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7 19:54:36

세타가야 일가족 살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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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colbgcolor=#171B1C,#000><colcolor=#eeeeee,#dddddd> 세타가야 일가족 살인 사건
가미소시가야 3정목 일가족 4명 강도피살 사건
上祖師谷三丁目一家4人強盗殺人事件
파일:setagaya murder case site.png
사건이 발생한 세타가야구의 주택.
일본 경찰에 의해 보존되고 있으나 접근이 금지되어 있다.
발생일 2000년 12월 30일
사건발생으로부터 [dday(2000-12-30)]일, [age(2000-12-30)]주기
발생 위치 도쿄도 세타가야구
가미소시가야 3초메 23반 26고 주택
범죄 항목 주거침입, 살인
피해자 야스코(당시 41세)
남편 미야자와 미키오(당시 44세)
딸 니이나(당시 8세)
아들 레이(당시 6세)

1. 개요2. 경위
2.1. 사건 당시 상황2.2. 시신의 상태2.3. 당시의 상황
3. 용의자 정보
3.1. 범인의 특징
4. 범인의 유류품
4.1. 범인의 이상한 점4.2. 목격 정보
5. 일본 내 '범인 한국인설'과 혐한 선동
5.1. '범인의 신발, 힙색이 한국 제품'이라는 주장5.2. 일본인 작가의 팩트체크 없는 '프로파일링' 주장5.3. '일본 경찰의 지문 감식' 관련 주장과 모순5.4. 응급치료를 잘 해서 한국인이라는 주장5.5. '한국인처럼 생긴 얼굴상'이라는 혐한 주장
6. 인터넷의 범행 보고?7. 그 밖의 이야기8. 사건 발생 전 예고?9. 사건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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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0년 12월 일본 도쿄도 세타가야구에서 발생한 일가족 살인 사건이다. [age(2000-12-31)]년이 지난 현재까지 범인은 체포되지 않았다. 일본 경시청 한국어 페이지에서 이 사건에 대해 알아볼 수 있다.

2. 경위

파일:세타가야 일가족.jpg

2000년 12월 31일 아침, 도쿄도 세타가야구(世田谷区) 가미소시가야(上祖師谷) 3초메(丁目) 23반(番) 26고(号) 주택에서 미야자와 미키오(宮沢みきお, 당시 44세), 부인 야스코(泰子, 당시 41세), 딸 니이나(にいな, 당시 8세), 아들 레이(礼, 당시 6세)가 사망해 있는 것을 부인 야스코의 어머니(2022년 기준 91세)가 발견했다.

바로 옆집에 살던 야스코의 어머니가 딸의 집에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하여 방문해 보니 일가족이 처참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2.1. 사건 당시 상황

파일:external/s14.postimg.org/madori_canvas1.jpg

집 안 내부도와 가택 외부.

미야자와 가족이 살던 곳은 카미소시가야(上祖師谷) 3번지에 위치했는데 특이하게도 바로 옆집과 딱 붙은 형태로 지은 2층 주택이었다. 이 옆집엔 부인 야스코의 친정어머니와 언니 부부가 살았다.[1] 이 주택지에는 200여 가구나 집들이 있었지만 공원 토지 확대 사업으로 재개발이 확정되어 다른 주민들은 이사를 갔기 때문에 사건 당시에는 불과 4가구밖에 없었다. 피해자 일가도 사건으로부터 4개월 뒤인 2001년 4월까지[2] 사이타마현으로 이사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자택 주변은 이미 집을 허문 곳도 있어 을씨년스러웠고 밤이 되면 아주 조용했다고 한다.

2.2. 시신의 상태

1층 계단에서 발견된 미키오는 머리, 얼굴 등의 상반신과 엉덩이, 다리를 포함한 하반신을 칼로 무참하게 난도질당했는데 시신 주변에 피가 잔뜩 쏟아졌다. 부인과 딸은 2층에 쓰러져 있었으며 얼굴과 목 등 상반신을 중심으로 위로부터 앞니가 부러진 식칼로 수십 번 찔렸다.

특히 부인 야스코는 시신의 상태가 제일 참혹했는데 얼굴 부근을 칼로 파낸 듯한 깊은 상처가 났고 장롱에서 꺼낸 듯한 옷으로 얼굴이 덮여 있었다. 직접적 사인은 심장 내 출혈성 쇼크였다. 목이 졸렸을 때 입은 듯한 갑상연골 좌상골절 흔적도 발견되었다.

