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타벳푸 마나부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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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 |||||||||||||||||||||||||||||||||||||||||||||||||||||||||||||||||||||||||||||||||||||||||||||||||||||||||||||||||||||||||||||||||||||||||||||||||||||||||||||||||||||||||||||||||||||||||||||||||||||||||||||||||||||||||||||||||||||||||||||||||
1979 | 1980 | 1984 |
니시모토 타카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키타벳푸 마나부 (히로시마 도요 카프) | → | 엔도 카즈히코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
코마츠 다츠오 (주니치 드래곤즈) | → | 키타벳푸 마나부 (히로시마 도요 카프) | → | 쿠와타 마스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
1986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MVP | ||||
랜디 바스 (한신 타이거스) | → | 키타벳푸 마나부 (히로시마 도요 카프) | → | 야마쿠라 카즈히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
1982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최다 승리 | ||||
1981 에가와 스구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키타벳푸 마나부 (히로시마 도요 카프) | → | 1983-1984 엔도 카즈히코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
1986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최다 승리 | ||||
1985 코마츠 타츠오 (주니치 드래곤즈) | → | 키타벳푸 마나부 (히로시마 도요 카프) | → | 1987 코마츠 타츠오 (주니치 드래곤즈) |
1985-1986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최고 승률 | ||||
1984 에가와 스구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키타벳푸 마나부 (히로시마 도요 카프) | → | 1987 카와바타 쥰 (히로시마 도요 카프) |
1991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최다 승리 | ||||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키타벳푸 마나부 (히로시마 도요 카프) | → |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자이언츠) |
1986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최우수 방어율 | ||||
코마츠 타츠오 (주니치 드래곤즈) | → | 키타벳푸 마나부 (히로시마 도요 카프) | → | 쿠와타 마스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
1982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투수 부문 베스트 나인 | ||||
에가와 스구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키타벳푸 마나부 (히로시마 도요 카프) | → | 엔도 카즈히코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
1986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투수 부문 베스트 나인 | ||||
코마츠 타츠오 (주니치 드래곤즈) | → | 키타벳푸 마나부 (히로시마 도요 카프) | → | 쿠와타 마스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
1986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 ||||
니시모토 타카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키타벳푸 마나부 (히로시마 도요 카프) | → | 쿠와타 마스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
히로시마 도요 카프 등번호 20번 | ||||
노리카에 히사요시 (1974~1975) | → | <colbgcolor=#b30000> 키타벳푸 마나부 (1976~1994) | → | 나가카와 카츠히로 (2003~2019) |
히로시마 도요 카프 등번호 73번 | ||||
호세 마르티네스 (1997) | → | 키타벳푸 마나부 (2001~2004) | → | 코바야시 칸에이 (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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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타벳푸 마나부 北別府学 | Manabu Kitabeppu | |
출생 | 1957년 7월 12일 |
사망 | 2023년 6월 16일 (향년 65세)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출신지 | 가고시마현 소오군 스에요시초 (現 가고시마현 소오시) |
학력 | 미야자키현립 미야코노죠 농업 고교 (미야자키) |
신체 | 181cm, 85kg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75년 드래프트 1라운드 (히로시마) |
소속팀 |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76~1994) |
지도자 | 히로시마 도요 카프 1군 투수 코치 (2001~2004) |
SNS | | 블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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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프로야구의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활약한 투수. 야구 지도자와 야구 해설가·평론가로도 활동하였다.현역 시절에 발군의 제구력을 무기로 삼아 '마운드의 정밀기계'(マウンドの精密機械)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한 피네스 피처 중 한 명이기도 했다.
2. 선수 시절
1982년 시즌에는 자신의 한 시즌 최다승인 20승을 거두면서 다승왕 타이틀을 획득했고 사와무라상을 수상했다. 1986년에는 다승, 평균자책점, 승률 부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며 사와무라상과 센트럴리그 MVP를 수상했고, 팀은 리그 우승을 차지하면서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프로 입단 당시 선배들의 구속과 구위에 압도되어 제구력을 가다듬는데 노력하였고, 그 결과 '정밀 기계’라는 별명이 붙여질 정도의 뛰어난 제구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 핀포인트 제구력을 바탕으로 1980년대 붉은 헬멧 군단과 센트럴리그의 간판 투수로서 맹활약했다.
제구력을 알 수 있는 일화로, 홈플레이트에 3개의 빈 깡통을 두고 3개의 공만으로 모두 넘어뜨렸다고 한다. 그의 공을 받았던 당시 히로시마의 주전 포수 타츠카와 미츠오는 키타벳푸의 투구에 대해 “미트를 움직이지 않고 잡을 수 있었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렇게 자신의 제구력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이 있어, 현역 시절에는 심판의 판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이 많은 투수이기도 했다.[1] 스트라이크/볼 판정에 의구심이 들 때는, 같은 코스에 공을 연속으로 던져 주심을 시험하는 톰 글래빈스러운 투구를 하기도 했다고. 당시 센트럴리그 심판부장이었던 다나카 토시유키는 키타벳푸에 대해 "다른 투수가 선발로 나온 경기에 비해 두 배는 피곤했다"고 말했다.
