1970년 3월 27일~2001년 6월 10일)
샤와 파라 황후 사이의 차녀. 황제 일가의 막내딸로 이란 국민의 가장 큰 관심과 사랑을 받은 공주이다. 9살인 1979년 이란 혁명의 발발로 가족들과 함께 고국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으며, 미국, 바하마, 이집트, 멕시코 등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 1981년 미국 코네티컷 주에 정착했다. 청소년기에는 형제들처럼 뉴욕의 기숙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이후 브라운 대학교에 진학해 영문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발렌티노의 패션쇼에 모델로 설 정도로 화려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으나 너무 이른 나이에 겪은 망명 생활과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후유증인지 평생 심각한 섭식장애와 우울증을 앓았다. 2001년 6월 10일 런던에 체류하던 도중 항우울제 과용으로 사망했다. 향년 31세.
4. 여담
팔라비 2세는 다양한 취미 생활을 즐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요트와 비행기 조종을 좋아했다. 이란 공군의 차기 전투기 도입에서는 스스로 후보기의 조종간을 잡고 시험비행을 하여, 최종적으로 F-14를 도입했다. 망명할 때도 직접 전용기 보잉 727을 조종하여 황후와 측근과 함께 망명했다.자동차 컬렉션을 좋아하여 이탈리아의 슈퍼카 람보르기니와 서독의 메르세데스 벤츠 600 등 고급차를 애용했다. 이 콜렉션은 이란 국립 자동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사진 보러가기
축구도 무척 좋아해서 당시 이란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을 불러다가 함께 공을 차기도 했다고... 당시 대표선수의 증언에 따르면 샤의 실력은 너무나 비범해서 드리블을 하면 수비수가 막을 수가 없었고, 슈팅은 골키퍼가 반응조차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장년의 팔라비가 청년 위주의 국가대표 전문 축구선수들보다 실력이 탁월했을 리가 없으니 군대 축구마냥 선수들이 알아서 접대게임을 했을 것이다.
- 예술품 컬렉션을 진두지휘한 팔라비 2세의 셋째 부인인 파라 팔라비와 앤디 워홀. 배경에는 워홀이 그린 파라의 초상화들이 있다. 현재 이 그림들은 테헤란 현대미술관 컬렉션에 포함되어 있으며, 아마도 이란의 신정 체제가 완전히 붕괴하기 이전에는 다시 전시되기 힘들것이다.
고흐나 르누아르, 마티스, 드가 같은 유명 화가들의 그림 및 조각 같은 예술작품도 마구 사모았다. 덕분에 그가 쫓겨날 때 테헤란 미술관에 남은 이 그림들을 호메이니 정권이 팔아치운다는 소문도 있어 해외 수집가들이 매의 눈으로 노리며 군침을 흘렸으나 팔긴커녕 미술관 지하에서 비공개로 보관하면서 되려 수집가들이나 미술 애호가들이 안타까워 하고 있다.[32] 이는 파라의 요청에 의해서였다고 하며, 결국 이 작품들을 소장할 "테헤란 현대미술관"(TMoCA, Tehran Museum of Contemporary Art)의 창립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 당시 미술관에서는 앤디 워홀, 마크 로스코, 잭슨 폴록과 같은 현대 팝 아티스트들의 작품들 약 300점을 사들였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기준으로 미국과 유럽을 제외하고는 전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현대미술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 다행히도(?) 이 컬렉션은 다른 작품과 교환된 한 점을 빼고는 전부 수장고에 고이 모셔져 있다고 하며, 현재 가치로 약 미화 30억 달러, 즉 2018년 기준 약 3조 3000억원(!)의 가치를 지녔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컬렉션 중에는 여성의 상반신 누드를 표현해 이란에서는 영원히 전시할 수 없는 르누아르의 "열린 블라우스의 가브리엘", 앤디 워홀이 그린 파라의 초상화 등 가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의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현 이란 정권이 작품들을 팔지 못한 이유는 이런 작품을 사줄 만한 곳은 미국이나 유럽의 이름높은 옥션뿐일텐데 미국이 이란 경제제재를 해제하지 않는 한 매각은 불가능할 것이다.
폴란드 사람들에게는 평가가 좋은 편. 2차 대전 당시 소련이 수용소에 가둬 둔 사람들을 이란에 있던 자유 폴란드군에게 인계한 일이 있었는데, 이들 난민들은 수용소의 극심한 환경으로 인해 기아와 질병을 앓고 있었다. 팔라비 2세는 이스파한에 난민 수용소를 지으며 적십자와 협력하여 난민 구휼에 매우 열성적으로 임했다. 사실 이 시기 이란도 나라만 안 빼앗겼지 폴란드와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았던 터라 어쩌면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의 자녀들 중 명목상의 샤는 그의 장남인 레자 팔라비 황태자가 계승하였는데, 이후 미국에서 팔라비 왕조 망명 정부를 수립해 이슬람 혁명으로 붕괴된 팔라비 왕조의 복고를 주장하고 있다.[33] 하지만 현실은 과거 팔라비 왕조 시절 이란과 사이가 좋았던 미국이나 서방 강국들에게서도 정치적, 군사적인 지원은커녕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는 중.
