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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목록

1. 개요2. 역사 속 폭군
2.1. 폭군으로 명백히 기록 되어 있는 경우
2.1.1. 한국사2.1.2. 중국사2.1.3. 그 외
2.2. 논란이 있는 경우
2.2.1. 한국사2.2.2. 중국사2.2.3. 그 외
3. 가공의 폭군

1. 개요

  • 독재자를 비롯하여 군주를 제외한 지도자를 기입하지 말 것.
  • 식민지의 군주는 본국에서 폭정을 벌인 경우를 제외하면 기입하지 말 것.
    • 지배국의 국민은 대부분 이들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식민지배국의 국민들은 자신들을 지배한 모든 식민 군주를 폭군으로 간주할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전신이 되는 영국령 북아메리카는 조지 3세를 폭군이라 여겼지만, 본국인 영국에서는 농부왕이라고 할 정도로 소탈했으며, 콩고 자유국의 군주인 레오폴드 2세는 생전에 자행한 악행으로 따지면, 역사상 손에 꼽을만한 폭군이라고 할 수 있으나 식민제국의 군주로써 입헌군주국이었던 본국인 벨기에에서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으니 비난은 받았고, 심지어 입헌군주국인 벨기에에서 벨기에 의회의 명령조차 무시하고 막가나면서 폭군에 근접했다. 그가 막판에 갑자기 입장을 바꾼 건 미국이 콩고 문제에 끼어들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이런 지배국-식민지 외에도, 국내에서는 훌륭하고 인자한 군주이지만 국외 문제에 대해선 매우 잔혹하고 강경하게 대응한 군주는 역사 속에서 꽤 많다.

2. 역사 속 폭군

2.1. 폭군으로 명백히 기록 되어 있는 경우

2.1.1. 한국사

나라 왕호 재위기간 비고
고구려 모본왕 48년 ~ 53년 [1]
차대왕 146년 ~ 165년 [2]
봉상왕 292년 ~ 300년 [3]
신라 헌덕왕 809년 ~ 826년
고려 충혜왕 1330년 ~ 1332년(1차)
1339년 ~ 1343년(2차)
[4][5]
조선 연산군 1494년 ~ 1506년 [6][7]

2.1.2. 중국사

나라 왕호 재위기간 비고
제양공 BCE 698년 ~ BCE 686년
이세황제 BCE 209년 ~ BCE 207년
서초 항적 BCE 206년 ~ BCE 202년
왕망 9년 ~ 23년
손오 손호(귀명후, 말제) 264년 ~ 280년
유송[8] 유의부(소제) 422년 ~ 424년
유준(효무제) 453년 ~ 464년
유자업(전폐제) 464년 ~ 466년
유욱(명제, 父) 466년 ~ 472년
유욱(후폐제, 子) 472년 ~ 477년
남제 소보권(동혼후) 498년 ~ 501년
후조 석호(무제) 334년 ~ 349년
염위 염민(무도천왕) 350년 ~ 352년
후연 모용희(소문제) 401년 ~ 407년
북제 고양(문선제) 550년 ~ 559년
고담(무성제) 561년 ~ 565년
고위(후주) 565년 ~ 577년
수양제 604년 ~ 618년 [9]
세종 947년 ~ 951년
해릉양왕 1150년 ~ 1161년 [10]

2.1.3.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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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ffffff,#1f2023><bgcolor=#ffffff,#1f2023><(>토론 - 식민제국 군주 추가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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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 합의사항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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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 합의사항45
토론 - 합의사항46
토론 - 합의사항47
토론 - 합의사항48
토론 - 합의사항49
토론 - 합의사항50
||

나라 왕호 재위기간 비고
고대 로마 콤모두스 177년 ~ 192년 [11]
카라칼라 211년 ~ 217년 [12]
사산 왕조 바흐람 4세 388년 ~ 399년
동로마 제국 포카스 602년 ~ 610년
안드로니코스 1세 1183년 ~ 1185년
베트남 전 레 왕조 와조제 1005년 ~ 1009년 [13]
스웨덴 크리스티안 2세 1520년 ~ 1521년 [14]
카스티야 연합 왕국 페드로 1350년 ~ 1366년(1차)
1367년 ~ 1369년(2차)
러시아 가짜 드미트리 1세 1605년 ~ 1606년 [15]
중앙아프리카 제국 보카사 1세 1976년 ~ 1979년 [16]
네팔 갸넨드라 2001년 ~ 2008년
란쌍 왕국 낭 깨오 핌파 1438년
오만 제국 사이드 빈 타이무르 알사이드 1932년 ~ 1970년

