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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필/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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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계 입문 전2. 정계 입문 후
2.1. 의원 시절2.2. 새누리당 소속 경기도지사 시절
2.2.1. 연정 시도
2.3. 새누리당 탈당, 바른정당 창당2.4. 바른정당 탈당, 자유한국당 복당, 경기도지사 재선 시도와 낙선
3. 정계 은퇴
3.1. 기업인 활동

1. 정계 입문 전

1965년 1월 20일(입학유예),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에서 아버지 남평우와 어머니 개성 김씨(開城 金氏) 김민정(金珉廷)[1]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국민학교는 수원에서 나왔지만, 서울 종로구의 청운중학교, 경복고등학교(58회)를 졸업했다.[2] 이후 연세대학교 사회사업학과(84학번[3])를 졸업하고[4] 부친이 회장으로 있던 경인일보에서 잠시 기자 생활을 하다 미국 예일 대학교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오세훈 변호사(현 서울시장)와 인연을 맺었다.

2. 정계 입문 후

아버지인 남평우 의원이 임기 중이던 1998년 3월 13일 갑작스럽게 별세하자, 박사 과정을 포기하고 귀국했다. 그리고 이에 실시된 1998년 재보궐선거(수원시 팔달구)에 이회창 당시 총재의 공천[5]으로 출마한다.

처음엔 열세가 예상되었으나, 26.2%라는 낮은 투표율 하에서 출구조사에서조차 우세가 예상되던 박왕식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를 꺾고[6] 만 33살의 나이로 당선되는 이변을 일으키며 정치에 본격 입문했다.[7][8] 그리고 2년 후 제16대 총선에서도 무난히 재선한다.

2.1. 의원 시절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이회창 후보 진영의 총괄 대변인을 지내는 동안 한나라당 당헌 개정안(당권 - 대권 분리[9], 집단지도체제 시행)에 투신한 혐의로 이회창 후보와 엄청난 반목을 하기도 했으나 어찌어찌 설득해서 관철시켰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에 찬성을 했었다. 이건 딱히 노무현과 원한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당의 방침에 따라간 것이다. 실제로 이후 원희룡, 정병국과 함께 박근혜에게 탄핵 찬성 철회를 주장했으나 씹혔다. 제17대 총선을 휩쓴 탄핵 역풍에도 불구하고 3선에 성공한다.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경기도지사 경선에 나갔으나, 경선 중반에 경기 부천시 소사구 3선 중진인 김문수와 단일화 해 김문수가 경기도지사 후보 및 당선되는데 기여를 했고, 당선 후, 경기도지사 인수위원장을 맡았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초반부터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였고[10] 이명박이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11] 이명박 정부로 들어와서 2008년 18대 총선 당시엔 이명박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의 총선 출마를 반대하였다. 당시 한나라당내 개혁/소장파를 비롯한 공천자 55명이 이상득의 퇴진을 요구하는 연판장에 서명하자 이상득은 본인지역구가 있는 포항시로 내려가서 칩거하였는데, 포항까지 내려가서 이상득을 만나 불출마를 종용하기도 했다.[12] 하지만 이상득은 결국 불출마 요구를 거절하였고 이후 행보와 묶여 오히려 불법사찰을 당하는 등 핍박을 받는다.

2008년 이명박 정부의 광우병 파동 당시, 경찰의 폭력진압 논란에 대해서 비판하고 미국에게 양해를 구하고 재협상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이 실용보다는 '정치와 이념' 잣대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한나라당이 재집권하려면 중도를 포용하는 등의 외연확대를 해야 한다며 이명박 정부정책과 한나라당 보수기조를 비판하였다. "이명박 정부는 대기업 성공시대, 고소득층 성공시대가 아닌 국민성공 시대를 위해 감세철회, 물가폭등의 원인인 고환율·저금리 정책 등 상당수 국정기조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 의원은 이어 "4대강 사업 등 토목관련 SOC사업 위주에서 벗어나 교육과 복지에 예산을 투자해야 한다"며 주장했다.[13] 해당 기사.

