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1-29 20:57:18

손학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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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장점
2.1. 굵직한 경력2.2. 경기도지사 시절 업적2.3. 청렴함
3. 단점
3.1. 지나친 당적 변경사3.2. 빈약한 당내 기반3.3. 경쟁력 부족3.4. 계속된 선택 실패
4. 총평

1. 개요

17대 대선부터 19대 대선까지 대선 경선에 참여했던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의 정치인 시절 평가를 서술한 문서.

21대 총선에서의 패배 이후 사실상 정계를 은퇴하며 결국 손학규가 대선후보로 오르는 일은 사실상 없게 되었다.

2. 장점

2.1. 굵직한 경력

민주화 운동가의 대부로 알려져있는 김근태 의장과 같이 묶일 만큼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모두 이끈 인물이며, 학력 역시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학사에 이어 영국의 명문대인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정치학 석박사 과정을 통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정계에 입문해서도 대선 출마전까지 3선에 성공할 만큼 나름 경력 있는 의원으로 이름을 쌓았고,[1] 문민정부에서 보건복지부 장관 직을 맡았으며 경기도지사로도 4년간 재임하였다. 민주화 이후 중앙행정(장관직)과 지방행정(단체장)을 모두 경험해본 몇 안되는 인물이다.[2] 이 모든 커리어가 손학규가 대선주자로 떠오를때, 즉 20년 전 이미 완성된 커리어였던 것.

이 덕분에 처음 대통합민주신당에 입당했을 때에는 진보층들에겐 운동 경력으로, 중도층들에게는 학력과 경력을 모두 갖춘 인물로 어필할수 있었다.

2.2. 경기도지사 시절 업적

앞서 언급했던 경기도지사로 재임하며 경기도내 기업 114개를 유치하였다. 당시 참여정부 시기여서 여당의 푸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따낸 유치들이며, 지역 경제성장률 역시 7.5%에 육박했다. 김문수 후보가 21대 대선 국면에서 경기도지사 업적으로 내세운 기업 유치 건들 중 일부는 손학규 지사 시절 이미 유치된 것도 있다.

같은 선거 당선된 이명박 전 시장이 서울시장으로서 워낙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기에 이제와서 살짝 묻혔지만 손학규 역시 경기도지사 시절을 기점으로 단숨에 대권주자로 올라서기도 하였고, 4대 지선 국면에서는 한나라당의 대승으로 끝난 것과는 별개로 서울시장 여론조사는 처음에 열린민주당강금실 전 장관을 후보로 내세웠을 때 예상 후보군이었던 맹형규홍준표를 이길 수도 있다는 여론조사가 나왔지만, 경기도지사 역시 장관 출신인 진대제 전 장관이 나왔음에도 김문수 후보에게 시종일관 밀리다가 결국 패배해버릴 정도였다.

2.3. 청렴함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 경선 박스떼기 논란을 제외하면 크게 번진 논란이 없으며, 박스떼기 역시 사실상 정동영 후보측의 논란이다. 시간이 지나 바른미래당시절 이준석 전 최고위원이 당비 내답 의혹을 제기하였지만 이 사실로 처벌을 받은 적은 없다.

2006년 공개된 공직자 재산변동 내역을 보면 재산은 2억9394만 원으로 자택인 경기도 광명의 아파트 한 채와 1억여 원의 예금이 전부였다. 이후로도 비리는 커녕 선거법 위반으로 처벌을 받기는 커녕 게이트에 연루된 사실조차 없다.

