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28 13:38:49

금강대도

동아시아의 종교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한국
전통신앙 계통
· ·
삼교 계통
· · ·
동학 계통
·
증산 계통
· · ·
중화권
삼교 계통
· ·
소수민족 계통
·
일본
신토 계통
·
교파신토 계통
· · · ·
불교 계통
베트남
·
몽골
}}}}}}}}}

{{{#!wiki style="margin:-10px -10px; word-break: keep-all"<tablebordercolor=#01a0c6>
파일:세종특별자치시 휘장_White.svg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color=#000,#fff> 국립세종수목원세종전통시장 • 조치원 문화정원 • 고복저수지 • 오봉산 맨발등산길 • 신안저수지 수변공원 • 조천연꽃공원 • 연화사 • 베어트리파크 • 비암사 • 뒤웅박고을 • 운주산성 • 금강보행교 • 금강수변공원 • 정부세종청사 옥상정원 • 대통령기록관밀마루 전망대국립세종도서관국립박물관단지세종호수공원세종중앙공원고운뜰공원 • 합강공원 • 세종예술의전당 • 숭덕사(덕성서원) • 지혜의숲 • 도시상징광장 • 방축천 음악분수 • 초려역사공원 • 영평사 • 금강대도미래엔교과서박물관김종서 장군묘 • 충청남도산림박물관
파일:세종특별자치시 브랜드 슬로건.svg }}}}}}}}}
파일:금강대도.jpg
금강대도 총본원에 있는 금강도덕문(金剛道德門).[1]
1. 개요2. 상세
2.1. 역사
2.1.1. 이승여의 대성적(大聖蹟)2.1.2. 이성직의 도성적(道聖蹟)2.1.3. 이일규의 덕성적(德聖蹟)2.1.4. 이경구의 태극적 개화시대(太極的 開化時代)

1. 개요

금강대도 150주년 기념 영상
금강대도(金剛大道)는 1874년[2] 이승여(李承如)[3]와 서의복(徐宜福)[4]이 창도한 민족종교이다.

금강대도는 창도주이자 1대 도주인 이승여와 서의복을 대성사부모(大聖師父母), 2대 도주인 이성직(李成稙)[5]과 민영인(閔永仁)[6]을 도성사부모(道聖師父母), 그리고 3대 도주인 이일규(李一珪)[7]와 김동윤(金東允)[8]을 덕성사부모(德聖師父母)라 하는데, 이들을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해 줄 구세주로서 삼신일체(三神一體)의 건곤부모(乾坤父母)[9]로 믿는다.

또한 , 삼교의 진리를 하나로 합하고 (忠孝)와 성경(誠敬)[10], 가화(家和)[11], 청결(淸潔)[12]을 실천하여 도덕군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2. 상세

2.1. 역사

금강대도의 역사는 이승여가 태어난 서기 1874년 5월 19일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금강대도에서 이승여를 생이지지(生而知之)[13]성인으로 추앙하여 금강대도의 기년법인 개도(開道)의 원년은 이승여의 출생년도로 잡고 있기 때문이다. 서기 2025년은 개도 152년이다.

금강대도의 역사는 전체적으로 4기[14]로 구분할 수가 있는데, 창도주이며 제1대 도주인 이승여의 생애에 대한 대성적(大聖蹟)과, 제2대 도주인 이성직의 생애에 대한 도성적(道聖蹟), 제3대 도주인 이일규의 생애에 대한 덕성적(德聖蹟)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제4대 도주 이경구(李敬求)[15]의 태극적 개화시대(太極的 開化時代)[16]를 제4기로 구분할 수 있다.

2.1.1. 이승여의 대성적(大聖蹟)

파일:이승여와 서의복.jpg
이승여(오른쪽)와 서의복(왼쪽)의 초상
이승여는 1874년 강원도 통천군에서 태어났고, 1898년 서자암과 결혼하였다. 이후 이승여는 1906년 종교적 체험을 겪게 되는데 그가 나무를 하고 내려오던 중 '자신이 건곤부모로서 새로운 우주를 열고,[17] 남쪽 충청도로 거처를 옮겨서 도덕 문명의 봄을 여는 만인의 스승이 된다.[18]'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 후 이승여는 자신은 금강도사(金剛道師)라 하고, 서자암은 연화도사(華蓮道師)라고 하면서 금강산을 중심으로 포덕(布德)[19]을 시작하였다.