하지만 이 때문에 찍혔는지 이명박 정부 시절 총리실 산하 공직자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사찰 파문의혹 사건이 터졌을 때, 여당 의원임에도 불구하고 정두언, 정태근 의원과 함께 불법 민간인 사찰의 대상이 되었다는 의혹이 터져나오기도 했다.[14] 이에 대해서 남경필은 “민간인 사찰, 뿌리 깊은 개입이 의심된다”라고 하였고해당기사, 검찰의 수사가 의혹 남기면 국조·특검 불가피하다고 주장하였다.

2010년 8월에 외교통상통일위원장 자리에 올랐다. 전임자인 원희룡이 당 사무총장에 내정되면서 2달만에 위원장직에서 사퇴했기 때문이다.

2011년 7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 출마하여 최고위원이 되었다. 당시 당대표 홍준표, 최고위원은 유승민, 남경필, 원희룡, 나경원, 홍문표, 김장수였다. 유승민과 함께 추가감세 철회를 이끌어냈고, 서울특별시장 재보궐 선거 패배와 선관위의 디도스 공격 논란이 일자, 유승민이 최고위 총사퇴를 주장하면서 사퇴를 결의하자 여기에 가세했다. 결국 홍준표 당대표 체제가 붕괴되고 이후 박근혜 전 대표를 중심으로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된다.

위에 서술했다시피, 남경필은 한때 범친이계에 속하기도 했으나, 이후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식을 날세워 비판하면서 친이계에서 벗어났고, 이후에는 계파 자체를 거부하는 무계파 정치인으로 변하게 된다.

19대 국회에서 폭력국회를 종식한 국회선진화법 발의를 주도했다. 국회선진화법에 대해서 비판이 일자, 대화와 토론, 타협과 양보의 국회를 만들기 위해 여야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만들어낸 것이 선진화법이라고 설명하며 국회선진화법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선진화법을 악용해 여당의 발목을 잡고 투쟁 도구화하는 것은 그 당시 정치철학을 이해하지 못한 야당 지도부의 정치철학의 부재라고 비판하면서도 여당 역시도 야당을 설득하고 대화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2년 5월 새누리당 원내대표 선거에 출마했다. 김기현 의원이 정책위의장 후보 러닝메이트였다. 이한구 의원(원내대표)과 진영 의원(정책위의장)조, 이주영 의원(원내대표)와 유일호 의원(정책위의장)조가 출마했다. 1차 투표에서는 남경필-김기현 의원 조가 58표, 이한구-진영 의원 조가 57표를 각각 얻어 1, 2위로 결선에 진출했으나, 결선 투표에서 이한구-진영 조가 전체 138표 가운데 72표를 얻어, 66표를 얻은 남경필-김기현 의원 조를 꺾고 1차 투표의 결과를 뒤집었다. 해당 기사.

2.2. 새누리당 소속 경기도지사 시절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로 당선되어 4년간 재임하였다.

당초에는 김문수 당시 경기도지사의 3선 출마를 주장하였고, "짜장면 중에서 삼선짜장이 제일 맛이 있듯이 도지사는 삼선 도지사가 가장 최고다."라는 드립을 시전하기도 했으나, 결국 김문수가 불출마 입장을 굳히고 당내에서도 남경필의 출마를 종용하면서 결국 경기지사 출마를 선언, 경선에서 정병국, 원유철, 김영선과 맞붙어 승리하면서 새누리당 경기지사 후보가 된다.

남경필 후보는 여당 내에서 상대적으로 개혁 성향이고, 새정치민주연합 김진표 후보는 야당 내에서 상대적으로 보수 성향의 정치인이었던지라, 이념의 차이가 거의 크지 않은 두 수원시의 왕자가 맞붙은 선거라는 평가였다.[15] 심지어 SBS 선거방송에서는 보수성향이 아니라 진보성향으로 표시되기도 했다.

남경필은 네거티브 선거를 펼치지 않고 정책선거를 하겠다고 선언하였고, 끝까지 네거티브를 하지 않았다. 네거티브로 당선이 된다한들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주게 되어서 통합이 되지 않아서 도정을 제대로 이끌 수 없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당시 지방선거 곳곳에서 네거티브전이 펼쳐졌음에도 불구하고[16] 경기도지사 선거만 거의 유일하게 버스 준공영제, 교통 문제, 주거 문제 등과 관련한 정책대결이 주목을 받았을 정도였다.