1992년 7월 16일,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경기에서 히로시마 구단 역사상 최초로 200승 고지를 밟았으며, 1994년에 선수 생활을 마감하였다. 통산 213승은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다승 18위에 랭크되어 있으며, 이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최다승 투수이기도 하다. 선발승 200승은 일본프로야구 역대 10위이다. 주니치에게 유독 강해 승수의 1/4 가량인 52승을 거두었다. 현역 시절 단 2개의 보크만을 허용했으며, 첫 등판 경기부터 2,420 1/3 이닝을 던질 동안 보크를 기록하지 않았다.
흑역사로는 통산 380개의 피홈런으로 가네다 마사이치의 379개를 뛰어넘어 센트럴 리그 최다 피홈런 신기록[2]을 세웠다는 것인데, 본인이 구위로 압도하는 파워피처가 아니었고, 그라운드 사이즈가 유독 작았던 히로시마 시민구장을 홈으로 두고 있었던 점이 원인으로 작용했다. 또다른 흑역사로는 일본시리즈에 5회 진출하여 선발로 6경기에 등판했음에도 단 1승도 거두지 못하고 5패만을 기록했다는 것. 세번째 흑역사로는 호코다테에 나와서 플라스틱 공을 목표물에 제대로 못 맞힌 적이 있었다는 것. 현역 19년 동안 탈삼진 1위를 단 1차례도 기록하지 못했다.
키타벳푸에게도 천적이 있었다. 바로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의 오치아이 히로미츠. 키타벳푸는 주니치 전에 강했지만 유독 오치아이에게만 약했다. "키타벳푸의 공은 기다리면 반드시 온다"고 말한 오치아이는 배트의 중심에 공을 맞히는 정교한 타격 기술로 유명했다. 정교함에 있어서는 뒤지지 않는 키타벳푸와의 대전은 '투구 명인과 타격 명인의 대결', '센티미터의 싸움'이었다. 더더욱이 오치아이가 주니치 감독을 맡고 있었던 내내 히로시마는 아예 주니치의 "승수 자판기"였다.
2019년 10월 일본프로야구 최다승(400승) 투수 가네다 마사이치의 부음 소식을 듣고 그와의 일화를 술회했다. 현역 시절 반팔을 입고 다니다가 가네다에게 투수는 어깨와 팔꿈치를 따뜻하게 해 보호해야 한다는 충고를 듣고 이를 충실히 실행했다고 한다.
19시즌 통산(1976~1994년), 515경기 등판, 460 선발, 135 완투, 28 완봉, 36 무볼넷경기, 3,113 투구이닝, 3,255 피안타, 1,757 탈삼진, 380 피홈런, 656 볼넷허용, 20 폭투, 213승 141패 5세이브, 통산방어율 3.67(1,399 실점 및 1,268 자책점)의 기록을 남겼다.
3. 은퇴 후
소속팀 히로시마는 등번호 영구 보관이라는 제도가 있는데, 이 제도는 등번호 전임자가 추천하는 선수가 나타날 때까지 그 번호를 임시로 궐번시키는 것이다. 노무라 겐지로(7번), 오가타 고이치(9번), 키타벳푸의 20번은 모두 후배들에게 양보했다. 200승 투수임에도 왜 영구결번이 아닌가에 대해 게시판에서 이야기가 오갔다고 한다. 키타벳푸는 블로그에서 후배 구로다 히로키의 등번호 15번이 영구결번된 것에 대해 "현역 은퇴 후 내 등번호가 영구결번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사실"이라고 속마음을 밝혔다.
완투 수가 현저히 감소한 현대 야구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다.
호코다테에 나와서 방범볼을 충격완화 매트에 던지는 역할을 맡았는데 정밀기계라는 별명에 무색하게 첫 발을 보기 좋게 빗맞춰버렸다.
팀 선배 키누가사 사치오의 부음 소식을 접하고 "내가 완투했을 때에는 제일 먼저 악수를 청하셨다. 내가 타자들에게 맞고 있으면 늘 말을 걸어주는 목소리가 들렸다. 키누가사 선배가 있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됐다"고 회상했다.