아들 레이의 시신은 2층 침실에서 발견되었다. 목을 졸려 사망했다고 추정되는데 칼에 찔린 상처는 없어서 그나마 시신의 상태가 온전했다.

2.3. 당시의 상황

조사에 따르면 범인은 12월 30일 밤 11시경 집 뒤에 있는 공원의 펜스를 발돋움 삼아 피해자 집 2층 욕실로 침입하였다. 그 펜스 주변의 나뭇가지가 꺾였는데 창문 아래 지면에서 범인의 발자국이 발견되었다. 욕실 문에는 방충망이 있었지만 뜯겨 지면에 떨어진 채로 발견되었다.

11시 무렵 집에서 다투는 듯한 소리를 근처 주민이 들었다. 옆집에 살던 어머니와 언니 부부가 30분경 "쿵!" 하는 큰 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처음엔 피해자가 범인에게 습격당하고 계단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아닌가 의심했으나 경찰이 샌드백으로 실험해 본 결과 사람이 떨어지는 소리는 아님이 판명되었다. 3층 로프트 침실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내릴 때 나는 충돌음으로 판단하였고 범행은 밤 11시 - 11시 30분 사이에 일어났다고 추정하였다.

범인은 2층으로 침입하여 2층 방에서 자는 아들을 목 졸라 죽인 후 2층의 소란을 듣고 1층에서 달려온 아버지 미키오에게 달려들었다. 미키오는 격하게 저항하며 범인과 싸웠으나 칼을 지닌 범인에게 무참하게 찔렸다. 부러진 앞 칼날은 미키오의 머리 부근에서 발견되었는데 범인도 자신의 칼에 오른손을 찔려 상당히 큰 상처를 입고 피를 흘렸다. 미키오를 살해한 뒤 범인은 사다리를 타고 3층 로프트 방으로 올라가 잠자던 부인과 딸을 한꺼번에 공격했지만 이미 끝이 부러지고 휘어버린 회칼로는 제대로 공격하기 어려워서 다시 2층 주방으로 내려와 식칼을 찾았다. 그 사이 경상을 입은 두 모녀는 도망치고자 사다리를 내려오다가 범인과 마주쳐 마구잡이로 난도질을 당해 사망했다.

이후 딸의 피가 묻은 휴지가 발견되었는데 도망간 사이 부인이 딸의 상처를 치료한 듯하였다. 일가족은 평화롭게 살던 자신의 집에서 갑자기 침입한 살인범 때문에 공포에 떨며 참혹하게 명을 다한 것이다.

특이하게도 범인은 회칼로 찌를 때 일반적인 살인사건에서와는 달리 위에서 아래로 찌르는 방법을 사용했다. 즉 칼을 역수로 쥔 채 내리찍는 방식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3. 용의자 정보

3.1. 범인의 특징

파일:external/s9.postimg.org/crm11122902020002p1.jpg
  • 신장 175cm 전후, 허리둘레는 83cm[3] 전후.
  • 범행 시 미키오와의 몸싸움으로 손을 다쳐 묻은 혈액으로 A형이라고 판명.
  • 경시청 추정 1965년에서 1985년생(사건 당시 15세~35세).
  • 범행 수법으로 보아 대담하며 뻔뻔함. 윗옷을 벗어 가지런히 접어놓은 것으로 보아 꼼꼼한 성격.
  • 피해자 자택에서 지문 수십 개가 나왔다. 지문은 소용돌이형이었는데 과거 범죄자들의 지문 데이터와 일치하지 않았으므로 전과자는 아니라고 추정함.
  • 피해자들의 상처들을 분석해 봤을 때 범인은 오른손잡이로 판단됐다. 따라서 오른손에 상처를 입었을 확률이 높다.

4. 범인의 유류품

범인은 유류품을 너무나도 많이 남겼지만 검거할 만한 실마리는 찾을 수 없었다.
  • L사이즈의 나그랑 셔츠
  • 유니클로의 L사이즈 나일론제 검은 에어텍 재킷(주머니 속에서 특정 해변의 모래와 버들잎 낙엽, 꽃가루, 애완용 새의 똥 등의 흔적이 발견.)
  • 검은 돈피 털장갑(안쪽에 범인의 것인 듯한 A형 혈액형 흔적)
  • 녹색바탕에 빨강, 주황 실선이 들어간 체크무늬 머플러 (130 x 30cm, 제조사를 알 수 없는 염가품)
  • 회색 크로셰(버킷햇) 모자[4]
  • 흉기로 사용된 칼날 길이 21cm 회칼 (후쿠이현 제조품)
  • 무인양품의 검은 손수건 2매 (45 x 45cm)(프랑스 기라로쉬제 Drakkar Noir 향수를 뿌리고 잘 다려 줄을 잡았음)
  • 힙색(오사카부의 한 업체에서 생산)
  • 족적에서 영국 메이커 슬래진저의 280mm 테니스화[5](제조국은 대한민국)를 신었다고 판명.