당시 세월호 참사로 여론이 악화된 와중에 결국 43,000여표, 득표율로는 불과 0.8%p의 근소한 차이로 김진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통합진보당 백현종 후보가 사퇴[17]하면서 무효표가 14만표나 발생하였기에, 남경필 입장에서는 참으로 아슬아슬한 승부였다는 평이었다.

경기도지사 당선 후 야권 출신의 이기우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을 경기도 사회통합부지사로 내정하여 도내 연정을 실시했다.[18] 경기도정을 이끌면서 야권과 협력하는 협치모델을 구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5년 한국사 국정화 교과서에도 반대 의사를 밝혔다.

2016년 4월 도내 프로젝트 중 하나인 G-MOOC(경기도-온라인 대중 공개강좌)의 추진단장으로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을 영입했다.[19] 카카오김범수 의장과 이영조 경희대학교 교수도 같은 시기에 영입했다.

2.2.1. 연정 시도

2014년 경기도지사 취임 이후, 경기도정을 여야가 함께 참여하는 연립정부로 이끌면서 무난한 행정능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연정을 아예 '자기브랜드화'하려는 것 같다는 평도 있다.

6.4 지방선거 결과 새정치민주연합 도의원들이 경기도의회에서 과반 의석을 차지하면서 경기도의회가 여소야대 상태이기 때문에 원활한 도정 운영을 위해서는 새정연 측과 협력을 해야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도내 국회의원들도 야당 의원이 과반수기도 하다. 다만 소장파로서의 의정 경력, 국회선진화법 발의, 도지사공약, 고려대 특강에서의 발언 등을 보면 단순한 유불리 때문에 한다기보단 본인의 평소 소신과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연정은 크게 야당 출신 부지사와의 연정, 도의회와의 연정, 진보교육감과의 연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로, 2014년 사회통합부지사직을 신설해 야당이 추천한 이기우[20]를 사회통합부지사로 임명해 사회, 보건, 복지 분야의 인사권 등 몇몇 권한을 부여했다.

도의회와는 2015년 1월 도의회와 집행부, 민간전문가가 참여하는 '경기도 연정 실행위원회'가 공식 출범하면서 예산 배분과 운용을 설정하는 재정전략회의가 신설돼 집행부와 도의회가 '함께 짜는 예산 연정'의 기틀이 마련됐다. 생활임금을 광역자치단체에서 처음 도입했으며 2015년 5~7월 전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메르스 사태 당시에도 초당적 협력, 중앙정부 및 타 지방과의 공조를 원활하게 이끌어 안희정 충남도지사 등과 더불어 행정력, 위기관리 능력을 발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교육감과의 연정을 통해서는 무상급식 관련 비용도 마찰없이 통과시키고, 상당히 왼쪽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재정 경기교육감과의 연정에 합의했다. 무상교복 정책을 추진하며, 보수 진영에서 무상급식을 비판할 때 거론되던 학교 화장실 등 시설물 문제도 합의하는 등 전임 김문수 도정 때와 달리 교육감과의 마찰도 줄었다.

야당이 주장하는 무상급식 등의 정책과 여당의 본래 공약을 함께 이루는데 많은 비용이 들 수 있으며, 연정이 법률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는 한계가 있지만 한국 정치계에서 주목할 만한 실험으로 평가받고 있다. 2014년 12월 고려대학교 초청 강연에서 남경필 도지사 본인이 밝히길, '우리나라는 다른 선진국과 다르게 한쪽이 권력을 잡으면 다른쪽 상대방이 짓밟히는 꼴을 봐왔다. 연정을 통해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여 우리나라의 정치를 한 단계 개선시켜나가야 하지 않나'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하지만 2016년 들어서 누리과정 예산 문제로 연정이 한차례 무너졌고, 특히 성남시 이재명 시장이 자체 예산으로 시행하려는 3대 복지사업에 제한을 걸면서 연정이 삐걱하는 모습도 보여 귀추가 주목된다. 남 지사는 연정 Ver 2.를 제안해서 다시 연정을 꾸릴 예정이라고 한다. 2016년 상반기 내로 재협상을 완료하겠다고 했으며 실제로 2016년 5월 경기도청경기도의회가 다시 화해에 성공하여 누리과정 예산을 확보하는 대신(2차 추경에 반영) 더불어민주당 측에 좀 더 권한을 양보하였다.

