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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시/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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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시 행정구역 변천사
백제 고구려 신라
멸오현
(滅烏縣, 1세기?)
구성현
(駒城縣, 5세기?)
한주
거서현
(巨黍縣, 8세기)
고려
양광도 광주목
용구현
(龍駒縣, 944)
양광도 광주목
처인부곡
(處仁部曲, 13세기 이전)
양광도 광주목
처인현
(處仁縣, 1232)
조선
경기도
용구현
(龍駒縣, 1392)
경기도
용인현
(龍仁縣, 1414)
충주부
용인군
(龍仁郡, 1895)
경기도
처인현
(處仁縣, 1397)
경기도
양지현
(陽智縣, 1399)[1]
충주부
양지군
(陽智郡, 1895)
일제강점기
경기도
용인군
(龍仁郡, 1914)
대한민국
경기도
용인시
(龍仁市, 1996)

1. 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백제 건국 후 백제의 땅으로서 멸오현(滅烏縣)이었다. 그러다가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에 의해 고구려 땅이 되면서 구성현(駒城縣)이 되었다. 551년 백제가 구성현을 수복하였으나 553년 진흥왕신라 땅이 되었다. 삼국통일전쟁 이후 통일신라 경덕왕 때 거서현(巨黍縣)으로 개칭되었다.

2. 고려 시대

944년 거서현이 다시 용구현(龍駒縣)으로 개칭되었다.
구 양지군 지역은 수주(水州)에 속한 양랑촌부곡(陽良村部曲)이었다. 그러다가 1362년(공민왕 11) 에는 안성으로 이속되기도 하였다.

13세기 초까지 처인 부곡이었지만, 처인성 전투에서 살리타를 전사시킨 업적으로 처인현으로 승격되었다.

3. 조선 시대

정종 때였던 1399년에는 양량촌부곡이 안성에서 독립하여 양지현으로 승격되었다.

태종 때였던 1414년에 구현(駒縣, 現 구성[2] 일대)'과 처현(處縣, 現 남사면 일대)'을 용인현으로 통합하였다.[3]

용인은 역사적으로도 교통의 요지였는데 구한말 때까지 존재했던 영남대로[4]가 거쳐가는 곳이었던데다 인천-수원에서 영동지방으로 가는 중간지점이기도 했다. 과거 영남대로가 지나갔던 때는 현재의 구성 지역(용인군)과 양지면(양지군)이 중심지였다[5].

1895년 23부제가 시행되자 용인현, 양지현이 용인군, 양지군으로 승격되었다. 참고로 이 당시 충주부 관할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 해에 충주부에서 경기도로 이속하여 용인, 양지군이 되었다. 1896년 용인군 행정구역은 16면 136동이었고 수부지역을 읍내면에서 수여면 소학동으로 이전하였다.

4. 일제강점기

1914년 일제에 의해 자행된 부군면 통폐합 이전까지 '용인군'[6] '양지군'[7]이라는 두 개의 독립적인 행정구역으로 존재하다가, 양지를 용인에 병합하여 현재의 행정구역이 만들어졌다. 그전 1399년안성에서 독립하여 양지군으로 독립하게 되었고, 일제가 되어서 용인으로 통합하게 되었다. 추가로 죽산군이 안성군과 용인군에 분할 편입되면서, 원삼면[8]과 외사면[9](현 백암면)을 설치하였다. 또한 수진면[10]과 지내면[11]이 통합되어 수지면이 되고, 수지면 죽전동, 동천동 일부 지역을 강제로 폐합해 광주군 낙생면 구미리(현 성남시)로 넘겨주어 현 구미동동원동[12]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지내면 행정구역였던 영통리, 덕동기흥면에 넘겨준다. 그 해에 읍삼면 구성리(현 기흥구 구성동)에 있던 용인군청이 수여면(후에 용인읍으로 승격) 김량장리로 이전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일본의 양곡수탈을 위해 건설됐던 수려선[13]이 현재의 기흥구 신갈동, 어정, 동백지구, 舊 용인읍내 일대[역명]를 지나가 용인의 중심이 신갈과 김량장으로 옮겨지게 됐다. 1937년 수여면이 용인면으로 개칭되었다.[15]

4.1. 일제의 수도 이전 계획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제국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제국 수도를 이전하려는 계획의 후보지 중 하나가 된 적이 있다.[16] 정확하게는 현재의 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캠퍼스 위치.

이유는 대동아공영권에 따라 일본 본토와 한반도, 만주국을 전체적으로 볼 때 용인이 거의 중앙에 위치해 있어 입지 조건이 좋으며, 일본 본토 자체가 지진이 많이 일어나는지라 이왕 힘 있을 때 입지 좋은 곳으로 수도를 옮기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계획을 세울 때만 해도 관동 대지진으로 크게 데인 직후였다.[17] 결과적으로 측량까지는 마쳐 곧 천도까지 가능한 상태였으나 각계각층의 반대에 부딪쳤고, 나중에는 일제가 패망하면서 당연히 백지화되었다.