이후 1910년 4월 8일 이승여는 가족제자들을 데리고 금강산을 떠나 계룡산 신도안(新都案)[20] 본격적인 포덕을 시작하였다. 이를 금강대도에서는 남천포덕(南遷布德)[21]이라 한다. 남천포덕 이후 수천 명의 제자를 얻으며, 교세가 늘어났으나 경술국치로 인해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일제는 민족종교들을 유사종교라는 명목으로 탄압하였기 때문에 이승여는 은거지를 옮겨가며 비밀리에 포덕을 이어갔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는 교세가 늘어날 수록 더욱 심해져 근거없는 죄목을 씌워 강제로 연행하여 구금하였다. 또한 1921년에는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냈다며 이승여와 제자들을 강제로 연행하였고, 이승여와 제자들은 고문을 받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파일:칠만대기.jpg
일제강점기 당시의 금강대도 총본원 전경
1922년 논산군 두마면에 법당을 건설하였는데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일본 불교의 일파인 진종동붕교(眞宗同朋敎)의 간판을 걸었다. 또한 불상을 봉안하고, 그 안에 단군상을 비밀리에 봉안했다. 이후 1923년 현재의 금강대도 총본원이 있는 연기군 금남면 금천리에 도장을 건설하였다. 이후 진종동붕교의 간판을 내리고 관성교연기지부(關聖敎燕岐支部)[22]로 바꾸었다가 1927년 금강도총본부(金剛道總本部)를 내걸었다.[23] 이때부터 금강도(金剛道)라는 명칭이 쓰이기 시작했다.

1927년 서의복이 사망하자 제자들은 군사부일체의 교리를 실천하기 위해 중복(重服)을 입고, 3년상을 치렀다. 이후 금강도는 충청도를 중심으로 경성부, 경기도, 강원도, 평안도 등은 물론 전국에 뻗쳐 함경도제주도에까지 지부를 설치하며 교세를 확장하였는데 신도 수가 20만 명[24]에 달했다고 한다. 이후 1934년 충남도청 앞 광장에서 도인들을 모아 포덕과 민족 의식 선양을 위해 흰옷을 입고 손에는 태극기와 함께 사구기(四九旗)[25]를 들고 수천 명이 광장에 모여들었으나, 내부자의 밀고로 사전에 발각되고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더불어 이때 장남인 이성직과 여러 제자들이 옥고를 치르게 되자 이승여는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하고 말았다. 이때에도 제자들은 중복을 입고 3년상을 치렀다.
파일:대성사부양례.png
이승여의 장례
이승여는 포덕을 위해 여러 방법을 사용했는데 1925년에는 포교 조직인 선화부(宣化部)를 두고, 그 책임자인 선화사(宣化司)로 하여금 전국 각지의 도인들을 관장하게 하는 등 교화 조직을 정비하였다. 또한 식자층의 포덕을 위해 교유문(敎諭文) 등 한문으로 된 여러 경전을 저술했고, 비식자층의 포덕을 위해 비유의술을 통한 포덕을 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양반상민, 남자여자가 한 자리에서 수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승여가 구술(口述)한 것을 약 18년간 제자들이 받아 적어 경전화해 나갔는데 모두 11경 28권의 방대한 양으로 이를 『대성경(大聖經)』[26]이라고 한다.

