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생 정치인에 대한 내용은 문석주(1962) 문서 참고하십시오.
<colcolor=#fff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99년 4월 4일 |
경상남도 웅천군 죽곡리 어은골 (現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죽곡동 어은동) | |
사망 | 1934년 1월 26일 (향년 36세) |
경상남도 창원군 진해읍 (現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
이명 | 문석주(文碩柱) |
직업 | 독립운동가 |
학력 | 웅천 개통학교 (졸업) 와세다대학 (정경과/졸업) |
서훈 | 건국포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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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2. 생애
1899년 웅천군 죽곡리 어은골에서 문기상(文基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주기효가 새운 진해의 웅천 개통학교(現 웅천초등학교)를 졸업했다.1919년 3.1 운동 당시 웅천면 남문리(現 남문동)에 거주하고 있었다.
웅동면(現 웅동1동)의 만세운동 계획은 3.1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1919년 3월 중순경 웅동의 계광학교(啓光學校) 교사였던 주기용[1]이 절친하게 지내던 정운조(鄭雲朝)·김병화(金炳和) 등에게 만세운동을 제의하면서 시작되었다. 주기용의 제의에 즉각 찬성하며 4월 3일을 의거일로 정하고, 웅동면 마천리(馬川里)에 위치한 면사무소 앞에서 봉기해 읍내에 이르러 웅천리의 시위 행렬과 합류하기로 계획하였다. 동지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필요한 격문과 태극기 등을 철야로 인쇄·제작하는 한편, 다른 동지 규합에도 힘을 쏟았다.
그런데 거사를 하루 앞둔 4월 2일 정운조·김병화와 함께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던 중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붙잡혔다. 이 때 일제 경찰의 조사 과정에서 끝까지 비밀을 누설하지 않아, 4월 3일 거행된 만세운동이 차질 없이 치러질 수 있었다.
1919년 5월 20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개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풀려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경과를 수학하며 도쿄 유학생 회장을 역임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는 동경한인노동조합(東京韓人勞動組合) 총연맹의 총무를 맡아, 재일한국인 노동자의 권익 옹호를 위해 일하였다.
1928년 귀국하여 조성업·김창업 등과 함께 웅천의 청년운동을 지도하면서 청년회관을 건립하는 한편, 웅천청년회·웅천소작조합 등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전개던 중 다시 붙잡혀 1931년 5월 19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여러 차례에 걸친 수감 생활로 건강이 나빠져 1934년 만 3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3. 여담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2017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