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10:27:55

워터게이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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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치인 헨리 키신저 · 스피로 애그뉴 · 제럴드 포드존 코널리 · 멜빈 레어드 · 제임스 R. 슐레진저 · 조지 W. 롬니 · 헨리 M. 잭슨 · 존 F. 케네디 · 휴버트 험프리 · 조지 맥거번 · 아치볼드 콕스 · 존 시리카 · 마오쩌둥
발언 닉슨 독트린 · 닉슨 쇼크
사건사고 데탕트, 라인배커 작전, 욤 키푸르 전쟁, 1973년 칠레 쿠데타, 전략무기제한협정, 워터게이트 사건, 피닉스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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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게이트 사건
Watergate scandal
파일:Nixon Resigns.gif
▲ 닉슨 사임 당시 워싱턴 포스트 1면.
<colbgcolor=#bc002d,#222222><colcolor=#fff> 일시 1972년 6월 17일 오전 2시 30분경
위치 미국 워싱턴 D.C. 워터게이트 복합단지
유형 선거 상대 후보자 도감청 및 사보타주
관련 인물 및 단체 리처드 닉슨 대통령
H. R. 홀더먼[1] 대통령 비서실장
존 얼리크먼[2] 백악관 국내정치보좌관
G. 고든 리디[3] FBI 요원
E. 하워드 헌트[4] CIA 요원
결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사임
영향 제럴드 포드 부통령의 대통령직 승계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의 정권교체

1. 개요2. 전개
2.1. 배경: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2.2. 1972년 6월 17일 밤2.3. 5인조 배관공의 체포와 보도의 시작2.4. 조여오는 수사망2.5. 존 시리카, 상원 조사위원회, 아치볼드 콕스2.6. 테이프를 찾아라2.7. 토요일 밤의 대학살2.8. 1974년: 미합중국 대 닉슨2.9. 1974년 8월 9일: 리처드 닉슨의 사임
3. 이후
3.1. 워싱턴 D.C.의 상황3.2. 사법 심판3.3. 당사자들의 여생3.4. 처치 위원회3.5. 스캔들의 영원한 대명사가 되다
4. 진실을 파헤친 사람들
4.1. 워싱턴 포스트4.2. 딥 스로트의 정체
5. 왜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났나?
5.1. 심리학적 설명: 면전에서 문 닫기 기법5.2. 백악관을 집어 삼킨 문고리 권력5.3. 닉슨의 편집증과 과대망상
6. 대중매체에서7. 여담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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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watergate.jpg
워터게이트 복합단지의 모습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I'm not a crook!)
I shall resign the presidency effective at noon tomorrow. Vice President Ford, will be sworn in as president, at that hour, in this office.
저는 내일 정오를 기하여 대통령직을 사임합니다. 포드 부통령이 그 시간부로 이곳에서 대통령에 취임할 것입니다.
닉슨의 사임 발표 연설 중
1972년 6월 17일, 백악관리처드 닉슨 재선 위원회의 사주를 받은 5명의 괴한이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워싱턴 D.C.의 워터게이트라는 지역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Democratic National Committee; DNC) 사무실에 침입해 불법적인 도감청과 상대 후보자 사보타주를 한 사건을 뜻한다. 권력형 비리 사건에 붙는 접미사 '~게이트'의 어원이 된 사건으로도 유명하다.[5]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정치 스캔들이었다.[6] 1972년 사건이 드러났을 당시에는 큰 관심을 모으지 못했지만 1973년 2월 닉슨이 재선 임기를 시작한 직후 미국 상원에 의해 진상조사 위원회가 설치되고 각종 언론들이 보도를 하기 시작하며 사건이 커졌다. 닉슨이 직접적으로 연루된 것은 아니었지만, 사건이 드러나자 닉슨이 대통령의 권한을 남용해 사건을 은폐하려 하고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들통이 나 닉슨에 대한 여론이 크게 악화되었고 상하원에서는 대통령 탄핵 절차를 밟았다.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어진 닉슨은 1974년 8월 9일,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미국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사임을 하였다. 닉슨의 사임 후 제럴드 포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했으며, 포드는 대통령의 직권으로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모든 혐의를 사면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포드의 지지율은 크게 떨어졌고,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청렴함과 도덕성을 내세운 지미 카터 조지아주 주지사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며 공화당은 8년 만에 민주당에게 정권을 내주게 되었다.

2. 전개

2.1. 배경: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리처드 닉슨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휴버트 험프리를 불과 0.7%p 차이로 꺾고 당선되었다. 당초 여론조사에서는 닉슨의 압도적 대승이 예견되었으나 험프리가 뒤늦게 북베트남 폭격 중지를 슬로건으로 내세워 반전 좌파의 표를 규합시켜 대단히 선전한 것이다. 선거 흐름상 일주일만 늦게 선거가 치러졌더라도 험프리가 이길 수 있었다는 말도 나오던 상황. 당황스러울 정도로 근소한 승리에 민주당은 고무되었고, 1972년 대선에 경쟁력 있는 후보를 내보낸다면 68 운동베트남 전쟁의 영향으로 만신창이가 된 지지층을 추스려 정권을 탈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이 나돌았다.

당초 민주당에서는 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 그러나 테드 케네디는 1969년 자동차가 바닷물에 빠지는 사고에서 동승했던 여비서를 구출하지 않고 무려 10시간 동안이나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은 차파퀴딕 사건에 휘말렸다. 당연히 사람들은 테드 케네디가 여비서와의 문란한 관계를 숨기려고 경찰에 신고를 주저했다는 의심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테드 케네디는 허망하게 침몰하고 만다. 또한 1970년 맥거번-프레이저 위원회의 출범으로 민주당은 이전과 달리 당원의 표심이 대통령 후보 선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도록 개혁을 한 상태였다. 이렇게 예비선거 룰의 변동과 가장 유력한 선두 주자의 침몰로 인해 1972년 대선을 앞둔 민주당의 상황은 점입가경에 빠져들었다. 조지 맥거번 상원의원, 헨리 M. 잭슨 상원의원, 험프리 전 부통령, 존 린지 뉴욕시장, 셜리 치좀 하원의원, 에드먼드 머스키 상원의원, 유진 매카시 상원의원 등 셀수 없이 많은 후보가 뛰어든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노린 닉슨의 재선 위원회(CRP)는 닉슨을 위협할 만한 후보를 민주당의 내분을 이용해 쳐내는 계획을 세웠다. 재선위원회는 1972년 연초 설립되었고, 회장은 닉슨의 측근이자 법무장관이었던 존 미첼(John Mitchell)[7]이었다. 이 조직은 전현직 CIA 요원이었던 E. 하워드 헌트(E. Howard Hunt), G. 고든 리디(G. Gordon Liddy), 제임스 매코드(James McCord)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닉슨의 최측근이었던 존 얼리크먼(John Ehrlichman), H. R. 홀더먼(H. R. Haldeman; 이하 밥 홀더먼으로 칭함) 등 닉슨의 문고리 권력과 긴밀하게 연관되어있었다.[8] 닉슨은 대다수의 정치인들을 불신해 존 코널리 재무장관, 헨리 키신저 보좌관, 멜빈 레어드 국방장관 등의 공적인 측근과는 진지한 이야기만 했지만 앞선 문고리 권력들과는 가볍고 개인적인 대화를 하곤 했는데, 재선위원회 조직의 일부는 1968년과 다른 압도적인 승리를 바라던 닉슨의 심리에 맞추기 위해 공작을 저지르기로 결정한다.
파일:조지 맥거번&휴브 험프리.jpg
분열된 1972년 민주당, 조지 맥거번(좌)과 휴버트 험프리(우)
가장 먼저 타깃이 된 건 1968년 대선에서 부통령 후보로 출마한 메인주 상원의원 에드먼드 머스키였다. 닉슨의 재선 위원회는 머스키가 프랑스계 미국인을 차별한다는 근거 없는 소문을 퍼트리는가 하면, 그의 아내를 공격하는 등의 비열한 술수로[9] 머스키를 선두 주자 자리에서 제거한다.

1972년 6월, 민주당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전당 대회를 한 달 앞두고 선거는 더욱 치열해졌다. 당은 반전좌파를 대변하던 맥거번과 기성 세력을 대표하던 험프리로 분열되어있었고, 비록 맥거번이 대의원 수에서 앞서있었지만 험프리 측은 맥거번의 대의원 일부를 무효표 처리해 그가 과반 득표를 할 수 없게한 후 결선에 진출해 나머지 후보의 대의원 표를 쓸어와 맥거번을 이긴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 때문에 많은 언론들이 누가 민주당의 대선 후보가 될 지 쉽사리 예상하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닉슨의 재선위원회는 이러한 상황에서 수없이 많았던 민주당 대선 주자[10]들의 약점을 캐낸다면, 이를 닉슨의 재선에 유리하게 활용하고 민주당의 내분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전략적인 판단을 하게 되었다. 닉슨은 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지만 닉슨의 문고리 권력은 이 사실을 이용하고자 1972년 5월, 전 FBI 요원 앨프리드 C. 볼드윈 3세(Alfred C. Baldwin III)를 시켜 6~7월에 민주당 전당대회(DNC) 사무실을 도청하는 계획을 세웠다.

2.2. 1972년 6월 17일 밤

영화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1976)에 묘사된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의 모습
1972년 6월에 문제가 생겼다. 리처드 닉슨 재선위원회의 요원 일부가 지난 5월 민주당 전당대회 의장 래리 오브라이언(Larry O'Brien)의 전화기에 설치한 도청기가 고장났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그래서 CRP의 요원이었던 하워드 헌트와 고든 리디는 1972년 6월 17일 토요일 새벽, 피그만 침공 때 같이 일했던 쿠바인 망명자 5인, 이른바 '배관공'에게 주말을 맞아 민주당 직원이 모두 퇴근한 틈을 타 워싱턴 D.C.의 워터게이트 복합단지(Watergate Complex)에 위치한 DNC 사무실에 몰래 침투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오전 2시쯤, 워터게이트 복합단지의 야간 경비원 프랭크 윌스(Frank Wills)[11]는 기밀 누설 방지를 위해 민주당 직원들이 퇴근하면서 문에 붙여둔 테이프가 아주 섬세하게 잘려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누군가가 문의 테이프를 자르고 사무실에 침입했다는 뜻이 된다. 프랭크 윌스는 워싱턴 D.C. 경찰 당국에 조심스럽게 워터게이트 복합단지에 강도가 든 것 같다는 신고 전화를 했고, 워싱턴 D.C. 경찰 당국은 근처에 있던 경찰에게 워터게이트 복합단지로 출동하라고 명령했지만 관할 경찰관들은 불금을 맞아 인근 술집에서 곤드레 만드레가 된 상태라(...) 연락이 닿질 않았다. 그래서 대신 히피들의 성매매마약 거래 단속을 주 목적으로 했던 히피 차림의 사복 경찰을 워터게이트 복합단지로 출동하게 하였다.

이때 도청 프로젝트의 총 책임자이자 주위에서 망을 보는 역할을 맡고 있던 앨프리드 볼드윈은 주변 식당에서 TV 연속극을 보는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물론 볼드윈도 몇몇 히피 차림의 젊은이들이 건물에 몰래 들어가는 걸 목격하긴 했지만, 이 당시는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로[12] 워싱턴 D.C.의 치안이 매우 안 좋았던 시절이라 그저 좀도둑이 든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13]

뒤늦게 워터게이트 복합단지 6층에서 3명의 히피 차림의 사복경찰이 손전등을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걸 보게 된 앨프리드 볼드윈은 배관공들에게 긴급 전화를 걸어 어서 철수하라고 명령했지만, 때는 늦은 후였다. 5명의 쿠바인 망명자 그룹은 도망치지 못하고 1972년 6월 17일 오전 2시 30분 워싱턴 D.C. 경찰에게 현행범으로 붙잡혔다. 이들의 이름은 버질리오 곤살레스(Virgilio Gonzalez), 버나드 베이커(Bernard Barker), 제임스 매코드(James McCord), 유제니오 마르티네스(Eugenio Martínez), 프랭크 스투지스(Frank Sturgis)였는데, 이중 곤살레스, 베이커, 마르티네스는 쿠바인 망명자였고 스투지스는 쿠바 혁명 당시 참전했던 군인, 매코드는 (앞서 언급된) 총책임자이자 쿠바 사건 때 광범위하게 관여한 인사였다.

2.3. 5인조 배관공의 체포와 보도의 시작

D.C. 경찰 당국은 처음에는 이들을 단순 절도범으로 간주하고 있었으나 이내 이들의 신원이 밝혀지자 수상함을 느꼈다. 강도들이 2,300달러의 현금[14], 35mm 카메라 2개, 단파 수신기를 들고 있는 것은 경찰관들의 의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무엇보다 버나드 베이커의 수첩에서 하워드 헌트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는 것이 밝혀졌다. 수상함을 지우지 못한 DC 경찰은 수사를 종결시키는 대신 이를 연방 법무부에 알렸다.
파일:번스타인과 우드워드.webp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인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

6월 18일에 사건을 인지한 워싱턴 포스트는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취재를 시작하였다. 바로 다음날 조간신문에 젊은 신참기자 칼 번스타인 (Carl Bernstein)과 밥 우드워드 (Bob Woodward)가 기사를 작성해 사건을 단독보도하였다. 이들은 5인조 절도범이 공화당의 닉슨 재선위원회, 특히 존 미첼 위원장과 깊이 연관되어있으며 절도범 중 한 명인 버나드 베이커 앞으로 지나치게 많은 수상한 돈이 입금되었다는 사실도 보도하였다. 뒤이어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뉴욕 타임스와 같은 유명 일간지도 사건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 것이 아니었기에 대개 짧은 기사로만 그쳤으며, 오로지 워싱턴 포스트만이 심층적인 탐사보도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고자 했다.

닉슨은 자신도 알지 못하던 공작에 깜짝 놀라 얼리크먼, 홀더먼에게 전화를 걸어 크게 화를 내고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알아내라고 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워싱턴 포스트를 제외한 다른 언론에서도 크게 보도되어 11월 대통령 선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사건을 은폐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당황한 존 얼리크먼 고문과 밥 홀더먼 비서실장은 즉시 존 딘(John Dean) 법률고문에게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 사건을 덮으라고 명령하였다. 사건 5일 후, 백악관 대변인 론 지글러(Ron Ziegler)는 이 모든 정황이 특종 기사를 노린 워싱턴 포스트의 과장이며 5인조 배관공은 그저 3류 절도범에 불과하다며 닉슨 재선위원회에 쏟아지던 의혹을 부인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며 취재를 계속하였지만, 다른 언론사들은 포스트와 달리 지글러 대변인의 반박 이후 대게 관심을 접고 말았다. 민주당의 전당대회가 불과 보름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실존하는지도 불명확한 거대한 음모를 파헤치는 것은 무리수였다고 판단한 것이다. 1972년 7월, 사우스다코타 주의 상원의원 조지 맥거번은 유효 대의원 수의 58%를 얻어 휴버트 험프리를 꺾고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맥거번은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토머스 이글턴 미주리 주 상원의원을 지명했다. 공화당 역시 예상대로 닉슨 대통령과 애그뉴 부통령을 후보로 재지명했다.
파일:1972년 대선 지역별 결과.svg
1972년 미국 대선의 결과
선거 결과는 리처드 닉슨의 너무나도 압도적인 대승이었다. 닉슨은 1970년 단기 공황을 딛어내고 만끽한 경제적 호황에 더해, 닉슨-마오쩌둥 회담으로 대표되는 외교적인 성과까지 겹쳐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재선 당시 그의 지지율은 거의 70%에 육박했을 정도였다.[15] 반면 조지 맥거번은 너무 급진적인 진보 공약[16]으로 민주당 내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하던 상황이었고[17] 선거 캠페인 자체도 그야말로 아수라장에 가까울 정도로 엉망이었다.[18] 결국 닉슨은 케네디 가문의 정치적 근거지인 매사추세츠 주를 제외한 49개주에서 승리하고 총 득표율 60.7%를 달성하는 엄청난 기록을 세웠다. 심지어 맥거번의 고향인 사우스다코타에서도 10%p 격차로 닉슨이 승리했다. 조지 맥거번은 엄청난 참패에 할 말을 잃었고 부인과 함께 영국으로 이민을 가는 계획까지 진지하게 세울 정도로 영혼까지 탈탈 털렸다.

