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0-07 14:21:16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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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65.media.tumblr.com/tumblr_mhfqisqsYY1s376ugo1_500.jpg
옥좌에 앉은 나폴레옹 1세, 앵그르, 1806년
제호나폴레옹 1세 (Napoleon I)
본명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eon Bonaparte)
출생1769년 8월 15일, 코르시카 공화국 아작시오
사망1821년 5월 5일 (향년 51년 263일), 영국세인트헬레나 롱우드
신체168cm, O형(Rh-)[1]
재위기간 1차 1804년 5월 18일 ~ 1814년 4월 11일 (9년 328일)
이탈리아 왕국1805년 3월 17일 ~ 1814년 4월 11일 (9년 25일)
2차1815년 3월 20일 ~ 1815년 6월 22일 (94일)
대관식 프랑스의 황제 1804년 12월 2일
이탈리아의 국왕 1805년 5월 26일
장례식1840년 12월
배우자조제핀 드 보아르네
마리 루이즈
학력파리 왕립 육군사관학교 졸업
종교가톨릭
서명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Firma_Napole%C3%B3n_Bonaparte.svg.png

1. 개요2. 이름3. 생애4. 평가
4.1. 영웅 또는 전쟁광4.2. 군사적 재능4.3. 꼬마 부사관(Le Petit Caporal)4.4. 외교력4.5. 해외4.6. 독재자의 롤모델
5. 신체적 특징
5.1. 용모5.2. 결코 작지 않았던 키5.3. 비만 등 각종 질병
6. 사생활7. 가족들과의 관계
7.1. 나폴레옹의 친가7.2. 나폴레옹의 연인 및 그 후손들
8. 기타
8.1. 짧은 수면에 관한 진실8.2. 나폴레옹의 평상시 일상8.3. 식사 습관8.4. 나폴레옹의 정리8.5. 벳시 발콤
9. 대중매체10. 어록11. 관련 항목



1. 개요

말 위에서 도시를 살펴보는 황제를 - 그 절대정신을 - 나는 보았다.
게오르크 헤겔
"나폴레옹의 생애는 1천 년 내 가장 비범한 생애였다..(중략)..나폴레옹은 분명 위대하고 특출한 인물로서 생애만큼이나 자질도 비범했다..(중략)..나폴레옹은 확실히 내가 본 인간 중에서 가장 대단했고, 우리 세대에 살았던, 아니 여러 세대 동안 살았던 인간 중 가장 놀라운 인물이라고 나는 믿는다."
탈레랑

프랑스 제1공화국군인, 독재자, 프랑스 제1제국황제이다. 공화국 프랑스를 쿠데타로 집어삼키고 황제에 올라 혁명을 퇴보시켰다는 점에서 당대에도 많은 비판을 받았고 유럽 전부가 휘말리게 된 전쟁으로 많은 인명 피해를 냈다는 점 때문에 부정적 평가가 많지만, 코르시카 출신의 하급 귀족으로 시작해 프랑스 혁명의 혼란한 시대 속에서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통해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며 당대 세계적 강대국들이 몰려 있던 유럽을 석권하고 황제 나폴레옹 1세가 된 입지전적인 삶을 살았다. 카를 3세 이후 프랑스 최초의 황제가 된 인물이며 나폴레옹 법전과 나폴레옹 전쟁 등의 여러 업적과 사건으로 세계사에 한 획을 그었다.

나폴레옹의 영향력은 매우 강력해서 그의 몰락 이후 유럽의 외교사는 어떻게 하면 이런 인물이 다시 유럽을 집어삼키는 걸 막는가를 기준으로 진행이 될 정도였다. 사상적인 측면에서 나폴레옹이 유럽 대부분을 지배하면서 그 스스로가 갖춘 사상과 철학인 법치주의, 능력주의, 시민평등사상을 온 유럽에 퍼트렸고 이것은 영국의 산업 혁명과 함께 근대 사회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당대 최고의 군사 전략가로서 프랑스 육군의 모든 부분을 전반적으로 선진화시켜 세계 최강으로 자리매김하게 한 주역이다. 나폴레옹은 개인으로서 세계사의 변혁을 이끌어낸 인물이며 유럽이 18세기 시민혁명시대에서 19세기 제국주의적 산업사회로 넘어가는 전환기를 풍미한 인물이었다. 한국에서도 그의 유명세 덕에, 설령 프랑스 출신 인물들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잔다르크와 나폴레옹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을 정도다.

2. 이름

본명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보나파르트는 이름이 아니라 성이고, 나폴레옹이 이름이다. 이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전체 이름을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으로 표기하는 실수를 저지르곤 했다. 다만 서적 등에서는 보나파르트로 적는다. 황제가 되면서 이름인 나폴레옹으로 불렸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유럽 군주의 명칭은 일반적으로 이름이 왕명이 되고 성은 왕조의 명칭이 되기 때문이다. 황제가 되기 전에는 당대에 보나파르트라고 불렸다.

본명은 나폴레오네 부오나파르테(Napoleone Buonaparte). '나폴레오네'로 쓰든 프랑스어인 나폴레옹으로 쓰든 이름의 뜻은 '황야의 사자'이다. 그러나 그가 그의 이름을 코르시카 사투리로 발음하면 ‘라파이유 오네’(코가 없는 사람)로 들려 많은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한문으로는 음차하여 나파륜(拿破崙)[2] 이라고 표기한다.

프랑스 황제로서의 칭호는 나폴레옹 1세. 프랑스 제국의 황제위 요구자들 또한 '나폴레옹 ~세' 라는 명목상의 칭호를 대대로 쓰고 있다. 이탈리아 국왕으로서의 칭호는 나폴레오네 왕인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탈리아 왕국을 포함한 여러 이탈리아계 국가의 군주들 중 유일하게 이름이 나폴레오네였기 때문에, '나폴레오네 2세' 라는 이름의 군주가 배출되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이탈리아에서의 칭호가 '나폴레오네 1세' 가 되는 일은 이탈리아의 군주제가 부활하지 않는 한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3. 생애

문서 참고.

4. 평가

히틀러와 나폴레옹이 자주 비교되긴 하지만, 그러한 비교는 허상에 불과하다. 히틀러는 12년간 권력을 행사한 뒤 군대를 제외한 분야에서는 독일에 해골과 쓰레기만 산더미처럼 남겼다. 반면 나폴레옹은 단 한 번도 전투에 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프랑스에 남긴 행정체제와 시민개혁만으로도 여전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의 하나로 평가될 것이다.
앨리스테어 혼 (영국의 역사학자)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은 19세기의 아돌프 히틀러에 불과하다...대중의 일반의지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을 한 개인이 대표할수 있다는 믿음의 최상 위에 올려놓은 것이 황제(L'Empereur)냐, 영도자(Der Fuehrer)냐의 차이 정도일 뿐이다...그에 비한다면 최후까지 프랑스 공화국의 집정관으로 공화주의의 테두리 하에서 행동했고, 황궁은 커녕 일개 하숙집에서 숙식했던 로베스피에르가 황제 폐하만큼이나 야박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That Sweet Enemy: Britain and France: The History of a Love-Hate Relationship, Robert Tombs, Isabelle Tombs 공저

아돌프 히틀러와 동급으로 보는 학설에서부터 전쟁 빼고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하나로 뽑히는 학설이 나올 정도로 나폴레옹을 바라보는 시각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며 이는 그만큼 그가 인류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문제적 인물임을 드러낸다. 이러한 복잡한 평가는 그가 '근대의 인물'이라는 특수성에서 기인하는데, 호쾌하게 군대 끌고 적군을 신나게 쳐부수면 영웅으로 떠받들었던 고대, 중세, 근세와 달리 근대서부턴 훨씬 복합적으로 역사적 인물들을 평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3]

4.1. 영웅 또는 전쟁광

현대 프랑스에서는 국가의 영웅이라는 찬사[4]와 나라를 망친 전쟁광이라는 비난, 두 시각이 공존하고 있는 논란의 대상이다.

그래도 좋게 보든 나쁘게 보든 봉건주의의 잔재를 종식시킴과 동시에 프랑스 대혁명 이후 극도로 불안정했던 프랑스의 정국을 안정시키고 근대 유럽의 시작을 알리며 미래를 내다본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법치주의를 내세우며 만든 나폴레옹 법전으로 현재도 대륙법 체계의 원형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전까지 프랑스 법률 체계는 고대로부터 잔존한 로마법의 잔재를 기초로 지역과 상황에 따라서는 교회법이나 지방의 관습법이 통용되고, 거기에다가 왕이 공표하는 칙령이 뒤섞인 아주 복잡한 구조였다. 단지 복잡할 뿐만 아니라 너무나 방대하고 지방이나 상황에 따라서 다르기도 해서 상당히 혼란스러웠는데 이걸 전부 다 나폴레옹 법전 한방으로 완전히 갈아엎어버렸다.[5] 또한 이 나폴레옹 법전의 편찬으로 절대왕정의 요람이던 유럽에 시민평등 사상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나폴레옹 법전'은 현재 '함무라비 법전',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때 편찬된 '로마법대전'과 더불어 '세계 3대 법전'으로 불리고 있으며, 나폴레옹 본인도 ''나의 진정한 영광은 마흔 번에 걸친 전쟁의 승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 민법전을 말살할 수 없는데 있다.''라며 한때 전 유럽을 군사적으로 제패한 것보다 '나폴레옹 법전' 편찬을 더욱 자랑스러워 했다.

그리고 가문이나 혈연이 아닌 능력 위주로 운영되는 관료제를 확립하고[6], 이러한 인재를 키워내기 위한 그랑제콜 제도를 도입하였으며, 국내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나폴레옹 지적법(Napoleon's Cadastre)을 제정하여 토지 측량 및 관리 체제를 확립함으로서 근현대적인 지적 측량 및 부동산 등기 체제의 효시를 세웠다. 또한 현대 정치 체제의 근간인 정교분리 역시 나폴레옹 시대에 비로소 완전히 확립되었다.

군사 면에서도 기동력을 중시하고 국민군의 전투력을 애국심의 고취로 끌어올리는 등 19세기 전쟁의 개념과 체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이것이 지금도 전쟁의 신으로 추앙받는 이유다. 실패하긴 했지만 대륙봉쇄로 물가를 최고점[7]으로 끌어올리는 등의 결과로 당시 최강국으로 성장했던 영국을 얼어붙게 하기도 했다.

그의 몰락을 기회삼아 메테르니히 등의 유럽의 구세력들은 유럽을 프랑스 혁명 이전의 구체제로 돌려놓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나폴레옹 몰락으로부터 1세기만에 나폴레옹의 비전이 실현되고 유럽 대부분 국가의 왕정, 제정 체제는 붕괴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폴레옹이 근대 유럽사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나폴레옹의 역사적 위치는 영국의 역사학자 '토마스 칼라일'에게 영향을 주어 영웅이 역사를 만들고 이끌어간다는 영웅사관을 창시할 정도였다.

나폴레옹은 백일천하동안 불리한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자유주의자들과 동맹하여 "자유 제국"을 약속했었다. 짧은 지배기간 때문에 사실상 이 약속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실제로 그 약속을 지킬 의지가 있었는지도 의문이지만. 실제로 나폴레옹은 몰락 이후 "내가 그런 헌법 만든다고 시간이나 낭비했다니! 어차피 다시 유럽의 지배자가 되면 전부 없애버릴 의회였는데!"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 약속 때문에 그는 "자유주의 황제"라는 하나의 환상을 추가하게 된다. 특히 부르봉 왕조 복고 왕정의 무력함과 혁명의 성과를 부정하려는 퇴행성은 나폴레옹에 대한 향수를 강하게 불러일으켰고 결국 군국주의민족주의, 자유주의, 혁명과 일인 독재가 결합한 "보나파르티즘"이라는 프랑스 특유의 기묘한 정치사상을 만들게 된다.[8] 그 과실을 나폴레옹이 죽은 이후에 조카 나폴레옹 3세가 획득하게 되지만 나폴레옹 3세의 실패로 보나파르티즘도 결국 종말을 고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 내 계급과 출신 배경에 따른 봉건적 사회적 차별 관계를 시민 개병제를 통해 평등하게 만들고 이러한 자유주의적 사회적 비전을 강력한 일인 군사 독재자의 권위를 통해 이룩하자는 얼핏 보면 진보적이면서도 그 방법에 있어 지극히 권위주의적인 정치적 풍조는 19세기, 20세기 들어 유럽, 나아가 세계사 전반에서 강력한 영향을 발휘해왔다. 당장 유럽 내에서는 20세기 전간기 폴란드유제프 피우수트스키를 비롯한 중동부 유럽의 군사 정권과 한국의 박정희장제스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소위 스트롱맨 군사 독재자들의 예로부터 근대 세계사 속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풍조로서 굳어졌음을 볼 수 있다.

혼란스러웠던 프랑스 초기의 공화정이나 무기력하고 퇴행적인 부르봉 왕조의 복고 왕정과 비교해보면, 나폴레옹 시대는 문제도 많았지만 번영도 있었던 시대였다. 그러나 그 번영은 무수한 전쟁을 통해 주위 나라들에게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아내며 일구어낸 것이었다. 나폴레옹이 법전의 완성을 위시하여 여러 선구자적 정책들을 도입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당시 사회의 난맥상은 단기간에 해결하긴 어려운 것들이었다. 결국 정부 재정의 문제나 당대 사회의 혼란들을 해결한 것은 그런 선구자적 정책이나 제도 개혁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의 승리였다. 그 승리가 계속되었을 때는 아무 문제도 없어보였지만, 지속적인 전쟁은 착실히 국력의 소모를 불러왔고, 전쟁에서 패배했을 때, 그는 너무나 쉽게 몰락했다.

4.2. 군사적 재능

전쟁의 신 그 자체(der Kriegsgott selbst).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말년의 아서 웰즐리에게 한 기자가 찾아와 이렇게 물었다. "공작님은 나폴레옹을 워털루에서 이겼는데, 공작님의 군사적 재능이 나폴레옹보다 훨씬 낫지 않나요?" 웰즐리는 정색을 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현재에도, 과거에도, 언제라도, 최고의 전략가는 나폴레옹일 뿐이오."("In this age, in past ages, in any age, Napoleon.")[9]
그의 전술적 능력은 시대를 앞서 나가는 것이었고 다른 나라들은 그의 용병술을 모방하기 바빴다. 군재(軍才) 하나만은 역대 최고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었던 그를 잡기 위해, 프랑스를 제외한 전 유럽의 강국(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스페인, 스웨덴, 러시아 등)들은 7차례에 걸친 동맹(대프랑스 동맹)을 해야만 했다.

포병장교는 수학적 계산능력과 탄도학 등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똑똑하고 머리회전이 빠른 인재들이 많았고 당시 프랑스 포병대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특히 그 엘리트적인 성격이 강한 편이다. 그랑제콜 중에서 최상위에 속하는 에콜 폴리테크니크부터가 원래는 프랑스군 포병장교 양성기관이었다. 이 때문에 상당수의 포병 장교들이 혁명이 발생하자 외국으로 망명했지만 나폴레옹은 드물게도 프랑스 혁명에 적극적으로 투신한 케이스였다. 게다가 군사 유년학교와 사관학교를 거치며 제대로 훈련받은 엘리트 장교임에도 불구하고 병사들과 고락을 함께하기를 주저함이 없었기에 인망이 높은 편이었고 이 때문에 나폴레옹은 적어도 휘하 병사들을 장악하는 데에는 거의 어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이는 엘바섬을 탈출했을때 그를 잡으러 간 군대가 오히려 힘차게 랑펠로를 외치며 그의 휘하로 흡수된 사건에서 아주 잘 드러난다.

포병장교 출신이지만 나폴레옹의 전술은 포병/기병/보병의 조화와 협동을 이용한 것으로 포병이 먼저 공격하고 기병이 휩쓸고 그리고 보병이 공격하는 형태를 이루어 병과간의 협력이 매우 중요했다. 그런 이유로 병과간의 상호작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워털루에서 패배했다는 게 인기 있는 분석이다. 당시 나폴레옹은 지병인 치질이 악화되어 하루 종일 엎드려 있어서 잠도 자지 못하여[10] 정상적인 지휘가 불가능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에 , 뮈라, 마세나, 베시에르, 베르티에, 모르티에, 다부 등 나폴레옹을 훌륭하게 보좌했던 유능한 원수들이 전부 빠졌다. 워털루 전투 시점에서 란, 베시에르, 베르티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뮈라는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그의 몰락에 기여한 전력 때문에 합류를 거절당했다. 마세나는 나폴레옹에 합류하길 거부했고 모르티에는 신경통으로 쓰러졌으며 다부는 마르몽에게 배신당한 기억이 뼈아프게 남은 탓인지 전쟁장관직을 맡겨 파리에 남겨두었다. 이런 여러 악재로 인해 기병과 포병이 따로 놀게 되어, 기병은 사지로 돌격하고 포병은 같은 편의 기병에게 포격을 가하는 촌극이 연출되게 되었다. 기병대를 맡은 미셸 네는 포병과의 협력 없이 혼자 돌격해서 기병을 격파하고 엠마누엘 그루시도 나폴레옹이 원한 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싸우는 등 난장판이었다.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의 참모장이었던 술트는 참모로서 재능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프로이센 군을 추격, 섬멸하는 임무를 맡은 그루시는 처음부터 원수감이 아니었다. 기병을 지휘한 는 용맹한 장군이었지만 기병의 천재였던 뮈라와 달리 기병 운용능력이 평범했다. 뮈라는 지성은 보잘것 없었지만 언제, 어디로 기병대를 돌격시켜야 할지를 정확하게 판단하는 탁월한 감각을 갖고 있어 기병 지휘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반면 네는 일선에서 부대를 이끄는 능력은 뛰어났지만, 전략적인 판단능력은 결여되어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게다가 워털루 당시의 네는 이중 배신을 한 입장상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든 상태였다. 아무리 나폴레옹이 제대로 활약을 못했다지만, 워털루 전투에서 뮈라가 나폴레옹의 기병을 다뤘다면 오히려 프랑스가 이겼을 거라는 의견이 큰 힘을 얻고 있다. 사실 워털루 전투에서도 끝내 주요 요충지를 함락시켜 아서 웰즐리가 후퇴를 고려하고, 나폴레옹은 샴페인을 터뜨릴 준비를 하는 상황까지 갔으나 문제는 그루시가 아직도 올 생각을 안하는데....

나폴레옹이 익힌 군사 기술과 제병 합동 전법의 재능은 다른 나라에 비해 선진적이고 효율적이었다. 거기다 사기 또한 높았던 혁명기 프랑스의 병참 제도 하에서 카리스마를 갖춘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대육군은 당시 유럽에서 당해낼 장군이 어디에도 없었고 '나폴레옹의 적들도 인정했다.'