2.2. 논란이 있는 경우

패자였기 때문에 승자의 역사에 의해 조작된 게 아닌가 싶은 인물들, 혹은 전임자나 후임자가 지나치게 성군이라 상대적인 폭군으로 전락한 인물들,(이 정도는 암군에 가깝다.) 혹은 폭군의 면모[17]만이 아닌 다른 업적이나 성향 또한 충분히 인정받는 인물들이다. 또는 폭군의 기질이 다소 크지만, 해당 군주 또는 국가가 처한 상황을 고려해야 하는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

2.2.1. 한국사

나라 왕호 재위기간 비고
태봉 궁예 901년 ~ 918년 [18]
고려 충정왕 1349 ~ 1351년 [19]
공민왕 1352년 ~ 1374년 [20]
우왕 1374년 ~ 1388년
조선 세조 1455년 ~ 1468년 [21]
광해군 1608년 ~ 1623년 [22][23]

2.2.2. 중국사

나라 왕호 재위기간 비고
걸왕 [24]
제신 B.C. 1075년 ~ B.C. 1046년 [25][26]
진(秦) 시황제 B.C. 247년 ~ B.C. 210년 [27]
전한 무제 B.C. 141년 ~ B.C. 87년 [28]
금나라 희종 1135년 ~ 1150년 [29]
위소왕 1208년 ~ 1213년 [30]
선종 1213년 ~ 1224년 [31]
몽골 제국 ~ 원나라[32] 귀위크 칸 1246년 ~ 1248년 [33]
몽케 칸 1251년 ~ 1259년 [34]
혜종 1333년 ~ 1370년 [35]
홍무제 1368년 ~ 1398년 [36]
영락제 1402년 ~ 1424년 [37]
건륭제 1735년 ~ 1796년 [38]

2.2.3. 그 외

나라 왕호 재위기간 비고
로마 제국 네로 54년 ~ 68년 [39]
도미티아누스 81년 ~ 96년 [40]
아케메네스 왕조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기원 전 359년 ~ 기원전 338년 [41]
사산 왕조 아르다시르 2세 379년 ~ 383년 [42]
교황령 알렉산데르 6세 1492년 ~ 1503년 [43]
오스만 제국 무라트 4세 1623년 ~ 1640년 [44][45]
셀림 1세 1512년 ~ 1520년 [46]
압뒬하미트 2세 1876년 ~ 1909년 [47]
영국 리처드 3세 1483년 ~ 1485년 [48]
헨리 8세 1509년 ~ 1547년 [49]
메리 1세 1553년 ~ 1558년 [50]
러시아 이반 4세 1533년 ~ 1584년 [51]
표트르 대제 1682년 ~ 1725년 [52]
니콜라이 2세 1894년 ~ 1917년 [53]
루마니아 블라드 가시공 1448년(1차)
1456년 ~ 1462년(2차)
1476년(3차)
이란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1941년 ~ 1979년
줄루 왕국 샤카 1816년 ~ 1828년 [54]
메리나 왕국 라나발로나 1세 1828년 ~ 1861년 [55]
일본 고훈 시대 부레쓰 천황 498년 ~ 507년 [56]

