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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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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경제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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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국립대학교, 196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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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칼리닌 대로,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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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랴빈스크주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소, 193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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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 SSR 바쿠 항구, 1980년대
인구 2억 8,673만 명 1989년, 세계 3위
명목 GDP 2조 6,600억 달러 1989년, 세계 2위
PPP GDP 2조 7,985억 달러 1990년, 세계 2위
1인당 명목 GDP 6,894 달러 1990년, 세계 37위
1인당 PPP GDP 9,300 달러 1990년, 세계 28위

1. 개요2. 역사3. 화폐4. 통계5. 농업6. 천연자원 산업7. 소비자경제8. 문제점
8.1. 계획경제의 한계8.2. 과도한 군비부담8.3. 노동생산성 저하8.4. 낙후된 물류와 유통망8.5. 정보산업 발전의 정체 8.6. 자원의 저주
9. 기타10. 참고11. 같이 보기

1. 개요

이 문서는 소련경제에 대하여 다룬다.

미국에 비해 이러저러한 문제점은 많았지만 사실 소련 경제는 전반적인 체급은 튼튼했다. 비록 경공업이 빈약해 생필품 부족이 빈번했고 식량도 미국[1], 아르헨티나[2] 등지로부터 막대한 양을 수입했지만[3] 중화학 공업이 튼실하여 공업 생산량은 세계 5분의 1이나 되었다. 주요 수입 및 산업은 자원수출, 철강, 항공우주, 화학, 중공업, 전자 등이었다고 한다.

경제 성장률신경제정책 기간부터 급속히 성장하기 시작했고 중간에 우크라이나 대기근독소전쟁으로 타격을 입기는 했지만 1950년대에 완전한 전후복구를 이룩했고 브레즈네프 초기인 1960년대 후반까지는 양호한 수준을 보이며 고도경제성장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중후반의 1차 코시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4] 2차 코시긴 계획 기간 이후로 성장률이 3% 이하 수준으로 하락하였고 이러한 저성장 현상은 1973년 석유 파동으로 막대한 양의 달러가 소련으로 들어왔음에도 개선되지 않아 브레즈네프 중후반기 내내 중진국 함정 현상을 겪게 되었다. 1982년에 집권한 유리 안드로포프 때는 기강 단속 강화로 일시적으로 효율성을 높여서 경제성장률을 4%대로 반등시켰지만 이는 오래가지는 못했으며 결정적으로 1986년의 유가폭락으로 외화수급에 타격을 입어 기존의 계획경제 정책만으로는 한계를 맞이하게 되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장화를 조금씩 단행하였고 그 결과 1988년에는 일시적으로 경제성장률이 5%대까지 올라갔으나 1989년에는 동구권 해체에 따라 코메콘도 해체되어서 결정적인 타격을 맞이하였고 이후 정치혼란과 함께 소련의 경기침체는 돌이킬수 없게 되었다. 다만 1960년~1989년까지 소련의 평균 경제 성장률은 전 세계에서 평균 이상이었고 1980년대에도 미미하게나마 성장했을 것으로 추측되나, 1986년 이후에는 여러가지 대내외적 문제로 인해 -2~2% 수준의 저성장을 기록했다. 같은 시기 미국의 경제 성장률은 낮지 않았고 대한민국의 경제성장률은 훨씬 높았다. 사실 1990년대 러시아의 불경기도 소련 말 경제 악화상황을 직접적으로 이어받은 만큼 좋지 않았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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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화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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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통계

1985년 소련 국내총생산(GDP)은 세계 2위였다.[5] 소련의 통계치에 따르면 1990년에 1인당 국민 소득이 약 9,200달러 정도였는데, 당시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소련 1인당 GDP의 3분의 2 정도인 약 6,000달러 정도였다.

당시 소련은 국민 소득을 공식적으로 발표한 교환가격으로 계산했다. 따라서 루블의 환율은 비정상적으로 오락가락했으며, 소련은 GNP나 GDP를 발표하지 않아 대부분의 통계 자료에서 제외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 있다.

한동안 많은 이들이 소련 경제의 이러한 면을 일컬어 암시장이라고 했지만 정확하게는 제2경제라고 하는 것이 옳다. 소련을 포함해 공산권의 제2경제는 단순히 불법적인 암시장으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다. 제2경제에는 불법적인 영역 외에도 정권이 용인한 부분도 있고[6] 혹은 전혀 법적으로 규율되지 않은 영역도 있기 때문에 제2경제라고 해서 무조건 불법이고 리스크가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 불법인 부분조차도 실제 국민 생활 영역에서 사실상 행정력에 의한 단속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무의미하고. 그리고 암시장을 이용하는 것이 리스크가 있으니 무리가 있다면 자유시장경제라는 대한민국조차도 식용 생수나 일부 커피 종류, 양주 같은 제품은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7] 일반적인 GDP 기준이 적용되어서는 안되며 일반적인 선진국에 비해 부정부패가 심각하여 지하경제도 GDP대비 타 선진국에 비해 클 것으로 추정[8]되는 그리스, 이탈리아같은 나라도 일반적인 GDP 기준을 적용하면 안 된다. 더 나아가면 시장에 대한 법적 규율과 집행이 부족한 대다수 개도국들도 마찬가지고. 오히려 국제 기준이라면 최대한 동일한 기준을 적용해 비교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애초에 GDP라는 개념부터가 시장에서 생산되는 부가가치를 기준으로 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시장을 무시하는 것부터가 논리 모순이다.

문제는 소련의 GNP 중 군사비 지출이 어마어마했다는 점이다. 소련은 몇몇 특수한 국가를 제외하면 세계 그 어떤 나라보다 군사비 지출이 큰 나라였고 때문에 실제로 인민들의 가처분소득은 명목 일인당 GNP와 매우 큰 차이가 있었다.

CIA 자료를 포함해 몇몇 사료에서는 1인당 GNP를 1990년 기준으로 9,300달러로 당시 기준에서 중진국과 선진국의 사이 정도의 소득은 되는 것으로 간주했다.[9] 세계 3위에 달하는 3억의 인구 덕에 국민총생산(GNP)은 1985년까지 세계 2위(1977년 당시 국민총생산 8,200억 달러), 1986년에 일본에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로 추월당했으나 1990년까지 3위를 유지하였다. 주요 수입 및 산업은 자원수출, 철강, 항공우주, 화학, 중공업, 전자 등이었다고 한다. 다만 추후 학자들로부터 CIA의 통계는 소련의 GDP를 과대평가했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이는 CIA가 구매력 평가 방식을 활용하고 있기 때문인데 구매력 평가 방식은 실제 국민들의 체감을 반영하는 면이 있으나[10] 상대적으로 개도국의 경제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제대로 된 국제비교 기준으로는 한계가 있다. GDP(PPP) 참조.

UN의 통계에 따르면 1인당 GDP는 1983년에 3,650달러로 가장 높았고(당시 시장가격을 반영한 수치다.) 관련자료 그 이후로는 대체로 감소 추세였다. 이에 기초해 GDP를 따지면 1978년부터 일본보다 그 수치가 낮아졌다. 1980년에는 서독에도 일시적으로 역전당했고, 1986년에 다시 역전당했다. 미국에 비교하자면 1970년 기준으로 약 절반 수준인 GDP, GNP를 자랑했으나 80년대에는 1/3으로 쪼그라들었다. 다만 생산량만 따지면 소련이 독일이나 일본보다 훨씬 많았다. (예를 들면, 자동차 생산량, 가축 사육 두수, 곡물 생산량, 발전량 등)

5. 농업

소련은 전세계에서 가장 넓은 국토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정작 식량만큼은 자급자족하지 못했다. 사실 소련의 경지면적이 국토 크기에 비하면 좁은 편이기는 하지만 인구 규모 역시 국토 면적에 비해 적었다. 나름 소련의 경지면적은 세계 1위였고, 특히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흑토 지대가 있었기 때문에 농업이 효율적으로 운영되기만 했다면 식량 역시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당장 러시아 제국 시대에도 오데사를 통해 수출되는 우크라이나은 러시아의 대영국 외교 카드로 사용될 만큼 막대한 양이었다.[11]

