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14 21:41:44

천동설

파일:천동설.jpg
천동설로는 밤하늘에서 보이는 천체의 이동을 설명하기 위해 복잡한 궤도를 상정해야 했다.

Geocentrism(지구중심설)

1. 개요2. 천동설의 발전 과정3. 지동설의 등장과 천동설 폐기
3.1. 동양
4. 지동설은 지구와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서 내몰았나
4.1. 기독교 교리와의 관계4.2. 관련 문서
5. 트리비아6. 관련 문서

1. 개요

움직이지 않는 지구우주의 중심에 있으며 그 주변을 태양, 그리고 당시까지 발견되었던 5개의 행성이 돈다는 설. 지구 중심설이라고도 불린다.

프톨레마이오스의 그럴듯한 주장을 비롯하여 중화권 등 다른 문명에서도 흔히 나타날 정도로 근대에 이르기까지 인류 천문학의 주류이던 학설. 물론 자연과학의 발전으로 폐기되었다.

2. 천동설의 발전 과정

근대적인 천문학이 연구되기 전까지는 천동설이 더 설득력 있는 이론이었다. 먼저 '자신이 두 발을 땅에 붙이고 있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이나, 누구나 하늘만 보면 뜨고 지는 것을 알 수 있는 태양이 '사실은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고대인들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관측자가 운동의 중심을 자신으로 두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1]. 당시 천동설은 금성과 화성 등의 불규칙한 위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복잡한 궤도를 그려냈어야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당시까지 관측된 천체들의 움직임을 설명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민중과 학계 모두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플라톤에 의해 동심원 모델이 등장하였고 에우독소스가 플라톤의 모델을 상당부분 개량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동심원 모델이 확립되었다. 2세기 경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동설을 집대성하여 '알마게스트'를 저술하였다. 그는 이심원 모델과 주전원(epicycle) 모델, 이심점 모델을 이용하여 동심원 모델이 갖고 있는 오류들을 수정하였다. 즉, 궤도의 중심 자체가 지구 주위를 감싼 가상의 원(deferent)을 따라 공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성의 궤도에서 행성만 쏙 빼놓은 셈. 이러한 방법은 비록 여러 개의 주전원을 사용하는 등 복잡하긴 하지만 겉보기 운동을 매우 수학적으로 정교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2] 예를 들면 프톨레마이오스식 주전원 이론을 적용한 아래의 동영상처럼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동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였지만, 우주 구조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은 양극단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우주의 구조에 대한 철학적 의문에 집중했던 반면, 프톨레마이오스는 우주의 구조를 수학적 모델을 통해 설명하려는 것에 집중하였기 때문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역작 《알마게스트》는 9세기에 이븐 후나인 등의 학자들에 의해 수차례 번역되었다. 이슬람교 문화권에서 널리 확대되었다가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 중세 사회에 널리 받아들여졌다.

3. 지동설의 등장과 천동설 폐기

천동설에 대비되는 지동설은 기원전 2세기 아리스타르코스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었고 헬레니즘 시대에는 주요 가설 중 하나로 취급되었으나(대표적 사례가 아르키메데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전원 개념이 널리퍼지면서 한동안 사장되어 있다가, 코페르니쿠스갈릴레오 갈릴레이 등의 천문학자들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게 된다. 이는 금성의 위상 변화 등 기존 천동설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로 뒷받침되었다.

교황청에서는 지동설을 '가설의 차원에서는' 논의하는 것을 허용했다. 가톨릭이 엄격해진 시기[3]에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하는 책을 내었는데 책 내용이 교황을 모독한다고 여겨져서 재판을 받은 건 사실이다. 갈릴레이의 저서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4]에서 지동설을 주장하는 인물, 중립인 인물, 천동설을 주장하는 인물 3인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천동설을 주장하는 인물의 이름은 심플리치오,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단순이, 멍청이 정도로 번역되는데 이름대로 황당한 주장만 되풀이한다.

