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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찬/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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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마추어 시절2. 삼성 라이온즈 시절3. 롯데 자이언츠 시절
3.1. 2001 시즌3.2. 2002 시즌3.3. 2003 시즌3.4. 2004 시즌3.5. 2007 시즌3.6. 2008 시즌3.7. 2009 시즌3.8. 2010 시즌3.9. 2011 시즌3.10. 2012 시즌3.11. FA
4. KIA 타이거즈 시절5. 수상 경력6. 연도별 성적

1. 아마추어 시절

충암고등학교 시절에 제2의 이종범이라고 불리며 대형 5툴 유격수 자원으로 유명했다.[1] 참고로 함께 비교되던 1981년생 3대 유격수는 박기혁, 박준서.[2]

2. 삼성 라이온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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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포토로)
삼성에서 등번호 10번을 달았던 양준혁은 당시 LG에 뛰고 있었고 김기태가 1999년에는 10번을 달다가 느닷없이 11번으로 번호를 교체해서 등번호 10번을 김주찬이 달고 뛰었다. 삼성에서 백업 내야수로 데뷔한 후에 괜찮은 컨택 능력과 빠른 발로 가능성을 엿보였고 삼성의 차기 내야수로 성장할 거라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2000년 7월 16일 마산 롯데 자이언츠 전에서 관중석 송구라는 대형사고를 쳐서 끝내기 실책을 허용하고 말았다.[3] 결국 이듬해, 외야수 이계성과 함께 선수협 파동으로 인해 롯데 구단의 미움을 받게 된 마해영과 2:1 트레이드되어 롯데로 이적하게 되었다. 결국 김주찬은 삼성에서 이제는 달 수 없는 10번을 달았던 6인 중 한 명으로 남게 되었다.

3. 롯데 자이언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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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포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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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공보다 빠른 남자!
▲ 김주찬 롯데 시절 응원가

3.1. 2001 시즌

롯데로 트레이드 된 후인 2001시즌은 주로 백업 내야수로 출전하다가 후반기부터 주전으로 중용되기 시작했다. 특히 고 김명성감독 서거 후 감독대행이었던 우용득의 지지에 따라 톱타자에 3루수로 출전하며 규정타석은 채우지 못했으나 3할대의 정교한 컨택과 15연속 도루 성공 등으로 한화 김태균, 삼성 박한이 등과 함께 신인왕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4] 이 당시 롯데가 시즌 막판까지 4강 싸움을 하는데 있어서 활력소 역할을 하며 마해영의 이적으로 속이 쓰린 롯데팬들을 달래줬다.[5]

3.2. 2002 시즌

2002 시즌에는 전년도에 비해 부진하였지만 소포모어 징크스로 보고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는게 중론. 하지만 이 해 후반 백인천 감독이 부임하면서 그는 어둠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되었다.

내야수임에도 관중석이나 덕아웃으로 송구를 하는 블래스 신드롬 증세를 나타냈기 때문에 외야수로 전향시킨 것까지는 좋았다.[6][7] 하지만 백인천 감독은 빠른 발과 좋은 컨택을 가진 김주찬을 "제2의 이승엽으로 만들겠다."라든가, "20-20은 기본이고 30-30도 충분히 가능한 선수"라면서 타격 개조에 들어갔다.그리고 3-3을 기록했다그 결과 김주찬은 이전까지의 맞추는 재능조차 모두 까먹은 채 선풍기 스윙만 해댔다. 장타력이 증가하긴커녕 타율만 2할대 초반으로 수직낙하한 채 고정되어 버렸다.

3.3. 2003 시즌

한 술 더 떠 2003 시즌은 타율 .160, 3홈런-3도루로 더더욱 추락하여 유망주의 야구인생 자체가 끝나는 것이 아니냐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8][9]

3.4. 2004 시즌

2004 시즌에는 양상문 감독의 무한 신뢰 하에 주전 외야수로 출전, 찬스마다 삼진과 범타를 일삼으며 이대호, 박기혁 등과 함께 "양상문의 양아들"이라며 무한대로 까였고 주찬이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였다. 120경기나 출전한 탓에 도루는 44개로 2위를 기록하며 그놈의 방망이만 좀 어떻게 하면...이라는 평을 받았지만 시즌 막바지에 터진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태로 인해 그해 말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 2005~2006년은 군 복무를 하였고 2007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소집해제했다.

1981년생 3대 유격수 박기혁, 김주찬, 박준서 모두 롯데 자이언츠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3.5. 2007 시즌

제대 후 맞이한 2007 시즌에는 강병철 감독의 무한 신뢰 하에 외야수로 출전, 찬스마다 삼진과 범타를 일삼으며 '강병철의 양아들'이라고 가루가 될 때까지 무한대로 까이며 주찬이라는 별명까지 새로 얻었다.