4.1. 범인의 이상한 점

범인은 범행 후 자택 안에서 일가족의 물건들을 사용하고 생리활동을 하는 등 극히 대담하고 엽기적인 행동들을 보였다.
  • 일가족을 살해한 뒤 피해자의 자택 냉장고에서 플라스틱 용기에 든 음료와 멜론, 아이스크림 5개 가량을 꺼내어 먹은 흔적 발견.
  • 범행 중에 을 씹고 있었다.
  • 오른손에 상처로 생긴 출혈을 자택에 있던 생리대를 이용해 막는 방법을 썼다. 생리대는 본디 피를 흡수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재질이기 때문인 데다 여성의 질은 감염에 민감한 편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위생적으로 제작되는지라 상처 감염에도 안전하다. 그러나 이런 지식은 주로 도시생존술 같은 특별한 분야에서나 가르친다고 한다. 물론 인터넷 같은 곳을 뒤져서 알았을 수도 있으나 굳이 지혈법을 검색해서 찾아볼 만할 정도로 중요한 지식이라고 보기 어렵다.
  • 범행 후 자택에서 대변을 본 것으로 확인됐다. 심지어 변기 물을 내리지 않아 대변이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시사통신의 2010년 12월 24일 보도에 따르면 대변에서 검출된 고마아에(胡麻和え, 야채에 참깨를 넣고 무친 음식)는 가정 내 음식물이나 부검 결과 피해자들의 위에 있던 내용물이 아님이 확인되었다.
  • 2층 거실 소파에서 수면을 취했다.
  • 2층 거실 소파에서 신용카드와 수첩, 은행 예금통장, 운전면허증 등 생년월일이 표시된 서류가 분류되어 있었다.
  • 찬장과 책상의 거의 모든 서랍은 아래서부터[6] 순서대로 열려 있었고 욕실의 욕조 안에는 영수증이나 서류, 타월, 쓰레기 등이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집 안을 탐색하고 쓸모없는 물건은 욕조에 버렸다고 추정된다. 욕조에 어질러진 서류와 광고지들은 가위나 손으로 찢긴 채로 발견되었다.
  • 1층 서재에 있던 컴퓨터로 인터넷을 한 흔적이 발견됐다. 아이스크림은 인터넷을 하는 중에 먹은 것으로, 스푼을 사용하지 않고 컵 용기를 손으로 움켜쥐며 입으로 먹었다는 특이점이 보였다. 인터넷 기록은 피해자의 회사 사이트와 대학 연구실 홈페이지 등이었으며 극단 사계의 무대 티켓을 예약하려다 실패했을 가능성이 있다. 인터넷을 한 뒤 콘센트를 빼서 전원을 껐다.
    인터넷에 접속한 기록은 2번이다. 첫 번째는 오전 1시 18분, 2번째는 같은 날 오전 10시 2분 아내의 어머니가 전화를 걸기 직전까지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범인은 바로 도주하지 않고 10시간 동안이나 집 안에 머물렀다고 처음엔 추정했지만 이후의 조사에서는 2번째 인터넷 접속은 컴퓨터가 오작동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 추정을 바꾸었다. 재현 실험 결과에 따르면 마우스가 어떤 충격이나 움직임에 의해서 떨어지는 바람에 컴퓨터가 접속되었던 듯하다. 31일 새벽에 피해자 집의 불이 꺼졌다는 증언도 나왔다. "새벽에 수상한 사람이 있었다"는 목격담이 있으므로 새벽 시간에 도주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 마디로 사람을 4명이나 죽여 놓고 거기서 음식을 먹고, 화장실을 쓰고, 컴퓨터를 사용해 연극표 예매를 시도하고, 잠까지 잔 것이다.[7] 집을 뒤지고 서류들을 분류한 것은 범행 후 무언가 목적이 있어서 한 행동이라면 납득이 가지만 나머지 행동들은 엽기적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하다.

