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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나츠 유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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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나츠 유타카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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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NPB 로고.svg 일본프로야구 선정 20세기 베스트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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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수

파일:히로시마 도요 카프 엠블럼.svg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1979 1980

파일:NPB 로고.svg 1968년 일본프로야구 사와무라 상
오가와 겐타로
(주니치 드래곤즈)[1]
에나츠 유타카
(한신 타이거스)
타카하시 카즈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79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와카마츠 츠토무
(야쿠르트 스왈로즈)
에나츠 유타카
(히로시마 도요 카프)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81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 MVP
키다 이사무
(닛폰햄 파이터즈)
에나츠 유타카
(닛폰햄 파이터즈)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오리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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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나츠 유타카
江夏豊 | Yutaka Enatsu
생년월일 1948년 5월 15일 ([age(1948-05-15)]세)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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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효고현 아마가사키시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2]
신체 179cm / 90kg
프로입단 1966년 드래프트 1위 (阪神)
소속팀 한신 타이거스 (1967-1975)
난카이 호크스 (1976-1977)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78-1980)
닛폰햄 파이터즈 (1981-1983)
세이부 라이온즈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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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프로야구 선수, 해설가.

좌완투수로서 "우승 청부사" 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3] 더불어 현역 시절 5개 구단을 거쳐간 저니맨이기도 하다.

2. 학창시절

형제간의 아버지가 서로 다른 다소 복잡한 가정에서 자랐다. 중학교 시절엔 투포환 선수였으며, 오사카가쿠인 대학 부속고교에 입학한 이후 비로소 야구를 시작했다. 또래 선수들에 비하면 다소 늦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투포환으로 다져진 강한 어깨를 바탕으로 학교의 에이스로 자리잡았고, 졸업하던 해인 1966년 학교를 고시엔 전국대회 4강으로 이끌었는데 예선 7경기에 모두 등판하여 단 3점만 실점하는 짠물투구를 선보이며 야구계의 이목을 끌었다. 비록 학교는 준결승에서 아쉽게 패했지만 그해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드래프트에서 1위로 한신 타이거스의 지명을 받았고, 그 외 무려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포함한 4개 구단의 뜨거운 추파가 있었으나 에나츠는 그대로 한신 유니폼을 입었다.

3. 프로시절

3.1. 한신 타이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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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에서 최고의 배터리를 이루었던 타부치 코이치(왼쪽)와 에나츠.

입단 첫해인 1967년, 젊은 투수를 선호하는 후지모토 사다요시 감독의 눈에 들면서 기회를 잡았고,[4] 42경기에 등판하여 12승 13패 평균자책 2.74 라는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고, 특히 탈삼진 225개로 1위를 기록하면서 무서운 신인으로 자리매김했다[5]. 이듬해엔 25승에 무려 401탈삼진으로 2년만에 생애 첫 다승왕과 2년 연속 탈삼진왕에 올랐는데, 401탈삼진은 1964년 샌디 쿠팩스가 세운 라이브볼 시대 최고 기록 382개를 뛰어넘는 기록이며 이는 지금도 철옹성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6] 이후로도 에나츠는 불같은 강속구를 바탕으로 데뷔 첫해인 1967년부터 1972년까지 센트럴리그 탈삼진왕을 6연패[7]하며, 무라야마 미노루의 뒤를 잇는 한신의 에이스로 맹활약 하였다.

이나오 가즈히사의 탈삼진 일본 기록인 353개를 넘는 354번째 삼진은 오 사다하루에게 뺏어내겠다고 공언했다. 타이 기록이 되는 353개를 오 사다하루에게 뺏어내고 일본 기록을 갱신한 것으로 착각해 기뻐했지만 바로 포수에게 아니라며 지적을 받았다. 그래서 모든 후속 타자는 의도적으로 범타로 유도하고 다시 오 사다하루의 타석이 돌아 왔을 때, 신기록인 354개째 삼진을 빼앗는 데 성공했다. 에나츠 본인이 회고하기를 "모리 마사히코씨와 다카하시 씨의 타석에서 삼진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힘들었다. 특히 다카하시 씨가 2스트라이크까지 몰린 것이 가장 곤란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연장 12회말에 에나츠 자신이 끝내기 안타를 치면서 승리를 거뒀다.

