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8-12 23:41:16

이명박/17대 대선 당시 장단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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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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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장점
2.1. 자수성가 스토리2.2. 민간경제·공공행정 경험2.3. 선거경쟁력
3. 단점
3.1. 개인 도덕성3.2. 약한 토론 능력

1. 개요

대한민국 제 17대 대통령 이명박의 대권주자 당시 장단점을 서술한 문서.

2. 장점

2.1. 자수성가 스토리

이명박은 고등학교 시절 구두닦이, 뻥튀기 장사, 막노동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 진학하여 현대건설에 입사, 평사원에서 초고속 승진으로 사장에까지 오른 전형적인 '서민 출신 자수성가' 스토리를 안고 있다.

이명박은 대선 후보 시절에도 "누구보다 서민의 애달픈 심정을 알고 있다"라며 당시 취업을 힘들어하던 청년들의 고통에 공감한다는 취지로 다가갔으며# 이명박의 유행어 중 하나인 내가 해봐서 아는데 역시 가난했던 시절 앞서 언급했다시피 낮에는 뻥튀기나 과일 장사를 하거나 온갖 노점상을 하며 생계를 위해 온갖 일을 해봐서 경험해본 일이 많다는 웃픈 유행어였다.

이와 같은 자수성가 스토리는 '기득권' 이미지에 사로잡힐 위험이 큰 보수정당 계열에서 몇 안되는 자수성가 이미지를 가진 정치인이었기에 더욱 희소가치가 컸다. 직전 대통령이었던 노무현 역시 대학교에 진학하지 못할 만큼 가난한 상황에서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인권변호사가 되었다는 자수성가 스토리가 있었지만, 그 이전의 3김의 일원들은 일제강점기 시절 출생하였다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청년시절 엄청난 가난 없이 성장한 편이다.[1] 이명박 이전 한나라당을 잡고 있었던 이회창 역시 아버지인 이홍규가 검사 출신이며, 이명박과 경선에서 같이 경쟁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아예 아버지가 대통령이었다.[2] 지금까지도 보수정당의 정치인 중에서 '인간승리'라고 할수 있을 정도의 스토리를 가진 대권주자급 정치인은 홍준표뿐인데, 지금보다 더 드물었던 상황 속에서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한 이명박은 서민의 공감에 대한 이슈를 가져갈수 있었다.

또한 이명박은 법조인에서 정계에 입문한 여타 정치인들과 다르게 기업에 입사하여 사장까지 오르며 '서민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며 성공한 기업을 이끈 경제전문가' 이미지를 더욱 탄탄히 쌓을 수 있었다. 이후 대통령에도 당선되며 자수성가 스토리에 방점을 찍었는데, 당선된지 17년이 넘어가는 지금에도 이와 비슷한 자수성가 스토리를 가진 대통령은 노무현[3]이재명[4]밖에 없으며, 여전히 보수정당 소속 정치인으로서는 유일하다.

2.2. 민간경제·공공행정 경험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이명박/서울특별시장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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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이명박/서울특별시장#|]]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이명박은 현대건설 사장까지 승진함으로서 민간 기업인으로서의 기업경영을 경험했고, 이와 더불어 3대 지선에서 당선됨으로서 서울특별시장으로서의 도시경영을 모두 경험해봤다.

특히 서울시장 시절의 업적은 이명박/서울특별시장 경력에 서술되었다시피 청계천 복원 사업,수도권 통합환승할인제도 같은 대표적인 제도 등으로 서울시민들에게 큰 호평을 받았으며, 서울시정 시기때는 중도우파를 표방하여 진보 중에서도 상당히 치우쳐져 있는 인물로 평가받는 심상정이나 박원순과도 교류하는 등 개방적인 모습도 보여주었다.

