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09:30:54

카스티야 연합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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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티야 연합 왕국
Corona Castellae
Corona de Castilla
파일:카스티야 연합 왕국 국기.svg 파일:카스티야 연합왕국 국장.png
국기 국장
파일:Crown_of_Castile_Overseas_Villafafila.png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영토[1]
1230 ~ 1715
성립 이전 이베리아 재통합 이후
카스티야 왕국 스페인 왕국
레온 왕국
위치 이베리아 반도, 남아메리카
수도 마드리드 (1561~1601, 1606~1715)
바야돌리드 (1601~1606)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 원수
주요 국왕 페르난도 3세(1230~1252)[2]
알폰소 11세(1312~1350)
이사벨 1세(1474~1504)
면적 335,000 km2 (1300년)
인구 3,000,000 명 (1300년)
민족 카스티야인, 레온인, 안달루시아인 등[3]
언어 카스티야어
레온어 등
종교 로마 가톨릭
통화 레알
주요 사건 [ 펼치기 · 접기 ]
1230년 레온 왕국동군연합
1469년 아라곤 왕국과 왕실 결혼
1516년 스페인 성립
1715년 카스티야 왕국 최종 해체
현재 국가 스페인, 쿠바, 베네수엘라, 파나마,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아이티
언어별 명칭
스페인어 Corona de Castiella (현대: Castilla)
라틴어 Corona Castellae
아라곤어 Reino de Castiella
포르투갈어 Coroa de Castela
프랑스어 Couronne de Castille
아랍어 تاج قشتالة
영어 Crown of Cast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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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230년부터 1516년까지 이베리아 반도에 존재했던 왕국. 명목상으로는 1715년까지 존재했다. 훗날 아라곤 왕국과 결혼으로 동맹을 맺은후 레콩키스타를 마무리 짓고 스페인 왕국을 형성한다.

2. 역대 국기

파일:카스티야 연합 왕국 국기(1230-1406).svg.png
1230년 ~ 1406년
파일:카스티야 연합 왕국 국기(1406-1500).svg.png
1406년 ~ 1500년
파일:카스티야 연합 왕국 국기(1406-1500)사각형.svg.png
1406년 ~ 1500년(사각형)
파일:카스티야 연합 왕국 국기.svg
1500년 ~ 1715년

3. 역사

3.1. 카스티야 왕국레온 왕국의 통합

1230년, 레온 국왕 알폰수 9세는 메리다, 바다호스, 엘바스, 탈라베라 라 레알 공략에 성공한 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방문해 대 야고보에게 경의를 표한 후 레온으로 향하다가 그해 9월 24일 빌라누에바 데 사리아에서 중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는 당초 첫 왕비 테레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페르난도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페르난도가 요절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베렝겔라 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페르난도가 왕위 후계자로 거론되었지만, 페르난도가 이미 카스티야의 국왕 페르난도 3세로 즉위한 점이 걸림돌이었다.

카스티야 왕국에 반감을 품고 있던 레온과 갈리시아 귀족들은 알폰수 9세에게 테레사 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딸 산차둘세를 후계자로 지명하라고 권유했다. 알폰수 9세 역시 자신의 동의 없이 카스티야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준 베렝겔라와 감히 자신에게 대항한 페르난도 3세 모자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기에, 그들의 설득에 따랐다. 그리하여 알폰수 9세 사후 산차와 둘세가 레온과 갈리시아의 공동 여왕이 되었다.

그러나 페르난도 3세가 즉시 군대를 이끌고 와서 토로에 입성해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과 힘을 합쳐 레온과 갈리시아 귀족들을 제압했고, 페르난도 3세의 어머니 베렝겔라가 산차와 둘세의 어머니인 포르투갈의 테레사와 협상한 끝에 1230년 12월 11일 베나벤테에서 연간 3만 메라베디(maravedí)에 달하는 거액의 연금과 토지를 받는 대가로 왕관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여생을 보내게 했다. 이리하여 페르난도 3세는 카스티야 국왕에 이어 레온과 갈리시아 국왕으로 등극했다. 이후 2년간 두 왕국의 통합에 반대하는 레온과 갈리시아 귀족들의 반란이 잇따랐지만 모조리 진압되었다. 페르난도 3세는 모든 반란을 평정한 후 1233년에 왕국을 카스티야, 레온, 갈리시아의 3개의 행정 단위로 나누고 각 도시들과 영주들에게 자치권을 보장해주는 형태로 행정 체계를 개편했다. 이리하여 카스티야 연합 왕국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3.2. 페르난도 3세

페르난도 3세레콩키스타에 열정적으로 임했다. 당시 알안달루스를 지배하던 무와히드 왕조는 1212년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 이후 급격하게 쇠락했다. 특히 1224년 9월 칼리파 유수프 알 무스탄시르가 압둘라 알 아딜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 후, 무와히드 왕조는 심각한 내분에 시달렸다. 모로코 등지에서 알 아딜에 반발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고, 알 안달루스에서는 하옌의 총독 아브드 알라가 칼리파 압둘라 알 아딜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알 아딜은 알 안달루스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을 모로코로 대거 이동시켰고, 알 아딜의 사촌이며 알안달루스의 대리 통치자인 알 바야시는 아브드 알라에게 패전을 거듭하자 페르난도 3세에게 아브드 알라를 공격해달라고 요청했다.

페르난도 3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마음먹고, 1225년 톨레도에서 출진해 알 바야시와 합세한 뒤 하옌 시를 포위 공격했다. 비록 공성 장비가 부족해서 공략엔 실패했지만, 하옌 시 주변 지역과 베가 데 그라나다 일대를 황폐화하고 연밀이 오기 전에 코르도바에 성공적으로 입성해 알 바야시를 총독에 복위시켰다. 알 바야시는 자신을 도와준 대가로 페르난도에게 비뇨스 데라 엔시나, 살바테리아 및 카필라 등 국경 지대의 전략적 요충지를 제공했다. 얼마 후 알 바야시가 코르도바에서 민중 봉기로 피살당하자, 카스티야군은 알 바야시가 소유하고 있던 안두하르, 바예자, 마르토스 일대를 점거했다.

1228년, 압둘라 알 아딜을 처단하고 새로운 무와히드 왕조 칼리파가 된 이두리스 알 마문은 알안달루스를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마지막 병력을 모로코로 철수시켰다. 이후 알안달루스에는 사라고사의 타이파 무함마드 이븐 유수프 이븐 후드 알 유드하미 등 각지의 타이파들이 다스리는 토후국들이 난립했다. 페르난도 3세는 이를 틈타 레온 왕국의 알폰수 9세, 아라곤 왕국의 하이메 1세, 포르투갈의 산슈 2세와 함께 알안달루스를 거의 매년 공격했다. 이븐 후드는 이들을 막으려 애썼지만 1230년 메리다를 포위한 알폰수 9세를 물리치려 했다가 오히려 격파당해 전력을 대부분 잃어버렸다. 이후 기독교 군대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알안달루스를 마음껏 유린했다. 다만 1230년 6~9월에 추진된 카스티야군의 하엔 공략 작전은 수비대의 결사적인 항전에 부딪쳐 실패로 돌아갔다.

그 후 카스티야 연합 왕국 최초의 군주가 된 페르난도 3세는 어머니 베렝겔라에게 내치를 위임하고 자신은 레콩키스타에 몰두했다. 1231년 카졸라, 1233년 우베다를 공략했으며, 1235년 토레스 데 알반체스 성을 공략했다. 또한 1235년 코르도바를 지키는 두 요새 이즈나토라프, 토레 데 포야토를 공략한 뒤 코르도바의 무와히드 총독과 1년 휴전 협정을 맺고 430,000 마라베디(maravedi)를 매년 공물로 받기로 했다. 1236년 1월 무어인 탈영병들로부터 코르도바가 무방비 상태라는 정보를 입수한 페르난도 3세는 레온, 살라망카, 사모라, 토로 일대에서 군대를 소집한 뒤 코르도바로 진격했다.

그해 2월 코르도바에 도착한 페르난도 3세는 4달간 공성전을 벌였다. 시민들은 에미르가 구하러 와 줄 거라 믿고 항전했지만, 끝내 구원군이 오지 않자 낙담하여 6월 29일 항복했다. 페르난도 3세는 알 안달루스의 핵심 도시였던 코르도바에 입성한 뒤 알폰소 텔레스 데 메네스와 알바 페레스 데 카스트로에게 도시 관리와 방비를 맡겼으며, 코르도바 주교구를 신설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코르도바 공략 소식에 크게 기뻐하며 페르난도 3세에게 경제적 및 정치적 특권을 부여했다.

1135년 슈바벤의 베아트리스 왕비가 사망했다. 당시 페르난도 3세는 7명의 자식을 두었지만, 베렝겔라는 아들이 여러 정부와 관계를 맺고 있어 왕의 미덕이 훼손되는 상황을 우려해 새 왕비를 들일 것을 강하게 권고해 동의를 얻어냈다. 이후 아들의 재혼 상대를 몸소 물색한 끝에 퐁티외 백작 시몬의 딸이며 당시 퐁티외 여백작이었던 잔 드 퐁티외를 아들과 결혼시키기로 했다. 결혼식은 1237년 11월 부르고스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1238년 기독교 세력의 공세를 상대로 조직적인 저항과 타협을 병행하면서 알안달루스를 이끌어가던 이븐 후드가 사망했다. 이후 알안달루스는 여러 타이파들의 난립으로 사분오열되었고, 페르난도 3세는 이 기회를 틈타 확장 정책을 이어갔다. 1240년 초 무르시아를 공략하고 대부분의 코르도바 지방을 정복했으며, 1241년 알바세테 공략에 성공했다. 이후 1243년까지 칠론, 가헤테, 페드로체, 산타 에우페미아, 오베조, 세테필라, 호르나추엘로스, 알모도바르, 루케나, 루세나, 산타엘라, 몬토로, 아길라르, 바에나, 에시하, 마르체나, 모론, 오수나, 에스테파 일대를 별다른 저항 없이 공략했다.

이렇듯 알안달루스를 순조롭게 공략했지만 아라곤 왕국 역시 영토를 급격히 늘리면서 서로 충돌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이에 페르난도 3세는 1244년 3월 알미즈라에서 아라곤 국왕 하이메 1세와 만나 알미즈라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비야르에서 부소트를 거쳐 비야호요사까지 이르는 전선 이북 지역은 아라곤 왕국이 갖고, 그 남쪽은 카스티야 왕국이 가지며, 양국은 상대방에게 할당된 영토를 침범하지 않기로 했다. 이 협약은 나중에 하이메 1세가 카스티야에 할당되었던 카우데테, 빌레나, 사스를 장악하고 카스티야의 알폰소 왕자가 아라곤에게 할당된 샤티바를 장악하면서 깨졌지만, 양국이 서로 전쟁을 벌이는 걸 자제했기에 넘어갔다.

1245년 8월, 페르난도 3세는 하엔 시를 3번째로 포위 공격했다. 하엔 시는 1246년 2월까지 7개월간 버티면서 카스티야 왕국의 침략으로 1244년 수도 아르주나를 빼앗기고 그라나다를 새 거점으로 삼은 무함마드 1세에게 구원을 호소했다. 무함마드 1세는 어떻게든 하엔을 구하려 했지만 모든 시도가 실패하자 그라나다로 피신하고자 하는 주민들의 신변을 보장해주는 대가로 하엔 시를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페르난도 3세는 이를 받아들이고 1246년 3월 하엔에 입성했다. 1246년 세비야 인근의 알칼라 데 과다이라 요새를 공략한 그는 그동안 자신을 대신해 내치에 전념하던 어머니 베렝겔라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본국에 귀환하여 부르고스의 산타 마리아 라 레알 데 라스 우에가스 수도원에 어머니의 유해를 안장했다.

1247년 세비야 공략 작전에 착수한 페르난도 3세는 카스티야 왕국 최초의 제독으로 대상인이었던 라몬 데 보니파스(Ramón de Bonifaz)를 선임했다. 라몬은 칸타브리아로 가서 13척의 대형 선박과 약간의 갤리선 및 소형 선박을 건조한 뒤 과달키바르 강으로 항해해 수적으로 우세한 무슬림 함대를 격파하고 세비야를 해상에서 봉쇄했다. 여기에 페르난도 3세가 1247년 8월 20일 세비야 인근 지역을 모조리 장악하고 외벽을 세우면서, 세비야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세비야의 총독 악사타프(Axataf)는 1년여간 항전하면서 하프스 왕조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좀처럼 구원이 오지 않자 결국 1248년 11월 23일에 항복했다. 페르난도 3세는 세비야에 입성한 뒤 궁정을 이곳으로 옮겼다.

페르난도 3세는 세비야 정복 후에도 전쟁을 이어갔다. 1249년 레브리하를 공략했고, 1250년에는 폰타나르, 보르노스, 아르코스 데 라 프론테라를 공략했다. 여기에 니에블라와 알가르베의 에미르인 이븐 마흐푸즈로부터 알가르베에 대한 권리를 양도받았으며, 헤레스 데라 프론테라, 메니다 시도니아, 알칼라 데 로스 가줄레스, 에헤르 데 라 프론테라, 엘 푸에르토 데 산타 마리아, 카디스, 산루칼라 시장, 로타, 트레부예나 일대의 무슬림 영주들을 봉신으로 삼았다.

몇몇 연대기에 따르면, 페르난도 3세는 세비야 정복 후 마그레브 원정을 계획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그는 알제리 북서부의 도시 오랑을 공략한 뒤 지중해와 대서양 사이의 해협 양쪽을 통제하고 십자군과 연합해 마그레브의 무슬림들을 복속시키려 했으며, 이 계획을 이루기 위해 아들 알폰소에게 세비야에 조선소를 건설하게 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알폰소 10세는 1257년 가자우에트와 오랑, 1260년 살레 등 알제리 북서부의 해안 도시들을 해상에서 습격하는 등 마그레브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다.

페르난도 3세는 치세 내내 정복 전쟁을 단행하면서도 행정 체계를 정비하고 왕국의 통합을 이루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서고트 왕국의 국왕 레케스윈트가 654년에 반포하고 에르위그 왕이 681년 개정한 <Liber Iudiciorum(심판의 책)>을 카스티야어로 번역한 <Fuero Juzgo>를 반포했다. 그는 이 법률을 일종의 '관습법'으로서 새로 확보한 영토에 그대로 적용했다. 또한 지금까지 왕실과 국가의 공식 언어로 쓰이던 라틴어를 카스티야어로 대체했다. 아들 알폰소는 갈리시아어로 성모 마리아를 찬양하는 노래인 <칸타가스 데 산타 마리아(Cantigas de Santa María)>를 작곡하기도 했다.