나폴레옹의 천재성을 진정으로 돋보이게 하는 건 전술보다 전략 및 작전술에서의 능력이다. 작전술이라는 개념 자체를 정립한 것은 나폴레옹인데. 작전술이란 <전략지침에서 제시된 군사전략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는 방향으로 일련의 작전을 계획하고 실시하며, 전술적 수단들을 결합 또는 연계시키는 활동>으로 쉽게 설명해서 전략을 달성하기 위하여 전술들을 결합하여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는 것으로 손자병법의 이상적인 조건인 '이겨놓고 싸운다'를 가장 잘 실천한 사람이다. 즉 광범위한 정보를 수집, 부대를 빠른 속도로 이동시켜 유리한, 원하는 장소에서 적보다 많은 병력으로 적을 상대하는 것을 가장 잘 실천했고 실천하고자 노력했던 사람이 바로 나폴레옹이다.

사실 그 전에도 당연히 병법에서 굳이 아군이 적군보다 적은 수인데 싸워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적을 분리시켜서 아군보다 적은 단위로 만들고 각개격파하는 걸 이상적인 상황으로 상정하긴 했었다. 이를테면 명나라의 10만 원정군이 4길로 나뉘어서 진격해오는걸 보고 4만에 불과한 후금 군대가 바로 각개격파한 것처럼, 기회를 날카롭게 포착하고 과감하게 움직일 줄 아는 지휘관들은 이런 전술을 애용했다. 다만 나폴레옹은 단순히 적군이 알아서 분리되었을 때 바로 기회를 잡는 수준을 넘어서서 연락책, 기만책, 병참술 등 가능한 방법을 총동원해서 적군을 순식간에 자기 의도대로 분리시키고 틈을 만들어내고, 아군은 유인을 위해 흩어졌다가도 또 결전이 필요한 순간에는 바로 결집해서 각개격파를 하는 기술을 매우 잘 선사했기 때문이다.

특히 나폴레옹의 병참술은 혁명에 가까울 정도였다. 과거로부터 이어지던 현지 징발의 방식으로 시작해서 보급소와 분배소를 설치하고 수송수단을 도입하면서 상설보급이 가능하도록 했다.

나폴레옹이 한 말로 알려진 "폐하께서는 항상 소수의 병력으로도 다수의 병력을 이기셨습니다."라고 부하가 감탄하자 "아니다. 나는 (내가 싸우는 곳에서는) 늘 다수의 병력으로 소수를 이겼다"라는 말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사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대프 연합군에 비해 처음부터 수적 우위를 차지한 적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그의 능력으로 인해 직접적인 교전 상황에서만큼은 오히려 프랑스군이 '수적 우위'를 차지하게 만들었다. 나폴레옹 스스로도 '대군(大軍)에는 병법이 필요없다'라고 할 정도로 수적 우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당대에 전술적인 면에서 나폴레옹과 맞서볼만한 인물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지만(웰링턴 공작, 카를 대공 등) 전략과 작전술에서는 그를 따라갈만한 인물은 사실상 없었다. 심지어 그가 완전히 몰락하고 건강마저 잃었던 백일천하 때조차, 전략 및 작전술 단계에서는 아주 훌륭한 모습을 보였다. 웰링턴마저 나폴레옹에게 완전히 낚여 허겁지겁 병력을 집결했을 정도.[11]

하지만 해군쪽에 대해서는 완전 문외한이었다. 해군 장교들에게 육군식의 명령 체계를 강요하는등, 해군쪽 인사들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다.[12]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폴레옹은 사실 해군이 되고 싶어 했었다(...).

게다가 이런 군사적 업적을 쌓기 위해 나폴레옹은 건강을 희생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폴레옹의 토막잠 전설에서도 알 수 있지만, 군무로건 공부로건 소싯적으로 워낙 과로하는 편이었던데다 성장 환경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경과민 증세도 있었고 병사들과 고락을 함께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당시 병영 생활이라는 것이 원체 개판이었던지라 열병, 위궤양과 탈장, 치질 등의 여러 가지 병을 앓아 사관학교 과정을 거쳐 소위로 임관했던 소년 장교 시절부터 내내 아프지 않을 때가 없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가 위암으로 사망한 것을 생각하면 체질적으로 위가 안 좋았던 모양이다.[13]

그리고 새로운 과학 기술을 통해 만든 '신무기'에는 큰 집착을 보이지 않았다.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소리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 등장한 그 '신무기'들 중에는 몽상가들의 장난감 수준이 아니라 이후 전쟁의 개념을 크게 뒤바꾼 장비들도 있었음에도 말이다. 한 예로 미국인 발명가인 로버트 풀턴이 기초적인 수준의 증기선, 잠수함을 소개하며 이것으로 영국 해군을 물리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나폴레옹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결국 받아들이지 않았다[14]. 1782년 개발되어 정찰용 등으로 군에서 시험용으로 사용하던 비행 기구에 대해서도 단순한 유흥거리 정도로 여겼다고 한다.

다만 보존이 용이하고 휴대가 간편한 전투식량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병조림을 도입하기도 하였고, 훗날 통조림으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를 통해보면 보급 부문은 모르겠으되 자신의 특기인 전투분야와 그에 사용되는 장비에 대해서 매우 보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차피 당시 수준의 무기로는 제대로 된 야전운용 적합성 평가를 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수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고 자신의 군사적 능력을 통해 유럽의 패권을 유지하던 나폴레옹으로서는 언제 상용화될지도 모르는 신무기보다는, 다른 데다 자원을 투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할 법 했다. 한정된 예산으로 최적의 편성을 하기 위해서는 무기의 성능 뿐만이 아니라 신뢰성과 병참이라는 측면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신무기는 실전이나 충분한 시험 운용으로 검증되기 전에는 신뢰하기 어렵고 대량 생산이 확정되어 단가가 낮아지기 전까지는 병참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더군다나 신무기에 대한 훈련도까지 합치면 비용이 장난이 아니게 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전술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쓸모가 없었다. 중국의 양무운동과 같이 신병기를 만들고 가져왔다고 한들 무기는 아무리 개발을 해도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데 신병기 생산에 훈련까지 합치면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들기에 차라리 어느 정도 위력이 있고 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낼 수 있는 구식취급 받는 무기가 오히려 더 쓸모가 있을 수 있다. 실제로도 그 신무기들이 본격적으로 위력을 발휘하려면 빨라도 100년은 지나야 했다. 증기선은 외륜이 피격되기 쉬운데다 일단 외륜이 피격되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으므로 스크류 추진장치가 발명될 때까지 주력으로 쓰이지 못했다. 로버트 풀턴은 나폴레옹에게 차이고 이번엔 영국으로 갔는데, 거기서도 제대로 된 실용성이 없단 이유로 물 먹고 신기술에 목말라 헤매던 미국에 가서야 어느정도 성공을 이룰 수 있었다. 프랑스가 1850년 마침내 증기 전열함을 도입하여(재밌게도 이 증기선의 이름은 "나폴레옹 호"였다.) 일시적으로 영국에 쇼크를 주긴 했지만, 영국인들은 금세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증기선을 양산해냄으로써 결과적으로 프랑스와 영국의 해군 전력비는 더 벌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잠수함은 전략적으로 유의미한 병기가 되려면 증기선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오히려 청년학파 때문에 프랑스 해군력을 박살내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선견지명 열기구 역시 여러가지 약점 때문에 당시 기술 수준으로는 실전에서 정찰용으로 쓰기도 어려웠다. (어딘가의 얼리 어답터랑은 확실히 다르지) 링크

게다가 나폴레옹이 개인적으로 관심이 없었다고 보기도 힘들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는 다른 장교들도 거의 전부 다, 그런 신무기 같은 것엔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새로 발명된 신무기가 몇 년만에 바로 전장의 흐름을 뒤바꾸어 놓는건 산업혁명 이후인 19세기 후반부터나 현실화되기 시작한 일이고[15], 그 이전엔 기술의 발전 속도가 그다지 빠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신무기의 개발 속도가 상당히 빨라진 이후로도 신무기의 가치에 대해 실제 일선의 장교들이 무시하는 경향은 굉장히 빈번했으며[16], 신무기가 언제든지 전장을 뒤집을 수 있으니 항상 긴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개념이 장교들에게 안착된 건 거의 2차대전 이후다.

4.3. 꼬마 부사관(Le Petit Caporal)

나폴레옹의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에 대해서는 말이 많지만, 웰링턴 군대에서도 '나보(나폴레옹의 별명)가 프랑스 놈들과 함께 있으면 4만 명의 군대와 맞먹는다.'고 논평했을 정도였다니 당대에는 인정받았던 이야기이다. 심지어 나폴레옹 이후 빈 체제를 정립한 메테르니히조차도 "황제와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매혹당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나폴레옹이 사람 다루는 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들이 있다.
한 포병장교가 4년 동안 똑같은 계급을 달고 있는 것에 불만이 생겼는데, 나폴레옹이 군대 점검을 위해 한 요새를 찾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나폴레옹에게 승진을 청원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나폴레옹이 시찰을 위해 요새에 도착하였는데…장교는 새삼스레 쑥스러워져서 나폴레옹에게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결국 나폴레옹이 떠날 시간이 되었다. 그제야 장교는 허겁지겁 달려가 떠나려는 나폴레옹을 불러세웠다.

장교: 폐.....폐하, 폐하!
나폴레옹: 왜 그러는가?
장교: 저는 14년 동안 복무했으나 4년 동안 대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내년에 있을 진급평가때 명단에만 올려주시면.....
나폴레옹: 지금부터 소령.

그리고 나폴레옹은 다시 갈 길을 갔다(...).

수행원으로 데려온 소령의 계급장을 떼서 손수 달아줬다는 말도 있다.

장교의 계급이 소위로, 복무 기간이 5년으로 바뀌고, 나폴레옹은 그에게 "나도 7년 동안 소위였는데 이자리까지 올랐다. 너무 불평하지 마라."하며 타이르는 버전도 있다. 참고로 이 일화는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회고록을 작성하며 직접 언급한 내용이다.
공훈을 세우거나 성과를 낸 부하에게는 아낌없이 칭찬을 하였으나, 잘못을 한 자에게는 무자비하게 갈굼을 시전하였다. 이는 사람이 많은 장소나 손님이 와 있는 자리에서 더욱 심했는데, 나폴레옹은 다른이들에게 일종의 경고를 주기 위해 일부러 그런 장소를 택하는 것을 즐겼다. 하지만 다음날이 되면 그 질책 했던 부하를 다시 불러서, 전날 자신이 그런 의도를 설명하며 친근하게 달랬다.
한 번은 숙영하는 야전 부대를 순시하던 중 졸고 있는 초병을 보았는데 깨우는 대신 자기가 잠깐 그 자리를 맡아 보초를 섰다. 잠시 후 초병이 깨어났지만 그를 질책하는 대신 조용히 자리를 돌려주고 돌아갔다.

초병의 중요성은 총사령관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자리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 셈이다. 더불어 지친 병사를 대신해 임무를 수행했다는 이미지로 장병들에게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조지 워싱턴도 비슷한 일화를 가지고 있다.
오스트리아 전쟁 당시, 영국을 침공하기 위해 배치된 군을 시찰하면서 병사 및 하급 장교들을 일일이 만나며 신상명세를 확인해 주고 고충을 들어주기도 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만나다니 오랜만이네. 자네는 지난 이집트 원정 때 피라미드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운 용사가 아닌가? 그런데도 훈장을 받지 못하다니 내 잘못이네. 당장 훈장을 수여해 주겠네!" 이런 식. 이 때문에 장병들의 사기 및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도는 크게 올랐다.

물론 나폴레옹이 처음부터 이런 내용들을 기억했을 리는 없고 사전에 장병들을 뒷조사했다. 그렇다고 해도 평소 장병들의 나폴레옹에 대한 인망이 높지 않았다면 나폴레옹의 이런 행사가 진정성을 얻긴 힘들었을 것이다.
장 란 원수와는 너, 나 할 정도로 말을 낮춘 사이였는데, 직설적인 편이었던 란 원수는 황제에게 화가 날 때마다 '''내가 저런 매춘부에게 애처로운 열정을 품었으니 죽어도 싸지!"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그래도 나폴레옹은 슬쩍 자리를 피한 뒤, 그 다음 날이면 언제 싸웠냐는 듯 사근거렸다고 한다. 심지어 나폴레옹은 '병사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엉덩이에 입이라도 맞추겠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17]
조아킴 뮈라 원수와도 너, 나 할 정도로 말을 낮춘 사이였다. 조아킴 뮈라는 185cm에 달할 정도로 키가 컸으며 힘은 엄청 장사라 나폴레옹이 맨 처음 출세하게 된 계기가 된 왕당파, 즉 부르봉파의 반란을 진압할 때 혼자 대포를 짊어지고 뛰었을 정도로 괴력을 갖고 있었다. 뮈라는 나폴레옹 측근 중에서도 눈에 띄게 용맹하여, 각종 전투에서 작전을 성공시킨 공로는 물론 나폴레옹의 목숨을 구한 적도 많았다.

그 때문에 나폴레옹은 자신의 여동생 카롤린을 뮈라의 아내로 내주었다. 무엇보다 뮈라가 왕 하고 싶다니까 나폴레옹은 바로 나폴리에서 왕 노릇 잘 하고 있던 자신의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돌연히 스페인으로 옮겨버리고 뮈라를 나폴리의 왕으로 봉해줬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측근 서열에서 뮈라를 자신의 형보다도 우위에 뒀다. 이 정도면 말 다했다.

정작 나폴레옹이 뮈라를 좋아해서 뮈라에게 시집보낸 그 여동생 카롤린은 뮈라에게 자신의 오빠를 배신하고 오스트리아로 붙으라고 꼬드겼다. 나폴레옹 자신은 뛰어난 군인이자 군주였으나, 그 집안은 이토록 콩가루였던 것이다.
1806년 아우어슈테트 전투가 끝난 직후 승장인 루이 니콜라 다부 원수가 보고를 위해 나폴레옹을 찾아왔다. 승리를 치하하는 나폴레옹에게 다부는, 자신의 는 나폴레옹의 것이라고 강조했다. "어떤 경우에라도 기꺼이 폐하를 위해 제 피를 흘리겠습니다. 폐하께서 저를 인정해주시고 따뜻함을 베풀어주시는 그것으로 저는 족합니다." 후에 다부는 이날의 공로로 아우어슈테트 공작이 되었다. [18]

샤를 드 라 베두아예르가 아들 이야기를 하면서 나폴레옹을 즐겁게 한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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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은 폴란드 출신인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에게 자신의 휘하 원수이긴 했으나 프랑스군 원수로 대한 것이 아니라 폴란드의 황제로 예우해줬다. 비록 포니아토프스키가 나라를 빼앗기고 독립 운동을 하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포니아토프스키에게 폴란드를 되찾아주겠다고 했으며, 포니아토프스키에를 항상 폴란드 황제라고 부르며, 프랑스 군 내부에서 자신과 똑같은 의전절차로 예우해줬다. 이에 감동받은 포니아토프스키는 나폴레옹을 위해서라면 죽을 힘을 다했다.
라스 카즈의 회고록에는, 세인트헬레나 유배 시절 나폴레옹을 수행한 시종들이 나폴레옹의 총애를 다투는 바람에 나폴레옹이 대놓고 "내가 자네 아내도 아니지 않는가? 자네와 내가 잠을 잘 수는 없지 않는가?"라고 투덜거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르노블로 진군하던 나폴레옹의 병력이 길가에 제5보병연대가 포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지역 주민들은 "신경쓰지 마세요. 쏘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으나 측근들은 좀 걱정된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우리가 속았는지도 모르겠군. 뭐 상관없지, 전진!"이라는 말과 함께 맨 앞으로 나아가 제5보병연대를 정면으로 바라본 뒤 이렇게 말했다.

"제5보병연대여! 짐을 알아보겠는가?"
"예, 폐하."
"짐이 자네들의 꼬마 부사관(별명)이다. 자네들 중 짐을 쏘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여기 짐의 가슴이 있다!"

이에 병사들이 "황제폐하 만세!"를 외치며 백색 휘장을 떼어내고 황제의 손을 만지기 위해 달려나갔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이제 혼자 남겨진 그들의 지휘관을 향해 나아갔다.

"무슈 레자르, 짐은 자네를 잘 아네. 자네를 대령으로 만든 게 누구인가?"
"폐하입니다."
"그러면 그 전에 자네를 중령으로 만든 게 누구인가"
"폐하입니다."
"그런데도 짐과 싸우기를 원하다니!"
"전 오직 그러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입니다"

이에 나폴레옹은 레자르의 칼을 돌려주고 항복한 제5연대를 규합해 그르노블로 전진을 재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백일천하 항목 참조. 영화 워털루와 프랑스 드라마에서 재현한 장면[19]
독일·폴란드 원정 중 폴란드에서 보급에 징발까지 제대로 안 되서 프랑스 병사들이 굶주리고 있었다. 그런데 병사 중 하나가 용감하게도, 대열 옆을 지나가던 나폴레옹을 향해 폴란드어로 "Papa, kleba!" (아빠, 빵 좀 요!)하고 외치자 나폴레옹도 폴란드어로 "Nie ma !" (없어!)하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병사들은 빵 터져서 불만이 좀 수그러 들었다고.