3. 가공의 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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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의 패자로 남았기 때문에 왜곡된 기록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대다수의 학계에서는 모본왕이 폭군이 맞다고 보는 쪽으로 보고 있다.#[2] 후술하겠지만, 다소 논란이 있는 모본왕과는 달리 차대왕은 명백한 폭군이다. 태조대왕의 아들들을 살해하는 등 폭정을 일삼다가 결국 명림답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3] 창조리가 일으킨 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투옥된 후 옥중에서 두 아들과 함께 자살했다. 처벌과 후환이 두려웠던 듯.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의 조카이자 후임자인 미천왕은 고구려의 전성기의 문을 연 명군이다.[4] 연산군의 행태들을 가벼히 뛰어넘는 막장 행각들을 수시로 일삼았다. 결국 원나라로 압송 후 귀양길에 오르던 도중 갑작스럽게 사망했는데, 일설에는 원나라에 의해 독살당했다고 한다.[5] 재위 기간이 둘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는 한 차례 왕위에서 물러난 후 부친 충숙왕이 세상을 떠난 1339년 3월에 복위했기 때문이다.[6] 한국사에서 다루는 역대 국가중 가장 유명한 폭군. 일각에서는 연산군은 폭군이 아니고 치밀한 계산하에 왕권강화를 하려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거의 원균옹호론과 비슷하게 씹히기 십상이다.[7] 중종반정으로 인해 쫓겨난 후 귀양지 강화도로 쫓겨났으며 얼마나 신하들에게도 미움을 샀으면 그 어느 누구도 연산군을 다시 추대하려는 움직임 조차 없었다. 그래도 명색의 군주였던 만큼 기왓집은 아니지만 생필품 이런것은 전부 제공을 받은 뒤 쓸쓸하게 병사했다.[8] 사실 이 왕조는 창업군주 무제, 그나마 내정을 제대로 하여 국가의 기틀을 잡은 문제,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였던 마지막 군주 순제를 제외한 모든 황제가 암군과 폭군이다. 왕조 창업자인 유유와 그의 후손들은 호부견자의 아주 대표적인 예시이다. 사실상 북한의 백두혈통과 함께 부탄의 왕축 왕조와 정반대인 셈.[9]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인 수문제는 중국 역사에서 손에 꼽힐정도의 명군이자 성군이다. 문제의 시기에 수나라는 6~70년 이상은 거뜬히 존재할 수 있는 국력을 갖춘 나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아버지가 쌓아올린 대업적을 자기 대에 다 무너뜨린, 부정적인 쪽으로 대단한 인물이다.[10] 아이러니하게도 후대인 금세종은 금나라 최고의 명군이자 성군이다.[11] 제위 중반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콜로세움 암살미수 사건으로 제국에 재앙을 남긴 폭군이 되었다. 그가 뿌린 씨앗 때문에 이후 로마 제국은 1000여년간 쭉 내리막을 걷다가 멸망한다.[12] 20세기 이후에는 여러 군공과 군제개혁 등을 인정받아 폭군은 아니지 않느냐는 주장도 있다. 그렇지만 지나칠 정도로 잔인, 잔혹한데다 분노조절 장애와 거만함, 존속살해 등으로 동시대 로마인들에게 살아있던 시절부터 대놓고 폭군으로 불렸다.[13] 와조황제(臥朝皇帝: 치질에 걸려 누워서 정사를 봤기 때문에 이런 시호가 붙었다.)라는 시호로 더 유명하며, 는 여용정(黎龍鋌 Lê Long Đĩnh). 형인 중종 여용월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 즉위했을 때부터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여색과 향락에만 빠져살았다. 죄인을 나무에 묶은 채로 나무를 베어 죽게 하거나, 죄인의 몸에 기름을 바른 짚을 씌워 태워죽이고 우리에 가두어 물에 빠뜨려 익사시키는 등 잔인하게 처벌했으며, 사찰을 파괴하고 신료나 승려의 머리에 사탕수수를 올려놓고 껍질을 벗기면서 일부러 상처를 내면서 죽이는 등 다분히 사이코패스, 새디스트 기질이 보이는 기행들을 보였다. 