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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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7년 ~ 978년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당나라 | 북송 | ||
별칭 | <colbgcolor=#fff,#191919> 오월국(吳越國) | ||
수도 | 항주(杭州) 서부(西府) | ||
위치 | 중국 현 저장성, 장쑤성, 푸젠성 일부 | ||
정치 체제 | 군주제 | ||
국성 | 전(錢) | ||
국가원수 | 왕 | ||
주요 군주 | 태조 무숙왕 전류 세종 문목왕 전원관 충의왕 전홍숙 | ||
언어 | 중세 중국어 | ||
문자 | 한자 | ||
종족 | 한족 | ||
통화 | 개원통보(開元通寶) | ||
현재 국가 | 중국 |
951년경 오대십국 후반기의 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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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류(錢鏐)가 저장성 일대에 세웠던 왕국으로 중국 오대십국시대 때 10국의 하나이다. 수도는 항주(杭州, 항저우)였고, 제2수도는 월주(越州)[1]였다.오월의 군주는 황제를 칭하지 않고, 왕을 칭했지만 처음 3대는 천자처럼 묘호를 올렸다. 단 시호는 오대(五代)의 황제에게서 책봉받은 시호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초대 왕인 전류는 심지어 독자적인 연호와 능호까지 썼다. 즉 중국 역사에서 독특하게 외왕내제를 했던 사례라고 볼수 있다.
2. 역사
오월은 당말의 절도사 전류가 오월땅에서 기업을 일으키고 오대 왕조 중 첫 번째인 후량에 칭신하여 '오월왕'으로 책봉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이름은 문자 그대로 오나라, 월나라를 한데 합친 것이다.[2]오월의 역대 왕들은 대개 5대 왕조에 조공을 바쳐 형식상 그들의 제후라는 모양새를 갖추었으며, 해상 무역을 전개하여 고려, 후백제, 일본 등과도 교역을 하였다.
978년, 송나라와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되자 마지막 왕 전홍숙이 대세가 기울었음을 깨닫고 스스로 나라를 들어 바치면서 멸망하였다. 전홍숙은 송 태종에 의해 '회해국왕'(淮海國王)에 봉해지고 수도 개봉으로 보내져 안락한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3. 평가
전홍숙의 정확한 판단으로 인해 오월국은 후세에도 평가가 상당히 좋은 편이고 역사책에도 그다지 나쁜 것들이 기록되지 않았다.오월은 굉장히 안정된 국가였는데 흥망성쇠가 한순간인 당말오대의 난세 군웅할거의 시대에서 70년간 국체를 보존하였으며 폐위된 전홍종을 제외하면 모두 길게 재위했다. 심지어 폐위된 군주는 살아남기 어려운데도 전홍종은 20여년동안 살다 죽었다.(심지어 그를 폐위한 사람이 새 왕이 그를 죽일까봐 일부러 옮겨살게 하기까지 했다.)
오월의 정치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고 또한 오월을 좌지우지한 암군, 폭군, 권신, 간신도 없었다.[3] 오월은 여타 5대 10국들에 비하면 적당히 좋은 국운이었다. 유일하게 군사적으로는 큰 업적이 없다는 게 흠인데 그래도 70년이나 나라를 지키고 남당과 합세하여 민국의 국토를 분할한 걸 보면 국세를 지킬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4. 한국사와의 관계
오월은 상술했듯 해상 무역으로 후삼국시대의 고려, 후백제와 교류하였는데, 견훤에게는 작위를 내려주기도 하였다.한국 도자사에서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는데, 초기 고려청자의 기술적 특징이 오월 기술의 월주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5. 기타
역사상 최초로 전쟁에서 화약을 사용한 나라 중 하나다. 낭산강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화약에 불을 붙여서 적에게 뿌리는 식의 전술을 썼는데,[4] 뒷날 오월을 합병한 송나라에서 이 기록을 참고해서 로켓을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송나라의 로켓은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폭죽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불을 붙여서 쏘는 무기를 난생 처음 봤던 당대인들에게는, 흡사 현대인이 핵무기를 보는 것처럼 충공깽을 선사했다. 낭산강에서의 전투 이전까지 화약이란 그냥 취급하기 까다로운 약재로만 여겨졌을 뿐, 무기로 쓰인다는 발상은 없었다. 화약을 무기로 쓰는 법을 처음 생각해낸 사람이 바로 2대 왕이었던 세종 장목왕인데,[5] 당대에 화약이 불 붙으면 폭발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으므로, 임시 방편으로 약재용으로 보관하고 있던 화약을 꺼내서 뿌린 것이다.오월 왕조의 창시자 전류의 후예 첸쉐썬(전학삼)은 조상의 명성을 뒤이어 현대 중국 로켓-미사일의 아버지가 되었다.