"중앙계획 소안요강안"으로 알려진 이 계획은 극비리에 이루어진 일본의 국토 계획 중 하나로, 수도 이전 뿐만이 아니라 철도, 고속도로, 공업지구 등에 대한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도 이전의 후보지는 후쿠오카, 오카야마, 경성 교외(모현 관청마을) 세 곳이었는데, 이 중 후쿠오카와 오카야마는 일본 본토 안에 있어 제국을 확장하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졌다. 일제의 수도이전계획의 주목적이 제국의 중심지이면서 교통이 편리한 곳에 천도하여 대동아공영권을 실현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았을 때 세 후보지 중에서는 만주-한반도-동남아-일본으로 이어지는 일본 제국의 중심인 용인 쪽이 개연성이 높았다. 이 계획에는 조선인 수백만 명을 만주로 강제 이주시키고 그 자리에 일본인을 채워넣는 인구 배정 계획이 포함되어 있는데, 만일 이 계획이 추진되었다면 식민지 조선인에 대한 상상 이상의 탄압이 병행되었을 것이다.

물론 중앙계획소 안이 만들어진 1943년에는 일본의 패배와 제국 해체가 가시화 되어 있었으므로, 영원히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는 계획이었다.

5. 대한민국

파일:용인시 휘장(1979-1997).svg
당시 사용된 휘장.

1963년, 고삼면이 안성군에 편입되었다. 1971년, 영동고속도로가 수려선이 지나가는 길을 따라 개통이 되면서[18] 기흥면 신갈리와 용인면이 지역 중심지로서 강화되었다. 1973년, 대통령령 제6542호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자행으로 변경된 수진면 죽전리는 본래의 수지면으로 복구되었다.

1979년, 대통령령 제9409호 용인면이 용인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 대통령령 제11027호 일제강점기 수지면으로 통폐합 된 지내면[19]의 여수내, 가산천 유역인 이의리와 하리는 수원시, 남사면의 진위천 유역 진목리와 봉명리 일부는 평택시로 편입되었다.[20] 1985년, 대통령령 제11772호 기흥면이 기흥읍으로 승격되었다. 1995년, 기흥읍 영덕리 일원 66만㎡가 수원시로 편입되었다.[21]

용인시는 근 20년 가까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유입된 도시이다. 1995년 당시 약 24만명 인구의 전형적인 수도권 도농복합시였던 곳이 1996년 군에서 시로 승격되어[22][23] 서울의 위성도시로서 난개발이 되어 인구가 급증하였다. 다음의 표를 통해 다른 도시들과 비교해보면 그 발전이 가파르다.
연도 용인시 인구 평택시 인구 안산시 인구 안양시 인구 부천시 인구 성남시 인구
1995년 244,763명 321,636명 504,615명 593,142명 779,745명 886,663명
2000년 392,133명 356,103명 566,912명 581,166명 775,815명 924,390명
2005년 681,344명 383,976명 679,011명 625,350명 855,359명 983,075명
2010년 876,550명 419,457명 714,891명 621,714명 875,204명 980,190명
2015년 975,746명 460,532명 697,885명 597,789명 848,987명 971,424명
2020년 1,068,519명 520,649명 653,575명 561,069명 826,845명 941,527명

시 승격 이전 24만명에서 2015년 97만 5천명으로 거의 4배 가까이 상승하는 기염을 토해 기초자치단체 중 가장 높은 인구 증가를 보여주고 있다.

위의 표를 보다시피 송탄까지 통합했던[24] 평택시를 2000년 이전에 제쳤고, 2000년부터 2005년 사이에는 안양시안산시를 제치고, 2005년부터 2010년 사이에는 부천시를, 2010년부터 2015년 사이에는 성남시를 제쳤다. 현 인구수 증가세대로라면 2015년부터 2020년사이에는 고양시를 제칠 것이 거의 분명해보이고[25], 만약 미개발 지역인 처인구 동부의 면 일대까지 대규모 개발이 된다면 수원시를 제치는 것도 가능해 보일 정도이다.

다만 이건 운이 좋은 케이스라고 볼 수 있는데, 도농복합시 개념 도입 이전 여러 자치단체로 쪼개지고 해체된 시흥군과는 달리[26] 1995년 도농복합시 제도가 도입되고 난 직후에 시로 승격한 덕분에 예전의 시흥군처럼 여러 지차체로 분리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행정구역 분리를 거치지 않고 인구 90만 명 돌파를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 행정구역이 갈라지지 않고 통째로 시로 승격하여 1기 신도시 효과를 받은 고양시의 인구 증가 수준이 비견될만하다. 이런 높은 인구 증가로 인해 2004년 대도시 특례를 받는 도시로 승격되었다.

또 기초단위 승격도 빈번했다. 1996년 수지면이 수지읍으로 승격되었고 내사면이 양지면, 외사면이 백암면으로 개칭되었다. 2000년에는 구성면이 구성읍으로, 2001년에는 수지읍이 수지출장소로, 2005년 10월 31일에는 수지구(수지출장소), 기흥구(구 기흥읍+구성읍)[27], 처인구(나머지 지역)의 일반구가 설치되었고, 포곡면이 포곡읍으로 승격되었다. 2017년 12월에 모현면, 이동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2021년 2월에 남사면이 남사읍으로 승격되었다.