이 인물이 당시 교황을 모티브로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나름 학문적으로 자부심이 있던 교황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통념상으로 알려지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은 후세에 만들어진 이야기다. 우리가 이 말을 알고 있다는 것은 진짜로 말했거나 말하지 않았거나 두 가지 경우인데, 진짜로 했다면 갈릴레이 본인의 입을 통해 알려졌거나 제 3자가 듣고 퍼져야 하는데 본인이 발설했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제 3자가 들었다면 바로 사형감이다(…). 따라서 누군가 꾸며낸 이야기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 때에도 지동설은 다시 위기에 빠졌다. 초기 지동설의 형태는 천동설보다도 번잡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서는 주전원을 27개 썼지만 코페르니쿠스는 46개를 썼다. 주요한 원인은 코페르니쿠스가 원운동 말고 다른 걸 생각하지 못한 탓. 더구나 티코 브라헤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개선해 자기식 천동설을 내놓았는데, 이 천동설은 '달만 빼고 모든 행성이 태양 주변을 돈다, 하지만 달과 태양은 지구 주위를 돈다'는 이론이었다. 그리고 이건 코페르니쿠스식 지동설보다 정확했다. 브라헤가 지동설을 검토해보긴 했으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당시까지는 가장 정확한 관측 데이터에 따르면 '지구가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생기는 여러 가지 의문점들을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까지 왔으면 '왜 다른 행성은 태양 주위를 도는데 지구만 태양이 지구를 도는가'라는 질문과 '상대성 원리에 비춰 태양이 가만있고 지구만 움직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는 의문이 생기기에 지동설로 이행하기 위한 밑바탕이 갖춰졌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케플러도 티코 브라헤의 태양중심 우주관과 타원 가설이 없었다면 케플러 법칙과 지동설을 증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이야 관측기술이 발전해서[5] 그렇지 당시 천동설은, 그 당시 관측기술이 떨어지는 상태에서 나온 제한적인 데이터를 오랜기간 축적시켜 만든 상당히 정교한 학문이었고 따라서 어느 한 학자가 내놓았던 학설이 긴 기간 동안 쌓여 있던 데이터를 한 번에 뒤집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즉 당시 발견된 천체 운동에 대해서는 천동설 자체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관측이 정교해지고 지동설로만 설명이 가능한 현상이 등장해 지동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간단해져서, 이 시기의 천동설의 궤도 모델을 보면 상대적으로 굉장히 머리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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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레미 식 모델로 설명한 금성의 궤도.

당시 교회는 지동설이 기존의 상식과는 너무나 동떨어지기도 했고, 기독교적 목적론 세계관에 치명타를 줄 수 있기에 지동설에 대해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지동설을 주장했던 갈릴레이가 (정치적인 이유가 크지만) 재판을 받은것도 사실이다. 당시 교회에서는 당연히 천동설을 정설로 가르쳤다. 다만 이를 교리적 차원에서 그렇게 가르치지는 않았으며, 단지 중세의 교회가 사람들을 교육할 때 이렇게 하였을 뿐이다. 많은 현대인들이 '중세 교회가 사람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는 현대의 교회를 중세의 교회에 무작정 대입시키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러나 중세의 교회는 현대 교회와는 달리 단순한 종교 단체를 넘어서 교육, 복지, 학문 등등을 모조리 담당하는 '공공 기관'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현대의 교회와 같은 선상에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지동설이 받아들여지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던 주된 이유에 대한 논쟁에서 교회의 탄압이 주된 변수라는 의견과 과학 학계 내의 패러다임 변경의 일종이라고 보는 해석이 존재한다. 당시 종교계가 학계를 포함하고 사회를 대표하고 있었기에 사회의 대표자로서 종교가 받아들인 기존 학설과 막 일어난 신생 학설 간의 대결이 종교와 학계의 대립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정치적인 이유로 지동설을 주장했던 갈릴레이가 재판에 회부되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이것이 과학 vs 종교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그 결과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천동설은 원래부터 틀려먹은 학설이었고 다 종교 탓이다 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교리적으로는 11세기 이후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사고관을 갖고 있던 기독교 입장에서 지동설이 사실로 받아들여질 경우 신의 지구 창조와 이에 대한 목적인 논의, 그리고 이 목적론적 세계관에 의존한 삼위일체 개념이 흔들릴 수 있었기에 당연히 반가운 현상은 아니었다. 따라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재판을 받던 시절만 해도 요하네스 케플러에 의해 상당 부분 증명이 된 지동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 크다. 사실 이는 초기 진화론 논쟁에서도 알 수 있는데, 진화론이 발표된 시점에서 교회는 중근세 시대에 비해 낮은 권한을 갖고 있었기에 학문 연구에 지장이 없었으나, 수많은 되도 않는 비판을 받은 것과 맥락이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지동설이 본격적으로 역전한 것은 요하네스 케플러의 시대였다. 케플러는 행성들의 원 운동이 보여주는 완전한 세계관에 이상을 갖고 티코 브라헤의 아래로 들어가 학문을 배웠다. 그런데 이후에 티코 브라헤의 비협조로 얻지 못하던 관측 자료를 들어 연구하다보니 예측되었던 것과 8분[6]의 각 차이가 있었고, 여기에 케플러는 매우 좌절했다. 그러나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연구에 나선 끝에 1618년에 케플러의 법칙을 정립했다.

