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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조 추존 황제 | |||
<colbgcolor=#008000><colcolor=#ece5b6> 촉한 초대 황제 유비 | 劉備 | |||
출생 | 161년 7월 9일 | ||
후한 유주 탁군 탁현 (現 허베이성 바오딩시 줘저우시) | |||
즉위 | 221년 5월 15일 (59세) | ||
촉한 익주 촉군 성도 무담산 남쪽 (現 쓰촨성 청두시) | |||
사망 | 223년 6월 10일 (향년 61세) | ||
촉한 익주 파동군 영안현 백제성 (現 충칭시 펑제현 바이디진) | |||
능묘 | 혜릉(惠陵) | ||
재위기간 | 후한의 의성정후(宜城亭侯) | ||
196년 ~ 219년 7월 | |||
후한의 한중왕(漢中王)[1] | |||
219년 7월 ~ 221년 5월 15일 | |||
촉한의 황제 | |||
221년 5월 15일 ~ 223년 6월 10일[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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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비(備) | ||
부친 | 유홍 | ||
배우자 | 소열황후, 미부인, 손부인, 목황후 | ||
자녀 | 3남 2녀(양자 1남) | ||
자 | 현덕(玄德) | ||
신장 | 178cm[3] | ||
작호 | 의성정후(宜城亭侯) → 한중왕(漢中王) | ||
묘호 | 열조(烈祖)[4] | ||
시호 | 소열황제(昭烈皇帝) | ||
제호 | 선주(先主) | ||
연호 | 장무(章武, 221년 ~ 22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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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후한 말의 인물이자 삼국시대 촉한(蜀漢)[5]의 창업군주이며 초대 황제.[6]2. 특징
유비는 유씨 집성촌에서 자라났으며, 후에 익주 지방을 정복하여 약 50년간 지속된 촉의 건국자가 된다. 북송 이전까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였으나, 특히나 한족이 이민족과의 싸움에서 밀려 남쪽으로 내려간 남송 대에 "정통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천하를 빼앗긴 존재"로서 낭만화되어 수많은 민담과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다.후한 말 장거, 장순의 난 진압에 참여하며 처음 공적인 기록이 시작된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부곡으로 불리는 후한 말 사병[7] 집단의 우두머리로서 관군을 도와 진압에 참여했다. 이후에도 군사력을 바탕으로 여러 군벌들 사이를 떠돌며 여러 전투에 참전하였다. 관도대전이 끝난 후 형주를 장악한 군벌이었던 유표 아래에서 힘을 모았고, 유표가 죽고 후계자가 북중국을 통일한 조조에게 항복하자 남부로 도망쳐 손권과 연합하였다. 적벽대전에서 남하하는 조조의 대군을 물리치고 손권과 합의를 통해 남형주에 기반을 마련하였다.
<선주전>에는 노식 휘하에서 공부할 때부터 꾸준히 유비가 주변 호협들과 교류했으며, 그들이 유비에게 귀부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기주 중산국의 대상인인 장세평과 소쌍의 돈과 재물을 받아 더 많은 무리를 꾸릴 수 있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를 종합해보면 유비는 집성촌의 주먹패(혹은 부곡) 우두머리로서, 인근 상인들의 보호비를 받고 무리를 강화하며 성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유비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정부 측으로 참전하여 관직을 얻었으나, 관직 감찰관인 독우와 사사로운 만남을 청했다가 거절당하자 그를 매질하고 관직을 버리고 떠났다. 이후에도 유비는 군사행동으로 사소한 관직을 얻었다가 버리기를 몇 차례나 반복했다. 독우에게 사사로운 만남을 청하는 행동이나 임지를 버리는 행동 모두 상당한 불명예이며, 특히나 후자는 범죄였는데, 그에겐 다행스럽게도 당시의 황제인 영제가 황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대사면령을 남발하였으므로 후에 문제가 되는 일은 없었다.
이러한 초기 유비의 행보는 전형적인 주먹패 우두머리의 행보로서, 유방이 유협 집단을 이끌고 다니면서 세력을 키운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유방은 고향의 지역 관리 소하나 하후영 등과도 친분이 있었고 해당 지역 토박이로서 거병한 반면 초기의 유비는 관우, 장비, 간옹 등의 몇몇 측근들만을 대동하면서 몇 년간이나 고향을 떠나 천하를 떠돌았다.
적벽대전과 이후 동오의 남군 정복으로 조조의 남진 기세가 박살나자, 유비는 촉으로 들어가 유장을 공격하고 익주를 차지했다. 이후 한중에서 승리하고 221년에 촉한을 건국했다. 동시에 자신과 한고조 유방을 동일시하여 한 황실의 부흥을 천명하고 황제로서 즉위하였다.