조지 맥거번은 상대 후보에 대한 네거티브 대신 진보적인 정책을 내세운 "정책 선거"를 원하고 있었고,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민주당의 정보가 새어나간 것은 없다며 워터게이트 사건을 적극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물론 선거 운동 도중 수상쩍은 닉슨의 행보에 대해 규탄하긴 했지만 대게 언론은 물론 유권자의 관심조차 받지 못했다. 휴버트 험프리 등 민주당의 다른 정치인들도 맥거번의 당선을 바라지도, 딱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것도 없었으므로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 결과,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선거일 때까지 무려 50%가 넘는 미국인들이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는 충격적인 조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2.4. 조여오는 수사망

영화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1976)에 묘사된 밥 우드워드와 딥 스로트의 비밀만남
이러한 압도적인 닉슨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워싱턴 포스트의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 기자는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취재를 이어나갔다. 이들에게 가장 도움이 된 것은 딥 스로트(Deep Throat)[19]라고 불린 비밀 내부고발자였다. 당시 유행하던 포르노 영화의 제목을 따 붙인 것이고, 밥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은 내부고발자가 죽거나 스스로 정체를 밝히기 전에는 그가 누구인지 절대 밝히지 않는다고 합의하였다. "딥 스로트"는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나고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이 취재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들에게 비밀의 루트로 진실을 알려줄 테니 자신에게 연락하라고 귀띔해주었다. 이 만남은 1972년 6월부터 그 다음 연도까지 몇 차례 반복되었고 CIA와 FBI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갖가지 수법을 써서 이루어졌다. 딥 스로트의 기밀 정보 제공은 워싱턴 포스트 입장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딥 스로트와 밥 우드워드, 칼 번스타인은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닉슨의 감시망을 피해 만났는데, 주로 밥 우드워드가 인터뷰를 하면 칼 번스타인이 인터뷰를 기사로 옮겨쓰는 식으로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다. 우드워드가 자기가 사는 아파트 발코니에 붉은 깃발이 달린 화분을 내놓으면 딥 스로트 보고 만나자는 신호였다. 반대로 딥 스로트는 뉴욕 타임스의 기사 20면에 시계바늘을 그려놓는 방식으로 의사 표시를 했는데, 우드워드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자기는 알지 못한다고 회고했다. 이들은 종종 워싱턴 D.C. 교외 버지니아 주의 한 주차장 맨 지하층에서 새벽에 만났다.
파일:리차드 헬름스.jpg
리처드 헬름스 CIA 국장
리처드 닉슨은 워싱턴 포스트로 새어나간 정보의 정교함을 미루어 보아 딥 스로트가 FBI의 고위 간부일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그렇다고 FBI를 대놓고 추궁할 수는 없었다. 아주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20] 결국 닉슨은 혼자 끙끙댔고, 대신 CIA에 FBI의 사건 수사를 방해하고 최대한 은폐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잘 되지는 않았다. 1973년 6월 23일 존 얼리크먼은 CIA 부국장인 버논 월터스(Vernon Walters)를 백악관으로 호출해 국가 안보와 관련된 일이니 FBI의 수사를 CIA 차원에서 방해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월터스는 이를 거부했다. 백악관 측은 다시 증인 매수와 입단속에 필요한 돈을 CIA 자체 자금으로 처리해줄 수 없겠냐며[21] 유화된 입장을 보냈다. 그러나 평소에부터 닉슨에 불만이 많았던 리처드 헬름스(Richard Helms) CIA 국장[22]은 전 국민적 이익이 주목된 상황에서 이런 부담스러운 일을 할 수 없다며 단칼에 요구를 거절했다.

딥 스로트 외에도 닉슨에게 또 다른 치명상을 가한 인물은 마사 미첼(Martha Michell)이었다. 마사 미첼은 존 미첼 법무장관 겸 재선위원장의 아내였고 평소 수다스러운 입담으로 사교계에서 유명했다. 자신이 어떤 정보를 접하는지 알지 못하고 떠벌리는 경향이 있었고 닉슨은 이런 마사 미첼이 자신의 기밀을 심각하게 누설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사실이 되었다. 닉슨은 궁지에 몰려 마사 미첼을 납치하라고 지시했다. 몇 명의 비밀 요원들은 마사 미첼을 납치해 정신병원에 감금하려고 시도했지만, 이는 실패했다. 마사 미첼은 이 사건을 언론에 떠들어대면서 닉슨을 납치 미수범이라고 마구 비난했다. 평소 그녀의 평판이 아주 나빴기 때문에 언론은 이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지만, 존 미첼과 닉슨의 속은 타들어갔다. 결국 아내와의 불화를 이기지 못한 존 미첼은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 법무장관 직위를 사퇴하고, 부인과도 이혼하며 가정이 박살이 났다.

미국에서 법무장관(Attorney General)은 한국의 법무장관과 달리 검찰총장의 역할도 맡는다. 한국의 법무장관은 법무부를 총괄한다는 인식이 있지만 미국의 법무장관은 법무부를 총괄하는 것과 동시에 검찰총장으로서 정부의 기소를 담당하고, 동시에 백악관의 공식 변호인으로서 정부에게 쏟아지는 법적 조치를 막아내는 역할을 한다. 존 F. 케네디로버트 F. 케네디를 법무장관으로 임명한 것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리처드 닉슨의 경우 가장 믿을 수 있는 법률 동료였던 존 미첼을 법무장관으로 임명한 것이었지만, 가장 믿을 수 있는 닉슨의 방패가 그의 아내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로 날아가버리면서 닉슨은 정치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었다. 더구나 마사 미첼이 떠벌린 기밀 자료는 그대로 매스컴을 탔고 이는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관심을 높일 뿐이었다.

2.5. 존 시리카, 상원 조사위원회, 아치볼드 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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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시리카 판사
해를 넘긴 1973년부터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1972년 연말부터 시작되었던 워터게이트 배관공 5명에 대한 재판을 담당한 판사는 존 시리카(John Sirica)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고 단지 워터게이트 복합단지가 위치한 지역이 자신의 담당 구역이었기에 사건을 떠맡은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시리카는 1957년부터 15년 넘게 워싱턴 지역의 지방 판사를 담당하면서, 정치인들의 음모와 술수를 꿰뚫어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리처드 닉슨과 밥 홀더먼, 존 얼리크먼 모두 돈을 쥐어주고 입막음을 해 배관공 5명 + 하워드 헌트, 고든 리디의 처벌선상에서 사건을 끊어내고자 했고 이는 거의 성공할 뻔했다. 하지만 존 시리카 판사는 이들이 침묵할 것을 예상하고[23], 배관공 5명 모두에게 40년형에 달하는 엄청난 징역형을 선고했는데, 이는 단순 절도 행위로 내려질 수 있었던 법정 최고형이었다. 당연히 이는 "배관공"들에게서 진심어린 자백을 듣고자 한 시리카 판사의 강수였다. 즉 강제적으로 사법 거래를 하게 한 것. 시리카의 예상대로, 배관공들은 자신들의 "절도"가 단순한 절도가 아니며 훨씬 위의 누군가에 의해 사주를 받았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존 시리카는 이런 사건 진행으로 자칫 닉슨에 의해 종결될 수도 있었던 워터게이트 사건을 다시 수면 위로 드러냈고, "법정 최고형 존"이라는 별명도 얻었으며, 1973년 타임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24]

1973년 1월 10일, 존 시리카가 판사를 맡은 재판이 시작되었고, 시리카의 40년형 선고는 즉각적으로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는 민주당원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단 민주당은 1972년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패배를 당했지만 상하원에서는 의외의 선방을 거둔 상황이었다. 민주당은 하원에서는 15석을 잃었지만 여전히 과반 의석을 사수했고 상원에서는 오히려 의석을 2석 늘렸다.[25] 민주당은 지방 조직과 의회 권력이 여전히 건재한 상태에서 시리카 판사에 의해 화제가 되고 있던 워터게이트 사건을 잘 활용하면 당세를 금방 재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고, 상원 원내대표 마이크 맨스필드와 원내총무 로버트 버드는 즉각 상원 선별위원회를 설치해 워터게이트 사건을 상원 차원에서도 조사하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시리카의 재판이 시작된 지 약 한 달 후인 1973년 2월 7일, 상원 대통령 선거 캠페인 활동 선별위원회(United States Senate Watergate Committee)가 구성된다. 민주당 4인[26]과 공화당 3인[27]으로 구성된 이 위원회의 위원장은 5선 중진의원인 샘 어빈[28] 상원의원이 맡았다.

상원이 주도한 청문회는 1973년 5월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는 미국인 거의 모두에게 관심을 받았다. 무려 85%에 달하는 미국인이 상원 청문회를 시청했다고 한다.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자 부담감을 느낀 닉슨 대통령은 측근 일부에게 사임을 권유한다. 밥 홀더먼 비서실장이 사임하고 그 자리를 알렉산더 헤이그(Alexander Haig)가 뒷따랐으며 존 미첼의 사임으로 기껏 불러온 리처드 클라인딘스트(Richard Kleindienst) 신임 법무장관도 사임해버렸다. 닉슨 대통령은 급한대로 국방장관 엘리엇 리처드슨(Elliot Richardson)을 신임 법무장관으로 임명한다. 엘리엇 리처드슨은 1973년 5월 청문회를 앞두고 특별검사를 선임해야 했는데, 자신의 대학교 은사인 아치볼드 콕스(Archibald Cox)를 포함한 몇몇 인사를 별 생각 없이 추천했다. 민주당이 이끄는 상원은 존 F. 케네디로버트 F. 케네디의 측근이자 그들의 친구이기도 했던 콕스를 특별검사로 승인했다. 리처드 닉슨은 공개적으로 콕스 특검의 설립을 축하했다. 그리고 백악관에 돌아와서는 케네디의 측근이 워터게이트를 수사한다니 믿을 수 없다고 소리를 질렀으며 리처드슨 장관이 자신을 분노하게 하려는 의도로 콕스를 추천한거라면 그야말로 대성공이라며 길길이 날뛰었다. 존 F. 케네디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던 닉슨에게 케네디의 최측근이었던 콕스가 특별검사로 임명된 것은 닉슨에게 심각한 정신적 타격을 입혔다. 아치볼드 콕스는 은퇴를 고려하던 늙은 교수였지만, 로스쿨을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열정적인 변호사와 검사를 자신의 팀에 포진시켰다.
청문회에서 발언하는 존 딘 고문
콕스 특검의 설치로 수사망은 점점 좁혀왔고, FBI는 난처한 입장에 처해졌다. 마침 존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의 사망으로 FBI 내부도 혼란스러웠던 상황. FBI는 혼란의 상황에서 수사 진행 보고를 존 딘 법률고문에게 하기로 결정한다. 백악관의 법률고문인 존 딘은 1938년생으로 1973년 당시 불과 35세로 매우 젊은 인물이었으며, 단지 닉슨 캠프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임명된 문고리 권력에 가까웠다. 존 딘 역시 워터게이트 사건 은폐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FBI로부터 보고받은 수사 결과를 닉슨에게 전달하였다. 그런데 존 딘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한 사법 처리가 자신의 생각보다 매우 심각해질 수 있으며 여차할 시 얼리크먼 고문과 홀더먼 전 비서실장, 닉슨 대통령이 차례 차례 "버려도 될 사람"을 버리고 자기들끼리만 살아남을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존 딘은 고민 끝에 차라리 자수를 하여 상원과 협의를 보아 형량을 낮추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1973년 2월부터 상원과 접촉하고 특검팀과도 손을 잡았다. 이 사실을 알아챈 닉슨은 딘을 해고했지만 존 딘은 상원 조사위원회로부터 면책특권을 부여받게 된다. 1973년 6월 25일, 존 딘은 상원 조사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총 4일간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청문회에서 털어놓았다. 그의 폭로는 사건의 전환점이 되었다. 존 딘은 닉슨과 그의 참모들이 이 사건에 연루되어있으며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하려는 시도가 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핵심적으로 자신과 닉슨 및 백악관 참모들의 대화가 녹음되는 것 같았다라는 결정적인 증언을 내놓았다.[29]

상원은 그 즉시 알렉산더 버터필드(Alexander Butterfield) 백악관 부보좌관을 7월 16일 청문회로 출석시켜 백악관에 모든 대화가 녹음되는 장치가 있는지 질문했다. 버터필드는 1971년 백악관이 모든 대화 및 전화를 녹음하는 장치를 설치했으며 거기에 닉슨, 홀더먼, 얼리크먼, 존 딘 등 모든 관계자의 대화가 녹음되어있을 것이라는 폭탄과도 같은 증언을 내놓았다. 이때부터 워터게이트의 국면은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닉슨의 지시가 담긴 테이프를 찾는 것으로 전환된다.

2.6. 테이프를 찾아라

버터필드의 폭탄 증언이 나온 지 이틀 만에 아치볼드 콕스 특별검사와 그의 팀은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존 시리카 판사 앞으로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명확한 증거가 담겨있는 테이프 8개를 제출하라고 명령하였다. 닉슨 측은 이에 대해 증거를 제출하거나 제출하지 않는 것은 법률 상의 영역이 아니라 대통령 고유의 권한에 있는 것이며, 국익에 따라 굳이 기밀을 공개할 필요가 없다라는 이유로[30] 이를 거부하였다. 하지만 존 시리카는 8월 29일 오랜 심의를 거쳐 닉슨이 콕스 검사의 명령을 거부할 권한이 없으며 닉슨이 즉시 테이프를 제출해야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1807년 존 마셜 대법관이 토머스 제퍼슨에게 증거를 제출하라고 명령한 판결 이후 거의 170년 만에 미국의 법원이 대통령에게 증거 제출을 명령한 판결이었다. 닉슨은 즉각 항소하였으며 테이프 제출은 그만큼 계속 연기되었다.

1973년 9월~10월은 그야말로 닉슨이 정신 없을 정도로 혼란을 겪은 시기였다. 대외적으로 살바도르 아옌데 칠레 대통령이 축출되었고, 욤 키푸르 전쟁이 일어났는데 닉슨은 비몽사몽한 채로 빗발치는 골다 메이어 총리의 전화를 받느라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한다. 게다가 10월 10일에는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이 워터게이트와 상관이 없는 사건으로 사퇴하는 일까지 생겼다. 메릴랜드 주지사와 부통령을 지내면서 받은 막대한 불법 자금이 논란이 된 것이다. 리처드 닉슨은 안 그래도 좋아하지 않는 부통령이 이런 방향으로도 발목을 잡는다고 짜증을 냈지만 별 수 없었다.[31] 인정사정 없이 닉슨을 강타하는 아치볼드 콕스 검사와 존 시리카 판사는 닉슨의 편집증을 더욱 강화시켰다. 결국, 리처드 닉슨은 리처드슨 법무장관을 통해 콕스 특검과의 테이프 제출 협상 절차를 밟는다.