히로시마 팀 후배인 마루 요시히로가 2018년 시즌 후 FA권을 행사한다는 발표[3]에 불쾌감을 표시하며 "선수의 권리인 것은 맞지만 마루를 키운 것은 히로시마 도요 카프다!" 라고 말했다.[4]
4. 사망
2020년 백혈병 투병 중임을 발표했고, 이후 투병 와중에도 계속해서 활동을 이어왔으나 병세가 악화되면서 끝내 2023년 6월 16일 사망했다. 향년 65세. 경기 시작 두 시간 전, 급작스럽게 부고 소식을 접한 카프는 경기 시작을 앞두고 묵념으로 키타벳푸를 기리는 기념식이 간소하게 치러졌다. 경기는 세이부를 상대로 토코다 히로키가 시즌 첫 완봉승으로 하늘로 떠난 키타벳푸의 영전에 값진 승리를 받쳤다.오노 유타카가 키타벳푸 부음 후 인터뷰에서 술회하기를 키타벳푸에 대한 첫인상은 '제구력이 좋고 투구폼이 매우 예쁘다'였다. 입단 2년차부터 이미 카프의 차기 에이스로 지목받았으며 그때부터 이미 제구력은 발군이었다. 투수로서도 강한 의지를 가진 선수로 타협하지 않은 모습이 인상적이었으며 투구 전 준비 단계부터 타자들을 제압하는 아우라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집중력이 항상 좋아 같은 팀원들조차도 연습 중에는 서로 이야기 할 수 있지만 게임 시작이 가까워지면 가까이 다가가거나 말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키타벳푸가 선발투수였고 오노가 구원등판했다가 승리를 날려먹고 오노가 구원승을 기록하면 오노는 미안한 감정을 느꼈지만 키타벳푸는 오노에게 화를 내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키타벳푸의 성격으로 볼 때 혼자서 던지고 승/패를 기록하고 싶은 타입이어서 경기 중간에 마운드에서 강판당하면 "그건 내 잘못"이라는 생각이 있었다고 하며 그런 생각까지 포함하면 진짜 투수처럼 보이는 투수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오 사다하루는 '이기기가 매우 어려웠던 투수로 그의 컨트롤은 훌륭했고 슬라이더, 커브, 슛 등도 좋았다. 그의 영혼이 안식할 수 있도록 진심으로 기도한다'고 말을 남겼다.
팀 동료이자 야수인 고바야카와 타케히코는 "그의 투구 스타일은 구멍에 바늘을 꽂는 것처럼 컨트롤로 타자에게 가는 것과 같았고,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도망치지 않고 타자를 향해 달려가는 카프의 스타일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는 수비를 잘하고 경기에서 승리하는 팀의 핵심이었습니다. 뒤에서 수비할 때도 굉장히 안심이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라고 술회했다.
아라이 타카히로 히로시마 감독은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지만 매우 유감이다. 내가 선수였을 때 그는 코치였고 항상 침착하고 견고했습니다. 내가 카프로 돌아 왔을 때, 키타벳푸가 아라이에게 친절하게 "행운을 빕니다"라고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위대한 선배들을 공경하면서 오늘부터 선수들과 함께 뛰고 싶고, 키타벳푸 씨가 하늘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고 말했다.
오카다 아키노부 한신 감독은 "내가 대학 졸업 후 프로에 입단했을 때 키타벳푸 그는 이미 에이스 등급의 투수였다. 같은 학년이기 때문에 서로 경기할 때 의식했다"고 말했다.
하라 타츠노리 요미우리 감독은 "그는 바늘에 실을 꿸수 있는 매우 제구가 좋은 투수였으며 라이벌로서 우리가 상대한 가장 인상적인 선수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의 영혼이 안식할 수 있도록 진심으로 기도합니다."라고 말했다.
타츠나미 카즈요시 주니치 감독은 "그는 정말 훌륭한 컨트롤을 가진 투수였습니다.", 신조 츠요시 닛폰햄 감독은 "일본 햄의 신조 감독은 "우리는 서로 매우 잘 대결했고, 이렇게 컨트롤이 좋은 투수는 없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5] "내가 가까이 느낀 스타이자 영웅이었다"며 애도를 표했다. 기자들에게 "진심으로 애도를 표하며, 키타벳푸는 카프의 첫 200승 투수이자 카프가 일본 1위가 되었을 때의 핵심 투수였다. 나와 같은 해와 달에 태어난 그는 내가 매우 기억에 남고 가깝게 느낀 스타이자 영웅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평안히 쉬시길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했다.
[1] 야구 중계 해설에서 “최근의 투수는 얌전하네요. 나는 심판과도 싸우고 있었어요”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2] 일본프로야구 기록이자 퍼시픽 리그 최다 기록자는 스즈키 케이시(560개)다.[3] 리그 내 라이벌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관심을 보였고 결국 이적했다.[4] 선수의 이적은 자유긴 한데, 교진은 좋은 선수가 FA로 나왔다 하면 압도적인 재력으로 빨아들이는데 그 과정에서 템퍼링도 서슴없이 한다. 마루 역시 교진과 사전 템퍼링이 있었음이 거의 확실한 선수. 단순히 정말 자기의 가치를 평가받고 싶어서 FA로 나온 것이 아니라 이미 사전에 약속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불쾌한 것이다.[5] 도쿄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본적은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이며 히로시마를 기반으로 3대째 정치가를 배출했다. 구장도 본인 지역구 내에 있으며 본인도 카프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