즉, 소련의 식량 자급이 힘들었던 것은 경지면적이나 천연자원의 부족 때문이라기보다는 서방(특히 미국)을 따라잡고자 무리해서 중화학공업에 몰빵한 결과로 발생한, 농업시스템, 농업기술, 농자재[12] 산업의 정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발생한 비효율 탓이 컸다. 특히 소련의 밀과 감자 생산량은 당시 세계 1위였지만 정작 가축 사료용으로 밀을 썼기 때문에 밀을 수입해야 했다. 또한 빵은 거의 원가수준에 팔아 가격은 싸도 오히려 이 때문에 농촌에서 빵을 사가다가 가축에게 먹이는 웃지못할 일들도 있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소련이 해체된 후 세워진 러시아 연방은 우크라이나를 잃고도 밀 순수출국이며, 러시아의 밀 흉작이 아랍의 봄의 원인이 될 정도로 국제 식량 가격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1930년대 급속한 중화학공업화 과정에서 도시노동자들에게 안정적으로 저렴한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서 집단농장 정책을 무리하게 펼쳤는데, 이것이 농민들의 큰 반발을 사면서 농업생산성이 크게 추락하였고, 소련해체 시점까지 복구되지 못했다. 그 결과 소련 후기 때는 소련 전체 경작지의 3%에 불과한 개인 소유의 텃밭(별장)에서 생산되는 작물이 소련 농업 생산량의 25%를 차지하였으며 육류는 40%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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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천연자원 산업

소련은 압도적인 세계 최대의 자원 부국이었다. 소련이 대외적으로 외화를 벌어들인 주요 루트는 널리 선전된 군수 산업도 철강 산업도 아니었다. 군수 산업은 소련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생각보다 크지 않았고, 무기 수출이 소련 경제에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그 규모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많은 예산을 잡아먹었던 우주 개발 분야는 경제적 이윤 창출과는 무관한 미국과 체제 경쟁의 산물로, 경제적 관점에서는 이윤이 아니라 천문학적인 예산을 소모하여 국가 재정에 부담을 안기는 천덕꾸러기였다.

소련 최대의 산업은 석유 산업이었으며, 석유 이외에도 천연가스 등 천연 자원 수출이 소련 외화 수입의 대들보 역할을 했다. 1970년대 소련은 석유, 천연가스, 수력, 원자력 등 전세계 에너지의 20% 이상을 생산하는 세계최대의 에너지 자원 부국이었다.

소련의 가채 석유 매장 추정량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은 세계 2위이며, 소련은 세계 1~2위를 오가던 세계 최대의 산유국 중 하나였다. 대부분의 기간 동안 소련은 중동을 훨씬 능가하는 산유국이었다. 제정 러시아 시절부터 세계 1~2위의 산유국이었고, 러시아 혁명과 적백 내전의 여파로 몇년간 3위로 밀려났지만 1927년 2위를 회복한 후 1973년까지 세계 2위 자리를 쭉 유지했고, 1974년 오일 쇼크 시기에 세계 1위로 올라선 후 소련이 망하던 1990년까지 계속 세계 1위의 산유국 자리를 유지했다.

이미 19세기부터 러시아의 카스피해 유전은 세계 최대의 유전이었다. 20세기 중반 이후 석유 탐사 기술이 크게 발전하면서 볼가 우랄 산맥, 시베리아, 북해 등 드넓은 소련 영토 곳곳에서 광대한 유전이 발견되어 소련은 압도적인 석유 생산량을 유지할 수 있었다. 소련은 처음에는 석유를 자국에서 소비하고 이웃 공산권 위성국가들에게 수출하다가 볼가 우랄 유전이 개발되면서 산유량이 대폭 증가했고 이에 1950년대 후반 미국 등 서방과 급작스런 관계 개선을 시도하며 석유를 서방국가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80년대 서방 기술력으로 사우디 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의 석유 채산성이 크게 향상되었고 1980년대 중반 유가가 폭락했다. 그러자 석유 산업으로 경제를 지탱하던 소련은 큰 타격을 받았다. 여기에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전비 지출, 엎친데 덮친격으로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 사고를 수습하는데 천문학적인 비용이 지출되면서 소련 경제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석유에 이어 천연가스 수출도 상당한 외화수입의 원천이었다. 소련은 압도적인 세계 1위의 천연가스 매장량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전쟁 수행을 위해 천연가스를 대대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당시 히틀러는 소련의 군수 에너지 공급에 타격을 주기 위해 소련의 석탄 탄광 지대를 점령했고, 이에 석탄 공급이 어려워지자 스탈린은 석탄의 대안으로 천연가스 공급을 대폭 늘리라고 지시했다. 이에 소련은 즉각 대대적인 가스 개발에 착수했고, 가스 파이프라인이 구축되기 시작했다. 1950년대 중후반 시베리아 등에서 막대한 천연가스 매장이 확인되었고, 당시 막 정권을 잡은 흐루쇼프는 천연가스를 서방에 수출할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당시 서유럽도 산업 발전에 따른 천연가스 공급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소련은 천연가스를 유럽에 수출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고, 결국 1960년대 중후반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핀란드 등과 천연가스 수출 협정을 맺는데 성공하여 서방에 천연가스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1968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프라하의 봄)이 벌어지자 소련에 대한 경계가 높아졌고 소련 천연가스 수입을 중단하라는 목소리가 서유럽에서 높아지기도 했지만, 서유럽의 좌파 정치인, 지식인들은 오히려 소련과 경제협력을 통해 개방을 유도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고 소련의 천연가스 수출은 70년대에 급증했다. 70년대에 오일쇼크가 발생하자 서유럽은 석유 의존을 줄이고 천연가스 사용을 증대하는 방향으로 에너지 정책을 전환하기 시작했고, 이에 당시 세계 1위 산유국이었던 소련은 유가 폭등에다가 천연가스 수출이 급증하는 쌍끌이 경제 호재의 수혜를 제대로 누리게 되었다. 오일파동 이후 스페인, 네덜란드, 스웨덴, 스위스, 벨기에 등에도 천연가스 수출이 이루어지면서 서유럽 전체에 가스를 공급하게 되었다. 한편 서유럽에서는 천연가스를 과도하게 소련에 의존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높아짐에 따라 70년대 중반 독일(서독), 프랑스, 오스트리아가 공동으로 이란에서 천연가스를 개발 수입하기로 공동 협정을 맺었지만 1979년 이란 혁명이 일어나 이란과 서방과의 관계가 단절되면서 중단되고 말았고, 소련에 대한 유럽 천연가스 의존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밖에도 소련의 드넓은 국토에 엄청난 천연자원이 매장되어 있었다. 주기율표에 있는 모든 원소가 매장, 채굴 가능했고, 석탄, 철광석, 동, 니켈, 망간, 아연, 코발트, 텅스텐, 수은, 보크사이트, 연 등은 세계 1위의 매장량을 자랑했다. 그밖에도 금, 티타늄, 알루미늄, 석영, 다이아몬드, 우라늄 등 각종 천연자원, 원자재, 에너지들이 채굴되어 수출되었다.

이처럼 소련은 압도적인 세계 최대의 자원 부국이었지만 1980년대 들어 낙후된 기술과 설비로 인해 갈수록 자원 산업의 경쟁력이 뒤쳤고 이에 소련 정부의 고민은 깊어져갔다. 80년대말 우리나라 노태우 정부와 소련 간의 관계가 크게 개선됨에 따라 당시 고르바초프 정권은 극동 시베리아 자원 개발을 두고 한국에 기술 협력을 타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후 소련이 무너지고 말았다.

1991년 소련의 해체 후에는 석유 산업을 포함한 전반적인 경제 시스템 자체가 붕괴하면서 90년대 러시아는 극도로 어려운 경제 상황을 맞이했지만, 이후 올리가르히를 내세워 석유 및 천연가스 산업을 재건하였고 러시아의 경제도 회복되기 시작했다.