3. 단점

3.1. 지나친 당적 변경사

2007년 처음 당적을 옮길 때에도 비판이 많았다.노무현 대통령을 "경제를 포기한 대통령"(일명 경포대 발언)으로 비판하고는 정작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민주신당 창당에 참여하면서 민주당 최대지분의 친노계를 자극했다는 것이다.[3] 어쩔 수 없이 건너온 철새정치인이라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민주화운동 및 학생운동, 노동운동 출신 정치인이 범민자당계 정당에서 범민주당계 정당으로 당적을 옮긴 것 자체로는 소위 '철새'라는 나쁜 평가까지는 듣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당장 노무현 자신도 민자당 탄생 직전 통일민주당에서 탈당하여 소위 꼬마민주당을 거쳐 민주당계 정당으로 합류한 인물이고, 철새의 왕 대접을 받는 이인제 같은 인물도 처음에는 철새 취급은 커녕 민자당~신한국당 당시의 경력까지 다 인정받아 단번에 대권주자급 정치인으로 대우받았지만 거기서 또 등돌리고 나간 탓에 줏대없는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힌 것. 말하자면 6공화국 이후 한국 정치사의 흐름에서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의 정체성이 민정당+공화당의 군사정권 계통 세력과 섞이고, 정치적 성향에서도 보수정당의 성격이 강해지면서 김영삼의 후원으로 정계에 진출한 민주화 운동 출신 정치인들 중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이 민주당계 정당으로 이적(移籍)하는 일은 드물지 않게 일어났던 것이다. 다만 손학규의 경우 그 시기가 2007년으로 늦은 편이었기에 그를 비판적으로 보는 이들은 "그 이전까지 15년 이상의 기간동안 선택할 시간은 충분했을텐데, 내내 민자당~한나라당에 머무르다가 당내에서 입지를 다 잃을 지경이 되어서야 민주당으로 넘어간 것 아니냐" 며 '철새 정치인이 맞다'고 비판하는 것이고, 반대로 그를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하지만 그 기간동안 당내에서 나름 개혁/진보파(양당구도에서는 중도파)라는 입장을 고수하며 버텼으니 손학규가 줏대없이 왔다갔다 한 것이 아니라 주변 상황이 바뀐 것 아니냐" 며 '철새 정치인은 아니다' 라고 변호하게 된 것. 게다가 이 점에서는 민주당이 여당이던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 내에서는 나름 협력적인 모습을 보여주던 인물이기도 하였다. 훗날 손학규에게도 이인제와 마찬가지로 '두 번째 이적' 이 있기는 하지만 이인제마냥 경선에서 지면 바로 통수를 쳐버리는 것이 아니라 당 내 경쟁에서 이긴 후보를 지원하는 모습을 여러번 보여주었고, 바른미래당-> 민생당으로의 두번째 이적 역시 혼자서 움직인 것이 아니라 정계 개편 분위기에 맞춰 함께 움직였다는 점에서 최소한 이기적인 권력욕만으로 철새행보를 보였다고 하기는 어렵지 않으냐는 변호는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손학규가 '철새정치인'에 해당하느냐는 각자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평가의 여지가 열려있는 편이다. 철새정치인으로 낙인찍혀 조롱과 불신의 대상이 될 정도는 아니지만, 그 행보가 본인에 대한 신뢰도에 야금야금 타격을 주었다고 할 수도 있다.

심지어는 이명박이 대통령 퇴임 뒤에, "그 사람도 참.. 한나라당에 남았으면 대권 후보까지 되었을 건데.. 괜히 옮겨가지고.."라는 말까지 했다. 다만 한나라당에서 나올 당시의 손학규는 이명박의 친이계와 박근혜로 대표되는 친박계 양쪽 모두에게 적대당하며 한나라당 내에서 정치적으로 끝장난 상태였다. 일례로 이명박은 손학규가 탈당한 직후에 "당에 남더라도 시베리아가 기다리고 있을 것"라고 냉소했을 정도.# 그러므로 훗날 이명박이 한 말은 진심으로 안타까워서라기보단 "그러길래 나한테 숙이면 편했을텐데..." 정도의 조롱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물론 이명박과 박근혜의 갈등을 감안해보면 정말 아쉬웠을 가능성도 적지는 않다.

이명박 입장에선 자신과 껄끄러운 박근혜가 당권과 대권을 모조리 쓸어담는 모습을 보느니 그나마 자신과 상대적으로 입장이 비슷한 손학규가 더 나았을 것이다. 범친이계에서 내세울 홍준표, 정운찬, 김태호, 임태희 같은 대권주자들은 전부 박근혜에 비해 네임밸류도 낮고 체급도 맞지 않다. 그나마 당 대표를 해본 홍준표나 도지사와 장관을 해본 손학규 정도가 박근혜에 비벼볼만한 수준이었다. 물론 손학규가 탈당하면서 이렇다할 비박 주자가 사라진 이명박으로서는 박근혜에서 정권을 넘겨주는 것이 아쉬웠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었다고 정말 손학규가 대권 후보가 될 수 있었느냐는 다른 문제. 만약 손학규가 한나라당에 남아었다면, 2007년 대선 경선에서 4위로 사실상 꼴찌를 했던 홍준표의 현실이 손학규의 미래에 가까웠을 것이다. 이명박은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에도 차기 대선 주자로 이재오와 정운찬 같은 본인과 성향이 잘 맞으면서 친밀한 최측근을 지지했던 만큼, 손학규가 홍준표처럼 친이계와 같은 배를 탔다고 해도, 손학규가 이명박 정부 말기 인기도가 떨어진 친이계와 강력한 콘크리트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는 친박계 사이에서 투쟁하면서 본인의 확고한 지지층을 만들어 차기 대선주자로서 입지를 강력하게 확보하지 못했다면, 한나라당의 차기 대권주자가 되기는커녕 계파도 만들지 못하고 당시 당 대표 체제가 무너지며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차기 대권 주자의 꿈을 접었던 홍준표와 비슷한 처지가 되었을 확률이 높다. 나중에 손학규와 비슷한 포지션이던 홍준표가 대선에 나가고 직후에 당권을 잡긴 했지만 그 때는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에서 마땅한 대권 주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 대표이던 김무성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견제나 당하다가 총선에서 진 후로 존재감이 사라졌고, 친박계 인사들이 나서기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친박 계파가 아예 무너지고 보수 진영 자체가 궤멸 위기에 놓인 시점이어서 불가능했다. 그래서 비박계 중진이던 홍준표가 사실상 빈집털이를 한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3.2. 빈약한 당내 기반