2.3. 새누리당 탈당, 바른정당 창당

2016년 10월 터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의 사퇴를 주장했다. # 이어 11월에는 9명의 친박 의원 모임, 이른바 진박 9인회[21]에 대해 폭로했다.

2016년 11월 15일, 비박계의 임시 지도부인 비상시국위 12인 공동대표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비상시국위 출범으로 분노한 이정현 대표로부터 지지율 합쳐 10%도 안 되는 대선주자들이 당에 먹칠한다막말을 들었다. 남경필은 이에 발끈하면서 이정현, 박근혜교 사이비 신도 같다라고 맞받아쳤다. 그리고 이정현 대표가 사퇴 안 하면 탈당하겠다고 밝혔다. #

2016년 11월 22일, "진정한 보수 중심을 세워 먼저 헌정 질서 복원 로드맵을 만드는 데 앞장서고, 헌법을 유린한 대통령과 그 일파가 헌법과 법률에 따라 의법조치 되도록 앞장서겠다"고 밝히면서 김용태와 함께 새누리당 탈당의 스타트를 끊었다. #

뒤이어 새누리당을 탈당한 비박계 정치인들과 함께 바른정당을 창당하였다. 2017년 1월 25일,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 바른정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유승민과 경쟁하였으나, 탈락했다.

2017년 7월 31일, 채인석 화성시장과 함께 동탄신도시 사랑으로부영아파트 부실공사에 대한 대책을 발표하였다. 이 아파트가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에 대해서는 이 항목으로...

바른정당 내 통합파와 자강파의 입장을 절충해 자유한국당의 서청원 등 친박 중진을 쳐내고 나서 신당 창당의 형식으로 자유한국당과 합당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대당 통합을 하기 위해서는 통합전대가 필수적인데 이를 위해서는 양측 지도부 모두가 사퇴해야 하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은 낮은 제안이다. 언론과 네티즌들은 자유한국당에 복당하기 위해 이러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선도탈당한 사람이 다시 자유한국당에 투항하는 꼴이라 기회주의자라고 비판받고 있다.

남경필 본인은 합당이나 신당 창당이 아닌 이상, 절대로 당을 탈당하지는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2.4. 바른정당 탈당, 자유한국당 복당, 경기도지사 재선 시도와 낙선

2018년 1월 9일,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의 합당이 잘 되기를 희망하지만 생각이 달라 지금 동참하기는 어렵고 이후에 큰 통합의 길에서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탈당계를 제출하였다. 페이스북에 “동탁을 토벌할 수 있다면 기꺼이 조조가 되겠다”며 자유한국당 복당을 시사한 데 이어 2018년 1월 15일 공식 복당 선언을 하면서 약 1년 만에 자유한국당으로 복귀하게 되었다.[22]

이재명은 남경필이 조조가 아니라 여포라고 비난했으며, # 바른정당 하태경은 "'조조'는 새 조(鳥)를 두 번 쓴 것이다. 철새가 두 번 이동했다는 뜻"이라고 비웃었다. #

'철새'라는 비판에 대해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들도 숱하게 당적을 옮겼다. 내가 철새면 김대중-노무현도 철새라고 해야 하나'라고 반론하였다.[23][24] 이에 대해 더불어민주당에서는 '막말대열에 합류한 남경필 지사, 자유한국당 복당 신고식이라도 하는가?'라는 논평을 냈고[25], 이재명 시장은 페이스북에서 '어찌 두분과 자신을 비교할 수 있는가? 함부로 모욕하지 마라'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당내 경선 없이 자유한국당의 경기도지사 후보로 단수공천되어 출마하였으나, 상대 후보인 이재명에게 여러 잡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35.51%의 득표율에 그치면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에게 무려 20.89%p차로 크게 밀리며 낙선했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원희룡 제주특별자치도지사가 연임에 성공한 것과 대비되면서, 복당이 악수가 되어버렸다는 평가가 많다.[26]

비록 낙선했다고는 해도 남경필은 당내 계파 싸움에서 자유롭고 자유한국당 내에서는 높은 인지도, 탄탄한 경력, 젊음, 그리고 가장 중도실용에 가까운 마인드를 갖고 있는 정치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만큼 향후로도 일정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여졌지만...