7. 소비자경제

교육이나 의료는 전부 무상이었고, 국가에서 기초 생필품이나 공공요금, 주택은 물론이고 심지어 소설책이나 애들 옷값, 여행 비용까지도 보조해 주었기 때문에 기초적인 물가는 매우 싼 편이었다. 다만 여기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소련에서는 물자난이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식료품같은 필수 품목을 제외하면 물자부족이 빈번했고, 때로는 암시장에서 국가가 지정한 가격보다 더 높은 가격에 구매해야 했다. 특히 소련 말기, 89년-90년 즈음부터는 고르바초프의 경영 자율화 정책으로 인해 기업들이 가격 통제가 아직 남아있던 국영 상점에 물건을 납품하지 않고, 암시장에 비싼 가격으로 팔자 물자 부족이 심화되면서, 물자들이 대거 암시장으로 흘러들었다.(암시장 환율이 상승한 것은 덤.) 이렇게 암시장으로 유출된 물자에 보조금으로 지출하는 금액이 커져서 당국에서 심각한 문제로 작용했다. 구매력은 높아서 수요는 많은데 아무리 보조금으로 돈을 쏟아도 전체 물자의 10%에서 15% 가량이 암시장쪽으로 유출되었기에 항상 물자가 부족했다.
자동차는 사람들이 어느정도 경제력으로 여유가 생긴 1950년대와 60년대에는 차 생산량이 1년에 몇십만 대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자동차를 구하려면 기껏 비싼 돈을 현금으로 주고도 몇년씩 기다리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1970년대에는 생산량이 연 200만 대 수준으로 늘어났으나, 상당수의 자동차가 해외수출용으로 배정된지라 여전히 새차를 구하려면 2~3년씩 기다려야 하는 것은 일상적일 정도로 새 차를 구하려하는데 진입장벽이 높았다. 아니면 기다릴 필요없이 중고차를 구입할 수도 있었으나 가격은 새 차보다 훨씬 비싼게 문제였다.[13][14] 그래서 자동차는 사회적으로 어느정도 자리잡은 중역들이 타고 다녔으며, 사회초년생들은 보통 가격이 훨씬 싸면서도 구하기도 쉬운 오토바이[15]를 타고 다녔다.[16] 1980년대 중순까지도 소련은 높은 중산층 비율과 값싼 휘발유값이라는 장점에도, 자동차 보급률은 5가구당 1대 수준에 머물렀고, 이것이 대도시 주택 문제를 가중시키기도 했다. 구소련권 대다수 국가에서 자동차가 사회초년생들이 타는 물건이 된것은 2000년대 중반 이후의 일이었다.

어쨌든 부동산 가격이 쌌던 환경인지라 개인이 많은 돈을 저축하기 용이한 환경이었기에 저축률은 매우 높았고 구매력도 높은 편이지만, 애써 모아둔 돈 가지고 비싼 전자제품이나 고급 모피 코트, 카페트,[17] 도자기같은 사치품을 구하려면 시장에서 중고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면 수령받는데 몇달씩 기다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즉, 소련은 공산주의 국가라는 특성을 잘 활용하여 2억을 넘는 거대한 중산층을 만들어내는데에는 성공했지만[18] 막상 경공업과 유통망이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었다. 또한 공산주의 경제 내부 모순으로 인하여 각 사업체에서 일어나는 부정부패에 대한 제어도 제대로 되지 못했다. 특히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물류 및 재화가 유통되고 공급되는 상거래를 활용할 수 없었기에, 국민 대다수의 생활수준이 향상되어도 이를 민간경제에 활용하기 어려웠다.

1980년대 소련인들의 평균 월급 수준은 200루블 정도로[19] 당대의 공식환율로 쳐도 좀 사는 중진국 수준에 불과했지만 교통비의 경우에는 버스, 지하철, 노면전차를 한번 타는데 5코펙이고 아파트 월세비도 대략 5루블(관리비까지 합치면 12루블)로 보드카 1병값(1980년대 후반에는 반병값) 정도면 충분했다. 또한 고기가 미국보다 비싸기는 했지만 감당못할 정도는 결코 아니라서(1980년대 후반 기준으로는 고기 1kg 가격이 2루블) 육류 소비량의 경우에는 남유럽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1990년 기준으로 소련의 1인당 육류소비량은 75kg을 기록하였다가 옐친대에는 경제난으로 45kg까지 감소했는데, 이 수치를 회복한것은 푸틴대로 그나마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닐 지경이다.

비록 사치품의 가격이 비싸다 해도[20] 하지만 국내 물가가 저렴한 편이다 보니 각 가정에서는 수천 루블에 달할 정도의 예금 자산을 보유할 수 있었고, 소련의 소비경제 수준에 비해 출판이나 언론, 영화, 연극, 발레, 프로스포츠[21]를 비롯한 소련의 문화산업이 매우 컸던것도 부분적으로는 당시의 책값과 입장료, 관람료가 비교적 값이 싸서 문화생활을 즐기는데 경제적 부담이 적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잠재된 구매력이 매우 컸기 때문이었다.

즉, 명목 월급은 200루블이지만 실질 구매력은 루블을 달러로 1:1 대응한 가격보다 높았다는 것이다. 1:1로 대응하기는 힘들지만 지금으로 치면 대졸초봉이 100만 원대에 좀 자리잡은 직장인들도 월 300만원대 벌면 잘번다는 소리 나올 정도로 한국보다 훨씬 밀리는 수준이지만 1인당 PPP는 일본을 넘는 대만이나 월급은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1인당 국민소득은 미국을 넘어서고 PPP는 10만 달러로 세계 3위를 찍는 싱가포르와 얼추 상황이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22]

이정도로 높은 구매력을 지녔지만 실제 소련인들의 소비 수준이 구매력에 걸맞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점이었다. 소련인들이 공산주의 체제에 불만족하게 된 가장 큰 이유도 은행에다가 돈을 어느 정도 저축할 정도로 여력이 있어도 정작 필요한 물건을 구하기 어렵거나, 발품을 팔아야되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자면 상당수의 공산품을 구매할 때 국영상점에서 길게 줄을 서거나 자동차, 가구 같은 경우는 받으려면 최소 몇 달에서 몇 년씩 기다려야 되는 등 구입에 심한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의류비도 소득에 비해서는 상당히 비싼편이었다. 셔츠나 근무복, 교복, 아동복은 가격이 비교적 싸고 저렴한편이었지만, 남성용 정장, 여성용 부츠나 코트, 스타킹같이 좀 고급스럽다 싶은 의류들은 몇 주치 급여를 초과하는 수준으로 몹시 비싼 경우가 많았다 하며, 외국에서 수입해온 옷들은 프리미어가 붙어서 소련 의류보다 몇배나 비쌌다. 공산권과 제3세계 국가에서 수입해온 옷들도 소련옷보다 가격이 2~3배 이상 가격에 책정된 경우가 많았다. 또한 시장에서 미국 등 서방권에서 밀수된 의류품을 팔기도 했는데, 이들 의류품은 소련물가와 비교해보면 터무니없는 비싼 값에 팔려나갔다. 그러나 위낙 불티나게 팔려나갔기 때문에 상인들은 잡혀가지만 않으면 손쉽게 부자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역설적으로 그 만큼 잠재된 구매력이 컸다는 애기가 된다. 이와 비교하면 현 구소련권은 수입의류만큼은 가격이 확실히 싸진 편이기는 했다.

신발 같이 미국보다 더 생산량이 더 많은 물품도 있기는 했으나 어쨌든 이것만으로는 소비재를 마음껏 사는데 충분치 않았고, 무엇보다 1970년대와 1980년대 경기가 침체될 수록 물건을 구하기 점점 더 어려워졌다는 문제점이었다.

이 때문에 공식상점에서 제때 공급해주지 못하는 재화를 대신 공급시켜 주는 지하경제 규모가 엄청나게 컸다. 이는 계획경제로 유통되는 물자가 지하경제로 흘러들면서 소련 사회 내 부패와 물자부족을 더욱 부채질하는 악순환을 불러일으켰다. 농민시장에서 가볍게는 다차(별장)에서 생산한 작물들을 교환하거나 판매하는 건 물론이고, 물론 직원들이 몰래 몇개씩 빼돌린 제품도 거래가 이루어졌으며 좀 여유가 있거나 직책이 있으면 수입품을 밀수해서 고가에 팔았다. 또한 암매상들도 판을 쳤는데 국영상점에서 파는 물품을 싸게 샀다가 몇배의 가격에 되파는 식이었다.

물론 암시장에서 파는 수입품의 가격이 암시장 환율에다가 추가적인 이윤이 붙기 때문에 물건값은 왕창 비쌌다. 잡지나 만화 같은 것을 조금만 골라살려도 해도 한달치 월급이 날라가는 것은 물론, 옷 같은 경우에는 이것저것 골라사면 1년치 봉급을 날려야 될 수도 있었다. 소련에서 1980년대 최저임금인 월 70루블 정도만 받아 먹고사는데 큰 지장이 없는 금액이지만 암시장으로 가서 환전할 경우에는 루블의 가치가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소련 붕괴 직전에는 그 정도가 심해져서 1991년 기준으로 20~100루블이면 1달러로 교환이 가능해졌으며 1992년에는 루블의 가치가 아예 휴지조각으로 변해버리면서 러시아 경제가 달러화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사실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는 말할 것도 없고 웬만한 도시에도 백화점이나 슈퍼마켓, 외화상점, 전자제품 가게나 장난감 가게, 구멍가게 등 있을 만한 건 다 있었다. 문제는 소련 전역 내 유통망이 부실하여서 지역격차가 몹시 컸다. 소련의 유통구조에서는 인구수에 맞추어서 전국을 대략 4종류 지역으로 구분해서 배분해놓았는데, 주요 대도시들과 공화국의 수도, 산업중심지역, 비밀도시, 크림반도와 소치를 비롯한 휴양지는 1급지, 2급지로 분류되어서 물자가 넉넉하게 공급되는 편이었지만, 지방 소도시와 농어촌 지역은 3급지, 4급지로 분류되어 상품 공급량이 적은 편이었고, 이 때문에 소도시와 농촌지역에서는 지역 구멍가게에서 파는 물건이 별로 많지 않거나 재고가 품절된 경우가 많아 소도시나 농촌 주민들이 지역 상점에 없는 물건을 구매하려면 기차와 비행기, 버스, 오토바이 등을 타고 큰 도시로 가서 사는 현상이 빈번했다.[23] 이는 소련 후기 물자난이 심해질 수록 점점 빈번해졌다.

