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ffffff><tablebgcolor=#ffffff> | 경상남도 김해시 출신/활동 독립유공자 |
{{{#!wiki style="color:#000000; margin: -0px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color:#555555" | <rowcolor=#fede58> 성명 | 운동계열 | 생몰년도 | 훈격 |
<colcolor=#fede58> 강원석 | 의열단 | ? ~ ? | ||
고영건 | 3.1 운동 | 1887 ~ 1941 | 애족장 | |
김두갑 | 일본방면 | 1922 ~ 1944 | 애족장 | |
김만수 | 3.1 운동 | ? ~ ? | ||
김석암 | 3.1 운동 | 1891 ~ 1959 | 대통령표창 | |
김선오 | 3.1 운동 | 1865 ~ 1919 | 애국장 | |
김성득 | 일본방면 | 1923 ~ 1983 | 애족장 | |
김승래 | 3.1 운동 | ? ~ ? | ||
김승태 | 3.1 운동 | 1878 ~ 1940 | 애족장 | |
김양산 | 3.1 운동 | ? ~ ? | ||
김원수 | 3.1 운동 | ? ~ ? | ||
김용이 | 3.1 운동 | 1891 ~ 1919 | 애국장 | |
김용주 | 3.1 운동 | ? ~ ? | ||
김정태 | 3.1 운동 | 1890 ~ 1958 | 애족장 | |
김종훤 | 3.1 운동 | 1893 ~ 1948 | 애족장 | |
김헌규 | 의병 | ? ~ 1916 | 애족장 | |
노백용 | 국내항일 | 1885 ~ 1961 | 건국포장 | |
노상익 | 만주방면 | 1849 ~ 1941 | 대통령표창 | |
노상직 | 파리서명 | 1855 ~ 1931 | 건국포장 | |
노석호 | 국내비밀 결사조직 | 1916 ~ 1944 | 애족장 | |
류진옥 | 파리서명 | 1871 ~ 1928 | 건국포장 | |
문위동 | 국내항일 | 1903 ~ 1976 | 애족장 | |
반양환 | 광복군 | 1924 ~ ? | ||
박도백 | 3.1 운동 | 1892 ~ 1939 | 애족장 | |
박재홍 | 국내항일 | 1903 ~ 1979 | 애족장 | |
박정수 | 광복군 | ? ~ ? | 애족장 | |
배덕수 | 국내항일 | 1895 ~ 1970 | 대통령표창 | |
배동석 | 3.1 운동 | 1889 ~ 1924 | 애족장 | |
배종철 | 국내항일 | 1895 ~ ? | 대통령표창 | |
배치문 | 1890 ~ 1942 | 애국장 | ||
서석재 | 3.1 운동 | ? ~ ? | ||
서진령 | 3.1 운동 | 1899 ~ 1971 | 대통령표창 | |
손명조 | 3.1 운동 | 1884 ~ 1919 | 애국장 | |
송기송 | 대한통의부 | |||
송상진 | 1887 ~ 1967 | 대통령표창 | ||
송세탁 | 3.1 운동 | 1884 ~ 1939 | 대통령표창 | |
신수명 | 일본방면 | 1924 ~ 2007 | 대통령표창 | |
안무술 | 3.1 운동 | ? ~ ? | ||
안효구 | 3.1 운동 | |||
안효진 | 3.1 운동 | 1874 ~ 1946 | 건국포장 | |
이강석 | 3.1 운동 | 1879 ~ 1923 | 애족장 | |
이윤재 | 조선어학회 | 1888 ~ 1943 | 독립장 | |
이윤희 | 노동운동 | |||
이진석 | 3.1 운동 | 1896 ~ 1970 | 애족장 | |
이차수 | 3.1 운동 | ? ~ ? | ||
임학찬 | 국내항일 | 1890 ~ 1952 | 건국포장 | |
조영우 | 3.1 운동 | 1887 ~ 1923 | 애족장 | |
조정환 | 대한독립단 | 1875 ~ 1926 | 애족장 | |
전용헌 | 국내항일 | 1890 ~ 1934 | 건국포장 | |
정적윤 | 3.1 운동 | ? ~ ? | ||
조동출 | 3.1 운동 | ? ~ ? | ||
조용명 | 3.1 운동 | ? ~ ? | ||
조항래 | 3.1 운동 | 1884 ~ 1949 | 애족장 | |
최여봉 | 국내항일 | 1899 ~ 1970 | 애족장 | |
최현호 | 3.1 운동 | 1890 ~ 1974 | 애족장 | |
한임길 | 의병.미상 | ? ~ ? | 애국장 | |
허 발 | 자금지원 | 1874 ~ 1931 | ||
허웅 | 언어학자, 한글학자 | 1918 ~ 2004 | ||
허윤송 | 광복군 | 1919 ~ 1985 | 애족장 | |
허 평 | 파리서명 | 1882 ~ 1968 | ||
황찬숙 | 국내항일 | 1905 ~ 1970 | 애족장 | |
김해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들과 김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을 포함함. |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능익(能益) |
본관 | 광주 노씨[1] |
출생 | 1885년 10월 16일 |
경상도 김해도호부 우부면 회현리 (현 경상남도 김해시 회현동) | |
사망 | 1961년 8월 13일 |
부산시 | |