4.2. 목격 정보

사건 발각 당일 오후 5시 20분 도부닛코역 도착 토부 열차 안에 오른손에 반창고를 붙인 남자가 있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남성의 외형은 30세 정도로 신장은 약 170cm였고 말랐으나 몸집이 컸으며 녹색의 룩색을 메고 검은 다운 재킷에 청바지와 하얀 운동화를 신었다고 한다. 사건이 일어난 직후 제보가 이루어졌으나 본격적인 조사는 10개월 후에 시작되었다.

조사 결과 남성의 부상은 오른손 뼈가 보일 정도로 깊은 상처였다고 한다. 그는 아사쿠사발 쾌속 열차에서 승객 20명과 함께 하차했으며 역 사무실에서 역무원에게 치료를 받았다. 상처의 원인을 묻자 "열차 안에서 칼을 떨어뜨려 손이 베였다."고 답했다고 하지만 열차 안에서 혈흔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단순히 칼을 떨어트려 베인 정도로 큰 상처가 생길 리가 없으니 거짓으로 추정된다.

5. 일본 내 '범인 한국인설'과 혐한 선동

이 사건의 범인에 대해서 일본 내에서 키워드를 검색하면 반드시 '한국(韓国)', '그 나라(かの国)', '이웃나라(隣国)', '재일 코리안(在日コリアン)' 과 같은 연관검색어가 등장하며 넷 우익 등 매체에서 범인이 한국인임을 거의 기정사실처럼 여기는 것을 찾아볼 수 있으나, 실제로는 범인이 한국인이라는 물증은 전혀 없으며, '흉악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재일 한국인' 과 같은 인종주의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가 섞인 주장이다.

5.1. '범인의 신발, 힙색이 한국 제품'이라는 주장

범인이 신었던 신발은 영국 브랜드 '슬래진저(Slazenger)'로 한국의 메이커가 1998년 10월부터 2000년 11월 사이에 4,530켤레를 제조하여 판매했다. 신발을 제작한 곳은 중국 길림성연변 조선족 자치주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가방 표면에 묻어 있던 세제가 일본에서 판매하지 않은 종류인 데다 안에서 검출된 모래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게 나타나 미국인이거나 미국과 관계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범인은 '일본 이외의 나라에 갔다 온 적 있는 인물'로 추정하기도 했다.

범인이 신고 있던 신발 사이즈는 한국 사이즈로 28cm 또는 일본 사이즈 27.5cm다. 범인이 한국인임을 주장하는 일본 내 가십 매거진과 인터넷 뉴스에서는 '당초 28cm 사이즈는 일본 내에서 판매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신발 외곽이 한국 사이즈 28cm와 같은 27.5cm의 물건은 사실은 일본에서도 판매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유류품으로 남겨진 힙색이 한국제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간토 지역의 할인매장에서 판매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경시청 공식 발표문에는 힙색과 모자가 한국제라는 말은 없다. 이는 이 사건이 입소문을 타고 돌면서 루머가 더해지며 생겨난 가짜 뉴스 중의 하나다.

5.2. 일본인 작가의 팩트체크 없는 '프로파일링' 주장

일본의 저널리스트 이치하시 후미야(一橋文哉)는 2015년 《세타가야 일가 살인사건, 15년째의 새로운 사실(世田谷一家殺人事件 ―15年目の新事実―)》, 2017년 《세타가야 일가 살인사건, 한국 마피아의 암살자(世田谷一家殺人事件 韓国マフィアの暗殺者)》 와 같은 책을 출간하여, 이 사건의 범인은 재일교포 출신으로 지하세계에서 암약하는 부동산 중개인이자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진 46세 카네다 히데미치(金田秀道)라는 인물이고[8] 이 자에게 사주를 받아 범행을 실행한 자는 이인은(李仁恩)이라는 이름의 32세 경기도 수원시 출신 남자라고 주장했다. 즉, 김수도가 교사범이고 이인은이 정범(범죄실행자)이라는 것이다.

이치하시는 '자신이 유명한 사건을 탐사해서 비밀을 밝혀내는 기자'라고 주장하며 이에 대한 글을 쓰는 민간인 작가로, 와세다대학을 나온 것 외엔 상세한 프로필이나 정보가 알려져 있지 않으며 관련 분야에서 학력이나 경력이 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는 대부분 "내가 몰래 해당 사건의 범인을 단독으로 만나 봤다"거나 "새로운 증거나 세기의 특종거리를 찾아냈다"는 식의 수식어를 붙여서 책을 내지만 수사기관의 자문을 받기는 커녕, 언론에서 거의 다루어지지도 않는다. 그다지 신용할 만한 저널리스트가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자신이 외부로 노출되길 꺼리는지 기자 인터뷰도 만남도 모두 거절하고 모든 질문은 출판담당자를 통해서만 회신한다.