재미있는 점은 소련 후기의 월급수준을 현재 물가수준으로 환산해보자면 현재 러시아의 급여수준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1980년 소련의 평균 월급이 185루블인데 공식환율로 환산하면 281달러로 나온다. 지금보기에는 현저히 낮은 수치지만 이 당시에는 미국의 1인당 GDP가 1만 2천여불정도이기 때문에 지금의 미국 달러가치로 비교하면 안된다. 소련과 러시아의 물가수준을 비교했을 때 유통환경의 개선으로 수입공산품과 고급품을 제외한 나머지 옷값, 상당수의 전자제품은 러시아가 훨씬 싼편이지만,[24] 부동산과 공공요금은 러시아가 훨씬 비싸다는 평으로 이는 러시아로 체제가 바뀌는 과정에서 부동산 민영화로 부동산 비용이 크게 상승한 여파이며, 그래서 집값과 월세비로 지출해야되는 비중이 러시아 일반인들에게 매우 커졌고, 이 때문에 체감적인 물가는 소련이 더 낮은 편이다.[25]

이는 러시아 뿐만 아니라 독립국가연합 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인데, 겉으로 보기에는 임금이 현상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소련 붕괴 이후 30년 동안 물가 상승세를 고려하면 소련 시절에 비해서도 급여가 점점 떨어지는 것이다. 실제 러시아 재무부 소속 노동연구원같은 공신력있는 기관에서는 현재 러시아의 급여 수준를 올릴 필요가 있다고 제기하고 있지만,[26] 현재 러시아 정부 특성상 개선될 지는 미지수다.

8. 문제점

8.1. 계획경제의 한계

소련 경제는 건국 이래 당과 국가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기획하는 계획경제로써 운영되었다. 모스크바에서부터 각 지방까지 모든 단위는 오로지 중앙부처인 고스플란(국가계획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했고, 이는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소련이 존속하는 내내 경제 원리를 지배하는 가장 큰 원칙이었다. 이른바 명령경제 또는 통제경제(Command economy)이다.

이 중앙통제식 계획경제는, 1930년대에 중공업 중심 산업화를 추진할 때나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는 전시경제와 같은 때, 즉 비교적 단순하고 명확한 목표를 어떤 비용을 치러서라도 신속하게 달성하기만 하면 되는 데에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경공업이나 서비스업과 같이 민간시장에서 소비자들의 다양한 수요를 반영하며 성장해야 할 부문에서까지 일괄적으로 중앙통제식 계획경제를 적용하면서 소련 경제는 효율을 잃어 갔다. 따라서 수요와 물자공급의 불균형으로 인해 일상에서는 물자부족 현상이 자주 일어났고 1970년대부터는 경제성장률이 3% 아래로 떨어지면서 구조적인 침체에 빠졌다.

더 자세히 설명하면, 비효율적인 중앙결정 의사구조 때문에 전반적인 생산과 유통이 무척 경직된 상태였다. 또한 소득수준이 증가하면서 자동차나 가전제품 같은 고급 소비재의 수요가 크게 증가했지만, 정작 수요예측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부실한 면모를 보였고, 그 결과 늘어나는 구매력을 생산력이 따라잡지 못해 지하경제가 활성화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예인 자동차만 해도 배급을 신청하여 대기명부에 이름을 올린 후 몇 년 정도를 기다린 뒤에야 간신히 받아가는 식이었고, 그 품질도 미국, 유럽, 일본 차에 비하면 형편없었는데, 주택이나 다른 고급 상품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소련인들의 구매력은, 주택요금과 아파트 관리비, 전기/수도/가스요금, 대중교통비 등 기초 공공요금과 생필품값이 몹시 싼 데다가 교육이나 의료는 무료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소득수준에 비하면 크게 높았다. 그러나 정작 소비재의 양과 질이 그 구매력을 충족시키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소련 계획경제에서는 소비재를 포함해서 모든 것의 생산량을 중앙당국에서 결정했는데, 문제는 국가가 개개인에게 필요한 소비재 양까지 맞추는 것이 쉽지 않았다. 국가에서 실시간으로 수요를 반영하기 어렵다보니, 간단한 생필품도 상대적으로 부족하여 물자난[27]이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보도되었다.

이와 같은 계획경제 체제의 비효율성은 소련 내부에서도 고쳐야 할 고질적인 문제로써 자주 지적받았다. 소련 정부에서도 계획경제의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여 코시긴-리베르만 개혁 등 다양한 개혁 방안이 나왔다. 하지만 여러 시도에도 결국 스탈린 시절부터 구축된 계획경제 운영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는 실패했다. 이처럼 소련 정부가 계획경제 시스템을 쉽게 개혁하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계획경제 체제가 곧 중앙정부에 권력을 집중시키는 필수 요소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소련과 같이 국가가 독점적으로 경제를 운영하는 시스템에서 민간 분야에 광범위한 경제적 자율성을 부여할 경우, 필연적으로 국가가 통제하지 못하는 분야가 생기면서 곧 계획경제 시스템의 붕괴 내지는 부분적인 마비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기술관료 시스템에 대한 개혁이 본격적으로 논의될 수 있었던 때는 중앙정부의 권력이 약해지고 소련경제가 본격적으로 악화되던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였다.

실제로 페레스트로이카 말기 불경기를 극복하기 위해 시장경제 요소가 적극적으로 도입되면서 소련 정부는 경제에 대한 통제력을 빠르게 상실했다. 페레스트로이카를 통해 생산량을 자율적으로 정하고, 합작기업을 설립할 수 있게되는 등 자율성이 늘었지만 동시에 가격통제는 그대로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국영기업을 비롯한 생산자들이 국가가 정한 낮은 가격에 파는 것보다 불법적이라도 암시장을 통해 더높은 가격에 판매하면서 지하경제가 급속도로 팽창되는 상황이 초래된 것이다. 또한 1990년 중후반에 '샤탈린의 500일 계획' 이라는 급진적인 시장자유화 정책이 실시되자, 소련의 경제는 반쯤 마비상태가 되어 버린다. [28] 결국 1990년 중후반, 계획경제 시스템은 사실상 마비되었고, 빵이나 감자, 우유, 쌀밥, 말린 국수나 우유 같은 흔하고 기본적인 식료품 이외의 고기, 설탕, 소시지, 버터 등을 비롯한 주요 식료품은 쿠폰이 있어야 정가에 살 수 있었고, 쿠폰이 없으면 시장에서 2배 이상의 웃돈을 주고 사야했으며,[29] 소련이 붕괴하게 된 중요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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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과도한 군비부담

냉전시기 소련군은 미군에 이어 세계에서 2위로 강한 군대라는 평을 받았다. 한 때 소련이 보유한 핵탄두는 4만발이 넘었고, 소련군이 보유한 전차는 NATO군의 전차를 몇 배나 상회했다. 냉전 시기 소련군은 서방의 공포를 자아내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이는 공짜가 아니었다. 소련의 군사비 지출은 전체 예산의 20%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어지간한 나라면 바로 망할 수준이었다.(미국은 약 10%) 소련이 무리하면서까지 군사비를 과도하게 지출하게 된 이유는, 이렇게 하지 않고는 서방진영과 군사력을 맞추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국방비를 퍼부었기에 소련은 많은 군사분야에서 서방에 우위였으며, 막대한 자본과 유지보수가 필요한 해•공군력만 예외적으로 열세였다.

예를 들어 소련의 핵전력은 1970년대 후반 즈음 미국을 추월했지만, 강력한 핵미사일이 정작 인민들의 복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동시대 소련 핵미사일이었던 R-36 미사일이 당대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고 있을 때, 정작 휴지같은 같은 생필품이 자주 떨어져서 수시로 상점 앞에서 줄을 서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실제로 1980년대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은 이 점을 간파해 일부러 소련에게 SDI와 같은 군비경쟁과 더불어 아프가니스탄에서 군비출혈을 강요했고, 안그래도 비효율적인 경제로 유지하려던 소련은 결국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 핵탄두 감축과 같은 군축을 제의할 정도로 국방비를 대대적으로 감축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군부 장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결국 1991년 군부가 쿠데타에 가담하는 중요 원인이 된다.