3. 정계 은퇴

2019년 3월 29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땀 흘려 일하는 청년 남경필이 되겠다.'라는 글을 올렸다. 정계를 떠난다는 말을 덧붙이며 정계 은퇴 선언도 덧붙였다. 앞으로는 스타트업 창업과 운영에 몸을 담겠다는 계획.

7회 지선에서 경기도지사에 낙선한 것을 빼면 5선 국회의원에 6회 지선에서 경기도지사로 당선된 이력이 있고 7회 지선에서만 딱 한번 낙선했을 뿐, 그 외의 선거에서는 전승한 데다, 아직 환갑도 채 되기 한참 전인 54세라는 정치인 치고는 젊고 다른 사람들 같으면 아직도 현역으로 일할 나이이고, 한국당 복당 정도를 빼면 큰 실책도 없었다[27]는 점을 보면 의외이지만, 22년간 그가 정치인으로 살면서 전처의 총리실 사찰이나 정치로 인한 이혼, 장남 남주성범죄까지 겪어오며 굴곡이 많은 삶을 살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나름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28] 물론, 남경필은 집안부터가 엄청난 부잣집인데다 본인도 그동안 정치로 재산도 많이 벌어놨으니 남은 여생을 사는 데에는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3.1. 기업인 활동

블록체인 기술로 국민건강보험공단의 데이터를 분석하여 건강검진 관련 일처리를 하는 스타트업 모두의건강 대표를 맡고 있다. 기사 이후 2019년 하반기 빅케어로 사명을 변경하고 가천대 길병원과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기사 회사 정보 스타트업 대표가 된 이후로 남경필은 정치 관련 언급은 공개적으로 단 한 차례도 하고 있지 않으며, 정치인들과의 만남도 오해를 살까봐 되도록이면 하지 않는다고 한다.[29]

2021년 MBN에서 인터뷰를 가진 바 있었는데,# 정계 복귀 제안은 여전히 빗발치며 당시 재보궐선거로 치러졌던 서울특별시장 출마도 제의받았다는 사실을 밝히기도 했다. 거물급 정치인으로 활약하던 시절을 잊지않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복귀 제안은 단칼에 거절하는 중이고 커리어가 탄탄대로였던 이재명의 정치 인생[30]을 되려 걱정하는 반응을 보면 굴곡진 정치 여로에 지쳤음과 정계에 더이상 미련이 없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서도 남경필의 경기지사 복귀 귀추가 주목받았고 여전히 죽지 않은 지지율을 보이기도 했으나, 남경필 본인 요청으로 여론 후보군에서 일찍이 제외되어 복귀설은 일단락되었다.

2023년 3월 24일 장남이 또다시 필로폰 투약으로 체포되었기에 정계 복귀는 더욱 어려워졌다. 어차피 본인도 이미 정치에 미련을 완전히 버린 지 오래이다. 오히려 마약 중독자 가족을 돌보느라 마음고생하는 가족으로서 각종 탐사보도 다큐멘터리에 가끔 등장하고 있다.