그가 '이인은' '김수도'라는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한 7가지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범인이 신었던 27.5, 28cm 테니스 슈즈 슬레진져는 한국 한정 판매품이었음을 비롯해 힙백이나 모자 등 범인의 유류품은 한국 제품이 많다. 이인은은 서울에 거주하며 자신의 활동권 내에 있는 슈퍼 등지에서 이러한 제품들을 쉽게 구할 수 있다.
2. 현장에 남겨진 점퍼 주머니에서 이인은의 본가가 있는 한국 경기도 수원시 주변의 것과 유사한 토사 입자가 검출되었다.
3. 미야자와 씨 집에서 발견된 지혈대의 라텍스 고무의 파편과 블레이 테스탄트 부츠의 가죽 조각, 심지어 감정 결과 범인이 현관문 열림 자물쇠에 활용한 것으로 보이는 스위스제 육군 나이프는 군대의 장비품으로 판명되었다.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한 경험이 있는 이인은이 소유,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4. 미야자와 씨 집에서 미세한 분말이 검출되었는데 벤제도린이라는 마약으로 밝혀졌다. 이인은 역시 약물 중독자였다는 의혹이 있다.
5. 힙백 안에 부착된 특수한 필름 조각과 티탄산바륨의 미세한 분말이 모두 사용되는 곳은 인쇄 가공 공장인데, 이인은 역시 이 사건 전에 인쇄 가공 공장에서 일했던 바 있다.
6. 이인은은 범인의 유류품과 같은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는 증언이 있었던 데다 악우들에게 자신을 "키드"[9]라고 하고 다녔으며 범인이 손수건에 뿌렸던 향수인 드러커 누어를 애용했다는 정보가 있다.
7. 이인은이 사건 이전인 12월 상순에 연극을 보러 방문한 스기나미구의 연극 스튜디오 주변에서 범인의 지문이 발견되었다.

이상 7가지 공통점을 근거로 경기도 수원시 출신 이인은이란 인물을 이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했다. 이치하시의 말에 따르면 이인은이란 인물은 본래 한국에서 불량 그룹[10]의 리더였던 인물로 미야자와 집안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인물이라고 한다. 다만 카네다 히데미치 즉, 김수도는 이야기가 다르다. 사건 당시 미야자와 가족은 카미소시가야의 공원 확장으로 토지를 도쿄도에 매각하여 1억 수천만 엔이 넘는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일본에도 살인 청부업자가 있지만 꼬리가 밟힐 우려가 있기 때문에 경기도 출신 재일교포 김수도가 같은 경기도 출신인 이인은을 이용해 범행을 사주했다는 것이다. 결국 미야자와 가족의 재산을 노리고 범행을 사주했다는 것이 이 저널리스트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 저널리스트의 주장에는 그 어떤 실제 근거도 없으며, '이인은', '김수도'라는 인물이 실존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인은'과 같은 작명법은 한국에서는 중, 장년층에서조차 보기 드문 이름이며, 흔히 외국인이 '한국인스러운 이름'을 급조할 때 한글의 조음 어감을 알지 못한 채로 만들어내는 작위적인 어감이 강하다. 당장 '이인은'이라는 사람을 구글에서 검색해 봐도 동명이인이 거의 없으며, 있어도 소수 여성의 이름으로만 사용되고 대부분 이 세타가야 일가족 살해 사건 다루는 글 뿐이다.

당시 해당 사건의 수사를 담당했던 일본 경찰 다케치 쓰치다 전 형사는 2019년 미국 ABC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치하시의 주장은 "100%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

5.3. '일본 경찰의 지문 감식' 관련 주장과 모순

일각에서는 "일본 경찰이 감식한 결과 서울시에 거주하는 한국인 남자의 지문과 범인의 지문이 일치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일본 경찰은 사건의 실마리를 잡기 위해 한국으로 조사원을 파견했으나 한국 전과자들의 지문과 대조해 보니 지문이 동일한 전과자 기록은 없었고, 지금도 신규 지문이 등록될 때마다 대조 중이지만 일치하는 기록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정부의 공식 보도자료를 통해 공개된 바가 전혀 없으며, 한국에서도 한국 경찰이나 사법 당국이 일본 경찰과 협조하여 수사를 진행했다는 보도자료가 없다.
파일:KGt1714539943891-850.jpg
한국에서 전 국민의 열 손가락 지문을 수집하여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일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한국의 주민등록 제도에 비추어 생각하면, '만약 그의 지문이 한국인임이 분명하고 서울에 거주한다는 것까지 알 수 있다'면 범인을 못 잡았음이 오히려 이상하다. 심지어 이인은이라는 사람의 실존 자체가 확인되지도 않았는데 애초에 김수도는 그렇다 쳐도 이인은은 흔한 이름이 아닌데 누군지 특정하지 못한다는 것은 실존하는 인물인지조차 의문스러운 부분이다.