슬하의 5남매 중 2명이 요절했다. 막내딸 릴라(레일라) 공주는 1979년 사태 당시 고작 9살의 나이로 자신을 포함한 황족들에 분노하는 민중, 조국에서의 추방과 아버지의 때이른 죽음을 연이어 겪은 뒤 그 후유증으로 갖은 스트레스성 질환에 시달렸다고 한다. 심각한 수준의 섭식장애, 우울증과 만성 스트레스를 장기간 앓던 공주는 2001년 런던의 한 호텔 객실에서 약물 과다복용으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차남인 알리 레자 팔라비 황자 또한 같은 사유로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다 2011년 자택에서 권총자살했다.
파라 팔라비 황후는 현재 엄중한 보호 아래 황실 가족들이 살고 있는 프랑스와 미국을 오가며 자선과 장학, 집필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건축학부까지 수학하여 페르시아어, 프랑스어, 영어, 이탈리아어의 4개 언어를 구사하는 황후는 재임 시절 이란에서 여성 교육과 현대식 고등교육 확립, 각종 자선활동에 힘을 쓴 이력이 있다. 그녀는 2024년 기준 85세로 고령의 나이임에도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외 각종 매체를 통해 대중들과 활발히 소통하고 있는데, 신정체제에 불만이 많은 이란의 일반 대중들도 긍정적인 의견을 보내는 모양이다. 한국의 역사카페인 '세계의 왕실 이야기'에서 파라 황후에게 편지를 보내서 이에 답장을 해주기도 했다.
1967년 6월 서독에서는 팔레비 샤의 방문을 반대하는 대규모 반정부 집회가 발발했다. 이 과정에서 서독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한 대학생이 총에 맞고 사망했는데, 이것은 결국 서독에서 무장투쟁 단체인 바더 마인호프의 창설로 이어졌다.
팔라비의 통치와 자세한 내용과 평가 등은 팔라비 왕조 문서를 참고.
5. 한국과의 관계
팔라비와 한국과의 관계는 처음엔 악연으로 시작되었다. 이승만 정부 시절 팔라비는 동아시아 순방을 준비하는 과정에 미수교국이던 한국에 수교를 제안했으나 성질 더러운 이승만은 주일 이란 대사가 한국 대사를 겸임하게 하겠다는 이란의 제안에 상주 대사관 없이는 수교도 없다고 벌컥 화를 내면서 단칼에 제안을 거절해버렸고 이란은 이를 대단히 불쾌하게 여겼다. 박정희 집권 이후 외무부에서 주터키 대한민국 대사관을 통해서 다시 접촉하자 이란은 "그때 그놈들이네?"라는 식으로 고깝게 반응했으나 팔라비의 터키 방문에 맞춰서 당시 주터키 대사관 참사관인 홍성욱이 팔라비를 직접 예방해서 한국의 친구가 되어달라고 요청했고 팔라비가 긍정적으로 반응하면서 1962년에 결국 수교하게 된다. 초기에는 주터키 대사가 이란 대사를 겸직했는데 당시 터키에 근무하던 외교관들은 대체적으로 팔라비에 대해서 근대화에 힘을 쓴 명군으로 평가하면서 안타까워하고 있다.이동원 외무부 장관의 회고록에서 그와 만난 이야기가 있는데 영어와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쓰는 유럽 신사라고 평하고 있다. 만약 런던이나 파리 시내에서 만났으면 이란인인줄 몰랐을 거라고. 이동원 장관에게 팔라비가 이란의 발전상에 대해 한참을 자랑하자 약간 약이 오른 이동원 장관이 "폐하, 이란을 너무 발전시키면 이란 국민들이 폐하보고 물러나라고 하는 거 아닙니까?"라고 농담을 했는데 샤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침묵하더니 설마 그럴 일이 있겠냐면서도 국민들이 군주제에 반대할 정도로 발전한다면 그것 또한 좋은 일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참고로 동생 압둘 레자 팔레비는 사냥 매니아였는데, 1974년 북한으로 사냥 여행을 떠나 호랑이를 잡은 적이 있다. 시베리아호랑이 문서 참조.