특히 이명박이 유력 대권주자로 급부상한 이후 '행정 경력' 역시 대권주자로서의 요소 중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3김 시대에서 김종필박정희 정부의 최측근으로서 풍부한 중앙행정경력이 있지만 당선 이전까지 행정적 성과를 거둔 적이 없는 김영삼김대중에게 정치인생 내내 대권주자로서의 존재감이 밀렸으며, 이명박 이전의 16대 대선에서도 이회창 후보와 노무현 후보는 각각 국무총리해양수산부장관을 역임하며 행정 경력이 있었지만 풍부하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기간이 짧았다.[5]

이와 같은 이유로는 우선 애초에 지방행정가를 선출하는 전국동시지방선거 자체가 1961년 박정희 정부 아래로 폐지된 뒤 1995년에 1대 지선으로 부활하기 이전 관선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지방행정가라는 이미지보다 정부에서 파견한 하수인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인데, 앞서 언급했다시피 민선 변경 이후 7년 뒤 이명박이 서울시장에 당선되어 국회가 아닌 자치단체장 출신의 경력 역시 대권주자로서의 장점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6] 공교롭게도 친이명박 성향으로서 이명박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김문수홍준표 역시 경기도지사,경상남도지사를 역임하며 쌓은 행정적 성과를 바탕으로 대통령 후보에 선출되는데 성공하였으며, 비록 다른 정당이지만 더불어민주당이재명 역시 이명박과 비슷하게 자치단체장 시절의 업적을 지지자들에게 어필하며 대통령에 당선되며 18년만의 자치단체장 출신 인물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재명의 당선 이후에도 오세훈,홍준표,김문수,김동연,김경수처럼 자치단체장 시절 업적을 바탕으로 대권을 준비하는 대권주자들이 많아졌는데, 이들의 대선배가 바로 이명박인 셈이다.

또한 보기 드문 기업가 출신 정치인으로서 성공한 사례 역시 보유하고 있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법조계에서 정계로 입문하거나 행정부의 관료 출신으로서 여당의 푸쉬를 받고 정계로 입문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고, 이명박 이후로도 후자의 경우는 많이 사라졌지만 지역의회의원이나 의원 보좌관등으로 국회에 입성한 직업정치인이 그 자리를 대체하였으며, 여전히 판사·검사·변호사 출신이 대거 있고 22대 국회에서는 아예 그동안의 국회 중 제일 많은 61명의 법조인 출신 의원들이 국회에 입성함으로서 방점을 찍었다.# 2019년 11월 당시 20대 국회에서도 직업정치인,사회운동가,법조인,고위 공무원 출신이 의회 다수를 차지하였지만 기업가와 기업 임원 출신 의원은 고작 18명에 불과했으며# 최근 20년간 기업인 출신 장관이 20년간 단 1.7%에 불과해 기업인이 정계에서 주목받기 쉽지 않다.# 이명박 이후로도 잠시나마 유력 대권주자로 부상한 기업가 출신 정치인은 없지만[7] 이명박은 당선됨으로서 현재까지 김대중과 함께 유이한 기업인 출신 대통령, 3김시대 이후 박근혜와 함께 유이한 非법조인 출신 대통령이 되었다.[8]

2.3. 선거경쟁력

경선시기 경쟁후보였던 박근혜는 아예 당 대표로서 17대 총선에서 당의 패배를 최소한으로 막는데 성공하였고, 4대 지선에서는 압승을 거둔 뒤 17대 대선 이후에도 비대위원장으로서 19대 총선을 과반 확보로 마무리하는 선거지휘능력까지 갖췄기 때문에 묻히는 사실이지만, 이명박 역시 정치인생 내내 모든 선거에서 전승하였을 정도로 선거경쟁력을 갖추었다.

사실 박근혜는 당 차원의 선거지휘능력은 검증된 것과 별개로 대통령 이전에 치룬 국회의원 선거는 모두 텃밭 중의 텃밭인 대구 지역구거나 비례대표로 출마했고, 무엇보다 아버지가 남긴 후광이 매우 강력했기 때문에 개인적인 선거경쟁력은 이명박이 더 우수할 수도 있다. 첫 선거는 전국구 투표로 국회에 입성했던 것이니 제외한다 치더라도, 다음 선거에서는 정치사에서 역사가 깊고 '정치 1번지'로 자주 소개되는 종로에 출마하여 당시 '청문회 스타'로 인기있던 정치인이자 이후 본인보다 먼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노무현을 꺾고 재선에 성공하였다.