이 일화는 나폴레옹의 시종인 콩스탕의 회고록에서 나온다.
나폴레옹이 병사들이 끓인 수프로 함께 식사를 하려는데 머리카락이 나오자 슬쩍 치우고 다 먹은 후 한접시 더 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두번째 접시에서도 머리카락이 나왔다고... 이 역시 콩스탕의 기록이다. 이 밖에도 나폴레옹은 종종 병사들과 함께 식사를 한 일이 있었다. 당시 장교들이 병사들과 겸상을 하는 것은 물론이요, 심지어 뭔가를 먹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금기시되어 있었다.[20] 즉 나폴레옹이 스스럼 없이 병사들의 식사 자리에 어울리며 그들의 음식을 함께 먹은 건 굉장히 파격적인 행위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고 미국으로 망명하려다 영국해군에게 걸려서 전열함 벨레로폰에 탑승하여 잠시 이곳저곳을 떠돌게 되었다. 배의 선원들은 '코르시카의 괴물'로 불리던 그를 보고 처음에는 경멸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이윽고 황제의 아우라에 감화되어 그가 갑판에 나올때 마다 진심으로 존경를 표하며 인사를 했다. 나폴레옹은 해병대원들을 직접 사열해보기도 하고, 영국식 집총자세와 프랑스식 집총자세의 차이점을 설명하기 위해 머스켓을 들고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황제가 병사들과 섞여 격 없이 어울리는 것을 본 영국인들은 "저 분은 항상 저러시냐?"며 매우 놀라워 했다.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가기 직전 플리머스 항구에 잠시 머물게 됐다. 그런데 황제가 플리머스에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그를 보려고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측근들은 영국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라도 할까봐 걱정했지만, 대중들은 갑판에 등장한 황제를 향해 모자를 벗으며 인사를 하고, 환호를하며 경의를 표하였다.
아우스터리츠 전투 바로 전날 밤, 나폴레옹은 밤에 자는 병사들이 깰까봐 횃불 하나 없이 시찰을 돌고 있었다. 그런데 황제가 자신들의 텐트 옆을 지나가는 것을 본 일부 병사들이 볏짚으로 횃불을 만들어 나폴레옹을 보러 나왔다. 이렇게 병영이 어수선해지자 다른 부대원들도 횃불을 들고 황제의 모습을 보러 나오는 통에 나폴레옹의 주변은 수많은 병사에게 둘러싸였다. 그때 누군가가 '오늘이 황제 폐하께서 즉위하신지 1주년 되는 날이다!' 라고 소리쳤고[21] 이윽고 병사들은 '황제폐하 만세!' 를 외쳐댔다. 이 광경은 건너편 러시아 - 오스트리아 연합군 진영에서도 보였다고 기록되었다. 나폴레옹도 훗날 이 일화를 '내 일생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감격스러워 했다.
사랑하는 아내여, 우린 뙤약볕 아래 골프주앙에 상륙했소. 굉장해. 황제 폐하가 가는 어디든 사람들이 달려나와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오.
황제 폐하를 저지하기 위해 파견된 부대들도 그를 보자 감동에 못 이겨 우리와 합류했네. 황제 폐하를 따라 전투에 임할 것이오. 황제 폐하 만세 ! 프랑스여, 영원하리라.
- 나폴레옹을 따라 엘바섬까지 갔던 44세의 근위대원 피에르 랑텔름이 그의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친근감의 표시로 상대방의 를 비틀어 꼬집는 행동을 했다. 사적으로 친한 사람이나 전투에서 공을 세운 부하들에게만 해주던 거라서, 이걸 당한(?) 사람들은 그 자체를 영광으로 인식했다.
여러 일화에서 나폴레옹은 부사관으로 불린다. 장교인데 왜 부사관이냐 하면, 당시 유럽의 육군유년 사관학교나 사관학교의 생도들은 생도 계급이 따로 있던 게 아니라, 상병이나 병장 등의 병 계급으로 훈련을 받았고 나폴레옹은 그게 별명으로 굳었기 때문이다.

4.4. 외교력

나폴레옹의 외교 능력에 대해 혹평하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나폴레옹 개인의 성향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폴레옹의 전략은 근본적으로 1)프랑스 혁명을 통해 탄생한 공화국과 그 공화국을 승계한 자신의 프랑스 제국이 기존 유럽 질서와 화해하는 것. 2)유럽 질서를 프랑스의 주도하에 재편하는 것이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가장 강력한 적이었던 영국과도 통령 취임 직후 계속 화해를 시도했고, 실제로 아미앵 조약을 통해 화해를 이루어내었다.[22] 그런데 화해조약이 아직 유효하던 중에서도 영국은 구 부르봉 왕족들을 계속 후원하고 나폴레옹에 대한 중상모략을 계속했으며, 나폴레옹에게 접근하는 러시아 제국의 궁정혁명을 지원 또는 방조하여 러시아의 반(反)프랑스 정책을 고착화시킨다. 이후의 일이지만, 프로이센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나폴레옹은 가급적 전쟁을 피하려 했고, 가장 큰 실책으로 꼽히는 러시아 원정조차도 러시아 제국과의 화평 시도 끝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일차적인 문제는 영국의 대륙 정책에 있었다. 해상대국으로서 당대 최강을 자부하던 영국으로서는 아직 경제력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 러시아나 약소국이 된 스페인, 지역 강국들의 군집체에 불과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이나 다 망해가는 오스만 제국은 경계할 대상이 되지 않았지만, 3천만에 육박하는 인구를 보유하고 있으며 당대 유럽 문명을 선도하는 입장에 있던, 게다가 기존 질서에 도전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까지 확보한 프랑스라는 강적이 유럽 대륙의 질서를 주도하는 것을 무슨 일이 있어도 허용할 수 없었다. 프랑스가 유럽 대륙 전체의 헤게모니를 확보하고 가공할 인적 자원을 활용하여 영국과 맞서게 된다면, 영국으로서는 국가의 존망이 걸린 문제였던 것. 실제로 불완전한 상태에서 행해진 대륙봉쇄령에 의해서도 영국이 겪은 고생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이러했으니, 안 그래도 강력한 적수인 프랑스에 나폴레옹 같은 지도자까지 나타난 상황을 영국으로서는 좌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영국의 입장에서 유럽 대륙은 고만고만한 강국들이 병립하면서 균형을 유지해줘야 했다는 것이고, 그 균형을 깨뜨릴 잠재력을 지닌 프랑스, 그리고 그 프랑스를 이끌어 다른 유럽 국가들을 압도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지닌 지도자라면, 나폴레옹이 아닌 다른 누구라도 타도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또한 유럽의 다른 제국들에 있어서도 프랑스 제국에 의한 유럽 질서 재편은 절대적으로 막아야 할 사태였다. 프랑스 혁명은 시민세력에 의한 구(舊)질서의 붕괴라는 당대 기준에서는 묵시록적인 사태의 실현이었고, 그런 프랑스 제국을 인정한다는 것은 자국 내에 있던 시민 세력들에게도 왕조 타도의 명분을 쥐어주는 행위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에 이탈리아와 나폴리, 네덜란드, 베스트팔렌, 스웨덴, 나아가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보나파르트 일족이나 그 인척들을 왕으로 앉히기 시작한 나폴레옹의 방식도 반감을 샀다. 물론 그건 원래 타오를 불에 기름 끼얹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나폴레옹 개인의 실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폴레옹은 군사력의 우위와 천재적인 지략을 바탕으로 계속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와 같은 승리가 계속되면서 자신과 프랑스 제국의 역량을 과신하게 된다. 무엇보다 프랑스 혁명을 거치며 정립된 프랑스군 특유의 현지 보급 및 프랑스 제국의 경기 회복을 위한 가혹한 배상금과 무자비한 약탈 정책이 문제였다. 그리고 이 정책의 가장 큰 피해자가 바로 훗날 프랑스의 원수가 되는 프로이센이었다. 프로이센은 기본적인 약탈로 1000억원대의 손해를 입었는데 2조 가량을 합법적, 공식적으로 뜯겼고 결국 프랑스의 속국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이러한 약탈은 처음에 나폴레옹을 환영하던 주변 나라의 시민 세력들이나 학생들이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리게 된 가장 큰 원인이다.

여기에 군주로서 그렇게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던 자신의 형, 동생과 친척들을 여러 나라의 왕으로 앉히는 무리수를 감수했던 것도 한몫 했다. 이런 짓을 시도하다가 당초 프랑스 제국에 우호적이었던 스페인도 결국 적으로 만들어버렸고,[23] 러시아 원정은 그런 나폴레옹 체제의 모순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나 다름없다. 낙하산으로 왕 자리에 앉힌 친인척들이 능력이 뛰어나고 선정을 펼쳤으면 모르나, 애초부터 나폴레옹이 제대로 지원도 안 하고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린 조제프 보나파르트[24] 네덜란드 시민들에게도 호평받았던 루이 보나파르트 정도를 제외하면 하나같이 능력 없고 부패한 인물들투성이어서 해당 국가의 사람들이 나폴레옹과 프랑스 제국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한다.

통령 취임 이전부터 이집트 원정 등으로 나폴레옹 개인의 군사적 야망이 지나친 수준이었다고 주위에 인식되었던 것도 문제. 원래 이집트 원정의 목적은 인도에 압력을 가해 인도를 비롯한 중근동 토후들의 반영 정서를 자극해서 영국을 뒤흔드는 것 정도였는데, 프로파간다로 알렉산더 대왕을 비롯한 고대 정복자들의 이름을 끌어다 쓰는 바람에 실제 이상으로 부풀려진 측면이 크다고 볼 수 있다.

4.5. 해외

이웃나라인 스페인에서의 평가는 거의 악마 수준이다. 이베리아 반도 전쟁으로 자국에 지옥을 초래했기 때문. 현대 와서야 이베리아 반도 전쟁 당시 군사 피규어도 팔리고 프랑스군 리인액트먼트도 하는 등 표면적으로야 유럽 전반의 자유주의적 풍토에 희석되었다 하지만, 마드리드 시내의 프라도 박물관 옆에 있는 역대 스페인 군주가 대관식을 치루는 교회인 성 예로니모 성당부터 나폴레옹 전쟁 시기 탄약창으로 쓰이다 박살난 걸 재건축했을 만큼 이베리아 반도 전쟁 당시 스페인이 입은 피해는 스페인 역사에 진하게 녹아있다. 상술한 프라도 박물관에서 고야의 그림을 보며 성장하고, 나폴레옹 전쟁때 한번 털리거나 박살난 사적만큼은 진짜 갈리시아에서 카탈루냐까지 그 지역색 강하고 서로 단합 못하는 걸로 유명한 스페인인들을 묶어주는 집단적 기억인데 스페인 사람들인데 악감정이 없을 리가 없다. 나폴레옹의 침략 당시 대불항전은 당시 스페인의 자유주의자, 보수파, 세속주의자, 가톨릭 교회, 카스티야인, 카탈루냐인 모두 합세하여 싸웠던 유산이고, 베니토 갈도스 같은 스페인의 문호뿐만 아니라 프랑스인 빅토르 위고마저도 경의를 표할만큼 치열했던 사라고사 공방전 같은 사건은 스페인 근대사의 집단적 기억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스페인 본토에서는 아예 이베리아 반도 전쟁을 '스페인 독립 전쟁 (Guerra de independencia)라고 부를 만큼 중요한 사건이고, 현대까지도 은연중에 모습을 드러내는 뿌리 깊은 반불 감정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아프리카라고 깐 적이 있다. 정확히는 "피레네 산맥 아래에 있는 나라들은 유럽이 아닌 아프리카다." 이 말에 스페인은 폭발했다. 참고로 그 당시 말하는 아프리카는 우리가 아는 아프리카가 아닌 아랍을 말한다. 레콘키스타로 아랍인을 쫓아낸 게 스페인 민족주의의 시작인데 그 감정을 건드렸던 것이다.

더불어 이집트 및 유럽 각지에서 문화재 약탈자라는 악명도 얻고 있으며, 때문에 모나리자를 약탈했다는 오명을 쓰기도 했다. 모나리자는 다빈치가 프랑스에서 죽으면서 대표적인 다빈치 빠돌이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에게 선물한 것이다.

1798년 이집트 알 이즈하르 마스지드에서 무장반란 진압 도중 4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살되었기에, 이집트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학살자 및 침략자다. 이런 사태가 난 이유는 나폴레옹은 이집트에서 무리한 징발을 요구하고, 심지어 마스지드에 세금까지 매겼기 때문이다. 결국 현지 아랍인들의 저항과 적군에 대한 협력으로 이집트 주둔 프랑스군은 보급에서도 곤란을 겪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오스만의 술탄을 대신하여 역적 맘루크를 토벌하러 왔다고 선전했고, 여차하면 자신과 부하들이 무슬림으로 개종할 수도 있다며 립서비스를 하며 이슬람 율법학자들을 비롯한 현지 지도층을 포섭하려 했지만[25],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고, 영국의 해상 봉쇄로 고생을 했고 팔레스타인 원정에서 영국 해군의 방해와 중포의 부재로 결국 오스만의 견고한 요새를 뚫지 못하고 점령한 팔레스타인 지역을 돌려주고 이집트로 돌아온 다음에,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는 수만 명의 오스만군을 바다로 처넣어 지위를 굳건히 했다. 하지만 한술 더 떠 페스트까지 발생한데다가 프랑스 내부에서의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자신의 부재로 약화되는 것을 감지한 나폴레옹은 부사령관에게 이집트를 맡기고, 겨우 2척이라는 적은 수의 함선을 타고 몰래 프랑스로 돌아갔다. 남은 프랑스군은 1년 반이 넘게 견뎠으나 계속되는 오스만군과 이집트 저항군, 영국군의 공격과 질병, 보급 문제로 결국 1801년 전면 항복한다. 덕분에 로제타석을 비롯한 문화재가 영국 손에 들어갔으므로 어딜 봐도 이집트 입장에서 좋게 볼 구석이 없다. 1980년대 KBS-1를 통하여 방영한 유럽 드라마 나폴레옹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심지어 오스만 포로들이나 민간인들에게 프랑스군이 총을 겨누며 스스로 바다로 들어가게 하여 빠져 죽게 하는 장면도 나온다.

러시아나 영국에서는 '그런 엄청난 적을 이긴 우리는 더욱 위대하다'는 논리의 설파를 위해 치켜 세워주면서도 악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영국에서 아기들 자장가에서 "망태 할아버지" 급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하지만 영국의 당대의 지식인들은 나폴레옹을 높이 평가했다. 나폴레옹이 사망한 직후, 아이반호를 지은 영국의 대문호 월터 스콧이 지은 "나폴레옹전"에서는 나폴레옹이 국가를 안정화하고 자국에 진보적 개혁 조치들을 취한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후 나온 토마스 칼라일 같은 경우는 아예 나폴레옹을 들어 영웅사관을 정립했을 정도. 또 '제인 에어'로 너무나 유명한 영국의 전설적인 여성 작가인 '샬럿 브론테'도 '웰링턴 공작'을 매우 존경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폴레옹'도 매우 존경해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에서 비극적으로 죽은 것을 애도하는 에세이를 쓰기도 할 정도로 열렬한 나폴레옹의 팬으로 그녀가 벨기에의 '브뤼셀'의 여학교에서 자신의 동생이자 '폭풍의 언덕'의 작가로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는 '에밀리 브론테'와 같이 유학했을 시절, 학교의 교장이였던 '콘스탄틴 에제'는 그녀가 나폴레옹을 매우 존경하는 것을 알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나폴레옹의 유품을 그녀에게 주었다고.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보면, 나폴레옹이 침략한 러시아에서도 나폴레옹 애호가들이 상당히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랑스의 동맹국이였던 덴마크에서는 애증의 대상이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덴마크도 의도하지 않은 전쟁에 휘말렸고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패전국 신세가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립국이던 덴마크를 선빵 때린 게 영국이라서 나폴레옹을 미워할 이유가 없는데 다만 덴마크 일반인들 중에는 나폴레옹에게 강한 매력을 느끼고 흠모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아버지가 그 일례이다.

폴란드에서는 구세주 수준의 평가를 받고 있다. 나폴레옹이 자신들의 조국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과 러시아를 줘패고 바르샤바 공국까지 세워줬기 때문이다. 비록 바르샤바 공국은 10년[26]도 지속되지 못한 반쪽짜리 국가였지만, 폴란드인들에게 독립의 희망을 가지게 해줬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프랑스 제국에 적극 협력했고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줬다. 나폴레옹은 폴란드를 말 잘 듣고 부려먹기 좋은 빵셔틀 수준으로 여겼지만 나폴레옹이 폴란드를 토사구팽할 생각을 하기도 전에 나폴레옹이 먼저 몰락해서 알려지지 않았고, 어쨌든 폴란드는 다른 나라들이 전부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리는 와중에도 끝까지 프랑스 편에 서서 싸웠다. 이렇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폴란드인들의 인식은 매우 좋다. 심지어 폴란드 국가폴란드는 아직 죽지 않았다의 가사에도 보나파르트가 우리에게 승리의 방법을 보여주었다라는 구절이 있을 정도다.

아시아 쪽에선 나폴레옹이 뭔가 해를 끼친 것이 거의 없다보니 인기가 좋은 편이다. 중국의 경우 나폴레옹이 "중국은 잠자는 사자며 깨어나기만 하면 세계를 진동시킬것이라 평했던 것 때문에 좋게 보는 측면이 있다. 사실 이 발언은 중국이 지금 당장 강하다는 것이 아니라 중국을 깨우면 중국인들이 언젠가 유럽을 비슷한 수준까지 따라잡을 것이고 제국주의의 보복을 할 것이라는 내용의 이야기였지만 시진핑이 프랑스-중국 수교 50주년 기념대회 강연에서 이 발언을 언급하는 등 중국에는 인상깊게 남는 발언이었던 듯 하다. 연합뉴스

나폴레옹은 조선에 대해선 자세히 알진 못했지만 주간조선에서 나폴레옹에 대한 기사로 유배지인 세인트헬레나에서 영국 탐험선이 짧게 섬을 방문했을 때, 영국 탐험대 대장이 나폴레옹에게 조선 여행담과 삽화를 보여줬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삽화에 담긴 조선인의 갓과 담뱃대에 꽤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나라라는 평이다.

독립운동가 김경천 장군이 나폴레옹을 존경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업을 배우라는 아버지나 형의 권고에도 굳이 일본육사를 지원하게 된 것도 나폴레옹의 영향을 받아서였다고...실제로 김경천 장군의 별명중 하나가 '조선의 나폴레옹'이였다고 한다.[27]

그리고 한국의 전설적인 독립운동가인 매헌 윤봉길 의사도 나폴레옹을 존경해 자신의 두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서[28]사상가 맹자, 혁명가 나폴레옹, 발명왕 에디슨을 배우라고 했다고 한다.[29]

한편 한국에서도 나폴레옹이 독재자의 모델이라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보는 여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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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발리드를 방문해 나폴레옹의 석관에 참배하는 히틀러와 수행원들

4.6. 독재자의 롤모델

많은 폭군이나 독재자들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압제와 전쟁으로 나라를 대차게 말아먹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장 베델 보카사는 그를 모델삼아 황제가 되었다.

아돌프 히틀러도 나폴레옹을 동경했다고 한다. 그는 프랑스를 점령하고 나폴레옹 2세의 관을 나폴레옹의 곁으로 이장시켜 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영국 정복이 힘들자 포기하고 소련을 침공하여 전선을 2개로 만들었고 이후 패망했다.[30]

중화민국장제스도 젊은 시절에 나폴레옹을 동경했으며, 나폴레옹의 혁명 정신을 잡지까지 내놓으며 칭찬했었다.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알 카다피 역시 나폴레옹을 롤모델로 삼았는데 통치 체제 등에서 나폴레옹의 통치 수단과 비슷한 시스템을 운용했다.