8.3. 노동생산성 저하

이 부분은 다른 경제분석에서도 누차 강조되는 점이지만, 소련인들은 기본적으로 경제활동에 있어 자발적인 창의성을 발휘하기 매우 어려운 환경에 있었다. 소련 체제에서 상부에서 계획이 수립되고 결제를 받으면 하부 조직은 무조건 따라야 되었으며. 그 계획마저도 굉장히 복잡하고 실제로 맞지 않아 자주 수정되기도 하는 등 비효율이 누적되었다. (실제 소련의 산업 계획을 수립했던 사람의 말에 따르면, 완벽한 계획 수립을 위해서라면 소련 인구의 대다수가 필요하게 될 지 모른다고 하였다.) 그리고 관료제 형식으로 경제를 운영하다 보니 아래에서 위로 보고받고 위에서 아래로 명령하는 상대적으로 경직된 방식의 제도가 운영되었는데, 더군다나 기존에 도입된 제도에 문제가 발생하거나 오류가 발생해도 제도의 오류가 개선되는 경우보다 그 제도를 시행한 사람한테 책임을 씌우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과거에 이미 제도 상으로 오류나 비효율적인 점이 발견되어도 수정되지 않고 지속되는 경우가 매우 잦았다. 실제 제도를 바꾸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그런 경제 개혁에 따른 부작용이나 기타 등등의 문제, 계획경제의 한계 등으로 개혁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였으며, 이는 소련정부의 독재적인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지키려는 신념과 무엇보다도 경제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추구하다보니 그러한 한계가 조금씩 쌓이고 쌓여 결국 개혁시기를 놓치게 되었다. 이러한 계획경제가 소련이 개발도상국이었던 시절에는 효율적이었지만 당대에도 여러가지 문제점이 지적되었으며, 1970년대부터 성장률이 정체된 이유도 산업고도화를 해야할 시점에 유연성을 발휘하지 못해서였다. 그 때 시점에서부터 소련의 노동자들이 출근도장만 찍고 태업하는 일이 비일비재해 노동생산성이 추락하기에 이르렀다. 노동을 열심히 하지 않아도 노동자로서의 권리와 혜택은 보장되었기에 굳이 열심히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실제로 스탈린 사후 소련 지도자들은 이 문제를 나름 인지하고 있어서, 말렌코프에서부터 흐루쇼프, 코시긴, 안드로포프까지 다양한 정치간부들이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해법을 제시해왔다. 문제는 경제개혁을 위해서는 사회 전반적으로 밑에서부터 경제를 운영하는 주체들이 자발성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개혁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했는데, 이는 소련 체제의 자유화와 본질적으로 직결된 것이었다. 그리고 소련 지도부는 이런 자유화를 매우 두려워 하여, 결국 여러차례 개혁이 흐지부지되는 원인이 되었다. 즉, 소련 지도부의 경직성과 권위주의가 결과적으로 경제를 개혁할 시기를 놓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소련경제를 마비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8.4. 낙후된 물류와 유통망

소련은 사회간접자본 구축에 있어 미국의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같은 대규모 고속도로 체계나 항공 물류 체계를 적극적으로 갖추는데 소극적이었다.[30] 이 시기 소련은 바이칼-아무르 철도 건설등 인프라 투자를 아예 안 한 건 아니었지만 그 속도는 지지부진하였고, 지형적인 악조건 때문에 전국적인 단위의 도로망 구축 및 관리는 상당히 부실해 장거리 수송은 철도에 의존해야 했다. 이 때문에 소련의 화물철도 수송량 자체는 당시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였지만, 간선철도에서 먼 소련 지역 내 물류 운송은 극도로 비효율적이었고, 이는 물자공급 및 물류망의 낙후로 이어져 경제사정을 악화시켰다.

8.5. 정보산업 발전의 정체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디지털 컴퓨터 개발에 착수했다. 1950년에 키예프 전자기술대학에서 'MESM'이라는 소형 전자 계산장비를 개발했다. 이 컴퓨터는 범용 프로그밍이 가능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컴퓨터 개발 과정에서 콘라트 추제의 Z4 등이 참고되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여하튼 MESM의 제작에 사용된 진공관은 당시 소련에서 라디오를 제작할 때 사용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스탈린 시절 소련은 컴퓨터를 '자본주의의 산물'로 규정하고 국가적인 투자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컴퓨터 기술을 확보하는 것은 소련 입장에서도 매우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스탈린이 사망하자 본격적인 투자와 연구가 바로 이뤄진다. 1955년에는 BESM-1이라는 대규모 컴퓨터가 제작되었다. 연산장비에는 5천개의 진공관이 사용되었으며, 당시 유럽에서 가장 빠른 컴퓨터로 기록되었다. 저장 장비는 반도체 다이오드(정류기) 기반의 ROM과 보조 저장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 컴퓨터는 단 한 대만 제작되었다.

1956년 12월에는 스텔라 컴퓨터가 완성되었으며, 이 컴퓨터는 유리 가가린을 배출한 보스토크 계획에 적극활용되었다. 이 컴퓨터 개발의 공로로, 사업의 책임 연구원인 Y. 바질레예프는 사회주의노력영웅 칭호를 수여받았다. 1960년대 들어선 소련 정부에서 컴퓨터 연구와 생산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1961년에 대규모 컴퓨터 제조 클러스터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지원을 바탕으로 1960년대 소련은 미르-1, 2, 3을 대량 생산해 소련 전국과 사회주의 국가에 보급했다. 오가스 계획이 나온 것도 이 시기였다. 당시 소련 정부에서 컴퓨터 관련 예산을 계속 늘려나가자 이에 주목한 글루시코프가 전폭적인 지원을 요청하며 오가스 계획을 제안했던 것이다. 물론, 이는 당시 기술 수준에선 소련뿐 아니라 다른 국가에서도 실현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당연히 반려되었다.

한편, 1962년 소련에선 진공관을 완전히 배제한 완전 반도체 기반의 민스크-2라는 중규모 컴퓨터를 완성한다. 진공관을 완전히 배제한 컴퓨터는 미국에서도 1964년이 돼서야 나왔기 때문에 민스크-2는 당시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1965년에는 BESM-6이 생산되었으며, 미국의 CDC-3600과 비슷한 성능으로 평가되었다.

1960년대 소련의 컴퓨터는 Analitik이라는 독자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이는 국제 고립을 심화시키는 것으로 소련 내에서도 많은 비판과 도전을 받았다. 결국 1960년대 중후반 소련은 당시 유럽에서 제안된 알골 언어로 주 언어를 바꾸게 된다. 1970년대부터는 소련 내에서 제작되는 모든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알골을 따르게 된다.

이처럼 소련은 컴퓨터 연구의 국제 협력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는데, 1965년부터 프랑스와 컴퓨터 연구 협정을 맺고 학술 자료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또한, 1966년에는 프랑스를 통해 미국의 CDC-6600을 구매하려 했으나, 미국의 정보 당국이 이를 저지했다. 이에 따라 제1세계에 속한 여타의 국가들도 소련과의 컴퓨터 협력을 중단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빡이 돈 소련은 1967년 예정에 없던 예산을 퍼부어서 코메콘 국가를 중심으로 ES EVM 공동체를 구축하고, ES 시리즈라는 컴퓨터를 찍어내기 시작한다. ES의 키릴문자 표기가 EC였기 때문에, 국내에선 소련 EC 컴퓨터라고도 알려졌다. 이때 등장한 ES 시리즈 컴퓨터들은 이후에 북한에도 도입돼 광명망의 초기 형태를 이루기도 했다.