그러나 리처드슨 법무장관이 협상에 매우 비협조적이었으며, 닉슨은 한술 더 떠 극우 성향으로 유명한 데다 청각장애까지 있는 존 C. 스테니스 상원의원에게 테이프를 제출하고 수기로 기록하게 함으로서 공개하자는 말도 안되는 제안을 하며 콕스 검사의 분노를 자초했다. 결국 협상은 파토나고, 1973년 10월 19일, 존 시리카 판사가 제시한 항소 마감기간이 지나버리면서 리처드 닉슨은 반드시 테이프를 제출해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이로서 리처드 닉슨은 어쩔 수 없이 아치볼드 콕스의 명령대로 8개의 테이프를 판사에게 제출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2.7. 토요일 밤의 대학살

1973년 10월 19일은 금요일이었고 그 다음날 1973년 10월 20일은 토요일이었다. 이 때문에 워싱턴 D.C. 지방 법원과 콕스 특별검사 팀이 모두 휴식에 들어갔고 주말 이틀 동안의 텀이 생겼다. 궁지에 몰린 리처드 닉슨은 이 텀을 이용해 아치볼드 콕스 특검팀을 대통령 직권으로 해산하기로 결정한다. 닉슨 대통령은 아치볼드 콕스 특별검사를 해임하고 대통령은 만약 공개된다면 국가 안보에 해를 끼칠 수 있는 기밀 문건 및 녹음 자료를 직권으로 공개하지 않을 수 있다는 주장[32]으로 시간을 끌어 대법원 판결까지 받으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리처드슨은 닉슨이 명령한 특별검사 해임을 거부하고 법무장관을 사퇴한다. 닉슨은 법무장관 대리가 된 법무차관 윌리엄 러켈스하우스(William Ruckelshaus)에게 다시 콕스를 해임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러켈스하우스도 닉슨의 지시를 거부하고 사퇴한다. 이제 법무장관 대리직을 맡는 인물은 법정에서 정부를 대변하는 역할을 맡는 송무차관(Solicitor General) 로버트 보크(Robert Bork)가 맡게 되었다. 로버트 보크는 사임을 고려했으나, 사임하지 않고 닉슨 대통령의 명령대로 아치볼드 콕스 검사를 해임하고 특검팀을 해체시켰다. 그러나 이로 인해 하루아침에 특별검사, 법무장관, 법무차관 직이 모두 공석이 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고, 워싱턴 포스트지는 이를 "토요일 밤의 대학살"(Saturday Night Massacre)이라고 부르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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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치볼드 콕스 특별검사 엘리엇 리처드슨 법무장관 월리엄 러켈스하우스 법무차관

토요일 밤의 대학살은 워터게이트 사건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전까지는 워터게이트 사건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지지율이 60%를 넘나들 정도로 인기 있었던 닉슨 대통령이 상대 후보 도감청을 직접적으로 지시한 것도 아닌데도 탄핵까지 갈 필요가 있겠냐는 여론이 다수였다. 그러나, 대통령이 직권으로 특검 팀을 무너트린 것은 대다수의 미국인들에게 대통령이 무엇인가를 숨기고 싶은게 있어 특검 팀을 해체시킨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것이 아니더라도 삼권분립을 매우 중시하는 국가인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사법권을 심각하게 침해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워싱턴 포스트뿐 아니라 다른 언론들도 탄핵을 거론하게 되었고, 전미 최대의 주간 잡지인 타임지마저 닉슨의 사임을 촉구하는 장문의 사설을 실어 닉슨을 비판하게 되었다.

이를 반영하듯, 1973년 6월까지만 하더라도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닉슨이 탄핵당해야 한다는 여론은 19%에 그친 반면[34] "토요일 밤의 대학살" 직후 치러진 NBC의 여론조사에서는 탄핵 찬성 44%, 반대 43%로 처음으로 탄핵 여론이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토요일 밤의 대학살의 당사자들이 겪은 운명은 엇갈렸다. 우선 리처드슨 법무장관은 법무장관 사퇴 이후 미국 언론의 찬사를 받으며 포드 행정부 시절 주영대사와 상무장관 직을 지냈고 카터 정권 때도 특사로 임명되는 등 초당적인 존경을 받았다. 비록 경선에서 떨어지긴 했지만 1984년 매사추세츠 상원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35] 러켈스하우스 차관도 레이건-부시 행정부 때 여러 공공기관장을 재임했고, 두 사람 모두 말년에 대통령 자유훈장을 수여받는 영광을 누렸다. 반면 로버트 보크는 1987년 로널드 레이건이 대법관으로 지명했음에도 워터게이트 사건 때의 행적이 문제가 되어 이례적으로 당파적인 이유 때문에 상원의 대법관 인준을 받지 못하는 굴욕을 당했다.[36]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여론이 심각하게 나빠지자 닉슨은 부랴부랴 레온 자워스키(Leon Jaworski) 특검의 출범을 다시 승인하며 김빠진 모양새가 되었다. 그리고 1973년 11월 17일, 동요하는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디즈니 컨템포러리 리조트의 회견장에서 기자회견을 연 닉슨은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I'm not a crook)이라는 전설적인 망언을 남기게 된다. "사기꾼"이라는 단어는 워터게이트 사건과 함께 제기된 세금 탈루 의혹을 잠재우기 위해 사용된 것이었다. 그러나 문맥이 어떻든 사람들에게는 "사기꾼"이라는 단어만 뇌리에 남은 덕에 미국인뿐 아니라 전세계인이 닉슨을 사기꾼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이 발언 직후 리처드 닉슨의 지지율은 20%대로 떨어졌다.

2.8. 1974년: 미합중국 대 닉슨

스피로 애그뉴의 사임으로 공석이 된 부통령 자리를 정하는 것으로 연말 화제가 잠시 옮겨갔다. 새 부통령 임명에 대해 많은 토론이 있었지만 닉슨이 새 부통령을 지명하고 상하원이 이를 인준하기로 하였다. 리처드 닉슨은 텍사스 주지사와 재무장관을 지낸 존 코널리를 개인적으로 선호했으나, 민주당 대부분의 의원과 뜻이 맞지 않는 보수적인 정책을 추진해 이미 민주당 의원들에게 밉보여있던 존 코널리가 부통령으로 인준될 가능성은 없었다. 2순위였던 넬슨 록펠러는 공화당 강성 지지층에게, 3순위였던 로널드 레이건은 민주당 강성 지지층에게 인기가 없었고, 그래서 하원 원내대표를 지냈으며 온화하고 청렴한 성격으로 광범위하게 인기 있었던 제럴드 포드가 부통령으로 임명되었다. 1973년 11월 27일 상원은 92대 3으로 포드 부통령 인준안을 통과시켰고 12월 6일에는 하원에서 387 대 35로 통과시켰다. 제럴드 포드는 청문회를 무난히 통과했고 애그뉴와 달리 깨끗한 경력을 가지고 있어 미국인들이 안심할 수 있었다.[37]

해를 넘긴 1974년부터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법정 공방은 심화되었다. 리처드 닉슨은 테이프를 제출해야한다는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몇백 쪽에 달하는 녹취록을 공개했는데 이는 완전한 역효과를 냈다. 닉슨이 정적을 욕하는 내용이 그대로 담겨있었기 때문에 보수층 사이에서 닉슨에 대한 여론이 급격하게 악화된 한편 진보층은 워터게이트와 관련된 핵심적인 내용은 모두 빠진 녹취록의 공개가 의미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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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지 표지를 장식한 레온 자워스키 특별검사
1974년 3월 4일, "워터게이트 7인방"(미첼 법무장관, 홀더먼 비서실장, 얼리크먼 보좌관 등)이 워싱턴 지방 법원에 의해 공식적으로 기소되었으며, 3월 18일 시리카 판사는 대배심 보고서를 하원 사법위원회에 보내도록 하였다. 1974년 4월 16일, 자워스키 특검은 8개의 테이프 제출만을 요구한 아치볼드 콕스 특별검사와 대조되게 64개의 테이프를 제출하라고 요구하였다. 시리카는 5월 31일까지 테이프를 넘기라고 명령했다. 닉슨은 이에 거세게 반발하며, "특검은 대통령에게 명령할 권한이 없으며, 그 대화는 공개 시 국가의 안보에 해를 끼칠 수도 있는 기밀이 담긴 것이다"라는 내용으로 미국 연방대법원에 항소하였다.

1974년 들어 탄핵을 요구하는 여론은 오차범위 밖에서 탄핵 반대 여론을 앞서고 있었다. 1974년 5월 9일 하원 법사위에서 탄핵 청문회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상원에서 확실하게 탄핵에 찬성하는 의원은 약 60명 정도로, 탄핵에 필요한 66명에 이르지 못했으므로, 닉슨은 연방대법원에서 테이프 제출을 무력화시켜 이를 토대로 여론을 반등시킬 생각이었다. 리처드 닉슨은 국가 기밀이 들어있는 테이프를 제출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의 주장을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뒷받침했다.
The President wants me to argue that he is as powerful a monarch as Louis XIV, only four years at a time, and is not subject to the processes of any court in the land except the court of impeachment.
미국의 대통령은 재임 도중 루이 14세와 같은 강력한 권한을 갖는다. 이는 미국 대통령이 탄핵 심판을 제하고는 그 어떠한 법정의 명령에도 굴복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즉, 리처드 닉슨은 미국 대통령이 일종의 면책특권을 가지며 법원의 명령에 구애받지 않고 극강으로 권력을 사용할 수 있는 자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과거 오하이오 켄트 주립대학교 발포 사건에서도 닉슨이 개인적으로 보인 신념이었으며 죽기 일보 직전의 인터뷰에서도 이를 강력하게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닉슨의 변론 3주 후 연방대법원은 이러한 닉슨의 주장이 헌법에 전면적으로 위배되는 것이며, 닉슨은 존 시리카 판사 및 자워스키 특검의 말대로 테이프를 넘겨줘야 한다라고 판결을 내렸다. 그것도 8대 0으로![38] 연방대법원의 의견은 다음과 같았다.
United States v. Nixon (418 US 683)
The expectation of a President to the confidentiality of his conversations and correspondence, like the claim of confidentiality of judicial deliberations, for example, has all the values to which we accord deference for the privacy of all citizens and, added to those values, is the necessity for protection of the public interest in candid, objective, and even blunt or harsh opinions in Presidential decisionmaking. A President and those who assist him must be free to explore alternatives in the process of shaping policies and making decisions, and to do so in a way many would be unwilling to express except privately.
사법 심의의 기밀 유지 주장과 같이 대통령이 자신의 대화와 서신의 기밀성을 기대하는 것은 소시민들이 사생활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가치를 지닌다. 여기에 더하자면, 대통령의 의사결정은 솔직하고, 객관적이며, 직설적이거나 심지어 가혹할지라도 모든 종류에 있어 기밀이 유지되어야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과 그를 보좌하는 사람들이 설령 험한 말을 하면서라도, 정책을 형성하고,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는 대안이 자유롭게 모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But this presumptive privilege must be considered in light of our historic commitment to the rule of law. We have elected to employ an adversary system of criminal justice in which the parties contest all issues before a court of law. The need to develop all relevant facts in the adversary system is both fundamental and comprehensive. The ends of criminal justice would be defeated if judgments were to be founded on a partial or speculative presentation of the facts. The very integrity of the judicial system and public confidence in the system depend on full disclosure of all the facts, within the framework of the rules of evidence. To ensure that justice is done, it is imperative to the function of courts that compulsory process be available for the production of evidence needed either by the prosecution or by the defense.
그러나 이러한 대통령의 특권은 법치주의에 대한 역사적인 헌신에 비추어 고려되어야 할 필요 역시 존재한다. 미국은 당사자들이 법정에서 모든 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형사 사법의 당사자주의를 채택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사자주의 체계에서 모든 사건과 관련된 사실이 법정에서 공개되어야 할 필요성은 근본적이고 또 포괄적이다. 만약 사실이 부분적이고 추측적으로 제시된다면 형사 사법의 목적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사법 시스템의 완전성과 또 그러한 시스템에 대한 대중의 신뢰는 증거 규칙의 틀 내에서 모든 사실이 완전하게 공개되는 것에 기반한다. 정의가 실현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면, 검찰이나 피고인이 필요로 하는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강제적인 절차를 시행하는 것도 법원의 기능에 필수적인 것이다.

The Sixth Amendment explicitly confers upon every defendant in a criminal trial the right "to be confronted with the witnesses against him" and "to have compulsory process for obtaining witnesses in his favor." Moreover, the Fifth Amendment also guarantees that no person shall be deprived of liberty without due process of law. It is the manifest duty of the courts to vindicate those guarantees, and to accomplish that it is essential that all relevant and admissible evidence be produced.
수정헌법 제6조는 형사 재판에서 모든 피고인이 자신에게 불리한 증인과 대면할 권리와 유리한 증인을 확보할 수 있는 권리를 명시적으로 부여한다. 더욱이 수정헌법 제5조는 적법한 절차 없이 그 누구도 시민 자유를 박탈당하지 않을 권리를 부여한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서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사법 처리에 있어 필수적인 것을 입증하는 것이 법원의 의무이다.

On the other hand, the allowance of the privilege to withhold evidence that is demonstrably relevant in a criminal trial would cut deeply into the guarantee of due process of law and gravely impair the basic function of the court. A President's acknowledged need for confidentiality in the communications of his office is general in nature, whereas the constitutional need for production of relevant evidence in a criminal proceeding is specific and central to the fair adjudication of a particular criminal case in the administration of justice. Without access to specific facts, a criminal prosecution may be totally frustrated. The President's broad interest in confidentiality of communications will not be vitiated by disclosure of a limited number of conversations preliminarily shown to have some bearing on the pending criminal cases.
그러나 형사 재판에서 명백한 관련성이 있어보이는 증거를 제출하지 "않을 수" 있는 대통령의 특권을 허용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며, 이는 법원의 기본적인 기능을 심각하게 훼손시킬 것이다. 대통령의 직무상 의사소통이 기밀로 유지된다는 것은 일반적인 경우에 국한되는 반면, 형사 소송에서 관련 증거를 제시해야 하는 헌법적인 필요성은 특정한 형사 재판의 공정한 판결과 관련되어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경우로 분류할 수 없는 예외적 경우에 해당된다. 의사소통의 기밀성에 대한 대통령의 특권은 그러한 예외적인 형사 사건으로 인하여 일부 대화가 공개된다고 해서 훼손되지 않을 것이다.
워런 E. 버거 대법원장의 의견서, 1974년 7월 24일
정리하자면, 대법원은 대통령의 특권은 보호되어야 마땅하나, 법치주의와 특권이 상충한다면 법치가 우선시되어야 한다라는 입장을 내비친 것이다.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할지라도 증거를 제출할 수 있는 상황에서 제출하지 않는다면 증거 불충분의 상태에서 재판을 할 수밖에 없고, 이는 필연적으로 형사법제도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는 이유에서이다. 물론 사생활과 기밀이라는 두가지 측면에서 대통령이 자신의 특권인 기밀 유지를 행사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워터게이트와 같은 형사 사건은 예외에 속한다는 것이 대법원의 의견이었다. 이 판결은 미국의 권력자들이 가진 막강한 권력이 결국 법치주의의 토대 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한 중요한 판례로, 미국에서 법학과 역사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반드시 외우고 갈 정도로 기념비적인 판결로 남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심의에 참여한 판사 9명 중 3명이 리처드 닉슨이 임명한 중도 내지 보수 성향의 대법관이었다는 점이다. 윌리엄 렌퀴스트는 닉슨 행정부에서 일한 경력이 있어 최종 판결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닉슨이 임명한 해리 블랙번 대법관과 루이스 파월 주니어 대법관은 모두 닉슨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앞서 닉슨을 궁지로 몰아넣은 존 시리카 판사 역시 공화당 소속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의 강력한 삼권분립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2.9. 1974년 8월 9일: 리처드 닉슨의 사임

리처드 닉슨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테이프를 시리카 판사에게 제출하였다. 그리고 시리카 판사에게 제출한 테이프에서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의 은폐를 명령한 것이 확인되었다. 이로서 닉슨은 국민에게는 거짓말을, 판사에게는 위증을 한 것이 되었다. 미국의 사법 제도는 위증을 큰 죄로 인식한다. 닉슨이 탄핵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워터게이트 사건에 자신이 관여한 것이 없고 아는 것도 없다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39]

이때 약 18분 30초 가량의 분량이 삭제되어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백악관 직원이 전화를 받다가 실수로 지운 것이라고 했는데, 정작 전화기 위치상 테이프가 지워지려면 팔다리 길이가 기린만큼 길어야 한다는 게 밝혀져서 닉슨만 망신을 산 바 있다. 다만, 현재는 약 3,000시간 분량의 테이프가 공개된 상태고, 이중 겨우 200시간만이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40], 전문가들은 이 18분 30초가 공개된다고 하더라도 별다른 얘기는 없고 지나치게 예민한 감정을 가지고 있던 닉슨이 과민반응으로 별것 아닌 것을 지운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일단 먼 미래에 복구 기술이 개발되기를 기다리면서 현재 이 테이프는 워싱턴 D.C. 도서관 지하에서 쿨쿨 자고 있다.