또한 1237년경에 12명의 학자들이 작성한 <고귀함과 충성의 책(Libro de la nobleza y lealtad)>을 출간했다. 이 책은 좋은 정부를 위한 통치자의 의무와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 충족되어야 할 미덕에 대한 정치법과 규범을 담았는데, 스콜라 학파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이 많이 반영되었다. 그 외에도 가톨릭 신앙이 투철한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부르고스 대성당 등 여러 성당과 수도원을 세우거나 막대한 기부를 했으며, 여러 병원을 왕국 각지에 신설하여 많은 병자들에게 치료받을 기회를 제공했다. 여기에 살라망카 대학이 유럽 최고의 대학이 될 수 있도록 물신양면으로 지원했으며, 말년에는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기도 했다.

3.3. 알폰소 10세

1252년 5월 30일, 페르난도 3세부종에 시달린 끝에 세비야에서 사망했다.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알폰소 10세는 아버지의 정복 전쟁으로 영토가 급격하게 불어난 왕국을 안정시키는 것을 중점으로 삼았다. 우선 레온과 카스티야의 모든 목동들을 관리하는 평의회를 설립하고, 이들에게 병역 면제, 재판에서의 증언 우선권, 통행권, 방목권 등 여러 특권을 부여했다. 이 평의회는 1273년에 3,000마리의 크고 작은 양을 소유한 협회인 메스타(Mesta) 로 발전했다. 이 조치는 잉글랜드로 수출보내야 하는 양모가 갈수록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내려졌다.

또한 평민들에 대한 세금을 감면해 국내 거래를 원활하게 하려 노력하면서도, 왕실의 수입을 늘리기 위해 수출과 수입에 관세를 부과했으며, 국가가 대외 무역을 담당하는 상인을 지명하는 제도를 실시했다. 여기에 동일한 화폐와 도량형이 도입되었으며, 통치 기간 동안 25개의 주조소를 설립해 백성들이 화폐를 충분히 사용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대외 무역에 상당한 투자를 하던 귀족과 성직자들이 상당한 세금을 내는 것에 강한 불만을 품었다.

알폰소 10세는 왕국 각지에 난립한 법전들을 통합한 새 법전을 편찬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왕국의 각 도시들에 적용되는 <푸에로 레알 데 에스파냐(Fuero Real de España)>의 초안을 작성했다. 이 헌장은 왕이 자유 재량에 따라 여러 도시에 부여한 경제적 특권을 명시한 것으로서, 봉건 귀족들의 권세를 견제하고자 도시를 키우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때 그는 국법의 발의, 심의 및 후속 승인은 오직 왕만이 책임을 가진다고 명시해, 국왕만이 국법을 제정 및 반포할 권한이 있음을 밝혔다.

그는 뒤이어 법률 개론서인 <법의 표본(El espéculo de las leyes)>을 작성해 각 도시에 발송했다. 카스티야 왕국에 통용되는 관습법들을 어느 정도 정리한 이 저서는 1255년에 공포될 예정이었지만, 1256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될 야심을 품은 알폰소 10세가 반포를 중단시켰다. 이후 10년간 여러 법학자들과 함께 법률 편찬에 몰두한 끝에, '법의 표본'과 신성 로마 제국의 법을 결합하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참조한 <시에테 파르티다스(Siete Partidas)>를 1265년에 반포했다. 이 법은 카스티야 연합 왕국 최초의 성문법으로, 19세기까지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에서 기본법으로 활용되었다.

알폰소 10세는 세비야 공방전에 참여했을 때 임시로 창설된 함대가 세비야 항구를 봉쇄하여 도시 함락에 기여한 것을 지켜보고, 앞으로 강력한 해군을 육성할 필요성을 확실히 느꼈다. 1253년 카스티야 제독 직책을 정식으로 신설했고, 세비야에 조선소를 조성해 함대를 집중적으로 육성하게 했다. 여기에 안달루시아와 무르시아에 마요르(mayor)가 신설되었으며, 뒤이어 알라바와 기푸스코아에서도 마요르가 신설되었다. 이들은 할당된 영지에서 사법 활동을 독립적으로 수행하고 외적으로부터 영지를 지키는 등 군사 업무도 맡았다. 그는 뒤이어 1188년 레온 왕국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코르테스(Cortes)를 정식으로 도입했다. 그의 통치 기간 내내 빈번하게 열린 코르테스에는 귀족, 성직자, 마을과 도시의 검찰관 등 다양한 신분이 참석했다. 코르테스를 소집한 주된 목적은 왕국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각 신분으로부터 보조금을 받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알폰소 10세의 치세 동안 시행된 정책 중 학계에서 가장 중요한 정책으로 손꼽는 정책은 정복지에 인구를 이주시키는 정책이었다. 그는 세비야 전역을 카스티야 왕국 곳곳에서 이주해온 기독교인들에게 분배했고, 정복지에 남은 무슬림들이 하엔, 세라노, 무데자르 일대에서 집단촌을 이뤄서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것을 허락하는 대신 상당한 '종교세'를 부과했다. 그러나 1264년 무데자르의 무슬림들이 나스르 왕조의 선동에 넘어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반란을 진압한 뒤 무슬림들을 대거 추방하고 과달레테 지역과 카디스 만에 살던 백성들을 과달키비르 계곡 등 무슬림이 떠나서 생긴 공백지에 대거 이주시켰다. 또한 세구라, 에스테파, 메디나 시도니아 등 나스르 왕조와의 국경지대에 군사 총독을 설치하고 그들이 자율적으로 군사 활동을 벌이는 것을 용인했다.

알폰소 10세는 외치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왕위에 오른 이듬해인 1253년, 그는 포르투갈 왕국으로 친정해 알가르베 일대를 공략했다.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3세는 알폰소 10세의 딸 베아트리스와 결혼하고 그 땅을 베아트리스에게 지불할 지참금으로 삼겠다는 내용의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다. 1267년, 알폰소 10세는 아폰수 3세와 바다호스에서 만나서 알가르베 일대를 포르투갈에 돌려주고 포르투갈과 상호 방위 협약을 맺는 데가로 아라세나, 모우라, 세르파, 아로체 등 과디아나 강 동쪽의 포르투갈 영토를 카스티야 왕국이 가진다는 내용의 바다호스 조약을 체결했다.

한편, 그는 재위 초기에 나바라 왕국의 종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나바라 왕국과의 국경지대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나바라 국왕 티발트 2세는 이를 두려워해 아라곤 국왕 하이메 1세와 에브로 강변에서 만나 하이메 1세를 주권자로 섬기고 아라곤 왕국의 보호를 받는 대가로 그들이 전쟁을 보낼 때 병력을 반드시 보내주겠다는 내용의 협약을 맺었다. 알폰소 10세는 이에 맞서 아키텐 공국을 소유하고 있던 잉글랜드와 손잡기로 하고,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왕자와 자신의 누이인 레오노르를 결혼시키고 가스코뉴 일대를 지참금으로 양도하는 대가로 나바라 문제에서 잉글랜드의 협조를 받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아라곤 왕국과 불필요한 갈등을 벌일 필요는 없다고 여기고 1256년 하이메 1세, 티발트 2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알폰소 10세는 하이메 1세를 나바라 왕국의 보호자로 인정하기로 했고, 하이메 1세는 카스티야 왕국이 나바라 왕국으로부터 탈취했던 영토를 그대로 인정하기로 했다.

1256년 독일왕 빌렘 2세가 프리지아인과의 전쟁 도중 전사하자, 피사 공화국의 사절이 알폰소 10세를 찾아와서 독일왕이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알폰소 10세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1257년에 전 유럽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손녀인 베아트리스가 자신의 어머니인 점을 들며 독일왕이 될 자격이 있다고 선언했다. 그 후 이탈리아의 기벨린파(친 황제파) 도시들에 외교관을 보내 지지를 호소했고, 나중에는 대규모 병력을 파견해 무력으로 복종을 받아내려 했다.

그러나 신성 로마 황제가 되려는 그의 계획은 많은 장애에 부딪쳤다. 카스티야 귀족들은 황제가 되기 위해 막대한 자금과 군대를 보내라는 왕의 요구에 난색을 보였고, 소리아에서는 과도한 세금에 반발한 지역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또한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위세를 떨치는 카스티야 국왕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까지 겸임한다면 너무 강해진다고 여겼기에 반대했다.

한편, 신성 로마 황제를 선출할 자격이 있는 7명의 선제후 중 4명은 알폰소 10세를 지지하기로 했지만, 3명은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의 동생인 콘월 백작 리처드를 지지했다. 알폰소 10세가 카스티야 왕국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반면, 리처드는 재빨리 아헨으로 이동해 1257년 5월 카롤루스 대제의 묘지를 참배한 뒤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 후 알폰소 10세는 십여 년간 리처드를 꺾고 교황의 마음을 돌리며 자신의 지지자들을 지원하고자 막대한 돈을 지출했지만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1272년 리처드가 사망하면서 그가 황제로 인정받는 듯했으나, 독일 제후들은 1273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인 루돌프 1세독일왕으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 역시 루돌프 1세를 지지하고 알폰소 10세의 독일왕 폐위를 선언했다.

설상가상으로, 알폰소 10세는 카스티야 귀족들의 반란에 직면했다. 1271년 초 레르마에서 열린 코르테스에서, 누뇨 곤잘레스 데 라라가 이끄는 대다수 귀족들은 국왕에게 "귀족에 대한 지나친 과세와 보조금 요구를 중단하고 착취를 일삼는 대리인들을 해임하며, 신법 집행을 중단하고 오랫동안 따라온 관습법으로 돌아가라"고 요구했다. 알폰소 10세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귀족들은 1272년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알폰소 10세는 이 반란에 곤욕을 치르다 1273년 신법을 다소 완화하고 귀족들에게 부과된 보조금 액수를 줄이는 등 온건책을 써서 가까스로 그들과 타협했다.

1275년 초, 알폰소 10세는 몬페라토 후작이며 자신을 독일왕으로 받들었던 기욤 7세와 만나서 앙주 공작 샤를 1세로부터 승리를 거둔 것을 축하하면서 자신이 롬바르디아에서 독일왕으로 즉위하려 하니 협조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기욤 7세가 신통치 않은 반응을 보이자 다시 리옹 공의회에 참석해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에게 자신을 인정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교황은 공연히 독일왕이 되려 하지 말고 카스티야로 돌아가라고 답했다. 그러다가 본국에서 마린 왕조가 쳐들어왔다는 급박한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신성 로마 황제가 되려는 뜻을 완전히 접고 본국에 돌아갔다.

이보다 앞선 1274년, 나스르 왕조의 군주 무함마드 2세는 알폰소 10세에게 연공을 바치는 대가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카스티야 왕국이 왕조 내부의 불만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기자, 마린 왕조의 아미르 아부 유수프 야쿱에게 타리파, 알헤시라스, 론다 등을 할양하고 충성을 바칠 테니 카스티야 왕국을 정벌해달라고 요청했다. 야쿱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1275년 4월 대군을 이끌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타리파와 알헤시라스를 공략했다. 뒤이어 카스티야령 안달루시아를 습격했고, 무함마드 2세는 독자적으로 코르도바를 공격했다. 카스티야의 왕자이자 본국을 떠난 알폰소 10세를 대신해 국가를 운영하던 페르난도가 반격하려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 7월에 병사했다.

야쿱은 기세를 이어가 세비야와 코르도바 사이의 요충지인 에시하로 진격했다. 카스티야령 안달루시아 총독 누뇨 곤살레스 엘 부에노가 출진했지만, 1275년 9월 8일에 벌어진 에시하 전투에서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야쿱은 뒤이어 에시하를 공격했지만 공성 무기가 준비되지 않아 철수한 뒤 9월 18일 알헤사리스에 개선하여 누뇨 곤살레스의 수급을 효수했다. 톨레도 대주교이자 알폰소 10세의 동생인 산초는 이에 맞서 톨레도, 마드리드, 과달라하라, 탈라베라 일대의 기사들을 모아 남하하다가 10월 21일 하엔 부근 마르토스에서 노획물과 포로들을 대등하고 이동 중이던 적군을 포착했다.

산초는 뒤따라 오는 기사들을 기다리자는 조언을 듣지 않고 곧바로 돌격했으나 참패를 당하고 생포된 후 마린 왕조군과 나스르 왕조군이 산초를 어찌 처리할 지를 놓고 분쟁을 벌이던 중에 살해되었다. 카스티야에 급히 돌아온 알폰소 10세는 군대를 수습해 국경지대에 집중 배치하는 한편 야쿱에게 휴전 협정을 맺자고 청했다. 원정이 장기화되면서 병력 손실이 많은 것을 부담스럽게 여긴 야쿱은 이를 받아들였다. 아라곤 왕국이 그라나다를 기습 공격하는 바람에 얼른 돌아가야 했던 무함마드 2세 역시 카스티야 왕국과의 휴전에 동의했다.

1277년 6월, 알폰소 10세의 동생 파드리케가 알폰소 10세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역을 꾀했다. 파드리케는 지난날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려드는 알폰소 10세에게 불만을 품고 카스티야 왕국을 떠나 시칠리아의 만프레디 왕을 섬겼다가 만프레디가 카를루 1세에게 패망하자 다시 콘라딘을 섬겼다가 그 역시 카를루 1세에게 주살되자 카스티야 왕국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들은 산초 왕자를 왕으로 모시고 알폰소 10세를 수도원에 유폐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조기에 발각되었고, 알폰소 10세는 아들 산초에게 이들을 직접 처벌하라고 명령했다. 산초는 이에 순종해 음모자들을 부르고스 인근의 트레비노에서 화형에 처했다.

