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전무영 全武永 | Jeon Mu Young | |
본명 | 전무영 |
출생 | 1941년 10월 25일 |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장방리 909-1 | |
사망 | 1960년 (향년 20세) |
서울특별시 원각사앞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가족 | 누나 석림, 난이, 석순, 미자 |
학력 | 김해한림초등학교 (졸업) 진해중학교 (졸업) 진해고등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신문학과 / 학사) |
상훈 | 건국포장 |
1. 개요
4.19혁명 최초 희생자였다.2. 생애와 성품
1941년10월25일 경남 김해시 한림면에서 아버지 전민진과 어머니 윤삼립의 1남4녀중의 막내 외동아들로 태어나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누나로는 석림,난이,석순,미자가 있다.김해 한림초등학교.진해 중학교.진해고등학교를 졸업하교 중앙대학교 신문학과에 입학했다 성격이 쾌활해서 부모형제 및 친족들과 동창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2.1사건
1960년 4월19일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자유당 독재정권에 대한 항거를 하기로 하고 결성하였다.전무영 열사는 중앙대학교 대표로서 참여하고 앞장섰다. 원각사앞 노상에서 "이승만 독재정권은 물러가라!" 라고 외쳤다가 경찰특공대의 쏜 흉탄으로 부상을 입은후 세브란스 병원에서 가료 중 사망
3. 추모
서울 수유리 4.19혁명민주묘역에는 가묘가 있고 경남 김해시 한림면 장방로493-2번지에는 실묘가 있다. 수유리 민주묘역에서는 국가적인 행사가 매년 열리고 있고 고향 선산에서는 친족들(김해 장방 진말 전씨 종친회)이 모여서 해마다 추모제를 열사님의 묘역에서 지내고 있다.*사진(추모제/매년 4.19혁명일이면 고향 선산에 있는 전무영 열사모역에서는 김해 장방 진말 전씨 종친회에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파일:추모제기념사진.jpg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중앙도서관 앞에는 6인(전무영.지영헌.송규석.서현무.김태년.고병래)의 열사님을 추모하는 의혈탑이 세워져 있다.
진해고등학교 교정에는 전무영 열사님을 추모하는 추모탑이 세워져 있다.
1964년 4월 06일 중앙대학교에서는 전무영 열사님에게 명예 학사학위증을 수여하였다.
4. 참고 자료
- 모태종교는 가톨릭였으며 세례명은 야고브였다. 열사님의 부모형제들이 모두 사망한 후 김해 진말 전씨 종친회에서는 유교를 숭배하는 전통에 따라 유교식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 "전무영 열사는 4.19혁명 최초희생자"라는 사실은 김의환(중앙대 신문학과 졸업/前방송광고균형발전위원회 초대위원장)이 2023년도 4.19혁명 63주기에서 증언해주었고, 김정일 (중앙대 4.19기념사업회 회장/4.19혁명동지회 부총재)씨도 이를 증명하는 글을 언론에 투고하였다.#
- 종질(從姪) 시인 전원일은 (사)경남작가회의 발행 2023년 사화집“문학으로 만나는 경남의 현대사”에서 특집으로 쓴 “전무영 열사,4.19혁명 최초의 희생자였다”라는 제하의 글에서 열사님이 4.19혁명 전날 고향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과정 서울에서 사망했다는 비보를 듣고 충격을 받은 부모형제 그리고 친지들의 모습, 서울에서 부모님이 살고 있는 진해로 시신을 모시고 와서 진해공설운동장에서 영결식을 하였고 군용트럭으로 운구하여 고향에 오는 모습과 선산에서 영결식하는 과정을 당시 초등학교 1학년생이었던 전원일 시인이 직접 목격했던 장면들을 생생하게 글로 담았다. 4.19혁명때 백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하였는데 고향으로 운구해 오던 장면과 목격담을 4.19혁명 63주년만에 글로 세상에 내놓은 사례는 전무영 열사님이 최초였다.그것은 전무영 열사님의 종질 (從姪) 이 문인이었기에 가능하다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