팀 선배 자토펙 투수 무라야마 미노루나가시마 시게오에게 라이벌 의식을 품고 고비의 기록이 되는 탈삼진은 늘 나가시마에게 빼앗던 것을 동경하여, 에나츠는 오 사다하루와의 승부에 집착했다. 에나츠는 오 사다하루에게 가장 많은 삼진을 뺏었지만(57개), 오 사다하루는 에나츠가 가장 많은 홈런(20개)을 허용한 타자이기도 했다.

데뷔 4년차인 1970년에 통산 1천 탈삼진을 기록하며 가네다 마사이치가 보유하고 있던 최단기간 1천 탈삼진 기록을 뛰어넘었고, 1971년 올스타전 1차전 에서는 9타자 연속 탈삼진을 기록했는데 이는 전년도 올스타전에서 기록한 5연속 탈삼진과 1971년 올스타전 2차전에서 기록한 탈삼진을 연결시키면 무려 15타자 연속 탈삼진이다. 이 또한 일본 올스타전 기록으로 남아 있다.

1973년 8월 30일 주니치 드래곤즈 와의 홈경기에서 상대 투수인 마츠모토 유키츠라와 11회까지 선발 맞대결을 벌여 무안타 무실점으로 역투했고, 결국 11회말에 에나츠 자신이 마츠모토를 끝내기 홈런으로 두들기며 사상 초유의 연장전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8]

파일:에나츠_홈런.gif
그 끝내기 홈런 장면. 고시엔 구장 럭키 존을 살짝 넘어갔다. 

이렇듯 한신의 기둥 투수로 불꽃같은 활약을 보였지만, 1974년 이후 지병인 혈행장애와 심장질환이 악화되고 어깨와 팔꿈치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남용한 진통제의 부작용으로 체중이 심하게 불어나는 등의 건강문제로 에나츠의 기량은 급격히 쇠퇴하고 있었다. 더구나 당시 감독이던 가네다 마사야스[9], 요시다 요시오와 불화가 심했고 "독불장군" 이니 "고독한 늑대" 라는 별명이 붙는 등 프런트와의 관계도 악화 일로였으며 한편으로 1969년 검은 안개 사건에 본의 아니게 연루되면서(물론 무혐의로 끝났지만) 한신에서의 그의 입지는 점점 좁아져 가던 상황이었다.

결국 에나츠는 1975년 시즌 종료 후 에모토 타케노리, 시마노 이쿠오와의 1-2 트레이드로 난카이 호크스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10][11]

3.2. 난카이 호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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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카이의 일원이 된 에나츠는 지병인 혈행장애와 심장질환으로 1976년 시즌 6승 12패 9세이브, 탈삼진 109개에 그치며[12] 최악의 한해를 보냈다. 이에 난카이의 감독 겸 선수이던 노무라 카츠야는 에나츠가 긴 이닝을 던질 수 없는 점을 감안하여 한 경기에 50개 정도만 던지는 구원 투수로 뛸 것을 권유하였는데 처음에 에나츠는 "나를 퇴물로 생각하는 겁니까?" 라며 반발했지만 "구원 투수도 스타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자. 야구계에 혁명을 일으켜 보자" 라는 노무라의 설득에 감명받고[13] 1977년 시즌 중반부터 전업 마무리 투수로 등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해 19세이브(리그 1위), 22SP최우수 구원투수 타이틀을 얻으며 노무라의 기대에 부응했고, 사실상 일본 프로야구의 첫번째 전문 마무리 투수로 선구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14][15]

당시 일본 야구계에선 마무리 투수의 컨디션 조절 방법이 체계화 되어있지 않은 탓에, 허리통증으로 고생하던 에나츠는 직접 기자들에게 메이저리그의 구원 투수들은 어떻게 하는 지 묻기도 했고, 결국 에나츠는 자기 나름대로 컨디션 조절법을 창안하여 경기 개시 후 5회 이전엔 덕아웃에 들어가지도 않고 라커룸에서 마사지를 받거나 잠을 자는 식으로 몸을 추스렸다. 이 방법은 처음엔 구단에서는 물론 야구계와 언론에서 호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이것이 상식으로 자리잡았다.