말년에는 이릉대전에서 대패하여 부족한 인재풀에 큰 치명상을 입혔다.
유비는 삼국지 3대 전투로 일컬어지는 관도대전, 적벽대전, 이릉대전에 모두 참전한 경력이 있다.
명나라 시대 베스트셀러 역사소설이자 고전인 《삼국지통속연의》의 명실상부한 주인공이다. 그 사후엔 그의 유지를 받든 제갈량이, 제갈량마저 죽은 이후엔 강유가 주인공을 이어받는다고 볼 수 있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총 120회인데 유비가 죽는 회차가 85회고, 이후 주인공 포지션을 물려받은 제갈량과 강유도 선제(先帝)의 유지를 이유로 북벌을 한 걸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삼국지연의》 전체의 진 주인공인 셈이다. 최후의 승자는 되지 못했지만 말이다.
《삼국지연의》의 이런 설정은 한고조 유방과 유비를 최대한 동일시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있는데, 《연의》에서는 유비를 유방과 거의 동일시함으로써, 그의 한중왕 선언이나 칭제에 큰 카타르시스를 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정사에서부터 스스로를 한고조의 현신 같은 이미지메이킹을 했는데, 이는 제갈량과 조식의 논쟁으로도 알수 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소설 초반에 나오는 황건적에게 대항하는 의병을 조직한 뒤, 대장간에서 쌍검을 만들어서 사용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삼국지》의 손가와 함께 현대까지 후손이 전해져 내려온다.# 공교롭게도 손권과 자기 부하였던 제갈량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곳과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무덤의 경우, 진위 여부에 논란이 있고 그나마도 도굴당한 조조, 무덤터가 남아있지만 무덤 자체의 행방이 묘연한 손권과 달리 온전히 무덤이 보존되었다.
영제(유굉), 소제(유변), 헌제(유협), 유우, 유언, 유장, 유요, 유엽, 유표 등 후한 말 유씨 인물과 친척 관계가 되나, 엄밀히 말해 계승권과는 거리가 먼 유씨[8]이며 유비의 족보 중간이 불분명해서 당시 황제들과는 정확한 촌수관계도 따지기 어렵다.
3. 유비 숭배의 기원과 현대에 미치는 영향
유비는 사후 여러 정치적 이유로 유교적인 가치관에 따라 낭만화되었다. 북중국을 정복한 전조의 건국자이자 흉노인 유연이 자신의 미약한 정당성을 보강하기 위해 유씨를 근거로 내세우면서 첫 씨앗이 뿌려졌다.[9][10] 그러나 육조에서 수, 당나라를 거쳐 북송 대까지 낭만화는 비교적 미비하였다. 습착치 같은 자들이 당대의 선양 논리를 반박하기 위해 유비를 추숭하는 등의 주장을 했던 경우도 있기는 했으나 결코 당대의 주류는 될 수 없었다.그러나 북송이 멸망하고, 한족 정권이 전통적인 중화의 영역인 북중국에서 밀려나 남부로 쫓겨난 남송대에 이르러 눈에 띄는 변화가 시작되었다. 지식인과 대중 양 쪽에서 "우리는 악한 적에 의해 밀려났으나, 여전히 천하의 적법한 통치자다."라는 정통성 관념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정통성'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유비와 촉한은 주요한 역사적 설명들이 왜곡될 정도로 강하게 미화되었다. 원나라 대에 삼국지평화와 같은 초기 소설이 출현하였고,[11] 명 초기 인물인 나관중이 소설 <삼국지연의>를 저술하며 유비를 주인공으로 삼아 유교적 덕목인 인의의 화신으로 묘사하였다. 이런 묘사가 일반화되면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유비의 이미지가 확립되었다.[12]
현대 동아시아에서 유비와 그의 충직한 신하들[13]은 중요한 문화적 상징이다. 21세기 현재에도 이들을 다루는 문화 상품이 활발히 제작되고 있으며, 주요 행적지는 관광 상품으로 개발되었다. 다른 한 편으로, 현대 사학계에서는 긴 시간 동안 낭만적인 이미지가 고착화되어, 유비라는 인물에 대한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접근이 어려워진 점도 지적되고 있다.[14]
4. 외모
《삼국지연의》에서 유비는 귀가 어깨에 닿고 손목이 무릎에 닿는 기이한 모습으로 묘사되며, 이는 사실 부처를 상징하는 외모라고 한다. 《정사 삼국지》에서 유비의 외모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신장은 7척 5촌[15]에 손을 아래로 내리면 무릎에 닿았고 눈을 돌려 자신의 귀를 볼 수 있었다.