거짓말을 한 것도 큰 문제였지만, 다른 문제도 속속 드러났다. 1974년 연초부터 계속 쏟아져 나온 녹취록과 8월 초 공개된 테이트의 육성에서 리처드 닉슨과 그의 고문이 저급한 욕설을 섞어가며 민주당의 유력 정치가를 비난하고, 심지어 주무부처 장관까지 뒷담화를 한 것이 드러난 것이다.[41]존 F. 케네디에 대해 비정상적일 정도로 열등감을 가지고 욕설을 퍼부은 것도 공개되면서 리처드 닉슨의 대중적인 이미지는 "열등감과 대인기피증에 사로잡혀 동료 정치인들을 욕하는, 대통령으로는 아주 부적합한 인물"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결국 1974년 7월 말 하원의 심의 결과, 다수의 혐의를 이유로 탄핵안이 통과되었다. 각 혐의별 표결 결과는 다음과 같다.
<rowcolor=#fff> 리처드 닉슨 탄핵 혐의별 찬반투표
<rowcolor=#fff> 혐의 찬성 반대 정당별
표결 결과
비고
사법 방해(위증)
1974년 7월 27일
27 11

찬 21, 반 0
찬 6, 반 11
<colcolor=#000> 가결
대통령 권한 남용
7월 27일
28 10

찬 21, 반 0
찬 7, 반 10
가결
의회 모독
7월 29일
21 17

찬 19, 반 2
찬 2, 반 15
가결
캄보디아 불법 폭격
7월 30일
12 26

찬 12, 반 9
찬 0, 반 17
부결
세금 탈루[42]
7월 30일
12 26

찬 12, 반 9
찬 0, 반 17
부결
미국은 상임위원회에서 우선 표결을 거친 후 본회의에서 표결을 하도록 하는데[43], 7월 말 치러진 것은 하원 상임위에서 탄핵을 본회의 표결에 부칠지 말지에 관한 것이었다. 표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절반에 가까운 공화당 상임위원이 많은 혐의에서 탄핵에 찬성했다. 하원의원 중에서는 대표적으로 후일 대선에 나가게 되는 록펠러 공화당원 존 B. 앤더슨 하원의원이 앞장서 닉슨의 탄핵을 지지했다. 상원의원 중에서는 에드워드 브룩 매사추세츠 상원의원이 공화당 내 탄핵 찬성 여론을 주도했다.

대법원 판결 및 테이프 공개 이전까지, 마이크 맨스필드와 로버트 버드 등 민주당의 상원 지도부는 하원에서는 300표 대 150표 정도로 탄핵안이 통과되지만 상원에서는 60 대 40으로 탄핵에 필요한 66표에서 6표 정도가 모자라서 부결될 것으로 예상되었다.[44] 그러나 1974년 7월 말 들어 상원 내 여론이 급반전되었는데, 밥 돌 상원의원은 이 당시 확실하게 탄핵에 반대하는 상원의원이 20명까지 줄어들었다고 회고했고 배리 골드워터와 공화당 상원 지도부는 15명 이하만이 탄핵에 반대 투표할 것이라고 계산했다.

결국 하원에서 탄핵 본회의 상정안이 압도적으로 통과된 이상 상하원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탄핵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뜻이다. 보다 못한 공화당의 일부 의원은 의회가 필요 이상으로 대통령을 간섭하게 될 선례를 남기지 않도록 닉슨이 사퇴해달라고 부탁했다. 닉슨은 처음에는 사퇴할 의향이 결코 없다고 밝혔지만, 공화당은 당 내에서 가장 존경을 받던 중진의원 배리 골드워터가 상원 지도부를 이끌고 백악관을 방문하도록 했다. 골드워터는 닉슨에게 사퇴하도록 설득했고, 회의는 순조롭게 풀렸다. 그날 저녁 닉슨의 딸과 아끼는 사위[45]와 식사를 가졌고 그 자리에서도 딸 부부가 사퇴를 요구했다. 결국 닉슨은 기존의 입장을 뒤집고 사퇴에 뜻을 두게 된다.

닉슨이 백악관에서 보낸 마지막 날은 아주 극적이었고 영화화도 많이 되었다. 닉슨은 헨리 키신저에게 같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자고 했고, 닉슨은 기도하던 중 결국 오열을 하고 말았다. 닉슨은 키신저에게 누구에게도 자기가 어린 아이처럼 울었다는 걸 말하지 말아달라고 했지만 키신저는 약속을 깨고 언론에 이를 떠들어대서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또 닉슨은 한밤중 존 F. 케네디의 초상화와 대화를 하는 등 정신적으로 아주 힘든 상황으로 내몰렸고, 미군 참모들은 닉슨이 우발적으로 핵전쟁을 일으킬 것을 우려해 대통령 전속부관들에게 지시하여 핵가방을 사퇴 결정 몇 시간 전부터 대통령이 이를 쓰지 못하게 했고, 자살하지 않도록 감시를 붙였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사임 연설
1974년 8월 8일, 닉슨은 대통령직 사퇴 의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닉슨은 개인적으로 중도에 포기하는 것을 혐오하며, 포기하는 자가 아니라 끝까지 버티는 자가 승리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퇴는 자신의 몸이 바라는 모든 것에 반한다고 했다. 그러나 국익과 참모들의 진지한 설득을 고려하여 사퇴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닉슨은 이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 4시, 전자 시계 배터리가 다 닳은 후에야 잠에 빠져들었다. 닉슨은 짧은 잠을 잔 후에 일어나 자신이 너무 늦게 일어난 것은 아닌지 궁금해했다. 그날 아침 닉슨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코티지 치즈를 올린 통조림 파인애플을 우유와 곁들여 먹은 후[46] 백악관을 나섰다.

8월 9일 정오 닉슨은 백악관 직원들과 마지막으로 인사했고, 이 자리에서 짧은 연설을 했다. 닉슨의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그 누구보다도 어머니를 기억하고자 한다. 어머니가 결핵에 걸린 내 형을 간호하느라 3년 동안 애리조나에서 고군분투했던 게 떠오른다. 아무도 내 어머니에 대한 책을 쓰지는 않겠지만, 그녀는 성자였다."

닉슨은 마지막으로 신임 제럴드 포드 대통령과 짧은 인사를 건낸 후, 마린 원에 올라타기 직전 환하게 웃으며 승리의 V 사인을 그었다. 그렇게 2년에 걸친 워터게이트 사건은 막을 내렸다.
파일:Nixon V.jpg
승리의 V자 사인을 긋는 리처드 닉슨

그의 퇴임과 포드의 취임 시각에 이르기 전 마린 원은 워싱턴 DC의 앤드류스 미합중국 공군 기지에 착륙했다. 닉슨은 마린 원에서 에어 포스 원으로 갈아타고 캘리포니아로 귀향길에 올랐는데, 비행중 워싱턴 DC에서 포드 대통령의 취임식이 열리자, 규정에 따라 기장 랠프 앨버타치 공군 대령은 에어 포스 원에서 기체 고유 부호 SAM 27000으로 호출 부호를 변경했다. 에어 포스 원이 비행중 호출 부호를 변경한 전무후무한 사례였다.[47]

3. 이후

3.1. 워싱턴 D.C.의 상황

미국사의 3대 부패한 거래
Corrupted bargain
1824년
애덤스와 클레이의 거래
1877년
1876년의 타협
1974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령 사면

미국인들의 정부에 대한 신뢰는 급격하게 떨어졌다. 제럴드 포드는 개인적으로 청렴했고 정치적으로도 안정된 리더십을 보여줬기 때문에 워터게이트 사건을 뒷수습하기에 적임자로 여겨졌다. 그러나 포드는 대통령 취임한 즉시 리처드 닉슨에 대한 모든 사법적 혐의를 사면하면서 이러한 적임자 역할을 맡기에 적합한 인물인지에 대한 대중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취임 당시 지지율 60%에 달했던 포드의 지지율은 단 몇 달 만에 닉슨 사면으로 30%대로 떨어졌다. 그리고 1974년 11월 치러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은 그야말로 역대급의 대승리를 거두었다. 그냥 대승리가 아니라 하원에서는 49석을 늘린 291석, 상원에서는 4석을 늘린 61석이었다. 이는 대공황 시기 공화당의 인기가 엄청나게 없었던 때를 제외하면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기록이며 특히 하원에서 단독으로 개헌선인 2/3을 넘기고 상원에서도 필리버스터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이른바 "클로처" 의석, 즉 3/5 이상의 의석을 차지한 것이다.
파일:1974_US_House_of_Representatives_Election_by_States.svg
1974년 하원 의원 선거의 결과
민주당은 이 선거를 통해 많은 초선 의원을 당선시키게 되었는데, 이때 당선된 의원 대다수는 그동안 공화당이 결코 내어주지 않았던 보수적인 교외 중산층 거주지 선거구에서 당선된 의원들이었다. 자연스럽게 이들은 지역구의 성향대로 중도적인 정책을 표방하게 되었고, 1980년대 게리 하트, 앨 고어, 빌 클린턴으로 대표되는 민주당 중도화의 물결에 크게 기여하게 되는데, 이들을 워터게이트 베이비(Watergate Baby)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인물로 1988년 민주당의 대권주자였던 폴 사이먼(Paul Simon)[48]이 있다. 여러모로 탄돌이와 비슷한 개념인데, 탄돌이처럼 워터게이트 베이비들도 민주당 당론에 따르지 않고 소신대로 활동해서 민주당 지도부 속을 썩였다.

그러나 민주당 역시 압도적인 의회 권력 하에서 여러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게 되었고 미국 사회에는 정치 혐오가 팽배했다. 펜타곤 페이퍼 사건으로 아이젠하워, 존 F. 케네디, 린든 존슨이 모두 미국 국민을 속여 베트남 전쟁 참전에 기여했고, 리처드 닉슨 역시 워터게이트로 국민을 속였기 때문에 민주당이나 공화당이나 그놈이 그놈이라는 인식이 확산된 것이다. 이로 인해 1976년 대선에서는 아웃사이더였던 지미 카터 조지아 주지사가 정치 혐오를 바탕으로 예비선거에서 깜짝 승리를 거두어 민주당 후보로 지명되었고 마찬가지로 공화당에서도 재치있는 입담과 대중 친화적 행보로 공화당 골수 지지자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던 로널드 레이건이 예비선거에서 상당히 선전하게 된다.[49] 상대 제럴드 포드 역시 백악관에 명예와 신뢰를 되찾겠다는 것을 핵심 공약으로 삼았을 정도로[50] 1976년 미국 대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청렴함과 성실함, 정직함과 같은 윤리적인 이슈가 부각된 선거였다.

선거 결과, 제럴드 포드는 닉슨 사면의 역풍을 이기지 못했고, 독실한 침례교 신자이자 도덕적으로 전혀 흠 잡을 것이 없었던 정치적 신인 지미 카터가 가까스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지미 카터는 경제와 외교 모두에서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았고[51] 결국 1980년 대선에서 다시 로널드 레이건에게 정권을 내어주게 된다.

3.2. 사법 심판

리처드 닉슨과 밥 홀더먼, 존 얼리크먼, 고든 리디, 하워드 헌트, 배관공 5인방 등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되어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법 처리되었다.
  • 법무장관 겸 재선위원장 존 미첼은 위증죄로 4년형을 선고받았으며, 19개월 동안 복역하였다.
  • 재선 부위원장 젭 매그루더(Jeb Magruder)는 절도 공모 혐의에 대하 유죄를 인정하고 4년형을 선고받았으며, 7개월을 복역한 후 가석방되었다.
  • 미첼 법무장관의 고문 프레더릭 C. 라루(Frederick C. LaRue)는 사법 방해 혐의로 4개월 동안 복역하였다.
  • 존 얼리크먼 내정보좌관은 절도 공모, 사법 방해, 위증 혐의로 4년 형을 선고받았으며, 18개월동안 복역하였다.
  • 밥 홀더먼 비서실장은 절도 공모, 사법 방해, 위증 혐의로 4년형을 선고받았고 마찬가지로 18개월 동안 복역했다.
  • 존 딘 법률고문은 청문회에서 적극적으로 진실을 밝힌 점이 참작되어 상대적으로 낮은 4개월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 에질 크로흐(Egil Krogh) 교통차관은 펜타곤 페이퍼 사건과 연관 공모 사실이 발각되어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 드와이트 L. 채핀(Dwight L. Chapin) 대통령 비서는 위증죄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 상무장관 겸 재선위원회의 자금 관리국장이었던 모리스 스탠스(Maurice Stans)는 선거법 위반으로 벌금 5,000달러[52]를 선고받았다.
  • 닉슨의 개인 변호사 허버트 W. 칼름버크(Herbert W. Kalmbach)는 선거법 위반으로 10,000달러[53]를 선고받았으며 191일동안 미결수로 감옥에서 복역했다.
  • 공공업무실장 찰스 W. 콜슨(Charles W. Colson)은 사법 방해 혐의로 7개월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 허버트 L. 포터(Herbert L. Porter) 재선위원회 보좌관은 위증죄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 고든 리디 요원은 20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이는 시리카 판사의 강제적 사법거래를 위한 판결이었으므로 실제로는 1년 반만을 감옥에서 복역했다.
  • 하워드 헌트 요원은 민주당사 사보타주를 주도하고 감독한 혐의로 3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마찬가지로 실제로는 33개월만을 복역했다.
  • 배관공 부대를 이끈 제임스 매코드는 절도, 음모, 도청을 포함한 6건의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고 2개월 간 감옥에서 복역했다.
  • 배관공 부대의 5인방은 시리카 검사에 의해 4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역시나 사법거래를 위한 과장된 선고였다. 실제로는 버질리오 곤살레스가 13개월, 버나드 베이커가 18개월, 유제니오 마르티네스가 15개월, 프랭크 스투지스가 10개월을 복역했다.
  • 닉슨 대통령 사임 1개월 후인 1974년 9월 8일, 포드 대통령은 대통령 직권으로 리처드 닉슨에 대한 모든 혐의를 사면했다. 따라서 닉슨은 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았다.