이 때문에 신하들과 백성들의 증오를 받았고 즉위한지 4년만인 24세의 나이로 부하에게 살해되었다.[14] 칼마르 연합이라는 이름 아래 다소 느슨하게 묶여있던 스웨덴을 완전히 복속시키고자 내부 분란을 이용해 스웨덴에 진입했으나 스톡홀름 대학살(Stockholms blodbad)로 8~90명에 달하는 스웨덴 귀족들을 처형했다. 이 대학살로 아버지를 잃은 구스타브 바사노르웨이 국경지대로 도망쳐 스웨덴 독립 전쟁을 일으켰고 한자도시 뤼베크의 지원을 받은 끝에 덴마크를 물리치며 사실상의 독립을 달성했다. 반대로 크리스티안 2세는 스웨덴에서의 패배로 위신이 떨어져 가뜩이나 상공업 진흥 정책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덴마크 귀족들에게 찍혀 덴마크 왕위에서 폐위당했고, 노르웨이 왕위에서도 연달아 폐위당해 처가가 있는 합스부르크령 부르고뉴 저지대로 망명길에 올랐다. 덴마크와 노르웨이와는 달리 스웨덴에서는 스톡홀름 대학살로 인해 폭군(Kristian Tyrann)이라는 오명을 얻었다.[15] 자신이 이반 4세의 막내아들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라고 사기를 친 후 황제 자리를 도둑질했다. 그것도 모자라 갖은 폭정에 자기가 데려온 폴란드 사람들이 깽판을 치거나 말거나 그들을 지지하고 정작 러시아 사람들을 내팽개쳤다. 결국 재위 1년을 못 채우고 살해당했다.[16] 공화제의 대통령이 직접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고 황제로 즉위한 특이한 사례이다. 황제가 디자인한 교복에 항의한다고 수백 명의 학생을 학살하거나 수감된 반정부 시위 참여자들을 직접 때려 죽이는 등의 폭정을 저질러서 결국 프랑스의 암묵적 지원을 받은 전임자 다비드 다코에 의해 쫓겨났고, 제정은 1대 만에 폐지되었다.[17] 가령 정치는 그럭저럭 잘 했는데 숙청을 크게 벌였다든지[18] 발견된 유물 등을 볼 때 역사의 패자로 남았기 때문에 폭군이었다는 것은 왜곡된 기록이었을 학설이 대두되고 있다. 다만 동시에 폭군이라고 볼 만한 여지도 상당히 많았을 만큼 백성들과 신하들의 모진 미움을 받은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막판에 왕통을 후계자에게 물려주지도 못하고 망했다는 점만 빼면 중국사조조사마소와도 같은 경우이다.[19]고려사》에 폭군이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교차검증이 불가능해서 진짜였는지는 모른다.[20] 말년 한정.[21] 조부 태종과 비슷하게 왕권을 위해 폭력을 상당히 많이 휘두른 경우인데, 그나마 태종의 경우 해당 행위들이 왕 본인의 능력을 제대로 살려서 최종적으로는 나름 조선이라는 나라를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는 긍정적 평판과는 다르게 세조의 경우 명분도 부족하고 행동들이 최종적으로 크게 조선에게 좋았다고 보기도 애매해 논란이 있다. 일단 집권부터가 정당한 명분이 없다시피한 반란이었고, 집권한 후에도 반대파를 잔인하게 숙청하며 조카 단종을 폐출하고 암살까지 하는 패륜을 저질렀다. 게다가 대표적으로 사관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태종의 경우 세조와 마찬가지로 잔인한 숙청과 이복형제이자 세자였던 이방석을 폐세자하고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기는 하였으나 본인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국가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면 터치하지는 않은 반면 세조는 그런 거 상관없이 본인이 마음에 안 들면 일단 무작정 박해하였다. 게다가 세조 본인의 실정 때문에 한편으로는 이때부터 조선이 변질된 측면도 있다. 때문에 태종이 정치적 폭력 사건으로는 손자와 비슷한데도 폭군 논란이 별로 없는 반면 세조는 이에 대하여 왈가왈부가 상당히 잦다.