1277년 6월, 야쿱이 재차 카스티야로 쳐들어왔다. 야쿱이 이끄는 무슬림군은 8월 2일 세비야 외곽에서 카스티야군을 격파하고 과달키바르 강을 따라 몇몇 성채를 공략한 후 8월 29일에 알헤시라스로 개선했다. 10월 30일에 재차 출병하여 아르키도나 부근에서 무함마드 2세와 합류한 뒤 베나메지 성채를 공략했다. 이후 연합군은 코르도바를 포위하고 근교를 약탈했다.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알폰소 10세가 배상금을 지불할 테니 휴전을 맺자고 청하자, 야쿱과 무함마드 2세는 이를 받아들이고 물러났다. 야쿱은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 숙부인 우마르 이븐 야흐야를 알안달루스 총독으로 선임하고,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한 말라가의 타이파 바누 이쉬킬룰라와 동맹을 맺었다.

나스르 왕조의 군주 무함마드 2세는 마린 왕조가 자신의 정적인 비누 이쉬킬룰라와 손잡고 알안달루스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불안을 느낀 끝에 그들과 갈라서기로 하고 알폰소 10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알폰소 10세는 이를 받아들여 세비야 함대 100척을 동원하여 알헤시라스 공격을 준비했다. 1278년 8월 5일, 알폰소 10세는 3만에 달하는 육군을 이끌고 알헤시라스 근교에 당도했고, 24척의 선박과 80척의 갤리선으로 이뤄진 함대가 지브롤터 만을 봉쇄해 마린 왕조의 본토인 북아프리카에서 알헤시라스로 수송하지 못하게 했다. 여기에 무함마드 2세가 말라가로 진격해오자, 야쿱은 일단 무함마드 2세와 화해하기로 하고 말라가 지배권을 포기하고 바누 아쉬킬룰라에 대한 보호를 철회할 테니 카스티야 왕국에 협력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무함마드 2세는 이를 받아들이고 그라나다로 돌아갔다.

알폰소 10세는 무함마드 2세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1년간 알헤시라스를 포위 공격했지만 우마르 이븐 야흐야가 이끄는 수비대의 결사항전으로 인해 좀처럼 공략하지 못했고, 장병들은 물자 부족으로 인한 굶주림과 역병에 시달렸다. 특히 해상 봉쇄를 수행하던 선원들은 괴혈병에 시달린 끝에 선박을 육지로 두고 육상 포위망으로 이동했다. 그 사이 야쿱의 아들 유수프가 72척의 함대를 이끌고 알헤시라스로 이동했고, 무함마드 2세 역시 12척을 보태줬다. 1279년 7월 20일 또는 25일, 나스르 왕조-마린 왕조 연합 함대는 기강이 해이해질 대로 해이해진 카스티야 함대를 습격해 막심한 타격을 입혔고, 사로잡은 적군 중 장교를 제외한 이들을 모조리 살해했다. 이에 사기가 뚝 떨어진 카스티야군은 철수했고, 수비대는 이들을 즉각 추격해 큰 타격을 입혔다. 알폰소 10세는 어쩔 수 없이 마린 왕조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는 대가로 평화 협약을 맺었고, 야쿱은 포위측 진영이 있던 비야 누에바 쪽에 성채를 건설하여 알헤시라스의 수비를 강화했다.

알폰소 10세는 이번 패전은 나스르 왕조의 배신 때문에 야기되었다고 여기고 1280년 아들 산초에게 나스르 왕조의 수도 그라나다를 공격하게 했다. 마침 무함마드 2세와 갈등을 벌이고 있던 야쿱도 알폰소 10세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그해 6월 모슬린 전투에서 산초가 적의 매복에 걸려 패배하자, 1281년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라나다 부근까지 진격했지만 그라나다의 방비가 워낙 강고해서 공략할 가망이 없자 퇴각했다. 그 후 무함마드 2세는 아라곤 왕국의 페드로 3세와 동맹을 맺고 카스티야 왕국을 견제했다.

이렇듯 무슬림과의 전쟁에서 연이어 패배하면서 위신이 떨어진 알폰소 10세에게 또다른 악재가 닥쳤다. 그는 당초 장남 페르난도를 왕위 후계자로 삼았지만, 페르난도는 1275년 빌라 레알에서 마린 왕조군과 대적하던 중 병사했다. 카스티야 관습법에 따르면, 장자가 사망할 경우 차남이 왕위 계승자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가 반포한 신법인 <시에테 파르티다스(Siete Partidas)>에 따르면, 장자가 사망할 경우 장자의 자녀가 왕위를 물려받아야 했다. 알폰소 10세는 처음에는 산초를 왕위 후계자로 지명하기로 했다. 1278년, 산초는 세고비아의 코르테스에서 카스티야 왕국의 차기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비올란테 왕비는 혹여 문제가 생길 가능성을 사전에 배제하기 위해 페르난도의 두 아들 알폰소와 페르난도를 아라곤 국왕 페드로 3세의 궁정에 보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부자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알폰소 10세는 유대인 세금 징수관 이샤크 데 라 멜라하가 산초의 요청에 따라 왕실 수입의 일부를 산초가 진 빚을 갚는 데 쓴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급기야 1279년 7월 알헤시라스 공방전에서 참패한 뒤 이사크가 횡령을 저질러 물자가 부족해지는 바람에 패전을 초래했다는 혐의를 씌워 이사크를 처형했다. 또한 알폰소 10세는 장남 페르난도의 자녀들이 하옌 일대를 독자적으로 이끌도록 해주려 했다. 그러나 산초가 "왕국의 모든 영토는 온전히 국왕 단 한사람만이 이끌어야 한다"며 반대하자, 알폰소 10세는 그가 조카들을 배제하려 든다며 반감을 품었다.

결국 1282년, 알폰소 10세는 세비야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장남 페르난도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페르난도가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새 국왕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에 격분한 산초 왕자는 아버지에게 반감을 품고 있는 귀족들을 결집해 아버지를 상대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바야돌리드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해 아버지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왕이 되겠다고 선포했다. 다수의 귀족과 성직자, 심지어 비올란테 왕비와 마누엘 왕자까지 산초의 편을 들자, 그는 세비야로 피신했다. 하지만 교황 마르티노 4세와 프랑스 국왕 필리프 3세가 알폰소 10세를 지지하고 알폰소 10세의 동맹자였던 야쿱 역시 알폰소 10세를 돕기 위해 개입하려 하자, 반란군은 폐위를 감행하는 대신 타협하기로 했다. 알폰소 10세는 왕위를 유지하는 것을 허용받을 수 있었지만, 치세 내내 실시했던 재정 및 입법 정책을 전면 중단하고 예전의 관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3.4. 산초 4세

1284년 4월 4일, 세비야 궁정에 사실상 유폐된 채 쓸쓸한 말년을 보내던 알폰소 10세가 숨을 거두었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을 심하게 대하는 아들 산초를 저주하고 그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한다는 내용의 유언장을 작성했다. 산초는 아버지의 유언을 무시하고 1284년 4월 30일 툴레도에서 산초 4세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알폰소 10세와 비올란테 왕비의 4남 후안과 로페 디아스 3세 데 하로 등이 선제의 유언을 받들어 찬탈자 산초를 몰아내고 페르난도의 아들들을 왕위에 올리겠다고 선언하며 우클레스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1285년 4월 야쿱이 군대를 이끌고 지브롤터를 건너 헤레스를 포위 공격하고 분견대를 파견해 메디나 시도니아, 카르모나, 에시하, 세비야 일대를 습격했다. 산초 4세는 일단 야쿱부터 물리치기로 하고 세비야에 군대를 집결시킨 뒤 함대를 과달키바르 하구로 보내 적 함대의 세비야 공격을 방지했다.

1285년 8월, 산초 4세는 대군을 이끌고 헤레스 구원 작전에 착수했다. 그때까지 헤레스를 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막대한 손실만 입었던 야쿱은 구원군이 다가오자 알헤시라스로 철수한 후 협상을 제의했다. 그해 10월 양측은 5년간의 휴전에 합의했고, 마린 왕조가 카스티야 왕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대신 카스티야 역시 마린 왕조와 나스르 왕조의 영지를 공격하지 않겠다고 서약했다. 이때 산초 4세는 레콩키스타 전쟁으로 교회가 획득한 안달루스 장서들 중 아랍어 책들을 선물하였고, 야쿱 역시 습격과 약탈로 인한 카스티야 측의 피해에 금전 보상을 해주었다.

이리하여 야쿱을 돌려보낸 산초 4세는 반란군 토벌에 착수했다. 반란군은 압도적인 군세로 몰아붙인 토벌대에게 참패했고, 후안과 로페 디아스 3세 데 하로는 체포되었다. 산초 4세는 로페 디아스를 처형하고 후안을 지하 감옥에 투옥했다. 여기에 조카들을 추종하던 바다호스 시민 4,000명과 탈라벨라 시민 400명, 아빌라와 톨레도의 많은 주민들을 집단 처형했다. 또한 카스티야 왕국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독립을 꾀한 레온과 갈리시아 귀족들의 반란도 진압했다. 1288년, 아라곤 국왕 알폰소 3세가 알폰소 10세의 손자 알폰소 데 라 세르다를 카스티야와 레온의 국왕으로 옹립해 산초 4세에 대적하게 했다. 이로 인해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 사이에 국경 분쟁이 수차례 벌어졌지만 큰 전쟁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1291년 카스티야 왕국과 마린 왕조와의 휴전 협약이 종결되었다. 마린 왕조의 아미르 아부 야쿱 유수프 앗 나스르가 알제리의 도시이자 자얀 왕조의 수도인 틀렘센을 포위 공격하느라 바쁜 사이, 산초 4세는 나스르 왕조의 무함마드 2세와 동맹을 맺고 안달루스의 마린 왕조의 영토인 타리파, 알헤시라스, 론다 공략에 착수했다. 1292년 10월, 산초 4세는 나스르 왕조군의 도움으로 타리파를 공략했다. 이때 그는 나스르 왕조에게 타리파를 넘기기로 약조했지만, 막상 공략한 후에는 자국의 영역으로 삼았다. 이에 분노한 무함마드 2세는 유수프에게 접근해 타리파가 수복되면 마린 왕조가 다시 가지는 것을 받아들이되 알헤시라스와 론다는 자신이 가지는 것으로 합의를 맺었다.

한편, 지난날 산초 4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지하감옥에 투옥되었던 후안은 형의 용서를 받고 풀려났지만 마린 왕조에 사절을 보내 형에게 복수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유수프는 즉각 군대를 일으켜 1294년 안달루스에 상륙하여 후안과 합세한 뒤 타리파를 공격했다. 카스티야 귀족 알폰소 페레스 데 구즈만은 성채에서 완강히 저항했다. 이에 후안이 인질로 잡고 있던 구즈만의 아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하였지만, 구즈만은 오히려 칼을 던져주며 그 칼로 어서 죽이라고 대꾸했다. 이리하여 포위가 좀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을 때, 리프 지역의 베르베르계 와타스 부족이 자얀 왕조의 선동으로 반란을 일으켰다는 비보를 접한 유수프는 어쩔 수 없이 회군하기로 했다. 유수프는 작전의 실패에 크게 좌절했고, 알안달루스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기로 하고 알안달루스 내의 마린 왕조의 영역을 전부 나스르 왕조에 넘기고 북아프리카로 되돌아갔다.

3.5. 페르난도 4세

1295년 4월 25일, 산초 4세가 톨레도에서 사망하고 9살된 아들 페르난도가 페르난도 4세로서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새 국왕이 되었다. 1295년 바야돌리드의 코르테스에서 엔리케 데 카스티야 왕자[4]가 어린 왕의 후견인이 되는 듯했지만, 어머니 마리아가 시민 대표들을 포섭한 끝에 투표에서 앞서면서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산초 4세 치세 때부터 종종 반기를 들었던 후안 왕자[5]가 "산초 4세와 마리아의 결혼은 교황청으로부터 불법으로 간주되었으니[6] 그들 사이에서 낳은 자식은 왕이 될 자격이 없다"라고 주장하며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산초 4세에게 밀려난 뒤 아라곤 왕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알폰소 데 라 세르다[7]를 국왕으로 추대했고, 비스카야의 영주 디에고 로페스 5세 데 하로, 라라 가문의 영주인 누뇨 곤살레스 데 라라, 후안 누녜스 데 라라도 여기에 가세했다. 게다가 카스티야 왕국이 혼란한 틈을 타 이득을 마음껏 보려는 아라곤 왕국, 포르투갈 왕국, 프랑스 왕국이 반란군을 은밀히 지원했다.

1295년, 후안 왕자는 나스르 왕조의 지원을 받으며 바다호스를 공격했으나 함락에 실패했고, 그 대신에 코리아와 알칸타라 성을 공략했다. 이후 포르투갈 왕국에 귀순하면서 카스티야 왕국에 전쟁을 선포하고 알폰소 데 라 세르다를 왕으로 옹립하는 데 동참해달라고 요구했다. 그 해 여름 바야돌리드 코르테스를 마친 마리아 왕비는 엔리케 왕자와 함께 시우다드 로드리고에서 포르투갈 국왕 디니스 1세와 대면했다. 그들은 포르투갈 국왕의 딸 콘스탄사와 페르난도 4세의 결혼을 예정대로 집행하고 페르난도 4세의 누이인 베아트리스를 디니스 1세의 아들 아폰수와 결혼시키기로 합의했다. 이와 동시에, 디에고 로페드 5세 데 하로가 비스카야를 계속 다스리는 것이 허용되었고, 후안 왕자 역시 산초 4세에게 몰수당한 재산을 회복하는 대가로 반란을 멈추기로 했다.

그러나 1296년 초, 후안 왕자는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아스투딜리오, 파레데스 데 나바, 두에냐스를 공략했고, 그의 아들 알폰소는 만실라 데 라스 물라스를 점령했다. 1296년 4월 알폰소 데 라 세르다는 아라곤 국왕 하이메 2세가 빌려준 군대를 이끌고 카스티야 왕국으로 진군해 레온 시로 입성한 뒤 레온과 갈리시아 귀족들로부터 레온, 세비야 갈라시아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 후 후안 왕자와 합세한 뒤 사하군으로 갔고, 이번에는 후안 왕자가 카스티야, 톨레도, 코르도바, 무르시아, 하옌의 왕으로 선포되었다.