6. 가족관계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파우지아 빈트 푸아드 이집트 공주 (Fawzia Fuad of Egypt, 1939년 결혼, 1948년 이혼) | ||||
1녀 | 샤나즈 팔라비 (Shahnaz Pahlavi) | 1940년 10월 27일 | 생존 ([age(1940-10-27)]세) | 호스로 자한바니/ 슬하 1남 2녀 |
소라야 에스판디아리-바크티아리 (Soraya Esfandiary-Bakhtiary, 1951년 결혼, 1958년 이혼) | ||||
파라 디바 (Farah Diba, 1959년 결혼) | ||||
1남 | 레자 팔라비 황태자 (Reza Pahlavi, Crown Prince of Iran) | 1960년 10월 31일 | 생존 ([age(1960-10-31)]세) | 야스민 에테마드아미니/ 슬하 3녀 |
2녀 | 파라나즈 팔라비 (Farahnaz Pahlavi) | 1963년 3월 12일 | 생존 ([age(1963-03-12)]세) | 미혼 |
2남 | 알리 레자 팔라비 (Ali Reza Pahlavi) | 1966년 4월 28일 | 2011년 1월 4일 | 라하 디데바르/ 슬하 1녀 |
3녀 | 릴라 팔라비 (Leila Pahlavi) | 1970년 3월 27일 | 2001년 6월 10일 | 미혼 |
[1] 실질적으로는 1월 16일까지.[2] #[3] 팔라비 왕조의 군주들 모두 카자르 왕조 시절 태어났고, 즉 팔라비 왕조 시절 태어난 팔라비 왕조 군주는 없다.[4] 여담이지만 팔라비의 서구, 특히 프랑스에 대한 동경은 가히 프랑코필(Francophile)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그 정도가 깊었는데, 본인이 유럽 상류층 문화 전반에 조예가 깊은 것과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의 3개 국어를 유창히 구사하는 것은 물론 마지막 부인인 파라 황후 또한 프랑스 유학파였다.[5] 이때 군인 출신 군주인 아버지가 수십년을 몸과 마음을 바쳐 기른 이란군이 허수아비 떼처럼 무너지는 것을 목도한 충격은 후일 백색혁명 시기의 어마어마한 군비증강으로 이어진다.[6] 말이 망명이지 사실상 유배였다.[7] 이때 루즈벨트가 샤에게 바친 뇌물이 현금 100만 달러였다고 한다.[8] 이란이 서방 국가들과 사이가 틀어진 후 이 747SP는 2016년까지 굴려먹게 된다. 그리고 2010년 단항전까지 인천-테헤란 정기편에 고정 투입되던 기종이였다. 사실 당연하게도 이는 이란이 냉전의 최전선에 있는 국가였기에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특히 이란은 최전선 중에서도 소련의 핵심지역인 캅카스 지방과 인접하고 있다.[9] 특히 모하마드 국왕이 한국의 새마을 운동과 강남 개발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테헤란 역시 한참 팽창하던 단계라서 지속적인 개발을 통해 주거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10] 참고자료[11] 이를 2024년 가치로 환산하면 무려 1억 3026만 달러다. 이를 넘어 행사 비용이 당시 가치로 1억 달러라는 주장이 유명하고 심지어 6억 3500만 달러라는 주장도 있지만, 이에 대한 실질적인 증거는 없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이란의 GDP는 137.3억 달러 남짓이었다.[12] 참고자료 1(영어 위키피디아 문서) 참고자료 2(2500년의 군주제를 종식시킨 10억 달러 파티) 참고자료 3(연회 관련 1) 참고자료 4(연회 관련 2) 얼마나 화려했는지 오슨 웰스는 "이것은 올해의 파티가 아니라, 25세기를 기념하는 축제였다!"라고 촌평했을 정도.[13] 팔라비는 이 행사가 이란의 유구한 역사를 전 세계에 알릴 좋은 기회라고 하면서 모든 수교국에 초청장을 보냈는데, 보카사의 대관식과는 정반대로 이 행사에는 세계 각지의 최고위급 인사들이 참석했다. 다카히토, 필립 마운트배튼, 보두앵(벨기에), 후안 카를로스 왕세자, 칼 구스타프 왕세자, 하일레 셀라시에를 위시한 왕족들과 다양한 국가들의 국가원수들이 이 행사에 참석했는데, 스피로 애그뉴 미국 부통령과 니콜라이 포드고르니 소련 최고간부회의의 의장, 요시프 브로즈 티토 유고슬라비아 대통령까지 참석하며 제1세계, 제2세계, 제3세계까지의 최상위급 인사들이 다 모였다. 한국에서는 김종필 한국 국무총리를 보냈다.(김종필 방문 당시 대한뉴스 영상)[14] 이 행사는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과 함께 중앙아프리카 제국의 참칭 황제 보카사 1세의 초호화 대관식에 영향을 미쳤다. 