그 이후에도 3대 지선 당시 서울시장에 출마할 때 경쟁 후보는 당시 대권주자급으로 동교동계에서 키워주고 있었고 이후 국무총리로까지 지명되는 김민석 후보였는데, 이 당시 김민석 후보는 '너무 어려 대선에 출마하지 못해 서울시장에 출마한다'라는 이야기까지 할만큼 유망세가 있던 정치인이었고, 김대중 역시 김민석을 강하게 푸시해주었으며 서울시장 역시 그 이전까지 민주당계 진영 소속이었던 조순고건 후보가 당선될 만큼 민주당 지지세가 상당하였지만 김민석 후보를 9%차로 크게 따돌리고 과반의 지지율을 확보해 안정적으로 당선되었다.

17대 대선에서도 당시 선거의 여왕이라고 꼽히던 박근혜를 경선에서 꺾으며 개인에 대한 경쟁력은 우위에 있음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이는 예정되었던 패배를 최소화시켜 '사실상 승리'라는 평을 들은 17대 총선을 제외하면 박근혜의 정계 인생 유일한 패배다. 이에 반해 이명박은 당의 수장을 잡은 적은 없지만 본인이 패배한 적은 단 한차례도 없었다.

대선 경선 당시 경쟁자였던 박근혜와 비교하여 당의 조직 기반은 약했으나 여론조사에서는 9%의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다. 비록 당대표까지 맡은 박근혜에 비해 당권은 약했지만 당시 국회부의장의 5선 의원이자 본인의 친형인 이상득의 도움으로 조금이나마 그 약세를 상쇄시켰으며, 서울시장을 거치며 생긴 서울특별시라는 가장 크고 본인에게 제일 든든한 정치 기반이 이명박을 58%나 지지해줌으로서 경선을 이기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단순히 서울 시민들의 지지만 있던 것은 아니다. 이명박은 서울시장으로서 성공하기 이전에도 앞서 언급했다시피 종로구 국회의원,서울시장이라는 정치적 중량감이 큰 선거구에서 만만치 않은 후보인 노무현과 김민석을 꺾고 당선될 만큼 이미 뛰어난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후보로 꼽혔다. 그 이전에도 야망의 세월의 대흥행을 바탕으로 샐러리맨 신화와 기업가로서의 성공적인 이미지가 잘 퍼져있었기 때문에 유권자들에게 '일 잘하는 기업인'으로서 각인되었던 상태였다.

서울시정 당시에는 앞서 언급했다시피 청계천 복원,서울숲 조성과 같은 환경친화적인 사업을 주사업으로 벌였고, 진보계열 인사와도 교류하고 파격적으로 홍대입구역 근처 클럽을 방문하는 등 청년층·중도층에 대한 경쟁력 역시 박정희의 딸이자 대구에서만 정치생활을 계속해온 박근혜에 비해 우수했었다. 실제로 당시 열린우리당의 기획위원장이었으며 이후 3선 국회의원이 되는 민병두 전 의원은 비록 이후 시정에 대한 비판을 하기도 하였지만 차세대 지도자감으로 박근혜 대신 차라리 이명박이 낫다는 발언을 하였으며,#, 당시 통일부장관이자 훗날 이명박과 경쟁을 하게 되는 정동영 역시 청계천을 방문하여 극찬을 늘어놓은 적이 있으며# 다음 지선에서 여당 소속으로 서울시장에 출마한 강금실 전 장관은 아예 이명박 시장의 뉴타운 사업을 계승하겠다고 이야기하였다.#

3. 단점

3.1. 개인 도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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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의 도덕성 문제와 비리 의혹은 대선후보때에도 따라다니던 고질적 단점이었다.

이명박은 대통령 이전에도 무려 전과 11범의 전과자였으며, 대선 당시 공보물에는 '전과 경력 없음'이라고 써놓기도 했다. 이미 공개된 학생시위 관련 전과조차 없음으로 발표했다는 것이 드러난 이후 전과 1건으로 수정한 바 있었지만, 그 이전에 언론에도 나온 건축법 위반과 선거법 위반으로 인한 유죄 판결이 남아있음에도 운동권 투신 이외에 전과는 없다고 거짓말을 써놓은 것이다.