국왕을 자처한 두 사람은 마요르가를 포위 공격했지만, 갑작스러운 전염병으로 인해 후안 왕자를 강력하게 지지했던 페드로 데 아라곤 등 수많은 장교와 장병이 병사하면서 기세가 꺾이자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후안 왕자와 후안 누녜스 데 라라는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포르투갈군과 합세해 마리아 왕비와 페르난도 4세가 있는 바야돌리드 시를 공략하려 했다. 아라곤 왕국은 이와 별도로 무르시아와 소리아를 약탈했고, 포르투갈 국왕 디니스 1세는 두에로 강을 따라 진군하며 각지를 약탈했으며, 비스카야 영주 디에고 로페스 5세는 페르난도 4세로부터 사실상 독립했다.

마리아 왕비는 디니스 1세에게 알폰소 데 라 세르다와 후안 왕자에 대한 지원을 계속한다면 전년도에 맺은 협정을 파기하겠다고 경고했다. 이에 디니스 1세는 더 이상 반란군을 돕지 않기로 마음먹고 지금까지 점령한 영토에 관료를 임명한 뒤 본국에 돌아갔다. 포르투갈군이 끝내 오지 않자, 후안 왕자는 레온으로 철수했고 알폰소 데 라 세르다는 아라곤 왕국으로 돌아갔다. 1296년 10월, 마리아 왕비는 반격에 착수해 후안 왕자의 아내인 마리아 디아즈 데 하로가 아들 로페와 함께 있던 파레데스 데 나바를 포위했다.

한편, 엔리케 데 카스티야는 반란군을 지원하는 나스르 왕조와 평화 협정을 맺기 위해 그라나다에 가 있었다. 그는 협상 도중 아라곤 왕국과 포르투갈이 물러났고 마리아 왕비가 친히 파레데스 데 나바를 포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러다간 마리아 왕비에게 완전히 밀려나 페르난도 4세의 가정교사 직마저 잃겠다고 여기고 카스티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나스르 왕조가 카스티야 왕국을 다시 공격하자, 알폰소 페레스 데 구스만과 다른 기사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그들을 물리치기로 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아르요나 전투는 카스티야군의 완패로 끝났고, 엔리케는 알폰소 페레스 데 구즈만이 구출해준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이후 카스티야 왕국으로 귀환한 엔리케는 파레데스 데 나바 공방전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리아 왕비는 이를 강력히 반대했지만, 기사들은 무슬림들이 쳐들어왔는데 내전을 이어가는 것은 무익하다고 여겨 엔리케의 말에 따랐다. 이리하여 정부군은 1297년 1월 파레데스 데 나바 공격을 중단하고 바야돌리드로 귀환했다. 엔리케는 뒤이어 나스르 왕조의 침략을 멈추게 하려면 타리파를 저들에게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타리파를 지키던 알폰소 페레스 데 구즈만이 강력하게 반대해서 무산되었다.

이후 카스티야 왕국과 포르투갈 사이의 국경을 설정하는 알카니케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캄포마요르, 올리벤자, 오우겔라, 산 펠리시아스 데 로스 갈레고스 등 알폰소 10세가 탈취했던 포르투갈 영토를 돌려주고, 알메이다와 카스텔로 봄, 카스텔로 메호르, 케스텔로 로드리고, 몬포르테, 사부갈, 사스트레스 비야 마요르 일대도 포르투갈 국왕에게 넘겨주기로 했다. 그러면서 양국이 영토 분쟁을 벌이는 것을 그만두고, 두 왕국의 고위 귀족과 성직자들은 서로를 지원하고 자신들의 영지와 특권을 지키는 데 서로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이 협약은 두 왕국의 군주뿐만 아니라 카스티야 도시 길드, 카스티야와 레온 귀족들에 의해 비준되었다. 이렇게 정해진 양국의 국경은 현대까지 거의 변경되지 않았기에, 유럽 대륙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는 국경 중 하나가 되었다.

이와 동시에, 페르난도 4세와 콘스탄사의 결혼이 다시 확인되었고, 포르투갈의 왕위 후계자 아폰수와 페르난도 4세의 누이인 베아트리스의 약혼도 확인되었다. 그리고 디니스 1세는 마리아 왕비를 돕기 위해 300명의 기사로 구성된 군대를 파견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포르투갈의 지원을 얻어낸 마리아 왕비는 1297년 말 알폰소 페레스 데 구스만을 레온 왕국으로 보내 레온 영토를 계속 지배하고 있는 후안 왕자를 물리치게 했다. 후안 왕자는 후안 누녜스 데 라라의 지원을 받으며 이에 맞서 싸우면서, 카스티야 왕국의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들기 위해 위조된 동전을 대량으로 주조했다.

1298년, 후안 왕자와의 전쟁이 장기전으로 치닫는 것을 우려한 마리아 왕비는 토로에서 디니스 1세와 재차 만나서 후안 왕자와의 전쟁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디니스 1세는 이를 거절하고 페르난도 4세와 후안 왕자의 화해를 중재하겠다고 제안했다. 후안 왕자는 점령한 영토에서 주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그가 사망한 후에는 그의 영토가 페르난도 4세에게 귀속되기로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야돌리드에 모인 카스티야 코르테스는 마리아 왕비로부터 뇌물을 받고 디니스 1세의 제안을 거부하기로 결의했다. 1298년, 마리아 왕비는 또다른 아들 펠리페를 갈리시아 왕국으로 보내 그곳의 귀족들이 카스티야 왕국에 순응하도록 유도하려 했다. 그러나 레모스와 사리아의 영주 후안 알폰소 데 아부케르케와 페르난도 로드리게스 데 카스트로 등 몇몇 갈리시아 영주들은 펠리페 왕자를 신경쓰지 않고 사실상 독립했다.

1299년 봄, 나스르 왕조의 타이파 무함마드 2세가 이끄는 무슬림군이 마린 왕조의 지원군과 합세한 뒤 세비야 인근에서 카스티야군을 격파했다. 엔리케는 다시 한 번 타리파를 할양하려 했지만 이번에도 반대에 부딪쳐 실패했다. 무함마드 2세는 무력으로 타리파를 탈환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알카우데테를 공략하고 하옌 일대를 약탈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해 4월, 마리아 왕비가 파견한 군대가 알폰소 데 라 세르다 추종자들의 손아귀에 있던 몬손과 베세릴 데 캄포스를 탈환했다. 그리고 카메로스의 영주인 후안 알폰소 데 하로와 알폰소 데 라 세르다의 지지자인 후안 누녜스 데 라라를 체포했다. 여기에 아라곤 왕에게 포위된 로르카를 구출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고, 그해 8월 왕실군을 동원해 팔렌추엘라를 포위 공격했다.

감옥에 갇힌 후안 누녜스 데 라라는 그의 여동생 후아나가 엔리케 왕자와 결혼하고 페르난도 4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다시는 반역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오스마, 팔렌주엘라, 아마야, 두에냐스를 헌납하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마리아 왕비는 이 땅을 충성파 귀족들에게 분배함으로써 자신와 페르난도 4세에 대한 충성심을 확고히 다지려 했다. 1300년 3월, 마리아 왕비는 시우다드 로드리고에서 디니스 1세와 다시 만났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 페르난도 4세와 콘스탄사의 결혼을 수행하기 위해 교황을 매수할 상당한 자금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바야돌리드 회의에서 귀족들을 몰아붙인 끝에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아들과 콘스탄사의 결혼을 합법화하기로 마음먹을 만큼 막대한 뇌물을 준비하게 했다. 당시 기근이 카스티야와 레온 전역에 돌면서 자금 마련이 곤란했지만, 귀족들은 마리아의 강경한 주장에 굴복하여 교황에게 은화 10,000 마르크를 보냈다.

1300년 6월 26일, 후안 왕자는 갈수록 불리해지는 전황에 부담을 느낀 끝에 페르난도 4세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후안 왕자의 소유권은 카스티야 정부에 좀더 일찍 항복한 디에고 로페스 5세 데 하로와 마리아 디아스 데 하로에게 넘어갔다. 얼마 후 마리아 왕비와 엔리케 왕자, 후안 왕자는 디에고 로페스 5세 대 하로와 함께 아직까지 반란을 이어가는 알마산 마을을 포위했지만, 조기에 함락시키지 못하고 엔리케 왕자의 강력한 철수 요구에 따라 물러났다. 1301년 아라곤 국왕 하이메 2세가 군대를 파견해 비예나 공작 후안 마누엘이 소유하고 있던 로르카를 포위하자, 카스티야군은 즉시 반격을 가하여 알카라와 물라 성을 공략한 뒤 하이메 2세가 머물고 있던 무르키아 시를 포위했다. 하지만 아라곤 왕국과 이 이상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던 마리아 왕비는 협상을 제안했고, 하이메 2세는 이를 받아들여 앞으로는 카스티야 왕국을 적대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뒤 물러났다.

1301년 11월,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카스티야 왕국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전 카스티야 국왕 산초 4세와 마리아 데 몰리나 왕비의 결혼을 합법화하고 페르난도 4세의 왕위 계승도 합법적이라는 내용의 칙령을 반포했다. 또한 페르난도 4세와 포르투갈의 콘스탄사의 결혼도 허가했다. 이리하여 1302년 1월 23일, 페르난도 4세는 바야돌리드에서 포르투갈의 콘스탄사와 결혼했다. 후안 왕자는 이 일련의 상황에 불만을 품고 여러 귀족을 포섭해 반란을 또다시 도모했지만, 마리아 왕비가 무장 봉기를 시사하는 귀족들을 어르고 달래며 상당한 뇌물을 건네자 귀족들이 마음을 금세 바꿔먹는 바람에 실패했다. 1302년, 나스르 왕조의 무함마드 2세는 아라곤 국왕 하이메 2세와 연합해 카스티야 왕국을 협공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출진하기 직전에 67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1303년 초, 페르난도 4세는 포르투갈의 왕위 후계자 아폰수와 페르난도 4세의 누이인 베아트리스의 결혼을 진행시키는 것을 논의하기 위해 포르투갈 국왕 디니스 1세와 바다호스에서 만났다. 이때 그는 디니스 1세가 일전에 가져간 영토 일부를 되돌려주기를 희망했지만, 디니스 1세가 단지 "그대가 위급한 상황이 되면 도와주겠다"고 할 뿐 영토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자 매우 실망했다. 그러는 사이, 엔리케 왕자와 디에고 로페스 5세, 후안 마누엘이 로아 데 두예로에서 회담을 갖고 장시간 논의한 끝에, 알폰소 데 라 세르다가 레온의 왕이 되어 페르난도 4세의 누이인 이사벨과 결혼하고, 페르난도 4세의 남동생 페드로는 카스티야 왕으로 선포되고 아라곤 국왕 하이메 2세의 딸과 결혼시키기로 합의했다. 그러면서 하이메 2세와 접촉할 인사로는 후안 마누엘이 선정되었다.

엔리케는 나중에 바야돌리드로 가서 마리아 왕비에게 자신들의 계획을 설명하면서, 이것은 왕국의 평화를 이뤄내고 마리아 왕비의 자녀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마리아 왕비는 카스티야 연합 왕국이 해체되는 상황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거부했다. 당시 후안 왕자와 친밀해진 페르난도 4세도 후안 왕자와 화해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주장했지만, 마리아는 이번에도 거절했다. 마리아가 계속 반대해서 계획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자, 엔리케, 후안 마누엘을 비롯한 여러 귀족들은 페르난도 4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고 무르시아 일대를 아라곤 왕국에 넘기고 하엔 왕국을 알폰소 데 라 세르다에게 넘기는 대가로 아라곤 왕국의 지원을 얻어내기로 했다. 그러나 엔리케 왕자는 곧 심각한 병에 걸려 본거지인 로아에 돌아갔다가 곧 사망했고, 그의 영지는 마리아 왕비에 의해 왕실의 직할지로 회수되었다.

한편, 나스르 왕조에서는 무함마드 2세 사후 아들 무함마드 3세가 타이파에 올랐다. 그는 아버지가 벌인 카스티야 왕국과의 전쟁을 이어갔다. 함무 이븐 압둘 학크 이븐 라후가 이끄는 나스르군은 베드마르 등 하옌 인근의 성들을 공략했다. 그러나 1303년 잇따르는 반란에 직면한 무함마드 3세는 카스티야 왕국과 협상하기로 했다. 페르난도 4세가 파견한 사절단의 대표 페르난도 고메스 데 톨레도는 그라나다가 점령한 영토를 그대로 인정하기로 했고, 무함마드 3세는 그 대가로 자신이 카스티야 국왕의 봉신이 되고 매년 공물을 바치겠다고 약조했다.

이리하여 나스르 왕조와의 전쟁을 마무리지은 페르난도 4세는 아라곤 국경지대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이에 위협을 느낀 아라곤 국왕 하이메 2세는 협상을 요청했고, 1304년 두 국왕은 토랄레스 협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에 따르면, 아라곤 왕국이 1296~1300년 사이에 카스티야 왕국의 내전을 틈타 빼앗아갔던 무르시아 주요 지역을 카스티야 왕국이 돌려받되 카르타헤나, 오리후엘라, 엘체, 카우데테, 엘다, 알리칸테 등지는 아라곤 왕국으로 귀속되었다. 그럼에도 국경 분쟁이 여전히 지속되자, 1305년 5월 19일 토랄레스 협약을 수정한 엘체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협약에서는 카르타헤나가 아라곤 왕국의 영역에서 카스티야 왕국으로 돌아가며, 양국의 경계는 세구라 강으로 정하기로 했다. 또한 알폰소 데 라 세르다는 알바, 베야르 및 지브랄레온 일대의 영주권을 확보하는 대가로 카스티야 왕위 계승을 더이상 주장하지 않기로 했다.

이리하여 아라곤 왕국과의 분쟁을 최종적으로 마무리지은 페르난도 4세는 어머니에게 압력을 행사해 정치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고 조용한 곳에서 여생을 보내게 했다. 그 후 내전이 한창일 때 카스티야 왕국의 남부 지역을 잇따라 공격한 나스르 왕조를 정벌하기로 마음먹었다. 1308년 12월, 그는 아라곤 국왕 하이메 2세와 알칼라 데 에나레스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양국은 나스르 왕조를 협공하며 단독으로 강화를 체결하지 않고, 나스르 왕조의 영역을 분할 점령하기로 했다. 1309년 봄,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은 함대를 집결시켜 그라나다 습격을 준비했다. 무함마드 3세는 낌새를 눈치채고 전쟁 준비에 나섰으나, 그해 3월 14일 궁정 쿠데타로 인해 폐위되고 나스르가 타이파에 올랐다.