한국에서는 주민등록증을 만들 때 지문을 뜨기 때문에 성인이라면 지문이 모두 등록되어 있으므로, 여기서 안 나온다면 당연히 한국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혐한 네티즌들은 이러한 한국의 지문 수집 제도를 알지도 못하거나 한국이 살인사건을 '은폐'한다고 주장하며, 지금도 한국이 지문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언플하고 있다. 한국에서 반일 감정 때문에 범죄 용의자의 지문정보를 제공하지 않을 이유도 없거니와 사건이 일어난 2000년에는 이미 일본에 외국인이 입국할 때는 지문날인을 했기 때문에 저 주장대로라면 한국에 부탁할 것도 없이 자기들 출입국 기록만 대조해 봐도 된다. 거기에서 아무것도 안 나온 이상 범인은 외국인일 리가 없다는 뜻이다.

5.4. 응급치료를 잘 해서 한국인이라는 주장

다른 일본 뉴스에서는 "범인은 젊은 남자인데, 일본의 젊은 남자는 칼 쓰는 법이나 지혈법을 모른다. 한국은 징병제니 대부분 칼 쓰는 법과 응급치료법에 익숙할 것이다."라는 것을 범인이 한국인이라는 근거라고 내세우고 있다. 사실상 일본 경찰이 자기들의 무능함을 한국 정부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당시 징병제를 실시하던 나라는 아시아에 한국 말고 대만도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일본에는 직업적으로 칼 쓰는 법과 응급치료법에 익숙한 사람들이 잔뜩 있다.

5.5. '한국인처럼 생긴 얼굴상'이라는 혐한 주장

파일:external/s15.postimg.org/3119.jpg

더 황당한 것은 미해결 사건의 범인을 추측하는 아사히 TV의 'TV의 힘'에서 일본에 대해 전혀 모르는 미국초능력 조사관(?)을 불러 용의자의 몽타주를 그려 보게 했는데 얼굴의 형상이 '광대가 진 일본인 얼굴이 아닌 한국계 얼굴'이라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위에 빨간 자막이 "일본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한국계의 얼굴" 이라는 뜻이다.

6. 인터넷의 범행 보고?

2000년 12월 27일 2ch의 익명 게시판 '애완동물 너무 싫어 판'에서 현 사건의 범행 예고로 보이는 스레드가 올라왔다. 게시판의 170번 글로 어릴 때부터 동물들을 학대해 죽이는 경험을 늘어놓으며 마지막엔 "최근엔 인간을 갈라서 내장을 보고 싶다. 가부키초에서 일어난 비디오 가게 폭발사건의 용의자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은 근처에서 행복해 보이는 가족을 보면 오이타 일가 상해 사건처럼 망쳐버리고 싶다. 실행일은 12월 31일 오후 11시 59분이다. 21세기가 오기 전에 빨리 죽여버릴까 생각하고 있다."[11]는 글을 남겼다.

사건 직전인 12월 26일 'J9'라는 닉네임의 인물이 'H씨에게, 이번 일에서 <학대 행위 대책(残虐行為手当て)>은 가지고 계신가요?'라는 글을 쓰자 'H'라는 인물이 '바나나는 과일이기 때문에 간식엔 안 들어갑니다'라고 답변했다.

사건 발각 직후인 2001년 1월 4일 오전 9시 47분경 'J9'가 '입금 확인했습니다. 저항을 만났지만 물리적 소거는 성공했습니다. BuP는 서쪽 ひ32b에 맡겨놓겠습니다. 참고로 유류품은 어원(御苑)[12]에서도 팔고 있습니다'라는 수수께끼의 메세지를 남겼고 'H'에게서 '데이터 확인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답장이 왔다.