<선주전>
<선주전>
유비가 말했다.
'안 됩니다. 명공은 여포가 정건양(정원)과 동태사(동탁)를 섬기던 일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조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포가 유비를 노려보며 말했다.
'귀 큰 놈(大耳兒)이 가장 믿지 못할 놈이로구나.'
《후한서》 <여포 열전>
'안 됩니다. 명공은 여포가 정건양(정원)과 동태사(동탁)를 섬기던 일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조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포가 유비를 노려보며 말했다.
'귀 큰 놈(大耳兒)이 가장 믿지 못할 놈이로구나.'
《후한서》 <여포 열전>
이후 선주(유비)가 돌아가자 공(조조)은 사람을 풀어 선주가 어찌하고 있는지 살피게 하였다. 선주는 그러한 사정을 알아채고는 밭에서 파를 뽑으며 하인에게 돕게 하였는데, 파가 단정치 않은 모양을 하고 있던 고로 하인을 몽둥이로 후려팼다. 이를 조조가 듣자 말했다.
'귀 큰 녀석(大耳翁)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군.'
《화양국지》 <유선주지>
'귀 큰 녀석(大耳翁)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군.'
《화양국지》 <유선주지>
유비에게는 수염이 없었기 때문에 장유는 이런 방법으로 그를 깨우친 것이다.
<주군전>
<주군전>
제갈량은 유비의 웅자(雄姿-웅대한 자태)가 걸출함을 보고 마침내 해대사성(解帶寫誠-출사하여 성심을 다함)하고 서로 두텁게 결납(結納-결탁)했습니다.
<제갈량전>
<제갈량전>
즉, 유비가 팔이 길고 귀가 크다는 건 정사에서도 나오는 사실이다. 귀 큰 건 후대에도 대표적인 유비의 아이덴티티였는지, 오죽하면 조선의 《용비어천가》에서도 유비는 大耳兒로 나온다.[16] 귀가 크다는 것은 외모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백성들의 고통을 잘 들어주는 현명하고 자비로운 인물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도 담겨 있다. 당장 4대 성인 중 하나인 석가불만 하더라도 중생의 고통을 제도하는 그의 행적에 맞추어 귀가 크게 묘사된다.
유비가 그리고 키가 크다는 사실을 기록을 통해 확실히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연의에서 관우, 장비는 크다는 묘사가 있지만 유비는 잘 언급되지 않는 편인데 실제로 유비는 꽤나 장신이었던 셈이다. 특히나 영양 부족으로 키가 작았던 과거 인물인 걸 감안하면 엄청난 장신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장유와의 일화에 따르면 그의 모습은 부분적으로 수염이 없었다고 한다. 수염이 없는 건 유비 스스로도 콤플렉스로 생각했었던 모양이다. 수염은 남성성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17] 이를 반영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유비가 맏형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몰라도 대부분 충분히 수염을 달고 나온다. 당장 유비의 황제 시절 모습을 그린 고대 삽화에서조차 유비가 수염이 별로 없다고 놀림받는 것이 이해가 안 갈 정도로 수염이 풍성하다.[18]
<제갈량전>에 따르면 유비에게 웅자한 자태가 있었다고 한다.
5. 이름과 칭호
널리 알려진 '유비 현덕'이라는 표기는 일본 이외에서는 사용하지 않았으며, 이를 한국에서 쓰는 것도 일본에서 유래한 것이다.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19]가 60~70년대 한국으로도 번역되어 들어왔는데 한자로 성 2자+이름 2자를 기본으로 쓰는 일본인답게 유비 현덕, 관우 운장으로 4글자를 맞추어 이름을 풀어 써 표기하는 등의 오류를 저질렀다.[20] 《연의》 본문에서는 유비, 유현덕, 현덕, 유황숙, 한중왕, 선주, 소열제 등의 호칭으로 그를 가리킨다. 이런 모습이 미디어에서 드러나는 것이 과거의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삼국지2 ~ 공명전)과 《범우사판 삼국지》인데, 전자는 일본식으로 4자에 맞춰 표기하고 후자는 대만판의 번역이라 유현덕, 관운장, 관 공(公) 등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중화권에서는 자와 이름을 다같이 소개할 때는 성은 유, 이름은 비, 자는 현덕이라고 각자 하나씩 쓰거나, 줄여서 부를 때는 유비, 유현덕이라고 부르지 한 번에 이름과 자를 같이하며 유비 현덕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21] 단적으로 중국의 삼국지 드라마에서는 아예 자막에 이름을 넣고 자는 따로 표기한다. 즉 유비를 소개한다면 유비 자(字) 현덕이라고 소개하는 것이다. 예컨대 유비를 부를 때는 헌제처럼 윗사람은 유비라고 부르고[22], 동급인 다른 군주들은 '현덕'이라 부르며[23], 아랫사람은 유예주, 유좌장군(예주 자사 및 좌장군을 제수 받은 적이 있으므로)등 관직명으로 부르고 현덕공이라고 자에 높임말을 쓰는 것은 오류이다. 그냥 현덕이라고 부르든가(윗사람 또는 동격, 친구), 직책 이름인 유예주 내지는 그냥 유 공(아랫사람)으로 부르는 것이 맞다. 편지를 쓸 때는 족하라고 부른다.