그런데 5월 27일 잠실 LG전에서 끈질기게 파울 타구를 처리하다가 머리를 땅에 부딪혀 그대로 실신하고 병원으로 후송되자, 임수혁의 악몽을 기억하는 롯데팬들이 일제히 김주찬 까기를 멈추고 한마음으로 회복을 기원했다. 다행히 바로 의식을 회복했고 이 때 타구를 처리하며 보여준 근성 때문인지 이때부터 김주찬 까기는 상당히 줄어들었다.

또한 김주찬 본인도 후반기로 갈수록 어느 정도 기량을 회복하는 모습으로 타율도 .262까지 끌어올려서 다음 시즌을 기대하게 했다.[10]

3.5.1. 베이징 올림픽 최종예선 국가대표

그런데 시즌 후 뜬금없이 베이징 올림픽 최종예선 국대로 선발되었다. 우타 외야수가 필요했고 1루도 되고 대주자도 되니 쓰임새가 많아 뽑았다고 하는데.. 팬들은 다들 당황스럽다는 분위기.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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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찬은 이 대회에서 5경기에 출전해 16타수 10안타(타율 0.625)에 5타점 3도루로 날아다녔다. 백업으로 출발했지만 맹타를 휘둘렀고, 급기야 마지막 대만 전에는 선발 3번타자로 나와 1안타 1볼넷 2도루 1득점을 올리며 한국의 역전승에 일조했다.

이 국대 출전은 김주찬의 야구 인생을 뒤바꿔놓았다고 평가된다.

3.6. 2008 시즌

베이징 올림픽 최종예선에서의 맹활약으로 자신감을 얻고, 새로 선임된 제리 로이스터 감독의 야구관 'No Fear' 와도 성향이 잘 부합을 해서인지, 2008 시즌에 들어서는 1, 2번으로 번갈아 기용되며 전반기 맹활약을 펼친다. 그런데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외야 플라이를 잡으려다 펜스와 충돌하면서 부상을 당해 이탈하였다. 그 후로 한 동안 꾸준하게 삽질을 하며 원래 자리로 돌아가나 싶었는데[11] 7월 즈음 음주 사고로 이탈한 정수근을 대신한 이인구에 밀려 1루수로 이동하였고 여기서 다시 폭발하였다. 시즌 막판에는 몰아치기까지 터지면서 타율을 3할 넘게 끌어올리며 맹활약하였고 김주찬, 이인구의 테이블 세터가 꼬박꼬박 출루해주는 것이 롯데 상승세의 원인 중 하나로 분석되었으며, 결국 롯데는 3위의 성적으로 패넌트레이스를 끝낼 수 있었다.

롯데가 죽을 쑨 2008 준플레이오프에서도 이인구와 김주찬 만큼은 꾸준히 잘해줬다. 특히, 준플 3차전에서는 악착같이 출루를 했는데 조성환, 이대호, 카림 가르시아 클린업 트리오들의 부진으로 계속 점수가 안 나왔고 나중에는 그냥 테이블 세터 둘이서 점수를 올리면서 자기들 끼리 해먹는 황당하면서도 대단한 활약을 했다. 8년의 긴 시간이 지난 이후에 드디어 포텐셜이 터진 것이다.

2008 시즌 최종 성적은 타율 0.313(리그 10위), 홈런 1, 타점 42, 도루 32(리그 5위[12]), OPS 0.752로 데뷔 후 가장 좋은 성적을 기록하였다.

3.7. 2009 시즌

2009 시즌 시작 후, 처음에는 맹타를 휘두르며 번트안타도 몇 개 치는 등 2008 시즌의 상승세를 그대로 이어가는 듯 했다. 하지만 5월에 가까워지면서 타율은 다시 2할 후반대로 추락했다. 무엇보다도 그나마 쉬운편에 속하는 1루수 수비가 그렇게 안정적이지 못했다. 거기다 김주찬의 블래스 신드롬 증상으로 내야에서의 포지션 변경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대호를 싫으나 좋으나 3루수로 기용하게 됨으로써 사실상 박기혁이 혼자 내야 수비를 하는 형세를 갖추게 되었다. 조성환의 부상 이후, 백업으로 들어온 김민성의 맹활약으로 내야가 그나마 나아진 상황.

6월 27일, 대 한화전에서 도루 중에 송광민의 스파이크에 발이 밟혀 탈골되면서 한 달 동안 결장했다.