2022년 1월 13일 특례시로 지정되었다.


[1] 1362년 안성군에 속했다가 다시 분리되었다.[2] 수지구와 기흥구를 관통하는 도로인 용구대로는 바로 이 이름을 딴 것이다.[3] 참고로 용인시 자체적으로 2014년에 '용인' 지명 600주년을 기념하였다.[4] '동래로'라고도 불렸으며, 동래(부산광역시)-밀양-대구-상주-문경-새재(조령)-충주-죽산-양지-용인-한양 구간에 해당된다.[5] 용인향교는 옛 용인시청이 있던 김량장이 아닌 기흥구 언남동에 있다. 양지면에는 1523년 세워진 양지향교(대성전과 내삼문)가 있다. 향교는 국가가 주도하여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하고 공자와 여러 성현들의 제사를 지내면서 지방 사람들을 교육하는 곳이다. 양지향교는 조선 전기 각 지방에 세운 공립 교육 기관으로, 향교가 위치한 곳은 구한말까지 각 고을의 중심지였음을 의미한다.[6] 현 행정구역 기준으로 수지구 전체, 기흥구 전체, 처인구 옛 용인읍(수여면) 지역·현4읍(포곡읍·모현읍·이동읍·남사읍) 일대.[7] 현 행정구역 기준으로 처인구 양지면, 안성시 고삼면 일대.[8] 원일면, 목악면, 주서면, 광곡리.[9] 고안면, 박곡면, 근일이면, 근삼면.[10] 서봉동, 죽전동, 성복동, 동막리, 손기리, 고분현, 신리, 정정리.[11] 덕동, 영통, 상리, 하리, 의상, 의하.[12] 수지면 죽전동, 동천동 부분 면적이 광주군 낙생면 구미리로 속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용인군 수진면 동막리와 광주군 낙생면 원천동이 합쳐진 지명으로, 동천동의 이름 유래와 비슷하다. 용인군 수진면 머내 일부 지역이 현 동원동 관할. 당연히 원천동은 수원시 원천동과는 무관하다.[13] 1930년 12월 1일 조선경동철조주식회사가 민간철도로 개통. 1946년에 국유화되어 운영. 6·25전쟁 초 인민군이 이용. 9·28 수복 후 영국군·터키군들이 수여선을 타고 중부전선으로 이동. 1972년 4월 1일 폐지.[역명] 어정, 역말(간이역, 현 행정타운 부근), 용인역, 심평(간이역), 양지, 제일(간이역)[15] 1909년 64.1에 불과했던 수여면의 민적밀도는 식민지 수탈에 필요한 경제 재편을 통해 중심지로 성장하여 1930년대 173.0으로 크게 증가하였다.[16] 여기(일본어)에 간략하게 조선 경기도 경성부 주변지구(朝鮮京畿道京城府周辺地区)가 후보였다고 나와있다. 기사(한국어)[17] 관동대지진 11일 이후 다이쇼 천황 조서를 통해 천도 자체는 일단 표면적으로는 백지화.[18] 그리고 수려선은 이듬해인 1972년에 폐선된다.[19] 용인군 지내면: 진위천으로 유입되는 황구지천의 분수계 마을들.[20] 현재 수원 이의동, 하동 광교신도시, 평택 진위면 일대.[21] 현재 수원 영통동 일대.[22] 참고로 1996년에는 일제강점기 일제에 의해 명칭이 변경된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개칭되고, 용인자연농원이 에버랜드로 개명되었다. 이 시기 용인에 거주했던 사람은 1996년 용인시의 승격, 초등학교 개칭, 에버랜드 명칭 변경, 캐리비안 베이 개장 모두가 한 해에 일어난 것으로 인상깊게 남아 있다.[23] 같은 날에는 파주군, 논산군, 양산군이 각각 파주시, 논산시, 양산시로 승격되었다.[24] 1981년 송탄시, 1995년 평택시.[25] 2020년 6월 기준, 6천명이 채 차이나지 않는다.[26] 공교롭게도 위에서 비교한 시 승격 짬밥이 좀 되는 도시들인 안양시, 안산시는 모두 시흥군에서 갈라져 나온 도시들이다.[27] 용인시 3개 행정구로 개편되기 전 이 지역의 명칭을 관계자들은 옛 이름인 '구흥(구성+기흥)'으로 하자고 건의했지만 어느 삼성전자 기흥 공장에서 당시 구성읍의 인구는 적었고, 기흥읍에 있었던 삼성전자 기흥 공장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기흥'으로 하자고 내세워 기흥구로 굳혀졌다. 참고로 1983년 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농서리 산 24번지 일대에 들어선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기흥 단지는 세계 반도체 업계에서 한국의 실리콘밸리로 통하고 있었다. 삼성전자에서는 기흥 공장이 반도체와 성분이 비슷한 '그릇이 흥한다'는 뜻을 가진 데 반해 구흥(驅興)은 '당나귀가 흥한다'는 의미라서 내심 지명 변경을 반대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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