사건의 규모에 비해 상당히 처벌 수위가 낮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 사건에서 나올 수 있을만한 혐의가 위증죄, 사법 방해, 위증, 절도 등으로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리처드 닉슨은 도청 사실을 주도하기는 커녕 알지도 못했으므로 억울하다고까지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사건이 밝혀진 이후 진상 규명을 방해하고 위증을 한 것이 문제가 되었고 이에 따라 약소한 처벌이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도청을 통해 민주당이 입은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고 또 도청은 당시 미국에서 워낙 흔한 것이었기에[54] 중대하게 처벌하기에는 애매한 감도 있었다. 꽤 큰 형벌을 받은 당사자들도 대부분 지미 카터 대통령이 가석방을 해줘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와 별개로, 비서실장, 정부부처 장관, 백악관 직원들이 줄줄이 쇠고랑을 차고 감옥에 들어가게 된 것은 미국인 대다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미국을 이끌어나갈 엘리트 정치가들과 고관대작들이 있을 수 없는 비민주적인 일을 저지른 것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던 것이다. 미국인들의 정치에 대한 혐오감과 불신감은 이때 역대 최고를 찍었고, 이는 정직성과 청렴함을 내세운 아웃사이더 지미 카터가 대통령이 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특색 없고 심심한 대통령이라고 평가받았던 제럴드 포드가 1976년 대선에서 의외로 선방한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3.3. 당사자들의 여생

리처드 닉슨은 1994년까지 살았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자신의 사저에서 하루 종일 허공을 바라보기도 하며 허망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럼에도 정치에 계속 관심을 가졌는데, 1980년대 몇권에 달하는 정치 분석서를 써내 대중과 평론단 모두의 호평을 받기도 하고, 레이건과 부시의 대통령 캠페인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기도 하는 등, 정치에 대한 야망은 끝내 내려놓지 않았다. 1993년, 사랑하는 아내 팻 닉슨이 사망하자 닉슨은 장례식에서 그야말로 오열을 했고,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이듬해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비록 그는 소박한 가족장으로 장례식을 치루라고 유언을 남겼지만, 빌 클린턴 대통령, 밥 돌 상원의원을 비롯한 여야의 많은 고위 정치인들이 장례식에 참석해 그의 최후를 배웅했다.

존 얼리크먼은 감옥에서 풀려난 후 여러 언론과 인터뷰를 가졌는데, 마약과의 전쟁이 닉슨의 실책이었음을 담담하게 인정하는 인터뷰가 뒤늦게 재발굴되어 크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밥 홀더먼은 고향으로 돌아가 사업을 했고 크게 성공했다고 한다. 얼리크먼은 1999년, 홀더먼은 2006년 사망했다.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닉슨의 입이 되었던 론 지글러는 1974년 닉슨의 대통령직 사임과 동시에 백악관 대변인 직을 내려놓았다. 닉슨의 다른 측근들은 닉슨과 연락을 끊었지만 론 지글러만큼은 존 코널리와 더불어 닉슨이 아주 가깝게 지낸 사람 중 하나였다. 1980년대에는 트럭 사업을 하면서 여생을 보냈고 닉슨을 옹호하는 활동을 벌이다가 2003년 사망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핵심 관계자였던 G. 고든 리디는 감옥에서 출소한 후 정보기관으로 돌아가지는 못했지만 방송 업계에서 의외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가 진행한 라디오 쇼는 인기가 좋아서 고든 리디는 꽤 행복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가 쓴 자서전은 백만부 넘게 팔리기도 했다. 2021년 그는 파킨슨 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하워드 헌트의 여생은 잘 알려져있지 않은데, 멕시코와 마이애미를 오가며 조용하게 살다가 2008년 숨졌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전모를 드러내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존 딘은 여전히 살아있다.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존 딘은 워터게이트 사건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배리 골드워터를 지지했을 정도로 강력한 보수주의의 지지자였지만, 사건 이후로는 민주당 지지자로 변신해 공화당 대통령과 그의 정책을 비판했다. 이라크 전쟁과 러시아 게이트 사건 당시 소리를 높여 공화당을 비판했고 얼마 전에는 도널드 트럼프와 윌리엄 바 법무장관이 거짓말을 한다고 맹공하여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 사건의 최대 피해자라고 볼 수 있는 1972년 대선의 민주당 후보 조지 맥거번은 별다른 말을 남기지 않았다. 그는 1980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이후 정계를 은퇴했으며, 리처드 닉슨을 끝내 용서하고 말년에는 닉슨을 기리는 재단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다. 정계를 은퇴한 이후에도 버니 샌더스와 같은 신인 진보 정치가들을 지원하고 밥 돌 상원의원과 빈곤 퇴치 운동을 벌이는 등의 활동으로 여생을 보내다가, 2010년 고향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3.4. 처치 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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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처치 특별위원장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내에서는 정부 기관의 비밀스러운 활동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고, 그 결과 1975년 미국 상원에서 정보 활동과 관련된 정부 운영을 연구하기 위한 미국 상원 특별 위원회(United States Senate Select Committee to Study Governmental Operations with Respect to Intelligence Activities)가 출범한다. 이 위원회의 위원장을 아이다호 주 출신 민주당 상원의원 프랭크 처치(Frank Church)가 맡아 처치 위원회라고 알려져있다.

처치 위원회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실추된 미국 정부의 신뢰도를 회복하기 위해 정보기관이 우선 투명성을 갖춰야한다는 신념 하에 세워졌고, 월터 먼데일, 필립 하트, 존 타워, 배리 골드워터, 리처드 슈바이커, 하워드 베이커 등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의 중진의원들이 위원을 맡았다. 이 위원회는 그동안 음모론으로 치부되었던 CIA와 FBI의 여러 뒷공작을 캐내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대표적으로 이 조직의 조사 하에 살바도르 아옌데를 몰아낸 1973년 칠레 쿠데타가 CIA의 뒷공작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증명되었으며, 쿠바 공산주의 정부를 향한 미국 정보부의 편집증적인 음해 시도도 발각되었다. 또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에 대해서도 광범위하게 재조사했는데, 이때 조사된 방대한 문건은 2022년 조 바이든 행정부 때 기밀 해제되었다. 물론 음모론자들이 기대한 새로운 건 없었고 FBI와 CIA가 자신들의 위신을 유지하기 위해 몇몇 사소한 사건을 은폐했다는 점만이 공개되었다.

처치 위원회의 평가는 엇갈린다. 진보 진영에서는 베일에 감추어져있던 CIA와 FBI의 더러운 행위를 철저하게 조사하고 정보 조직의 투명성을 높이고자 한 위대한 진상규명 행위였다고 평가하는 반면, 보수층은 이러한 노골적인 CIA, FBI 찍어내기가 결국 지미 카터 정권의 안보 무능을 초래했다고 비판한다. 1979년 이란 인질극 사건 당시 특히 미국의 안보 공백에 대한 우려가 대두되었고 결국 1980년 로널드 레이건이 당선되면서 처치 위원회는 해체되고, CIA와 FBI의 조직을 확장하는 정책이 백악관 행정명령 12333호를 통해 추진되며 처치 위원회의 정보조직 개혁은 반쪽짜리의 성공으로 끝났다. 더불어 프랭크 처치 본인도 1980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재선에 실패하고 정계에서 물러나게 된다.[55]

그럼에도 처치 위원회의 활동은 미국 정보조직의 장막을 걷어내고 이를 개혁하려는 최초의 시도였으며, 이후 CIA와 FBI 개혁을 추진한 여러 정치인들에게 동기를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3.5. 스캔들의 영원한 대명사가 되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난지 5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워터게이트 사건은 평범한 일상 어휘 속에서도 살아있다. 다름 아닌 정치 스캔들 뒤에 붙는 접미사 ~~게이트의 어원이 바로 워터게이트이기 때문이다. ~~게이트는 어감도 좋고 이것 저것 붙일 수 있는 용례가 많아서 1970년대 코리아게이트 사건 등 여러 정치 스캔들의 별명으로 사용되었는데, 오늘날에는 정치 스캔들 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스캔들에 다 쓰이는 용어가 되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만 하더라도 박연차 게이트, 엘시티 게이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등 일상적으로 친숙하게 쓰이는 어휘이며, 해외에서도 지퍼게이트, CPU게이트, 엘사게이트 등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심지어 최근에는 스웨덴게이트 같이 스캔들과 별로 상관 없는 유머러스한 논란에도 사용될 정도로 용례가 확장되었다.

이 때문에 미국사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워터게이트를 물과 관련된 게이트로 착각하기도 하는데, 주객이 전도된 모범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4. 진실을 파헤친 사람들

워터게이트 사건은 미국 민주주의에 경종을 울린 사건이기도 했다. 당시 미국은 대통령이 상대 정치인을 도청하고, FBI와 CIA가 불법적인 사찰을 저지르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을 정도로 민주주의가 훼손된 상태였다. 그러나 외압에 굴하지 않고 사건을 취재한 워싱턴 포스트와 묵묵히 자신들의 할 일을 한 법관과 검사들, 닉슨을 쏘아붙이며 여론전을 주도한 상하원 법사위원의 역할이 뭉쳐져 지지율이 60%를 훌쩍 넘기고 있던 무소불위의 리처드 닉슨은 무너지고 말았다.

워터게이트 사건 이전까지, 언론사들은 대통령이나 고위 정치인들의 말에 맞추어주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이 때문에 닉슨이 대놓고 대선 토론회를 거부하고 기자회견을 회피했음에도 누구 하나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였다. 하지만 워싱턴 포스트의 영웅적인 취재 이후 분위기는 달라졌다. 고위 권력을 감시하는 기구로서의 언론사의 기능이 최초로 부각된 것이다. 이 사건 이후, 닉슨과 달리 그 어떤 대통령 후보도 대통령 선거 토론회를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1976년 대선 때는 1960년 대선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 토론회가 치러졌을 뿐 아니라 부통령 선거 토론회도 치러졌다. 또 고위 정치인들이 알아서 쉬쉬하고 넘어가던 관행도 상당히 개선되었다.

예를 들어,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후, 민주당의 중진의원 윌버 밀스(Wilbur Mills)가 음주운전 사고를 냈다. 윌버 밀스는 하원 8선 의원으로 조지 맥거번이 1972년 대선에서 당선되면 그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하겠다고 약속할 정도로 민주당 내에서 인망이 높았고, 당연히 민주당 내에서는 이를 묻어가자고 했으나, 여론은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언론이 앞다퉈 윌버 밀스의 음주운전 사고를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이 때문에 윌버 밀스는 1976년 선거에서 불출마를 선언한다. 이처럼 폐쇄적이었던 워싱턴 정가는 제3의 감시 기구인 언론의 활약으로 예전과 같아질 수 없었다.

또한, 워터게이트 사건은 희미해져가던 미국의 민주공화주의 원칙을 다시 상기시켰다. 이 사건을 담당한 존 시리카 판사는 공화당 소속으로 1968년과 72년 대선에서 닉슨에게 투표했고, 닉슨이 임명한 3명의 대법관은 닉슨이 테이프를 제출하지 않을 권리가 없다고 판결을 내렸다. 이처럼 당시 사법부에는 닉슨을 지지하는 인물이 많았지만 그들도 정치인 닉슨이 원리원칙을 위반하는 것에 대해서는 분별 있는 판단을 내렸다. 자신의 정치적인 성향에 앞서 법치주의를 내세운 것은 사법부가 행정부를 견제한다는 미국의 민주공화정 정신에 부합하는 것이며,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대통령일지라도 건국의 아버지들이 강조한 삼권분립의 원칙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음을 여실 없이 보여주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워터게이트 사건이 한낱 정치 스캔들로 비화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사와 정치, 법을 공부하는 모든 미국의 학생들은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해 공부하며 이것이 민주주의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에 대해 배운다. 그만큼 워터게이트 사건은 미국 민주주의에 오점을 남긴 사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민주공화정체의 위대함을 상기시킨 사건이기도 했다.

4.1. 워싱턴 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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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포스트 사무실
진실을 밝혀낸 두 기자는 워싱턴 포스트 소속의 칼 번스타인(Carl Bernstein)과 밥 우드워드(Bob Woodward)였다. 칼 번스타인과 밥 우드워드는 1970년대 초반 워싱턴 포스트에 입사한 신참이었는데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세계 최고의 기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두 사람은 워터게이트 취재로 함께 유명해졌지만 성격이나 배경은 완전히 달랐다. 칼 번스타인은 미국 공산당 당원인 사회주의자 부모 밑에서 태어나, 1960년대 68혁명의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대학교를 중퇴하고 지역 신문사에 입사했다가, 평판이 좋아서 워싱턴 포스트로 전직했다. 반면 밥 우드워드는 공화당을 지지하는 중산층 부모 밑에서 유복하게 자랐고 대학교 장학금을 받으면서 예일 대학교에 다녔다. 밥 우드워드는 하버드 로스쿨에 갈지 신문사에 취업할지 고민했는데 고민 끝에 워싱턴 포스트에 들어간다.

둘은 글쓰기와 취재 방식도 정 반대였다. 칼 번스타인은 학벌은 번번찮았지만 글을 아주 빠르게 잘 써서 워싱턴 포스트의 고참 기자들에게 예쁨을 받았다. 밥 우드워드는 글을 너무 못써서 동료 기자들에게 "예일 대학교의 수치"라는 농담도 들었지만, 인터뷰를 잘했고 특히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서 특종을 낚아대곤 했다. 그래서 워터게이트 사건 취재는 우드워드가 딥 스로트를 비롯한 관계자들을 인터뷰하면, 번스타인이 원고를 받아 다듬어 신문에 싣는 역할을 했다. 물론 거꾸로일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우드워드가 인터뷰를 하면 번스타인이 인터뷰를 기사로 만들었다.

이렇듯 출신 성분부터 취재 스타일까지 모든 것이 달랐던 두명은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각자의 길을 갔다. 번스타인은 1977년 워싱턴 포스트에서 자진 퇴사해 프리랜서 취재 기자로 일하게 되는데, 특기를 살려 유명 정치가들과 교황, 대통령의 회고록을 써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56] 평생 엘리트 코스를 밟았던 우드워드는 그대로 워싱턴 포스트에 남았고, 현재는 워싱턴 포스트의 편집부장을 맡으며 워싱턴 포스트의 최고참 기자로 대우받는 중이다. 우드워드는 이후 누구도 그의 인터뷰 요청을 쉽게 거부하지 못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의 대통령들이 재임 중 한 번씩은 그와 단독 인터뷰를 가지는 게 관례가 되는 엄청난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대통령들을 인터뷰해 낸 책들을 포함해 총 8권 이상의 책을 발간하였다.[57] 얼마 전에는 도널드 트럼프를 비판하는 공포: 백악관의 트럼프를 퍼내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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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브래들리 편집국장과 캐서린 그레이엄 사주
물론 번스타인과 우드워드만이 진실을 밝힌 것은 아니다. 이 모든 것은 백악관의 위협과 주류 언론의 무시에도 불구하고 뚝심 있게 워터게이트 사건 취재를 지지해준 편집국장 벤저민 브래들리(Benjamin Bradlee)[58]와, 사교계 권력을 이용하여 외풍으로부터 워싱턴 포스트를 지켜준 워싱턴 포스트의 사주 캐서린 그레이엄(Katharine Graham)[59]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워싱턴 포스트는 펜타곤 페이퍼 사건 당시 닉슨의 조치로 추가 보도를 하지 못하게 된 뉴욕 타임스의 바통을 이어받아 기밀 문건을 공개한 일 때문에 닉슨에게 밉보인 상태였고, 자연스럽게 백악관은 강도 높은 세무조사나 감사를 비롯한 많은 방법으로 워싱턴 포스트의 취재를 방해하려고 했지만 워싱턴 포스트 측에서 완강하게 맞선 탓에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의 취재가 빛을 발할 수 있었다.