고대 중국에서는 성인이나 부모, 조상, 군주 등의 이름과 같은 한자를 쓰지 않음을 예로 여겼고, 발음도 하지 않았다. 이를 피휘(避諱)라고 부른다. 피휘할 대상은 아니더라도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무례한 짓이었다. 대놓고 면전에다 이름을 부르면 모욕도 그런 모욕이 없다고 했다.[24] 자(字)를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친한 사람끼리 부르는 이름이고 실제로 그렇게 아는 사람이 있는데 자야말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끼리 이름을 부르지 않기 위한 또 다른 이름이었다. 요컨대, 이름이야말로 친한 사람들끼리 부르는 것이다. 여기서 친한 사람이라고 함은 친구 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가족 등 그야말로 혈연관계에 있는 가까운 사람이다. 또한 공식적인 문서에는 인물의 이름을 쓴다. 다시 말하자면, 벼슬과 자는 같이 쓰지 않는다.
그리고 성+자를 하면 존중의 의미이고, 그냥 벼슬 이름을 부르기도 하지만, 성+벼슬 이름을 부르면 그 사람을 존중하는 지칭이라고 한다. 이는 현대 한국에서는 좀 다른 부분으로 김 사장님, 김 교수님보다는 김철수 사장님, 김철수 교수님 쪽이 더 격식있게 느껴지는 편이다.[25]
유비의 이름인 비(備)에는 근신하며 준비한다는 뜻이 있다. 《대대예기》(大戴禮記) <소변>(小辨) 편에는 "일을 경계해 근심하지 않는 것을 '지비'(知備)라 한다(事戒不虞曰知備)."라고 기록되어 있다.[26] 또 다른 의미로 《역경》(易經)<계사>(繫辭)에 "역(易)의 글됨이 광대해(우주의 모든 문제를) 그 속에 전부 갖추고 있다(易之爲書也, 廣大悉備)에서 볼 수 있듯이 '완전하다, 모두 갖추고 있다'는 뜻이 있다.
유비의 자(字)는 더 특별하고 무게감도 있다. 유비의 자는 현덕(玄德)이다.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서는 현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낳고도 소유하지 않고, 행해도 그 공에 의지하지 않으며, 길러도 주재하지 않는 것을 이르러 '현덕'이라 이른다(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간단하게 해석하면 현덕에는 세 가지 상태가 있다. 첫째, '낳고도 소유하지 않는다'는 생이불유(生而不有)이다. 즉 자신이 심은 사과라도 혼자 소유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눈다는 뜻으로, 자신이 깨달은 이치를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눈다는 것이다. 둘째, '행해도 그 공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위이불시(爲而不恃)이다. 즉 내가 한 일이라 해도 자랑하거나 만족하지 않고 겸허하게 행동하며 과장해 늘어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셋째, 장이부재(長而不宰)이다. 여기서 '재'(宰)는 주관을, '장'(長)은 장년을 뜻하는 말로 권위 있고 존귀한 위치에서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고 권한을 이양하고 부여할 줄 안다는 뜻이다.
유비의 다양한 호칭과 의미는 다음과 같다.
- 유비(劉備): 본명. 실제로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이른바 전근대 중국과 한국에서는 상대가 미성년자이거나 평민, 노비가 아니고서야 함부로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매우 무례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형제자매 간에도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으니, 따라서 '유비 놈' 이라든지 '네 이놈 유비' 라는 식으로 적이 더 많이 썼다.[27] 유비 자신이 황제와 같은 윗사람 앞에서 또는 윗사람에게 보내는 편지글에서 자신을 지칭할 때도 ‘비’라고 자기 이름을 직접 불렀다. 자신을 낮추는 겸양의 표현이다.
- 현덕(玄德): 자. 현덕이라는 그의 자는 《도덕경》 10장에서 따온 어휘로 여겨지며, 이를 풀이하자면 우주에 드러내지 않은 채 만물을 다루고 변화하게 하는 깊은 도리(대자연의 질서), 묘한 덕 또는 매우 깊은 덕이라는 뜻이다.