7월 25일 올스타전에서 1루수 부문에 뽑혔지만 선발 출전하지 못하고 9회말 대주자로 출전하였다. 허나 '마구마구 온라인 홈런레이스'에서 우승을 차지해 상금 200만원을 받았다.

9월 13일, 데뷔 첫 홈스틸을 기록하였다.

2009 시즌은 타율 0.310(리그 9위), 홈런 7, 타점 51, 도루 34(리그 5위에 성공률도 83%로 상당히 좋아졌다), 출루율 0.356, 장타율 0.451, OPS 0.806로 2008 시즌보다 더 좋은 성적으로 시즌을 마무리하였다.

3.8. 2010 시즌

시즌 초에는 출발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박종윤의 각성 때문에 1루수보다 중견수로 더 많이 출장하고 있기 때문인지 전년도보다 낮은 타율에 특히 톱타자감으로는 낙제점인 출루율을 보여주었다. 수비는 원래 좋지 않은 선수였지만 더욱 더 불안한 중견수 수비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5년 연속 두 자리 수 도루를 기록했다. 그 와중에 코뼈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전반기 막판에 벌어진 황재균김민성, 김수화 트레이드로 인하여 이대호가 1루수로 수비위치를 이동하게 됨으로서 좌익수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홍성흔의 부상으로 이대호가 지명타자로 이동함에 따라 8월 이후에는 다시 1루수로 많이 출장했다.

8월 28일, 2연속 도루에 성공하면서 이대형을 제치고 도루 1위에 올랐다. 이후 함께 출루율 꼴찌를 다투고 있는 이대형과 한동안 엎치락뒤치락했다.

드디어 9월 18일, 도루 2개를 추가하며 60도루를 돌파했다. 하지만 이대형이 9월 26일에 도루 1개를 추가하면서 결국 도루왕을 놓쳤다.

2010년 페넌트레이스 기록은 타율 0.276, 출루율 0.324[13], 홈런 9, 타점 40, 도루 65(리그 2위[14]), 장타율 0.386, OPS 0.710. 클래식 스탯은 좋아보이지만 출루율이 너무 심하게 낮아서 sWAR 1.30이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sWAR 1.91을 기록한 이대형보다 한참 낮았다. 타고투저가 작년부터 왔는데도 역으로 성적이 떨어졌으니...

김주찬과 이대형의 도루 스타일은 서로 다른 게, 도루에 있어서 세 가지 요소인 3S(스피드, 스타트, 슬라이딩) 중에서 김주찬은 스피드 및 가속력이 이대형보다 낫고, 이대형은 스타트, 슬라이딩이 낫다는 평. 물론 두 선수 모두 나머지 요소들 모두 평범한 주자보다 훨씬 월등한 것은 말할 필요 없는 사실이었다.

두산 베어스와의 2010년 준플레이오프 전 경기에서 선발 1루수 겸 1번타자로 출장하여 20타수 9안타 2볼넷 1몸에 맞는 공 1타점 6득점, 타율&장타율 .450, 출루율 .522로 좋은 활약을 했지만, 팀은 2연승뒤 3연패로 탈락했다.

이 해의 안습한 도루 관련 에피소드는 여담 문서 참조.

3.9. 2011 시즌

시즌 초부터 타격 능력이 많이 침체되었다. 개막전부터 1번 타자로 기용되다가 4월 중후반부터 전준우에게 톱타자 자리를 내주고 9번 타자로 밀려났다.

4월 23일 SK전에서 상대 선발 짐 매그레인의 공에 손목을 맞았다. 처음에는 단순 타박상인줄 알았으나 재검사 결과 미세골절로 밝혀져 엔트리에서 제외되었다. 6월 중에 복귀가 가능할 것으로 보고 훈련에 들어갔었으나 병원에서 검사 결과 아직 뼈가 아물지 않아 좀더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밝혀졌다.

6월 21일 두산전에서부터 복귀하였다. 복귀 후, 스탯을 상당히 끌어올린 점이 고무적이다.

부상 중이던 2달 동안 뭘 했는지 그 전에 비해 살이 좀 붙었고, 주루스피드 자체가 이전에 비해서 다소 줄었다. 대신 7월을 기점으로 수비가 안정적으로 바뀌었다. 김주찬의 수비를 아는 사람이라면 경악할 정도로 겨우내 3루 수비 연습을 해 외야 수비 감각이 떨어진 전준우의 수비범위를 야금야금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가장 큰 원인은 조원우 외야 수비 코치 덕분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초구를 참는 습관도 생겨서 홈런보다 보기 힘들다는 볼넷도 자주 얻어내었다.