2.1.2. 이성직의 도성적(道聖蹟)

파일:이청학과 민보단.png
이성직(오른쪽)와 민영인(왼쪽)의 초상
1934년 이승여가 사망한 뒤 1937년 이성직은 2대 도주로 추대받으며 도통을 계승하였다. 이성직은 일본 불교 시찰[27]을 나갔는데, 이는 일제가 금강도를 일본 불교에 통합시키려 하다가 이성직이 이에 불응하자 일본 불교를 과시하고자 일본 방문을 주선한 것이었다. 이성직이 일본에 도착하자 일본 승려들은 참선으로 이성직을 시험하려 했는데 이성직이 12시간이나 정좌하였다고 한다. 이에 일본 승려들은 일본 불교 진언종(眞言宗)의 창시자인 홍법대사(弘法大師)의 후신이라며 칭송하였다고 한다.
파일:흥기도덕가.gif
흥기도덕가무 시연 장면
이성직은 환국 후에 교리의례를 체계화하는 일에 매진하였는데, 특히 자신의 종교적 이상을 상징화하여 흥기도덕가(興起道德歌), 봄노래 등을 가르쳐 주고, 가사 내용에 따라 여러 가무(歌舞)를 추게 하였다. 노래에는 우리나라의 해방이 임박해 있다고 예언하여 도인들의 사기와 민족정기를 북돋고 해방의 희망을 심어주었다.

금강도의 교세가 점차 확장되자 일제는 사찰을 명령했고, 이후 금강도를 배일(排日) 단체로 규정하였다. 또 일제는 금강도에 대한 억압책으로 도인들을 간도로 강제 이주하려 했지만 도인들은 강하게 버텼다.

이후에도 일제는 탄압의 명분을 찾았다. 그러다 문제가 된 것이 있었는데, 당시 일제는 천황에게 매일 경배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성직이 "우리 배달민족은 단군의 자손이며 천황의 자손일 수 없다."며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천황에게 경배하지 않았다. 이에 조선총독부에서는 ‘금강도를 굴복시키던가, 아니면 없애버리라’고 명령을 내렸고 일본 경찰은 야밤에 금강도를 급습하여 이성직과 주요 간부들을 강제 연행하기로 했다.

일본 경찰은 100명이 넘는 인원을 동원하여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을 씌워 도인들을 끌고 갔다. 이에 이성직은 “모든 것을 내가 책임질테니 나머지 도인들은 즉시 석방하라”고 요구하며 그러지 않으면 체포에 응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이성직과 일본 경찰이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도인들은 일본 경찰을 습격해 이성직을 구출하려 하였다. 하지만 일본 경찰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붙잡혀 오히려 연행자만 늘어나게 되었다.
파일:옥중서한문.gif
이성직의 옥중서한문
일본 경찰은 이성직을 비롯한 도인 53명을 연행하였다. 이성직은 대전경찰서에 수감됐는데, 바로 그날 일본이 미국진주만을 공습태평양 전쟁이 발발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그러자 이성직은 갑자기 얼굴이 밝아졌고 이를 이상하게 여긴 간수가 ‘무엇이 좋아 그러느냐?’ 물어보자 “좋을 수밖에 없다. 이제 너희 일본이 망할 날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이 전쟁에서 틀림없이 망하고 말 것”이라고 예언했다.

일본 경찰은 도인들에게 고문을 가해 신앙을 버리고 일본 천황의 신민이 되겠다는 각서에 서명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도인들이 이를 거부하자 고문을 더욱 악랄해졌고 목숨을 잃은 도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옥살이에 지쳐 숨진 도인은 11명에 달했다.

이에 도인들은 매일 대전경찰서로 몰려와 도인들의 석방을 요구했고,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일본 경찰의 막무가내식 행태에 대한 여론도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공주법원의 곤도 검사는 경찰의 강압 수사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직권으로 기소 조치하였다. 한밤중에 납치되듯 끌려간 지 9개월만에 재판을 받게 된 것이다. 곤도 검사는 구속된 도인들을 상당히 온건하게 대했고 이성직을 병보석으로 석방 조치했다.

