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 문창석(文昌錫) |
자 / 호 | 사헌(士憲) / 겸산(謙山) |
본관 | 남평 문씨[1] |
출생 | 1861년 8월 27일 |
경상도 삼가현 대평면 오동동 (現 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 성리 3구)[2] | |
사망 | 1926년 3월 15일[3] |
묘소 | 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 성리 3구 오동골 |
상훈 | 건국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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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6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문용은 1861년 8월 27일 경상도 삼가현 대평면 오동동(현 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 성리 3구)에서 아버지 문재화(文在和, 1841 ~ 1907. 4. 12.)와 어머니 탐진 안씨(耽津 安氏, 1838 ~ 1911. 12. 2.)[4] 사이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자식 없이 요절한 큰아버지 문재욱(文在郁, 1838 ~ 1860. 6. 5.)에 양자로 입적되었다. 이후 인천 이씨 이규석(李奎錫)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1명[5]을 두었다. 일찍이 허유(許愈)와 곽종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그는 1919년 3월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복한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 유림과 김창숙 등의 영남유림 137명이 대표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영남유림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하였다. 이들은 '파리장서'를 통해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고종황제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1919년 4월 12일 경상북도 성주군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당시 독립청원서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이 붙잡히는 바람에 발각되었다. 이 때문에 문용도 일경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다만,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하지 않았다.
출옥 후 옥고의 여독으로 고통을 겪던 중 1926년 3월 15일 사망하였다.
199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 『겸산문집(謙山文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