케플러의 법칙은 지동설을 기초로 행성의 타원 운동(이는 기존의 '완전한 원 운동'의 관념을 뒤엎는 혁신이었다.)을 분석하여 내놓은 3개의 법칙이었다. '법칙'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 이는 이전의 천문학적 오류들을 깔끔하게 수정하면서 완성된 우주관이었다. 이로써 천체의 움직임을 천동설에 비해 훨씬 간단한 방법으로 더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게 됨으로써 중세적 우주관을 뒤집고 지동설이 천동설에 앞서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아이작 뉴턴물리학 연구에도 기초가 되어, 이후 만유인력의 법칙을 통해 천체의 움직임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됨으로써 천동설에 결정타를 날리게 된다.

그리고 광행차가 1674년 로버트 후크에 의해 처음 관측되고 1729년 제임스 브래들리가 해석하며 천동설에 관뚜껑을 덮었고 1838년 프레드리히 베셀이 연주시차를 확인하면서 관뚜껑에 못을 박아버렸다. 이후 1961년, 유리 가가린이 직접 지구 밖으로 나가서 우주를 관측하면서 아예 천동설을 못박힌 관 채로 땅 속 깊숙히 묻어버렸다. 물론 유리 가가린의 시대에는 이미 천동설은 완전히 폐기되어 천동설을 반박할 필요 자체가 없었고, 유리 가가린이 관측한 내용 자체도 지동설과 직접 관련은 없지만, 천동설이 바탕을 두고 있었던 우주관이 잘못되었음을 인간이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현대에는 천동설은 완전히 틀린 이론이 되고 말았다. 상술했듯이 지동설이 맞다는 수많은 추가 이론이 나왔고, 그게 맞음이 증명된데다, 아예 우주로 나가서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관측되었기 때문이다.

3.1. 동양

한편 동양에서 전통적인 천동설의 붕괴는 상당히 늦었다. 조선의 경우, 김석문, 이익, 박지원, 홍대용 등의 학자들은 지동설과 천동설에 대한 논의를 접하긴 했으나, 보다 현실에 가까웠던 지구 구형설과 지전설의 입증에 집중하여 사실상 천동설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았다. 자전과 공전의 체계를 완전히 정리하여 수용한 것은 1857년 최한기의 '지구전요'를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사실 천동설과 지동설의 문제는 우주론적으로도 그다지 중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듯하다. 동양에서 처음으로 지구가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한 것은 묵자로 보인다. 다른 사람들이 묵자의 주장을 지칭한 표현들 중 하나가 "지구는 둥글고 움직이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당대에, 그리고 그 이후에도 묵자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실 단순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기보다 근본적으로 지구가 둥글고 움직이고 있는가라는 논점 자체가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했다.

4. 지동설은 지구와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서 내몰았나


태양이 지구 주위를 공전하는 게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것을 밝혀내어, 지구와 인간은 신이 창조한 것이니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종교적 논리를 부수고 지구와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서 내몰았다는 설이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 이건 틀린 얘기다. 오히려 코페르니스적 우주관은 지구와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의 위상을 높였다는 쪽에 가깝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자연철학을 지배한 아리스토텔레스물리학 체계에 따르면,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는 까닭은 무거운 물체, 불순물이 가라앉듯 자연스럽게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이 관점에서 무거운 물체를 끌어당기는 것은 거대한 천체가 아니라 우주의 중심점이며, 지구는 불순물이 가라앉은 덩어리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장소 자체가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여' 지구가 가장 무거운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왜 우주의 중심에서 움직이지 않아야 하는지를 설명할 뿐이다.