6. 매체에서의 오월
한국의 사극 태조 왕건에선 후백제에서 교류할 때 사신을 주고 받은 것도 가끔 언급되었던 수준이다.7. 역대 국왕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능호 |
- | - | 홍승왕(洪勝王) 홍성왕(弘聖王)[6] | 전패(錢沛) | - | - | - |
- | - | 건초왕(建初王)[7] | 전주(錢宙) | - | - | - |
- | - | 영현왕(英顯王)[8] | 전관(錢寬) | - | - | - |
1대 | 태조(太祖)[9] | 무숙왕(武肅王)[10] | 전류(錢鏐) | 천보(天寶) 908년 ~ 912년 보대(寶大) 924년 ~ 925년 보정(寶正) 926년 ~ 931년 | 907년 ~ 932년 | 평릉(平陵) |
2대 | 세종(世宗)[11] | 장목왕(莊穆王) 문목왕(文穆王)[12] | 전원관(錢元瓘) | - | 932년 ~ 941년 | - |
3대 | 성종(成宗)[13] | 충헌왕(忠獻王)[14] | 전홍좌(錢弘佐) | - | 941년 ~ 947년 | - |
4대 | - | 충손왕(忠遜王)[15] | 전홍종(錢弘倧) | - | 947년 ~ 948년 | - |
5대 | - | 충의왕(忠懿王)[16] | 전홍숙(錢弘俶) | - | 948년 ~ 978년 | - |
[1] 삼국지에 나오는 손오의 첫 중심지 회계, 현재의 사오싱(紹興)이다.[2] 특이하게도 옆에 오나라가 건국되었다. 남오의 양행밀이 먼저 오왕으로 책봉될 때 전류는 월왕이 되었는데 나중에 오왕을 다시 책봉받았다. 오월이라는 봉국은 주전충이 내려준 것이다. 양행밀의 자손들은 '마음대로' 오왕을 습봉한 것이고 정식 책봉을 받은 것은 아니다.[3] 동시대 중국의 다른 왕조들을 보면 하나씩 영 좋지 않은 모습이 있어서 5대 국가의 경우 후량은 주전충을 빼고 변변찮았고 주전충은 애민의식은 있었으나 잔인하고 음란했으며 후당은 이존욱은 군사적 재능은 충분했지만 내치가 엉망이어서 비명횡사했었고 이사원은 말엽이 조금 아쉬워 결과적으로 나라를 망치게 만든 면이 있으며 후진은 건국 자체부터가 거란의 힘을 빌어 이룬 괴뢰국에 가까우며 후계자들도 시원찮았다. 후한은 5대 및 중국사 최단명의 정통왕조라는 불명예 타이틀이 있으며 후신인 북한은 지방왕조 및 거란의 괴뢰정권이었다. 후주는 그래도 곽위가 후계자를 보는 눈이 뛰어났고 시영은 이존욱 이래 최고의 군재가 있던 명군이었지만 요절해버려 다른 5대국가들이 그렇듯 존속기간이 너무 짧았다. 10국의 경우 초나라·민나라는 40년도 안 되는 역사에 왕이 6명(초)·7명(민)이나 있는 막장스런 역사에 군주들도 그다지 좋지 못하고 오나라는 양행밀 이후 군주는 서온의 괴뢰였으며 결국 서온의 양자인 이변에게 망하며 전촉·후촉은 모두 2대만에 단명. 형남은 최약소국에다가 고보욱이 숙맥이어서 나라를 망쳤고 남한은 주군이 암군 폭군이었으며 환관의 발호까지 말엽으로 갈수록 정치가 막장테크를 탔다. 그나마 강남(중국)을 제패한 남당이 가장 괜찮은 편이었는데 때가 너무 늦어 끝판왕인 후주-송이 등장하는 바람에 망했어요.[4] 쉽게 말하면, 동시대 동로마 제국에서 개발해서 사용한 그리스의 불 사용법과 비슷했다고 보면 된다.[5] 본명은 전원관, 낭산강 전투 당시에는 왕자 신분이었다.[6] 후량의 주전충이 추증.[7] 후량의 주전충이 추증.[8] 후량의 주전충이 추증.[9] 자체 추존.[10] 후당의 이사원이 추증.[11] 자체 추존.[12] 후진의 석경당이 추증.[13] 자체 추존.[14] 후한의 유지원이 추증.[15] 송태조가 추증.[16] 송태종이 추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