2011 시즌 페넌트레이스 최종 성적은 타율 0.312, 출루율 0.360, 장타율 0.423, OPS 0.783, 6홈런, 40타점, 25도루. 부상 때문에 규정타석은 채우지 못했으나 시즌 막판의 무서운 상승세로 100안타를 채우며 6년 연속 100안타를 기록하였다.

2011년 10월 16일 사직야구장에서 열린 SK 와이번스와의 2011년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는 1회말 상대 선발 투수김광현으로부터 선두 타자 홈런을 쳤다. 이날 김주찬은 5타수 3안타, 1홈런, 1볼넷, 1도루, 2타점, 2득점으로 맹활약했지만 팀은 연장 10회 접전 끝에 7:6으로 패배하였다.

김주찬은 SK 와이번스와의 2011년 플레이오프에서 21타수 10안타, 1홈런, 1볼넷, 1사구(死球), 2타점, 4득점, 타율 0.476, 장타율 0.762, 출루율 0.522로 맹활약했지만, 팀은 SK에게 시리즈 전적 2승 3패로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11월 18일, 울산에 위치한 천상초등학교와 천상중학교를 방문해 학생들의 야구 기본기와 실기지도 선생님으로 참여했다.

3.10. 2012 시즌

시즌 초에는 햄스트링 부상 등 잔부상이 많아 많이 출전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부상에서 복귀한 뒤 6월부터 롯데 타선에서 미친 존재감을 드러내며 타율 0.294, 32도루(3위), 장타율 0.405, 출루율 0.346을 기록했다.

두산 베어스와의 2012 팔도 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에서 1차전은 선발 좌익수 겸 2번타자, 2, 3, 4차전은 선발 좌익수 겸 1번타자로 출장하여 18타수 5안타(2루타 한 개 포함), 2타점 2볼넷, 타율 0.278, 장타율 0.333, 출루율 0.350을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3승 1패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SK 와이번스와의 2012년 플레이오프 전 경기에서 선발 좌익수 겸 1번타자로 출장하여 22타수 7안타 1볼넷 1몸에 맞는 공 2도루 1타점 3득점, 타율 .318, 장타율 .409, 출루율 .375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2승 3패로 탈락했다.

김주찬은 2012년 포스트시즌에서 40타수 12안타 3볼넷 1몸에 맞는 공 3타점 3득점, 타율 .300, 장타율 .375, 출루율 .364를 기록했다.

3.11. FA

2012 시즌 종료 후, 생애 첫 프리에이전트 자격을 얻었다. 일찌감치 FA 시장의 최대어로 꼽혔는데 이유는 2013 시즌 첫 1군 진입을 하는 신생팀 NC 다이노스의 존재, 그리고 한화 이글스류현진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280억이라는 실탄을 획득했고, 또 다른 주요 타자매물인 LG 트윈스정성훈, 이진영이 시장에 나오지 않고 일찌감치 원소속팀에 잔류함에 따라 그만큼 김주찬의 가치가 뛰어오르게 되었다. 스토브리그 시작 당시부터 50억 대박설이 나돌았고, 한화의 김응용 감독도 50억 원의 가치가 있다라고 평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원소속팀 우선협상기간의 마지막 날인 11월 16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최종협상을 가졌으나 결렬되었다. 롯데는 4년 44억(옵션 4억)을 제시했으나, 선수 본인은 4년 48억(옵션 8억)으로 옵션 4억을 더 요구했다고 한다. 세간의 평은 "44억도 오버페이다", "롯데 프런트도 할만큼 했다"라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웬만한 조건이면 롯데에 남고 싶다고 말했던 김주찬이었기에 보장금액도 아닌 옵션 4억에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소식에 배신감을 느낀 롯데팬도 적지 않았다. 킬리만자로의 거지

롯데가 협상 막판엔 49억까지 제시했다는 기사가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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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1월 17일, 뜬금없이 KIA 타이거즈와의 접촉을 통해 입단을 결정하였다. 계약조건은 4년 계약에 계약금 26억, 연봉 5억에 옵션 4억으로 총액 50억. 김응용의 50억 발언이 현실이 된 셈. 정작 김주찬이 시장에 나온 직후 가장 먼저 접근한 팀은 한화였지만, 한화와의 협상이 지지부진한 사이에 KIA가 재빠르게 접근해 계약을 바로 확정지었다고 한다. KIA팬들은 헛돈만 쓴 게 아니냐면서도 일단 사왔으니 제대로 써 보자는 반응을 보였다.