이렇게 이성직 등 도인 53명이 체포되고, 또 도인 11명이 순도한 이 1941년 신사년에 일어난 사건을 신사사변(辛巳事變)이라고 한다. 신사사변으로 금강도의 수많은 성전건물들이 파괴되었으며 도인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성직은 조치원읍 신흥동에 거주 제한 당하는 것을 조건으로 석방된 것이었기에 금천리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집 주변에는 일본 경찰들을 배치해 감시하게 하고 도인들의 출입도 금지했다. 감시 중에도 이성직은 항일운동이 암암리에 계속하였다.

신사사변 이후에도 일제의 탄압은 계속되었다. 일제는 이성직에게 총본원의 모든 건물을 충청남도나 조선총독부에 기증하라고 요구했으나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일제는 도인들을 위협하거나 기증서에 서명을 강요하거나 잡아다 고문하여 정신을 잃게 만들어 기증서에 지장을 찍게 하였다. 또한 일본 경찰의 비호를 받은 깡패들이 총본원에 난입하여 성전들을 파괴하였다. 더불어 건물 자재들은 당시 충남의 갑부이며 당시 중추원 참의를 지낸 매국노 김갑순(金甲淳)에게 경매로 넘겨버렸다.

이후 금강도에서 불법 검거와 건물을 불법 철거한 일로 충청남도 경찰과 김갑순에게 소송을 제기해[28] 일제는 이성직을 다시 검거하려고 하였다. 이에 이성직은 미리 준비해 둔 토굴[29]로 피신을 하였고, 다시 은거지를 옮겨가며 피신 생활을 하였다.
파일:만세.gif
해방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도인들
광복 이후, 이성직은 본래 금천리의 금강도 총본원에 돌아왔다. 이성직은 도장[30]을 복구하고 성전을 재건하였다. 또한 금강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여 청소년 교육에도 주력하였으며, 성재(誠齋)[31]라고 하는 정기적인 수련 과정을 두어서 강론과 수련을 격려하는 등 적극적으로 포덕에 진력하여 당시 도인 수가 수만에 달했다고 한다.

이후 이성직은 경전을 편찬하고 대성경 간행하는 등 종교적 체계화에 주력하다가 1957년 옥고의 후유증으로 병이 재발하여 사망하였으니 향년 45세였다. 이성직 사후에는 그 부인인 민영인이 홀로 업무를 관장하다가 1959년에 또한 사망하게 되어 제자들은 모두 중복을 입고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였다.

2.1.3. 이일규의 덕성적(德聖蹟)

파일:덕성사부모.jpg
이일규(오른쪽)와 김동윤(왼쪽)의 초상
1957년 이성직이 사망한 뒤 금강도는 자치적으로 운영되다 1962년 이일규가 총관장으로 추대되어 종단의 업무를 총괄하게 되었다.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는 국산종교통합계획에 따라 유사한 신종교들을 통합하여 인위적으로 재편하려 했다. 때문에 금강도 또한 단군성주교(檀君聖主敎), 단군도덕성회(檀君道德聖會)와 함께 단군천선금강대도(檀君天仙金剛大道)라는 이름으로 통합하게 된다. 그러나 1964년 단군성주교와 단군도덕성회가 종교 의식에 참여하지 않는 등 내분이 있었고 종단들이 다시 분리되었다. 또 동시에 종교 명칭을 금강대도(金剛大道)로 개칭하였는데 이때부터 비로소 금강대도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같은 해 이일규와 김동윤이 도주로 추대되며 정식으로 도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이일규는 금강대도의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던 종교 지도자로서 금강대도의 현대화를 위해 힘썼고, 그 결과 오늘날 금강대도는 계룡산 주변 신종교 중 가장 건실한 발전을 거듭해 나갈 수 있었다.

이일규는 금강대도의 중심 사상인 의성(義誠)을 제시하여 교리와 의례를 확립하였으며, 교화 조직을 체계화하였다. 또한 전국에 100여 개의 도장을 세우는 등 종단 조직 확대에 주력하였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드는 도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총본원의 성역화를 추진했다. 그리고 여러 경제, 복지 사업도 실시했으며, 인재 육성을 위해 금강삼종대학을 두고 교리에 대한 연구도 전개했다.