아무튼 마무리 투수로 변신한 에나츠는 비록 전성기 시절의 불같은 강속구는 사라졌지만 타자와의 수싸움과 정교한 변화구를 바탕으로 기교파 투수로 변신했고, 가네다 마사이치는 "현역 시절의 나보다 낫다"며 에나츠에게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3.3. 히로시마 도요 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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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77년 시즌 말 노무라 카츠야가 구단과의 불화로 난카이를 떠나자 에나츠도 난카이를 떠나겠다고 선언, 현금 트레이드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유니폼을 입었다. 히로시마에서도 고바 타케시 감독이 그를 마무리로 중용하며 에나츠는 1979 ~ 1980년 2년 연속으로 최다 세이브최우수 구원투수 수상을 달성했고, 히로시마의 1979 ~ 1980년 일본시리즈 2년 연속 우승에 큰 공을 세웠다. 또한 1979년에는 에나츠 생애 처음이자 마무리 투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센트럴리그 MVP를 수상하였고, 특히 그 해 킨테츠 버팔로즈와의 1979년 일본시리즈 7차전 9회말에 보여준 이른바 에나츠의 21구는 아직까지도 일본프로야구 명승부의 전설로 남아있다. 에나츠는 은퇴 후 히로시마 에서 뛰던 시절을 "정말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특히 1979년은..." 이라고 회상하며 그때의 활약에 대해 여전히 감격에 젖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히로시마 시절 신인 투수였던 오노 유타카의 투구폼을 교정해 주고 많은 조언을 건네는 등 그가 프로에서 성공하는데 적지 않은 힘을 보태주었고, 팀의 중심 타자였던 "철인" 기누가사 사치오와 친분을 쌓으며 기누가사가 2018년 4월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절친으로 우의를 다졌다.

3.4. 닛폰햄 파이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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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닛폰햄 파이터즈 감독인 오사와 케이지의 강력한 요청으로 에나츠는 1-1 맞트레이드를 통해 닛폰햄 파이터즈로 적을 옮겼다. 그곳에서도 에나츠는 끝판왕으로 강력한 포스를 발휘했고, 이적 첫해인 1981년 닛폰햄이 19년만에 퍼시픽리그를 제패하는 데 큰 힘을 보탰다.[16] 게다가 25세이브로 구원부문 1위에 퍼시픽리그 MVP 까지 손에 쥐며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양대 리그에서 MVP를 수상한 선수가 되었다. 덧붙여 히로시마 시절 포함하여 1979~1982년 4시즌 연속 구원 1위를 차지했고 사상 최초로 12개 전 구단을 상대로 세이브를 기록하였다.[17] 1982년에는 프로통산 200승을 달성하며 가네다 마사이치가 주도하던 명구회에 가입하였다.

3.5. 세이부 라이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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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 타이거즈 시절 배터리 멤버이자 절친 타부치 코이치(오른쪽)와 세이부에서 재회했다.[18]

1983년 시즌 후 오사와 감독이 물러나면서 에나츠는 1984년 세이부 라이온즈로 트레이드 되었지만[19]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있던 상태였기에 예년같은 활약을 보이지 못했고[20], 감독이던 히로오카 타츠로 특유의 관리야구는 자유분방한 성격의 에나츠에게는 전혀 맞지 않는 옷이었다. 결국 에나츠는 통산 200세이브(에나츠가 달성했다면 사상 최초였다)와 3천 탈삼진이 눈앞이었음에도 불구하고[21] 미련없이 1984년 시즌 도중에 은퇴를 선언하였다.[22] 구단에서 따로 은퇴경기 내지는 은퇴식을 마련해 주지 않았지만 에나츠는 자신이 소속해 있던 명구회의 협찬으로 은퇴식을 거행했고, 에나츠는 은퇴식에서 "메이저리그에 도전해 보겠다. 에나츠 유타카 36세, 정말 시시한 녀석일지도 모르겠지만 나중에 일본에 돌아오거든 '수고했다' 라는 한마디로 맞이해 주었으면 좋겠다" 라고 더욱 큰 꿈이 있음을 털어놓았다.