[22] 한때 내치에서는 훌륭했다고 평가받았고 명나라와 친하게 지내되, 청나라와도 어느정도 친하게 지내는 중립정책을 하여, 외교도 뛰어난 군주였다는 평이 있었으나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내치에서는 암군이었고 숙청과 친국도 유난히 많았으며 외교적 평가와 경제적 평가도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다시 혹평이 주류. 다만 광해군이 정말로 명백한 폭군인 연산군과 같은 폭군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다소 논란이 있는 편이다.[23] 그럼에도 광해군이 폭군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는 이유는 반정으로 오른 인조가 광해군보다 내치도 못하고 외교를 파탄내면서 정묘호란과 정유재란이 벌어져 삼전도의 굴욕을 찍는 등 최악의 암군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24] 하나라 자체가 기록만 있고 유적, 유물이 발견되지 않은 나라라서 상나라가 지어낸 없는 나라라는 설이 있다.[25] 조작 주장이 자주 제기된다. 걸과 주 모두 머리가 비상하고 용맹무쌍한 점, 달기와 말희에게 홀려 폭정과 가렴주구를 일삼은 점, 탕과 서백 창을 가두었다가 뇌물과 미녀를 받고 풀어준 점, 풀어준 인물들이 각각 상나라 탕왕과 주문왕이 되어 새 왕조를 세운 점 등이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손호의자왕 등도 비슷한지라 아주 막장이 아닌 폭군들은 한두번씩 재조명 주장을 받기도 한다.[26] 다만 그런 재평가가 있는 것과는 별개로, 폭군의 대명사로서의 지위는 매우 확고하다. 위의 하나라 걸왕과 합쳐 걸주라고 흔히 지칭되는데, 연산군이 조선 폭군의 대명사라면 이쪽은 한자 문화권 전역에서 폭군의 대명사로 사용되었다.[27] 통일 대업을 달성하기 전에는 분명히 훌륭한 군주의 범주에 속하지만, 통일 이후에는 폭군의 모습을 더 많이 보여준 사례. 이러한 차이를 설명하는데에는 이분법적 시각 대신 일부 재평가를 포함한 보다 정교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황제의 통일 후 행보(특히 6국 통합 정책)가 많은 백성들의 고통을 낳았고 결과적으로 왕조의 단명을 낳았다는 점에서 그러한 재평가에도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28] 한무성세(漢武盛世)라는 전한의 전성기를 만들었지만, 전성기를 이끄느라 드는 재정의 부담이 너무 컸고, 무리하고 사치스런 토목공사를 벌여 백성들의 고혈을 짜냈다. 신하들에게도 폭압적이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폭군이었다.[29] 말년 한정. 하지만 뒤에 즉위한 황제가 그보다 더 극악무도한 폭군이었기 때문에 폭군 이미지가 많이 희석되었다.[30] 즉위 이전부터 암군과 폭군 성향이 보였다고 한다. 칭기즈 칸도 그의 행태를 보고 절레절레 흔들 정도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라는 등 강요하는 행동을 보여 훗날 금나라의 멸망 원인 중 한 축이 되었다. 또한 정치, 군사, 외교에서도 무능하다. 몽골이 처들어올 때 무능으로 유명한 금군 사령관 완안승유에게 약 49만명의 정예병을 주어 훗날 야호령 대전에서 모두가 전사하는 참담한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여러 장수들의 노력으로 위소왕 시기엔 금나라가 멸망하진 않았으니 다행이다.[31] 위소왕보단 외교나 군사적 측면에서는 뛰어난 황제지만 정치에서는 폭군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무리하게 수도를 카이펑으로 옮기거나 거란족 대신들을 숙청하는 등 굉장히 폭군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32] 적어도 몽골제국 시기는 중국사로 간주하기 어렵지만, 편의상 함께 기술한다.[33] 성격은 포악했으나 정치나 외교, 군사 분야에선 나름 명군이었다.[34] 무리한 남송 원정 시도. 하지만 그의 말년기였으니 말년 한정.[35] 고려의 폭군 충혜왕은 잘 처벌했으나 자기 자신도 정치적으로나 모든 면으로 봤을땐 폭군 수준이었다. 다만 남중국쪽에서 명나라라는 나라가 강성해지고, 원나라도 선대 칸 ~ 선대 황제들의 국정 운영 때문에 망국으로 변했으니 폭군 + 망국의 군주에 한정.