이처럼 1960년대까지만 해도 소련의 컴퓨터 개발은 서방 세계와 비슷한 지위를 유지했으나 1970년대 들어서는 개발 의지와 동력이 크게 떨어지면서 기술 격차가 발생하게 된다. 특히, 소련 정부에선 독자적인 기술을 개발하기보단 서방 제품을 들여와 기술을 복제한 후, 양적 우위를 점하자는 정책을 취하면서 소련 고유의 컴퓨터 기술 발전이 멈추게 되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소련에서 컴퓨터는 대단히 특수한 기기로 이를 취급하는 인력도 특수 인력으로 여겨졌다. 이로 인해 컴퓨터 교육은 고도의 전문 과정으로 일관되었고 그 영향으로 소련은 1970년대 중반까지 기계어 중심의 개발, 사용 환경이 주를 이뤘다. 또한, 산업 분야의 파편화로 인해 컴퓨터 생산과 보급에 필요한 인프라 구축이 들쭉날쭉했다. 상술된 오가스가 실현되지 못한 이유는 컴퓨터 장비 자체의 수준 문제도 있었으나 가장 큰 것은 장거리 통신망의 용량 증가가 지지부진했기 때문이다. 당시 소련의 체신 당국에선 자신들의 계획에 따라서만 통신망을 구축하고 있었을 뿐 컴퓨터 관련 기관의 요구는 전혀 반영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1970년대 후반 오가스의 후신 사업으로 시작된 EGSVT는 당초 계획으론 3년 내에 구축을 완료하는 것이었으나 통신망 확대 속도가 느려서 1980년대 후반에야 컴퓨터 통신망 구축이 완료되었다. 그리고 정작 구축이 완료되자 통신망의 컴퓨터는 노후화되어 제대로된 기능을 하지 못했다[31].

1980년대에도 이러한 컴퓨터 기술의 정체는 계속되었고, 소련에선 서방 제품을 들여와 복제하기 바빴다. 그런데 의외로 그 카피 속도나 수준이 준수해서, 소련의 ES 시리즈와 카피의 대상이 된 IBM System 시리즈 사이의 2~3년의 기술 격차는 소련이 붕괴되기 직전까지 지속적으로 유지됐다[32]. 이와 함께 ES 시리즈는 소련은 물론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의 주력 전산기기로 자리잡았다.

소련은 1970년대와 80년대 당시 서방에서 훗날 컴퓨터로봇으로 이어질 자동기계와 정보산업에 투자하는 동안 산업 자동화나 정보산업같은 전자 산업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 결과 산업화 시절 지어진 인력 시스템을 그대로 활용하는 비효율이 이어져 1980년대 초에는 잉여직이 약 3,200만 명 정도 남게 되었다. 소련에서 PC컴퓨터가 처음 출시된 것은 엘렉트로니카 BK가 나온 1984년이였지만 가정용 컴퓨터가 활성화된 것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IBM, HP와 기술교류가 활발해진 1989년 이후였다. 사실 저축률이 높아서 은행에 도는 자금은 많았기 때문에 제대로 활용했다면 재빠른 인프라의 구축도 가능했지만 이렇게 구축이 늦었던데에는 관료들의 첨단산업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졌던데다가 비용문제를 제기했던 당대의 전문가들이나 산하기관들의 미적지근한 대응으로 재빨리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그 만큼 소련의 침체를 깊게 했다는 점이었다.

소련에서도 인터넷과 비슷한 네트워크망을 연결하려는 기획은 있었다. 이른바 "오가스"로 그대로 컴퓨터 네트워크망을 통해서 소련의 중앙경제시스템을 효율적으로 관리한다는 발상으로, 연구시설은 물론이고 각 지방의 공장, 농장들까지 컴퓨터로 연결해서 물자를 효율적으로 관리한다는 것인데, 당시 소련 내 부실한 유통체계로 인하여 물자공급이 원활하지 않던 소련경제의 비효율성을 고려했을 때 획기적으로 보였다. 실제로 1970년대에 미국의 알파넷 계획이 입수되면서 오가스 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지만 재정부처와 경제학자들이 반대하고, 기반시설을 구축하는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추진동력을 잃어버렸다. 당시 소련의 국토와 경제운용 방식을 고려했을 때, 네트워크망은 운영에 필요한 사회기반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져야 제대로 활성화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재정부와 경제학자들의 지적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과제였다.

또한 정부가 주도하는 국책 사업으로 진행하려다 보니, 민간 차원에서 활용할 수 있는 재량이 적었다. 실제로 인터넷의 아버지 격으로 불리는 알파넷 또한 처음에는 국방부와 대학 사이 내부통신망 정도로 활용되다가, 여러 대학들이 같이 참여하면서 점차 주도권이 국가에서 민간으로 넘어가 오늘날 민간 중심의 인터넷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오가스 계획은 이후로 여러번 재추진이 이루어졌지만 개발자가 1982년에 사망하면서 결국 기초망 정도만 깔리는 수준에 머물렀다. 이후 1980년대말 페레스트로이카 시절 소련에도 인터넷이 도입되면서 오늘날 옛소련 국가들의 정보산업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8.6. 자원의 저주

Е.ГАЙДАР: Собственно, дата краха СССР, когда история была уже сыграна, она хорошо известна. Это, конечно, никакие не Беловежские соглашения, это не августовские события, это 13 сентября 1985 г. Это день, когда министр нефти Саудовской Аравии Ямани сказал, что Саудовская Аравия прекращает политику сдерживания добычи нефти, и начинает восстанавливать свою долю на рынке нефти. После чего, на протяжении следующих 6 месяцев, добыча нефти Саудовской Аравией увеличилась в 3,5 раза. После чего цены рухнули. Ну. Там можно смотреть по месяцам — в 6,1 раза.
가이다르: 소련이 무너진 날은 충분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날은 당연히 벨라베자 조약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8월의 사태가 일어났던 날도 아니며, 그 날은 1985년 9월 13일이었습니다. 그 날은 사우디 아라비아 석유부 장관이었던 아흐메드 야마니가, 사우디 아라비아는 석유생산 억제전략을 중지하며, 석유 시장에 자국의 생산량을 늘리겠다고 선포한 날이었습니다. 그 날 이후 다음 6개월 동안 사우디 아라비아의 석유 생산량은 3.5배나 증가하였습니다. 그 날 이후 (석유) 가격은 무너졌습니다. 몇 달 단위로, 6.1배나요.

Е.АЛЬБАЦ: В 6 раз они рухнули?
알바츠[33]: 6배로 무너졌다고요?

В 6 раз. Если смотреть долгосрочную перспективу – в 4 раза. После чего, собственно, история СССР была полностью сыграна.
장기적 관점에서 본다면, 4배입니다. 그날 이후, 당연히도, 소련의 역사는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예고르 가이다르, 에호 모스크바와 진행한 인터뷰, <제국의 붕괴> 중 출처

경제학자들 중에는 소련의 경제가 지나치게 석유에 의존했으며, 70년대 고유가로 인해 벌어들인 외화를 자국의 군수산업과 중공업에 투자해왔다가 80년대 저유가로 한순간에 몰락했다는 견해가 제기된다. 일부 학자들은 이에 단순히 소련이 자원에 의존하여 몰락했다는 주장에는 문제가 있다고 반박하지만, 그럼에도 자원의 저주는 1980년대 소련경제이 맞이한 위기를 설명할 때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자원의 저주를 둘러싼 중점이 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 소련의 주요 수출 대상국에 대한 고려가 없다. 소련의 주요 수출품이 원유였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주요 수출국은 미국과 유럽이 아니라 같은 공산권이었다는 점이다. 지금의 입장에서는 석유시장이 하나이므로 세계시장의 석유값이 동일하지만 당시에는 이원화된 시장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 서방과의 무역과 달리[34] 공산권 간 무역은 경화결제 비율이 높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부분은 코메콘 체제의 비효율성을 간과한 설명이다. 소련은 냉전 시절 사회주의권 국가들 사이 이루어진 무역은 크게 이익을 내기 어려웠다. 우선 코메콘이 위치한 동유럽 국가들의 소득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은 편이 아니었기에 일반적인 기축 통화를 통한 결제가 어려웠으며, 일반적인 무역처럼 국제가격에 따라 주고 사기 어려웠다. 또한 소련은 사회주의권과 우호적인 관계를 위해 석유, 석탄, 천연가스같은 천연자원을 저렴하게 공급했다.[35] 대신 사회주의권 국가들로부터 (소련으로부터) 지정된 가격에 따라 필요한 품목을 원하는 만큼 할당하여 보상받았다. 따라서 자본주의 국가와 교역을 제외하면 코메콘 체제 내부 무역에서는 소련과 사회주의권 국가들 모두 국제시장 가격에 따라 차익을 얻기가 어려운 구조였다. 즉, 소련은 사회주의권 내부 교역에서는 큰 수익을 얻기 어려운 구조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수익을 얻을 수 있었던 국제시장의 가격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 계획경제에 대한 고려없이 시장경제적 측면에서 분석하고 있다. 소련의 경제는 계획경제이므로 매년 GDP가 일정하게 성장했다. 만약 석유가격이 소련 재정에 영향을 미쳤다면 적어도 석유가격이 4배가 뛴 제1차 오일쇼크 때에는 최소한 상당한 흑자를 주어야 하고, 1985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증산에 의한 석유가격 하락에는 그에 따른 적자가 발생했다고 생각해야 한다. 문제는 소련의 경제는 1970년이나 1980년이나 1990년이나 큰 차이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 석유수출을 통해 얻은 수익을 중공업이나 군수품에 투자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자유시장경제와 WTO체제에서나 가능한 발상이다. 수출을 통해서 얻어진 외화를 다른 곳에 투입하거나 외화보유고를 높여서 이를 기반으로 재정적자를 매꾸거나 등은 지금과 같은 국제무역시장에서나 먹히는 이야기이다. 소련의 입장에서 미국의 화폐를 얻어도 어차피 이 외화보유고를 쓸데가 없다. 차관을 들일 일도 없고, 국채를 발행할 일도 없다. 기껏해야 수입품에 대한 결재정도에 쓰일 뿐인데, 수입품이 주로 소비재이다보니 그렇게 많이 들이지도 않았으며, 수입도 모든 것이 국가의 주도에서 운영된다는 점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즉, 자원의 저주가 소련을 망하게 만든 것은 아니지만, 자원의 저주는 소련이 취약해지던 시점에 날라온 치명타였다. 물론 이 치명타가 아니었다고 해도 소련 경제는 파국을 벗어나기 어려웠겠지만, 적어도 소련 경제가 처한 병 중에서는 심각한 병에 속했다.