에나츠의 현역 18시즌 간 통산 성적은 829경기 출장, 3196이닝, 2987탈삼진, 206승 158패 193세이브 평균자책 2.49 이다. 또한 MVP 2회, 사와무라상 1회, 베스트나인 1회를 수상했다.

4. 은퇴 이후

은퇴식에서 밝힌 것 처럼 에나츠는 이듬해 1985년 초 미국으로 건너가 밀워키 브루어스의 스프링 캠프에 합류하여 36세의 적지 않은 나이로 메이저리그에 도전하는 동양인으로 현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에나츠는 스프링 캠프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나이가 문제였고, 결국 밀워키의 시즌 개막전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하며 일본으로 돌아왔다.

이후 에나츠는 닛폰 테레비, 테레비 아사히 등에서 해설가로 활동하였고 탤런트와 영화배우로 예능계에 발을 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1993년 3월, 각성제 단속법 위반혐의로 체포당하여 초범임에도 각성제 소지량이 많다는 이유로 징역 2년 4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아 시즈오카 형무소에 수감되는 흑역사를 만들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에나츠는 명구회를 자진 탈퇴했다.[23]

그러나 에나츠는 오히려 형무소에서의 규칙적인 생활로 몸 상태가 많이 건강해졌고, 스승이던 노무라 카츠야와 현역 시절 동료이자 친구인 에모토 타케노리, 기누가사 사치오의 적극적인 구명 활동을 통해 1995년 4월 가석방으로 출소하여 해설가로 다시 야구계에 복귀했다. 출소 후 에나츠는 "나의 석방을 위해 힘써준 모두에게 감사한다. 만약 형무소에 가지 않았다면 나는 진작에 죽은 목숨 이었을지도 모른다" 라면서 수감 생활이 자기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음을 시사하였다. 또한 야구계에서도 독불장군이던 에나츠가 형무소에서 새 사람이 되어 나왔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에나츠는 출소 후 다시 시작하겠다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받은 트로피와 상장 등은 전부 내다 버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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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나츠는 현재 TV 오사카와 데일리 스포츠의 해설가, 평론가로 야구계에서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2015년 한신의 춘계 캠프 때 투수 인스트럭터(임시 코치)로 일했고 2016년 2군 춘계 캠프 때도 인스트럭터를 맡아 투수들을 지도했다. 2015년 캠프 때 오승환에게 조언을 해주기도 했는데, 어떤 기레기 각도드립을 치며 에나츠를 비하하는 쓰레기 기사를 싸지르기도 했다.. 기사를 보면 에나츠가 오승환보다 못한 투수라고 한다.

2018년 4월 23일, 소울 메이트인 기누가사 사치오대장암으로 작고하자 슬픔을 금치 못하면서 "기누가사는 나의 보물같은 친구였다. 나도 곧 그를 따라가서 저 세상에서 같이 야구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라며 그의 죽음을 애통해 했다. 에나츠는 기누가사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여 절친의 마지막 가는 길까지 함께 하는 사나이의 진한 우정을 보였다.

참고로 국내에서도 정발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라는 소설의 주인공 '박사'가 좋아하는 야구 선수이기도 하다. 지병으로 인해 박사는 그가 전성기였던 한신 시절만(정확히는 그가 트레이드 되기 직전인 1975년까지만)[24] 기억하기 때문에, 에나츠는 작중 내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5. 에나츠의 21구

해당 항목 참조.