무함마드 3세의 갑작스런 폐위로 인해 나스르 왕조가 혼란에 빠져 조직적인 저항을 할 수 없게 되자, 페르난도 4세는 이 때를 틈타 원정을 감행해 지브롤터 공략에 성공했다. 그러나 뒤이은 알헤시라스 공략은 수비대의 결사항전으로 인해 좀처럼 함락시키지 못하다가 후안 왕자가 도중에 이탈하는 바람에 군대의 사기가 떨어지자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한편 아라곤군 역시 알메리아를 공격했지만 함락에 실패하자, 앞서 맺었던 협약을 깨고 나스르 왕조와 휴전을 맺고 물러났다. 이후 나스르는 마린 왕조가 두 나라와 연합하여 공격해오는 것을 사전에 막기 위해 알헤시라스, 론다, 세우타를 마린 왕조에 넘기는 대가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1311년 1월, 나스르 왕조를 상대로 재차 원정을 떠난 페르난도 4세는 부르고스에 당도한 뒤 알헤시라스 공방전 중 탈영해버린 후안 왕자와 국왕에게 사사건건 반기를 든 자들을 모조리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후안 왕자가 이를 눈치채고 살다냐 시로 도망치자, 페르난도 4세는 후안의 지지자들을 심하게 박해했다. 뒤이어 후안 왕자에게 부여된 모든 특권과 칭호를 박탈하고 그와 그의 아들 알폰소의 재산을 몰수했다. 여기에 후안 왕자를 따라 살다냐로 도주한 동생 페드로의 '마요르(Mayor, 최고 관료)' 직책을 박탈하고 비예나 공작 후안 마누엘에게 넘겼다.

그러나 후안 마누엘이 왕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고 후안 왕자와 손잡고 다른 귀족들도 왕이 자신들까지 해치려들 것을 우려해 반기를 들 준비를 하자, 나스르 왕조와의 전쟁에 전념하길 원했던 페르난도 4세는 은퇴 생활을 보내던 어머니 마리아를 소환해 이들과 협상하게 했다. 15일간 협상한 끝에 후안 왕자와 그의 아들 알폰소의 칭호를 복구하고 재산을 돌려주며, 귀족들은 왕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바친다는 내용의 평화 협약을 맺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이 일로 페르난도에게 불만을 품은 귀족들은 1311년 가을 후안 왕자와 후안 누녜스 2세 데 라라 등의 주도하에 페르난도 4세를 타도하고 페드로를 왕으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몄지만, 페드로의 양육을 담당하던 마리아 왕비가 완고하게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 이에 귀족들은 페르난도 4세에게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를 섬기는 것을 중단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위협했고, 페르난도 4세는 그들의 뜻에 따라 귀족, 고위 성직자, 도시 신하의 관습, 후예 및 특권을 존중하고 귀족이 왕실에 속한 지대와 토지를 박탈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며, 후안 왕자에게 사과의 뜻으로 폰페라다 시를 양도했다.

1311년 12월, 페르난도 4세는 아라곤 국왕 하이메 2세와 칼라타유드에서 대면했다. 두 사람은 하이메 2세의 딸 마리아와 페르난도 4세의 동생 페드로를 결혼시키기로 합의했고, 그라나다 왕국과의 전쟁을 재개하기로 했다. 이듬해인 1312년 당숙이자 매부인 아부 사이드 파라즈가 말라가에서 반란을 일으켜 그라나다를 포위하자, 나스르는 페르난도 4세에게 구원군을 요청했다. 그는 이를 기회로 여기고 공세에 착수해 알카우데테를 포위 공격했다. 1312년 9월 5일 3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항복을 받아낸 뒤, 하옌으로 돌아가서 후속 병력을 집결시켜 그라나다로 진군하려 했지만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중단되었다.

3.6. 알폰소 11세

1312년 9월 7일, 페르난도 4세는 하옌 시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아무도 그가 죽은 순간을 목격하지 못했기에, 왕이 왜 죽었는지에 대해 수많은 가설이 제기되었지만 진실은 현재까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사후 유일한 아들인 알폰소 11세가 1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고, 할머니 마리아 데 몰리나와 어머니 콘스탄사의 섭정을 받았다. 1313년 11월 18일 어머니 콘스탄사가 사망한 후 마리아가 단독으로 섭정했고, 페르난도 4세의 동생 페드로와 알폰소 10세의 아들 후안 왕자가 후견인이 되었다.

그러나 페드로와 후안 왕자는 최고 권력을 놓고 치열한 암투를 벌였고, 1318년에는 카스티야 왕국 내 바야돌리드와 레온 왕국 내 메디나 델 캄포에서 별도의 코르테스가 소집되어 지지자들을 규합하고 서로를 비방했다. 마리아 왕비의 중재로 내전으로 확산되는 것은 가까스로 모면했지만, 왕국 내부의 갈등은 갈수록 고조되었다. 두 사람은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나스르 왕조에 대한 습격 원정을 몸소 지휘했다.

1319년 늦봄, 페드로와 후안은 합동으로 그라나다에 대한 대규모 원정을 감행하기로 합의했다. 교황 요한 22세는 이 원정을 축복했고, 교회는 십일조를 원정군에 보내기로 했다. 1319년 6월 코르도바에 집결한 원정군은 페드로의 지휘하에 국경을 넘었고, 후안이 별동대를 이끌고 뒤를 따랐다. 여기에 산티아고 기사단, 칼라트라바 기사단, 알칸타라 기사단이 함께 했으며, 톨레도와 세비야 대주교도 동행했다. 원정군은 행군하는 동안 여러 마을을 습격해 많은 양의 약탈물을 수집했다. 그러다가 베가 데 그라나다에 도착해 인근 지역을 약탈했지만, 그라나다의 방비가 강고한 것을 보고 지금까지 확보한 전리품에 만족하고 카스티야 왕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1319년 6월 25일, 원정군은 귀환길에 올랐다. 이때 나스르 왕조의 타이파 아불 왈리드 이스마일은 반격을 가하기로 마음먹고, 아부 사이드 우트만 이븐 아비 알 울라[8]가 정예 아랍 기병대를 이끌고 출격해 후퇴하는 적군을 괴롭혔다. 카스티야 장병들이 약탈물을 지키는 데만 혈안이 되어 제대로 방비하지 못하자, 우트만은 전군에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위기에 빠진 후안은 선봉을 이끌던 페드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페드로는 후안이 이참에 큰 손실을 입기를 바랐기에 일부러 시간을 끌다가, 장군들의 거듭된 재촉에 못 이겨 후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접전을 치르던 중 말에서 떨어져 죽임을 당했고, 병사들은 공황 상태에 빠져 허겁지겁 도망치다가 게닐 강을 급하게 건너던 중 익사하거나 아군 장병들에게 짓밟혀 죽었다. 후위대 역시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한 채 궤멸되었고, 후안은 적을 피해 정처없이 달아나다가 뇌졸중 또는 열사병으로 쓰러져 죽었다. 이 전투에서 카스티야군의 손실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수년간 국경을 지킬 인력이 너무 부족해서 무슬림군이 마음껏 약탈을 자행할 수 있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실로 막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을 보좌하며 귀족들의 리더를 자처하던 두 사람이 한꺼번에 사라지자, 카스티야 왕국은 깊은 충격과 혼란에 빠졌다. 1319년 8월 26일 안달루시아 도시 대표들은 페냐피엘에서 긴급 회의를 소집한 뒤 앞으로 닥칠 권력 공백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일련의 예방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그들은 페드로 폰세 데 레온 델 비예호와 후안 폰세 데 카브레라 등 저명한 귀족들에게 국경 수비를 일임하기로 했고, 왕실 수입에 대한 사용을 통제하고 육지와 해상 경계를 강화하기로 했다. 여기에 각 도시의 '형제단'이 공동으로 어린 왕을 보좌하며, 형제단 중 누구도 단독으로 왕의 후견인을 수행하기를 열망하는 자를 지지하지 않기로 했다.

페드로와 후안 왕자 사후, 페르난도 3세의 손자이며 알폰소 10세의 조카인 후안 마누엘과 페르난도 4세의 동생인 펠리페가 대두되었다. 그들은 교황청과 유럽 각지에 십자군을 요청하는 한편, 나스르 왕조와 평화 협정을 맺고자 노력했다. 카스티야 왕국엔 그나마 다행히도, 나스르를 몰아내고 타이파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스마일이 카스티야 왕국을 상대로 전쟁을 이어가는 것보다는 반대 세력을 모조리 제압하여 입지를 굳히는 데 중점을 두기로 했기에 협상이 진전되었다. 1320년 6월 18일, 카스티야 왕국과 나스르 왕조는 8년간 휴전 협정을 맺기로 합의했다. 이 협정을 이뤄내는 데 공헌한 후안 마누엘은 자신의 딸 콘스탄사 마누엘을 알폰소 11세와 결혼시킴으로써 위신을 드높였다.

그러나 페드로와 후안 왕자가 그랬듯이, 펠리페와 후안 마누엘은 곧 정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지자들을 가능한 한 많이 규합하여 최고 권력을 얻고자 했으며, 각자가 서명한 계약을 존중하지 않고 지지자들의 지원을 받으며 서로를 공격했다. 대귀족들은 중앙 정부가 혼란에 빠지자 세금을 제대로 바치지 않고 자기 영지에서 왕처럼 군림했다. 마리아 데 몰리나 왕비는 이런 상황을 수습하려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 1321년 7월 1일에 사망했고, 어린 왕은 궁궐 한 구석에 틀어박혀 지냈다. 나스르 왕조의 타이파 이스마일은 카스티야 왕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1324년 휴전 협정을 깨고 침략을 감행해 1325년까지 바자, 오르체, 우에스카르, 갈레라, 마르토스 등을 공략했다.

1325년, 알폰소 11세는 아직 14세가 되지 않은 시점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친정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해 8월 바야돌리드의 코르테스에서 자신이 성년이 되었다고 선언하고 왕으로서 선서했다. 그 후 왕실의 군대를 장악한 그는 통제에 따르지 않은 몇몇 귀족들을 잡아들여 처형해 왕의 권위를 강화하려 애썼다. 그러던 중 하로 가문의 수장이자 케야르 영주인 후안이 그를 이용해 카스티야 왕위를 꿰차려는 마음을 품은 아라곤 국왕 알폰소 4세의 회유를 받아들여 알폰소 4세의 딸 블랑슈와 결혼하려 하자, 알폰소 11세는 위기감을 느꼈다. 만약 이 결혼이 성사된다면, 아라곤 왕국과 하로 가문이 손잡고 카스티야 왕위를 노릴 테고, 그는 도저히 막아낼 수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강력한 위세를 떨치는 하로 가문의 수장을 대놓고 처형하는 건 무리라는 것을 잘 알았던 그는 책략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1326년 10월, 알폰소 11세는 토로에서 후안 데 하로와 만나 "내 누이와 결혼하는 것이 어떻겠나"라고 제안했다. 후안이 이에 긍정적인 입장을 표하자, 그는 궁궐에서 개최될 연회에 초대할 테니 거기서 좀더 자세히 논의하자고 권유해 승낙을 얻어냈다. 후안이 별다른 의심 없이 그해 11월 1일 연회에 참석하자, 알바 누녜스 오소리오가 이끄는 왕실 근위대가 습격해 후안 데 하로와 두 명의 기사 가르시아 페르난데스 사르미엔토, 로페 아즈나레스 데 페르모셀을 처단했다. 이후 알폰소 11세는 알바 누녜스 오소리오에게 후안 데 하로가 소유했던 모든 영지를 수여했다. 그는 이후에도 몇몇 귀족들을 상대로 암살을 감행했고, 어린 왕을 우습게 여기던 귀족들은 그제야 두려움을 느끼고 왕에게 복종했다.

그러나 후안 마누엘 만큼은 쉽사리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카스티야군이 베자 데 그라나다 전투에서 궤멸된 뒤 다들 무슬림군의 침략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슬림군을 상대로 선전했고, 1326년 8월 29일 과달오르세 전투에서 우트만을 상대로 적병 3,000명을 사살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327년 알폰소 11세가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4세의 딸인 마리아와 결혼하기 위해 자신의 딸 콘스탄사와의 결혼을 무효로 해버리자, 후안 마누엘은 이에 분노해 나스르 왕조와 손잡고 반기를 들었다가 교황청의 중재로 왕과 화해했다. 후안 마누엘은 이후에도 알폰소 11세와 여러 차례 마찰을 벌였고, 1332년에는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4세와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다. 알폰소 11세는 그가 없이는 나스르 왕조의 침략을 저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직위를 일시적으로 박탈하고 유폐시켰다가 나중에 레콩키스타를 단행했을 때 사면시키고 원정군에 동행시키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한편, 나스르 왕조는 내란에 휩싸였다. 베자 데 그라나다 전투의 영광을 얻어냈던 이스마일이 1325년 암살당한 뒤 10살의 아들 무함마드 4세가 새 타이파로 즉위했다. 어린 술탄을 두고 와지르 (재상) 무함마드 이븐 알-마흐루크와 장군 우스만 이븐 아불 알라는 국정 주도권을 두고 서로 내전을 벌였다. 우스만 이븐 아불 알라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말라가로 후퇴한 뒤 1327년 무함마드의 숙부인 무함마드 빈 파라즈를 대립 술탄 알-카임 비아므랄라로 선포하고 알폰소 1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무함마드 이븐 알 마흐루크는 마린 왕조의 술탄 아부 사이드 우스만 2세에게 론다, 마르벨라, 알헤시라스 등의 할양을 대가로 원군을 청했다. 그는 이 때를 틈타 엘비라 성채를 공략하는 등 이득을 챙겼다.

