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2-09 21:51:12

홍건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홍건
洪楗[1]으로 오기되어 있다.]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경오(景五) / 남사(南史)[2]
본관 남양 홍씨 토홍계[3]
출생 1838년 4월 1일
경기도 남양도호부
(現 경기도 화성시)
사망 1902년[4] 5월 5일[5] (향년 64세)
경상남도 하동군
묘소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 정도리마을
상훈 건국포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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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말기의 무신.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09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38년 4월 1일 경기도 남양도호부(現 화성시)에서 아버지 홍영운(洪永運, 1801. 10. 5 ~ 1872. 10. 15)과 어머니 아산 이씨(1805 ~ 1832. 11. 19)[6] 사이의 5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872년(고종 9) 무과에 급제해 1891년(고종 28) 12월 30일 풍천도호부사(豊川都護府使, 종3품)에 제수되었으나, 1892년 1월 2일 신병을 이유로 장계를 올려 사직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그해 11월 11일 홍주진영장(洪州鎭營將)에 특별히 제수되어 동학농민군 토벌에 앞장섰다. 《갑오군공록(甲午軍功錄)》에 의하면, '홍주성 전투에서 홍건에게 많이 힘입었다.(洪州之捷, 多賴其力.)'라는 내용이 있어 그가 홍주성 전투에서 군공을 많이 세웠음을 알 수 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난 뒤 단발령이 단행되자, 이에 분노한 김복한은 1896년 1월 12일 향회를 열어 충청도 홍주부(現 충청남도 홍성군) 일대의 유생들을 모은 뒤 명성황후에 대한 복수를 계획했다. 이때 홍건은 이미 관직에서 물러났음에도 귀향하지 않고 이상린(李相麟)과 함께 동참해 1896년 1월 16일 홍주의병진을 조직한 뒤 김복한을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이상린은 그날로 이웃 고을에 통문을 돌려 동지를 모았고, 180여 명의 의병들을 모집해 곧 홍주성을 점령했다. 이때 김복한 의병진은 홍주부관찰사 이승우(李勝宇)를 위협하고 참서관(參書官) 함인학(咸仁鶴)을 핍박해 내쫓았으며, 경무관보(警務官補) 강호선(姜浩善)을 결박해 구타했다. 특히 홍건은 홍주부관찰사 이승우에게 김복한이 작성한 통문을 수락하고 선언할 것을 권유하고, 이승우를 의병진에 반강제로 편입되도록 했다.

그러나 이튿날인 1월 17일 경무관보 강호선과 홍주부관찰사 이승우의 배반으로 김복한·이상린·이설(李偰)·안병찬(安炳瓚)·송병직(宋秉稷)·임승주(林承周) 등 22명과 함께 구금되었고, 결과적으로 홍주의병진은 와해되었다. 이후 2월 13일 한성부로 압송되던 도중 무죄 판결이 내려져 석방되었다가 각지에서 의병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자 이튿날인 2월 14일 다시 체포되어 한성부로 압송되었다. 2월 25일 재판소에서 《대명률》 소송편(訴訟篇)에 '입으로는 호소를 아뢴다고 하면서 곧장 아문으로 쳐들어가 관리를 위협하여 통제한 경우'에 대한 형률에 해당하나 방조범에 대한 징역처단례 제2조로 바뀌어 징역 3년형에 처해지고 부역은 면제되었다. 그러나 2월 27일 고종으로부터 특지를 받아 특별사면되었고, 곧 석방되었다.

석방된 뒤에는 은거하다가 1902년 5월 5일 경상남도 하동군에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 정도리마을에 안장되었다. 저서로 1895년 11월 19일부터 1896년 2월 26일까지 김복한의 홍주의병진에서의 활동사항을 기록한 일기인 《을감일기(乙坎日記)》가 있다.

200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2] #[3] 참의공파(參議公派) 21세 木변 항렬.[4] 최익현의 문집인 《면암선생문집(勉菴先生文集)》 부록 제3권에 수록된 「연보(年譜)」에 따르면, 최익현이 70세 되던 1902년 4월, '하동에 들어가서 제문을 지어 영장(營將) 홍건(洪楗)의 빈소(殯所)에 제사했다.(復入河東, 操文祭洪營將楗殯.)'이라는 구절이 언급된다. 빈소(殯所)라는 표현을 썼으므로 사망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5] 남양홍씨(토홍계)세보 2권 628쪽에 몰년은 미상이나 다만 5월 5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6] 이인회(李寅會)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