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6 22:05:48

박영순(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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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16년 7월 12일
제주도 제주군 애월면 하귀리
(現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면 하귀리)
사망 미상 (향년 불명)
본관 밀양 박씨
추서 건국포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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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 생애

박영순은 1916년 7월 12일 제주도 제주군 애월면 하귀리에서 박한준(朴漢俊)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금구소학교의 야간부를 졸업했다. 이후 화하류전지제작소에서 일하던 그는 일본공산당 당원이자 동향인인 김귀영(金貴榮)에게 설복되어 공산주의를 받아들이고 무산 아동에게 항일의식을 교육하는 것이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1933년 1월 병에 걸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그해 8월 야학을 설치해 자제들에게 일제 식민지 통치의 부당성을 역설했다. 그러던 1934년 12월 야학을 확대, 발전시키기 위해 하귀리에서 야학을 운영하던 김홍규(金弘奎), 김을봉(金乙鳳) 등과 회합한 후 두 야학을 통합시키기로 했다. 그 후 그는 60여 명의 학동들에게 식민지 수탈의 실상을 알리고 한국인의 피폐를 극복하기 위해서 한국 독립의 달성을 역설하였다. 한편으로 학생들의 항일 의식을 효과적으로 고취시키기 위해 이천만가(二千萬歌), 혁명가, 단결가 등의 노래를 가르치면서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러나 1935년 8월 23일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구속된 그는 10월 10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자 항소하여 1936년 6월 2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기까지 미결수로 8개월여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이후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조용히 지내던 박영순은 8.15 광복 후 사립 단국중학교 교사로 재임하다 1947년 4월 2일 제주도의 상황이 혼란해지자 향리를 떠나 피신했다. 그러나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박영순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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