[1] 검은 안개 사건에 연루되어 영구제명.[2] 원래는 오른손잡이 였으나 야구를 하려면 왼손잡이가 유리할 거라는 큰형님의 권유로 바꿨다고 한다. 그래서 글쓰기와 젓가락질도 왼손으로 하고 있다.[3] 이 별명은 후배 좌완투수 쿠도 키미야스에게 이어진다.[4] 후지모토는 에나츠를 친손자처럼 귀여워 했고, 틈만 나면 차 한잔 하면서 에나츠에게 옛날 일본 야구에 대해 얘기해주는 것이 낙이었다고 한다.[5] 하지만 신인왕은 고쿠테츠 스왈로즈의 신인 2루수 타케가미 시로에게 내주었다.[6] 현재 라이브볼 시대 한 시즌 최다 탈삼진 기록은 1973년 놀란 라이언이 세운 383개이다. 참고로 역대 한시즌 최다 탈삼진 기록은 데드볼 시대에 나온 513탈삼진.[7] 같은 시기 퍼시픽리그에서도 어떤 좌완투수가 탈삼진 1위를 6연패하는데, 바로 킨테츠의 스즈키 케이시. 세(리그)의 에나츠, 파(리그)의 스즈키라고 불렸다.[8] 오죽 승부가 극적이었으면 이 경기를 중계하던 아나운서가 "에나츠 만세!!"를 외쳤고, 덕분에 방송위원회 징계심의에 회부되어 주의조치를 받았다고 한다[9] 1973년 곤도 마사토시가 가네다의 갈굼과 모욕에 시달리다가 결국 시즌 종료 후 "나를 원숭이라고 모독한 것에 대해 사과하라"고 요구했으나 가네다가 그런 말 한 적 없다며 발뺌하자 결국 제대로 빡쳐서 가네다를 구타하고 이것 때문에 중징계를 받고 은퇴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때 곤도랑 같이 따라갔던 선수가 바로 에나츠였다. 에나츠가 당시 곤도가 감독실로 들어간 후 감독실 문을 막고 서 있었는데 잠시 후 가네다의 비명 소리가 들리자(무엇 때문 인지는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코치들이 감독실로 쫒아와 들어가려 했으나 에나츠는 계속 문을 막고 있었고 결국 비명 소리가 잦아든 뒤 문을 열자 가네다는 곤도에게 실컷 얻어터지고 제대로 코뼈가 돌아가 있었다. 밖으로 나오는 곤도에게 에나츠가 "선배 이제 분이 풀렸수?" 하니 곤도는 "그래.." 하면서 감독실을 나왔다고. 참고로 곤도는 야구계 안팎에서 성격이 상냥하고 온후하기로 소문이 나있었기 때문에(에나츠의 말에 의하면 한신 시절 곤도가 화내는 모습을 1번도 본 적 없었다고 한다. 또 거인과의 시합 중 오 사다하루의 뒤통수에 빈볼을 날린 적 있는데 당시 거인 감독인 카와카미 테츠하루가 "곤도가 일부러 빈볼을 던졌을리 없다" 라며 직접 선수들이 나가려는 걸 말릴 정도였다. 참고로 바로 직전에 한신 투수 진 바키오 사다하루를 향한 빈볼 때문에 한바탕 난투극이 벌어진 후였다) 이 사건 후 오죽하면 그랬겠냐며 야구계 안팎으로 동정을 받았다.[10] 자신이 트레이드 된다는 소식을 들은 에나츠는 현역에서 은퇴하려 하였으나, 난카이 감독이던 노무라 카츠야의 간곡한 설득으로 결심을 번복하고 난카이로 이적하기에 이르렀다.[11] 당시 에나츠가 맞트레이드 상대중 한명인 에모토 타케노리에 대해 "내가 왜 저런 녀석이랑 팀을 바꿔야 하는건가?" 라며 불만을 표시하자, 이를 들은 에모토는 "너 이자식 말 다했냐?!"라면서 한판 붙어보자는 태도로 맞서며 둘의 관계는 한때 최악의 상태에 놓이기도 했다.(그도 그럴만 한게 에모토는 1973년 난카이의 마지막 퍼시픽리그 우승을 이끈 공신인데 그런 선수를 비하했다.) 그러나 이 둘은 한바탕 충돌한 후 서로 화해하며 싸운 뒤에 정든다고 했는지 오히려 둘도 없는 막역지우가 되었다. 