중세 시절 지구가 중심에 위치한다는 것은 지구가 고귀한 존재가 아니라 천한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로 여겨졌다. 중세의 철학자였던 모세스 마이모니데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주의 경우에는 중심에 가까운 부분일수록 더 흐릿하고 단단하고 둔하고 혼란스럽다. 빛의 원천에서 나오는 가장 고결한 원소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이다."

중세의 유명한 기독교 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 또한 이와 비슷한 주장을 했다.
"우주의 중심에 위치하며 다른 천체들로 둘러싸인 지구는 모든 천체 가운데 가장 조악하고 비천한 천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마게스트》 1권 5장에서 또 이렇게 말했다.
"지구는 고정된 별들 사이의 거리에 비하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수학의 점처럼 여겨야 마땅하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우주론에서 지구가 중심에 위치했다는 것은 특별함이나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물리적 중심이자 대단히 비천하다는 의미였다. 단테 알리기에리가 쓴 신곡에서 지구의 중심에는 마왕 루시퍼가 박혀있다. 우주의 중심인 지구에서도 다시 중심에 루시퍼가 박혀있다는 것은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이 절대 좋은 의미가 아니었음을 나타낸다.

즉, 지동설은 지구와 인간의 위치를 우주의 중심에서 내몬 게 아니라 반대로 우주의 중심에서 끌어올린 것이다.

기존의 잘못된 인식이 박힌 이유는 중세 까기에 앞장섰던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영향이다. 베르나르 퐁트넬은 《수많은 세계에 관한 대화》에서 코페르니쿠스를 찬양하며 "코페르니쿠스의 설계가 우주의 중심을 고집하는 인간의 허영을 꺾었다"잘못된 해석을 했다.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또한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엄청난 특권을 버리게 했다"고 말하며 퐁트넬의 개념을 되풀이했다.

사실 계몽주의자로 자칭했던 사람들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중세 때리기에 골몰했던 것은 현대에 들어서까지 매우 성공적이었다. 오늘날 알려진 중세의 이미지, 특히 "인류의 이성과 과학의 발전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종교"라는 뻔한 스토리텔링은 과거부터 현대에 이르는 세계 지성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어서, 호전적인 일부 과학자들을 비롯하여 흔한 대중들의 인식까지도 당연히 그때는 그랬을 거라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4.1. 기독교 교리와의 관계


지금은 장본인인 가톨릭 교회조차 자기들이 중세에 교리 문제로 갈릴레이를 탄압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당대에도 천동설과 지동설은 기독교의 교리 문제가 아니었다.

단적으로, 지동설을 당대에 발굴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부터가 본직은 성직자로서 주교직까지 역임한 사람이다. 천문학은 학위가 있거나 정식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가톨릭 교리 상 주교는 사람 하나가 그 자체로 교회로써 독립적으로 교회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주교급 성직자 눈에도 지동설이 딱히 교리적으로 문제가 안된다고 판단되었다는 것. 또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주변에 알려졌을 때 그의 주변인들은 출판을 권유했다. 지동설이 책으로써 저술되는데에는 꽤나 지체가 있긴 했지만 교회에게 탄압될 것을 두려워해서 늦춘 것이란 증거는 전혀 없다.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발간했을 때에는 교황의 비서가 그 책을 교황에게 소개하기도 했으며 쇤베르크 추기경이 지동설을 자세히 가르쳐달라고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레고리력을 만들 때 코페르니쿠스의 모델을 이용해 역법을 계산하는 등, 그의 이론은 유용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즉 가톨릭 교회는 그의 우주관이 기독교 교리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거나 위협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실무적으로 유용한 것이라고 보았다.

