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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뉴델리 | 1954 마닐라 | 1958 도쿄 | 1962 자카르타 | 1966 방콕 | |
<rowcolor=#373a3c> 6회 | 7회 | 8회 | 9회 | 10회 | |
1970 방콕 | 1974 테헤란 | 1978 방콕 | 1982 뉴델리 | 1986 서울 | |
<rowcolor=#373a3c> 11회 | 12회 | 13회 | 14회 | 15회 | |
1990 베이징 | 1994 히로시마 | 1998 방콕 | 2002 부산 | 2006 도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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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광저우 | 2014 인천 | 2018 자카르타·팔렘방 | 2022 항저우(연기) | 2026 아이치·나고야 | |
<rowcolor=#373a3c> 21회 | 22회 | 23회 | 24회 | 25회 | |
2030 도하 | 2034 리야드 | 2038 미정 | 2042 미정 | 2046 미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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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테헤란 아시안 게임 | ||
제7회 아시안 게임 بازیهای آسیایی ۱۹۷۴ 1974 테헤란 아시안 게임 VII Asian Games™ Tehran 1974 | ||
대회 기간 | 1974년 9월 1일 ~ 1974년 9월 16일 | |
개최국 | [[이란| ]][[틀:국기| ]][[틀:국기| ]] / 테헤란 | |
참가국 | 25개국 | |
참가 인원 | 3,010명 | |
경기 종목 | 16개 종목 - 200개 세부 종목 | |
개회 선언 |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이란 샤한샤 | |
선수 선서 | 만수르 바르제가르[1] | |
성화점화 | 골베르디 페이마니 | |
개·폐회식장 | 아리아메르 스타디움 |
[clearfix]
1. 개요
1974년 이란 제국 테헤란에서 개최된 제7회 하계 아시안 게임. 서아시아 및 중동지역에서 열린 첫 대회이다.2. 메달 순위
1974 테헤란 아시안 게임 메달 집계 최종 집계 | |||||
<rowcolor=#dbbe32,#ffffff> 순위 | 국가 | 메달 | 합계 | ||
금 | 은 | 동 | |||
1 | [[일본|]] 일본 | 75 | 49 | 51 | 175 |
2 | [[이란|]] 이란 | 36 | 28 | 17 | 81 |
3 | [[중국|]] 중국 | 33 | 46 | 27 | 106 |
4 | [[대한민국|]] 대한민국 | 16 | 26 | 15 | 57 |
5 | [[북한|]] 북한 | 15 | 14 | 17 | 46 |
6 | [[이스라엘|]] 이스라엘 | 7 | 4 | 8 | 19 |
7 | [[인도|]] 인도 | 4 | 12 | 12 | 28 |
8 | [[태국|]] 태국 | 4 | 2 | 8 | 14 |
9 |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 | 3 | 4 | 4 | 11 |
10 | [[몽골|]] 몽골 인민 공화국 | 2 | 5 | 8 | 15 |
11 | [[파키스탄|]] 파키스탄 | 2 | 0 | 9 | 11 |
12 | [[스리랑카|]] 스리랑카 | 2 | 0 | 0 | 2 |
13 | [[싱가포르|]] 싱가포르 | 1 | 3 | 7 | 11 |
14 | [[미얀마|]]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 1 | 2 | 3 | 6 |
15 | [[이라크|]] 이라크 | 1 | 0 | 5 | 6 |
16 | [[필리핀|]] 필리핀 | 0 | 2 | 12 | 14 |
17 |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 | 0 | 1 | 4 | 5 |
18 | [[쿠웨이트|]] 쿠웨이트 | 0 | 1 | 0 | 1 |
19 |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 공화국 | 0 | 0 | 1 | 1 |
3. 이모저모
- 국제 축구 경기에서 원정 팀에게 악명높은 아자디 스타디움이 이 대회를 준비하면서 만들어졌다. 이 시절의 이름은 '아리아메르 경기장'이었고 여자도 입장할 수 있었다.
- 세부 종목에서 마라톤이 제외되었다. 종목의 유래 자체가 고대 페르시아를 그리스가 마라톤 전투에서 이긴 것을 기념해서 하는 경기였기에 당연히 페르시아의 후신인 이란에서는 국가 감정상 개최할 수 없었던 것.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이란인 패널 키미야가 밝힌 실제 이유는 당시 이란에 마라톤 경기에 참가할 선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걸 다시 말하면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것도 아니고 달리기만 할줄알면 아무나 참가는 할수 있는 종목에 아무도 참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가 감정이 없다고는 할수 없다.
- 중국과 북한과 몽골 등 아시아 공산권 국가들이 처음으로 출전한 아시안 게임이다. 단 북베트남은 불참했다. 그리고 1982년에 처음으로 통일 베트남이 참가하였다.