[36] 황권을 크게 강화하기 위해 관료들을 상상 이상의 규모와 방법으로 잔인하게 숙청해댔다. 그 대신 일반 백성들은 최대한 피를 덜 보게 했고 내치(內治)를 대단히 훌륭하게 수행한 명군이라 강희제 "명나라의 치적이 당나라송나라보다 더 융성했다."고 칭송했을 정도. 다만 마황후가 말리지 않았다면 훨씬 더 심했을 가능성이 높았다.[37] 위의 주원장과 같은 경우. 숙청을 엄청 해댔으나 정치를 잘했다. 다만 일부 정당성이라도 있었다는 홍무제와는 달리 영락제의 숙청은 불필요한 것이 많았다고 평가받는다.[38] 전대인 강희제옹정제 시기에는 체제 정비 목적으로 한정적으로 이루어진 문자의 옥을 시도 때도 없이 일으켜 역사상 가혹하기 이를 데 없는 언론 탄압, 문화 검열을 시도했고 청나라의 학문적 기반을 초토화시켰으며, 10전 무공으로 잘 알려진 대외 원정도 버마와 베트남은 굴복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심한 피해를 본데다 무엇보다도 니오후루 허션이 청나라의 20년치 국가 예산에 달하는 규모의 자금을 부정축재할 동안 가만히 손 놓고 있었던 결과 건륭제 사후 청나라는 계속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39] 보통 폭군의 대명사 수준으로 유명하지만, 집권 전반기에는 의외로 형식상 유능한 모습을 보인 전형적인 암군의 그것에 가깝다. 현대에는 업적이 있어 재평가 중이고, 암군에 가까운 폭군으로 불린다. 다만, 로마인들의 기준으로는 형식적 공화정인 로마 제국 안에서 프린켑스가 불법, 위법 행위 외에도 반인륜적 범죄 등을 지시하거나 직접 한 까닭에 암군이 아닌, 진짜 폭군이 맞았다.[40] 기독교도들에게는 공포의 대상 그 자체였지만, 원로원과 로마 상류층 지식인들에게도 최악의 황제였다. 도미티아누스는 네로와 달리 불법이나 위법 행위를 펼치지 않았고, 그 능력이 뛰어난데다 법질서 확립을 이유로 펼친 엄격하고 공정한 통치 부분에서는 모두에게 극찬을 받았다. 하지만 이전의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칼리굴라)와 마찬가지로 냉혹한데다 원로원과 갈등의 골이 깊었던데다, 반란 사건 이후 의심이 심해져 암살 이후 기록말살형과 동시에 폭군으로 공인됐다. 갈등의 골이 이전 두 황제 이상으로 최악이었던데다, 황제가 반역죄로 원로원 의원들을 기소 후 고문까지 동원해 욕을 엄청 먹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더욱이 칼리굴라처럼 자기 신격화를 하면서도, 언행까지 대놓고 Rex(왕)들이 사용한 방식을 사용하고 이를 고발인 제도로 끝없이 감시해 원로원과 상류층 모두에게 두고 두고 욕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41] 특히 이집트를 포함한 사트라프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는데, 이는 제국이 분열되는 것을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행위였다.[42] 기독교들 한정. 그러나 기독교도들은 사산 제국내에서 소수였다.[43] 당시의 정세에 따르면 세속적인 군주로서는 그럭저럭 명군이라고 평가받기에 충분한 인물. 다만 오늘날에는 교황 하면 정치가가 아니라 성직자로서의 모습만 떠올리기 때문에 이 성직자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악평을 듣게 된 경우다.[44] 흡연자들에게는 악마보다도 더한 사람이라는 평을 들었다. 단지 담배를 피운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였기 때문인데 자세한 이야기는 튀르키예/여담 참고.[45] 다만 법 체계를 개혁하여 국가 막장 테크를 타고 있던 오스만 제국을 다시 일으켜세우는 한편 무너질 대로 무너진 황권을 강화했으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하여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또한 역대 오스만 제국의 황제들 가운데 마지막으로 몸소 군대를 지휘한 황제였으며, 담배와 커피를 필요 이상으로 강경하게 금지하지만 않았더라도 폭군은커녕 명군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능력만으로는 명군에 더 가깝지만 인간으로서 미움 받아 폭군 소리를 듣는 경우.