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9-10 23:37:48

안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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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 안재숙(安在璛) 또는 안소(安塑)
자정(子精)
분암(憤庵, 墳庵) 또는 야계(倻溪)
본관 순흥 안씨[1]
출생 1880년[2] 12월 8일
전라도 곡성현 오지면 대리
(현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 대동마을)[3]
사망 1957년 2월 22일[4]
묘소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봉조리 현조마을
상훈 건국포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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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03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안재창은 그의 6촌 재종형(再從兄)이다.

2. 생애

1880년 12월 8일 전라도 곡성현 오지면 대리(현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 대동마을)에서 아버지 안홍섭(安洪燮, 1854. 10. 17 ~ 1925. 9. 25)과 어머니 함안 조씨(? ~ 1893. 5. 10)[5]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그의 영특함을 알아본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으로부터 자정(子精)이라는 자(字)를 받았고, 20세 되던 1899년에 면우 곽종석(俛宇 郭鍾錫)의 문하에 들어가 한문을 수학했다. 이후 1901년 곡성군 오지면 덕양리(현 곡성군 오곡면 덕산리 덕양마을) 51번지에 완계정사(浣溪精舍)를 건립하고 후진양성을 시작했다.

경술국치 후 1911년 전 호남 의병장 이석용(李錫庸)이 의병활동을 재개하려 군자금을 모집할 때 목화 20근을 군자금으로 제공했고, 또한 이석용이 의병활동의 거점조직으로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團)을 조직하자, 이듬해인 여기에 입단해 이듬해인 1912년 남원군지역 단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913년 이석용이 전라북도 임실군에서 조선인 형사 김대형(金大亨)에게 체포되자, 곧 귀향해 1913년부터 다시 완계정사에서 후학교육에 전념했다. 이후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비밀리에 군자금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금하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했고, 1941년에는 의병장 이석용의 추모비를 건립하려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57년 2월 22일 별세하였다.

200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1] 참찬공파 28세 토(土)변 재(在) 항렬. 족보명은 안훈(安壎).[2] 순흥안씨대동보 2권 640쪽에는 1881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3] 순흥 안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안재창도 이 마을 출신이다.[4] 순흥안씨대동보 2권 641쪽에는 1958년 2월 12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5] 생육신 조려의 후손으로, 조성순(趙性順)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