후일 에나츠가 각성제 소지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자 당시 국회의원 신분이던 에모토가 직접 증인으로 나왔고, 이후 에나츠의 또다른 친우인 기누가사 사치오와 함께 에나츠의 구명 운동을 주도할 정도로 돈독한 우정을 과시하였다.[12] 의외로 방어율은 2.98로 전년도인 1975년보다 더 내려갔다. 출장경기가 49경기에서 36경기로 대폭 감소한 게 함정이긴 하지만.[13] 노무라의 회고에 따르면 제안을 받은 에나츠는 "내가 선발 투수에서 구원 투수로 바뀐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라며 반발했지만, 노무라는 "뭐가 부끄럽다는 게냐? 훌륭한 일이 아닌가? 자네가 일본 야구의 릴리프 투수로서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라고 설득하자 에나츠가 눈을 반짝이며 "오오... 혁명인 겁니까?" 라 되물었고, 이에 노무라가 "그래, 혁명이다!" 라고 강하게 답하자 에나츠가 "좋아, 하겠습니다!" 라며 받아 들였다고.[14] 여담이지만 노무라는 에나츠와의 트레이드 상대였던 에모토 타케노리도 명투수로 단련시킨 바 있다.[15] 물론 마무리 투수라고 해서 토니 라루사데니스 에커슬리로 시작한 이후의 현대적 1이닝 전문 마무리가 아니라, 이기고 있는 경기에서 2~3이닝 정도를 책임지는 롤리 핑거스, 마이크 마셜, 브루스 수터, 리치 고시지와 비슷한 중무리 투수 역할이었다.[16] 다만 닛폰햄은 일본시리즈에선 요미우리에게 패배하여 요미우리의 V9시대 이후 8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여담으로 그 당시 두 팀의 구장이 똑같이 고라쿠엔 구장이었기 때문에 덕아웃 시리즈를 구현한 전무후무한 시리즈이기도 하다.[17] 다만 친정이던 한신 타이거스 상대로는 승리를 거두지 못하는 바람에 12개 전 구단 상대 승리투수는 무산되었다.[18] 타부치는 세이부로 이적한 이후 포수 마스크를 벗고 1루수로 전환하여 에나츠와 다시 배터리를 결성하지는 못했다.[19] 아이러니하게도 에나츠를 마무리 투수로 전향시켜 대스타가 되는 계기를 만든 노무라 카츠야도 1980년 세이부에서 은퇴했다.[20] 당시 성적은 20시합에 출전해 1승 2패 8세이브. 방어율 3.65를 기록. 참고로 이 방어율은 에나츠의 역대 최악의 방어율 성적이었다.(실점 11점중 자책점이 무려 10점이었는지라) 그 때문에 WHIP도 역대 최악은 1.38 을 기록.[21] 은퇴 당시 200세이브 까지 단 7개, 3천 탈삼진은 단 13개 남아 있었다. 당시 코치였던 모리 마사아키도 감독의 지시를 받고 선수들의 방을 점검한 뒤 마지막으로 에나츠의 방에 와서 어려움을 토로했다. 모리가 감독직을 맡은 뒤 관리야구를 많이 완화했고 그 결과 퍼시픽리그 8회, 일본시리즈 6회 우승의 위업을 달성했다.[22] 타부치 코이치도 이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23] 이는 회장이던 가네다 마사이치의 조치였다고 한다. 그러나 출소 후 명구회에 복귀하였다.[24] 주인공 아들에게 "에나츠 지금도 활약하냐?" 라고 묻자 아들이 "다른 팀으로 이적했고 이미 은퇴했다" 란 말을 했는데 그 말을 듣고 혼란스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