롯데의 49억 제의는 다른 기자에 의해서도 언급되었던 것으로 보아 사실임이 확실해보인다. 아마 KIA가 옵션 조건 등 세부 계약내역[15]에서 더 좋았지 않겠냐는 것이 이 기사의 추정. 이후 롯데에서는 FA 보상선수로 홍성민을 지명하였다.

KIA에서 받은 등번호는 조영훈이 NC로 옮기게 되면서 결번이 된 16번.

그리고 1년 뒤, 이 계약은 시작에 불과했는데...

4. KIA 타이거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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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찬 KIA 응원가

4.1. 201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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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201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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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 시즌에 기록한 도루 13개 중 7개는 허도환에게서 뺏어낸 도루다.

4.3. 201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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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즌부터 도루 갯수가 줄어드는 대신 장타 포텐이 대폭발하면서 FA 이전 김주찬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상반된 이미지가 생겼다.

4.4. 201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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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자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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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찬의 커리어하이 시즌

4.5. 2017 시즌

파일:zldwncj.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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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FA 2기

FA 시장에 나왔다. 일단은 현 소속팀과 우선 협상을 진행한다고 나왔고, 나이도 30대 후반을 향해가는데다 보상금이 비싸기 때문에 실제로도 KIA와 계약을 맺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대어급 야수들의 행선지가 정해지고 슬슬 시장의 윤곽이 잡혀가는 가운데 2017년 크리스마스까지 양현종과 함께 재계약 소식이 들리지 않았었다. 기사를 보면 그래도 양현종은 큰 틀에서 협상 윤곽이 잡힌 것으로 보이나, 김주찬은 아직도 멀었다는 것이 좋지 않은 느낌. 문제가 되는 건 만 36세라는 늦은 나이와 그에 따른 계약 기간의 차이로 보인다. 해당 기사에서는 2+1년 계약을 찼다고 하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선수 측에서 꽤나 터무니없는 조건을 바라고 있는 듯. 팬들은 우승 달성에 기여해준 건 고맙지만, 양현종도 1년 단기 계약으로 끝낸 마당에[16] 풀타임 출전한 시즌도 적으면서 장기 계약을 바라는 모습을 썩 달가워하지만은 않는 듯 하다. 놀랍게도 그 양현종이 재계약을 한 12월 28일을 넘긴 18년 1월 시점에도 김주찬은 계약을 하지 않고 있었다.

정성훈, 서동욱, 최원준이라는 카드도 있어서 이들을 잘 활용하면 김주찬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는 수준은 되었음에도 2+1년 연간 10억 제안을 찼다는 것이 알려지며 상당한 야유를 받고 있다. 유격수인 손시헌이 2년 15억 계약을 맺었는데 이건 해도해도 너무하다는 반응. 이미 이 정도 규모의 제안을 한 것만으로도 KIA 구단은 호구 인증을 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걸 거절한 김주찬은 도대체..

비슷한 나이대의 채태인이 2년 10억에 롯데로, 정근우가 한화 구단 방침으로 맥시멈 2년 계약제한이 걸린 상태에 방출된 정성훈이 KIA와 링크가 뜨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대체 자원으로 거론되는 정성훈은 2016년 FA로 1년 8억 원의 계약을 맺고 방출되고 소속 팀을 절실하게 찾고있는 입장이라 낮은 눈높이에서 계약할 수 있고 정성훈과의 계약이 성사될 경우 김주찬은 그대로 FA 미아가 되는 것이다. 오랫동안 몸담아왔던 롯데로 돌아가고자 해도 롯데가 민병헌채태인을 영입하면서 최준석FA 미아가 되게 생긴 판국에 김주찬이 들어갈 자리는 없어져 버렸고 다른 팀으로 가려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다.[17]

KIA에선 대체할 자원이 충분히 있고 비슷한 나이대에 비슷한 스펙을 가진 외부자원을 더 싸게 영입할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김주찬의 계약을 우선시하는 것은 그가 KIA의 주장인데다 5년간 KIA에서 그나마 꾸준히 해준 것이 있기 때문이다.[18] 김주찬이 내세울 유리한 협상 카드가 확실히 적은 상황에서 스프링캠프까지 약 보름 남은 상황. 계속 이렇게 불안요소를 내재함으로서 팀 분위기가 흐트러질 전망이 있다. 과연 먼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사람은 조계현 단장일지, 김주찬 선수 본인일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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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 것은 KIA 타이거즈 구단과 조계현 단장이었다. 2018년 1월 16일, 2+1년 계약금 15억, 연봉 4억으로 총액 27억원에 계약했다. 팬들의 평가는 거품이라는 평이 대다수. 그래도 어찌어찌 계약을 마쳤다. 김주찬과의 협상을 마지막으로 KIA는 2017년 한국시리즈 우승 전력을 올해까지 그대로 끌고 갈 수 있게 되었다.

