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8월 5일, 경성부 종로경찰서에서 촬영된 사진. |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호 | 운곡(雲谷) |
본관 | 거창 신씨[1] |
출생 | 1897년 3월 8일 |
충청남도 연산군 모촌면 남산리 (현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남산2리 당골마을)[2] | |
사망 | 1947년 10월 16일 |
충청남도 대전부 대흥동[3] 충청남도 도립의료원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217호 |
상훈 | 건국포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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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9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97년 3월 8일 충청남도 연산군 모촌면 남산리(현 논산시 양촌면 남산2리 당골마을)의 양반가[4]에서 아버지 신영흡(愼寧洽, 1859. 1. 10 ~ 1930. 8. 20)[5]과 어머니 파평 윤씨(1868. 2. 20 ~ 1936. 8. 23) 사이의 3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6] 위로 맏형 신채성(愼彩晟, 1879. 1. 6 ~ 1960. 8. 3)[7]과 둘째 형 신기성(愼杞晟, 1886. 4. 17 ~ 1967. 3. 29)[8], 아래로 첫째 여동생 신성(愼晟, 1900. 12. 29 ~ ?)과 둘째 여동생 신덕희(愼德凞, 1909. 1. 27 ~ ?) 등이 있었으며, 출생 후 양촌면 모촌리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고, 그곳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살았다.#그는 일찍이 상경하여 경성고등보통학교 부설 교원양성소 제1부[9]에 입학, 1914년 졸업하였다. 같은 해 4월 1일, 공립보통학교 훈도에 임명되어# 전라북도 진산공립보통학교에 발령받은 것을 시작으로, 1917년부터 1918년까지 군산공립보통학교 훈도, 1919년 충청남도 연산공립보통학교 훈도, 1921년부터 1922년까지 강경공립보통학교 훈도를 역임하는 등 10여년간 교원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사회주의 사상에 눈을 떠 교직에서 은퇴하고 이후 서울청년회 및 경성노동회(京城勞動會) 등에 가입하여 대중운동과 사회운동을 통한 항일투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25년 1월 20일 군산청년회·군산노동연맹회·민중운동사가 연합 주최한 레닌 1주기 추도강연회[10]에서 「朝鮮(조선) 農村(농촌)에서 본 레닌」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같은 해 4월 전조선노농대회(全朝鮮勞農大會) 준비위원 및 자격심사위원이 되었고, 또 조선사회운동자동맹(朝鮮社會運動者同盟) 상무위원에 취임하였으며, 전진회(前進會) 및 국제청년의 날 기념협의회 준비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이 무렵 모스크바 공산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로 갔다가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6년 2월 귀국하여, 같은 해 3월 조선공산당 대전 야체이카[11] 책임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같은 해 7월 25일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같은 달 10일부터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었으며, 1928년 2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150일 통산)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8년 2월 1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1928년 9월 16일 출옥하였는데, 같은 해 9월 18일 조선공산당 동지들이 당일 출옥한 신표성을 비롯한 20여 명의 출감자들을 위한 환영회를 식도원(食道園)에서 개최하려다 금지당하는 일도 있었다.# 1930년 2월 3일, 동아일보사 논산지국에서 논산군 양촌면 인천리에 양촌분국을 설치하자 신표성은 고문에 임명되었다.#
1932년 5월경 논산군 양촌면 인천리에서 농민 70여명이 머슴계를 조직하고자 양촌주재소에 집회신청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흥분한 군중들이 적기를 흔들며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격렬히 항쟁하였던, 이른바 적기 시위사건이 있었다. 이때 이들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그해 8월 30일 대전지방법원 강경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혐의없음으로 불기소처분을 받고 곧 석방되었다.
그는 1933년 9월 20일경에도 양촌면에서 소작계를 조직해 농민을 선동하고 의식화했다는 혐의로 강경경찰서에 또 다시 체포되기도 하였다.# 이후 조용히 지내다가 1944년 여운형의 건국동맹에 참여하여 충청남·북도지부 책임자로 선정되어 창씨개명 반대 투쟁을 전개하는 등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8.15 광복을 맞았다.
해방 후 1946년 여운형·백남운 등과 함께 사회노동당 창당에 관여하여 그해 11월 12일 개최된 임시중앙위원회에서 상임중앙위원 선임을 위한 전형위원에 선출되었다.# 11월 15일에는 상임위원 및 농민부 책임위원에 선임되었으며#, 같은 날 개최된 제1회 상무위원회에서 공산당대회파 상임위원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정세상 사회노동당이 불리해지자 탈당하고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하였다. 1947년 10월 미군정 포고령 위반으로 검거되어 취조 도중 병세가 악화되어 10월 16일 충청남도 대전부 대흥동(현 대전광역시 중구 대흥동) 충청남도 도립의료원에서 별세하였다.#
200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논산시 벌곡면 어곡리에 안장되어 있다가 2010년 4월 2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
3. 여담
- 장남 신극범(愼克範, 1932. 11. 17 ~ )[12]은 미국 미시간 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한양대학교 사범대학 학장, 청와대 교육문화수석비서관, 한국교원대학교 총장, 광주대학교 총장, 대전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했다.
[1] 참의공파 30세 성(晟) 성(珹) 항렬.[2] #[3] #[4] 1928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출생지가 논산군 노성면, 신분이 '상민(常民)'으로 기재되어 있다.[5] 초명 신영태(愼寧泰). 1908년 11월 16일 공립 은진보통학교 전과 부훈도에 임명되었다가, 1910년 3월 18일 사직하였다.[6] 어머니 파평 윤씨는 아버지의 둘째 부인이며, 첫째 부인 고령 신씨(? ~ ?. 10. 26) 신영호(申永浩)의 딸은 슬하에[7] 초명 신의성(愼義晟). 1909년 기호흥학회에서 세운 기호학교 특별과에 재학 중이었다.# 당시 기호흥학회에 금 1환을 의연하기도 했다.#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 후 1916년 5월 충청남도 사립학교 교원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920년 10월 소학교 및 보통학교 교원 제3종 시험에 합격하였다. 그 뒤 양촌공립보통학교에 발령받아 1921년부터 1922년까지 부훈도를, 1923년부터 1926년까지는 훈도를 역임하는 등 10여년간 교원 생활을 하였다. 교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충청남도 대전시 인동(현 대전광역시 동구 인동)으로 이주하여 40년간 의원을 경영하였고 슬하에 4남을 두었다. 이후 충남의약협회장 및 한약종상 재교육 강사 촉탁 등을 역임하였다.#[8]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 근무하면서, 1911년부터 1913년까지 동 직장에서 측량과 기수로, 1914년 측지과 서기로, 1915년에는 측지과 기수, 1916년에는 측지과 기수보로 근무하였다.#[9] 3년 과정[10] 블라디미르 레닌은 1924년 1월 21일 사망하였다.[11] 세포조직[12] 일명 신재이(愼在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