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득은 1896년 서천군 종천면 지석리에서 태어났다. 정원득은 1925년 흥림저수지 축조 현장에서 다이너마이트로 암반을 폭파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1925년 9월 어느 날, 청주시에 사는 그의 손위 처남인 김응선(독립운동가)이 그한테 찾아왔다. 김응선은 충북에 살고 있었으며 그의 친구인 전좌한과 함께 창의단 단원으로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김응선과 전좌한은 창의단의 거사 계획에 따라 조선총독부, 경성부청, 조선신궁, 조선은행, 종로경찰서 등을 동시에 폭파하기로 하고 방법을 찾던 중 매제인 정원득을 찾아온 것이다. 매제인 정원득이 공사장에서 발파작업을 하고 있음을 알고 다이너마이트를 빼돌리기 위해서였다. 정원득은 김응선의 뜻에 따라 발파작업이 있는 날이면 몰래 다이너마이트를 빼돌렸다. 그는 다이너마이트 10개, 뇌관 10개, 도화선 1장 5척을 확보했다. 김응선은 전좌한의 집 골방에서 폭탄 6개를 제작 완료하고 옥천군이원면과 금산군의 경계에 있는 진위산 속에서 폭발 실험을 하였다. 폭파에 가담할 단원들이 만주에서 국내로 들어오기 어려우므로 국내에서 이를 확보키로 했다. 이들은 경성으로 무기를 반입하는 일, 거사에 가담할 단원의 확보 등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김응선은 같은 마을에 사는 송암우, 정명옥, 김운용 등을 경성 구경을 시켜준다고 포섭해 1월 28일 옥천 이원역을 출발해 그날 밤 용산역에 도착했다. 다음 날, 경성구경을 시켜준다며 조선총독부 경성부청 조선신궁 조선은행 종로경찰서 등을 실지로 답사하고 청진동 여관에 투숙했다. 이튿날 폭파장소를 재확인한 뒤 광화문 중식점에서 최후의 기념 회식을 마친 후 일행에게 계획을 말했다. 거사일은 다음 날인 1월 31일 새벽으로 정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이어 일제 헌병대가 이를 눈치채고 이들의 숙소를 급습했다. 이 과정에서 송암우, 정명옥, 김운용이 체포된다. 서천 사람 정원득과 그의 처남 김응선은 다시 서울의 관공서를 폭파할 계획을 세우고 중국 봉천으로 건너가 창의단 조직을 재건한 후 국내에서 활동하다 1926년 7월 경기도경찰부에 체포됐다. 정원득은 징역 4월을 받고 김응선은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그 이후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1년 정원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