20세기 중반에 들어 언론은 점차 보도 속도와 특종만을 노리는 "경마식 저널리즘"에 물들고 있었다. 이러다보니 1972년 대선 도중에도 미국 언론들은 양 후보의 경쟁을 공정하게 다루지 않았고, 스캔들과 과격한 발언, 말실수만을 부각하는 식의 보도가 판을 쳤다. 하지만 워싱턴 포스트는 오랜 기간 인내심을 가지고 취재한 내용을 토대로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특종을 터트렸고, 이는 경마식 저널리즘에 빠져있던 다른 미국 언론들에게 귀감이 되어 "보도 저널리즘"이라는 개념이 탄생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 사건 이전에도 여러 차례 수준 높은 취재를 통해 몸집을 불리고 있었는데[60], 이 사건으로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뉴욕 타임스 다음가는 인지도 높은 일간지가 되었다.[61]

4.2. 딥 스로트의 정체

이른바 딥 스로트(Deep Throat)라고 불린 내부고발자는 워터게이트 사건의 진상을 워싱턴 포스트가 보도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딥 스로트의 존재는 칼 번스타인과 밥 우드워드가 공저한 "대통령의 사람들"(President's Men)에 중요하게 설명되어있어 널리 알려져있었지만 정작 2005년까지는 누가 딥 스로트인지 추측만이 무성했다.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 모두 딥 스로트가 누구인지 절대 공개하지 않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다. 둘은 딥 스로트가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거나 사망하면 그의 정체를 공개하겠다고 했고, 그 약속을 30년 넘게 지켰다.[62]

딥 스로트의 정체로는 존 얼리크먼 내정비서관, 론 지글러 대변인, L. 패트릭 그레이(L. Patrick Gray) FBI 국장대행 등이 유력하게 거론되었으며, 윌리엄 렌퀴스트 대법관, 헨리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 조지 H. W. 부시, 알렉산더 헤이그 비서실장, 팻 뷰캐넌 특별보좌관, 리처드 닉슨 자기 자신(...) 등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딥 스로트의 정체는 2005년 드러났는데, 그는 바로 FBI 부국장 마크 펠트(Mark Felt)인 것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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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FBI 부국장인 마크 펠트

펠트는 우드워드와 친분이 깊었는데 선거 유세 취재차 펠트의 고향을 방문한 우드워드가 집에 들른 것이 펠트의 정체가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펠트의 딸은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신좌파 히피 그룹과 어울려 시사에 밝지 않아서 우드워드가 유명한 기자라는 사실 말고는 누구인지 몰랐다. 하지만 그가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된 기자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자신의 아버지가 딥 스로트일 수 있다고 생각했고 아버지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펠트는 당시 알츠하이머 초기라서 그때가 아니면 영원히 진술을 들을 수 없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딸에 질문에 펠트는 순순히 자신이 딥 스로트였다는 것을 시인하면서 이것이 신문에 보도되고, 우드워드와 번스타인, 그리고 브래들리 편집장이 이것이 사실이라고 확인해 주면서 33년 만에 딥 스로트의 정체가 알려지게 된 것이다.

우드워드와 펠트의 기묘한 인연은 이렇게 시작된다. 1960년대는 아직 징병제가 유지되고 있을 때였던지라 우드워드는 해군 대위로 펜타곤 건물에서 근무했다. 1969년에 우드워드는 백악관 안보보좌관실로 문서를 보내는 잡무를 했는데, 이때 좁은 방에서 헨리 키신저를 기다리다가 펠트와 마주쳤다. 펠트는 아들뻘인 우드워드를 좋게 봐주었고 대학 동문이기도 해서 우드워드에게 이것저것 조언을 해주었다. 워싱턴 포스트 입사 시험에서 낙방해서 지방 신문사에 머무르던 우드워드에게 다시 워싱턴 포스트 입사에 도전하라고 용기를 준 사람도 펠트이다.

197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의 대권주자인 조지 월리스[63]가 정신병자 아서 브레머(Authur Bremer)에게 총격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때 마크 펠트는 자기가 아는 정보를 우드워드에게 비밀스럽게 알려줬다. 우드워드가 쓴 기사에는 경찰 당국과 FBI만 알고 있었던 극비 정보가 상당히 자세하고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있어 경쟁 신문사들을 놀라게 했고[64], 워싱턴포스트의 브래들리 편집국장은 그런 우드워드를 범상치 않게 보고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나자 모든 취재를 우드워드에게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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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드워드와 펠트의 비밀 만남 장소였던 버지니아 주의 지하주차장

정작 펠트의 여생은 아주 불행했다. 펠트의 딸은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 참여하다 극좌 히피 그룹의 무리와 어울려 마리화나 중독자가 되었고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를 아이를 3명이나 낳았다. 펠트의 부인은 그런 딸을 보고 우울증에 시달렸고, 1984년 집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펠트 자신도 남미 사회주의 정당과 국내 신좌파 조직을 사보타주한 혐의로 감옥에 갇혔다가 1981년 로널드 레이건에 의해 사면되었다.[65] 가족과 명성, 부 모든 것을 잃은 펠트는 고통으로 가득 찬 노년기를 보내다가 2008년 사망했다.

왜 펠트는 우드워드에게 호의를 배풀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의 가설이 있다. 첫 번째 설은 펠트는 전형적인 FBI의 고위 간부였고, 흑인 민권운동 그룹과 좌파 조직, 남미 사회주의 정치가들을 해치는 비민주적인 업무를 자주 맡았는데, 이 때문에 죄책감이 생겨 우드워드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혹은 더 단순하게 닉슨이 자신에게 FBI 국장 자리를 주지 않아 화가 나서 복수했다는 설도 있다. 1972년 존 에드거 후버의 사망 후 가장 유력했던 FBI 국장은 펠트 자신이었으나, 정작 FBI를 혐오했던 닉슨은[66] 사실상 낙하산 인사나 다름 없는 L. 패트릭 그레이를 국장 대행으로 앉힌다. 이 때문에 원한을 품은 펠트가 워싱턴 포스트에 비밀 자료를 줬다는 설이 있는 것이다. 펠트 자신은 삼권분립을 해치는 닉슨에 맞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짧게 대답했지만 어느 쪽이든 석연찮은 면은 있으니[67][68] 결국 펠트만 내부고발자가 된 이유를 알 것이다.

5. 왜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났나?

풀리지 않는 의문점은 도대체 왜 상대 당의 당사에 침투해 도청을 시도했냐는 점이다. 이는 두가지 이유에서 의문점이 드는데, 첫번째로 "배관공 부대"가 침투한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는 후보자들의 정보를 대대적으로 관리하는 곳이 아니다. 민주당의 재무 상황과 경선일정 등만을 관리할 뿐, 조지 맥거번이나 휴버트 험프리 등 주요 대권주자들의 비밀 사항에 대해서는 담당하는 바가 없었다. 두번째는 1972년 대선 자체가 닉슨에게 극도로 유리했다는 것이다. 보통 이런 부정선거가 저질러지면 부정선거를 저지른 측이 불리하거나 혹은 경합 열세라서 확고한 우위를 굳히기 위해 하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재선에 도전하는 닉슨의 지지율은 아무리 낮아도 50%대 후반이었고 갤럽의 여론조사에서는 닉슨의 재선을 지지하는 여론이 60%를 넘기고 있었다. 대선 결과 자체도 닉슨의 대승리였다. 그냥 대승리가 아니라 미국 50개 주 중 매사추세츠 주를 제외한 49개 주를 승리하고 61%를 득표하는 역사적인 대승이었다.[69] 이렇게나 우세한 선거에서 닉슨이 굳이, 왜 긁어 부스럼을 만들 수 있는 부정선거 은폐를 지시했는지에 대해 의문점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닉슨과 그의 측근들이 어찌하여 안정적으로 이길 수 있는 선거에서 소득은 별로 없고 리스크는 엄청난 도청을 지시하였는지에 대해 여러가지 설명이 나왔는데, 이중 대표적인 것을 들자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5.1. 심리학적 설명: 면전에서 문 닫기 기법

워터게이트 사건을 심리학적으로 풀어낸 시도가 나와서 한동안 이슈가 된 바 있다. 한국에서는 이 내용이 미국의 심리학자, 작가, 대학 교수인 로버트 시알디니(Robert Cialdini)의 저서 설득의 심리학을 통해 소개되었다.

당시 불법 침입 계획은 대통령재선위원회 정보 수집 담당자 고든 리디의 작품이였는데 그가 본래 계획했던 것에서 민주당사 도청 시도는 매우 사소한 일부분이었다. 그가 처음 제시한 것은 도청 외에도 민주당 정치인과 언론사 기자에 대한 미행, 특수 통신장치를 탑재한 추적기, 공갈협박, 강도 위장 침입, 납치[70]습격[71], CIAFBI를 이용한 신상 털기, 조작된 정신병력 등의 허위사실 유포[72], 언론기사 조작, 민주당 정치가들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고급 콜걸을 태운 호화 요트 등을 포함한 100만 달러[73]짜리 계획이었다. 리디는 워낙 괴짜인 데다 신뢰성이나 판단성이 의심되는 인물이었고 당연히 이런 말도 안 되는 계획이 통과될 리는 없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리디는 이 계획을 대폭 축소한 50만 달러짜리 계획을 제시했고 여전히 황당한 내용이었기에 당연히 통과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리디는 이 계획들이 모두 거절당하자 제법 저렴한 25만 달러짜리 계획을 제시했다. 여전히 내용은 황당했으나 이번에는 통과되었다.

당시 이 계획 통과에 관여하였던 사람은 존 미첼 재선위원회 위원장, 제프 매그루더 부위원장, 백악관 법률 고문 존 딘, 그리고 프레드 라루였다. 이 중에서 가장 급이 낮았던 라루만이 마지막 의견에 반대 의견을 표출하였는데 중요한 건 라루는 그 전 2번의 제안 때 참석하지 않았고 이때 처음 참석한 것어었다. 이후 제프 매그루더가 내놓은 보고에 따르면 이 사건의 진실이 약간은 보인다.
"우리 중 누구도 리디의 계획에 적극 찬성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00만 달러라는 엄청난 금액에서 시작했기에 25만 달러 정도면 수용 가능한 금액이라고 생각했다" …… "리디를 빈손으로 돌려보내기 곤란했던 것이다." 미첼은 "'좋아, 100만 달러의 1/4만 내주고, 뭘 들고 오나 보자'라는 의미로, 리디에게 뭔가 작은 것을 승인해줘야 한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사건 이후 몇 년이 지난 후 매그루더는 이 사건을 '거절 후 양보' 전략의 사례로 이야기했다. 거절 후 양보 전략이란 머리부터 들이밀기(Door in the face technique) 전략이라고도 하는데 먼저 큰 요구를 하고 점차 요구를 줄여가면서 상대가 자신 또한 양보해야 한다는 심리적 압력을 받도록 하는 설득 전략이다. 심리학적으로 상호성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는데 누군가에게 받은 것이 있으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뭔가를 돌려줘야 한다고 느낀다는 것을 말한다. 이 기법은 실제로 상대에게 준 것은 없지만 이와 같은 방법을 통해 마치 제안자가 양보한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설득 기법으로 꼽힌다.
"만약 리디가 처음부터 우리한테 래리 오브라이언(DNC 의장)의 사무실에 불법침입해 도청장치를 설치할 계획입니다'라고 말했다면, 우리는 즉시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리디는 일단 콜걸 투입, 납치, 습격, 파괴, 도청 등의 계획을 한아름 들고 왔다. 절반, 아니 1/4만 받아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 먼저 빵 한 덩어리를 전부 요구했던 것이다."
물론 이렇게 쓰면 사건에 대한 미화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으나, 이것은 현재 미국에서도 심리학적인 주요한 사례로 다루고 있는 사건이다.

5.2. 백악관을 집어 삼킨 문고리 권력

이런 심리적인 이유 외에 정치적 이유를 찾자면 이는 닉슨의 폐쇄적인 인사 구도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리처드 닉슨은 가난했는데도 어릴 적 공부를 잘해서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고 장학금까지 받아놓고는, 정작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하버드 대학교에 가면 부모님의 야채 가게 일을 도울 수 없다는 이유로 동네의 이름 없는 대학교에 진학해야 했던 어린 시절의 서러움이 있었다. 이 때문에 닉슨은 부잣집에서 태어나 아이비리그에 들어간 북동부 출신 엘리트에 대한 과도한 증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존 F. 케네디에 대한 닉슨의 열등감은 거의 병적이었는데, 자신과 대비되게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공부를 못하는데도 기부입학 전형으로 하버드 대학교에 들어간데다 말도 잘하고, 젊은데다 잘생기기까지 한 케네디와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며 투덜거렸다. 이런 닉슨의 개인적인 심리 때문에 아이젠하워, 케네디, 존슨 행정부와 달리 워싱턴의 검증된 엘리트들이 아닌 자신이 믿을 수 있는 문고리 권력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것이 워터게이트 사건을 초래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존 얼리크먼 내정비서관은 잠깐 변호사로 일하다가 1962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캠페인 때 닉슨과 연이 닿은 것 외에는 경력을 알 수 없는 검증되지 않은 인물이었다. 밥 홀더먼도 UCLA를 학사로 졸업하고 광고 대행사로 일한 것이 경력의 전부였다. 나중에 닉슨의 뒷통수를 치는 존 딘 법률고문도 1964년 골드워터 대선 후보 캠페인 때 닉슨을 알게 되었고 그 전에는 조지타운 대학교를 졸업한 것 외에는 전혀 경력이 없었던 인물이었다. 법무 장관에 앉힌 존 미첼은 그나마 낫지만 이 사람 역시 닉슨이 야인이던 시절 로펌을 같이 한 인연으로 백악관에 들어간 것에 가깝다. 이처럼 닉슨이 가까이 둔 인물들은 자신이 선거 캠페인을 하면서 만났거나 알게 된, 검증되지도 않았고 신뢰할 수도 없는 인물이 대부분이었다.

도리어 닉슨은 그에게 충성을 바친 대부분의 고위 장관들을[74] 무시하거나 경멸하기까지 했다. 헨리 키신저와는 공적인 자리에서만 사이가 좋은 척을 했을 뿐 뒤에서는 키신저에 대한 뒷담화를 서슴치 않고 했으며, 조지 W. 롬니 장관을 보고는 자기가 대통령인줄 안다고 나쁜 소리는 다했고, 멜빈 레어드 국방장관은 믿을 수 없는 나약한 인물이며 베트남 전쟁 하나 제대로 처리 못한다고 깠다. 존 에드거 후버는 늙어서 신좌파 그룹을 처리할 수 없는 사리분별이 안되는 인물이라고 했고 CIA는 엘리트 의식에 젖어서 잘난 척은 다한다고 했다. 이러다보니 능력있고 검증된 인물들은 닉슨을 슬금슬금 피할 수 밖에 없었고 한 자리 해쳐먹으려는 간신배 문고리 권력이 닉슨 주위에 꼬이게 된 것이다.

물론 닉슨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인사 관리를 잘 하는 것 역시 대통령의 역할이다. 믿고 맡길 수 있는 측근의 존재는 대통령의 입장에서 필수적이긴 하지만 닉슨의 경우에는 숙련된 정치가가 아니라 자신에게 아첨하는 일부 인물에게 지나친 권력을 밀어준 것이 문제가 되었다. 처음에는 괜찮았을 수 있어도 집권 몇년차가 흐르다보니 닉슨의 의사 판단 능력도 떨어지고 이들이 자연스럽게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제멋대로 칼을 휘둘러 배보다 배꼽이 커진 모양새가 된 것이다. 여러모로 민주공화정의 대통령보다는 전제군주제이 겪을 만한 문제이긴 하지만, 닉슨은 대통령을 선출된 황제와 같은 위치로 생각했으므로 이는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이라고 하겠다.