9. 기타

  • 소련 시절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들은 고스트(GOST, Gosudarstvenniy Standart)라 불리는 국가표준이 규정한 제품만 생산, 유통될 수 있었다. 계획경제 특성상 국가표준은 단지 제품의 재질, 성능에 대한 최소 안전규격 뿐만 아니라 테스트 방법이나 생산공정같은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규정되어 있었고, 소련에서 생산되는 제품은 모두 한치 오차없이 이를 따라야 했다. 가령 한국에도 주부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로모노소프(임페리얼 포셀린) 도자기는 현재까지 국가표준(GOST) 28390-89호 규정에 따라 생산되고 있으며, 공장제 도자 제품들은 이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사모바르도 소련시절부터 지금까지 국가표준(GOST) 7400-81호 규정에 따라 생산되고 있다. 소련 시절 국가표준은 현재도 러시아를 포함한 독립국가연합 국가 대부분에서 여전히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다만, 계획경제 특성상 자율적인 품질관리 및 개선이 어려웠다. 또한 제품 종류에 따라 품질의 차이도 심해서 아이스크림이나 냉장고, 사모바르 같이 고품질을 자랑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텔레비전이나 냉동생선같이 [36] 소비자들에게 혹평을 받음에도 큰 개선없이 지속적으로 판매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사용자 편의성이나 품질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 고르바초프가 국제표준기구(ISO) 기준을 도입했을 때는 대부분의 공산품이 국제기준에 미달해 정부에서 일부러 기준을 완화했다는 소문까지도 있었다. 소련 정부에서는 다양한 기준을 제정해 품질을 관리하려 했고, 실제로 국가가 중점적으로 관리한 제품은 품질이 우수했지만, 그 밖에 일반 대중이 사용하는 공산품 같은 경우 품질이 조악하거나 사용자 편의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소련이 급속히 붕괴된 이후로 고스트는 유명무실화되었지만, 새로운 인증제도의 도입은 혼란속에 정착되지 못한 1990년대에는 각종 짝퉁제품과 저질 공산품이 판을 쳐서 소비자들이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는 평이기는 했다.