다만 보카사의 대관식은 국가수반과 그에 준하는 최고위급 인사는 아무도 오지 않았고,(애초에 그 이디 아민마저 기겁한 행사였다), 대관식에 참여한 외빈도 절대다수가 주재 대사와 비교적 격이 떨어지는 인사들이었다. 심지어 이쪽은 국력도 이란보다 훨씬 약한데 대관식에 2024년 가치로 환산해도 1.1억 달러로 팔라비의 행사와 거의 차이가 없는 거액을 쏟아부었다가 나라 GDP의 18%를 날려먹어 나라 경제까지 붕괴시켰다.[15] 왕당파[16] 명목상 자유주의 정당이라고 하지만 5공 때의 관제야당이나 공산국가의 우당을 생각하면 된다.[17] 단순히 인정한 정도가 아니라 홍해를 통해 석유를 팔기까지 했다. 그래서 이때의 이스라엘과 이란은 우호적인 관계였다. 사실 종교적인 감정 이외에도 팔라비 왕조는 이전부터 뒷구멍 무역을 통해 부정축재를 일삼았던 전적이 꽤나 많았다. 대표적인게 위에서도 언급된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에 석유를 팔다가 영국과 소련에게 발각돼서 나라가 절단이 날 뻔한 적이 있다.[18] 투데(Tudeh) 당이라고도 한다. 1949년에 팔라비를 암살하려다 부상만 입히고 실패한 전적이 있다. 이슬람 공화국 치하에서 금지당하고 지금은 유럽을 근거지로 하고 있다.[19] 사실 이는 선대 레자 팔라비 시절인 1936년부터 시작된 일이다. 물론 선대와는 달리 히잡 착용을 빡세게 금지시키지는 않았다.[20] 이란 최후의 세속주의 총리로 반정부 활동을 하다가 1991년 파리에서 이란 신정이 보낸 암살자에 의해 암살당한다.[21] 5월에는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22] 같은 군주국이라 잘 대해줄 거라고 믿었지만 당시 모로코의 국왕이던 하산 2세가 망명 조건으로 돈을 뜯어내려고 하자 떠나버렸다.[23] 카터 대통령은 팔레비를 질색했지만 키신저와 록펠러 가문의 로비로 받아들여줬으나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이 터지면서 나가라고 압력을 주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록펠러 가문 소유의 맨해튼 체이스 은행은 이란 황실과 밀접한 관계였는데 인질 사건과 그 후 제재 과정에서 비자금을 꿀꺽한다.[24] 멕시코와 비교적 우호적인 쿠바가 미국의 꼭두각시를 받았다고 비난하고, 새 이란 정권과의 관계도 신경써야 했던 멕시코 정부가 떠나라고 압력을 줬다. 멕시코는 전통적으로 외교에서 불간섭주의를 펴는 나라인걸 감안해야 한다.[25] 파나마의 실권자였던 오마르 토리요스도 팔라비를 싫어해서 좌익 성향의 교수를 팔라비가 있는 병실에 눌러 앉혀 팔라비를 계속 비난하게 했다.[26] 자신과 절친했던 이집트의 독재자인 안와르 사다트 덕이 컸다. 특히 사다트는 팔레비와 그의 가족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주고 생활비를 주는 특혜를 베풀어주었다. 안와르 사다트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는 한 원인이 바로 팔라비를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그가 암살되는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란 정부는 사다트 암살범을 영웅 대접해주었다고.[27] 2년 후 열린 사다트의 장례식에 지미 카터, 제럴드 포드, 리처드 닉슨 미국 전직 대통령들과 이스라엘, 서독, 프랑스, 이탈리아 등 많은 서방 국가들의 지도자들이 참석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28] 샤의 첫 부인 푸아드 공주의 오빠이다. 즉 한때는 손위 처남-매부 관계였던 셈. 물론, 나세르의 쿠데타 당시에 샤와 푸아드 공주는 이미 이혼한 상태[29] 단, 파루크 1세의 경우 옛날에 자기 여동생하고, 매제의 보물을 훔친것도 모자라서 레자 샤 팔라비의 장례식때 관속에서 보물을 훔쳐간 이력이 있었다.[30] 대부분이 샤의 어머니인 타즈 올 몰루크(님타즈 아이로믈루) 태후에 의한 것이었는데, 황실 가족들에 소라야에 대한 험담을 하거나 손녀인 샤나즈 공주와 소라야를 이간질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31] 1953년 모사데크 축출 쿠데타의 주역인 파즈롤라 자헤디의 아들이다.[32] 출처는 오! 이런 이란. 책지은이도 이 소식을 듣고 그 해당 미술관으로 가봤지만 지하에 비공개로 있다는 말만 듣었다.[33] 이 사람은 딸만 셋이라 (현재로서는) 그가 죽으면 가문의 수장은 샤의 조카(샤의 남동생의 아들)가 된다고 한다. (영문 위키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