2024년에는 차인표와 함께 마약 예방 치유 단체인 은구를 설립하여 마약 예방에 힘쓰고 있으며,# 국정감사에 참고인으로 출석하여 마약청을 신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1] 김태호(金泰鎬)의 딸이다.[2] 졸업동기로 김재호 동아일보 회장 겸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이 있다.[3] 빠른 생일에 해당하는 1월 출생자지만, 그런 것 상관없이 (65년생) 동갑내기들과 나이에 딱 맞춰서 초등학교입학하였다.[4] 연세대 재학 시절 신학과 학생이었던 가수 안치환농활을 같이 가면서 친해졌다 한다. 지금까지도 연락하며 스스럼없이 만나고 지낸다고 한다.[5] 이회창 총재가 없었더라면 이 선거 때 공천조차 받지 못했을 거(원래 내정된 다른 한나라당 후보가 있었다.)라고 남경필 경기지사의 저서 '시작된 미래'에서 밝히고 있다.[6] 이 당시에는 재보선에도 출구조사를 했는데, 1998년 재보선 당시 출구조사에서는 박왕식 후보의 6%포인트 차 당선이 예측되었다. 남경필 후보는 이때 벌어진 재보선 당선자 중 출구조사를 뒤집은 유일한 당선자였다.[7] 운이 크게 따라준 선거이기도 했다. 보통 투표는 노년층이 오전, 젊은 층이 오후에 집중되는데, 이날 오후 시간대에 폭우가 쏟아졌다.(...) 덕분에 젊은 층의 투표율이 크게 떨어졌고, 반대로 부친을 봐서라도 한 표 던져준 노년층의 표심이 크게 작용했고, 이는 자연스럽게 남경필의 당선으로 이어졌다.[8] 만약 낙선했더라도 박왕식 후보가 다음년인 1999년 별세를 해서 2년 뒤 있을 총선에선 당선됐을 것이다.[9] 오늘날의 정치에 익숙한 나이적은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일일지라도, 이는 대통령이 당 대표 격인 총재를 겸하며 각종 선거의 공천, 당론, 국회의결 등 각종 당의 업무를 사실상 결정하던 관습을 깨트리고자 하는 것이었다. 3김시대의 과도기적 성격을 탈피하게 된 중요한 일이다.[10] 이 당시 남경필은 소장파였기 때문에 손학규를 따라 대통합민주신당에 합류할 것이라는 추측이 돌았으나 한나라당에 잔류했으며, 강력하게 이명박에 대해 지지선언하기도 했다.[11] 이 때문에 남경필 본인은 정두언, 정태근과 달리 이명박을 바로 옆에서 보좌하진 않았지만 친이계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12] 회고하길, 밤이었음에도 사무실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북적북적했다고 한다. 본인도 그 줄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이상득 의원이 왔고, 남경필을 보자마자 '어, 남경필이네? 또 불출마 요구하려고 왔어? 일단 들어가지'라고 프리패스로 그와 함께 들어갔다고 한다.[13] 놀라운 점은, 2007년 대선 경선 때, 남경필은 극초창기부터 이명박 지지 선언을 강력하게 한 바 있어, 범친이계에 속했으면서도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해 날선 비판을 한 점이다.[14] 엄밀히 말하면 총리실 산하 공직자 윤리지원관실에서 남경필 의원의 부인을 사찰했다. 당시 지원관실에서는 2008년 남 의원 부인이 사업상 횡령 혐의로 고소된 사건을 경찰이 무혐의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하자 남의원이 외압을 행사했는가를 뒷조사했다는 해명을 했지만, 민간인과 정치인에 대한 불법사찰 아니냐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15]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경기 수원 출신이며(정확히는 남경필의 출생지는 용인), 수원을 기반으로 하는(남경필은 팔달구, 김진표는 영통구) 정치인들이다. 또한, 두 사람 모두 당시 해당 지역 현역의원이었다. 그래서 지선 이후 신장용 의원의 의원직 상실로 인해 공석이 된 권선구(수원시 을)까지 묶어 수원시 장안구(수원시 갑)를 제외한 지역구 4곳 중 3곳에서 보궐선거를 하게 되었다.[16] 특히 서울특별시장, 서울특별시교육감 선거가 가장 네거티브가 심한 선거라는 인식이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다.[17] 새정치민주연합 김진표 후보와 단일화, 이로 인해 남경필은 상대적으로 불리해졌다.[18] 반대하던 야당 인사들에겐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연정 시도 얘기를 꺼내며 설득했다고 한다.