- 유 예주(劉 豫州): 도겸, 조조가 상표하여 예주목을 벼슬로 받았을 때의 호칭. 중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지방관을 역임했거나 역임하고 있는 자는 성씨와 그 지방의 이름으로 부르곤 했다. 덧붙여 유비가 자주 있던 소패는 예주 패국 패현으로 추정된다.
- 바리에이션으로 (예주)자사님이라는 뜻의 사군(使君)도 확인된다. 논영회에서 조조가 유비를 부를 때 사용한 단어.
- 유 황숙(劉 皇叔): 《연의》에서 헌제와 만난 다음 족보를 뒤져보고 황제의 숙부뻘이라 하여 붙은 호칭이다. 주로 아군 측에서 유비의 혈통을 높이려는 뜻에서 자주 쓴다. 당연히 역사적으론 쓰인적이 없다.[29]
- 좌장군(左將軍): 유비가 한중왕에 스스로 등극하기 전 조정에서 정식으로 받은 최고 관직은 좌장군이다. 출처는 <노숙전>, 《오서》 인용 주석, 관우의 말. 사실 과거나 현재나 직함이 있을 경우 그걸 붙여 호칭하는 게 일반적이라 그 사람의 행적을 조명할 때나 어떠어떠한 지위를 거쳤다고 적는 거지, 그렇게 불렸다는 출처를 표기하라거나, 그것들을 일일이 불렸던 호칭이라고 열거하는 건 의미가 없다.
- 한중왕(漢中王): 한중왕에 오른 뒤에 쓰인 이름이다.
- 선주(先主): 촉한의 앞선 군주라는 뜻. 《정사 삼국지》에서 쓰인 호칭이며, 《삼국지연의》에서도 유비가 황제가 된 후에는 해당 표현이 쓰인다. 성+선주라고 해서 불린 적이 있는 듯하다. 북송 시대의 기록 가운데 《삼국지》를 소재로 한 연극을 보고 한 농부가 의자를 머리에 쓴 다음 "유 선주 같지 않나?"면서 장난을 쳤다는 것이 있다.[30] 위의 정통성을 이은 진나라의 사가인 진수가 촉한을 꽤나 존중했음을 나타내는 칭호다.[31] 유비의 뒤를 이어 촉한의 황제가 된 유선은 후주(後主)라고 불린다.
- 소열제(昭烈帝): 시호+제(帝)를 붙여서 황제로 취급한 것. 정통성을 인정하여 가장 높이 평가하는 호칭이다.[32] 물론 시호이므로 생전에 저렇게 불린 적은 없다.
- 소열, 한소열: 帝는 떼고 시호만 부르는 명칭이다. 한국에서 조선 시대 왕들을 부를 때 보통 묘호를 부르듯, 조선 시대에 유비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면 시호인 소열로 부르는 기록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 음흉한 놈, 사기꾼, 배신의 달인, 유통수, 당나귀 귀: 촉까들이 종종 쓰는 호칭. 물론 촉까가 아니어도 유비를 저렇게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개중 음흉한 놈이란 호칭은 위서의 정욱도 대놓고 부를만큼 그 유서가 깊다.
- 유패왕: 유비 패왕설에서 기인한 명칭. 인터넷상에서 많이 쓰인다.
- 누상촌 돗자리파 두목: 유비군이 기본적으로는 임협의 성격이 강했기에 나오는 말. 실제로 토사구팽만 빼고 한고제 유방과 흡사한 부분이 많다. 은근히 한국 인터넷상에서 많이 쓰인다. 실제로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는 유비의 기반 세력을 탁군 저잣거리의 유협 집단으로 해석한 뒤 도원결의 부분을 2차 창작으로 적어놓았다.
6. 생애
자세한 내용은 유비/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7. 평가
자세한 내용은 유비/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7.1. vs 조조
자세한 내용은 조조 vs 유비 문서 참고하십시오.8. 혈통
자세한 내용은 유비/혈통 문서 참고하십시오.9. 가족 관계
조부는 유웅이며 부친은 유홍이다.유비의 적실로는 미부인, 손부인, 목황후 오씨 등이 있다.
유비의 측실로는 소열황후 감씨, 유영의 어머니, 유리의 어머니 등이 있다.
유비의 자식들 가운데 행적이 알려진 이는 양자 유봉, 장남 유선, 차남 유영, 삼남 유리 이렇게 4명이다.