[46] 이집트를 정복하고 페르시아를 상대로 기선을 제압하는 등 치세 8년 동안 제국의 영토를 2배로 확장한 공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지만, 매일같이 관료들을 처형하는 게 문제였다. 다만 마구잡이로 잡아 죽인 게 아니라 명령을 빡빡하게 내려놓고는 제대로 하면 포상, 제대로 못하면 처형이라서 일관성은 있는 편이었으며, 연회 자리에서 셀림과 신하들 사이에 처형하는 것을 두고 농담이 오고 갈 정도였다는 것을 보면 공포정치까지는 아니었던 듯 하다. 다만 후대에는 "셀림의 관료처럼 되기를!"이라는 말이 욕설로 쓰였다.[47] 서구권에서 붉은 술탄이라고 부를만큼 정치적 숙청을 많이 단행한 술탄이었다. 탄지마트 이후 입헌군주제로 바뀌어가던 오스만 제국을 전제군주제로 회귀하기 위해 검열제, 비밀경찰제 등을 도입했으나 이에 분노한 청년 튀르크당의 혁명으로 폐위되었다. 다만 오늘날에는 일부 학자들에 의해 숙청이나 학살의 규모가 다소 부풀려졌으며 해외 유배형에 처한 경우도 많았다는 등 재평가되는 분위기.[48] 이쪽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의해서 폭군 이미지가 덧씌워진 점도 있다.[49] 홍무제나 고려 광종, 조선의 태종 & 숙종처럼 헨리 8세도 정치는 잘했지만 그 대신에 숙청을 많이 한 사례다.[50] 자신의 동생이 너무 뛰어난 업적을 세우는 바람에 상대 절하되어 악역으로 묻혀버린 경우. 실제로는 그 정도로 포악하고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고, 오히려 당시 군주치고는 너그러운 편이었으며 업적도 여러 개 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업적으로 알려진 것 중에서도 사실은 메리 1세 대에 시작되었던 것이 제법 있다.[51] 말년에 이르러 혹독하고 포악하며 변덕스러운 성정으로 변해버렸다. 신하들을 잔인하게 숙청하기도 했고, 별 것도 아닌 일로 임신한 며느리를 폭행해 유산시키고 이를 항의하는 아들마저 구타해 죽게 하는 엄청난 사건을 저지르기도 했다. 다만 외교, 문화, 군사적인 면에서 상당한 업적을 거두어 이후의 러시아 제국의 기반을 튼실하게 다져서 현재의 러시아를 있게 만든 군주라는 점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52] 러시아 역사를 표트르 이전과 이후로 나눌 정도로, 러시아를 근대화시킨 명군으로 인정받지만 이 근대화를 위해 귀족과 백성들을 가혹하게 부려먹었다.[53] 무능한 통치로 나라를 몰락으로 이끌다가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민중들에게 폭군으로 찍혔다. 다만 군주로써 무능의 극치를 달렸을 뿐 개인적으로는 막대한 황실 자산과 개인 재산을 빈민 구제에 기부하는 등 선량한 인물이었다는 반론도 있다. 피의 일요일 사건은 애초에 본인이 수도를 비운 상황이라서 부하 관리를 못 한 책임이라면 몰라도 직접적인 책임까지 묻기는 애매하다. 차라리 평범한 농사꾼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니 폭군보다는 단순한 무능한 암군에 가깝다는 평이 많으나, 그에 대한 반론도 존재하는 상황인지라 애매하다.[54] 말년에는 암살 위협과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정신병에 걸려서 미친 폭정을 일삼다가 시해되었다. 하지만, 한때나마 남아프리카의 대부분을 통일하는 한편, 영국 등의 유럽 강대국들과 접촉해서 근대화 정책을 시행하는 명군의 자질도 보여주어서, 오늘날 대다수의 남아공 사람들은 샤카를 성군으로 인식하는 편이다.[55] 기독교 탄압과 영토 확장을 위한 내전으로 사람을 죽여 단 6년 만에 고국의 인구를 500만에서 250만으로 반토막냈다. 다만 최근에는 이게 서구 열강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고육책이라는 재평가도 있다.[56] 일본 고대사 최악의 폭군. 하지만 그 악행이라고 하는 것들의 대부분이 《고사기》에는 없고 《일본서기》에만 기록되어 있어서 후대에 게이타이 천황의 즉위를 정당화하려고 중국사에 등장하는 폭군들의 행적을 갖다붙여서 부레쓰 천황을 폭군으로 묘사했을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