사건 조사 관계자 측도 이 게시글을 예의 주목했다. 'J9'는 '학원(일본어로 쥬쿠)'이라는 의미로 미야자와의 아내가 자택에서 학습 학원을 운영한 것에서 따온 사건의 실행범이며 'H'는 '범인(한닌)', '진짜 범인(혼보시)'의 약자로 살해를 사주한 공범으로 추측했다. 글이 쓰여진 시기가 너무 잘 맞는 데다 '물리적 소거', '유류품', '학대 행위 대책' 등 단어가 이 사건과 관계가 없다고는 말하기 힘들 정도로 맞아떨어지는 내용이라 더욱 의심을 샀다. 참고로 추측이지만 아마 ひ32b는 ひ 3(み)2(つ)(秘密, 비밀)을 뜻하는 비밀 거래 장소가 아니었을까 예상된다.

조사원은 게시판을 세운 인물의 사정청취를 벌일 예정이었으나 2ch는 특성상 일체 통신 기록이 남지 않는 시스템이라 조사의 단서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7. 그 밖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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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를 찾는 전단

평소 피해자 가족은 정의감이 강한 성격으로, 자주 규칙 위반자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자택 근처 스케이트 보드를 탈 수 있는 광장에서 밤에도 그곳을 이용하는 스케이트 보더가 있어 피해자 자택과 소음 문제로 다투고 있었으며 뒤편에 있는 공원에 드나드는 폭주족들과 트러블이 일어났다. 목격자 증언에 따르면 사건 당일 밤에도 싸우는 것이 목격되었다.

사건 현장의 서쪽에는 남북으로 센카와(仙川)라는 조그만 시내가 흐르고 시내의 서쪽 바로 옆으로 시냇물을 따라 산책로가 있다. 그런데 사건이 일어난 지 꼭 100일이 되는 2001년 4월 9일 센카와 시내의 서쪽 산책로, 사건 현장과 가까운 곳에 동남아시아화강암으로 만든 지장보살입상이 발견됐다. 발견된 석조 지장보살입상은 총 높이가 59cm, 무게는 19.5kg으로 상당히 크고 무거웠다. 보살상의 높이는 약 50cm지만 높이가 11cm 남짓한 연꽃 모양 석조 대좌(臺座)[13]가 따로 있어서 보살상과 대좌를 결합하는 형식이었다. 단순 계산으로는 보살상 높이가 50cm에 대좌 높이가 11cm라면 총 높이가 61cm가 되어야 하지만 대좌에는 보살상을 안치하라고 만든 움푹 판 부분이 있기 때문에 보살상을 실제로 안치한 총 높이는 59cm가 되었다. 그런데 대좌의 바닥과 (보살상을 올리는) 결합면 쪽에 한자 육(六)으로 보이는 문양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이 지장보살입상은 피해자의 집을 바라보는 위치로 있었다는데 누가 왜 가져다 놓았는지는 모른다.

불교에서 지장보살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좋은 곳으로 이끌어준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필 이런 참혹한 사건이 벌어진 곳 근처에 사건이 일어난 지 100일째 되는 날 사건현장을 바라보는 위치에 지장보살상을 놓았음이 의미심장하다. 물론 범인과 아무 상관이 없는 제3자가 다만 죽은 이들을 가련하게 여겨 지장보살상을 가져다 놓았을 수도 있지만 범행과 관련 있는 자가 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게다가 보살상이 상당히 크고 무거워서 발견된 자리에 가지고 오려면 꽤나 힘을 써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 경시청은 이 지장보살상에 대해 아는 사람도 찾는 중이다.

피해자 일가족은 공원 확장으로 집을 팔고 이사갈 예정이었는데 이때 부동산업자들로부터 보상보다 많이 받게 해 줄 것이니 집을 넘기라는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피해자 가족은 끝내 거부했다고 한다.

8. 사건 발생 전 예고?

피해자 집 바로 옆집에 살던 미야자키 부인의 친정어머니는 집 앞 도로에 계속 차가 서 있음을 목격했다.

사건 3일 전 피해자 집의 형세를 살피던 40대 중반의 의심스러운 남자가 목격되었다.

사건 발생 하루 전 29일 15시경 현장에 남아 있던 가방, 운동화, 비슷한 복장을 한 젊은 남자가 세이조가쿠엔마에역(현장에서 1.5km 거리)에서 목격되었다. 목격한 주부에 따르면 12월이라고 하기엔 얇은 옷을 입었다고 하며 이 남자는 사건 당일 30일 21시경 피해자의 집 근처에서 목격되었다고 한다.