5.3. 닉슨의 편집증과 과대망상

물론 그렇다고 닉슨에게 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닉슨이 딱 잘라서 비열한 술수 부리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선거를 치르라고 지시했으면 아무리 간신배인 얼리크먼과 홀더먼, 재선위원회라 할지라도 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닉슨은 스스로의 컴플렉스에 기인한 피해망상 때문에 공사 구분을 하지 못했고, 이것이 결국 자기 자신의 몰락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닉슨은 부통령의 자리에 있으면서 자신이 당연히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될 것이라고 자만했지만, 토론회에서 케네디에게 밀려 불과 0.1%p차로 존 F. 케네디에게 밀려 그토록 소망하던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심지어 텍사스, 일리노이 주 등 결과를 판가름할 경합 지역에서는 부정선거 의혹까지 제기되었다. 1968년 대선에서는 민주당이 반전좌파와 남부민주당원, 험프리 등의 당권파로 분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0.7%p차로 승리했을 뿐이다. 그마저도 1970년 중간선거 때에는 여당인 공화당이 일시적인 불경기로 대참패하는 등 위기감이 고조되었고, 닉슨은 자연스럽게 이전 선거와 다른 압도적인 승리를 갈구하게 되었다.

선거전 초반에 유력한 후보자는 에드먼드 머스키 상원의원이었고 만약 머스키가 출마한다면 승리하지는 못했을지언정 꽤 선전은 할 것이라고 판단되었다. 민주당 당권파가 밀고 있던 휴버트 험프리, 닉슨의 남부전략을 망칠 수 있었던 극우 성향의 조지 월리스도 닉슨에게는 위협적인 상대였다. 그래서 닉슨은 일찌감치 선거 공작을 통해 머스키, 험프리, 월리스를 내치고자 했고, 이를 실천했다. 결국 머스키는 친닉슨 언론의 악선전으로 탈락하고 말았고 대신 급진좌파적인 공약으로 민주당원 대다수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던 조지 맥거번이 본선 후보로 올라온다. 닉슨의 예상대로 맥거번은 압도적으로 패배했고 닉슨은 인생 처음으로 만족스러운 승리를 만끽했다.

뿐만 아니라 닉슨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해치려고 한다는 일종의 망상증을 가지고 있었고, 70년대 초반에 정적 리스트까지 만들어 관리할 정도로 철두철미한 인물이었다. 리스트에 포함된 인물만 해도 220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그나마 자신의 정적이었던 민주당 정치가들인 조지 맥거번, 월터 먼데일, 조지 월리스 등의 인물들이야 심정적으로 자기 반대파니 어찌어찌 넘어간다고 쳐도, 같은 공화당 소속의 하워드 베이커 상원의원, 피트 매클로스키 하원의원, 철학자 노엄 촘스키, 배우 폴 뉴먼, 가수 빙 크로스비까지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광범위하고도 악질적이었다. 심지어 이 정보를 입수해 폭로한 기자 본인도 이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어서 생방송 도중에 자기 이름을 정적 리스트에서 읊는 촌극까지 빚었다. 이 외에도 닉슨은 존 레논의 평화운동을 눈엣가시로 여겨 진지하게 존 레논을 미국에서 추방시키려고 할 정도로 자신에 대한 반대 의견자들에게 지나치게 포용력 없고 졸렬한 모습을 보였다.

이런 닉슨의 과대망상증 때문에 만들어진 조직이 바로 워터게이트 사건을 일으킨 '배관공 조직'이다. 닉슨은 존 에드거 후버가 너무 늙어서 신좌파에게 관대해졌다고 생각했고, 이 때문에 FBI나 CIA와는 차별화된 자신만의 사조직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얼리크먼과 존 딘, 홀더먼에게 믿고 맡길 수 있는 비밀 공작 조직을 만들라고 지시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조직이 닉슨이 시키지도 않은 도청 공작을 저지르다가 발각되어 자기 목숨을 조인 것이다.

정리하자면, 닉슨은 노련한 정치감각이 있으면서도 그 값을 하지 못해 공사를 혼동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였고, 그러한 자신의 망상을 떨쳐내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권력을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단히 위험한 사고관을 가진 잠재적 독재자의 기질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렇다 보니 견제 세력이 많은 미국 정가에서 닉슨이 발목을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고, 그것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터진 것뿐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닉슨이 왜 죽을 때까지 정신 못 차리고 자신이 결백했다고 고집을 부렸는지도 설명이 된다.

6. 대중매체에서

  • 닉슨 사임 이후 2명이 저술한 책을 바탕으로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치는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의 모습을 그린 영화가 1976년작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All The President's Men).[75] 로버트 레드포드(밥 우드워드 역)와 더스틴 호프먼(칼 번스타인 역)이 두 주인공을 맡아서 열연했다. 이 영화 자체에는 대통령이 발리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사실상의 행정부의 승리와 함께 엿 먹는 것처럼 그리면서 마지막 장면에서 '닉슨의 하야를 이끌어낼 증거가 발견되어서 하야했다'는 식의 자막이 뜬다. 이 영화는 1977년 49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후보로 올랐으나 상은 록키한테 돌아갔다. 비록 4개 부문에서 상을 받으며 그 해 최다수상을 기록하긴 했지만 남우조연상(제이슨 로바드)를 제외하면 각색상, 음향상, 미술상 등 주요 부문과는 거리가 있는 상들이었다. 그리고 이 때 같이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가 쓴 잔을 마신 다른 영화들이 네트워크택시 드라이버다.
  • 1995년작 영화 '닉슨(영화)'에서 닉슨의 전반적인 생애를 다루긴 했지만, 워터게이트 사건이 가장 비중 있게 나온다. 영화의 시작이 1973년 워터게이트 사건이 쟁점화되는 와중에 불꺼진 백악관안에서 닉슨이 혼자 관련 보고서를 읽는 모습으로 시작하여 하야를 결심한 뒤 벽난로 앞에서 흐느껴 울며 기도를 하고 이후 케네디의 초상화를 바라보는 장면으로 끝난다.
포레스트 검프에서 묘사된 워터게이트 사건
  •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도 이 사건이 유머러스하게 풍자된다. 미국을 대표하는 유명한 탁구선수가 되어 닉슨을 만난 검프가 그의 배려로 고급 호텔에 묵게 되는데, 밤에 자기 방 맞은편의 객실의 창문을 통해 괴한 몇 명이 형광등은 안 켜고 손전등으로 방을 이리저리 뒤지는 걸 발견한다. 검프는 그 방이 정전돼서 그러는 줄 알고 나름 배려해 준답시고 프런트에 전화해서 '제 맞은편 방이 정전돼서 두꺼비집을 찾는 것 같은데 사람 좀 보내주세요'라고 했다. 그리고 화면에 그 호텔의 이름이 드러나는데, 바로 워터게이트. 이후 사건은 모두가 아는 대로 진행된다.[76] 재밌는 것은 포레스트 검프 역할을 맡은 톰 행크스가 《더 포스트》에서는 워싱턴 포스트의 편집국장 밴 브래들리의 역할을 분한다는 점이다. 이로서 톰 행크스는 다른 배역으로 닉슨을 두번 죽인 셈이었다.
  • 프로스트 vs 닉슨〉은 리처드 닉슨이 부분적으로나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최초의 인터뷰[77]였던 사건 3년 후인 1977년에 영국 언론인 데이빗 프로스트와의 인터뷰 및 비하인드 스토리를 다뤘다.
  • 왓치맨에선 사건이 은폐되었고 닉슨이 20년이나 대통령을 해먹고 있다. 코미디언이 현실에서 워터게이트 도청 사건을 취재하고 폭로했던 기자들인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을 처리할 때가 재밌었다고 파티장에서 낄낄거리는 장면이 있다.
  • 백투더퓨처 2편에서 비프 태넌이 스포츠 연감으로 승승장구한 세계선에서도 워터게이트 사건이 은폐되었는지, 닉슨이 5선을 준비한다는 1983년자 뉴스가 나온다.
  • 성룡 주연의 폴리스 스토리 2에서 잠깐 언급된다. 폭파범의 협박전화를 도청하려고 주인공이 반장과 하는 이야기가 '미국 대통령도 도청하다가 물러났잖아요'라고 나온다.
  • 2017년 내부고발자 "마크 펠트"를 다룬 영화 《마크 펠트:백악관을 무너뜨린 사나이》(Mark Felt: The Man Who Brought Down the White House)가 나왔다. 주연 마크 펠트 역할은 리암 니슨, 부인 오드리 펠트 역은 다이앤 레인이 맡았다.[78]
  • 더 포스트》에서는 펜타곤 페이퍼 보도가 주제이나 결말에서 캐서린 그레이엄이 "이런 일은 다신 감당 못할 것 같다."고 말한 후 워터게이트 호텔 경비원이 침입 흔적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하는 장면으로 워터게이트 사건을 암시하며 끝난다.
  • NBC의 드라마 굿 플레이스 1-9화에서 악마들이 노래방 기기로 부르는 노래 중 하나로 나온다. 곡명은 닉슨 테이프며 다른 라인업으로는 무솔리니 연설, 멜 깁슨의 비하 발언 등 제정신은 아니다.
  • 마블 코믹스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의 시크릿 엠파이어 에피소드에 영향을 주었다.[79] 여기서 악당 조직인 시크릿 엠파이어의 리더가 캡틴 앞에서 두건을 벗는 장면이 있는데 이게 정확히 누구인지는 묘사되지 않는다.[80] 단지 캡틴이 그의 정체를 보고 경악하고 리더가 자신은 더욱 더 많은 힘을 원했다는 얘기만 하고 자살하는 장면만 나온다. 워터게이트 사건 즈음에 나온 에피소드라 닉슨과 워터게이트를 풍자하기 위해 쓴 에피소드라고 한다.
  • 보드게임 《워터게이트》로도 나왔다. 사건을 은폐하고 임기를 마치려는 닉슨 측과 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언론인 측으로 플레이하는 2인용 게임이다. 닉슨 측은 각종 카드를 활용해 증인들을 하나하나 제거하고 정보 말이 판에 꼽히면서 진상에 다가가는 것을 중간에 끊고, 언론인들은 반대로 내부고발자와 언론인들을 엮어가며 판에서 정보 말로 트리를 구성해내야 한다. 2020년에 정식 한글판이 출시되었다.
  • 2022년 미국 starz 채널에서 해당 사건을 다룬 개스터(Gaslit)라는 드라마를 방영했다. 같은 해 대통령들의 영부인을 다룬 드라마인 '퍼스트 레이디'에서 역시 워터게이트 사건이 다뤄졌다.

7. 여담

  • 워터게이트 사건의 배경이 된 워터게이트 복합단지는 아직도 남아있다. 워싱턴 D.C. 내에서는 꽤 고급 주거지로 통하며 여전히 많은 상원의원과 하원의원이 이곳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호텔과 아파트, 사무단지 등으로 구성되어있는데 호텔은 워싱턴 내에서 평판이 아주 좋은 5성급 호텔이다. 물론 장소가 장소인지라, 리뷰 란에는 "내가 숙박하는데 연방 정부 요원이 들이닥치면 어떻게 합니까?"라는 개드립이 종종 보인다(...).