5. 신체적 특징

5.1. 용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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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보나파르트(Bonaparte franchissant le Grand-Saint-Bernard),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31] 1801년

나폴레옹과 함께 그야말로 전설이 된 그림이다. 타 버전이 몇 가지 더 존재하며 구도는 같지만 머리가 흰 백마와 망토가 붉은 색인 버전도 매우 유명하다. 왼쪽 아래의 바위들에 나폴레옹의 성인 보나파르트와 한니발카롤루스 대제가 새겨진 것은 덤이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성인 보나파르트가 한니발과 카롤루스 대제보다 더 위에 있어 나폴레옹이 이들보다 더 위대하다고 선전하는 것도 덤이다. 흔히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이라고 부른다. 그림에는 멋있어 보이라고 백마로 그려져 있지만, 실제 알프스 산맥을 넘을 때에는 지구력이 뛰어난 노새사용했다고 한다. 말메종과 부아프레오 성에 있는 원본 그림은 그야말로 신고전주의의 극한이라 칭할 만하며, 그야말로 크기와 포스 모든 면에서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다.

나폴레옹의 초상화들은 선전을 위해 미남 대역을 고용해 그려진 것들이 대다수라고도 하는데, 초상화에서 나폴레옹의 외모는 그린 화가에 관계없이 매우 일관된 편[32]이기 때문에 대역들은 얼굴보다는 포즈를 위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다비드가 그린 얼굴이 본인과 닮은 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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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폴레옹은 수려한 미남이었다. 정권을 잡은 후에는 어느 정도 보정이 들어갔다 치더라도, 정권을 잡기 이전의 초상화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초상화뿐만 아니라, 사망 후에 남긴 데드 마스크를 봐도 얼굴은 확실히 보통 이상으로 잘생긴 편이다.

참고로 우측의 초상화는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별의 별 고생을 다하고 막 프랑스로 돌아온 러시아 원정 후 결국 파리가 함락당하고 극한의 상황에 몰린 퇴위 직전의 나폴레옹을 상상해 그린 상상화다. 당장 러시아에서 손실할 병력을 복구하고 민심을 달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녀야 할 판국에 태평하게 초상화를 그리진 않았을 것이다.

사실 나폴레옹이 못생겼다는 이미지가 돌게 된 이유는 영국의 풍자만화 때문인데, 프랑스 제국과 적대적이던 영국이 적대국가의 최종보스 나폴레옹을 당연히 잘생기게 그릴 리가 없었으니, 나폴레옹의 이미지는 대개 키 작고 못생긴 난쟁이로 널리 퍼진 것이다. 사실은 나폴레옹에 대해 결코 좋게 말하지 않는 사람들조차 "키는 좀 작았어도 얼굴은 조각을 해놓은 것처럼 아름답다", "그의 미소는 아름답고 매력적이다."라고 회상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아들인 나폴레옹 2세의 초상화를 봐도 그 유전자를 확인할 수 있다.

5.2. 결코 작지 않았던 키

작지만 사나운 인물을 뜻하는 나폴레옹 콤플렉스의 유래가 된 동시에 흔히 키가 155cm 정도로 작았다고 유명한데 실제 나폴레옹의 키는 168cm였다. 당시 프랑스 사람들의 평균 신장이 164cm 정도였음을 고려하면 오히려 큰 편인 것이다.

168cm였던 나폴레옹이 160cm도 안 되는 단신으로 여겨지게 된 이유는 그때 프랑스에서 썼던 피에(pied)라는 단위를 영국에서 피트로 착각했기 때문이다.[33] 피에가 피트보다 2cm 더 길기 때문에 거의 10cm에 가까운 오차가 생긴 것이다. 거기다 고참 근위대는 원래 178cm 이상으로 키가 큰 인원들을 차출해서 만든 부대인 데다가, 특유의 셰코 모자 때문에 그들과 같이 있으면 나폴레옹의 키가 더욱 작아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성장기 때에도 빈곤하게 지낸 탓에 잘 먹고 잘 살던 귀족들과 같이 있다 보면 키가 좀 작다는 인식도 있었다.

밑에서 말하는 키는 좀 작았다고 말한 것도 이런 이유이다. 거기다 나폴레옹은 다른 병사들과 달리 삼각모를 넓게 쓰는 버릇도 있었고, 몸매가 약간 펑퍼짐한 면도 있는 데다 숏다리였던 것도 이러한 '작아 보이는' 인상에 한몫했을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본인 스스로 "내 키는 땅에서 재면 가장 작지만 하늘에서 재면 가장 크다."라는 말까지 하는 바람에...

마지막으로 이 낭설엔 그의 조카로 알려진[34] 나폴레옹 3세가 진짜로 키가 작았던 게 한몫을 보탰다. 당시로서도 작은 키여서 160cm도 안 되었다고 한다.

이런 비교는 큰 성과가 없지만 1986년 당시 대한민국 남성의 평균키가 167.7cm로 나폴레옹은 20세기 후반, 전 세계 역사상 유례가 적은 경제발전을 보여왔던 국가인 대한민국의 남성 평균키보다 겨우 0.1 cm 차이 밖에 안 난다. 다시 말해 나폴레옹은 2세기에 가까운 후대의 남성들의 평균 키에 속할 정도로 당대에는 꽤 키 큰 사람이었다.

오히려 오늘날 프랑스 남성의 평균키(177cm)를 당시 프랑스 남성의 평균키인 164cm와 일대일로 대입할 경우, 나폴레옹은 현재인으로 따지면 181cm정도 되니 오히려 '일반인보다는 큰 편'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다만 평균키 164cm라는 수치에는 당시 일주일에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던 프랑스 하층민들의 키가 포함됨을 고려해야 한다. 당시 유럽 귀족들의 키가 174cm정도였음을 보면 나폴레옹은 자신이 속한 계층에서는 상대적으로 작아보일 수 있다.

매체에서 쓰이는 우락부락한 거구들 사이에 있는 체구 왜소하고 제일 약해 보이는 인물이 알고보니 최고 지도자라는 클리셰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다.

5.3. 비만 등 각종 질병

30대 중반까지의 초상화를 보면 '나폴레옹은 유황을 끼얹은 것 같다'라고까지 얘기될 만큼 창백한 안색에 대단히 여윈 모습으로 묘사된다. 비서 부리엔에게 '나는 나이가 들어도 살이 붙을 것 같지 않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황제 즉위 이후부터는 급격히 살집이 붙게 되고, 나중에가면 비만이 심각했는데 세인트헬레나 섬에서의 말년을 묘사한 초상화를 보면 그야말로 펭귄의 모습이다. 사후 부검할 때 복부에서 엄청난 지방을 걷어냈다고 한다.(...)

황제가 되기 전부터 이미 수시로 입고 있던 조끼 등의 단추를 풀고 책상에 기대거나 왼손을 윗도리 밑으로 넣어 문질러 통증을 가라앉게 할 정도로 위장 건강이 좋지 않았고 이는 평생 나폴레옹을 괴롭혔다[35]. 이 정도로 위장이 좋지 않은데다 식사량도 많은 편이 아니었고, 식사를 지나칠정도로 빨리하며[36] 승마 등 운동을 너무 격렬하게 해서 오히려 건강을 해칠 정도였다고 함에도, 갑자기 비만체가 된 걸 보면 잘못된 식습관과 유전적인 요인이 같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말이 있다.

한편, 그에겐 피부가 가려운 피부염이 있었기 때문에 그 때부터 시간이 있으면 장시간의 목욕을 즐기고 목욕탕 안에서 집무를 보기도 했다고 한다. 이탈리아 원정 때 부인인 조세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기침과 편두통, 발열이나 배뇨 곤란, 치질 등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중에 치질은 거머리 치료법으로 호전된 듯했다가 다시금 재발해서 결국 아편을 처방받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다만 아편을 처방받은 날이 하필이면 워털루 전투때였는데 당연히 전투지휘에 큰 지장을 주었다.

6. 사생활

여러 가지 비범한 모습과 신화적인 전설들이 내려오지만 사실 나폴레옹은 인간적으로서는 단점도 만만치 않았다. 고집이 세고 독선적인 면이 강했으며 자신의 실패는 무조건 덮으며 감추는 데 급급했으면서, 부하들이 실패할 경우엔 자신과는 관계없는 100% 부하의 잘못으로 매도해서 질책하고 몰락케 하는 모습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 보잘것없는 시골 귀족 가문에 대한 콤플렉스랑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와 전쟁에 너무 많이 참여한 관계로 주변에 나폴레옹을 지지하는 사람이 적었다. 여성 문제에 있어서는 조제핀과의 사랑으로 유명하지만, 서로 성격이 만만치 않은데다 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지 않자 결국 이혼해버리고 오스트리아 황녀인 마리 루이즈와 결혼했다. 묘한 건 조제핀이 나폴레옹에게 다시 열중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나폴레옹 쪽에서 열정이 식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도 죽는 순간 마지막에 말한 단어가 조제핀의 이름이었으니 진정한 사랑이라 해야 할까. 어쨌든 주변인들이 남긴 기록을 보아도 세속의 권력과 영화에 찌들기 이전에는 상당히 순수한 면이 있고, 인간성도 털털하고 괜찮은 편이었다고 한다. 그의 사생활의 이면에 실망한 사람들은 황제가 되고난 후에 이전의 모습과 다른 개차반적 모습을 보였다며 비난하기도 하고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고 난 후의 기록을 언급하며 인간적으로 확 깨는 수준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반면 '차갑고 악마같은 인간'이라는 이미지[37]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 중에서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그를 달리보기도 했다.

조제핀과 헤어진 직후 한 배우가 나폴레옹의 이 역린(?)을 건드릴 뻔한 일화가 있다. 당시 프랑스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던 프랑수아 조제프 탈마라는 연극배우가 있었다. 나폴레옹 본인도 그를 튈르리 궁에 초청하여 함께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좋아했다. 탈마는 로마 제국을 무대로 한 연극 '브리타니쿠스'에서 네로 역을 맡았다. 물론 이 공연에는 나폴레옹도 직접 관람하러 참석하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연극의 내용 중 네로의 아내인 옥타비아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쫓아내는 장면이 있었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이전부터 브리타니쿠스의 내용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이쯤 되면 극을 계속 진행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나폴레옹과 궁정 관계자들이 한 행동은 '쿨쿨 잠이 든 척 하기'였다. 나폴레옹 스스로도 탈마의 행동이 비의도적이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고, 괜히 사건 만들어서 유명한 배우를 족친다며 여론을 흔들기는 곤란하므로 잠이 들어서 문제의 장면을 못 본 척 하며 넘어간 것이다.

특히 재밌는 점은 나폴레옹의 친지들은 나폴레옹에게 도움은 안되고 그저 배신 혹은 이용만 해먹었지만, 피가 섞이지 않은 의붓아들인 외젠과 딸인 오스탕스는 나폴레옹을 끝까지 따랐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친지들과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지만 외젠과 오스탕스를 친자식처럼 아꼈다. 하지만 혈연주의가 강했던 보나파르트 가문은 이 둘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제4차 대불(對佛)동맹전 당시 베를린을 점령했을 때는 나름대로 훈훈한 일화도 남겼다. 베를린 총독 하츠펠트 대공이 간첩 혐의에 연루되었다는 증거인 편지를 입수한 나폴레옹이 하츠펠트 대공을 체포하자, 대공의 부인이 남편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못 된다며 총살당할 처지가 된 남편의 구명을 호소하러 왔다. 나폴레옹이 그녀의 눈앞에 편지를 들이대자 부인은 울음을 터뜨렸고, 임신 중이었던 부인의 부른 배를 보자 마음이 약해진 나폴레옹은 지금 이 편지를 곁에 있는 난로에 던지면 아무 증거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고 그녀에게 넌지시 귀띔했다. 결국 하츠펠트 대공은 목숨을 건졌다.
개방적인 성생활을 즐겨서 자식복은 많았지만 죄다 사생아로써 마리 루이즈의 아들만 적자로 인정했다.

7. 가족들과의 관계

위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특유의 혈통에 대한 집착과 가족주의 때문에 낭패를 본 바가 많았다. 물론 권력자가 혈연에 의지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일이고, 신분에 따라 재능을 단련할 기회가 차등적으로 주어지던 전근대 시대에는 권력자 주위의 혈연 집단이 의외로 능력을 발휘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출신의 지방귀족이었고, 프랑스 대혁명을 배경으로 자신의 재능에 의지해 출세한 경우였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의지했던 보나파르트 가문은 사실 당대 기준으로 보아도 능력 면에서는 영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들이었고, 그러면서도 야심들이 대단해서 권력자가 자신의 혈족에게 흔히 기대할 수 있는 충성심도 거의 기대할 수 없었다. 오히려 나폴레옹의 몰락에 일조하기까지 했을 정도로 가족들은 답이 없었다.

오죽하면 나폴레옹 스스로 "내 형제들 말만 들으면 내가 프랑스 황제의 자리를 우리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아서 혼자 꿀꺽한 줄 알겠다"라고 푸념했을 정도였다. 그 때문에 의붓자식인 외젠과 오스탕스와 훨씬 더 친했고 외젠과 오스탕스도 나폴레옹에게 충성했다. 하지만 보나파르트 가문은 저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7.1. 나폴레옹의 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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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티치아 보나파르트(1750~1836) : 나폴레옹의 어머니. 뛰어난 미인이고 기질이 거세, 평범한 기질의 소유자였던 남편 샤를 보나파르트에 비해 보나파르트 형제들의 독특한 개성 형성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는 평을 듣는다. 여담인데 14살에 결혼하여 15살에 아들을 낳았으나 1살도 못돼 죽었다. 모두 자식들을 7남 6녀를 낳았는데 그중 2남 3녀는 2살도 안돼 일찍 죽고 나폴레옹을 비롯한 8명만 어른으로 자랐다.
    나폴레옹의 집권을 썩 반기지 않아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식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며느리 조제핀과도 불화를 빚었다.(나폴레옹의 어머니는 보나파르트 집안에서 혼자 나폴레옹에게 황제가 되지 말라고 조언했다.) 대신 금전에 대한 집착이 강해 여러 은행가들을 곁에 두고 치부에 힘을 썼다고 하는데, 입버릇처럼 '내가 낳은 이 여러 왕과 공주들이 나중에 다시 내게 빵을 구하러 올지도 모른다.'고 말했고, 실제로 나폴레옹 몰락 후 보나파르트 가의 재정을 상당부분 책임진 것은 나폴레옹 집권기 동안 레티치아 보나파르트가 열심히 치부했던 돈이었다. 아들의 유배와 죽음까지도 보고 아들보다 15년이나 더 살다가 당시에는 엄청난 장수를 누리고 86세에 죽었다. 그녀에 대한 책자도 세월이 지나 여러 권이 나오고 여장부로서 많이 재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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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샤를 보나파르트(1746~1785) : 나폴레옹의 아버지. 39살 나이로 요절했으며 죽을 당시 나폴레옹은 사관생도였으니 아들이 황제가 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하고 죽었다. 고향인 코르시카에서는 제법 명문 집안 출신이고 코르시카 독립전쟁에 열심히 나선 인물이었다. 코르시카 독립운동으로 유명한 파올리의 부관이었을 정도. 비록 가망이 없다는 걸 알고 친 프랑스파가 되었지만 그 덕에 코르시카 총독 빽으로 나폴레옹이 프랑스 사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기에 나폴레옹 인생에 그도 큰 다리를 놓아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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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제프 보나파르트 (1768~1844) : 나폴레옹의 형. 스페인 국왕인 호세 1세이기도 하다. 자세한 건 항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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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뤼시앵 보나파르트(1775~1840) : 나폴레옹의 형제들 중 정치적 재능이 가장 뛰어났다고 알려진 인물. 재능보다는 열정이 두드러졌다고 한다.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당시 의원들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하면서 일시적으로 패닉에 빠진 나폴레옹을 대신해 사태를 주도하여 나폴레옹 집권에 기여했지만, 이후 내무장관과 마드리드 주재 프랑스 대사를 역임하며 금전적인 비리를 숱하게 저지른 데다, 나폴레옹이 반대한 결혼을 하는 바람에 나폴레옹 집권기 동안에는 사실상 나폴레옹에게 협조하지 않았고, 영국의 포로가 되기도 하는 등 나폴레옹 제정 기간 동안의 존재감은 전무에 가깝다. 형이 몰락한 뒤 유럽 여기저기를 떠돌긴 했으나 평온하게 살다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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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이 보나파르트(1778~1846) : 나폴레옹이 가장 아낀 동생. 네덜란드 왕국의 왕을 지냈고, 나폴레옹의 양녀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와 결혼하여 루이 나폴레옹을 비롯한 여러 아들을 보았다. 나폴레옹 2세 탄생 전에는 나폴레옹이 루이의 아들들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을 만큼 총애했지만,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있었던 데다 부인 오르탕스와의 사이도 좋지 못해 개인적으로 계속 불행한 삶을 살았다. 군사적 재능도 썩 훌륭하지 못했고 군주로서도 별 존재감이 없었다. 형이 몰락한 뒤로 이름을 숨기고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를 오가며 살아갔다. 그래도 1840년에 프랑스로 귀국하여 형의 장례식을 보고 늘그막은 그럭저럭 평온하게 살다가 갔다. 막내아들이 바로 나폴레옹 3세이지만 최근 들어서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자세한 내용은 나폴레옹 3세 항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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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롬 보나파르트(1784~1860) : 나폴레옹의 막내동생. 해군에서 복무했으며 베스트팔렌 왕국의 왕을 지냈고, 워털루 전투에서도 사단장으로 참전했다. 보나파르트 형제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조카인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하는 것까지 보았다. 다른 형제들에 비해 비교적 나폴레옹의 뜻에 충실히 따른 편이었지만, 베스트팔렌 왕으로 재위하던 중에는 지나치게 사치를 즐겨 주위의 골치를 썩였다고 한다. 나폴레옹 3세에게 "폐하는 선대 나폴레옹 폐하와 하나도 닮지 않으셨습니다"라고 말했는데, 나폴레옹 3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분과 마찬가지로 나도 친척들 때문에 골치를 썩이지 않습니까"라고 답한 일화가 있다고. 제2제정 당시 상원 의장을 지내는 등 평안한 늘그막을 지냈다. 손자인 찰스 조셉 보나파르트(1851~1921)는 미국에서 살면서 정치인이 되어 미국 법무장관까지 오른 바 있다. 1860년까지 살았기에 나폴레옹의 형제자매들 중 유일하게 사진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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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롤린 뮈라 보나파르트 (1782~1839) : 나폴레옹의 누이동생, 조아킴 뮈라에게 시집갔다. 정치적 야심이 대단해서 남편 뮈라를 나폴레옹의 후계자로 만들려 획책했고, 나폴레옹의 아내 조제핀과 양녀 오르탕스에게 가장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나폴레옹과 뮈라가 폴란드로 출정한 동안, 나폴레옹이 전사할 경우를 대비해 당시 파리 방위사령관이었던 앙도슈 쥐노를 정부로 삼아 남편 뮈라를 제위에 올릴 계획을 꾸미기도 했다. 이후 남편 뮈라가 나폴리 왕이 되면서 왕비가 되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해방전쟁 당시 오빠를 배신한다. 이후 오빠와 뮈라 모두 몰락하고 오스트리아로 달아났으나 무수한 문전박대를 당하며 고생하게 된다. 그래도 늘그막에 재혼하여 어느 정도 넉넉하게 살다가 갔지만 죽을때까지 아이들에게 자신은 왕비로서 유럽을 호령했다는 말을 남기며 지나간 영광을 잊지 못했던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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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엘리자 박치오키 보나파르트(1777~1820) : 카롤린만큼은 아니었지만 기질이 거세고 야심이 많아 나폴레옹이 토스카나 일대에 영지를 주었음에도 만족하지 못했다. 남편 펠릭스 박치오키(1762~1841) [38] 가 자신의 눈에 차는 인물이 아니라고 하여, 당대의 유명한 문인 퐁탄과 연애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남편은 그럼에도 그녀를 사랑했고 오빠가 몰락한 뒤 오스트리아에서 감옥에 갇히기도 했지만 풀려나서 지방에서 작은 별장에서 연금을 받으며 남편과 같이 살며 평온하게 살다가 갔다. 죽을때 그녀 곁을 지킨 건 남편뿐이라서 그녀는 죽어갈 때, '나는 배신했지만 당신은 바보같이 나를 따르니 참 웃기네요...하지만 정말 고마워요...마지막까지 남은 게 오로지 당신 뿐이니...'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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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폴린 보나파르트(1780~1825) : 보나파르트 자매들 중 가장 미모가 뛰어났다고 전해지는 여인. 르클레르 장군과 1797년에 결혼하여 아이티에 파견되었지만, 부부가 나란히 사복을 채우는 바람에 평이 좋지 못했다. 1802년 황열병으로 르클레르가 30세 나이로 요절하자 다음해인 1803년에 보르게세 왕자(1775~1832)와 재혼하여 나폴레옹의 정략에 충실히 따랐다. 낭비가 심했고 연애행각이 잦아 언니들만큼이나 말썽이 많았지만, 사적으로 봤을때는 나폴레옹에게 가장 우호적인 여동생이었다. 나폴레옹도 폴린을 가장 총애했는데, 이를 두고 대불 동맹군은 둘이 서로 근친상간을 한다는 악의적인 흑색선전을 일삼기도 했다. 1814년 나폴레옹이 엘바섬에 유배 되자 어머니와 함께 섬으로 와서 그를 위로하였고, 결국 오빠가 사망 했을 땐 형제 가운데 가장 슬퍼했었다. 여담으로 아이티 바닷가에서 훌러덩 벗고 헤엄치길 즐기다 보니 현지인들에게 하얀 여신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가족들이 이렇다보니, 나폴레옹이 그나마 믿고 의지했던 것은 아내 조제핀이 데려온 외젠 드 보아르네오르탕스 드 보아르네였고, 외젠은 이탈리아 왕국의 부왕을 지내면서 대체로 나폴레옹의 기대를 충족시킨 편이었다. 때문에 외젠이 나폴레옹의 후계자가 되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대체역사적 가정들도 종종 나오고 있지만, 보나파르트 가문이 조제핀과 그녀의 아이들에게 보였던 적의가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나폴레옹 입장에서는 하고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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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파르트 가문은 현재 코르시카 지방 정부에서 정치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가문의 수장은 1950년생인 샤를 나폴레옹(Charles Napoléon. 위 사진 오른쪽의 백발 신사)으로 위에서 소개한 나폴레옹의 막내동생 제롬의 후손이며, 코르시카의 시장을 역임했다. 그의 장남 장 크리스토프 나폴레옹(Jean-Christophe Napoléon. 샤를 왼쪽의 인물)은 1986년생으로 경영학을 전공한 후 뉴욕, 런던에서 금융 분야에 종사했으며, 가문의 차기 수장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20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투 200주년 기념 행사에서도 가문을 대표해서 참석했을 정도. 2019년에는 마리 루이즈 조카의 직계 후손인 올림피아 폰 운트 주 아르코-지네베르크라는 오스트리아 여성과 오는 10월 결혼식을 올린다.#