상훈 | 건국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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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항일운동가. 한국의 공산주의자였으나, 전향하였다. 2008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노백용은 1885년 10월 16일 경상도 김해도호부 우부면 회현리(현 경상남도 김해시 회현동)에서 아버지 노상욱(盧相旭)과 어머니 김해 허씨 허형(許炯)의 딸 사이의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그는 관립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10년 밀양공립보통학교에서 훈도로 근무했고, 1912년에 김해공립보통학교에 훈도로 근무해 1919년까지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후 김해사립합성학교 교원으로 일하던 그는 1922년 1월 김해청년회 의사부장을 맡았고, 그해 4월 김해연합대강연회에 김해교육회 대표로 참석하여 ‘교육회와 김해 장래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또한 1923년에 결성된 공산주의 사상 단체 '제4회'에서 활동했으며, 1924년부터 조선일보 김해지국 기자로 활동했고, 1928년 2월 4일과 5일 부산에서 개최된 제4회 경남기자대회에서 대회 집행부 의장과 의안 작성 위원을 맡았다. 또한 1925년 7월 김해에서 사회사정비판회 결성에 참여했으며, 1926년 12월 조선공산당 제2차 대회에 경남대표로 참석했다.
1927년에는 제3차 조선공산당 경상남북도 책임자로 활약하는 한편, 사상 단체 정우회(正友會), 북풍회(北風會), 북성회(北星會)에 가담했다. 그리고 그해 2월 21일 서울 견지동 시천교 회당에서 열린 정우회 임시총회에 참여했으며, 5월 8일 김해농민동맹주최로 열린 노동야학회(勞動夜學會) 낙성식 기념 각 단체연합 대강연회를 신축 대강당에서 개최하고 '문맹퇴치의 근본정신'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1927년 10월 30일 울산 방어진에서 열린 울산 사회단체 8개의 연합간담회에서 연설했으며, 그해 11월 신간회 김해지회 준비위원을 역임했고, 조선공산당 경남도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8년 2월 4일~5일에 열린 경남기자대회 겸 경남기자연맹 총회에서 교섭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제3차 조선공산당 경남 도간부로 활동했다. 그러나 1928년 2월 제3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윤일(尹一), 강대홍(姜大洪) 등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약 8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10월 18일 예심 종결 이후 면소 처분을 받고 출옥했다. 출옥 후, 노백용은 1930년 4월 12일 밀양 조익극장에서 열린 제5회 경남기자대회에서 축사를 하였다. 그리고 10월에는 신간회 김해지역 대표회원 후보에 선출되었고 11월에 중앙검사위원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12월 통의부를 지원하기 위해 독립자금을 모집하려고 공갈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체포되었다. 이 일은 1926년 1월경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특파원 송기송(宋基松)이 독립자금을 얻기 위해 김해면 마마리에 사는 허발(許墢)에게 1만원을 교부를 받으려고 하다가 체포된 후 1930년 6월 1일 출소한 뒤 다시 허토발을 찾아가 3,000원을 받은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노백용은 여기에 연루되어 재판에 회부되었고, 1931년 2월 2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에 불복하여 고등법원에 상고했지만 1931년 4월 27일 기각되어 옥고를 치르고 1932년 10월 19일에 만기 출소했다.
출옥 후 조선일보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고 부산에서 형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근근히 지내던 그는 광복 후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는 1945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상남도지부 위원장과 경상남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 대회에 경상남도 대표로 참석했다. 또한 1945년 10월 8일 <인민 해방보>를 발행해 <부산 인민보>와 함께 부산에서 발행된 좌익계 신문으로 육성시켰으며, 1946년 대구 10.1 사건에 참여했다가 가족과 함께 투옥되어 몇달간 취조받아야 했다. 이후 1947년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부산시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그러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한 후에는 전향을 선언하고 1949년 11월 국민보도연맹 경남도연맹의 간사장을 맡았다. 6.25 전쟁 발발 후인 1950년 8월 22일 방첩대에 체포되어 부산형무소로 끌려갔고, 보도연맹 학살사건이 벌어질 때 함께 처형될 뻔했지만 김정한의 제자였던 방첩대 요원이 김정한과 함께 풀어준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이후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자택에 은거했고 1961년 8월 13일에 사망했다.
3. 기타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노백용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1] 해은공파 29세 용(容)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