10. 참고

11. 같이 보기




[1] 쿠바 핵미사일 사태 당시에도 식량을 실은 미국 화물선은 대서양과 흑해를 오갔다.[2] 당시 아르헨티나는 극우 군부 정권이 집권했음에도 이러한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정치적 스펙트럼에 비해 의외로 사이는 괜찮았다.[3] 그래도 북한 같은 동네보다는 훨씬 개념이 있어서 식량 등은 철저히 제값을 주고 치렀으며 식량을 포함해 명색이 공산권 큰 형님이라 이것저것 제2세계 국가들에게 퍼다준 것이 적지 않았다. 단순히 타국으로부터 수입을 많이 했다는 것이 그 분야의 생산량이나 공급량이 떨어진다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오히려 순수입으로만 보면 유럽이나 미국이 소련보다 더 많은 식량을 수입했던 적이 더 길다.[4] 경제성장률은 준수했지만 각 기업체에서 성과조작을 통해 지원금을 타내는 등 부정수급 사례가 많았다.[5] 1986년부터는 일본에 밀려 3위로 떨어지긴 했었다. 다만 이 때의 일본은 엔고 현상으로 경제 규모가 꽤 부풀어져 있긴 했으나 소련 역시 루블이 실제 가치에 비해 엄청나게 평가절상된 경우라 대부분 소련은 순위에서 제외하거나 독일보다 낮게 보는 경우가 많다.[6] 단적으로 중국의 개혁개방 모델의 초창기버전은 쌍궤제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이런 제2경제 활성화였다. 다른 말로 문화대혁명 이후 중국은 여타 공산권에 비해서도 이런 제2경제를 철저히 탄압했기 때문에 다른 공산권 국가 수준으로 이런 제2경제 수준을 끌어올린 것으로 볼 수 있다.[7] 이 외에도 금주법시기 술 소비가 금지된 미국도 그러하다.[8] 애초에 정확한 집계가 가능하다면 지하경제가 아니다.[9] 소련 공식 수치로는 더 높게 나오나, 공산주의 국가들은 각종 통계 조작이 일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신빙성은 낮다.[10] 다만 냉전기 동구권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왜냐면 공산권의 제품 품질은 서구권에 비해 훨씬 열악했기 때문.[11] 다만, 당시 러시아 제국의 밀 수출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노들의 낮은 식생활 수준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특히 러시아 제국이 밀을 수출하는 동안 농노들은 풍족하게 먹기는커녕 끼니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가난한 식생활을 했다.[12] 비료, 농약, 농자재, 농기계[13] 공산주의 유머에서 자동차 1대를 구하려면 몇 년씩 걸린다거나 하는 식의 유머가 소련에 있었는데 실제로도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소련 연방 내엔 다양한 차량 제조사들이 있었지만 그중 잘알려진 승용차 제조사는 크게 5개로 나눌 수 있다. ZAZ 자포로제츠와 같은 저렴한 소형차를 생산했던 ZAZ, 소련의 국민차 지굴리로 유명한 라다, 1960년대까지 볼가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 고급차로 통했으나 80년대 들어 품질과 상품성 측면에서 라다에게 역전되어버린 모스크비치, 높으신 분들의 고급차로 잘알려진 볼가 시리즈를 생산한 GAZ, 민간에서 구매하긴 어려웠지만 험지에서도 잘굴러가는 오프로드 차량을 생산하던 UAZ등이 있다. 1983년 기준으로 자동차 가격은 ZAZ 자포로제츠 시리즈가 5,600루블, 라다 지굴리는 모델에 따라 6,400~9,000루블, 라다 니바가 10,300루블, 모스크비치 2140이 7,500~8,000루블, GAZ-24는 11,200루블에 달했다. 그러다가 소련 말기엔 벤츠, 볼보, 토요타 같은 수입차도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14] 그러나 차를 무작정 산다고 장땡이 아닌 것이 어지간한 정비와 유지관리는 스스로 해야 했다. 큰 사고나 고장이라도 났다하면 수리비가 매우 비쌌고 필요한 부품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아서 자리만 차지하는 애물단지가 되는 일도 흔했다. 1970년대까지는 길에 아무데나 세워뒀다가 와이퍼나 각종 외부 부품을 도난당하는(...) 일도 많았다. 소련은 도시에 있는 주거 단지마다 차고가 존재했는데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개인 차고를 사서 차를 안전하게 보관하는 경우가 많았다. 공산주의를 따르던 소련에서 보기 드물게 사실상 사유재산에 가까웠던게 바로 차고인 셈이다. 대개 차고는 10대 단위의 일렬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형태로 벽돌, 철제 패널과 나무 합판으로 비전문가가 지어서 외관이 제각각인데다 판잣집처럼 허름하고 승용차 한대가 겨우 들어가는 크기지만 셀프 정비를 하기 위해 바닥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구덩이를 만들어둔 곳이 많았고, 어떤 이들은 지하실을 파서 감자나 병조림같은 식품을 장기보관하거나 집에 두기 힘든 각종 잡동사니를 보관하기 다반사였다. 그리고 마음씨 좋은 이웃 남자들이 있다면 자동차 수리를 서로 도와주거나 유용한 팁을 얻는 것도 가능했다. 지금도 이러한 차고는 러시아 전역에 아주 많으며 부부싸움후 아내로부터의 피난처(...) 혹은 친구들을 불러모으고 동네 남정네들이 모여서 술판을 벌이거나 사교를 나누는 은밀한 공간으로 통한다.[15] 소련의 오토바이 제조사들을 살펴보자면 국내에서 IMZ 우랄이 가장 유명하며 무기 생산업체인 이즈마쉬로 유명한 IZh, 소박한 모페드를 생산하던 '리가', 그 밖에도 '민스크', '드네르프'등이 있다.[16] 한편 여성들과 노인들은 요금이 아주 쌌던 대중교통을 애용했다. 대신 자전거는 기껏해야 몇주~한달치 월급으로 살 수 있었던터라 교통에 열악한 시골에선 집집마다 한대쯤은 있었고 어지간히 가난한 집이 아닌 이상 남자아이가 12살쯤이 되면 편리한 통학을 위해서라도 선물로 사주곤 했다.[17] 오늘날에도 어르신이 사는 러시아의 시골집이나 아파트를 방문하면 벽에 큼지막한 페르시아 러그가 걸려있는걸 볼 수 있는데 이는 흐루쇼프 시대에 조립식 아파트를 대량으로 건설하던 시절, 단열과 층간소음을 줄이고 장식을 위해 걸어둔 것이 현재까지 이어진 잔재다. 이러한 카페트는 캅카스 지역에서 제조된 것을 고급품으로 치며 소련 시절엔 몇달치 봉급에 맞먹을만큼 잘사는 집의 상징과도 같았다. 요즘은 할머니 집에나 가야 만날 수 있는 촌스러운 인테리어로 통한다.[18] 다만 미국이나 서방 국가들 기준으로는 대체로 중산층에서 중하류층 정도에 속했다. 집을 보유하기는 했다만 서방 국가들에 비해 소득 수준이 낮은 건 엄연히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당대 개발도상국들 기준으로는 충분히 중산층에 속하고도 남기는 했고, 소련의 1인당 GDP는 소련의 전성기였던 60~70년대 당시에 선진국의 끝자락 내지 개발도상국의 최상위 정도로 평가되었다.[19] 이것도 시대별로 차이가 있으며 1980년대 전반기에는 평균월급이 200루블에 못미치는 수준이었지만(상여금까지 포함하면 200루블을 넘기는 한다) 1980년대 후반에는 월급이 200루블을 훨씬 넘어선다.[20] 예를 들어 1970~80년대 소련의 국민차인 쥐굴리를 한대 사는데 2~3년치 봉급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던가 컬러TV 가격이 몇달치 봉급에 해당된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또한 암시장에서 외제품을 사려고 하면 공식환율이 아닌 암시장에서 통용되는 환율로 책정되었기에 루블의 가치가 20% 가량 절상되었다.[21] 물론 소련의 프로스포츠는 세미프로에 해당되어서 지금처럼 스포츠 스타가 되었다고 돈방석에 앉거나 하는 것까지는 아니기는 했다,(물론 그 대신에 좋은 아파트나 자동차를 배정받거나, 해외여행 제한이 없었다.) 소련의 인기스포츠 선수들이 올림픽에 멀쩡히 잘만 출전했던것도 아마추어 스포츠 선수로 분류되어서 그런것이다.[22] 좀 극단적인 예시로, 기본 봉급은 한화 몇만 원 정도에 불과하지만 사회복지제도와 보조금으로 공공요금과 기초 생필품, 국산품 가격을 매우 싸게 유지해서 실질 생활수준은 중진국 수준인 쿠바도 있다. 월급은 수만 원 정도에 불과하지만 구매력은 열 배가 훨씬 넘는다.[23] 공산주의 유머에서도 소시지 열차라고 해서 이를 반영한 유머가 있다.[24] 옷의 경우에는 조금이라도 있어보인다 싶을 경우에는 한달, 두달치 급여를 써야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을 정도로 소련이 생필품 가격에 비해 옷값은 지나칠 정도로 비싼 편이었다. 그래서 다채롭게 옷을 입을려면 직접 만들어입거나 부업벌이로 돈 꽤나 모아야했다.[25] 가계저축률만 봐도 이런 차이를 느낄 수 있는데, 소련은 저축률이 매우 높았지만, 현 러시아는 가계저축을 안하거나 못하는 가정이 60%를 넘긴다. 다만 이는 러시아인들이 금전적인 여유가 부족해서이기도 하지만 1990년대 러시아 경제가 극도의 혼란을 겪으면서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하여 루블 환율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예금 가치가 폭락한 경험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러시아에서는 경제가 어려운 조짐을 보일 때마다 루블 대 달러 환율이 실시간 검색어에 언급되거나, 달러를 사재기하는 현상이 종종 목격된다.[26] (출처) Уровень благосостояния трудоспособного населения как концентрированное выражение качества трудовой жизни (러시아어) (직장생활 환경을 나타내는 집중된 현상으로써의 노동가능 인구의 복지수준), О. И. Меньшикова, Всероссийский научно-исследовательский институт труда Министерства труда и социальной защиты РФ, 2020.[27] 참고로 이 생필품 부족 문제는 지방 소도시일수록 심각했다. 소련의 유통구조가 대도시에 생필품과 식료품을 우선적으로 공급하는 식이었기 때문에, 대도시 지역은 식료품이나 생필품 부족은 덜한편이었지만 지방 소도시에서는 공급에서 후순위로 밀려나있었기 때문에 생산지가 아닌 곳은 소시지나 치즈 같은 필수식품조차도 상점에서 보기 쉽지 않을 때가 있었던 것. 그래서 소도시 사람들이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 등 대도시로 가서 부족한 생필품이나 소도시에서 맛보기 쉽지 않은 식품들을 사오곤 했다.[28] 사실 암시장이라고 해도 자본주의 국가였다면 정상적인 시장에 해당했을 상거래 영역이 불법화된 것이었기에, 소련 내 암시장은 북한의 장마당과 비슷하게 경제에서 무시하지 못할 비중을 차지했다.[29] 이 때문에 당시에 용돈벌이와 재태크 수단 중 하나가 쿠폰을 타인에게 웃돈을 받고 팔아치우는 것이엇다. 해당 식료품들을 다이어트와 식습관 등의 이유로 선호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 쿠폰을 웃돈을 주고 추가적인 식료품 구매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양도하는 것이다.[30] 현대경제에서 물류는 생산, 공급만큼이나 중요한 요소다. 경부고속도로도 아직 한국의 경제 수준이 열악했던 시기에 좀 무리하는 한이 있더라도 물류 교통망을 원활히 해야 할 필요가 있어 건설한 것이다.[31] 다만 이 때 깔아 놓은 장거리 컴퓨터 통신망은 계속 개량되어 현대 러시아의 기간 통신망을 이루고 있다. 기존의 인프라가 아무리 노후화돼 있다 하더라도 개량하는 것이 완전히 새로 설치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에 완전히 폐기되지 않은 것이다.[32] 21세기 들어 기술 혁신이 강조되고 기술 복제가 중요 국가 범죄로 인식되면서, 이걸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데, 어떤 제품을 그대로 복제하고 양산하기 위해선 리버스 엔지니어링이 이뤄질 정도의 학문적 발전이 이뤄져야 하고, 생산 기술 역시 상당한 수준이어야 가능하다. 쉽게 이야기해서, 아이폰을 몇 대를 구입해와서 그걸 그대로 생산한다고 생각해보라. 당시 소련은 컴퓨터 분야뿐 아니라 화학, 제약, 기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서방의 기술을 모방하고 양적 생산에서 우위를 취하는 정책을 기본으로 삼았다. 이 방면에선 특히 제약은 정말 서방 국가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카피 실력이 뛰어나서 FDA 승인 문서에 부속된 임상시험 논문을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유효성분 조제법을 리버스 엔지니어링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게 단기적으론 효율적이고 성과가 있을진 몰라도, 장기적으론 경제 활력 저하와 국제 경쟁력 상실로 이어진 가장 큰 배경이다.[33] 예브게니야 알바츠(Евгения Альбац). 진행자이다.[34] 당시 소련은 소련 루블과 달러의 교환이 어려웠기 때문에 석유 대금을 주로 경화로 결제받았다.[35] 북한도 소련으로부터 비슷한 혜택을 받아 소련이 무너지는 1980년대 말까지 경제운영에 필요한 천연자원을 저렴하게 공급받았으며, 소련이 붕괴한 이후 저렴한 천연자원 공급처가 사라지면서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을 겪게 된 중요한 원인이 된다.[36] 1970년대 소련에서 구내식당에서 목요일마다 생선요리를 주로 팔도록 했는데, 당시 소련의 물류유통체계 상 신속한 공급이 어려워 비린내가 나는 편이라 그리 선호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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