7.2. 나폴레옹의 연인 및 그 후손들

위에 언급한 현대의 보나파르트 가문의 인물들은 나폴레옹의 직계 자손이 아니라 나폴레옹의 막내 동생인 제롬 보나파르트의 자손이다. 제롬이 꽤나 자유분방했고 그 덕분에 워낙 자손을 많이 두어서, 제롬의 후손들이 지금 보나파르트 가문의 수장 노릇을 하고 있다.

나폴레옹에게는 또 다른 아들이 두 명이 있다. 다시 말해 나폴레옹의 애인에게서 태어난 아들들인데 사생아들이라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지 못했고 정식으로 호적에 오르지도 못해서, 정식 황태자이자 적자인 나폴레옹 2세와 달리 역사상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나폴레옹도 동생 제롬 못지 않은 바람둥이였는데, 그의 수많은 애인 중 잘 알려져 있는 두 명의 애인이 있는데, 첫째 애인이 엘레오노르 드누엘(Eleonore Denuelle)이다.

엘레오노르는 프랑스의 한 재력 있는 중산층 가문에서 태어났기에 어렸을 때부터 그녀의 아버지가 집안에서 이름난 가정교사를 들여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현숙하고 명망 있는 숙녀로 자라났다. 외모도 뛰어났기에 여러 고위층 남성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18세에 장프랑수아 르벨-오노르(Jean-Francois Revel-Honore)라는 장교와 결혼했지만 그가 공금 유용 및 사기죄로 2년형을 선고받자 그와 이혼하고 독신이 되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나폴레옹의 눈에 들었는데, 사실 그녀가 나폴레옹과 만날 수 있었던 계기는 나폴레옹의 여동생인 카롤린의 공이 컸다. 엘레오노르가 카롤린과 사적으로 친했던 터라 그녀가 엘레오노르를 오라버니에게 소개시켜 주었고, 나폴레옹은 그녀의 박식함과 외모에 반해 그녀와 결혼하려 했으나 조제핀과 결혼중인 상태였으므로 애인으로 삼았다. 엘레오노르는 나폴레옹의 애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들을 한 명 낳았는데, 그 아들의 이름은 샤를 레옹(Charles Leon)으로 당시 애인의 자식은 아버지의 성을 따를 수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성인 드누엘을 따라 이름이 샤를 레옹 드누엘이 되었다. 샤를 레옹은 어머니를 닮아 유식하고 아버지를 닮아 잘 생겼으며, 아버지의 작위를 잇지 못하는 대신 군인이 되어 장교를 역임하고, 백작 작위를 받아 부유하게 살다가 죽었다. 샤를 레옹에게도 자식들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들은 군인이 되었고 나폴레옹 3세 시절 일어난 여러 전투에 참여했는데, 그 와중에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대신 딸들은 살아서 결혼하여 자식을 많이 두어 지금도 샤를 레옹의 딸들의 자손이 살고 있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둘째 애인은 마리아 발레프스카(Maria Walewska)이다. 마리아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실 폴란드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엘레오노르처럼 유복한 삶을 살며 자라났다. 특히 그녀의 가정교사들 중 한 명이 바로 폴란드와 프랑스의 유명한 음악가인 쇼팽의 아버지인 니콜라 쇼팽(Nicolas Chopin)이다. 쇼팽이 폴란드의 음악가로 통하는 이유는 그의 아버지 니콜라가 젊은 시절에 폴란드로 떠나서 폴란드에서 음악을 가르치며 생활하다 폴란드 여자를 만나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바로 쇼팽이기 때문이다. 바로 폴란드에서 니콜라가 한창 음악가로서 생활하고 있을 때에 가르쳤던 소녀가 바로 마리아였다. 그러나 폴란드는 당시 식민지나 다름이 없어 국가의 주권이 거의 박탈된 상태로, 폴란드인들은 독립을 갈망하고 있던 시대였다. 마리아도 그중의 한 명이었는데, 나폴레옹이 정복 전쟁을 할 때 폴란드에 군대를 이끌고 들어왔는데, 마리아가 사는 성이 있는 지역을 통과하다 우연히 나폴레옹이 마리아와 눈이 마주쳤고, 나폴레옹은 마리아가 마음에 들어 측근에게 일러 마리아를 데려오라 했다. 나폴레옹을 열렬히 환영하던 폴란드인들은 폴란드의 명운을 걸고 어떻게든 마리아를 찾아서 나폴레옹에게 바치려 했지만 큰 문제가 있었으니 마리아가 이미 아들 안토니 루돌프 바질리(Antoni Rudolf Bazyli)까지 있는 유부녀라는 사실이었다. 발레프스카는 마리아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성이 아니라 남편 발레프스키 백작 아테나시우스의 성이었던 것이다.[39]

마리아는 조국 폴란드에 해방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인물인 나폴레옹을 열렬히 환영하러 갔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지만 설마 자신의 국가 공인 공녀로 나폴레옹에 바쳐지는 신세가 될지는 몰랐고 당연히 이를 수치스럽게 생각해서 거부했다. 당시에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라고 해도 도덕적인 일은 절대 아니었고 전 유럽인들이 뒤에서 소곤거릴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는 일이니 마리아로서는 당연한 거부였다. 어떻게든 나폴레옹의 비위를 맞춰야 했던 당시 폴란드인들은 거물 중의 거물인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가 직접 마리아에게 찾아가 애원하고, 심지어 남편인 발레프스키 백작까지 자신의 아내 앞에서 무릎 꿇고 제발 나폴레옹과 만나 줄 것을 애원했다.[40] 결국 남편까지 나서서 나폴레옹과 만나 줄 것을 요구하는 주위의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마리아는 나폴레옹을 만나게 된다. 마리아를 만난 나폴레옹은 그녀의 식견과 외모에 감탄했으며 그녀가 애국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녀에게 자신이 유럽을 평정하면 폴란드를 독립국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맹세하고 자신의 부하들과 폴란드 대중 앞에서도 그랬다. 마리아는 나폴레옹의 서약을 신뢰하여 그의 애인이 되었고, 나폴레옹은 바르샤바 공국을 설립해주고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를 자신과 동등하게 대하여 줌으로서 그 약속의 일부를 지켜주었다.[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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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궁정화가 프랑수아 제라르(François Gérard)가 그린 마리아 발레프스카의 초상이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그다지 미인이 아닌 것 같지만 대단히 아름답게 그려진 다른 초상화들도 있기 때문에 이는 제라르 화풍의 문제일 수도 있다. 사진도 각도에 따라 외모가 다르게 나오는데 화풍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오는 초상화야 말해 뭐하겠는가. 또 외모가 별로였다고 해도 마리아가 프랑스어가 유창했고 나이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지적이었다는 주위의 평가를 보면 이런 지성과 발랄함에 나폴레옹이 반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마리아는 나폴레옹의 아들인 알렉상드르 플로리앙 조제프(Alexandre Florian Joseph)를 낳았다. 그러나 이 아들 또한 애인의 아들이었으므로 아버지의 성과 작위를 잇지 못하고 성은 어머니의 남편인 발레프스키 백작의 성 [42]을 따른 발레프스키(Walewski)를 따르고, 자신의 작위 이름인 콜로나 백작(Comte de Colonna)를 붙여 콜로나-발레프스키(Colonna-Walewski)로 했다. 알렉상드르는 프랑스와 폴란드를 오고 가며 외교관을 역임했으며, 프랑스 의회의 장도 역임했다. 그는 위의 샤를 레옹과 달리 아들이 죽지 않아 대를 이어 지금까지 그 후손이 존재한다.

알렉상드르의 탄생은[43] 나폴레옹의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데 바로 나폴레옹이 자신도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과 조제핀의 결혼 뒤 둘 사이에서는 아이가 전혀 없었는데 조제핀이 이미 두 아이의 엄마였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아이가 없는 이유를 자신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44] 때문에 엘레오노르 드누엘이 아들 샤를 레옹을 낳았을 때도 샤를 레옹이 진짜 자신의 아들이 맞는지 약간 의심하고 있었다.[45] 하지만 잘 노는 스타일이라 바람 피웠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았던 엘레오노르와 달리 마리아 발레프스카가 나폴레옹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지극히 헌신적이라는 사실은 주위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폴레옹 자신까지 모두 공인하는 사실이라 마리아가 임신한 아이가 나폴레옹의 친자식이라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당시 나폴레옹은 자신의 소생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것을 반쯤 포기하고 조제핀의 딸인 오르탕스와 자신의 동생 루이를 결혼시켜 두 사람 사이의 소생에게 제위를 물려줄 생각이었지만 자신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자신의 후계자를 낳을 결심에[46] 조제핀과 이혼하고 유럽 왕실 가운데서 자신의 후계자에게 혈통의 권위를 안겨줄 적절한 상대를 찾게 되고 결국 오스트리아의 마리 루이즈와 결혼하게 된다.

마리아의 남편 발레프스키 백작은 자신의 아내가 나폴레옹과 외도해서 낳은 알렉상드르를 자신의 아들로 입적했을 뿐 아니라 주위에도 자신의 아들로 소개했으며 죽을 때는 상당한 유산도 물려주었다. 알렉상드르 본인도 자신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아들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끝까지 자신은 발레프스키 백작의 아들이라고 주장했으며 주위 사람들에게도 이를 어필했다고 한다.[47] 마리아는 1816년에 나폴레옹의 6촌인 필립 앙투안 도르나노(Philippe Antoine d'Ornano)와 재혼하였다. 기병 장교 출신인 도르나노는 나폴레옹이 그녀를 데리고 다니던 울름 전역 시절부터 알던 사이였는데, 그는 예전부터 마리아를 사모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군이자 사촌의 연인에게 마음을 드러낼수는 없었던지라 그저 먼 발치에서 그녀를 지켜만 보아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발레프스키 백작이 늙어서 사망하여 그녀가 공식적인 미망인이 되자 마리아에게 수차례 청혼을 하였고, 그녀도 결국 이를 받아들였다. 둘은 벨기에 리에주의 저택에서 회고록등을 작성하며 살았으며, 마리아는 아들 루돌프 오귀스트(Rodolphe-Auguste)를 낳고 이듬해, 신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알렉상드르는 세 번 결혼했는데 처음에는 영국의 6대 샌드위치 백작(Count of Sandwich)인 조지 몬터규(George Montagu)[48] 딸 캐서린과 결혼해 한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두었으나, 요절했다. 두 번째로는 교황청의 서기의 딸과 결혼해 한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을 두었으나 아들은 결혼하지 않고 죽었고 딸 한 명은 요절하고 나머지 두 명의 딸만이 결혼하여 자식을 두었다. 마지막으로 알렉상드르는 앞서 결혼한 두 명의 여자와는 출신이 완전히 다른, 라쉘 펠릭스(Rachel Felix)라는 여자와 결혼했는데, 이 여자는 다름 아닌 연극 배우였다. 라쉘은 한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 이름이 알렉상드르 앙투안이었으며, 알렉상드르 앙투안은 결혼하여 앙드레 알렉상드르 마우리스(Andre Alexandre Maurice)라는 아들을 낳고, 앙드레 알렉상드르 마우리스는 결혼하여 앙투안 레옹 샤를(Antoine Leon Charles)이라는 아들을 낳고 앙투안 레옹 샤를은 두 명의 아내를 두어 여러 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그중의 가장 큰아들이 알렉상드르 콜로나 발레브스키라는 사람으로, 지금 프랑스에서 생존 중이다. 사진을 보아하니 80대는 되어 보이시는 듯. 링크 앞서 언급했듯이 그의 조상 알렉상드르의 마지막 부인이 당시 하찮은 직업 중의 하나였던 연극 배우인 라쉘이었는데, 정말 현재 생존 중인 알렉상드르 옹(翁)이 그의 친 자손이자 곧 나폴레옹의 친 자손인지 확인하기 위해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의 후손인 샤를(위 장 크리스토프의 아버지)의 DNA와 알렉상드르 옹의 DNA를 비교해 보았더니, 놀랍게도 일치했고, 알렉상드르 옹은 실제로 나폴레옹의 생물학적 후손임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이미 보나파르트 가문의 수장은 제롬의 후손이 딱 잡고 있기 때문에 알렉상드르 옹은 가문 승계 문제에 간섭하지 않고 조용히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가끔 나폴레옹 관련 행사에 참여하고도 있는 것 같다. 워털루 전투 200주년을 기념해 열린 행사에 참가한, 현재 로마노프 왕가의 수장인 드미트리 왕자(좌)와 알렉상드르 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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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과 그의 애인 마리아 발레브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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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 콜로나-발레브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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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의 첫 번째 부인 캐서린 캐롤린 몬터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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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의 두 번째 부인 마리아 안나 디 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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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의 세 번째 부인 엘리사벳 라쉘 펠릭스

8. 기타

이탈리아어어로는 Napoleone di Buonaparte (나폴레오네 디 부오나파르테), 프랑스어로는 Napoléon Bonaparte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코르시카어로는 Nabulionu Bonaparte (나불리오누 보나파르테)라고 부른다.

나폴레옹을 신으로 숭상한 니콜라 쇼뱅(Nicolas Chauvin)의 일화에서 맹목적인 애국심을 뜻하는 쇼비니즘(chauvinism)이란 용어가 나왔다. 다만 쇼뱅은 가공인물로 여겨진다.