손학규는 이미 2000년대 대권주자로 올라섰지만 그 이후 당을 움켜쥘수 있는 계파를 형성한 적은 없다. 애초에 당적을 처음 옮긴 이유가 친이명박 계파에게 밀려 본인의 계파를 모조리 잃어버렸기 때문이고, 대통합민주신당에서도 이미 차근차근 계파를 모으던 정동영에게 밀린 뒤 급부상한 친노에게도 밀려버렸다. 이후 국민의당에 입당했지만 이후 안철수,유승민이 선거 패배로 밀려날때까지 당의 주류가 되지 못했으며, 바른미래당의 대표로 선임된 이후로는 끝없는 갈등을 일으키다 21대 총선에서 0석이라는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바른미래당 와해 과정에서 최측근이었던 이찬열마저 손학규를 등지게 된 것은 엄청난 타격이었다. 심지어 손규라는 멸칭[4]으로 불리는 등 비아냥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3.3. 경쟁력 부족

손학규가 결국 긴 세월 동안 대권주자로 분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권은 커녕 대선 후보로 다다르지 못한 이유는 결국 위에 언급된 철새 이미지를 이길수 있는 경쟁력도 부족했다는 것이다.

17대 대선에서도 대선주자가 아쉬운 민주당계 입장에서 손학규를 받아들였지만 결국 손학규도 이명박 후보나 박근혜 후보를 상대로 참패한다는 여론조사만이 나왔고, 당내 기반이 저조했던 그를 굳이 밀어주어야 할 이유가 없어지자 경선에서 경쟁력을 급속도로 잃기 시작하였다. 상대 후보인 정동영,이해찬,한명숙에 비하여 양자대결에서 훨씬 더 나은 결과를 보여주었어야 했지만 중도적 이미지에 비해 얻는 경쟁력은 낮았던 것.

이후 18대 대선 국면에서도 경쟁력이 더 강한 문재인안철수에게 밀렸다. 17대 대선 이후 5년간 다른 대권주자들과 당권을 두고 다투면서 소모된 정치적 이미지가 악영향을 주고 만 것이다. 재보궐선거로 분당구 을에 당선되며 강재섭 후보를 이기는 대파란을 일으켰음에도 당원들은 더 큰 전국선거에서 중도층을 끌어들일수 있는가에 대해 큰 의문을 갖게 되었다. 결국 이 의혹은 말끔히 해결되지 못했고, 상대적으로 더 신선한 이미지의 안철수나 아직 정치적 이미지 손상이 덜 된 시점에서 친노의 수장이 된 문재인에 비해 나은 모습을 보여줄수 없었다.

3.4. 계속된 선택 실패

정치적 감각 문제로 지속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반복했으며, 결국 그게 누적되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즉, 일부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던 "뽑히질 못해서 그렇지 능력과 인성은 괜찮다"라는 이미지마저 점차 사라져가 재기하기 어려워졌다.

'손학규 징크스'까지 나올 정도로 손학규가 중대한 결심을 하면 대형 사건이 터지는 일이 일어나 불운이 크긴 했지만, 20대 총선 당시 애매한 일보로 일관하며 선거 패배 이후를 벌써 예상하며 당권을 잡을 준비를 하다 야당의 승리로 끝나 급속도로 존재감이 실종된 것은 순전히 본인의 선택 미스다. 이후 바른미래당 시절에도 수많은 내홍 끝에 민생당으로서 한석도 건지지 못했던 것 역시 본인의 잘못된 선택이 겹쳐 일어난 결과이다.

4. 총평

"자신만의 브랜드를 보여주기에 부족했다”
2007년 1월 10일 경향신문 "손학규 인터뷰 평가"#
뛰어난 정무적 능력과 상반되는 시류에 어둡고 정치적 감각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줬다. 총리나 장관 같은 임명직 관료에 맞는 사람이 선출직을 노리다 보니 생기는 비극의 주인공이다.