[19] 본래 윤여준은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이기도 했으며, 2000년대 중반까지는 보수인사였던 인물이다. 16대 총선에서 공천학살을 주도해서 당시 민정계와 상도동계 같은 기성세력을 밀어내고 한나라당의 체질을 젊게 만든 것도 이 사람이다. 이후 안철수 의원을 도와 국민의당 창당에 기여하기도 했으나 건강악화를 이유로 일선에선 물러난 상태. 이후 7개월 만인 2016년 11월 추진단장직에서도 물러났다. 다만 필요하다면 남경필 지사는 계속 도울 생각이라고 한다.[20] 17대 국회의원 출신이다.[21] 최순실 일가와 문고리 3인방 등이 사라진 상황에서 서청원, 최경환, 윤상현을 축으로 정갑윤, 원유철, 정우택, 홍문종, 유기준, 조원진이 매일 작전회의를 하여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대책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실제로 조원진은 이 존재를 인정했다. 이정현을 포함해서 진박 10인회라고 하기도 한다.[22] 남경필과 함께 새누리당을 선두 탈당한 김용태도 2017년 11월에 바른정당을 탈당하고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했다.[23] 이건 남경필이 무리수 둔 거에 가까운 반론인데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속한 민주당계 정당더불어민주당 전신인 새정치민주연합 시절때 까지 자주 개편 및 당명변경을 해서 어쩔 수 없이 당적이 늘어난 거에 가깝다.[24] 그렇게 따지고 보면 본인이 속한 보수정당 출신 대통령 김영삼은 처음에는 집권보수여당인 자유당으로 시작해서 이승만 대통령의 3선 개헌 반대로 탈당해 1990년 3당 합당으로 다시 보수 정당으로 전향하기 전까지는 군사정권 시절 야당이었던 민주당계 정당에 있었으며 정치노선으로 보면 김대중-노무현은 민주당계 정당은 자주 개편됐어도 꾸준히 계속 지켜왔고, 김영삼은 보수정당-민주당계 정당-다시 보수정당으로 노선을 바꾸었기 때문에 김영삼이 오히려 철새행위 한 거에 가깝다.[25] 원문.[26]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높은 지지율에 힘입어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이 상한가를 치던 시기임을 감안하면 남경필은 무소속으로 출마해도 당선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TK 제외 전 지역에서 민주당 후보들이 넉넉한 격차로 압승했고, 제주지사 선거는 문대림의 경쟁력이 너무 떨어져서 민주당 버프를 받고도 낙선한 케이스다. 거기다가 남경필의 장남 남주성의 마약 투약과 군대에서의 가혹행위도 있어서 남경필에게는 발목잡히는 일이었을 것이다.[27] 자유한국당 복당도 결국 최종적으로 2020년 초에 이르러 미래통합당이 출범하면서 이전 바른정당 - 바른미래당 인원 상당수가 복당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제 와서는 남경필만의 실책이라고 하기도 뭣하다.[28] 특히 장남의 마약사건은 남경필 개인적으로도 많은 충격을 준 사건이다. 폭행 사건에 이어 아들의 범죄 혐의까지 2연속으로 드러난 것인데다가 오죽하면 본인 스스로 당시 해외 출장 중이던 것마저 전격 취소하고 귀국했을 정도였다. 후일 인터뷰한 기사에 따르면 장남의 마약 사건 이후 아버지로서 제대로 자식들한테 신경써주지 못했다는 자책의 말을 한 것으로 보아 이 시기를 기점으로 정계 은퇴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한 듯 싶다. 실제로 박형준이 남경필이 당시 본인에게 보낸 문자에 가슴에서 비가 내린다고 썼다고 했을 정도로 장남의 마약사건은 본인에게도 크나큰 상처로 남았다.[29] 다만 전직 경기지사이자 경기도의 최대 도시 수원의 5선 의원 출신으로서 경기도의 거물이라는 상징성은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에 김은혜가 경기지사 후보로 공천되자 김은혜의 요청으로 만나주기도 했고, 상대 정당인 김동연이 경기지사에 당선되고도 김동연의 요청으로 회동을 하기도 했다. 경기지사 시절 민주당 인사에게 정무부지사 자리를 주어 협치를 실현했던 적도 있는 만큼 김동연 지사가 상대 정당의 당선인임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만남을 허락해준 것으로 보인다.[30] 이재명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됐을 때 축하전화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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