번외격인 이야기로, 나폴레옹이 전쟁터에서 정찰을 하던 도중 잎이 네 개인 클로버를 발견하고 신기하여 고개를 숙였더니, 총알이 나폴레옹의 모자를 뚫고 지나갔다는 에피소드 덕분에 네잎 클로버가 행운의 상징이 되었고, 나폴레옹이 전장에 나설 때마다 늘 도서관 마차를 만들어 끌고 다니면서 책을 읽는 애독가였다는 사실은 뭇 책벌레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49] 다만 한 번 읽은 책은 보관하지 않고 길가에 내던져 버리는 요상한 버릇이 있었다. 이는 자신이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지나가던 사람이 주워보고 똑같은 감동을 느끼라는 의미의 행동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번외 격으로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대승을 거두고 이집트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 피라미드에 들어가 잤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에 어떻게 된 일인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무서운 듯이 피라미드에서 뛰쳐나와서 다짜고짜 하는 말이 "앞으로 피라미드에 대해 한 마디도 꺼내지 마라!"였다고 한다. 이후 세인트 헬레나에 유배당한 뒤 친한 친구들이 나폴레옹에게 피라미드에서 무엇을 봤냐고 물어보자 뭔가를 말하려던 나폴레옹은 갑자기 마음을 바꿔 손을 저으며 '됐어. 어차피 말해봤자 안 믿을게 뻔한데 뭐하러 말하겠냐'라고 했다고 한다.[50] 여러 주장들 중 하나를 말하자면 나폴레옹이 피라미드 안에서 본 것은 바로 자신의 미래의 모습이라고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폴레옹은 이미 아주 오래전에 죽고 없으니까 사실인지 확인할 길도 없기에 학자들도 답답한 노릇일 것이다. 여하간 그냥 그런 떡밥이 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수행비서였던 Louis Antoine Fauvelet de Bourrienne의 글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피라미드 안에 들어간 적이 없다고 한다.
7월 14일, 나폴레옹은 피라미드를 둘러보기 위해 카이로를 떠났다. 원래는 멤피스의 네크로폴리스 고대 유적을 삼사일간 조사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가 갑자기 계획을 바꾸었다. 이때의 피라미드로의 여정은 전쟁과 맞물려 한 가지 로맨틱한 일화를 낳게 내게 되는데, 일부 원주민들이 나폴레옹이 이슬람 율법학자들을 접견한 것과 연관 지었는지 이야기하고 다니길, 그가 피라미드 안에 들어서자 '알라께 영광을! 신은 오직 알라뿐이며 무함마드는 그의 선지자다!'라고 외쳤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이렇다. 나폴레옹은 피라미드에 들어간 적도 없다. 심지어는 들어가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사막에서 한시도 그의 곁을 떠났던 적이 없으므로 만약 그가 피라미드에 들어가 보았다면 나 역시 따라 들어갔었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피라미드 밖에 있는 동안 몇 사람을 시켜 대 피라미드 안에 들어가 보게 한 뒤 그들이 돌아오자 안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물었다. 그들이 보고하길 '아무 것도 볼 게 없었습니다!'라고 했다."[51]

수학과 과학에 상당한 조예와 관심이 있었던 듯, 이집트 원정 때도 아예 현지 학술원을 만들기 위해 명망있는 학자들을 끌어모아 동행시켰으며 현지에서 이 학자들과 여러 차례 학술적 토론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단순한 토론 정도가 아니라 '이집트지'라는 이집트학 학술지까지 현지에서 만들게 하고 거기 참여하기도 했다. 이 '이집트지'는 근대적 이집트 고고학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개중엔 "내가 군인 말고 학자를 했으면 아이작 뉴턴[52] 정도로 대성하지 않았을까?"라고 던졌더니 학자들이 "ㄴㄴ 님이 아무리 뛰어나도 뉴턴만큼은 아님"이라 대답해 빡쳤다는 일화도 있다. 단, 당시 프랑스에서는 이게 별난 일이 아니고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1800년 전후 프랑스에서 가장 수학과 과학에 정통했던 집단이 공병과 포병 장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한가락 했다 하는 프랑스 수학자나 물리학자들 명단을 보면 죄다 에콜 폴리테크닉[53]에서 공부하고 군에서 공병이나 포병 장교로 복무한 경력이 있다. 군대에서 응용되는 공학기술(축성술, 탄도학, 대포 제조법 등등)의 기초로 수학이나 과학을 체계적으로 교육시키는 기관이 공병/포병 장교 사관학교뿐이었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됐듯이 나폴레옹은 엘리트 교육을 받은 정통 포병 장교 출신이다. 당연히 당대 기준으로 상당한 수준의 수학, 과학, 공학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오오! 이공계 황제, 오오! 이뿐만이 아니라 유명한 수학자들과 과학자들의 저서들에 직접 주석을 달기도 했다고 한다.[54]이렇게 전문 학자 수준으로 수학, 과학 지식을 갖추고 수학자들과 과학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탓에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탈출해 프랑스 황제 자리에 복위했을때 수학자들과 과학자들이 나폴레옹의 황제 복위를 가장 지지했다는 말이 있다.

위의 '이집트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관심과 재능은 수학-과학으로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역사적인 관심과 교양 또한 뛰어났으며, 젊은시절 루소의 계몽주의적 작품에 심취하여 문학 공모전에도 출품을 시도하는 등 인문학적인 소양도 상당할 정도로 가지고 있는, 말 그대로 다방면에 있어서 상당한 수준의 인물이었다.

체스를 좋아했지만 실력은 별로였다고 한다.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었을 때 나폴레옹을 탈출시키려는 추종자들이 체스판에 탈출 계획을 숨겨서 보냈는데 그걸 얘기해줘야 되는 장교가 가는 도중 죽어서 나폴레옹은 자신의 탈출 계획이 숨겨진 체스판에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르고 사망했다라는 말도 있으나 근거는 없다. 세인트헬레나 시절 측근들의 기록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탈출계획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하인 중 하나가 총독 허드슨 로를 죽이려고 계획한 사건이 벌어지자 이에 대노하여 그 하인을 혼냈을 정도로 나폴레옹은 물리력을 사용하거나 탈출을 하는 등의 행위를 거부했다.

백년전쟁 당시 위기에 몰린 프랑스를 구한 업적에 비해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무명인 취급 받으며 잊혔고, 공화파로부터는 더욱 천시 당하던 잔 다르크를 다시 부각시켜 영웅시한 것도 나폴레옹의 집권 시대 때이다. 자신과 잔 다르크가 벽지 출신이고 대포를 주무기로 다뤘으며 영국과 맞섰다는 공통점이 있음을 내세웠다. 잔 다르크가 별 볼일 없는 인물이었는데 나폴레옹에 의해 조작되고 부풀려진 영웅이라는 일부 수정주의적 인식도 다소 과장된 면이 있다. 자세한 건 잔 다르크 항목 참조.

종교대해서 거의 무신론에 가까운 견해를 가졌다.특히 카톨릭을 싫어했으며 비오 7세와의 불화도 그렇고, 종교를 일종의 필요악으로 취급하였다. 일단 스스로도 종교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그는 '인간의 필요성이 종교를 탄생시켰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55]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본 것과 달리, 이슬람교에는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군인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도 자리잡는데만 수백년이 걸린 기독교와 다르게, 단 몇십년만에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페르시아를 정복한 이슬람 제국이야 말로 더 뛰어나다고 평가하였다. 더불어 아무것도 못 이룬 예수보다는 맨땅에 헤딩하는 수준으로 시작해서 왕에 준하는 자리에 오른 무함마드야 말로 훨씬 유능한 인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56] 이집트 원정때도 개종을 고려하기도 했으며, '동방의 영토와 부를 손에 넣을수만 있다면 개종 따윈 몇번이고 할수 있다'고 발언하였다.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와는 거의 숙적 관계로 취급받지만 사실 꽤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다.

유배지에서의 공책이 경매에 올랐는데 영어 공부[57]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그런데 잘하지는 못했다. run의 과거형은 ran인데 runned라고 우직하게 한 페이지를 채워놨다고 한다. 영국 정복에 성공했으면 불규칙 변화를 모조리 없애 버리고 ran을 runned로 바꿔버리는 세계적 대업적을 이룩하지 않았을까.[58] 영어 공부가 쉬워질 수 있었는데 아쉽다 영어 공부가 아니라 프랑스어 공부를 하지 않았을까

지금은 폐지되었지만 프랑스 프랑 지폐에 등장한 인물 중 하나다.

파리를 여행하다보면 다리나 궁전 같은 건축물에 월계수 안에 N자가 있는 부조를 대단히 많이 볼 수 있는데 나폴레옹과 조카 나폴레옹 3세가 열심히 새겨준 덕분이다.

2014년 11월 16일에 모나코 왕실에서 보유중이던 나폴레옹의 이각모를 경매에 내놓았는데 하림 그룹의 김홍국 회장이 낙찰 받았다.# 문제는 무려 26억원 가까운 돈을 주고 샀는데 하림 그룹의 여러 문제로 투자자들 비난을 받던 중에 이런 것. 게다가, 나폴레옹이 쓰던 칼에서부터 여러가지까지 경매로 11억원을 주고 사서 이게 언론으로 알려지면서 투자자들에게 욕을 처먹었다.

국제학술대회 등지에 간간히 모습을 드러내던 이 모자는 2017년 현재 판교테크로밸리 NS홈쇼핑 별관 1층 나폴레옹 갤러리에 나폴레옹의 검 등, 몇몇 전시품과 함께 무료로 상설 전시되어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넥슨코리아, 네오위즈, NHN본사가 근방에 있으니 이곳에 들릴 방문객이 있다면 둘러봄직 하다.
말 위에서 도시를 살펴보는 황제를 - 그 절대 정신을 - 나는 보았다.
게오르크 헤겔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역사를 이끌어가는 절대 정신(absoluter Geist)이란 개념을 만들었으며, 나폴레옹이 독일을 집어삼켰음에도 그를 절대 정신의 화신으로 보며 찬양했다.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절대 정신이 나폴레옹이 이룰 혁신들을 통해 구현되리라고 보았던 것.

나폴레옹의 대관식 초상화에 셉터와 같이 등장하는 흰색 손가락 모양은 '정의의 손'이라는 것이다. 왕의 권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 나폴레옹 외의 초상에서도 가끔 보인다. 본래 샤를마뉴 대제 때부터 내려온 상징으로서 보석으로 만들었지만 프랑스 혁명기에 분실되어 상아로 만들었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다.

8.1. 짧은 수면에 관한 진실


[59]

나폴레옹은 잠을 효율적으로 자는 자의 대명사로 꼽히기도 한다. 3~4시간만 자고 부족하다 싶으면 위에서 토막잠을 자기도 했다는데, 사실 당시 장교들이 전쟁 중에 맘 놓고 자기 힘든 상황이었으니만큼, 좀 과장된 면도 없잖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나폴레옹은 항상 자기가 잔 것보다 적게 잤다고 생각했다는 식의 말도 있다. 하지만 확실히 당대 기준에서 봐도 수면 부족이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 젊은 시절부터 마치 발작하듯 그 자리에서 쓰러져서 바로 잠들어버린 적도 있다고 하니...

그러나 나폴레옹은 잠을 결코 적게 자지 않았다. 나폴레옹이 사관학생 시절, 다들 코르시카 촌놈이라고 무시했지만 브리엔이란 동기만 유일하게 친하게 지냈고 이 인연으로 부관이 되었던 브리엔이 남긴 기록을 봐도 불면증 때문에 못 잔다고 투덜거린 게 많았다고 한다. 브리엔은 나폴레옹빠였지만 늘그막까지 나폴레옹이 잠을 적게 잤다고 하면 왜곡하지 말라며 반론했다. 그 밖에도 프랑스 사학자 Roger Chartier의 연구에 의하면, 야간의 수면 시간이 2~3시간이었을 뿐, 1일 동안 토막잠을 잔 시간까지 합치면 최소한 6시간 이상이었다고 한다. 더구나 불규칙한 생활 덕분에 불면증까지 겹쳤기에 적게 잤을 뿐이지, 노력근성으로 졸음을 참은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저렇게 수면이 불규칙적이다 보니, 한번 잠이 들면 주변에서 깨우는 것을 엄청나게 싫어했다고 한다. 한 번은 연회 도중에 잠든 나폴레옹을 깨우려고 측근들이 그가 좋아하는 치즈를 가져다 줬는데, 그 냄새를 맡던 나폴레옹이 돌연 '오늘은 피곤하니 안 되겠소 조세핀'이라 잠꼬대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체취와 치즈 냄새도 구분 못할 만큼 넉다운 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저 광고가 아주 엄청나게 중대한 실수를 하나 하고 있는데, 보나파르트 가문은 코르시카의 귀족이다. 나폴레옹의 직계 조상인 자코보 부오나파르테는 교황 클레멘트 7세와 메디치 가문의 친구이자 측근이었고, 15~16세기에는 르네상스 피렌체의 상당히 힘 있는 명문가였다. 16세기 후반에 정권 다툼에 휘말려 코르시카로 망명을 갔으나, 코르시카에서도 지방 귀족 가문으로, 비록 섬 밖에서 크게 떵떵거릴 위세는 아니지만, 현지에서는 상류층에 속했으며, 경제적 사정도 아버지의 사치만 빼면 그럭저럭 잘 살았다. 나폴레옹의 아버지 카를로 부오나파르테는 코르시카 독립 혁명가 파스콸레 파올리의 동지였으며, 루이 16세의 궁정 내 코르시카 대변인이기도 했다. 가문이 살던 현지의 부오나파르테 저택은 당시로나 지금으로나 상당히 좋은 편에 속하며, 인근에는 나폴레옹의 조상들이 매년 사용하던 가문의 여름 별장도 따로 있다. 이런 배경이 있었던 덕분에, 나폴레옹도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좋은 교육을 받으며 일찍부터 큰 세상에 발을 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나폴레옹의 유년 시절은 결코 빈곤하지도, 처량하지도 않았다. 그가 활동한 프랑스 본토에서야 어찌 되었건 프랑스에 편입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외딴 섬 촌놈이라서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였던 거지, 나폴레옹의 배경을 현대로 치면, 한국에서는 차관급이나 중견기업 집안 출신인 사람이 미국에 좋은 사립대학에 유학갔는데 주변인들은 미국의 장관급이나 포춘 500대 기업의 집안 출신이라 상대적 빈곤감을 느꼈던 셈이다.

포털 사이트에서 '나폴레옹 잠(혹은 수면)'으로 검색하면 나폴레옹 수면법이라는 출처불명의 유사과학 같은 헛소리까지 나와서 마치 나폴레옹이 잠을 컨트롤해서 성공한 것처럼 포장하기도 하며, 이 수면법을 자신에게 정착시키는 동안엔 해서는 안 되는 것까지 규정해놓고는 하는데, 정작 이 중에선 나폴레옹이 즐겨 했던 목욕 역시 금지되어 있다고 하니 신빙성이 떨어지는 요법이다. 일부 책에서는 나폴레옹이 바보는 6시간, 여자는 5시간, 남자는 4시간을 잔다는 말을 했다고 쓰기도 했다. 남녀노소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려면 늦어도 10~12시에는 잠자리에 들어 6~10 시간 이상 자야 한다.[60] 그러나 나폴레옹이 그런 불규칙적이고 부족한 수면으로 건강을 망쳐서 워털루 전투 같은 큰 전투에서 패인(敗因)이 되었다는 것은 철저하게 숨긴다. 그리고 비교적 1년 정도 짧은 시간에 공부에 전력매진해야 되는 입시생이라면 모를까, 일반 성인이 이따위 짓을 하다가는 건강을 해칠 뿐더러 카오너에게는 졸음운전까지 유발하는 그야말로 자살,민폐행위나 다름 없다.

8.2. 나폴레옹의 평상시 일상

나폴레옹은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났다. 일어나면 가장 먼저 두 시간 동안 욕조에 푹 잠겨 있으면서 비서가 읽어 주는 영국독일 신문의 번역본을 듣거나, 비서에게 자기가 불러 주는 편지를 받아쓰게 했다.

그 후에는 아침을 먹을 때까지 탄원서를 처리하거나 종종 탄원자 본인과 면담을 했다. 하루는 기술학교 (에콜 폴리테크니크) 입학을 거부당한 한 유망한 젊은이가 겁도 없이 무작정 황궁으로 찾아와 나폴레옹을 알현하게 해 달라고 들이댄 적이 있었는데 나폴레옹은 즉석 면접을 본 뒤 교장은 이걸 읽는 즉시 얘를 입학시키라는 친서를 써 주었다.

아침 10시에 아침 겸 점심을 먹었고, 오후 5시에 저녁을 먹었다. 음식 취향은 소박해서 프로방스 스타일의 치킨감자튀김, 물을 탄 와인이면 만족했다.

여가 시간에는 사냥의 명수였던 베르티에 원수와 함께 코르시카식 토끼 사냥을 즐겼다. 한 번은 담당관이 실수로 길들여진 토끼들을 사오는 바람에 토끼들이 나폴레옹에게 몰려드는 해프닝도 있었다. "와~ 황제다~"

부하들과 카드놀이를 하기도 했는데, 황제가 되고 나서는 종종 밑장을 빼곤 했다. 이젠 자기가 황제니 눈치채도 판을 엎기는커녕 티도 못 내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연극 매니아라서 생클루와 말메종의 양쪽 황궁에 모두 황제 전용 극장을 지을 정도였으나 오페라 매니아였던 조제핀과는 영 취미가 맞지 않았다.

연회자리에서 흥겨우면 종종 친히 노래를 하곤 했는데 노 장군의 부인 로르 쥐노가 회고하기를 나폴레옹이 노래를 불렀다 하면 연설을 할 때의 그 근사한 목소리는 대체 어디로 간건지 돼지 멱따이는 소리로 꽥꽥거려서 연회가 백이면 백 갑분싸해졌다고 한다.[61]

8.3. 식사 습관

식사 습관도 지금 기준에서 보면 문제가 많은 편인데, 황제가 된 뒤에도 15분 이상 식사하는 법이 없었다고[62] 할 정도로 무척 빨리 먹는 편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꾸벅꾸벅 졸면서 대충 먹어치우고 곯아떨어질 때도 있었다고 하는데, 선천적으로 위장이 약했다는 걸 생각하면 이런 식생활로 건강이 나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세인트헬레나로 쫓겨났을 때 불과 46세였는데, 그로부터 6년밖에 못 살고 죽은 것도 (독살설을 제쳐두고 보자면) 이전부터 건강이 별로 좋지 않은 데다, 제대로 관리도 하지 못한 것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러한 수면 부족과 급히 먹는 식습관이 훗날 건강에 악영향을 주고 몇몇 중요한 전투에서 패인으로 작용했다.

8.4. 나폴레옹의 정리

기하학 공식 중의 하나.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8.5. 벳시 발콤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과 벳시 발콤이라는 소녀와의 이야기를 다룬 "벳시와 황제"라는 소설이 유명한데,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대부분은 작가의 상상력에 기반한 소설이다. 다만, 나폴레옹이 거주한 롱우드 지역에 발콤이라는 가족이 살았고, 그 집의 자녀인 딸 두명이 나폴레옹과 친하게 지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기록된 사실이다.[63]

9. 대중매체

9.1.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서 선악과를 가졌던 인물로 밝혀지며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에서 장교로 활동하던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9.2. 그 외

일단 나폴레옹 전쟁은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벌어진 전 유럽의 운명을 놓고 일어난 최후의 대규모 전쟁이므로 수많은 소설, 영화, 드라마, 게임 등에 소재로 쓰이고 있다.

전쟁과 평화에서는 사실상 진주인공 포지션이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에도 나폴레옹이 언급된다. 나폴레옹이 직접 등장하는 것은 아니고, 에드몽 당테스가 누명을 쓰고 인생이 망가지게 되는 배경이 나폴레옹의 편지를 외부로 전달했다는 것이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짐 커비즐이 주연한 2002년 영화에는 초반 섬에 들른 에드몽에게 직접 자신의 명령이 담긴 편지를 부하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코난 도일의 전설적인 추리 소설 시리즈인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는 주인공인 셜록 홈즈가 존 왓슨에게 자신의 라이벌이자 영국 범죄 조직의 우두머리인 제임스 모리아티를 '범죄 세계의 나폴레옹'이라고 묘사했다.