이 당시에 전과로 드러나지 않았던 다스 실소유주 논란BBK 주가조작 사건 역시 한나라당 경선에서 박근혜가 지적한 논란이 후에 사실로 밝혀진 것이며, 위장취업 의혹 역시 제기됐었다. 재임 대통령들 중 비리와 연관 안된 대통령을 찾기 힘들 정도로 대통령이라는 자리 자체가 검은 돈과 멀어지기 쉽지 않은 자리라지만 이명박은 당선 이전부터 이미 범죄가 있었던 인물이기 때문에 비교가 다르다. 개헌 이후 역대 대통령 중 김영삼김대중을 제외하면 모두 기소를 당했고, 김대중 역시 '홍삼 게이트'로 대표되는 아들들의 비리 사건과 측근들의 사건으로 '게이트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안았지만 모두 대통령 시절 일어났던 논란을 바탕으로 기소당한 것으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으면서 대통령 이전의 논란으로 기소된 인물은 이명박이재명이 유이하다.

2007년 당시에도 이명박 후보의 BBK 사건 연루 가능성에 대해 이명박의 지지층마저도 29.7%가 연루되었을 것이라고 응답하며 30.5%의 '연루되지 않았다'와 큰 차이 없는 결과가 나오기도 하였다.# 또한 압도적인 지지율을 대선 기간 내내 이어온 인물치고 '도덕적일 것 같은 사람' 선호도에서 4위를 차지하며 문국현,이회창,정동영에게도 밀리는 결과가 나타났다.# 이 응답에서 38.5%가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는데 후보 지지자들 중 2/3이 넘는 비율이 도덕성은 다른 후보들이 더 우수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3.2. 약한 토론 능력

이명박은 본인의 유머감각이나 연설 실력과 비교하여 토론 실력이 확실히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된다.

우선 앞서 언급했다시피 법조인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법정에서 논리적 언쟁을 벌여야 하는 변호사검사 출신 정치인에게 밀릴수밖에 없으며, 정계 입문 이후에도 6년간 활동한 국회에서 큰 존재감을 뽐내지 못하였고,[9] 그 이후에도 시장으로서 행정에 주력하였기 때문에 애초에 토론을 할 일 자체가 없었다.

경선에서도 박근혜 후보의 공세에 대해 맞받아치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평가되었고, 경선 토론에서의 승자만큼은 박근혜로 여겨졌다.[10]

한나라당 후보로 선출된 이후 후보들간의 대선 토론에서도 좋지 못한 실력을 보여 보수 성향 언론인 뉴데일리에서도 이명박의 토론실력을 비판하는 기사가 실렸을 정도였고이명박 토론에 네티즌 '대체로비난' KBS가 주최한 대선후보 초청 토론회에 대해서는 '질문 내용을 사전에 협의하지 않으면 토론회에 참석하기 어렵다'라는 답변으로 거부하며 즉흥적인 토론에 대해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 되었다.# 이후 기존 선거와 다르게 선거법상 의무적으로 부여된 세번의 공식적인 토론 이외에 토론에 일체 응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명박을 전후로 제6공화국 대통령의 토론실력에 관한 잣대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명박 이전 3김의 일원이었던 김영삼김대중의 토론 능력은 이미 검증되었고, 다음 대통령인 노무현 역시 청문회에서의 소신 발언으로 주목을 받고 인권변호사로서 실력이 검증되었을만큼 확실한 언변을 갖췄다. 또한 대통령에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두번이나 대선에 출마한 이회창 역시 앞서 언급한 김대중,노무현과 토론을 해도 전혀 밀리지 않을 만큼 출중한 토론 실력을 갖추었다.

그러나 17대 대선에서 상대인 정동영 후보와 이회창 후보가 BBK 사건을 중심으로 이명박의 의혹에 대한 갖가지 공세를 하였고, 이명박 후보는 거기에 대한 반박을 논리적으로 하지 못하고 의도적으로 흐리며 토론에서 밀렸다는 평가를 들었지만 오히려 이명박의 치부를 강하게 공격하던 정동영에 대한 비토가 더더욱 쌓이고 이명박의 지지층만 굳건해지는 결과가 나오면서 이후 대선 토론의 양상도 바뀌었다.