- 중국이 아시안 게임에 들어오게 됨에 따라 대만은 아시안 게임에 참가하지 못하게 된다.
- 중동전쟁에 대한 항의로 이스라엘이 참가하는 경기마다 아랍국가들과 파키스탄, 중국, 북한이 보이콧의 의미로 기권을 날렸다.
- 남베트남이 마지막으로 참가한 대회다. 1975년에 공산화된 뒤 차차기 대회부터 통일 베트남으로 출전했다.
- 이 대회부터 실론이 스리랑카 국호로 참가했다.
- 당시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으로 부터 고작 16일뒤에 벌어진 아시안 게임이었던지라 북한에 대해 독기가 바싹 오른 상태였던 대한민국은 북한과의 종합순위 경쟁에서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대한민국에서 역도 선수를 하다가 은퇴하고 국회의원을 하던 신민당의 황호동 의원이 테헤란으로 급파되어 역도 슈퍼 헤비급 경기에서 인상 2위, 용상 4위, 합계 4위를 차지하여 은메달을 땄다.[2]
- 한편 북한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축구[3]에서 한국은 당시 8강 조별리그에서 조 최하위로 탈락(7등)하여 이미 결승 진출이 불가능해지고 동메달전 진출시 상대로 북한을 만나게 될 상황에서 최종전 말레이시아전을 일부러 져서 고의로 탈락하는 승부조작을 저지르기도 했다. 정작 그렇게 올라간 말레이시아에게 북한이 졌다는 건 함정.
- 북한의 역도 3관왕인 김중일 선수가 금지약물 복용 사실이 뽀록나서 금메달 3개를 모두 박탈당했다.[4] 아시안 게임에서 금지약물 복용으로 메달이 박탈된 첫 사례로 남게 되었다. 따라서 북한은 대한민국에 종합 순위에서 밀리게 되었다.[5] 참고로, 역도 3관왕은 이 대회에서만 가능했다.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에서는 인상과 용상의 합계로 순위를 매기지만, 전국체육대회나 세계선수권 대회에서는 합계 뿐만 아니라 인상, 용상만의 순위도 각각 인정하고 있다. 이 대회에서 역도 강국인 이란이 메달을 많이 딸 목적으로 세계선수권대회 방식으로 인상, 용상 성적을 따로 인정하도록 한 것이다.
- 개최국 이란은 일본에 이어서 종합 순위 2위를 하는 저력을 선보였다. 하계아시안게임 메달 순위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이겨본 적이 있는 단 두 국가 중 하나.
[1] 당시 이란의 레슬링 선수이며 이 아시안 게임에서는 레슬링 남자 자유형 74kg급에서 금메달을 땄다.[2] 이와 관련된 이야기도 재미있다. 황호동의 평소 체중은 슈퍼헤비급의 한 단계 아래인 헤비급에 해당했다. 황호동은 헤비급(당시 90-110킬로그램)이 아닌 슈퍼헤비급(110 이상)에 참가하기 위해 열심히 먹어서 체중을 늘려서 간신히 계체량을 통과했다. 다른 선수들과 정반대 방법으로 체중조절을 한 것이다. 그리고 뒤에서 언급했지만 세계선수권대회 방식으로 메달을 수여함에 따라 메달 획득이 가능했던 것이었다. 여담이지만 이 대회의 슈퍼헤비급 입상자들은 오히려 헤비급 입상자들보다 기록이 저조했다. 역도연맹이 황호동의 복귀를 요청한 것도 사실 이것을 노린 것이었다. 당시 헤비급 한국 대표는 윤석원이었는데, 황호동과 윤석원의 인상 기록은 같았다. 그렇지만 황호동은 2위, 윤석원은 4위였다(윤석원은 용상과 합계에서는 각각 3위를 해서 동 2개를 땄다).[3] 15개팀 본선 진출 대회로 15강 조별리그 다음 8강 조별리그에서 각 조 1위만 결승행, 각 조 2위는 동메달전으로 갔다.[4] 당시 일화가 참으로 어이없고도 대담한데, 용상 1차 시도에서 180kg을 실패하고 대기실에서 에페드린을 복용하고 용상 2차 시도에서 190kg을 성공했다고 한다. 성공 직후 김일성 수령님 만세(X3)를 외쳤다는데, 행동도 행동이지만 당시 얼굴이 새빨개서 수상히 여긴 대회조직위 측이 곧바로 소변검사를 해서 걸렸다고 한다. #[5] 이 때문에 북한 측에서도 그 "남조선"에게 순위가 밀리게 되니 불같이 항의했지만 도핑 자체가 빼도박도 못해서 금메달 박탈을 막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