1328년 무함마드 4세와 우스만이 비밀 협정을 맺고 각각 재상 이븐 알-마흐루크의 살해와 대립 술탄 알-카임의 축출을 이행하면서 내전이 종결되었다. 하지만 나스르 왕조는 내전으로 인해 쇠락해졌고, 알폰소 11세는 레콩키스타를 계속 이어가기로 했다. 1330년, 알폰소 11세는 아라곤 국왕 알폰소 4세와 연합하고 그라나다를 함께 침공했다. 카스티야 군은 테바를 점령했고, 우스만은 카스티야군과의 전쟁에서 연전연패한 뒤 얼마 후 사망했다. 무함마드 4세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막대한 공물을 매년 바치겠으니 평화 협정을 맺어달라고 호소했고, 알폰소 11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1331년 카스티야군이 협정을 깨고 재침해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무함마드 4세는 1332년 마린 왕조의 신임 술탄 아불 하산 알리에게 직접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다. 1333년, 아불 하산 알리는 아들 아부 말리크 압둘와히드의 지휘 하에 5천 병력을 보내어 카스티야령 지브롤터를 점령했다. 이 소식을 접한 알폰소 11세가 지브롤터를 포위했지만 무함마드가 보급로를 차단하자 1333년 8월 휴전 협정을 맺고 철수했다. 이리하여 무함마드 4세는 위기를 벗어났지만, 얼마 후 마린 왕조와의 동맹을 반대한 신하들에게 피살되었다.

이렇듯 알폰소 11세는 준수한 통치력과 군사적 재능을 갖춘 군주였지만, 남편과 아버지로서는 좋게 평가받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1327년 아폰수 4세의 딸 마리아와 결혼해 페르난도(1332 ~ 1333)와 페드로(1334 ~ 1369)를 낳았지만, 정부로 삼은 레오노르 데 구즈만에게 흠뻑 빠져 사생아를 10명이나 낳았다. 급기야 마리아 왕비를 세비야의 산 클레멘테 수녀원에 보내버리고 페드로를 궁궐 밖으로 내보내고 제대로 된 교육도 시켜주지 않았다. 아폰수 4세는 알폰소 11세에게 레오노르와의 관계를 끊고 딸을 아껴달라고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1334년 2월 나스르 왕조의 새 타이파 아불 핫자즈 유수프와 평화 협약을 맺고 한동안 내치에 전념한 알폰소 11세는 1340년 아불 핫자즈 유수프가 마린 왕조 술탄 아불 하산 알리와 손잡고 타리파를 포위하자 친히 군대를 이끌고 진격했다. 이때 그로부터 원군을 요청받은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4세는 "내 딸 마리아를 박대하고 정부와 놀아나는데 무슨 염치가 있어서 원군을 보내라고 요구하느냐?"라고 비난했다. 알폰소 11세는 아폰수 4세로부터 원군을 어떻게든 받아내야 했기에, 수녀원에 가 있던 마리아 왕비를 설득해 아버지에게 가서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게 했다. 그러면서 원군을 보내준다면 레오노르와 사생아들을 추방하고 마리아에게 왕비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대우를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아폰수 4세는 이를 믿고 원군을 보내줬고, 카스티야-포르투갈 연합군은 1340년 10월 살라도 전투에서 나스르-마린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그러나 알폰소 11세는 적군을 물리친 후 앞서 맺었던 약속을 무시하고 레오노르를 계속 총애했다.[9]

알폰소 11세는 살라도 전투에서 완승을 거둔 여세를 이어가 알카자 데 벤자이데, 로쿠빈, 프리에고, 베나메히 등을 점령했고, 1342년부터 알헤시라스를 포위해 2년간 공성전을 치른 끝에 1344년 3월 공략에 성공했다. 이후 나스르 왕조와 10년간 평화 협약을 맺은 그는 마침 발발한 백년 전쟁에서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 중 어느 한 쪽도 지지하지 않고 중립을 유지했다. 그러면서도 플랑드르 도시들의 양모 판매를 금지한 잉글랜드의 조치를 이용해 양모 수출을 크게 늘림으로써 왕국의 재정을 눈에 띄게 개선시켰으며, 브뤼헤 같은 항구 도시에 카스티야 출신 상인들이 모여사는 거주지를 신설했다.

1348년, 알폰소 11세는 32개의 목차와 125개의 법률로 이뤄진 알칼라 조례를 반포했다. 이 법은 왕권 행사의 정당성을 설파하고 민법, 행정법, 사법, 요새 설립 등 다양한 분야를 다뤘다. 또한 이 법령에서 법률이 적용되는 우선 순위가 결정되었다. 첫번째는 국왕의 명령 자체에 포함된 법률이고, 그 다음은 지방 자치 특권에 해당하는 법률이며, 마지막으로 알폰소 10세가 반포한 <시에테 파르티다스(Siete Partidas)>가 적용되었다.

1349년, 알폰소 11세는 마린 왕조의 아불 하산 알리가 반란군에게 폐위된 틈을 타 지브롤터 탈환에 착수했다. 그러나 지브롤터는 쉽사리 공략되지 않았고, 아불 핫자즈 유수프는 카스티야 변경을 공격하며 후방을 교란했다. 그러던 1350년 3월 26일, 알폰소 11세는 진영에 창궐한 중세 흑사병에 걸려 3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후 카스티야 연합 왕국은 심각한 내전에 휘말렸다.

3.7. 페드로엔리케 2세의 내전

알폰소 11세 사후, 알폰소 11세에게 박대받던 페드로가 알폰소 11세가 남긴 유일한 적자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오랜 전쟁과 흑사병으로 국가 재정이 파탄난 것을 고려해 전쟁을 그만두기로 하고 나스르 왕조, 마린 왕조와 협상을 벌인 끝에 7월 17일에 평화 협약을 맺었다. 또한 자신의 가정교사이자 어머니의 고문이었던 후안 알폰소 데 알부케르케를 궁재로 삼고 그에게 통치를 위임했다.

한편, 아버지의 유해를 세비야 대성당에 안장하고 장례식을 거행한 페드로는 트라스타마라에 머물고 있던 레오노르에게 장례식에 참석하라고 통보했다. 레오노르는 처음엔 신변에 해를 입을 것을 우려해 가지 않으려 했지만, 아들 엔리케가 세비야로 가서 융숭한 대접을 받자 마음을 놓고 세비야로 향했다. 그러나 세비야에 도착한 레오노르는 오래 전부터 그녀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마리아 왕비의 명령으로 체포된 뒤 레알 알카사르의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다.

어머니가 수감당하자 반감을 품은 엔리케는 카스티야에서 강력한 위세를 떨쳤던 귀족 후안 마누엘의 딸 후아나 마누엘 데 빌레나와 비밀리에 결혼하고 아스투리아스로 피신한 뒤 추종자들을 모집했다. 많은 귀족들은 비록 사생아이지만 부모 모두 카스티야인인 엔리케가 어머니가 포르투갈 사람인 페드로보다는 낫다고 여겼고, 포르투갈 귀족 후안 알폰소가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레오노르와 엔리케를 지지했다.

1350년 8월 중순, 페드로는 중병에 걸려 며칠 간 사경을 헤맸다. 많은 이들은 왕이 만약 죽는다면 그의 사촌이자 알폰소 11세의 조카인 토르토사 후작 페르난도를 옹립하자고 주장했고, 다른 이들은 페르난도 4세를 상대로 왕위 계승 전쟁을 벌이다가 상당한 영지를 받는 대가로 카스티야 왕위를 포기했던 알폰소 데 라 세르다의 후손인 후안 누녜스 데 라라를 왕으로 옹립하자고 제안했다. 며칠 후 페드로가 회복되면서 이러한 논의는 중단되었다. 그러나 페르난도와 후안 누녜스 데 라라는 이 일로 페드로 정권의 경계 대상으로 낙인찍혔다.

1350년 11월 말, 후안 누녜스 데 라라가 부르고스에서 35살의 나이로 돌연 사망했다. 이에 후안 누녜스의 측근이었던 가르실라소 2세 데 라 베가가 "주군께서 페드로 왕에게 암살당했다!"라고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페드로는 즉각 진압에 착수해 1351년 5월 부르고스를 함락하고 가르실라소 2세를 체포한 뒤 기사들을 시켜 길거리에서 그를 몽둥이로 마구 쳐서 죽게 했다. 또한 후안 누녜스의 3살된 아들 누뇨 디아스 데 하로의 영지를 몰수했다. 누뇨는 바스크의 베르메오 마을로 도망쳤지만 2년 후 그곳에서 요절했다.

이후 바야돌리드 코르테스에 참석한 페드로는 후안 알폰소 데 알부케르케가 정한 대로 흑사병 창궐로 인한 노동력 부족을 완화하기 위해 길드를 정식으로 인가하고 유랑민들에게 정착을 권했으며, 계절마다 노동과 휴식 시간을 정하고 물품이나 제품의 가격을 고정하기로 했다. 또한 사법 행정이 재편되었고 상업, 농업 및 가축의 진흥을 위한 법령이 발행되었으며, 유대인을 학대하는 자들을 처벌하고 유대인들의 신변과 재산을 지켜주겠다고 선언해, 많은 돈을 지닌 그들의 협조를 받아내고자 했다.

이때 마리아 왕비는 바야돌리드 코르테스에 참석하고자 여정을 떠나면서 레오노르를 '전리품' 삼아 데려갔다. 레오노르는 도중에 레레나(Llerena)에서 산티아고 기사단장이자 자신의 아들인 파드리케를 만났다. 파드리케는 마리아로부터 새로운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라는 강요를 받고 이를 이행한 뒤 레오노르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코르테스에 도착한 마리아는 레오노르가 귀족들이 왕에게 반역하도록 선동하여 일을 키웠다고 비난하면서 그녀를 왕국을 좀먹는 질병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코르테스에 참석한 이들은 마리아 왕비의 강력한 압력에 따라 그녀를 반역자로 선고하고 텔라베라 데 라 레이나에 종신형에 처하기로 했다. 그러나 마리아 왕비는 이걸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1351년 여름 아들의 동의를 얻어 레오노르를 처형했다.

아스투리아스에서 어머니가 끝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엔리케는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히온을 공략하는 등 기세를 떨쳤으나 아빌레스와 오비에도 공략에 실패해 더 이상 세력을 키우지 못하다가 1352년 6월 토벌대의 공격을 받아 패배를 면치 못하자 포르투갈로 망명했다가 나중에 페드로의 용서를 받고 카스티야로 돌아왔다. 이후 페드로는 왕위를 굳히기 위해 프랑스 왕국과 손을 잡으라는 조언을 받아들여 프랑스 왕국과 협상한 끝에 1352년 7월 부르봉 공작 피에르 1세의 딸이자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조카인 블랑슈와 약혼했다.

당시 프랑스 국왕 장 2세는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카스티야 왕국의 지원을 필요로 했기에, 이 결혼을 반드시 성사시켜야 한다고 여겼다. 그는 지참금으로 다음 크리스마스에 25,000 길더, 블랑슈가 프랑스 왕국을 떠났을 때 25,000길더, 이후 매년 크리스마스에 50,000길더씩 보내 총 300,000 길더를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이 막대한 돈을 받게 된 것에 고무된 페드로는 아빌랴, 세풀베다, 세고비야, 레온 등 여러 마을의 수입을 아내에게 지참금으로 양도하겠다고 약속했다. 여기에 블랑슈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는다면 모든 지참금을 프랑스 왕국에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1353년 1월, 블랑슈는 바르셀로나에 도착하고 2월에 바야돌리드에 이르렀다. 그러나 장 2세가 약속과는 달리 지난 크리스마스 때 25,000 길더를 보내주지 않자, 페드로는 결혼을 연기했다. 사실 페드로는 1352년 여름에 이복 형제 엔리케의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 아스투리아스 원정을 따났을 때 카스티야 귀족 집안인 파디야 가문의 일원이었던 마리아 데 파디야와 연인이 되었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보았다. 그는 내심 블랑슈와의 결혼 계약을 파기하고 마리아 데 파디야와 결혼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어머니 마리아와 후안 알폰소 데 알부케르케의 강력한 압력에 직면하자, 결국 결혼을 진행하기로 했다.

1353년 6월 3일, 페드로와 블랑슈의 결혼식이 바야돌리드에서 거행되었다. 그러나 결혼식 이틀 후 더 이상 그녀와 함께 살기를 거부하고 아내를 별궁에 가두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6세는 서신을 보내 블랑슈를 합법적인 아내로 맞이하라고 권고했지만, 페드로는 "그녀의 확실한 고백으로 내가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결혼을 지속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블랑슈가 무엇을 고백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장 2세가 주기로 한 지참금이 좀처럼 오지 않자 자신이 속았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일각에서는 그녀가 파드리케와 불륜을 저질렀다고 의심했을 거라고 추정한다.[10] 블랑슈는 남편에게 외면당한 뒤 메디나 시도니아에서 페드로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지내다가 나중에 아레발로 성에 감금되었다.

1354년 초, 페드로는 칼라트라바 기사단장 후안 누녜스 데 프라도를 해임하고 정부로 삼은 마리아 데 파디야의 형제인 디에고 가르시아 데 파디야를 칼라트라바 기사단장으로 선임했다. 후안 누녜스 데 프라도는 왕의 숙청을 피해 아라곤 왕국으로 피신했다가 나중에 알마그로로 이동했다가 체포된 후 감옥에서 살해되었다. 뒤이어 후안 알폰소 데 알부케르케를 해임하여 포르투갈로 돌려보내고 마리아 데 파디야의 친족들을 주요 직책에 앉혔다. 또한 후안 알폰소가 영지로 삼았던 플라자 데 메델린을 공략하고 그곳을 지키던 장교들이 저항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처형했다. 후안 알폰소 데 알부케르케는 이에 격분해 엔리케 왕자의 편으로 돌아섰다.

1354년 봄, 페드로는 레모스, 몬포르테, 사리아의 영주인 페드로 페르난데스 데 카스트로의 딸 후아나 데 카스트로와 결혼했다. 교황청으로부터 결혼 무효를 승인받지도 않은 상황이었지만, 그는 블랑슈와 사실상 결별했다며 산 마르틴 데 쿠엘라르 성당에서 결혼식을 거행했다. 후아나는 페드로와의 사이에서 후안을 낳았지만, 페드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에게 관심을 거두고 마리아 데 파디야와 사랑을 나누었다. 후아나의 형제인 페르난도 루이스 데 카스트로는 이에 분노해 지난날 페드로의 어머니 마리아 왕비에게 살해된 레오노르의 자식들과 후안 알폰소 데 알부케르케, 그리고 아들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뒷방 늙은이 취급받는 것에 반감을 품은 마리아 왕비와 함께 음모를 꾸몄다.