당장 대선 경선에서 이명박을 공격했던 박근혜 후보는 18대 대선에서 도리어 공격받는 입장이 되었고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에게 맹렬한 공격을 받았지만 오히려 보수층 결집으로 이어져 오히려 당선요인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이 결집의 피해자라고 볼수 있던 상대후보 문재인 역시 토론 실력으로는 큰 강점을 지니지 못한 후보였고, 19대 대선에서 뛰어난 토론 실력을 갖춘 상대 당의 홍준표,유승민의 거친 공격을 받았지만 이명박급의 큰 득표율차로 당선되었다.[11]

이후 20대 대선에서도 토론 실력에서 경선,본선 경쟁상대였던 홍준표,이재명에게 밀린다고 평가받으며 이명박과 마찬가지로 4자토론을 지속해서 거부한 윤석열이 당선되었으며, 정작 19대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경선 당시 지속적으로 공격하고, 20대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에게 계속해서 토론을 하자고 요구한 이재명 역시 3년이 지난 21대 대선에서 본인이 대세가 되고 공격을 받는 입장이 된 뒤에는 3번의 토론을 제외하면 토론에 응하지 않았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이명박의 당선 이후 대통령의 토론 실력에 대한 잣대가 많이 낮아지게 된 것이다.
[1] 김영삼은 그 당시 진학하기도 어려웠던 대학교에 진학하여 졸업 후 바로 정계로 뛰어들 만큼 여유가 있었고, 김대중은 애초에 정계 입문 이전 청년사업가로 이름을 떨쳤다. 김종필 역시 일본으로 유학을 가거나 광복직후 서울대학교에 입학할 만큼 어려운 상황이 아니었다.[2] 다만 박근혜는 아버지를 1026사태로 인해 일찍 여의었고, 이에 따른 동정론 역시 확산시켰다.[3] 너무 가난하여 대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고, 이는 고졸 출신 사법고시 합격이라는 희귀한 타이틀을 얻게 되었고, 인권변호사로서의 이미지와 결합하는 데에도 성공하였다.[4] 이재명 역시 너무 가난하여 중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하다가 겨우 검정고시를 통과하여 대입 시험을 볼 수 있었다.[5] 이회창의 국무총리 역임 경력은 불과 126일로 그보다 적게 국무총리를 한 인물은 장면 내각 출범 이전까지 임시로 총리직을 맡은 허정성완종 게이트로 인해 취임하자마자 자리를 내려놨던 이완구, 그리고 이회창과 고작 5일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노재봉뿐이다. 노무현 역시 해양수산부 장관 취임의 성격 자체가 국무회의를 경험해보라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의도였고, 노무현 역시 해수부 장관 경력이 이후 대통령 경력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고 밝힌것과 별개로 233일만 재임하였다. 둘의 행정 경력을 합쳐도 359일로 1년이 채 안된다.[6] 그 이전에도 이인제손학규경기도지사 경력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대선에도 도전했지만 이인제는 경기도지사 경력보다 고용노동부장관으로서의 성과, 손학규는 노동운동 시절의 경력을 주 아이덴티티로 삼았다. 또한 두 인물 모두 양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된 적이 없었다.[7] 그나마 쌍용건설에서 근무한 정세균이 국회의장과 국무총리까지 역임하였지만 유력 대선후보로 선출되는데까지는 실패하였다.[8] 다만 이명박 개인의 의회 장악력이 적었지만 본인의 친형인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이 6선을 할만큼 풍부한 의회경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친형의 도움을 받았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이상득의 역할은 당 내에서의 존재감 유지까지였지 대권주자로 부상할수 있었던 것은 이명박의 개인 능력이다.[9] 김영삼의 도움을 받아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여 여당 국회의원으로 입성하였지만 그와 별개로 문민정부에 입각하거나 야당에 대립하는 인물이 아니었고, 정권교체 이후에는 불과 1년뒤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10] 이후 박근혜 역시 18대 대선에서 이정희 후보의 공세에 시달렸으며, 박근혜 화법으로 회자될 만큼 대권주자라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언변을 보였지만 이는 18대 대선 당시로서, 17대 대선에서는 그보다 나은 실력을 보였었다.[11] 물론 19대 대선 당시 문재인보다 더 좋지 않은 토론 실력을 지니고 있던 안철수의 수혜를 입은 것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