사실 민주자유당에서 정치를 시작한 만큼 보수층으로의 확장성도 있고, 한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경기도지사를 역임했다는 점에서 수도권에서의 득표력도 기대해볼 만하며, 경상남도지사보건복지부장관 재직 경험을 통해 행정 능력까지 입증했다는 점에서 '저평가 우량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2007년에는 한나라당에서 이명박과 박근혜 양강에 밀리고, 진영을 옮겨 대통합민주신당 창당에 참여하면서 유력 주자로 부상했으나 조직표를 끌어모은 정동영에게 밀려버렸다. 2012년의 경우는 더욱 허망한데, 2010년~2011년 민주당 대표를 지내면서 2011년 4월 재보궐 선거에서 '험지' 분당구 을 당선에도 성공했으나,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재부상한 친노계에게 장외 주도권을 내준 결과,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참신한 슬로건을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민주통합당 제18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문재인에게 큰 차이로 패하고 만다. 마지막 시도에서는 2016년 국민의당 창당 과정 및 20대 총선에서 애매한 태도로 일관한 결과, 대권주자로서의 존재감이 실종되기에 이르렀다.

썰전에서 이철희 소장이 말하기로는, 손학규는 대통령감이지만 정치에 무른 편이라고 한다. 이유는 너무 신사라서 즉 정치 투쟁에 밀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판에 20년 있었던 사람에게 신사라서 투쟁에 밀린다는 말은 결코 칭찬이 아니다. 비슷한 시기 민주당 대표를 지냈던 정세균 전 국회의장의 사례도 참고할 만 하다. 정세균 역시 누구에게나 알려진 정계의 신사로서 여야 어느 쪽에서건 적을 만들지 않기로 유명했는데, 이로 인해 국회의원 최대 영예인 국회의장 직을 마치고도 관례인 정계은퇴에 나서지 않고 계속 정치활동을 시도하고 있다. 물론 이는 정세균의 지역기반이 호남이며, 정당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사'형 정치인은 결국 대통령감이 아니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제대로 말하면 당내의 여론을 주도하는 코어 지지층에 인기가 부족한 스타일, 다르게 말하면 전형적인 '중도 후보 필승론'에 해당하는 후보라 볼 수 있다. 양당제 구도가 고착화된 정치상황에서 양당의 핵심 지지층은 어쨌건 자당 후보가 나오면 좀 마음에 덜 들더라도 찍어줄 가능성이 높은 고정 지지층으로 보고 중도 유동층 확장력이 좋은 후보를 내세우면 승산이 크다는 논리. 그러나 분명 합리적으로 보이는 논리인데도 불구하고 큰 선거에서 이 논리에 따라 승리한 사례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데, 그 이유는 '확장성 좋은 중도 후보'는 대부분 핵심 지지층에서는 인기가 덜하기에 당내 경선 등 후보 선출 절차를 뚫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주요 대선후보급 정치인으로 평가받았으면서도 대선 본선에는 한번도 진출해보지 못한 손학규가 바로 그 전형적인 예시라 할 만한 것. 이제 70을 훌쩍 넘은 고령이라는 점도 걸림돌로 작용한다. 보수층과 수도권에서 먹히는 강점이 있다는 말이 무색하게 2014년 7.30 재보궐 선거새누리당의 신인 김용남 후보에게 깨졌다는 점에서 실제 확장성에 의문이 있기는 하다. 잦은 수준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두 차례 양대 정당을 떠나고 나서 국민들이 지지할만한 신뢰를 얻지 못한 것도 문제였다.

[1] 이후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며 최종적으로는 4선이 되었다.[2] 다른 인물로는 똑같이 경기도지사를 역임하였고, 고용노동부 장관직을 역임한 김문수 전 지사와 경상남도지사,행정안전부 장관을 역임한 김두관 전 지사가 있다. 이명박 전 시장과 이재명 전 지사도 중앙행정을 경험하긴 했으나 대통령으로서 역임한 것이기 때문에 제외.[3] 노무현 대통령 본인도 회고에서 "한나라당에서 나를 가리켜 경포대라고 했다. 나도 예전에 사실을 잘못 알고 비판한 경우가 더러 있었다. 하지만 고의로 사실을 왜곡해서 남을 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말을 한 분이 당을 옮겨 이쪽으로 건너왔다. 할 말이 없었다"라고 대놓고 비판을 가했으며, 2007년 대선 당시에 대통합민주신당 경선에 나선 유시민은 손학규를 "보따리 장수"라고 비판했다.[4] 손학규에게 모두가 '학'을 떼며 떠나갔다고 해서 학을 제외한 손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