1354년 10월 반란 세력의 리더를 맡았던 후안 알폰소 데 알부케르케가 갑작스럽게 사망했지만, 다른 음모자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획대로 시우다드 로드리고를 근거지로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 세력이 삽시간에 카스티야 북부 대부분을 장악해버리자, 페드로는 반란을 진압하려 애썼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페드로는 그때까지 아레발로 섬에 감금되어 있던 블랑슈를 알카사르 데 톨레도 성에 이송시키기로 했다. 블랑슈는 톨레도에 도착한 직후 기사들을 설득해 자신을 감옥에서 빠져나오게 한 뒤 교황 인노첸시오 6세에게 페드로가 자신을 무자비하게 학대했다고 호소하는 서신을 보내는 한편 지역 귀족과 시민들에게 자신을 지켜달라고 요청했다. 알폰소 11세와 레오노르의 아들 파드리케는 즉시 700명의 기사와 함께 톨레도로 가서 블랑슈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급기야 페드로를 충실히 따랐던 이들마저 마리아 데 파디야와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고 그녀의 친족들을 내치고 블랑슈를 맞이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충성하지 않겠다고 통보하자, 페드로는 토르데시야스로 피신했다가 다시 토로의 견고한 성채로 피신했다. 이후 반란군에게 포위된 그는 성채에 의존해 항전하면서, 그들을 용서할 의향은 있지만 마리아 데 파디야와 절대로 헤어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반군이 마리아를 해쳤을까 봐 걱정이 됐는지, 그는 토로 요새를 은밀히 떠나 마리아가 있는 우루에냐로 향했다. 그 사이, 페드로와 함께 있던 마리아 왕비는 토로의 성문을 열어줬다. 이리하여 토로를 장악한 반란군은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서, 당장 이곳으로 와서 자신들의 뜻에 복종하라고 요구했다.

페드로는 어쩔 수 없이 토로로 돌아갔다가 체포된 후 사모라 주교의 집에 감금되었지만 어느정도의 자유를 보장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사냥을 하면서 유유자적한 모습을 보이는 한편, 음모가들끼리 서로 권력 다툼을 벌이도록 이간질해 일부 구성원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 결과 알폰소 11세와 레오노르 왕비의 사생아들에게 상당한 영지와 권력을 양도하는 대가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그는 1355년 초 토로에서 탈출한 뒤 부르고스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해 군대를 무장시키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보조금을 받아냈다.

엔리케 왕자는 토로에서 톨레도로 이동해 페드로에 대한 저항을 이어가려 했다. 그러나 그곳 주민들은 페드로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하고 그를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이에 엔리케는 무력을 동원해 주민들을 복종시키기로 마음먹고,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무장시킨 뒤 톨레도 내 유대인 집단 거주지를 공격해 1,200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페드로는 이 소식을 접하자 톨레도로 진군했고, 엔리케는 페드로가 오기 전에 톨레도를 장악하는 데 실패하자 어쩔 수 없이 텔라벨라로 도주했다.

페드로는 톨레도에 입성한 뒤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체포된 인사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블랑슈를 시구엔사(Sigüenza) 성에 엄중히 가두었다. 엔리케는 텔라베라에서도 주민들이 협조하지 않자 다시 토로로 가서 저항을 이어가려 했으나 끝내 패배를 면치 못하자 프랑스로 망명하여 장 2세의 궁정에서 지냈다. 이후 페드로는 후아나 데 카스트로에게 두예나스의 영주권을 내주고 헤어졌다. 이후 후아나는 두예나스에서 여성 영주로 지내면서 죽을 때까지 자신을 카스티야와 레온의 왕비로 칭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각지에서 준동하는 반란군 잔당 토벌에 전념하던 페드로는 1356년 1월 알카자르 데 토로에 은신중이던 어머니 마리아에게 그곳에서 나와 자신과 만나자는 전갈을 보냈다. 마리아는 여러 귀족들과 함께 페드로를 찾아가서 자신에게 의탁한 이들을 용서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페드로는 집사 마르틴 알폰소 텔레스 데 메네세스를 비롯해 마리아 왕비와 동행한 여러 귀족을 처형했다. 페드로 로페스 데 아알랴가 기술한 연대기에 따르면, 마리아 왕비는 기사들이 무참히 살해되는 광경을 보고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그녀가 깨어났을 때, 기사들이 그녀 주위에 벌거벗은 채로 쓰러진 광경을 목격하고 큰 소리로 아들을 저주하며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나으니 어서 죽여달라"고 애걸했다고 한다. 그 후 마리아 왕비는 포르투갈의 에보라 시로 돌아갔다가 1357년 1월 18일 그곳에서 44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1356년, 페드로는 반란군을 뒤에서 후원했던 아라곤 국왕 페드로 4세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일명 "두 명의 페드로 전쟁"이라 명명된 이 전쟁에서, 아라곤 왕국은 많은 패배를 당하고 타라고나, 아리제, 엘체, 모로스, 세티나 등지가 짓밟히는 등 큰 피해를 입었지만, 페드로 역시 아라곤 왕국의 반격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은 데다 엔리케 지지자들의 준동으로 인해 아라곤과의 전쟁에 전념하기 힘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중세 흑사병이 창궐했고 가뭄과 메뚜기떼의 습격 등 여러 자연재해가 벌어지면서 수많은 이들이 죽어나갔다.

아라곤 왕국과의 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1358년 1월 13일, 페드로의 편에 서서 아라곤 왕국과 맞서던 파드리케 왕자가 페드로로부터 세비야로 와달라는 명령를 받고 그곳에 방문했다. 페드로는 파드리케가 프랑스 왕국으로 망명한 뒤 카스티야 왕국을 적대하는 형제 엔리케와 밀통한 정황이 드러났다며 사형을 선고했다. 파드리케는 급히 달아났지만 레알 알카세르의 안뜰로 도주했다가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페드로 로페스 데 아알랴의 연대기에 따르면, 페드로는 부하들이 파드리케를 척살한 뒤 창문으로 시신을 내던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태연히 식사했다고 한다. 또한 아일랴의 연대기는 페드로가 1년 후에 파드리케의 형제인 10살의 후안 알폰소와 14살의 페드로 알폰스를 카르모나에서 체포한 뒤 가르시아 디아스 데 알바라신을 시켜 처형했다고 밝혔다.

1561년, 페드로는 아라곤 왕국이 시구엔사 성에 유폐된 블랑슈와 접촉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알카사르의 헤레스 데 라 프론테라로 이송시켰다. 교황 인노첸시오 6세는 그녀를 석방하라고 요구했지만 무시당했다. 그러다가 아라곤 국왕 페드로 4세와 일시적으로 휴전 협약을 맺은 뒤 세비야로 돌아온 페드로는 블랑슈를 처단하기로 마음먹었다. 페드로 로페스 데 아얄라에 따르면, 그는 아내를 메디나 시도니아로 이송시킨 뒤 이니고 오르티스 데 에스투르니가에게 그녀를 처단하라고 지시했지만 거부당하자 왕의 석궁수인 후안 페레즈 데 레볼레도에게 다시 지시했고, 블랑슈는 곧 살해되었다. 반면 아얄라 연대기의 다른 버전에 따르면, 블랑슈는 약초에 중독되어 죽었다고 한다. 또한 후대의 일부 기록에는 블랑슈가 병에 걸려 죽었다고 기술되었다. 진실은 분명하지 않지만, 페드로가 그녀가 죽기를 바랐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블랑슈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오랫동안 정부로 삼았던 마리아 데 파디야를 왕비로 삼겠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블랑슈가 죽은 지 얼마 안되어 아스투디요에 있는 거주지에서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페드로는 진심으로 사랑했던 마리아가 죽자 몹시 애통해 했고, 그녀의 장례식을 정성껏 치러줬다. 이후 1362년에 세비야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자신의 유일한 왕비는 마리아 데 파디야이며 다른 두 결혼은 무효라고 선언하고 그녀의 자녀들을 합법화 했으며, 아스투디요에 안장되었던 그녀의 유해를 역대 카스티야 국왕과 왕비의 무덤이 조성된 세비야 대성당에 이장했다. 이후 후아나 데 카스트로의 아들인 후안 대신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알폰소를 왕위 후계자로 지명하고, 아라곤 국왕 페드로 4세와 화해하는 차원에서 그의 딸과 결혼시키려 했다. 그러나 알폰소는 결혼이 이뤄지기 전에 사망했다.

1362년 아라곤 왕국과 휴전 협약을 맺은 페드로는 나스르 왕조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보다 앞서, 페드로는 나스르 왕조의 타이파 무함마드 5세에게 아라곤 왕국과의 전쟁에 쓸 병력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무함마드 5세는 군대를 보내줬지만, 기독교 국가를 도운 타이파에게 분노한 민심을 등에 업은 이복동생 이스마일 2세가 1359년 정변을 일으켜 무함마드 2세를 폐위시키고 타이파에 올랐다. 무함마드 5세는 마린 왕조로 망명했고, 이스마일 2세는 1년간 집권하다가 1360년 정변의 공신이었던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와 대립하다가 그의 반란으로 폐위된 뒤 처형되었다.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는 무함마드 6세로 즉위한 뒤 카스티야 대신 아라곤의 페드로 4세와 손을 잡았다.

페드로는 아라곤과 휴전 협약을 맺은 뒤 1362년 무함마드 5세와 연합하여 그라나다로 함께 진격했다. 무함마드 6세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자 세비야로 망명해 페드로에게 자신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페드로는 그를 친히 참수한 뒤 복위한 무함마드 5세에게 수급을 보냈다. 이후 아라곤과의 전쟁을 재개해 1363년 초 알리칸데, 엘체, 크레빌렌테를 공략했지만, 아라곤 국왕 페드로 4세가 반격하여 빼앗긴 영토 다수를 회복했다. 1363년 7월 2일,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은 교황 사절 장 드 라 그랑주의 중재하에 모르베데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양국은 이후에도 전쟁을 이어가며 크고 작은 전투를 연이어 치렀다.

이 무렵, 프랑스에 망명가 있던 엔리케는 깃발 색깔 때문에 소위 "백인 중대"라고 불리는 용병들을 고용했다. 그는 아라곤 왕국, 프랑스 왕국, 교황의 지원을 받고 1365년 3월 카스티야 왕국으로 진격했다. 엔리케와 함께 이베리아 반도로 향한 프랑스 지휘관 베르트랑 뒤 게클랭은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2세에게 카스티야 왕국으로 가려 하니 통과시켜달라고 요구했다. 카를로스 2세는 공식적으로는 카스티야 국왕 페드로와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많은 돈을 받는 대가로 통과시켰다. 나중에 마음을 바꿔 통과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대신 그들이 나바라 왕국을 통과하면서 약탈을 최소화하기 위해 많은 돈을 지불했다.

부르고스에서 머물고 있던 페드로는 엔리케가 용병대를 이끌고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급히 톨레도로 돌아간 뒤 아라곤의 정복지에 주둔한 모든 군대를 철수시키고 엔리케와 맞서 싸우려 했다. 그러나 귀족과 장군들이 잇따라 엔리케에게 귀순하고 아빌라, 세고비아, 탈라베라, 마드리드, 쿠엥카 등 여러 도시가 새 왕에게 경의를 표하자, 페드로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366년 초 세비야를 떠나 포르투갈 왕국에 망명하려 했다. 그러나 포르투갈 국왕 페드루 1세가 망명을 거부하자, 그는 알부케르케로 피신하려 했지만 그곳 시민들이 성문을 걸어잠그고 입성을 거부하자 갈리시아로 피신했다. 이후 갈리시아까지 쳐들어오는 엔리케 2세를 피해 가스코뉴로 달아난 뒤 바욘에서 흑태자 에드워드와 만났다.

페드로는 잉글랜드 왕국과 나바라 왕국이 자신을 복위시켜주는 대가로 비스키야와 카스트로, 우르디알레스 일대를 잉글랜드에 넘기고 기푸스코아, 알라바 및 라 리오하 일부를 나바라 왕국에 넘긴다는 내용의 리부른 비밀 협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2세는 1366년 12월 엔리케 2세와 로그로뇨에서 만나서 더 많은 보상금을 받는 대가로 잉글랜드군의 통과를 저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흑태자 에드워드는 이중계약을 맺은 그에게 분노해 나바라 국경지대에 군대를 집결시키고 원래 약속한 대로 하라고 요구했다. 카를로스는 급히 에드워드를 찾아가서 자신이 엔리케 2세와 거래한 적이 없다면서, 잉글랜드군이 산길을 통과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카를로스를 신용할 수 없다고 여기고 올리버 드 매니에게 카를로스를 붙잡아놓게 했다. 그 후 카를로스는 흑태자 에드워드가 엔리케 2세를 몰아내고 페드로를 카스티야 국왕으로 복위시킬 때까지 잉글랜드 군영에 억류되었다.

1367년 3월 흑태자 에드워드와 함께 카스티야 왕국에 돌아온 페드로는 4월 3일 나헤라 전투에서 엔리케 2세와 게클랭의 군대를 격파했다. 게클랭은 포로로 잡혔고, 엔리케 2세는 프랑스 왕국으로 달아났다. 페드로는 자신을 도와준 것에 보답하고자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170캐럿짜리 붉고 거대한 보석을 선물하니, 이것이 바로 흑태자의 루비이다. 하지만 카스티야인들은 그가 잉글랜드와 나바라 왕국에게 많은 영토를 넘기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격분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재정이 파탄난 지 오래라서 사전에 보상금으로 주기로 했던 돈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페드로는 어떻게든 에드워드와 맺은 약속을 지키고자 애썼지만, 에드워드는 그가 약속을 실현시킬 가망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아라곤 국왕과 비밀리에 접촉해 카스티야 왕국을 잉글랜드, 아라곤, 나바라, 포르투갈 왕국이 4부분으로 나눠 가지는 방안을 논의했다. 그러나 군중에 전염병이 돌고 급기야 자신마저 중병으로 앓아눕게 되자, 에드워드는 이베리아 반도에 더 있어봐야 답이 없다고 여기고 보급품을 마련하기 위해 약탈을 자행하며 가스코뉴로 귀환했다. 이때 그는 페드로가 빚을 갚게 할 보증인으로 삼고자 페드로의 두 딸 콘스탄사와 이사벨을 인질로 데리고 갔다.