사실 KIA의 이러한 노장 대우는 길게 보면 KIA 측에도 득이 될 수 있긴 하다. FA 계약 시에 비슷한 금액을 복수의 구단들과 KIA가 제시했을 때 다음 FA 때까지도 어느 정도 배려해주는 KIA 쪽으로 선수들의 선택이 갈 가능성이 높아질수 있다는 것.

4.7. 2018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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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2019 시즌

김기태 감독과의 면담 끝에 3년 연속 주장에 선임되었다. 여기에 정성훈이 은퇴하면서 야수 최고령 및 팀 내 최고령 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최악의 모습을 보이며 스스로 은퇴의 길을 걷고 있다.[19]

결국 1군과 2군을 재활과 부상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5월 15일 자로 안치홍에게 주장직을 넘겨주었다.

복귀전인 5월 22일 롯데자이언츠와의 5차전 경기에서 5타수 3안타로 활약하여 팀에 승리에 기여하였다.

5월 23일 3타수 무안타를 기록했지만 최형우의 멀티홈런으로 팀은 승리하였다.

6월 5일 두산전에서 멀티히트를 쳤지만 8회말 주자 1, 3루 상황에서 1루에서 홈으로 송구 실책을 해서 경기를 말아먹었다.

6월 7일 NC전에서 대타로 2루타를 치고 희생플라이로 홈으로 들어가는데 너무 안일해서 아웃당했다.

요즘 1번타자 출장을 하는데, 초구찬이라는 말처럼 맨날 첫번째 타석에서 초구를 치고 죽는다. 실제로 직관을 가 보면, 라인업송 부르고 있는데 어느새 아웃카운트가 올라가 있다.

9월 3일에는 한화전에서는 3할을 찍었다.

9월 18일에 말소되면서 정확히 3할로 시즌을 마감했다.

시즌 이후 40인 보호명단에서 제외되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2차 드래프트에서 그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20]

4.9. 2020 시즌

2019년 12월 12일에 왼쪽 허벅지 지방종 수술을 받아 스프링캠프에서 빠지게 되었다. 4~5개월 정도 재활이 필요해 빨라도 4월에서 5월쯤은 되어야 모습을 볼 수 있을 듯 했으나, 생각보다 회복이 빨라서 2월 중순부터 스프링캠프에 합류할 수 있다고 한다.

5월 5일 시즌 개막 후 1군 엔트리에는 들지 못하고 꾸준히 퓨처스 경기에 출장했지만, 타율이 1할도 채 안될 정도로 타격이 심각하게 좋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콜업 이야기가 전혀 안 나왔다.

6월 6일 퓨처스 리그에서 4안타를 기록했고 현재 16경기 타율 0.366/ 15안타/ 2홈런을 기록하고 있다. 윌 감독은 타격감이 올라왔음을 언급하며 곧 기용할 것을 예고했다.

6월 7일, 1군에 등록되었다. 대신 황대인이 말소되었다.

6월 7일 두산전에서 선발 1루수, 6번타자로 출전해 찬스를 많이 말아먹거나 주루사를 당하는 등 4타수 1안타의 부진한 활약을 했다.

6월 11일 KT전에서 선발 출전해 시즌 마수걸이 홈런을 때려내는 등 4타수 3안타(1홈런) 1타점 2득점의 맹타를 휘두르며 유민상과의 경쟁에 불을 지폈다.

6월 12일 SK전에서 6번타자로 출전해 4타수 무안타를 기록했다.

6월 14일 SK전에서 6번타자로 출전해 3타수 1안타 1타점을 기록했다.

6월 16일 NC전에서 유민상의 대타로 등장해 1타수 무안타를 기록했다.

6월 21일 삼성전에서 최형우의 대타로 출전해 안타를 기록했다.

6월 22일 1군에서 말소되었다. 사유는 고질적인 허리 통증의 재발. 다음 날 10일짜리 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2군에서도 출장 기록이 없다.

시즌 종료 후인 11월 7일, 본인 요청에 의해 FA로 풀렸다. 부상으로 인해 올해는 변변한 활약도 못한데다 나이도 야구선수로서는 황혼기이고, 현재 KIA에서 젊은 선수들 위주로 적극 육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추가적인 계약이 어려워 FA 시장에 나와 새 팀을 찾을 생각인듯. KIA측에선 현역 연장에 대한 의지가 강해 흔쾌히 풀어줬다고 설명했다.