뿐만 아니라 갈릴레이보다 약간 후세대로서 지동설을 완성한 요하네스 케플러도 지동설이 원인이 되어 종교적 탄압을 받은 적이 없다. 이론의 선구자만이 아니라 동시대 같은 주장을 한 학자조차 천동설/지동설과 관련된 종교 재판을 받지 않았다면, 지동설 이론 자체보다는 갈릴레이 본인의 문제에서 비롯된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가장 중요한 지점은, 위에서 보듯이 천동설의 최종 형태를 만든 것은 천문학자인 티코 브라헤다. 지동설이 당시 혁명적인 이론으로써 과학계의 주류였고 종교가 조직적으로 과학을 탄압하는 상황이었다면, 수 많은 과학자들이 갈릴레이에게 동조하고 교회는 그들을 전부 탄압하는 사건이 벌어졌을텐데 그런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갈릴레이의 적대자들은 순전히 종교인들이 아닌 당대의 과학자들도 다수 존재했다. 즉 당시에 지동설과 천동설의 대립은 통설에서 생각하듯 과학과 종교의 대립으로서 설명될 일이 아니라 과학계 내에서도 논쟁이 있었던 이론임을 보여준다.

지동설에 대한 교회의 입장에 대해 조르다노 브루노의 화형 사건으로 소급하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은 칼 세이건이 자기 저서에서 주장하는 바람에 유명해졌다. 브루노가 화형을 당할 때의 죄목 중 첫 번째와 후에 추가된 약 20가지의 죄목 중 다섯 번째와 관련된 "신이 창조한 행성들 외 다른 행성을 논하고 있으며, 행성에 관한 여러 가지 무지를 드러냄"에 대한 목록 중에는 지동설에 관한 내용도 포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브루노의 화형에는 종교 개혁, 진정한 종교는 이집트 다신교라는 헤르메틱 철학적 주장 등 다양한 원인이 얽혀있다. Luigi Firpo가 1949년에 낸 『Il processo di Giordano Bruno』에 언급된 그의 죄목을 보면, 크게 지목된 죄목은 9개로, 지동설과 관련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항목은 6번에서 '복수의 세상이 있으며, 그들의 영원성을 주장함.' 의 하위 항목이다. 나머지는 '1.기독교 믿음과 교리에 배치되는 의견, 2.삼위일체를 부인함, 3.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부인함' 등 브루노가 종교적 이단으로써 심판 받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우주관도 재판에서 죄목으로 지적되긴 했으나 지동설과 완전히 합치되는 것도 아니다. 당대의 지동설은 우주가 계란 같은 구조에 노른자 자리에 태양이 있고, 흰자 부분에 태양계 행성들이 있으며, 계란 껍데기 안쪽에 그 외 작은 별들이 그림처럼 그려진 형태였다. 반면 브루노가 주장한 우주관은 저 별들도 다 태양 같은 항성이며 행성을 거느리고 있다는 관점이었다. 우연히도 현대적 관점으로는 브루노의 말이 맞아서 지동설과 같아 보일 수도 있지만, 당대에는 지동설과도 전혀 다른 주장으로 여겨졌으며 갈릴레이만 해도 브루노의 관점에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정작 코페르니쿠스의 저서가 금서로써 지정된 건 브루노의 화형으로부터 16년이나 지난 뒤의 일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브루노의 우주관과 별 상관없다고 여겨졌다는 증거. 그 16년의 공백 뒤에 지동설이 이단시 된 것의 배경에는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있다.