현재까지 나온 나폴레옹이 주연인 영상매체로 가장 유명한 것은 1927년작 영화 '나폴레옹'과 70년작 워털루 및 2002년 제작된 프랑스의 TV 미니시리즈 Napoléon이 있다. 아벨 강스의 27년작 나폴레옹은 무성영화 시절 막바지 들어 영화에 대한 감독들의 권한이 극에 달해 있던 시절에 만들어진 영화인데, 1부부터 6부까지 연이어 만들어질 계획이었으나 1부만 해도 그 내용이 330분(!!)에 달했고, 거기에다가 후반부의 전투 장면은 1.33:1 화면 세 개를 붙여서 만들어진 4:1 화면으로 상영해야만 했다. 이런 엄청난 길이와 전례 없는 기술적인 난제 때문에 영화는 일부 공간에서만 제한적으로 상영되었고, 영국과 미국에 가서 본격적으로 돈을 벌어야 할 때 즈음에는 유성 영화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묻혀버렸으며, 그나마도 4:1 시퀀스가 전부 1.33:1로 잘려나가고 러닝타임이 훨씬 더 짧아지는 등 수많은 부분들이 잘려나간 뒤에야 상영될 수 있었다. 당연히 영화는 상업적으로 실패했고, 나폴레옹 2~6부는 촬영조차 들어가지 못했다. 이 영화는 1980년에 가서야 완전하게 복원되었지만 [64], 이나마도 VHS레이저디스크로 발매된 이후 한동안 홈미디어로 발매되지 않았으며 [65], 오늘날에도 1~2년에 한 번씩 대형 오페라 극장에서 오케스트라 반주와 함께 상영되어야만 운 좋게 볼 수 있다. 영화 자체는 후기 무성 대작들 중에서 최고 수준은 아닐지라도 그 사치로운 세트 구성과 기술적인 대담함은 여전히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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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시리즈는 크리스티앙 클라비에(나폴레옹 역) , 제라드 드 빠르디유(푸셰 경시총감 역), 이사벨라 로셀리니(조세핀 역) 등등 당대 프랑스 최고의 배우와 존 말코비치(탈레랑 외무장관 역)가 출연한 걸로 화제를 모았다. 유투브에서도 나폴레옹 관련 검색어에서 빠지지 않은 작품. 특히 아스테릭스나 비지터 시리즈 등 코미디 연기로 그동안 알려젔던 크리스티앙 클라비에가 열연한 나폴레옹은 그간 나폴레옹을 맡은 배우 중 실제 인물과 가장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말코비치 역시 당대 최고의 외교관이자 책략가로 유명했던 탈레랑의 모습을 훌륭히 보여주었다. 라 마르세예즈와 합성한 동영상도 유투브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라 마르세예즈 그 외 콜드플레이Viva la vida와 합성한 동영상도 찾아볼 수 있다. 본래 이 곡은 샤를 10세몰락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곡이지만 가사 내용이 나폴레옹의 삶과도 매치되는 부분도 있어서 종종 합성되는 듯. Viva la vida와 합성한 동영상

Commands and Colors Napoleonics, 줄여서 C&C 나폴레옹이라 불리는 보드 게임이 나폴레옹 전쟁을 다룬다. 이외에도 나폴레오닉 워(The Napoleonic Wars), 나폴레옹의 승리(Napoleon's Triumph), Manoeuvre, 야전사령관-나폴레옹(Field Commander: Napoleon) 등등 나폴레옹 전쟁을 다룬 보드게임은 정말 많다. 나폴레옹 전쟁 관련 보드게임만 모아놓은 자료

토탈워 시리즈나폴레옹: 토탈 워는 나폴레옹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졌다. 그런 이유인지 플레이 도중 나폴레옹만은 부대가 전멸해도 죽지 않고 부상당해 본국으로 귀환했다는 메세지만 뜨고 나중에 다시 돌아온다. 그래도 부상당해서 본국 귀환하면 레벨이 떨어지니 조심해야 한다.[66] 캠페인하면서 경험치가 쌓여서 자동전투를 시키면 두 배 정도의 적은 간단히 이긴다.

코에이에도 나폴레옹을 소재로 한 게임으로 1990년에 발매한 랑펠로(정확한 독음은 랑페뢰)가 있다. 다만 모든 코에이 게임들 중 가장 어려운 데다[67] 후속작이 안 나온 관계로 삼국지 시리즈신장의 야망 시리즈에 비하면 인지도가 매우 낮은 편이다.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 확장팩에서는 나폴레옹 전쟁 루트에 맞춰진 세계 정복 캠페인을 플레이할 수 있다.

문명 5에서는 프랑스의 지도자로 나온다.

유로파 유니버셜리스 4에서는 프랑스 대혁명 도중에 이벤트로 등장한다. 군주로서의 능력치는 6/6/6으로 본 게임내 최고 수준. 원래 유럽 깡패인 게임 내의 프랑스와 혁명 효과, 나폴레옹의 능력치가 합쳐져 실제 역사대로 전 유럽 영토에 삼색기를 휘날릴 수 있다.

유로파 유니버셜리스 갤러리의 갤주로 인정받고있다.

근육맨2세에 따르면 실은 시간초인이었다고 한다.

진정남 나폴레옹이라는 만화도 있다.(원제는 '사자의 시대 - 나폴레옹'.)

#링크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보자. 이게 나폴레옹인지, 켄시로인지 싶어질 거다.

참고로 이 만화의 작가는 문명 5 출시 기념으로 나폴레옹을 주인공으로 문명 홍보 만화를 그혔다.

한국만 해도 어린이들이 읽는 위인전 시리즈에 그가 나오지 않은 시리즈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의 1세대 판타지 소설 불멸의 기사 2부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시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당연히 등장한다. 그런데 나폴레옹의 정체를 다름 아닌 루이 16세로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 충격과 공포다.

국내 웹툰 플린트 락 머스킷은 나폴레옹 전쟁을 배경으로 한 수인물이다. 주인공 로제타 듀베르는 용기병[68] 여성이지만 나폴레옹 본인도 수인화되어 출연한다.

역시 용을 다룬 대체역사소설 테메레르 시리즈에서도 당연히 등장했다. 간지폭풍 절대군주로 나온다.

포켓몬스터엠페르트는 나폴레옹이 모티브. 이름의 조합이 황제를 뜻하는 영단어 Emperor+보나파르트다.

나폴레옹의 명성 때문에 19세기에서 20세기 초의 유럽 대체역사소설계에서는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이겼다면 어떻게 됐을까?"라든지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했다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대체역사적 가정이 단골 떡밥이 되었다. 그런데 정작 역사학자들이 다룬 대체역사인 What if에서는 나폴레옹이 중간에 전쟁을 그만두고 정치와 외교로 해결을 했다면 어땠을까, 라는 가정을 하고 있다. 만일 나폴레옹이 틸지트에서 승리하고 조약을 맺는 과정에서 좀 더 너그러운 방향으로 조약을 맺었다면, 유럽은 나폴레옹의 손을 들어줬을 것이고, 결국 영국도 굴복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챕터의 제목이 우주의 왕 나폴레옹이다.

해리터틀도브의 대체역사소설 "두 명의 조지"에서는[69] 프랑스 왕가가 1980년대까지 존속하게 된 영웅으로 묘사된다. 루이 16세의 목숨을 노리는 파리 민중들에게 대포 사격을 하는 바람에 소요를 진압한 장교가 바로 나폴레옹이다.

겁스 무한세계의 '보나파르트' 세계들은 나폴레옹이 승리한 평행세계들이다. 그 중에 하나인 보나파르트-6은 나폴레옹이 이탈리아인으로 태어나 통일 이탈리아를 건국했다![70] 또한 레비아탄이라는 세계에서는 바다에서 아틀란티스인들이 갑툭튀해서 프랑스가 시망하자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 지대에서 모래제국을 건국했다.

한국에서 나폴레옹 관련 영화를 하면 주로 양지운이 더빙을 맡는다.

코드 기어스 시리즈에서는 현실 역사와 달리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 해군을 관광보내고 영국에 상륙[71], 영국 왕실과 귀족들이 신대륙으로 피난케 함으로써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이 건국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원래 설정으로는 전 유럽의 황제가 되었으며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직후 독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았으나, 코드 기어스 망국의 아키토에선 황제가 되지 않고 공화정의 장군으로서 살았던 걸로 설정이 변경된 것 같다.

베르사유의 장미 6권(완전판 기준)에서 지나가는 포병장교로 잠시 등장한다. 스무 살의 라 페르 포병연대 소위로 나온다. 죄드폼의 맹세 사건이 터져서 심란해 하던 오스칼이 스쳐 지나가다 눈빛에 매우 놀라 식은 땀을 다 흘리며 나폴레옹을 불러세운 후 관등성명을 묻고 그 이름을 기억해둔다. 이후 다시 식은 땀을 흘리며 '사람의 몸을 얼어붙게 할 것 같은 그런 눈빛이야..! 보통 사람의 눈이 아냐'('앙드레, 저 눈빛 봤니? 저건 독수리의 눈빛이야. 제왕의 눈이야!'라고 말했다는 말도 있다.')이후 에필로그에서 황제에 즉위한 모습으로 한 컷 등장한다.

그리고 이케다 리요코는 베르사유의 장미 연재를 마친 후 '황제 나폴레옹'이라는 만화책을 냈다.

라이트노벨 악성소녀에서는 나폴레옹이 초능력을 지닌 마왕으로 나온다. 참고로 이 작품에서는 하이든이 근육 떡대인 격투가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찍은 이후 나폴레옹에 관한 대작을 찍기 위해서 고군분투했지만 세르게이 본다르추크 감독의 1970년 작인 워털루가 쫄딱 망하면서 투자를 못 받아 계속 연기했고 결국 죽을 때까지 꿈을 이루지 못했다. 나폴레옹 역으론 잭 니콜슨이 낙점된 상태였는데 잭 니콜슨은 큐브릭에게 나폴레옹 역을 제안받고 매우 기뻐했으며 큐브릭이 자신을 불러주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으나 그 전에 큐브릭이 세상을 떠나면서 무산되었지만 니콜슨은 이 인연으로 샤이닝의 잭 토렌스 역으로 출연하게 된다.[72]

키아누 리브스가 이름없던 시절 나온 영화 엑설런트 어드벤처(1989)에서는 우연히 타임머신에 타게 되어 현대 미국으로 오는데 현대 세계에서 바로 수영장[73]의 미끄럼틀에 반해 종일 그것만 타고 논다. 두 주인공이 친척 아이에게 부탁하여 맡기는데 나중에 그 아이가 "형, 저 바보 남잔 대체 누구야?"라고 질문한다. 주인공 둘이 나폴레옹이라고 답변하자 "웃기지마! 미끄럼틀만 종일 타고 아이스크림만 신나게 먹는 저런 띨띨이가 나폴레옹이라고?"라며 전혀 믿지 않는다. 사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위인들이 죄다 맛탱이가 가서 현대 미국에서 활약하긴 한다. 칭기즈 칸은 백화점에서 마네킹을 신나게 부수고 잔 다르크는 에어로빅 강사를 칭하며 신나게 에어로빅을 춤추듯 하다가 진짜 에어로빅 강사와 경비원들에게 끌려가며 빌리 더 키드는 백화점에서 미치도록 총을 천장에 쏘다가 경비원들에게 끌려가고 베토벤은 전자 키보드를 신나게 연주하며 프로이트는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손님들에게 정신분석학을 연설하는데 사람들은 어안이벙벙하게 바라보고 에이브러햄 링컨은 백화점 안에서 연설하는데 사람들이 무슨 미친 놈 바라보듯이 한다.

나폴레옹 전쟁이 배경인 혼블로워에서는 주인공이 영국 해군이다보니 절대악으로 묘사가 된다. 그리고 주인공 혼블로워의 활약은 나폴레옹에게 치명타를 준다.

1994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뮤지컬 나폴레옹이 초연이 올라왔고 큰 인기를 끌었다. 2017년 7월, 라이센스 공연이 샤롯데시어터에서 올라왔다. 나폴레옹 역에는 한지상, 임태경, 마이클 리가 캐스팅됐다. 조세핀 역에는 정선아(뮤지컬 배우), 박혜나, 홍서영이 캐스팅 됐다. 여기서 특히 한지상의 광기 넘치는 나폴레옹 연기가 압권이다. 다만 여기에서의 나폴레옹은 전쟁광의 이미지만 보이고, 정치면에서는 시종 일관 탈레랑에게 이용당하는 것으로 나와, 실제 나폴레옹보다 못한 모습으로 묘사돼 나폴레옹 팬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하고 파리로 진격할 때, 권력의 변화에 따라 태도가 달라졌던 대표적인 당시 신문이였던, 프랑스 대혁명 당시 프랑스 시민들과 혁명 정부를 지지해 시민들의 지지를 얻은 신문이였지만 나폴레옹 집권 후 변절해 철저한 친나폴레옹 신문을 표방하다가 나폴레옹의 엘바섬 유배와 루이 18세의 등극 이후 철저한 반나폴레옹 신문으로 돌아섰다가 나폴레옹의 엘바섬 탈출후 다시 극적으로 입장을 바꾼 '모니퇴르'지를 비꼬는 유머가 있다. 버전은 여러 가지로 다르지만, 나폴레옹에 대한 호칭이 멸칭에서 점점 경칭으로 바뀐다는 것이 포인트다.

Fate 시리즈에서 아처 클래스로 등장했다. 자세한 것은 나폴레옹(Fate 시리즈) 참조.

워낙 유명한 인물이다 보니 대한민국의 광고에서도 몇 번 활용되었는데 몇몇 광고들은 그냥 선전에만 관심을 두고 고증(따위는 쿨하게 씹어 버려서 역덕후들의 분노를 자아내게 하였다. 짧은 수면에 관한 진실 단락에 제시된 광고는 영상 밑 주석에도 적혀 있듯이 보나파르트 집안이 아무리 깡촌 코르시카 출신이라 해도 엄연히 귀족 가문이라는 사실을 무시한 채 어부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과 다른 가정을 하고 있다.
  • 365mc병원 지면광고(지하철) 중 지방이가 나폴레옹 코스프레를 한 것이 있다. 빼볼래용이라는 광고문구가 압권이다.

중국 모바일게임 성녀전기에어는 주인공 폴린 보나파르트의 오빠로 등장한다.

10. 어록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74]
"내 키는 땅에서 재면 가장 작지만 하늘에서 재면 가장 크다."[75]
내 비장의 무기는 아직 내 손 안에 있다. 그것은 바로 희망이다.
중국은 잠자는 사자다. 깨기만 하면 세계를 진동시킬 것.[77]
나는 내가 가는 모든 곳에 자유의 씨가 뿌려지길 원한다.[78]
당대 사상의 선두에서 나아가라, 사상이 당신을 따르고 지지할 것이다. 당대 사상을 뒤따라 가라, 사상이 당신을 끌고 갈 것이다. 당대 사상을 거슬러 가라, 사상이 당신을 전복시킬 것이다.[79]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승리하지 못한 삶을 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다.[80]
"승리는 가장 끈기 있는 자에게 돌아간다."[82]
''승리를 원한다면,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적을 이길 수 없다면 적과 합류하라."[83]
"내가 쓰러진들 혁명가들에게 프랑스를 넘겨주진 않을 것이다. 그들의 손에서 내가 프랑스를 구해내지 않았던가?"
대혁명은 끝났다. 내가 대혁명이다.
"내 가족은 매춘부 가족이란 말인가!"[84]
"단 하루도 그대를 사랑하지 않은 날이 없소. 단 하룻밤도 그대를 내 팔에 끌어안지 않은 적이 없소. 어떤 여인도 그대만큼 큰 헌신과 열정, 자상함으로 사랑하지 않았소. 공감과 사랑, 진정한 감정으로 묶인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 뿐이오."[85]
"나의 치세는 내가 더는 강력하지 못하여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를 멈추는 날 끝날 것이다. 나는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한 뼘의 땅도 넘겨주지 않겠다. 왕좌에 앉을 운명을 타고난 그대 큰 마음 먹고 스무번 패해도 되고 언제나 수도로 되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다. 나는 나 자신의 힘으로 출세한 군인이기 때문이다."[86]
"그대는 군인의 정신이 어떤지 전혀 모르오. 나는 전장에서 성장했소. 나 같은 사람은 백만명의 목숨도 개의치 않소."[87]
"정복자로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잔인해야 한다. 내가 좀더 잔인했더라면 세계를 정복했을 것이다."[88]
소설 같은 나의 생애여! 내가 죽으면 나에 대한 연민이 물결칠 것이다.[89]
"내가 권력을 찬탈했다고? 나는 그 누구에게서도 왕권을 뺏지 않았어. 나는 그저 시궁창에 버려진 왕관을 주워서, 진정한 가치를 부여한 것 뿐이야. 그리고 나는 그 왕관을 국민들의 투표에 의해 머리에 썼어. 나는 국민들의 의사를 존중한거야."[90]
"내가 종교를 갖는다면, 태양을 택하겠어. 태양은 모든 것을 잉태하는 지상의 진정한 신이야."