유영과 유리는 유선과는 어머니가 다른 이복동생으로 유선의 후손은 영가의 난 때 몰살당했으나 유선의 동생인 유영(劉永)의 손자 유현(劉玄)은 살아남아 성한(成漢)으로 도망가 황제 이수(李壽)로부터 안락공의 칭호를 받았다. 따라서 지금까지 내려오는 유비의 후손은 모두 유영의 후손이다. 또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이 유선의 사위였기에 제갈씨에 유비의 피가 섞여있는 것도 맞다.
유리의 후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유비의 후손은 아래 단락에 나온 청두 유비혜릉 앞에서 조상님이 거병하기 전에 했던 같은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33]
이외에는 딸이 둘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위서》 <조순전>의 '장판파에서 유비의 두 딸과 군수품을 획득했다'는 대목이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관련 기록이 없고 저 기록이 전부다. 고대에 여성들은 금수저가 아닌 이상 전리품 취급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다른 이도 아닌 조조의 숙적 유비의 딸이었으니 조조 본인이 분풀이로 취했거나 조순에게 내렸을 가능성이 있다.
양자 유봉에 대해서는 유비가 시종일관 친자식으로 여기고 아끼며 좋아했었다. 유봉이 죽은 이유는 겉으로는 관우를 구원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유봉이 주둔 중이던 상용은 원래 위나라의 땅을 점령한 것이었기 때문에 군대를 움직이면 반란을 걱정해야 한다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고, 제갈량에게 상소를 올리기도 했었다. 중국의 역사학자 심백준의 유비에 대한 비판에서도 나오지만, 유봉의 죽음에 대해서는 제갈량의 독단이 아니라, 유비의 합의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유봉에게 좋게 언급한 것인데, 번성의 포위가 풀리기까지는 두 달이 걸렸다.[34] 두 달이면 지원을 가기에 충분한 기간적 여유가 있었으며, 형주자사와 상용 동쪽 남향군 태수가 위군을 지원했다가 관우에게 토벌당해서 상용 동쪽은 공백지라 지원이 가로막힐 가능성도 없었다. 오히려 상용에서 지원을 오지 않아 보급 문제도 있던 관우는 어쩔 수 없이 장기전에 돌입하고 만다.
내부의 반란이 우려됐으면 유봉이나 맹달 중 한 명은 반란에 대비할 병력만 남기고 남은 한 명이 갔어도 됐다. 애초에 유비가 유봉과 맹달을 파견한 이유가 상용에서 관우를 언제라도 지원할 것을 염두에 뒀으며, 실제로도 신속히 지원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배치인데 반란 우려를 핑계로[35] 서로 주도권 싸움이나 해대며 결국 관우와 남군, 강하, 유강구, 번성, 양양, 맥성들을 잃었으며, 후에는 유봉, 맹달이 지키던 상용도 결국 빼앗겼으니 후계자 문제 이전에 큰일을 그르친 것만으로 처형당할 이유는 충분했다.
10. 무덤
자세한 내용은 청두 유비혜릉 문서 참고하십시오.11. 창작물
자세한 내용은 유비/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12.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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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칭.[2] 음력 기준 221년 4월 6일 ~ 223년 4월 24일.[3] 전한 때는 1척이 23cm이었으므로 172.5cm였겠지만, 유비가 살았던 후한말 당시에는 1척이 23.7cm였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유비의 키는 178cm(정확히는 177.8cm)에 가깝다. 현재 중국 성인 남성 키보다 더 큰 편인데 거의 1800년보다 더 오래된 저 때 당시에는 매우 큰 키였다.[4] 촉한에서 붙여준 정식 묘호는 아니고, 후세에 추증한 묘호다. 전조의 유연은 흉노는 한 황실의 동생이라며 한나라의 계승을 칭하고, 한왕에 올랐는데 한고조, 광무제, 소열제(유비), 한문제, 한무제, 한선제, 한명제, 한장제를 모셨다. 이때 앞의 세 명, 즉 서한의 창건자 고조, 동한의 중흥자 광무제, 촉한의 건국자 유비까지 3조(三祖)로 두고 뒤의 다섯 황제는 5종(五宗)으로 모셨다고 한다. 대체적으로는 이때 '열조'의 묘호를 올리지 않았나 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열조가 유비의 묘호라고 쓴 기록이 있다.