2달 후인 2021년 1월 5일, 은퇴 및 지도자의 길을 걷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나왔다. 2021 시즌은 두산 베어스에서 코치로 활동할 예정. # 이로서 프로선수 활동은 KIA에서 마무리 한 셈이 되었다.

5. 수상 경력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김주찬의 KBO 수상 경력
2008 동군 올스타(베스트10)
2009 이스턴 올스타(베스트10)
2012 이스턴 올스타(베스트10)
2015 나눔 올스타(베스트12)
2016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 나눔 올스타(베스트12)
2017 한국시리즈 우승

6. 연도별 성적

  • 푸른 글씨는 KBO 최다,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글씨는 리그 5위 내 입상 성적.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김주찬의 역대 KBO 기록
<rowcolor=#ffffff>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RC+ WAR*
2000 삼성 60 52 15 3 2 0 5 22 7 3 16 .313 .365 .458 .824 118.7 0.36
<rowcolor=#ffffff>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RC+ WAR*
2001 롯데 86 333 94 21 4
(4위)
4 31 57 29
(3위)
24 56 .313 .363 .450 .813 111.1 1.81
2002 84 291 58 13 4
(4위)
7 25 25 9 14 75 .220 .271 .379 .650 66.4 -0.45
2003 55 131 20 5 1 3 3 12 7 5 33 .160 .192 .288 .480 12.2 -0.91
2004 120 503 109 20 5
(2위)
7 42 53 44
(2위)
32 92 .242 .310 .356 .665 77.8 2.07
2005 군복무 (공익근무요원)
2006
2007 113 416 101 17 1 5 30 49 22 13 69 .261 .298 .349 .647 75.6 0.57
2008 104 458 129 16 7
(1위)
1 42 75 32
(5위)
24 61 .313 .359 .393 .752 108.5 3.08
2009 109 479 135 30 5
(4위)
7 51 77 34
(5위)
28 56 .310 .356 .451 .806 105.7 2.26
2010 118 535 134 18 4
(4위)
9 40 89
(2위)
65
(2위)
31 65 .276 .324 .386 .710 85.4 1.30
2011 86 371 100 12 3 6 40 58 25 27 38 .312 .373 .424 .797 117.3 2.40
2012 118 488 128 27 3 5 39 62 32
(3위)
30 48 .294 .346 .405 .751 113.7 2.88
<rowcolor=#ffffff>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RC+ WAR*
2013 KIA 47 195 51 9 4 0 28 24 23 15 18 .304 .372 .405 .777 106.8 1.32
2014 100 442 138 32 4 9 46 72 22 31 48 .346 .397 .514 .911 127.7 3.06
2015 98 377 109 23 2 18 62 66 8 23 58 .327 .383 .571 .954 137.3 2.57
2016 130 555 177 37
(4위)
3 23 101 97 9 30 68 .346
(4위)
.386 .566 .952 135.8 4.12
2017 122 478 136 39
(3위)
2 12 70 78 9 31 59 .309 .359 .489 .848 116.0 2.35
2018 121 471 146 23 0 18 93 71 8 23 57 .340 .375 .520 .895 122.1 2.75
2019 100 363 101 16 0 3 32 35 3 17 44 .300 .340 .374 .714 97.0 0.71
2020 7 18 6 0 0 1 2 3 0 0 2 .333 .333 .500 .833 117.0 0.04
KBO 통산
(19시즌)
1778 6956 1887 361 54 138 782 1025 388 401 963 .300 .349 .440 .788 105.8 32.26