11. 관련 항목


[1] 구글링을 해보면 알 수 있겠지만 Rh-O형이 맞다. 나폴레옹의 사망원인이나 DNA 등에 대한 검사로서 시체 부검과 머리카락의 화학 성분 등을 조사하던 정밀검사 과정에서 밝혀진 것으로 보인다.[2] 한국에는 나폴레옹의 음차가 '나륜'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破'는 한국어로 분명히 '파'라고 읽지 '팔'이라고 읽지는 않는다. 물론 '나팔륜'이라고 음차한 경우도 많지만 저 음차한 한자는 '나파륜'이라고 읽는 게 맞다. 어차피 음차라서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3]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를 다룬 TED 강의이다.[4] 프랑스 역사에서 '자연적 국경선'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확보했던 시기가 나폴레옹 집권기다.[5] 한국의 법 체계도 대륙법(나폴레옹에게 자극을 받아 정비된 독일법+그 독일법을 이어받아 나름대로 정리한 일본법)을 바탕으로 영미법을 받아들인 절충 형태이니 나폴레옹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6] 정작 나폴레옹 본인은 무능한 가족들을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리에 앉히거나, 본인에게 충성하는 장교들을 적극 기용하여 자신의 몰락을 재촉했다.[7] 1위는 나폴레옹 시대, 2위는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이다.[8] 정확히는 원래 정의되었던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가 정의한 것이다.[9] 워털루 전투의 승리는 아서 웰즐리만이 아니라 블뤼허 장군의 적절한 증원 도착도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웰즐리 자신도 나폴레옹을 넘어서는 전략가라고 생각했다고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동시대의 장군으로서 나폴레옹의 재능을 인정했다고 봐야 한다. 일례로 이베리아 전역 당시 가까운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군의 졸렬한 움직임으로 피해가 컸던 것을 한탄하며 만일 나폴레옹이 상대였다면 아군은 궤멸당했을 거란 식으로 얘기한 적도 있다. 세인트헬레나 생활을 기술한 '라스 카즈의 회상록'에도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영국군과의 대화를 기술하고 있는데(1816년 7월), 당시 영국군은 완전히 진 전투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엠마누엘 그루시의 배신(이를 배신 행위로 알고 있던 영국군들이 있을 정도였으니, 당시 그루시의 판단이 얼마나 어이없는 것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이 없었더라면 실제로 패배했을 거라고 여기고 있었다고 한다.[10] 고통 때문에 주치의에게 아편을 처방받기까지 했다.[11] 나폴레옹이 벨기에로 들이닥칠 때 웰링턴은 브뤼셀의 무도회에서 춤추고 있었다. 문제는 미셸 네가 카트르브라에서 이 상황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고, 이것 때문에 시간을 번 웰링턴이 워털루에서 싸울 수 있었다.[12] 트라팔가 해전도 사실상 영국 상륙을 위한 양동작전이었는데, '빌뇌브가 넬슨을 이기고 도착하면 영국 가는거고, 못 오면 그냥 병력 빼서 오스트리아 치는거' 수준이었다. 그 결과, 프랑스 해군은 말 그대로 영국해군에게 '영광의 제물'이 되어버렸고, 그나마 영국을 견제할 수준 정도는 되었던 프랑스 해군 전력은 전쟁 내내 쭈구리 신세를 면치 못했다.[13] 이때문에 나폴레옹의 초상화에서 한쪽 손을 배 부위에 넣고 근엄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을 배가 아파 초상화를 그리는 도중에도 문지르는 모습이었다고 주장하는 설이 있지만 이는 다른 역사적인 인물의 초상화에도 등장하는 당시의 유행하고 있던 포즈로 관련없는 낭설이다. 일부 음모론자들은 이 포즈를 일루미나티와 연관지어 무리한 주장들을 하곤 한다.[14] 먼 훗날 닐스 보어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맨해튼 프로젝트에 대한 허가를 받으러 갔을 때 이 일화를 말하면서 핵무기 제조의 중요성을 어필했고 이에 루즈벨트 대통령은 바로 프로젝트를 허가해주었다.[15] 후장식 소총, 기관총, 발전된 야포 등등[16] 이를테면 1차대전 시기 장군들은 항공기를 그다지 고평가하지 않았다. 당시엔 항공기를 이용한 직접적인 타격 효과는 미비했으며 보조적인 역할에 그쳤기 때문. 항공 폭격이 전술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건 그로부터 최소 20~30여년 후의 일이며, 당장 전투를 해야 하는 장교들은 그 시점에서 보이는 효과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근미래에 굉장히 강력해질 거란 가능성을 파악한 사람도 별로 없었고, 그런 가능성을 파악했다한들 당장 내일의 전투엔 그렇게 큰 도움이 안된단 사실엔 변함이 없기에...[17] Ronald Zins, Le maréchal Lannes, 1994.[18] Pierre Charrier, Le maréchal Davout, 2011.[19] 드라마에서 처음 나오는 권총을 두고 오가는 실랑이는 측근이 위험하니 권총이라도 챙기라는 것을 나폴레옹이 필요없다고 만류하는 장면이다.[20] 1805년 영국의 다이아몬드 록이라는 바위섬에서 올콤 중위가 자리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병사들과 나란히 식사를 했다가 신사로서 부적절한 행위를 한 죄로 군사재판을 받고 견책 처분을 받은 기록도 있다.[21] 정확히는 대관식을 한 날이다.[22] 이 방침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가 바로 틸지르 조약 때였다. 틸지르 조약으로 유럽은 프랑스와 러시아의 공동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대불동맹을 주도하던 오스트리아는 적들로 묶인 식물인간, 프로이센은 국토가 반토막난 걸로도 모자라 경제적으로 파산하여 프랑스의 속국 수준으로 떨어졌다.[23] 다만 이는 당시 스페인 왕으로 즉위한 페르난도 왕의 반(反)프랑스 정서에서 기인한 바도 크다.[24] 스페인 보르본 왕조의 왕이었던 전임자 카를로스 4세페르난도 7세는 군왕으로서는 명백히 모자란 인물이었다.[25] 이슬람교를 믿으면 술을 못 먹는데 우리 프랑스인들은 술 못 마시는 건 안 된다고 둘러대어 결국 개종은 안했다. 근데 일부 프랑스 장교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현지 여자들과 결혼하기도 했다.[26] 러시아령에 세워진 폴란드 입헌 왕국까지 본다면 35년.[27] 출처: KBS 뉴스 2018년 11월 20일자 기사 '조선의 나폴레옹' 김경천 일기 러시아서 출간,YTN 뉴스 2019년 1월 27일자 기사 더 큰 사람들 '조선의 나폴레옹' 김경천 장군[28] 편지의 제목은 '강보에 싸인 두 병정들에게'[29] 중앙일보 2019년 1월 7일자 기사 윤봉길 증손 윤호석 "할아버지는 맹자,나폴레옹,에디슨을 배우라 하셨죠"[30] 러시아 원정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며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전에 찾아가 다짐을 했었다.[31] 1748~1825/ 신고전주의 화가. 천재적인 그림 실력과 그에 맞먹는 처세술프랑스 혁명 이전부터 나폴레옹 이후까지도 살아남아 천수를 다했다. 그러나 다비드는 이 그림을 그린 이후 점점 유럽 제패와 권력에 차츰 타락하는 나폴레옹을 직접 마주보면서 다비드는 말년에 저 그림을 그린 것을 자기 인생의 흑역사로 취급하게 된다.[32] 심지어 적국인 영국에서 그린 초상화도 마찬가지. 나폴레옹을 유배 보낸 후 그린 초상화에서 나폴레옹을 깎아내리기 위해 작은 키에, 배가 나오고, 얼굴도 살찌고 머리숱도 적게 묘사했지만 미남인 본 바탕은 건드리지 않았다.[33] 착각한 게 아니라, 차이가 있는데 난쟁이 똥자루로 폄하하려고 일부러 틀리게 측정했다는 주장도 있다.[34] 최근에 Lucotte 교수에 의해 나폴레옹 3세와 1세의 유전자 검사가 있었는데, 둘은 실제로 아무 혈연관계가 없음이 확인되었다. "Professor Lucotte tested the Y-DNA of Napoleon I, Napoleon III and their descendants, and was able to confirm that Napoleon III was not the biological nephew of the first Emperor of the French." http://www.eupedia.com/europe/Haplogroup_I2_Y-DNA.shtml 출처[35]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나폴레옹이 원체 꽃미남이기도 했고, 워낙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간 사람이기도 해서, 그의 배를 문지르느라고 옷자락 안에다 손을 넣고 있는 모습이 꽤나 간지나 보였는지, 이후에 나라를 막론하고 고위급 장교들이 나폴레옹의 이런 습관을 따라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나폴레옹이 배에 손을 넣고 있는 모습이 특유의 모자랑 함께 오늘날까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을 정도다.[36] 당시 기록을 보면 나폴레옹의 식사 시간은 오래해봤자 15분이었다고 한다.[37] 이런 '악마 보나파르트'의 이미지는 주로 주적이었던 영국인들 사이에 횡행했는데, 예를 들어 세인트헬레나 시절 인도에서 영국으로 돌아가던 중 세인트헬레나에 잠시 기착했던 한 여인은 자신이 들었던 그의 괴물같은 이미지와 실제 모습이 굉장히 다른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38] Felix Pasquale Baciocchi. 코르시카 아작시오 출신. 바치오키 가문은 보나파르트와 같은 코르시카 귀족 가문으로, 16세기 중반에 보나파르트 가문과 마찬가지로 가문의 일원 중 한 사람인 톰마소 바치오키(Tommaso Baciocchi)가 가족을 데리고 이탈리아 본토에서 이주해 코르시카의 아작시오에 정착했다. 펠릭스는 톰마소의 7대손인 프란체스코 마리아 바치오키(Francesco Maria Baciocchi, 1716~1779)의 15명의 자녀들(9남 6녀) 중 14번째 자식이다. 15~16세기부터 코르시카, 특히 중심 도시인 아작시오에 살기 시작한 가문들에는 대표적으로 아리기-카사노바(Arrighi-Casanova), 도르나노(d'Ornano, 프랑스의 미용 회사인 시슬리Sisley의 전 회장이었던 위베르 도르나노와 같은 가문이다.), 라몰리노(Ramolino), 바치오키(Baciocchi), 세바스티아니(Sebastiani) 등이 있는데, 이 가문들은 보나파르트 가문과 결혼 관계를 맺거나 각종 교류들을 하여 친밀했고 그래서 펠릭스는 어릴 적부터 근처에 살던 동생뻘인 나폴레옹과 친했다. 이런 둘의 친한 관계 더분에 나폴레옹은 자신의 여동생인 엘리자를 펠릭스에게 소개해주어 결혼한 것이다.[39] 발레프스카는 발레프스키의 여성형이다.[40] 마리아의 남편 발레프스키 백작은 이미 60이 훨씬 넘은 노인이었는데 60대 노인과 지적이고 아름다운데다 집안까지 괜찮은 10대 소녀와의 결혼은 당시에도 드물었기 때문에 마리아의 아들이 사실은 발레프스키 백작의 아들이 아니고 마리아가 10대의 소녀 시절 혼외임신한 것을 늙은 발레프스키 백작이 떠안는 형식으로 결혼한 거라는 소문이 있었다. 다만 소문이기 때문에 확실한 사실은 절대 아니다.[41] 하지만 바르샤바 공작은 폴란드인이 아닌 독일인이었다.[42] 폴란드인은 남성의 성 끝에는 보통 -ski가 붙고, 여성의 성 끝에는 보통 -ska가 붙는다. -ski나 -ska 앞에는 같은 가족이면 같다.[43]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탄생이 아니라 임신[44] 현재는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없었던 이유를 조제핀이 둘째 오르탕스를 낳은 뒤 뭔가 알 수 없는 사고로 임신할 수 없는 몸이 되었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다.[45] 현재는 샤를 레옹이 나폴레옹의 친자가 맞다는 게 통설이다.[46] 알렉상드르는 사생아라 당시 유럽의 관습으로 후계자가 될 수 없었다.[47] 하지만 마리아와 나폴레옹의 관계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데다, 무엇보다 외모부터가 나폴레옹과 판박이라서 이런 주장은 잘 먹히지 않았다. 아래에 언급하듯이 나폴레옹의 아들이라는게 엄연한 사실이라......[48] 작위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샌드위치의 유래로 유명한 4대 샌드위치 백작인 존 몬터규(John Montagu)의 손자이다.[49] 그 책들 중에 손자병법도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50] 물론 세인트헬레나 동행인들의 기록들에는 이런 피라미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51] http://www.strangehistory.net/2013/12/02/napoleon-and-the-great-pyramid/, 왜 아무 것도 없었는지는 피라미드 문서 참조.[52] 천재적 수학-과학자로 더 알려져 있지만, 신학자이기도 했으며 다방면에 재능을 보였다.[53] 프랑스 혁명기에 설립된 공병장교 교육기관이다. 오늘날에도 프랑스 제일의 이공계 교육기관으로 남아 있다.[54] 이 사실은 헤럴드경제 2019년 1월 24일자 기사인 데스크 칼럼 '체리피킹' 리더쉽에 나온다. 정말로 인류 역대 국가원수들 중 가장 뛰어난 수학과 과학지식을 갖춘 사람 중 하나일듯.[55] 그가 벌였던 토론들중에는 '인간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영혼은 언제부터 존재하는가?'등, 상당히 추상적인 주제도 꽤 많았다.[56] 사실 무함마드는 왕을 칭하지 않았다.[57] 라스 카즈에게서 배웠다. 교습 후 얼마 되지도 않아 라스 카즈에게 아직 어설픈 문법이 군데군데 존재하기는 했으나 영어 편지를 자주 쓸 정도로 실력이 나름 빠르게 향상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아 라스 카즈가 섬을 떠나게 되면서 교습은 중단되고 말았다.[58] 이 서술이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실제로 세인트헬레나에서의 라스 카즈의 기록에 의하면 나폴레옹은 프랑스어를 '완성되지 못한 언어'로 보았다고 한다. 이유는 바로 '불규칙 문법요소들의 산재'. 그래서 자신의 권력이 좀 더 지속되었더라면 프랑스어는 완벽해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runned를 고집한 것 역시 그가 그 정도의 간단한 과거형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문법의 불규칙성'에 반대하는 자신의 언어학적 신념을 애둘러 드러낸 부분이라고 볼 수도 있다.[59] 사실 이 광고는 말도 안 되는 광고인 게, 아무리 코르시카가 깡촌이라지만 보나파르트 가는 엄연히 귀족 가문이다. 귀족이 무슨 어부를 하나?[60] 수면시간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짧아지며, 수면량을 채우는 것보다 늘 규칙적으로 일정시간 자주는 것이 좋다.[61] 출처는 리처드 홈즈 저 '나폴레옹의 영광'[62] 현대 프랑스인의 평균 식사시간의 1/4 정도다.[63] 이 소녀들은 황제에게 온갖 천진난만한 질문들을 하는등 나폴레옹의 흥미를 끌었고, 그도 아이들이 딱히 싫지는 않았는지 '마치 가면무도회에 온 것 같다'고 했다.[64] 정확히는 완벽 복원은 아니고 2000년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3시간 30분 판본으로 복원 완료되었다. 이 영화의 극렬빠로 케빈 브라운로라는 영국 영화 비평가가 있다. 어린 시절 접한 후 이 영화를 복원하고 연구하는데 일생을 바쳤다고 한다. 때문에 이 사람 주 연구분야 역시 무성영화/고전 영화다.[65] 그러나 2016년 영국 영화 협회에서 드디어 블루레이 출시되었다. 3시간 30분 판본[66] 정확히 말해 당대의 5대 강국의 가장 유명한 지휘관 1명은 다 이런다. 프랑스는 나폴레옹이고 영국은 아서 웰즐리, 오스트리아는 카를대공(항목 3번의 테셴의 카를), 러시아는 쿠투조프, 프로이센은 블뤼허.[67] 징병이 1년에 딱 한번만 가능하고(게다가 승리 후 남은 적군의 예비병도 흡수 불가능하다.) 스페인, 러시아의 경우는 완전 점령을 못할 경우 게릴라의 습격으로 물자, 병사를 잃게 된다. 숨겨진 시나리오인 엘바 섬 탈출은(PC판만 있음)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깰 수 없을 정도다. 오죽하면 이 시나리오를 깰 수준이면 코에이의 모든 게임을 깰 수 있다는 말까지 있으니(...).[68] 작품에선 용을 타는 기병. 본래 뜻은 용기병 항목 참조.[69] 조지 워싱턴과 영국왕 조지의 극적인 협상 타결로 미국 독립전쟁은 소요로 끝나고, 영국령 북미연방으로 남게 된 후 1980년대 찰스 2세 집권 시기를 다루고 있다.[70] 코르시카의 혁명가 파올리가 없어서 코르시카가 제노바령이었다.[71] 이 세계관의 호레이쇼 넬슨은 그냥 삼류 제독이 된 걸로 추정.[72] 샤이닝 촬영으로 두 사람은 상당히 안 좋은 사이가 된다.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 촬영 일화들은 상당히 악명 높다. 같은 장면을 별 설명도 없이 다시 찍고 다시 찍고 해서 백번 넘게 찍었던(심지어 길거나 복잡하지도 않은 장면) 일화는 니콜슨을 질리게 만들었다. 심지어 큐브릭은 니콜슨을 놀리려고 쉬는 시간에 그에게 사진을 찍어준다면서 그 뒤쪽 거울에 비친 자신과 딸을 찍었던 적도 있다.[73] 이름이 Water loop다.[74] 원문은 "<<Impossible>> n'est pas français."로 " '불가능'은 프랑스어가 아니다."라는 뜻이다.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사전이라는 단어가 추가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는데, 궁금한 위키러는 확인 바람. 원래 이 각주에는 실제로 당시 프랑스어 사전에 불가능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애초에 원문에 사전이라는 말이 없기 때문에 신빙성이 낮다.[75] 실제로는 평균 이상으로 그리 작은 편은 아니고 오히려 크다면 큰 키였다. 하지만 항상 상당히 큰 키에 높은 곰털모자까지 쓰고 다니는 프랑스 제국 근위대와 다니다 보니 그런 인식이 생긴 듯.[76] 그걸 아는 사람이 러시아 원정을 떠났단 것을 생각하면 정말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100여년 후 한 장교가 이 말을 정면으로 거슬러 전쟁사에 길이 남을 대형 참사를 일으킨다.[77] 중국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한 나폴레옹의 발언. 후에 아편 전쟁등의 식민지 지배를 당하면서 비웃음을 당하기도 했던 발언이지만 현재의 중국에는 흔히 인용되는 말이다.[78] 자신이 정복한 유럽 각국들의 봉건적인 제도들을 폐지하면서 한 발언으로 나폴레옹 최고의 이타적인 명언. 이것이 나폴레옹이 후대에 그를 롤모델로 삼은 전 세계의 군사독재자들과 가장 다른 면모.[79] 이 말 역시, 후대에 그를 롤모델로 삼은 전 세계의 군사독재자들과 가장 다른 나폴레옹의 면모.[80] La mort n'est rien, mais vivre vaincu et sans gloire, c'est mourir tous les jours.[81] 총재정부 시절 나폴레옹의 군사적 명성에 위협을 느낀 프랑스 공화정부가 군부에 대한 나폴레옹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고 공동 사령관을 임명하여 하루 간격으로 번갈아 지휘하도록 지시한 일이 있었는데, 이에 나폴레옹이 "차라리 내가 사령관을 그만두겠다"라고 반응하며 한 말이다. 결국 나폴레옹보다 나은 사령관을 찾을 자신이 없던 총재정부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이후 군사 부문에서 '지휘 체계의 통일성'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할 때, 자주 인용되고 있다. 구 일본군이 훌륭한 반면교사에 해당한다.[82] La victoire appartient au plus persévérant.[83] 운동화를 신은 마윈[84] 카롤린 뮈라와 조아킴 뮈라 부부의 배신에 열받아 외친 말이다[85] 조제핀 드 보아르네의 죽음에 한 말.[86] 1814년 6월 26일 메테르니히에게 한 말이다.[87] 위의 발언과 같다.[88]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된 이후 한 말이다.[89] 세인트 헬레나에서 자신의 삶을 회상하며[90] 역시 위와 같이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회고록을 구술하며 했던 말이다. 참고로 영화 '워털루'에서도 똑같은 대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