[5] 계한(季漢), 혹은 유촉이라고도 한다.[6] 유비와 촉한이 스스로 내세운 촉한정통론에 따르면 초대 황제가 아닌 한나라의 제30대 황제이다.[7] 한국 매니아층에서 중국사를 논할 때, 이런 사적인 전사 집단을 흔히 '유협집단'이라 칭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학술적으로 명확히 정의된 바가 없고, 도덕적 가치판단이 섞인 단어이므로, 여기서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가급적 정확한 언어를 사용한다. 후한 말 군벌 연구에서는, 서로 쓰는 단어는 다를지라도 군대 구성의 중요한 골자가 부곡으로 대표되는 사적 전사집단임에 동의한다. 세력이 큰 가문이 방위를 위해 예속민을 무장시켜 형성된 경우, 혹은 지방의 군대가 특정 장교 아래 사병화되어 형성된 경우, 마지막으로 지역의 유랑민(모든 종류의 적賊)들이 무장하며 생겨나는 경우가 모두 있었다.(박건주, 한대의 지방상비군과 部曲의 推移) huskarl, 혹은 로마 내전기의 군단과도 유사점이 있다.[8] 한나라는 중간에 한번 망했다가 광무제가 재건했기 때문에 후한을 중건한 광무제의 후손들의 계승권이 우선되었는데 유비는 전한 초기에 이미 갈라진 방계 후손이다.[9]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 Imperial Warlord:A Biography of Cao Cao 155–220 AD.[10] 이런 정통성 보강의 일환이었는지 전조의 국명은 본래 한나라로, 촉한처럼 한의 후신을 자처했고, 이는 유총은 물론 4대 유찬 때까지 쭉 이어졌다. 그러나 이후 5대 황제 유요가 국호를 조로 바꾸면서 흉노의 후예임을 공고히 하였고, 한나라 삼조오종에 대한 제사도 끊었으며, 남교와 북교를 설치해 묵돌선우에게 제사를 올렸다.[11] Idema, Vernacular Fiction, 97.[12]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 Imperial Warlord:A Biography of Cao Cao 155–220 AD[13] 관우, 장비, 조운, 황충, 제갈량 등.[14]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 Imperial Warlord:A Biography of Cao Cao 155–220 AD[15] 전한 때는 1척이 23cm이었으므로 172.5cm였겠지만, 유비가 살았던 후한말 당시에는 1척이 23.7cm였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유비의 키는 대략 177~178cm(조금 더 구체적인 수치로는 177.8cm)에 해당한다. 2020년대 동아시아에선 평균 보다 조금 더 큰 정도(한국 기준 약 3~4cm, 중국 기준 약 6~7cm)지만, 당대에는 현대의 190대 이상에 해당하는 장신에 속한다.[16] 《용비어천가》 29장. "한덕(漢德)이 비록 쇠하나 제주(帝胄, 황제의 자손)가 중흥하실 것이라, 귀 큰 아이(大耳兒)를 와룡(臥龍)이 도왔나니. 세란(世亂)을 구하러 나시어 천자(天姿, 하늘이 내린 자질)가 기이하고 크시기에 귀 큰 관상(大耳相)을 중국 사신(詔使)이 일컬으니." 조선 태조도 용 같은 얼굴과 큰 키, 유별나게 큰 귀로 독특한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17] 현대에도 마초성을 강조하는 기준 중 하나가 인상적인 수염인데, 고대 당시에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삼국시대로부터 1000년이 지난 뒤의 얘기지만, 몽골 사신단이 호라즘의 대빵에게 수염이 깎인 채 돌아오자, 칭기즈칸이 대노하여 직접 전쟁을 일으켰을 정도였다.[18] 보통 만화에서 유비는 의형제 관우나 장비보다는 젊게 그려지는 편이다. 대표적으로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의 황건적의 난 부분을 보면 풋풋한 느낌을 주는 청년장수 유비와 산전수전 다겪은 듯 수염이 덮수룩한 관장은 묘한 대비를 이룬다. 다른 삼국지 만화 매체들도 시간이 흘렀다는 장치로 유비도 어느 순간부터 수염을 달고 나오지만 수염이 풍성하고 파격적인 관장보다는 숱이 확실히 적게 그려진다. 별명 자체가 수염인 사람 및 밤송이 돼지털이 아이덴티티가 되어버린 사람과 비교하면 누구 수염이 밋밋하지 않겠냐만은.[19] '오늘도 황하는 도도히 흐른다'라는 구절로 시작하며 유비가 황하를 바라보다가 장비와 만나는 《삼국지》이다.[20] 별개로 제갈량을 '제갈 공명'으로 표기하는 것은 오류가 아니다. 