교회 차원에서 지동설에 대한 반대 의견이 떠오른 것은 갈릴레이가 한창 지동설을 주장하고 다니던 1612년이다. 갈릴레이는 이미 1610년에 지동설에 대해 다룬 책을 출간하였으며, 동시대 천문학자들과 논쟁을 매우 즐겼다. 이 과정에서 갈릴레이는 2번이나 '지동설은 종교적으로 이단'이라는 혐의로 종교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두번 모두 무혐의로 풀려났다. 이 회부조차 순수 종교인들이 아닌 갈릴레이와 논쟁하고서 진 졸렬한 학자들이 기소한 것이다.(...) 지동설 자체는 가설의 영역으로서 다루는 것은 여전히 허용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갈릴레오에게 "타당한 논증 없이는 더는 지동설이 유일한 진리임을 주장하지 말아라." 라는 권고를 한다. 한편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지동설이 '참된 논증'을 통해 입증된다면, 성경에 근거하여 지동설이 틀렸다고 단정해서는 안 되며 성경을 신중히 재해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갈릴레이는 권고를 무시했고, 심지어 갈릴레이의 편을 들어주고 코페르니쿠스 모델 우주의 오류를 수정해서 좀 더 정확한 모델을 만들어준 요하네스 케플러의 편지도 무시한다. 즉 스스로 자신의 이론을 더 타당하게 논증할 수 있는 기회를 제 발로 거절한 것이다. 실제로 갈릴레이는 인격적으로 결함이 많은 사람이었다. 케플러가 완성해서 입증이 가까워진 지동설 모델을 무시한 것도 갈릴레이의 성격에서 기인한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결국 성직자 측이 '그 이론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면 받아들이겠다'고 말하고 과학자측이 자신의 이론과 상충되는 개선안은 무시하는 구도가 된 샘. 위에서도 써 있듯 당시의 관측 자료로써는 천동설이 더 합리적이었다. 문제가 커지게 된 지점은 저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바로 브루노를 화형한 재판관이었다는 점이다. 결국 갈릴레이가 논쟁을 계속한 덕에 1616년 코페르니쿠스의 우주관이 브루노와 연관이 있다는 혐의가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귀에 들어갔고, 교황청은 코페르니쿠스의 저서를 금서로 지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교회는 여전히 지동설을 가설의 차원에서 논의하는것을 허가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저서도 불과 4년 뒤인 1620년 금서에서 해체된다. 교황청이 지동설을 가설 차원으로 다루는 것을 허용했다는 것을 현재적으로 유지되는 학설(천동설)과 비교하여 해당 학설을 더 견고화하는 용도에서의 '가설' 차원으로서 다루는 것을 허용한 것일 뿐, 이를 정설로까지 발전시킬 정도로 지원을 한다거나 학제에 편입시키겠다는 뜻이 아니라고 해석해서 가톨릭 교회의 행동을 탄압으로 간주하는 주장도 존재하나, 당시에도 교회에는 어떤 과학 이론을 학계의 정설로 만들거나 편입시킬 이유도 없고 권한도 없었다.

어쨌건 갈릴레이의 친구인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1623년 우르바노 8세 교황으로 즉위하자 갈릴레이는 그에게 '지동설을 가설 차원에서 논의하는 책을 발간해도 된다'는 허가를 받았고, 그리하여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를 1630년에 출간하게 된다. 하지만 그 책은 막상 까보니 천동설을 주장하는 이들을 '심플리치오(직역하면 '단순이', 의역하면 '바보')라는 이름을 붙이고서 그들을 조롱하는 내용에 가까웠다. 누가 봐도 '가설의 차원에서 천동설과 지동설을 대등하게 다루는' 책이 아니었다. 친구라고 풀어줬더니 뒤통수를 맞은 교황은 격분했고, 이 책이 문제가 되어 갈릴레오는 종교재판에 다시 회부되어 자신의 모든 주장을 철회하고 다시는 관련된 논쟁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서야 풀려난다.

코페르니쿠스의 삶, 케플러의 삶, 그리고 티코 브라헤의 반론, 그리고 갈릴레이의 생애까지 네 가지 정황을 살피면 갈릴레이의 재판은 지동설이 기독교 교리와 대립되어 문제가 되었다기보다는, 갈릴레이 개인의 문제로 촉발된 사건이었다는 추측에 무게가 실린다. 사실 더 단순하게도, 갈릴레이의 지동설을 따른 당대의 다른 이탈리아 과학자들, 그리고 갈릴레이의 제자들 역시 딱히 지동설과 관련한 무언가로 재판을 받거나 탄압을 받은 적이 없다.

그리고 현대인들이 가장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지점은 갈릴레이 당시에 과학이라는 학문과 과학적 방법에 대한 이론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대에 과학이라 부르는 학문은 당대에는 '자연 철학'으로 분류되었으며, 현대 과학처럼 연역법귀납법을 병행하는 연구법에 대한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코페르니쿠스만 해도 정밀한 새 천문관측 자료를 통해서 새 이론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지동설을 주장했다. 그의 저서를 보면 태양을 하느님에 비유하고, 지구를 인간에 비유해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은총에 의지해야 하는 인간'으로 지동설을 비유했다. 사실 이론을 만들고 비유를 한 것이 아니라 저 비유에 끼워맞추려고 이론을 만든 것에 더 가까운데, 현대인들이 보기엔 매우 비과학적이지만, 본직이 성직자인 사람이라는 점이나 당대의 철학과 분리되지 못한 과학의 성질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더 간단한 예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당대에 위대한 학자로 분류되었지만, 현대에는 그의 이론이 현대 이론과 다르다고 저평가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자연철학, 즉 과학도 권위자의 권위에 의존하는 종류의 학문이었던 것. 이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종교는 권위로 이론을 세우고 과학은 과학적 방법론으로 이론을 세워서 대립한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시대적 맥락을 파악하지 못한 오류를 범한다.

