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7-01 01:33:21

홍연흠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대가(大可)
본관 부림 홍씨(缶林)[1]
출생 1885년 5월 21일
경상도 의흥현 부남면 대율동
(현 대구광역시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2] 894번지)
사망 1970년 11월 22일[3] (향년 86세)
묘소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지심이재
상훈 건국포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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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08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홍영우는 그의 7촌 재종숙(再從叔)이며, 채희각·채송대 형제는 그의 처조카이다.[4]

2. 생애

1885년 5월 21일 경상도 의흥현 부남면 대율동(현 대구광역시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에서 아버지 홍장우(洪章佑, 1854 ~ 1892. 10. 23)와 어머니 전주 최씨(1852 ~ 1932. 3. 9)[5] 사이의 3남 4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20년 음력 7월 27일, 홍재훈(洪在燻)·이원봉(李遠鳳)의 권유로 군위군 부계면 동산동에 있던 28촌 지간의 족조(族祖) 홍정수(洪定修, 1872 ~ 1970)[6]의 집에서 홍영우의 첫째 남동생인 7촌 재종숙(再從叔) 홍석우(洪奭佑, 1895 ~ 1930. 5. 15)·이기식(李基植)과 함께 일심동체임을 서약한 후, 흠치교에 8인조의 교도로 가입하고 홍재훈에게 치성비 20원을 기부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1년 6월 4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이송되었으며, 7월 8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다이쇼 제령 제7호, 즉 정치범 처벌령 위반 및 사기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이에 불복하여 공소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11월 26일 대구복심법원 형사제2부에서 다만 미결 구류일수 중 120일이 징역 형기에 산입되었을 뿐 공소가 기각되었고, 이에 곧 상고하였으나 11월 30일 상고를 취하해 결국 안동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2년 8월 2일 출옥한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70년 11월 22일 별세하였다.

200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1] 대율파-종(宗)파 25세 흠(欽) 항렬.[2] 인근의 남산리·동산리와 함께 부림 홍씨 집성촌이다. 홍창식 전 육군고등군사법원장과 독립유공자 홍목·홍영우·홍창흠도 이 마을 출신이다.[3] 부림홍씨세보 상권 대율파 332쪽에는 3월 16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4] 홍연흠의 부인은 인천 채씨(1887 ~ 1921. 10. 12)로 채구해(蔡龜海, 초명 채영해(蔡永海), 1850 ~ 1905. 2. 20)의 딸이다.[5] 최달식(崔達植)의 딸이다.[6] 부림홍씨세보 권상 923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