피해자 가족이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신자였고 종교와 갈등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9. 사건 이후

사건 현장은 사건 전 공원 토지 확대를 위해 철거될 예정이었으나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계획이 흐지부지되었다. 주변 주택들이 모두 허물어진 후에도 사건 현장은 허물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 크게 다루어질 정도의 강력 사건이기 때문에 세타가야 근방에 방범등과 누르면 바로 신고되는 신고장치기계를 설치했으며[14] 현재도 피해자 자택엔 방범설비가 철저히 돼 있고 경찰관이 매일 순찰을 돌고 있으며 단순히 현장에 접근만 해도 의무조사를 받는다고 한다.

유족들은 일본에서 일어난 강력 범죄 사건의 유족들과 함께 공소시효의 폐지를 위한 '살인사건 피해자 유족 모임', 통칭 '소라노카이(宙の会)'를 결성했다. 2010년 살인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하기 위한 형사 소송법이 성립되어 해당 사건 및 과거의 미해결 사건들도 시효가 폐지되는 결과를 이루었다.

경시청은 2007년 현 사건의 유력 정보를 제공하는 자에게 현상금 최대 300만 엔을 내걸었으며 '사건 조사를 협력하는 모임'이라는 사적 단체에서 최대 2천만 엔(약 1억 8,200만 원)의 현상금을 내걸었는데 이는 일본 현상금 사상 최고금액이라고 한다.

사건 이후 건물의 진입로는 차단되었다. 2015년 3월에 촬영된 구글 스트리트 뷰의 사진을 보면 건물 주변에 가림막이 추가되었는데 건물 노후화 때문에 붕괴의 위험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2019년부터 도쿄도 경시청에서 붕괴 위험을 이후로 건물 철거를 하기 위해 협의 중이긴 하지만 유족들과 시민단체가 지속적으로 반대하는 모양이다[15]. 2020년에는 다시 가림막이 없어졌다. ## 그동안 경시청은 조사원을 연인원 23만 명이나 투입했고 지금도 38명이 매달려 있다. 현장 보호를 위해 24시간 경찰관이 상주해 사건 현장을 지킨다. ###



2020년 1월 유가족들이 허가하여 살인현장이 공개되었다.

한국 방송 프로그램인 당신이 혹하는 사이에서 해당 사건을 다룬 바가 있다. 영상에서는 전반적으로 초동수사 미흡과 무작정 범인을 한국인으로 본 것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다루었다.


[1] 어머니와 언니 부부가 거주한 건물은 1975년 이전부터 존재했고 바로 옆에 붙은 사건이 일어난 미야자와의 자택은 1980년대 초반에 증축되었다. 1990년 5월 친가 측과 미야자와 부부는 이 땅과 건물을 공동구매하여 입주했다.[2] 미야자와 부부의 막내아들은 발달장애가 있어서 괴성을 지르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주변의 이웃에 폐를 끼치지 않고 마음 편하게 육아를 할 수 있는 조금 황량한 당시의 거주지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다른 이웃들보다 이사를 최대한 미룬 이유도 육아 문제 때문이었다고 언니가 증언하였다.[3] 약 33인치[4] 털실로 짠 것이며 색깔은 회색 흑색 줄이 있다.[5] 농구화 타입도 가지고 있다.[6] 다급하게 물건을 터는 경우 보이는 대로 위에서부터 뒤지기 마련이다. 즉 전문 털이범들이 아래에서부터 연다.[7] 따라서 범인이 이 가족들의 이동 시간이나 일정을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을 1명도 아니고 일가족 전체를 죽여 놓고 태연히 누가 올지 모르는데 잠을 자는 살인범이 몇이나 될까.[8] 카네다 히데미치는 일본에서 쓰는 통명이고 본명은 김수도다. 경기도가 고향이라고 한다.[9] 해적 캡틴 키드라는 뜻이다.[10] 일진 또는 조직폭력배[11] 원문: 最近では人間を切り裂いて内臓を見たいとも考える。あの歌舞伎町で起きたビデオ屋爆破事件の容疑者の少年が供述していたように。今では隣の幸せそうな家族を見るとあの大分一家殺傷事件のようにしてしまいたいとも思う。決行日は12月31日午後11時59分だ。21世紀がやって来る前にちゃっちゃと殺ってしまおうか考えている。[12] 일본 황실 소유의 정원. 신주큐교엔, 아카사카교엔 등이 있다.[13] 불교에서 부처나 보살 등의 상을 안치하고자 특별히 만든 자리를 뜻한다. 연꽃 모양을 한 연화좌(蓮華座) 형식이 가장 흔하지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형식이 있다.[14] 2017년에 전부 철거되었다.[15] 기사(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