4.2. 관련 문서


5. 트리비아

  • 흠좀무하게도 21세기에도 종교적, 개인적 이유로 천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7] 좀 많이 믿기는 힘들겠지만 외국에는 천동설을 주장하는 자칭 학회 또한 존재한다. 당연히 학계는 물론 종교계에서조차 인정을 전혀 못 받고 있다. 이런
  • 조선시대에는 홍대용, 김석문 등이 지동설을 주장하였지만 천동설이든 지동설이든 사상적인 것과 관련이 없어서 이슈가 되지 못하고 묻혔다. 둘 다 선교사들을 통해 받아들인 것으로 자체적인 관측으로 이를 터득한 사례는 되지 못했다.
  • 과거에는 어린이용 과학책에 지동설은 옳고 천동설은 종교적인 이유만으로 지지받은 엉터리 학설이며 갈릴레이와 코페르니쿠스를 억압한 당시의 교회는 좋지 못한 집단으로 묘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2000년대 중반 이후에는 이런 경향이 감소했고 사실관계를 좀 더 정확하게 묘사하기 시작했다. 가령 천동설이 지금은 틀린 것으로 판명났지만 상당히 정교한 모델이었으며 초기의 지동설보다도 더 정확히 예측을 했다거나.

6. 관련 문서




[1] 지동설이 기정사실화된 현대까지도 중, 고등학교 수준의 천문학에서는 별과 관련한 교육 때 태양계를 중심에 놓고 별자리들이 움직이는 모델로 가르친다. 디민 그 우주관은 옛날의 우주관과는 판이하다. 옛날에는 우주의 중심은 반드시 지구여야 했다고 여겼다면, 지금은 '그냥 아무 데나 중심으로 잡아도 되니까 지구로 잡아도 뭐 어때?' 정도[2] 수학적으로는 복잡한 궤도를 푸리에 해석을 통해서 분석한 것과 정확히 동일하다. 각 주전원은 푸리에 급수의 항 하나에 해당된다. 단지 프톨레마이오스 시기에는 아직 무한급수와 허수, 자연로그의 밑의 개념(즉, einπx=cos(nπx)+isin(nπx)e^{in\pi x}= \cos\left(n\pi x\right) + i \sin\left(n\pi x\right))이 없었으므로 사람의 손으로는 정확한 궤도를 계산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뿐이다.[3]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하며 출간한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는 1632년에 출간되었는데 당시는 30년전쟁 기간이라 구교, 신교의 대립이 격화된 시기였기에 구교가 점점 교조화되고 엄격화되는 추세였다. 때문에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을 당한 것은 지동설을 주장함으로써 야기된 여러가지 복합적 사태들, 이를테면 개신교측과의 관계애 대한 의혹과 교황에 대한 모독 의혹 등등이 엮여버려서 일어난 일이다. 신학자들이 천동설이 교리적으로 어떠한 의미가 있냐 정도의 사유는 하였고 개개인의 호오는 존재하였으나 그것을 교리로 주장하지는 않았다.[4] 다만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는 틀린 과학상식도 꽤 있다. 예를 들자면 지구가 빙빙 도는 자전때문에 썰물, 밀물이 생긴다고 설명하지만 실제로는 달의 인력이 영향을 미치는 경우다.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는 대화형식으로 그리고 모자란 사람 심플리치오를 등장시켜 이에 대한 반박 형식으로 재미있게 글을 써서 과학에 문외한이라도 쉽게 읽을 수 있어서 지동설을 보급했다는데 의의가 있다.[5] 지구 공전의 근거로 연주시차(1초 이하)와 광행차(20.47초)가 있는데 둘 다 초 단위다. 참고로 3600초가 1도다.[6] 원을 360도라고 할때 그 도(degree)의 또 60분의 1이 '1분'이다. 8분을 도로 환산하면 고작 0.133도. 당시 브라헤의 관측은 정밀하기로 유명했다.[7] 이중에서도 지구 평면설을 주장하는 평평한 지구 학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