8. 관련 문서


[1] H. R. Haldeman[2] John Ehrlichman[3] G. Gordon Liddy[4] E. Howard Hunt[5] 그러나 이 접미사는 갈수록 용례가 확장돼 정치뿐만 아니라 언론, 기업, 과학기술 등 여러 분야에서 조직적인 은폐, 조작 및 비리가 저질러진 경우에도 쓰인다. 게임 언론의 게이머게이트, Apple배터리게이트, 폭스바겐디젤게이트, 인텔CPU 게이트, 가상 화폐와 관련한 코인 게이트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심지어 최근에는 단순히 안 좋은 쪽으로 화제가 된 사건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스웨덴게이트를 그 예로 들 수 있다.[6] 이전에도 율리시스 S. 그랜트의 측근들을 둘러싼 여러 부정부패 스캔들, 187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부정선거 의혹, 워런 G. 하딩의 부정수수 사건이 있었으며, 이후에도 이란-콘트라 사건, 화이트워터 사건, 모니카 르윈스키 혼외정사 논란, 리크 게이트 등 미국을 뒤흔든 여러 스캔들이 있었지만 미국의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을 사임하게 한 것은 이 스캔들이 유일하다.[7]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과거 닉슨이 야인이었던 시절 같이 로펌을 했을 정도로 닉슨과 가까운 사이였다. 다만 미첼 본인은 선거 공작을 사후에야 알았고 모든 공작은 그저 요원들의 자발적인 일탈일 뿐이었다고 변명했다.[8] 얼리크먼과 홀더먼은 워터게이트 사건을 직접적으로 지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닉슨의 베를린 장벽(성에서 알 수 있듯 둘 다 독일계 미국인이다)으로 불리며 닉슨에게 전달되는 모든 정보를 통제했기에 워터게이트 사건의 은폐 자체에는 매우 직접적으로 관여했다.[9] 머스키가 네거티브에 대항한답시고 거짓 기사를 내보낸 신문사 건물 앞에서 성명을 냈는데, 이때 펑펑 쏟아지던 눈이 머스키의 얼굴에 닿아 녹아내려 머스키가 우는 것 같은 모습이 연출되었다. 이 때문에 많은 미국인들은 머스키가 대통령이 되기에는 너무 성급하고 감정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10] 물론 선두 주자는 맥거번과 험프리였지만 조지 월리스헨리 M. 잭슨 등도 상당한 표를 얻었고, 무엇보다 결선 투표에 간다면 이 군소후보들의 대의원 수가 중요하게 작용했을 터였다.[11] 원래는 이 시간대에 퇴근을 했어야 했는데, 한 민주당 직원이 시외전화를 싸게 쓴다고 저녁 늦게까지 통화를 하는 바람에 퇴근을 못한 상태였다.[12] 통상적으로는 1968년 반전 시위가 가장 유명하지만, 이때는 펜타곤 페이퍼 사건으로 미국 정부의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거짓말이 들통났던 데다가 베트남 전쟁에서 무공훈장 11개를 휩쓴 젊은 참전용사 존 케리가 상원 청문회에서 미국이 그저 전쟁에서 이기고 싶은 욕심 때문에 무의미하게 청년의 목숨을 낭비하고 있다는 폭탄 발언을 내놓아 다시 미국 전역이 시위로 뒤덮였을 때였다.[13] 너무 우연에 우연이 겹친 전개라 이에 관련된 음모론도 많다. 가장 유명한 음모론은 스피로 애그뉴가 자신의 비리 혐의를 더 큰 사건으로 덮어버리기 위해 워터게이트 사건을 조장했다는 것이지만 증거가 없기 때문에 그저 음모론일 뿐이다.[14] 지금도 한화 약 250만원에 달하는 큰 돈이니 이 당시에는 더욱 큰 돈이었다. 이는 5명의 배관공이 경비원을 맞닥트리면 입막음을 하기 위해 들고 다니던 비상금이었는데 정작 경비원이 바로 경찰에 신고를 걸어서 무용지물이 되었다.[15] 네이트 실버가 설립한 여론조사 종합 분석기관 Five Thirty Eight의 자료에 의하면 닉슨의 재취임 당시 평균 지지율은 62.4%인데, 이는 동분기 로널드 레이건과 거의 같고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를 제외하면 그 이전과 이후 어떤 대통령도 기록하지 못한 엄청난 수치이다.[16] 핵심 공약이 당선 90일 내에 베트남 전쟁 즉각 종료, 마약과의 전쟁 종식 및 의료용 마리화나 합법화, 연간 1,000달러 기본소득, 주한미군 전면 철수 등이었다.[17] 휴버트 험프리마저 닉슨에게 개인적인 전화를 걸어 베트콩에 복종하고 말 맥거번 대신에 차라리 닉슨의 재선을 돕겠다고 했을 정도였다.[18] 선거운동 도중에는 토머스 이글턴 부통령 후보가 우울증 때문에 전기치료까지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부통령으로 재직하기에는 정신상태가 불안정한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터져 부통령 후보가 교체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터졌다. 다혈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던 맥거번이 자신을 비난하는 유권자에게 쌍욕(Kiss my ass)을 퍼붓는 일도 일어났다. 결정적으로 선거 4일 전, 헨리 키신저 장관이 베트남 전쟁의 종결이 임박했다는 "명예로운 평화" 성명을 내자, 베트남 전쟁 종결이 핵심 공약이었던 맥거번은 말문이 막혔다.[19] 정체는 아래의 "딥 스로트" 문단을 참조.[20] 심지어 FBI가 배후가 아닐 수도 있었다. 닉슨은 CIA 간부나 백악관 직원, 심지어 키신저 같은 고위 장관이 딥 스로트의 정체일 수 있다고 의심하던 상황이었다. 닉슨은 평소에도 의심병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누가 진짜 딥 스로트인지 죽을 때까지 확정짓지 못했고 론 지글러 대변인이나 존 코널리 재무장관을 제외하고는 자신과 같이 일한 거의 모든 백악관 직원 및 고위 장관과 연락을 끊었다.[21] 당시 CIA의 자체 예산은 비공개였기 때문에 닉슨이 마음놓고 사용할 수 있는 자금의 원천이었다. 현재도 CIA를 "포함"한 모든 정보기관의 총 예산이 얼마쯤 들어간다는 것만 밝히고 있다. 대한민국 국정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예산이 비공개로 처리되어 있다.[22] 린든 B. 존슨의 친구이기도 했고, 평소 CIA를 불신했던 닉슨이 헬름스의 권위를 무시하고 키신저 국무장관을 통해 국제 수사 결과를 보내도록 지시하며 하인 부리듯 대했다. 정치 명문가 엘리트 출신이었던 헬름스의 자존심이 상했던 건 당연지사.[23] 배관공 5인조 측의 변호사가 보석금을 내고 유죄를 인정할 테니 자세한 경위 파악은 그냥 퉁치자는 황당한 사법거래를 제안해서 시리카가 짜증이 난 상태였다.[24] 놀랍게도 시리카는 공화당의 당원이었다. 미국의 삼권분립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25] 훗날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조 바이든도 이때 처음으로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26] 샘 어빈(Sam Ervin, 노스캐롤라이나), 대니얼 이노우에(Daniel Inouye, 하와이), 조지프 몬토야(Joseph Montoya, 뉴멕시코), 허먼 톨미지(Herman Talmadge, 조지아)[27] 하워드 베이커(Howard Baker, 테네시), 에드워드 거니(Edward Gurney, 플로리다), 로웰 바이커(Lowell Weicker, 코네티컷)[28] 과거 조지프 매카시 비난결의안을 주도하기도 했고, 민주당 내에서도 인종차별주의를 옹호하는 보수적인 남부민주당원 성향인 데다, 1974년 은퇴할 예정이었기에 초당적인 위원회를 이끌기에 딱 적합한 인물이었다.[29] 존 딘의 증언은 그저 추측이었다. 백악관에 녹음기가 설치되어있다는 것은 닉슨과 얼리크먼 같은 측근 중의 측근만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30] 펜타곤 페이퍼 사건 때도 똑같은 논리를 사용했다.[31] 당시 미국 사법계는 닉슨이 지나친 정신적 압박으로 자살하거나 혹은 위법 행위로 탄핵되는 등의 방식으로 대통령 자리가 공석이 되면, 애그뉴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해 자신에 대한 모든 혐의를 사면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애그뉴에게 10,000달러 벌금을 내는 것을 대가로 사법 거래를 시도했다.[32] "국가 안보에 해를 끼칠 수 있는"이 들어간 이유는 뉴욕타임스 대 미합중국(New York Times v. United States, 1971) 재판으로 대법원이 "국가 안보에 심각한 위해를 끼치는 기밀 문건이 아니라면 기밀 문건의 공개는 출판의 자유로서 보장되어야 한다"라는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33] 이 사건은 당시 잘나가던 보수 법학자였던 로버트 보크의 명성을 실추시켰고, 이후 그의 대법관 지명 인준에 실패하는 이유가 되었다.[34] 1972년 대선에서 급진좌익 후보자였던 맥거번이 받은 득표율이 38%였다.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탄핵은 너무 나간 것이라는 공감대가 있었다는 뜻이다.[35] 대중 여론조사에서는 앞섰지만 중도적인 성향 때문에 문제가 되어서 정작 경선에서는 보수적인 후보자인 레이 섀미(Ray Shamie)에 밀렸다. 레이 섀미 역시 본선에서는 11%p차로 낙선했는데, 이 선거에서 당선된 사람이 다름 아닌 존 케리.[36] 레이건은 이 때문에 보크 대신 앤서니 케네디를 대법관으로 새로 임명해야 했고, 상원에서 보크 인준 거부운동을 이끈 조 바이든 사법위원장은 유력 대권주자로 발돋움했다.[37] 청문회 도중 공적 자금으로 양복을 구매했다는 사실 하나만 드러났고 이마저도 포드가 양복 가격을 반납한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실제로 포드는 1976년 재선 당시 백악관에 청렴과 명예를 복구시키겠다는 것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워 꽤나 선전했다.[38] 윌리엄 렌퀴스트 대법관은 닉슨 행정부에서 일해서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어렵다는 이유로 자진해 표결에 참여하지 않았다.[39] 비슷하게 후일 빌 클린턴도 불륜을 저지른 것 자체는 논란이 되지 않았지만, 비서와 성관계를 가진 적이 없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 논란이 되어 탄핵 재판에 이르게 되었다. 다만 클린턴의 탄핵 심판 자체는 대권을 노리던 뉴트 깅리치 하원의장이 다소 무리하게 정치적 공세를 한 것에 가깝다는 의견도 있다.[40] 나머지 2,800시간은 다른 이야기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과 미국 관계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 존 F. 케네디에 대한 질투, 주무부처 장관 뒷담화, 초선 상원의원 조 바이든의 가족이 당한 사고 관련 소식 듣기# 등이 있었다.[41] 헨리 키신저는 후일 리처드 닉슨이 존 코널리 재무장관을 제외한 모든 장관을 불신하고 뒷담화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42] 닉슨이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라는 희대의 망언을 한 배경이었다. 정작 세금 탈루 논란은 아주 사소한 것이라서 이 혐의는 의회에서도 압도적으로 부결되었고 대중에게도 잊혔지만,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만큼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되고 있는 것이 아이러니다.[43] 이 때문에 미국의 상하원 상임위원회의 권력은 아주 강력하다.[44] 당시 상원은 민주당 56석, 공화당 44석이었다. 물론 공화당에서도 제이컵 재비츠, 에드워드 브룩 등 자유주의적인 상원의원이 존재했지만 반대로 민주당 내에서도 닉슨에 우호적인 제임스 이스트랜드, 존 스테니스 등의 남부민주당원이 존재했다.[45]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손자이자 유명한 노래 "Fortunate Son"의 모티브가 된 걸로 유명한 데이비드 아이젠하워다.[46] 닉슨의 마지막 아침 식사를 사진으로 찍었는데, 이 역시 유명해졌다.[47] 에어 포스 원이 비행중 대통령이 바뀐 사례는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 때도 있었지만, 이때는 부통령이던 린든 존슨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시신과 함께 기내에 있다 바로 취임 선서를 한, 즉 전현직 대통령이 동승중이었던 상황이라 호출 부호가 유지됐다.[48] 사이먼 앤 가펑클 소속으로 유명한 폴 사이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인물. 그러나 이름이 같아서 자주 엮였고 마침 폴 사이먼이 민주당의 강성 지지자이기도 했던 만큼 둘은 상당히 친해졌다고 한다.[49] 레이건은 아웃사이더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닉슨과는 달리 여러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고 배우 출신인 만큼 연설도 잘해서 닉슨이나 록펠러, 키신저 같은 기성 정치가와는 다르다는 인식이 있었다.[50] 1976년 포드의 대선 광고에서도 이 점이 부각된다. 시민들의 인터뷰가 나오는데, 하나같이 내용이 "백악관을 다시 신뢰할 수 있게 만들었다" "미국인인 게 다시 자랑스러워졌다" "청렴하고 믿을 수 있는 인물이다" 등이다. 불과 2년 전 워터게이트 사건을 겪은 정당의 후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닉슨과 자신을 차별화한 것이다. 실제로 포드는 리더십이 없다는 말은 들었을지언정 굉장히 청렴하고 소탈한 인간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그래서 현재는 그를 재평가하는 여론도 꽤 있다.[51] 닉슨 같은 폐쇄적인 인사를 피하겠다고 조지아 주지사 시절부터 같이 알고 지냈던 지역 정치가, 목사, 시민운동가 등을 고위인사에 많이 앉혔는데 청렴할지언정 실무 능력은 떨어지는 사람이 대부분이라 카터 행정부는 오일쇼크 같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게 되었다.[52] 현재의 27,200달러(약 3,000만원)[53] 현재의 60,000달러(약 7,500만원)[54] 물론 상대 후보를 직접 도청하지만 않았을 뿐이지 후버 FBI 국장부터 민간인 불법 사찰을 했다는건 워싱턴 정가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한술 더떠 후버가 도청한 마틴 루터 킹의 불륜, 케네디 가문의 섹스 스캔들의 녹음 파일을 들으면서 박장대소 한 전적도 있다.[55] 1980년 상원의원 선거에서는 버치 베이, 프랭크 처치, 조지 맥거번 같은 민주당 중진의원이 많이 낙선했고 중도보수적 성향이 있던 로버트 버드가 상원 원내대표를 맡아서 민주당이 레이건 정부의 우경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56] 사생활 면에서는 아내였던 영화감독 노라 에프론이 둘째를 임신했을 때 아내 친구와 불륜을 저질렀는데 이혼 후 그 불륜을 담은 소설 '제2의 연인'이 출판되었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57] 다만 부시 행정부의 주요 인사들을 인터뷰하면서 '이라크 침공이 정당하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기는 내용을 보도해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부시 행정부가 우드워드의 막강한 영향력을 이용해서 언론 플레이를 하고 있고 우드워드는 다른 기자들은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자신만이 만난다는 특권의식에 취해 있다는 비판. 또한 그는 오바마와도 단독 대담을 가진 뒤 책을 출판했는데 여기서는 오바마가 오판을 하여 이라크, 아프간전을 확전시켰다며 통렬하게 비판하여 논란이 되었다. 한편 이 책을 읽고 자신의 감상을 비디오로 공개하며 우드워드의 분석을 극찬한 사람도 있는데 바로 이 사람이다.[58] 영화 "더 포스트"에서 톰 행크스가 그의 역할을 맡았다.[59] 더 포스트에서 메릴 스트립이 그의 역할을 맡았다.[60] 워싱턴 포스트는 본래 이름 없는 지역 일간지에 불과했지만, 펜타곤 페이퍼 취재 등을 통해 워터게이트 사건 이전에도 미국에서 가장 큰 일간지 중 하나로 분류되고 있었다.[61] 1970년대 당시 워싱턴 포스트의 경쟁지였던 보스턴 글로브,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 시카고 트리뷴 등은 이제 미국 시사에 관심이 정말 많지 않은 이상 이름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지만, 워싱턴 포스트는 NYT, WSJ와 엮여 미국 3대 일간지로 분류된다는 점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이 얼마나 워싱턴 포스트의 명성에 큰 공헌을 한지 알 수 있다.[62] 여러모로 모범적인 내부고발자의 대우 방식이라고 할 만하다. 다만 이 사건 이후 익명성 뒤에 숨어 중대한 국가 기밀이나 허위 사실을 언론에 흘리는 내부고발자도 늘어나는 등의 부작용도 생겼다고.[63] 앨러배마 주지사이자, 유명한 인종차별주의자로, 1963년 앨라배마 대학교 흑인 입학 거부 사건으로 잘 알려져있다. 월리스는 이 총격 사건 당시 자신을 수술한 의사가 흑인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손을 씻고 흑인 민권운동의 열렬한 지지자로 거듭났다.[64] 당시 뉴욕타임스나 보스턴글로브 같은 워싱턴포스트의 경쟁 신문사들은 월리스 총격범의 정체가 급진좌파 조직의 소속이거나 혹은 흑인 민권운동가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었는데, 워싱턴포스트만이 월리스 총격범이 정신질환자라는 점을 정확하게 짚어냈을 뿐만 아니라 월리스를 쏜 총기의 기종이 무엇이고 월리스의 건강 상태가 어떤지까지도 상세하게 보도해서 전국적으로 화제가 되었다.[65] 리처드 닉슨은 마크 펠트가 석방된 날, 샴페인 한 병을 선물로 보냈다고 한다.[66] 닉슨은 FBI가 관료주의에 찌들어 마피아와 신좌파 그룹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는 믿을 수 없는 조직이라고 생각했다. 반대로 CIA는 잘난 척이나 하는 북동부 엘리트 집단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67] 전자의 경우 온갖 종류의 더러운 일은 다한 펠트가 갑자기 정의의 내부고발자가 되는 게 말이 안 된다는 지적이 있으며, 후자의 경우 그게 맞다 치더라도 1970년부터 밥 우드워드와 마크 펠트가 연락하고 지낸 게 다소 타이밍이 어긋나는 점이 있다.[68] 물론 어느 쪽이든 설명하자면 못할 것은 없다. 전자의 경우 사람 심리가 원래 늘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니 계속 더러운 일을 하면서도 죄책감을 동시에 느끼는 것도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기에 본인의 이런 죄책감을 워터게이트 사건 해결로 조금이나마 풀어내고 싶었을 수도 있고, 후자의 경우라 해도 정치 성향이 서로 정반대인 사람들끼리라도 개인적인 친분을 유지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니 본인의 업무와는 별개로 옛날부터 우드워드와의 친분을 갖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이 와중에 FBI 국장 자리를 얻지 못한 것을 복수하기 위해 원래부터 가졌던 우드워드와의 친분을 이용했다고 볼 수도 있다.[69] 이렇게나 압도적인 대승리였기에 민주당 측에서도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났을 때 대선 무효를 주장하지 않았다.[70] 목표는 존 미첼 법무장관의 아내 마사 미첼. 그녀는 닉슨 행정부내 내부 고발자로 활동했다. 배관공들은 그녀를 납치했으나 미첼 법무장관의 요구로 풀어주었다.[71] 목표는 닉슨의 부패 혐의를 폭로한 칼럼니스트 잭 앤더슨(Jack Anderson). 그를 마약중독으로 위장해 독살하려고 계획했으나 실제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워터게이트 이후에는 칼 번스타인과 밥 우드워드 역시 암살하려 계획하기도 했다.[72] 목표는 펜타곤 페이퍼를 폭로한 대니얼 엘스버그. 실제로 그를 진단한 정신과 의사의 집에 침입해 진단기록을 탈취하려했으나 실패했다. 그들의 목적은 엘스버그를 정신병자로 몰아 펜타곤 페이퍼의 신뢰도 자체를 떨어트리는 것이었다.[73] 당시 1973년 대한민국에서 미국 1달러의 가치는 397.5원이었다. 그러므로 397,500,000원이므로 현재 가치는 6,533,310,000원(65억원)이다.[74] 유일한 예외는 존 코널리 재무장관으로 닉슨은 다른 장관들과는 달리 코널리만큼은 그를 부통령으로 임명할 것을 고려할 정도로 매우 신뢰했고 뒷담화도 까지 않았으며 워터게이트로 퇴임한 이후에도 코널리와 친분을 유지했다.[75] 대한민국에선 '대통령의 음모'로도 통한다. 제목은 영국 동요 'Humpty Dumpty'의 가사인 'All the king's men'에서 따 온 것이다.[76] 때마침 프런트에서 전화를 받은 사람도 프랭크 윌스다.[77] 그래서 워터게이트 사건 닉슨 자료 영상으로 단골로 등장한다.[78] 다만 영화평은 그렇게 좋지 못하고 실제 사건 및 마크 펠트의 개인사에 대한 왜곡도 심한 편이다.[79] 캡틴 하이드라로 유명한 그 에피소드가 아니라 과거에 나온 에피소드다.[80] 얼굴 자체가 안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