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10:41:52

윤충식(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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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현 정율성불확실 문시환 이춘암
공약 10조
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5파괴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④ 각 경찰서
⑤ 기타 왜적 중요기관
7가살
조선총독 이하 고관
② 군부 수뇌
대만총독
④ 매국노
⑤ 친일파 거두
적탐(밀정)
⑦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조선혁명선언 황옥 경부 폭탄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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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윤충식.png
출생 1907년 8월 28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신설리
사망 미상
한반도 일대
추서 건국포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 생애

배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중국 중산대학에 입학할 목적으로 1927년 4월 10일경 중국 광둥성 광저우에 갔다. 학교에 입학하려면 유월한국혁명동지회의 추천이 필요했다. 6월 중순경 김진동의 소개로 유월한국혁명동지회에 가입했다. 이 사이에 서응호, 김철호 등과 교류하면서 의열단에도 가입했다. 9월경 중산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여 안중근의 조카인 안우생 등과 교류했다. 12월 일명 ‘광저우 봉기’가 일어나 학교가 폐쇄되자, 1928년 2월 1일 서울로 돌아왔다.

1928년 6월 신간회 경성지회 간부였던 박완의 소개로 신간회에 가입하여 본부지회의 위원이 되었다. 1929년 5월 상순경 이항발 등 이른바 ‘서울계’ 사회주의자들이 조선공산청년회를 조직하자, 경기도 책임인 심원섭의 권유로 여기에 몸담았다.

1929년 10월 김지수 등과 함께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다. 과거 중국에서 유월한국혁명동지회와 의열단에 가입한 것과 관련된 것이었다. 즉, 당시 단원이었던 서응호 등이 국내로 들어오면서 ‘의열단 사건’으로 확대된 것이었다. 취조를 받던 15일에 부인이 사망하여, 부친의 보증 아래 임시로 석방되어 장례를 치르기도 했다. 12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으나 다음날 석방되었다. 하지만 출옥 후 곧바로 광주학생운동 관련 격문 사건으로 촉발된 ‘학생전위동맹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다. 1930년 1월 29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하지만 다행히게도 9월 13일 예심 면소 처분을 받고 출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