성인 제갈과 자인 공명을 합쳐 제갈 공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은 표기이기 때문. '유비 현덕'은 굳이 따지자면 '제갈량 공명'이라고 쓴 것과 같다. 실제로 일본에서 나온 코에이의 삼국지 영걸전, 공명전 등에서 제갈량 공명으로 등장한다.[21] 신삼국에서 유비 휘하의 부하들이 자신의 소속을 밝힐 때 주공의 이름을 "유비 유현덕"이라고 부르긴 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성+이름+자의 구조로 말하는 경우는 등장하지 않는다.[22] 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유비가 헌제와 항렬을 비교했을 때 아재비 뻘이므로 보통은 이름이 아니라 황숙이라고 부른다. 사실 부모 정도가 아니라면 어지간해서는 이름을 직접 부르는 일은 거의 없다.[23] 사실 그냥 현덕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이는 꽤 친근하게 부르는 것이며 보통은 성과 직위를 붙여서 유예주나 좌장군 등으로 부른다.[24] 드라마 대군사 사마의 후반부에서 흑화한 사마의의 모습에 실망한 백령균이 딥빡친 목소리로 '사마의'라고 부르자 사마의도 당황해서 지금 날 뭐라고 불렀냐고 화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런 이유에서다.[25] 과거에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이름은 거의 부르지 않았고 대부분 자나 호, 직위를 붙이는 게 일반적이었다. 현대는 자, 호 등이 사라지고 이름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게 되니 남의 이름을 생략하는 것이 더 비격식이라고 여겨지는 것일 뿐이다.[26] 기존 문서에서는 출처가 《소대예기》(小戴禮記) 라고 나와있었는데 이것을 잘못된 인용이다. 아마도 《사람을 품는 능굴능신의 귀재 유비: 속내를 감추고 은밀히 지배한다》라는 책에서 소대예기가 출처라고 되어 있어서 소대예기가 출처라고 적은것 같은데 대대예기 원문을 본다면 (https://ctext.org/da-dai-li-ji/xiao-bian/zh) 대대예기가 출처임을 알 수 있다.[27] 여기서 더 낮추면 '귀 큰 놈'이라든가 '돗자리 짜던 촌놈' 하는 식의 욕설로 호칭하게 된다.[28] 《연의》에서는 툭하면 적들에게 "돗자리나 짜던 천한 놈이"라면서 출신 문제로 욕먹는 경우가 허다하다. 황족인 동시에 하류층인 미묘한 사회적 위치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29] 사실 연의에서 유황숙유황숙하니 유비가 혈통팔아먹고 다니는 인물로 여겨질 때도 있는데, 사서에서 유비의 혈통에 대한 얘기는 그가 중산정왕 유승의 아들 유정의 후예란 게 짧게 언급되는 정도다. 황실에서 전한대에서 갈라져나온 유비와 달리 후한대에서 갈라져나온 유엽같은 인물도 딱히 혈통 덕을 본게 없다는 걸 감안하면, 당시 평민 출신인 유비가 이걸로 딱히 대접받았을 확률도 희박하다. 헌제가 의대조 사건 때 그를 포섭한 이유는 그가 조조에게 대적하는 실력자여서였지, 촌수를 따지기도 힘들만큼 희미한 혈통 때문이 아니다. 물론 나중에 유비가 칭제할 정도로 세력을 키운 이후엔 유씨 성이 명분 면에서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아무리 먼 방계라고 해도 확실한 유씨고, 확실히 한 고조의 후예긴 하니까.[30] 면류관을 의자에 비유한 것이기 때문에 황제의 지위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이 농부는 관청에 잡혀갔지만, 황제가 무지렁이 시골 농민이 장난친 걸 가지고 진지 빤다며 풀어주게 했다.[31] 참고로 진수는 서진의 관료였으므로 조위 정통론자의 입장이었고, 따라서 위나라는 통상적인 본기의 서술을 따라 <무제기>, <문제기> 등으로 호칭했다. 오나라의 황제였던 손권에 대해서는 <오주전>이라고만 쓰고 본문 첫머리부터 "손권은 자가 중모이다." 라며 이름을 언급하는데, 유비는 제목은 비슷하게 <선주전>이지만 그 이름을 말할 때 "선주의 성은 유이고, 휘는 비이다." 라며 나름의 존칭을 사용했다. 여담으로 사마의는 선제라는 추존 명칭이 있었는데도 그냥 진나라가 왕국이던 시절의 추존명인 사마선왕이라고 적었다.[32] 소열은 시호이고, 연호는 장무다.[33] 그런데 일설에서는 짚신 장사는 일종에 마케팅이고, 실제로는 관리인이라는 말이 있다. 이게 사실이면 유비의 후손이 선조의 무덤을 돌보는 격이다.[34] 8월에 도착하여 지원병을 충분히 받은 서황이 만총과 연계해 10월에 번성 포위를 풀었다.[35] 맹달은 상용이 지키기 유리한 곳이라고 언급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