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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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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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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간
Big Week
파일:Oorlogsschade_na_het_bombardement_van_22_februari_1944;_gezien_vanuit_de_toren_van_de_St._Dominicus_F65461.jpg
2월 22일, 폭격 피해를 입은 네이메헌
날짜
1944년 2월 20일 ~ 25일
장소
나치 독일, 네덜란드 국가판무관부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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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폭격기 226기
전투기 28기
항공기 파일럿 및 승무원 2,000명 이상 사망 및 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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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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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기 131기
전투기 262기
파일럿 250명 사상
결과
연합국의 승리
영향
연합국의 제공권 확보
네덜란드 민간인 사상자 다수 발생

1. 개요2. 배경3. 진행4.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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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 육군 항공대가 1944년 2월 20 ~ 2월 25일에 걸쳐서 수행한 작전으로 독일 본토 항공전의 일부이며 흔히 Big Week(대주간)로 알려져 있다. 이는 나치 독일의 항공기 산업시설에 대규모 공격을 가해서 루프트바페를 결정적인 전투에 끌어들일 목적으로 계획되었다. 그동안 장거리 호위기의 부재로 폭격기들은 전투기의 호위를 제대로 받지 못했으나 이 시점에서 폭격의 전 과정을 호위할 수 있는 P-51 머스탱이 도입되어 호위 임무에 투입되었다. 루프트바페를 격퇴하는 것에 의해서 연합군제공권을 확보하고 유럽 본토에 상륙을 진행할 수 있으리라고 여겨졌다. 한편 아서 해리스는 이 작전에 부정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안그래도 야간 공습 임무에서 적지않은 피해를 입고 있던 영국 폭격기의 전력을 대거 투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작전을 감행한 후 독일 공군의 종합적인 방공능력이 상당히 위축되었으며 연합군에게 제공권이 넘어가기 시작한 계기가 된다.

2. 배경

1943년 동안 미국 8공군의 규모와 경험은 커지고 있었고 점차 독일 깊숙한 곳까지 폭격을 하게 된다. B-17B-24는 다수의 12.7mm 중기관총으로 무장을 하고 있었으며 폭격기무적론의 영향으로 이 폭격기들이 밀집대형을 형성하고 화망을 형성하면 전투기들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다고 여겨졌으나 실제로는 기대한 만큼 효과적이지 않다고 판명되었다. 비록 폭격기들이 공격해온 독일 전투기들을 어느 정도 격추시키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이는 독일 공군에게 견딜만한 손실이었던 반면 폭격기들의 피해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특히 유명한 사례로는 두 차례 실시된 슈바인푸르트 공습이 있는데 376대의 B-17이 동원된 1차 공습에서 60대의 폭격기가 격추되고 95대 정도의 폭격기가 심각한 손상을 입었으며 291기의 B-17과 60기의 B-24가 동원된 2차 공습에서는 77대가 격추되고 121대가 심각한 손상을 입고 말아 폭격기 부대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지고 '검은 목요일'이라고 불리게 된다. 결국 미국은 한동안 주간 폭격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고 폭격의 전 과정을 호위할 장거리 호위기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장거리 호위 전투기인 P-51 머스탱이 등장하면서 달라지기 시작한다. 긴 항속거리에 모든 면에서 적절히 균형잡힌 우수한 성능은 폭격의 전 과정을 호위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가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1943년 겨울 동안 전투기 부대는 머스탱을 수령하기 시작하였으며 1944년 초에 미국은 독일 공군을 끌어내기 위해 항공기 생산 공장등을 공습하기로 한다. 만약 독일 공군이 이에 대응하면 호위기가 독일 공군에게 타격을 입히고 이에 대응하지 않으면 항공기 생산 공장을 타격하여 어느쪽이라도 독일 공군에게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3. 진행

8공군과 15공군으로 구성된 유럽전략공군은 이 기간동안 1만톤 이상의 폭탄을 투하하였다. 비록 이 작전 기간 동안 상실한 항공기의 수는 이전보다 많았지만 그것은 이전보다 훨씬 많은 항공기가 투입되었기 때문이며 이전에 30%에 육박했던 폭격기 손실률은 7%까지 떨어졌다. 연합군은 독일의 주요 도시에 잇따라 폭격을 가했으며 일부는 이탈리아에도 폭격을 가했다.

4. 결과

영국 공군은 131대의 폭격기를 상실했고 미군은 226대의 폭격기와 28대의 전투기를 상실하는 동안 독일은 262대의 전투기를 상실했다. 단순히 손실비만 고려하면 독일이 이득을 본 셈이며 이 전투로 독일 공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지도 못했다. 게다가 항공기 산업시설에 준 피해도 상당히 제한적이어서 다른 기체의 생산을 줄이는 등의 조치를 취한 결과이기는 해도 독일의 전투기 생산량은 1944년에 정점에 달했다.

그러나 독일에게 결코 좋은 상황은 아니었는데 비록 이 작전 한번으로 독일 공군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손실은 결코 가볍지 않아서 전투기 부대는 17%에 달하는 인명손실이 발생했으며 이는 치명적인 수준은 아니었으나 충분히 우려스러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연합군과는 달리 인적자원이 부족해지기 시작한 독일 공군에게는 이러한 손실은 손쉽게 보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독일 공군은 1943년 중반부터 조종사 양성에 과부하가 온 상황이라 신참 조종사들을 그냥 실전에 투입하는 수순에 들어가고 있었고, 또 다른 에이스 조종사들은 동부전선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독일은 17%의 서부전선 피해를 복구할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 작전으로 기존에 독일이 사용하던 방어전술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것이 드러났으며, 연합군 폭격기 승무원들에게는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었다. 결국 이 작전의 결과로, 독일의 방공작전에 상당한 차질이 생기게 되었으며, 결국 유럽 하늘의 제공권을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연합군의 작전 목표는 달성된 셈이다.

논쟁 작전은 전쟁 끝까지 계속된 미 육군 항공대 호위 전술의 베타 테스트에 불과했고, 이후 미군이 더 효과적인 호위 전술을 도입하며, 논쟁 작전 기간 동안 17% 정도였던 독일군의 파일럿 손실은, 3월~6월까지 20% 후반과 30% 초반에 이를 정도로 악화되었다.
이렇게 기존의 루프트바페를 지탱하던 에이스급 파일럿 인력들이 대부분 전사하게 되면서 점차 독일의 파일럿 자원은 매말라 갔고, 신참 파일럿들이 2~3회차의 출격 중에 격추당해 전사하는 지경에 다다르면서 루프트바페의 종말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