이후 이일규는 2004년 6월 10일 7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으며, 그 부인인 민영인 또한 2022년 6월 8일 8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2.1.4. 이경구의 태극적 개화시대(太極的 開化時代)

파일:용화교주.jpg
이경구(오른쪽)와 양정숙(왼쪽)
2004년 이일규가 사망한 뒤 2010년 이경구가 도통을 이어 받아 현재까지 금강대도를 이끌고 있다. 이경구는 앞의 3대 도주들의 시대를 무극적 은도시대(無極的 隱道時代)라고 규정하고, 본인이 태극적 개화시대(太極的 開化時代)를 연다고 하면서 대내외에 금강대도를 널리고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금강대도의 교세는, 전국에 100여 개의 본원, 분원 및 회관을 두고 있으며, 도인 수는 70만 명을 주장하고 있다.

[1]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금천리에 있다.[2] 금강대도에서는 이 해를 원년으로 삼는 기년법인 개도(開道)를 쓰고 있다. 2025년은 개도 152년이다.[3] 파일:대성사부.jpg아호는 토암(土庵)이고, 는 현우(顯宇)이며, 사호(師號)은 만법교주 대성사부(萬法敎主 大聖師父)이다. 1874년 5월 19일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포항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이문유(李文囿)인데 그 부인인 전백전(全白田)의 꿈에 옥황상제가 나타나 하얀 솜을 많이 주어 품에 안았는데, 그 때부터 임신하여 이승여를 낳게 되었다. 1934년 11월 2일 6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4] 파일:대성사모.jpg아호는 자암(慈庵)이고, 사호는 만법교주 대성사모(萬法敎主 大聖師母)이다. 1884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포항리에서 태어났다. 1927년 12월 25일 4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5] 파일:도성사부.jpg이승여의 아들로, 아호는 청학(靑鶴)이고, 사호는 동화교주 도성사부(東華敎主 道聖師父)이다. 1913년 5월 5일 충청남도 논산군 두마면 황적동에서 태어났다. 1957년 5월 28일 4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6] 파일:도성사모.jpg이성직의 부인으로, 아호는 보단(寶丹)이고, 사호는 동화교주 도성사모(東華敎主 道聖師母)이다. 1913년 5월 12일 충청북도 청주군 강서면 용정리에서 태어났다. 1959년 9월 13일 4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7] 파일:덕성사부.jpg이성직의 아들로, 아호는 월란(月鸞)이고, 사호는 통천교주 덕성사부(通天敎主 德聖師父)이다. 1934년 4월 29일 연기군 금남면 금천리에서 태어났다. 2004년 6월 10일 7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8] 파일:덕성사모.jpg이일규의 부인으로, 아호는 향련(香蓮)이고, 사호는 통천교주 덕성사모(通天敎主 德聖師母)이다. 1937년 12월 26일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각계리에서 태어났다. 2022년 6월 8일 8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9] 건곤(乾坤)은 하늘이라는 의미로, 건곤부모는 하늘과 땅의 어버이라는 뜻이다.[10] 정성과 공경.[11] 가정의 화목.[12] 몸과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함.[13] 태어나면서부터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깨우쳐 안다는 뜻으로,『논어(論語)』계씨편에 나오는 말이다.[14] 이승여는 도의 씨앗을 뿌렸고, 이성직은 도의 줄기를 가꾸었으며, 이일규는 도의 열매를 거둬들이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15] 파일:용화교주.jpg호는 법산(法山)이고, 사호는 용화교주 대종법사(龍華敎主 大宗法師)이다. 1961년 1월 18일 충청남도 연기군 금남면 금천리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양정숙(梁貞淑)인데 호는 도향(桃香)이고, 사호는 용화교주 대종덕사(龍華敎主 大宗德師)이다. 1959년 2월 6일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 박계리에서 태어났다.[16] 이경구는 선대 도주들의 시기를 무극적 은도시대(無極的 隱道時代)라 하여 도를 크게 드러내지 않았으나 100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은 태극적 개화시대라 하여 금강대도가 세상에 크게 드러나 도주들의 가르침으로 중생구제되어 대동세계가 되는 시기라고 선포하였다.[17] "현우(顯宇, 이승여의 ) 윤세황(允世皇) 인개지풍수(人開地風水)라."