[1] 훗날 김주찬이 KIA로 이적하게 되었을 때, 어떤 기사에서는 이종범의 공백이었던 우익수 자리를 메워줄 선수라고 평가했다.[2] 공교롭게도 이 세 선수는 박준서가 SK에서 트레이드되어 들어온 2002년 여름부터 롯데 자이언츠에서 함께 뛰게 된다. 하지만 2012년 말 김주찬이 FA가 되어 KIA에 이적했고, 2014년 말 박기혁이 FA로 kt에 이적,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박준서마저 2015년 방출되며 이 셋 모두 롯데를 떠나게 되었다.[3] 이 경기 전까지 삼성은 13연승을 달리고 있었고, 더불어 이 경기에서 9회까지 1:2로 삼성이 지고 있었으나 주장 김기태가 극적으로 솔로홈런을 치면서 동점까지 따라갔다.[4] 결국 2001년 신인왕은 김태균이 차지했다.[5] 이 시즌이 전설의 비밀번호 8888577에서 첫번재 8을 찍은 시즌이긴 하지만, 4위와 2경기 차이인 8위였다. 그러나 이 시즌 중 김명성 감독이 사망하고 뒤에 어느 골프를 좋아하시는 분이 감독으로 오면서...[6] 충암고 시절엔 유격수였다. 그의 내야 송구가 엉망이 된 이유에는 고교 시절 몇 차례 투수로 등판했다가 송구 폼이 변해서라는 설이 있다.[7] 이처럼 발이 빠른 센터라인의 야수를 수비 불안이나 부상 방지 등의 문제로 인해 외야수로 전향시키는 사례는 꽤 많다. 물론 귀한 내야수를 굳이 외야수로 바꾸냐고 싫어하는 팬들 역시 심심치 않게 나온다.[8] 하지만 무조건 백인천 감독을 비난할 수만은 없는 것이, 당시 김주찬이 갖추었던 툴을 감안해 보면 30-30 같은 것이 완전히 가능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백인천 감독의 무리한 장타 교정과 김주찬 개인의 불성실함이 낳은 하모니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9] 오랜 시간이 지난 2015년 시즌에 부상으로 출장이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18홈런을 기록했고, 2016년 시즌에는 3할+20홈런+100타점을 기록하기도 했고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하는 등 타신투병의 2015-2018 4시즌 동안 매년 두자리 수 홈런을 넘겨 나름대로의 장타 툴을 보여 주었다. 물론 이 시기는 KBO리그 역사상 최악의 타고투저 시기였던 탓에 커리어 내내 두자릿 수 홈런을 넘겨본 적이 없는 정근우도 한시즌 18홈런을 때리는 등, 대부분 타자들의 클래식 스탯이 비약적으로 향상했던 시기임을 고려할 필요는 있다.[10] 여담으로 하루가 멀다하고 삽질을 거듭하며 까이다 보니 현란한 언어솜씨로 김주찬을 까는데 도가 튼 한 야갤러가 명성을 얻는 일까지 생겼다. 정카스 어록[11] 시즌 초반 로이스터가 '내가 아는 김주찬은 2할 6푼 2리의 타자다'라고 말했었다. 객관적으로 보겠다는 의미였겟지만 어째 예상이 그대로 맞아 떨어지는듯한 모양새..[12] 단 성공률은 64%로 그리 높지 않다. 세이버메트리션 상으론 도루 성공률이 70% 이하인 경우 뛰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고 본다.[13] 규정 타석을 채운 타자 중 뒤에서 2등.[14] 도루만 놓고 보자면 커리어 하이.[15] KIA와의 계약 내용에서 옵션 4억, 4년간 연봉 총 20억, 계약금 26억원이라는 내용을 참고. 4년 연봉 총액보다 계약금으로 받는 액수가 더 많다. FA 계약 총액이 아닌 계약금 26억만 두고 보면 4년 총 60억에 계약한 심정수(계약금 20억)보다 많으며, 똑같은 50억에 계약한 이택근 역시 계약금은 16억으로 김주찬보다 10억이 적다. 무엇보다도 계약금은 규정상 계약 첫 해 전반기/후반기 나눠서 지급하거나 구단 재량으로 일시불로 지급할 수 있다 보니 선수 입장에선 4년간 나눠받는 연봉보다 계약금을 일시불로 받으면 그만큼 단기간에 목돈을 손에 쥘 수 있다 보니 계약금 비중을 높이는 게 유리하다.[16] 다만 양현종은 규정상 1년 단위 연봉 협상만 가능한 상태이다.[17] 타 팀 이적에 경우 보상제도가 관건인데 FA 선수를 영입하기 위해서는 보호선수 20인 외 보호선수 + 연봉의 200% 또는 연봉의 300%를 지불해야 한다. 젊은 유망주를 주면서까지 30대 후반의 김주찬을 영입하려는 팀은 찾기 어려울 것이며, 김주찬의 2017년 연봉은 무려 6억 원이나 되기 때문에 보상으로 최소 12억 원+선수 1명 혹은 최대 18억 원을 지불해야 한다.[18] 규정타석 3할을 채운 것도 2년 뿐이고, 선수 본인의 노쇠화가 보였던 2017 시즌 초반을 생각하면 KIA에서는 김주찬의 부상과 노쇠화 등을 감수하더라도 우승 프리미엄, 주장으로서의 자존심, 팀 케미를 지키기 위함으로 보인다.[19] 4월 28일 기준 sWAR이 -0.43으로 팀 내 야수조 사이에서 꼴지이다.[20] 지방 모 구단에서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가 있는 베테랑 내야수가 40인 명단에서 빠졌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결국 확인된 건 정근우였다. 구단이 명단을 공개하지 않는 이상 영원히 알 길은 없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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