현우께서 진실로 세상의 옥황상제(玉皇上帝)시니 사람으로서 땅과 바람과 물을 열도다. 즉 옥황상제가 세상에 사람으로 화신한 대성사부(大聖師父)께서 개벽(開闢)을 하노라.
[18] "윤사월지망간(閏四月之望間)에 평생덕지심착(平生德之尋鑿)이라. 의외천리객(意外千里客)이요, 명출고명전(名出高名傳)이라. 장원급제제일(壯元及第第一)이요, 부귀공명특등(富貴功名特等)이라. 시시우봉춘(是時又逢春)하니, 만인개앙시(滿人皆仰視)라."

윤4월 보름에 평생덕(平生德, 통천군의 한 지명)을 이윽고 찾았네. 뜻밖에 천리객(千里客)이 밝게 나감에 높은 이름이 전하네. 장원급제(壯元及第)함이 제일이요, 부귀공명(富貴功名)이 특등이라. 이때에 또 봄을 만나니 만인들이 다 우러러 보도다.
[19] 덕(德)을 편다는 뜻으로, 금강대도와 천도교, 증산교 등에서 전도(傳道)를 이르는 말.[20] 신도안은 새로운 도읍의 후보지라는 뜻으로, 예로부터에서 풍수지리명당으로 유명했다. 또한 정감록(鄭鑑錄)에서 구세주 정도령이 새로운 정씨 왕조를 세울 도읍지로 지목되면서 정감록신앙 등 민간신앙의 중심지였다. 또한 민간신앙뿐만 아니라 증산교의 중심지인 모악산과 함께 신흥종교들의 집산지로 1984년 신도안의 재개발 사업 이전까지만 하여도 70여 개의 종교 단체가 있었다.[21] 파일:남천포덕의 경로.jpg금강대도에서는 이승여의 탄생으로부터 계산하여 1874년을 금강대도의 시작으로 보지만, 실질적인 포덕은 1910년 이승여가 금강산을 떠나 계룡산으로 남천포덕한 이때로부터 시작된다.[22] 관성교(關聖敎)는 관성대제를 믿는 신종교로, 당시 유행했던 도교관우에 대한 대중적인 신앙을 이용해 자신의 가르침을 드러내려 했던 은도(隱道, 도를 드러내지 않음.)의 방편이었다.[23] 교명을 금강도로 한 이유는 이승여가 금강산에서 포교할 때 자신을 금강도사라고 했기 때문이다.[24] 물론 시대상에 때문에 정확한 신도 수는 알 수 없다. 때문에 신도 수가 들쭉날쭉하는데 1934년 조선총독부의 조사에 의하면 당시 신도수가 13,000여명으로 전국적으로 민족종교 중에서는 천도교, 보천교에 이어 세 번째의 교세로 파악되고 있다. 그런데 그 교세의 90% 이상이 충청도에 집중되고 있어서 적어도 충청 지역에서는 제1의 교세를 보여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25] 파일:금강대도의 도기.jpg금강대도의 도기(道旗)이다.[26] 파일:대성경.jpg 대성경은 천도론, 인성론, 수양론, 인식론동양적 사유의 전반적인 사상을 섭렵하고 있고 양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720,000여 글자로 이루어져 방대하다.[27] 파일:이성직 방일.jpg이성직은 일본 고야산(高野山) 금강봉사(金剛峰寺, 곤고부지)에 방문하였다. 이성직은 아랫줄에서 두번째.[28] 파일:김갑순 고소장.jpg당시 김갑순의 고소장.[29] 파일:이성직의 토굴생활.jpg당시 이성직의 토굴 생활.[30] 道場. 금강대도와 증산교 등에서 교당(敎堂)을 이르는 말.[31] 겨울 음력 12월에 모든 도인이 총본원에 모여 열흘간 하는 수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