에드워드가 가스코뉴로 돌아간 뒤, 엔리케 2세는 1368년 9월 프랑스 왕국의 지원을 받고 카스티야 왕국에 돌아왔다. 부르고스, 코르도바, 팔렌시아, 바야돌리드, 하옌 등 여러 도시들이 엔리케 2세를 즉각 지지했고, 갈리시아와 아스투리아스는 페드로를 계속 지원했다. 엔리케 2세가 톨레도로 향할 때 안달루시아로 후퇴한 페드로는 군대를 집결시킨 뒤 1369년 3월 14일 몬티엘에서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참패한 페드로는 몬티엘의 한 요새로 피신한 뒤 적군에게 포위되었다.

페드로는 충실한 기사 멘 로드리게스 데 사나브리아를 엔리케 2세와 함께 있던 게클랭에게 보내 그에게 여러 영지를 제공하는 대가로 자신이 탈출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게클랭은 이를 받아들이겠다며, 3월 22일 밤에 변장한 채 몬티엘 성을 빠져나오게 했다. 페드로는 몇몇 수행원만 대동해 성밖으로 나온 뒤 게클랭의 안내를 받으며 한 천막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엔리케 2세가 무장한 채 기다리고 있었고, 천막 안으로 들어간 페드로는 엔리케 2세의 단검에 찔려 죽었다.

3.8. 엔리케 2세

엔리케 2세페드로를 처단한 뒤 그의 수급을 벤 후 여전히 그를 지지하고 있는 성채와 마을에 널리 보여주며 항복을 유도했다. 갈리시아 귀족들은 엔리케 2세를 따르기를 거부하고 포르투갈 국왕 페르난두 1세를 갈리시아 국왕으로 추대했지만, 페르난두 1세는 1371년 엔리케 2세와 협상한 끝에 갈리시아를 카스티야 왕국에 도로 넘겼다. 이리하여 내전에서 승리한 엔리케 2세는 자신을 도와준 샤를 5세에게 보답하기 위해 카스티야 해군을 보내줬고, 샤를 5세는 카스티야 해군의 지원에 힘입어 1372년 라 로셸 해전에서 잉글랜드 해군을 격파하고 라 로셸을 공략했다. 하지만 역시 자신을 도와준 아라곤 국왕 페드로 4세에게 넘겨주기로 했던 무르실아를 양도하기를 거부했다. 페드로 4세는 이에 분개해 아라곤 왕국과의 전쟁을 이어갔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375년 알마잔 평화협약을 맺었다. 카스티야는 몰리나 영주권 등 아라곤 왕국의 통치하에 있던 카스티야 왕국의 영지를 돌려받았고, 페드로 4세의 딸인 레오노르와 엔리케 2세의 후계자인 후안 1세의 결혼이 성사되었다.

한편, 1371년 페드로의 딸 콘스탄사와 결혼한 제1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은 아내가 카스티야 여왕에 오를 자격이 있으며 자신 역시 공동 군주로 등극해야 한다며 스스로 카스티야와 레온의 왕이라는 칭호를 취했다. 그러면서 동료 귀족들에게 "스페인의 주군"이라고 부르라고 권했다. 엔리케 2세는 곤트의 존의 이같은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백년 전쟁에 개입해 프랑스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373년 곤트의 존이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2세에게 접근한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카를로스 2세에게 결혼동맹을 맺을 것을 제안하면서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 왕국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카를로스 2세는 1374년 3월 기스코뉴에서 곤트의 존을 만나서 엔리케 2세가 지난날 빼앗아간 나바라 왕국의 도시들을 탈환하는 데 힘을 보태준다면 나바라 왕국을 카스티야 침공기지로 사용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곤트의 존은 얼마 안가 계획을 포기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가버렸고, 엔리케 2세로부터 보복당할 위기에 몰린 카를로스 2세는 1375년 5월 장남 카를로스와 엔리케 2세의 딸 레오노라의 결혼에 동의하고 나바라 왕국이 카스티야 왕국의 봉신이 되는 것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레오노라는 카스티야에 머물렀고, 그가 나바라 왕국에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카스티야를 찾아갈 때 아내를 종종 만났다. 그러던 1378년 카를로스 2세가 잉글랜드와 손잡고 카스티야 왕국이 지난날 빼앗아간 로그로뇨를 공략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소식을 샤를 5세로부터 전해듣자, 엔리케 2세는 1378년 6~7월 나바라 왕국을 전격 침공해 각지를 황폐화시켰다. 결국 카를로스 2세는 1379년 3월 31일 투델라를 포함한 나바라 왕국 남부의 20개 요새를 카스티야 왕국에 넘겨주고 잉글랜드에 맞서 카스티야-프랑스 왕국과 군사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내용의 브리오네스 협약에 서명해야 했다.

엔리케 2세는 유대인에게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페드로가 유대인 재무관 레비를 중용하고 유대인을 괴롭히는 자들을 처벌한 것을 근거로 삼아 "유대인 왕"이라고 비난해 일반 주민들이 품고 있는 반유대주의를 부추겼다. 또한 게클랭의 용병들에게 돈을 지급하기 위해 톨레도의 유대인 공동체에 2만 길더를 부과했으며, 그들이 이를 내지 못한다면 굶어죽을 때까지 음식을 주지 말라고 명령했다. 여기에 1369년 토로 코르테스와 1374년 및 1377년 부르고스 코르테스에서 결정된 사항에 따라 유대인들에게 다윗의 별 배지를 가슴에 달라고 명령하고 기독교식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단기 대출의 경우 기독교인 채무자는 유대인 채권자에게 원금에 2/3만 갚아야 한다고 명령했다. 그러면서도 재정 관리에 탁월한 유대인들을 마냥 내칠 수는 없었기에 유대인 요세프 피코네를 수석 세금 징수원으로 삼았다. 한편, 자신을 위해 싸워준 "백인 중대"에게 줄 돈이 부족하자 화폐를 대량으로 주조하고 금의 함유량을 줄였으며, 왕국을 재건하기 위해 행정 체계를 개편하고 코르테스를 여러 차례 개최했다. 형제 텔로 알폰소가 사망한 후 비스카야의 영주권을 왕실 유산에 완전히 통합했다.

3.9. 후안 1세

1379년 5월 29일, 엔리케 2세가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자다에서 사망했다. 이후 카스티야의 새 국왕에 오른 후안 1세는 아버지 엔리케 2세의 유대인 박해 정책을 중단하고 유대인들을 관대하게 대했다. 한 번은 유대인 보석상 아브라함 다비드 타로(אברהם דוד בן שלמה אברהם טארוש)가 보나도나(Bonadona)라는 이름의 아내가 출산 능력이 없어 자손을 낳지 못하기 때문에 결혼을 무효화하고 기독교인 여성과 재혼하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카스티야 법에 따르면 아내가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이상 일반인이 결혼을 무효화하고 재혼하는 것은 불법이며, 유대인이 기독교 여성과 결혼하는 것 역시 금기시되었다. 하지만 후안 1세는 그가 그동안 왕실에 우수한 세공품을 꾸준히 바치고 많은 돈을 빌려준 것을 고려하여 보나도나를 정중하게 대하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게 배려해주는 조건으로 허락했다.

후안 1세는 백년 전쟁에 개입해 프랑스 왕국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아버지의 정책을 물려받아 카스티야 제독 페르난도 산체스 데 토바에게 해군을 맡겨 프랑스를 돕게 했다. 페르난도 산체스는 프랑스 제독 장 드 비엔과 연합해 1380년 7월 원정에 착수했다. 연합 함대는 윈첼시 앞바다에서 영국 함대를 격파하고 아르풀레르 항구에서 승무원과 물자를 적절하게 공급받은 뒤 도버 해협을 건너 템스 강을 따라 잉글랜드 왕국의 수도 런던 인근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잉글랜드군이 2척의 갤리선을 강에 가라앉혀서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게 막아놓고 항전하자, 인근의 선박들을 불태우거나 탈취한 뒤 귀환했다. 한편, 후안 1세는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를 설득해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어 있던 누이 레오노르의 남편 카를로스가 나바라 왕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줬다.

1382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 레븐 5세가 맘루크 왕조의 공세를 피해 카스티야로 망명했다. 후안 1세는 오랜 여정으로 지칠대로 지치고 행색이 남루한 그를 가엾게 여겨 거둬들이고 1383년에 마드리드, 비야레알, 안두하르의 영주로 선임했다. 레븐 5세는 나중에 프랑스로 가서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화해시키고 자신이 아르메니아 왕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십자군을 일으키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1393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1382년 아내 레오노르가 사망한 뒤, 후안 1세는 재혼 상대를 물색한 끝에 1383년 5월 17일 바다호스 대성당에서 포르투갈 국왕 페르난두 1세의 외동딸 베아트리스와의 결혼식을 거행했다. 이때 맺은 결혼 조약에 따르면, 페르난두 1세가 남자 아이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하면 포르투갈 왕위는 베아트리스에게 넘어가고 그녀의 남편은 포르투갈의 왕을 칭할 수 있지만 실제로 통치를 하지는 않고 베아트리스의 어머니 레오노르가 섭정을 맡기로 했다. 또한 베아트리스가 낳은 자식은 포르투갈 왕국을 물려받지만, 자식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왕위는 후안 1세에게 돌아가며, 그 다음엔 후안 1세가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엔리케 왕자에게 넘어갈 것이었다. 5월 21일 카스티야 기사와 고위 성직자들은 카스티야 왕이 조약에서 동의한 약속을 어긴다면 왕과 싸우겠다고 맹세했고, 포르투갈인들 역시 조약을 준수하겠다고 맹세했다.

1383년 10월 22일 페르난두 1세가 사망했다. 그의 미망인인 레오노르는 사전에 맺은 조약에 근거해 딸과 사위의 이름으로 섭정을 시작했다. 여기에 레오노르의 연인인 주앙 페르난데스 안데이루가 재상으로 선임되었다. 후안 1세는 페르난두 1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몬탈반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베아트리스와 자신을 포르투갈의 통치자로 선포하는 내용의 선언서를 포르투갈 전역에 보내고 알폰소 로페스 데 테하다를 포르투갈 총독으로 선임해 리스본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기득권이 훼손될까 두려웠던 포르투갈 상인 계급은 자국이 카스티야 왕국에 병합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백성들을 선동해 11월 말부터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1383년 12월 6일 아비즈의 영주이자 페르난두 1세의 이복 동생인 주앙이 포르투갈의 섭정 레오노르의 애인인 주앙 페르난데스 안데이루를 암살하면서 반란의 기세가 더욱 거세졌다. 알바로 파리스의 선동에 넘어간 백성들이 리스본에서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켜 카스티야의 앞잡이로 간주된 리스본 주교 마르티뉴 아네스(Martinho Anes)를 살해한 뒤 주앙 왕자를 지도자로 옹립했으며, 포르투갈 제독 란사로테 페사냐도 베자 시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일으키고 포르투갈 국왕을 자칭했다.

알바로 파리스는 레오노르에게 주앙 왕자와 재혼할 것을 제안했지만, 그녀는 이를 거부하고 산타렝으로 도주한 뒤 후안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후안 1세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포르투갈의 상황을 안정시키기로 마음먹고 베아트리스와 함께 산타렝으로 진격했다. 1384년 1월 13일 산타렝에 도착한 그는 레오노르로부터 사임 각서를 받아내고 많은 기사와 성주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얻어냈다. 이후 4월 6일 아톨레이로스 전투에서 카스티야 장군 페르난도 산체스 데 토바르와 포르투갈 귀족 페드루 알바레스 페헤이라가 이끄는 카스티야군이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가 이끄는 포르투갈 반란군과 처음으로 맞붙었다. 카스티야 기병대는 이 전투에서 정사각형 방진을 세운 적군을 향해 무작정 돌진했다가 큰 손실을 입고 패퇴했다.

1384년 5월, 후안 1세는 군대를 정비한 뒤 리스본으로 진격해 육지와 해상 모두 봉쇄했다.(리스본 공방전) 그러나 리스본 공략은 쉽사리 이뤄지지 않았고,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는 카스티야에 충성하는 도시들을 습격하고 침략군의 후방을 교란했다. 한편, 주앙 왕자는 잉글랜드 왕국에 사절을 보내 동맹을 맺자고 요청했다. 당시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인 17세의 리처드 2세를 대신해 국정을 주관하던 랭커스터 1대 공작 곤트의 존은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 왕국을 지원한 카스티야 왕국을 견제하기 위해 포르투갈에 지원군을 보내기로 했다.

1384년 7월 18일, 루이스 페헤이라 제독이 이끄는 포르투갈 함대가 테호 해전에서 카스티야 해군과 격돌했다. 루이스 페헤이라는 이 해전에서 전사했지만, 포르투갈 함대는 적의 해상 봉쇄를 뚫고 리스본에 도착해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던 주민들에게 귀중한 보급품을 전달했다. 후안 1세는 이후에도 리스본을 계속 포위했지만,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가 보급로를 교란하면서 보급품이 부족해지고 진영에 페스트가 돌면서 수많은 병사가 죽어가자 어쩔 수 없이 9월 3일에 봉쇄를 풀고 카스티야로 철수했다. 그렇지만 리스본 외 다수의 포르투갈 지역은 카스티야군에게 넘어갔다.

1385년 초, 잉글랜드군 600명이 포르투갈에 상륙했다. 이들 전원이 백년 전쟁에서 활약한 베테랑으로, 대 기병 전술에 특화되어 있었기에 강력한 기병을 앞세운 카스티야군을 상대하는 법을 포르투갈인들에게 전수할 수 있었다. 한편 주앙 왕자는 코임브라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그해 4월 6일에 포르투갈 국왕 주앙 1세로 등극했다. 그는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를 포르투갈군 총사령관으로 선임하고 카스티야군에 넘어간 지역을 모조리 탈환하게 했다.

후안 1세는 이에 분노해 원정군을 파견했다. 이들은 비세우를 철저하게 약탈하고 포르투갈인들을 상대로 잔학 행위를 저질렀지만, 1385년 5월 29일 트랑코소 전투에서 대패해 지휘관 7명 중 6명이 사망할 정도로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에 후안 1세는 6월에 대군을 일으켜 셀로리코 다 베이라에서 코임브라와 레이리아에 이르는 포르투갈 중북부로 진격했다. 원정군 규모는 32,000명에 달했는데, 그 중엔 프랑스 중기병들도 있었다. 주앙 1세와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는 이에 맞서 6,500명 가량의 병력을 일으켜 토마르 시에 집결했다. 이후 적을 어찌 맞서 싸울 지 논의한 끝에, 리스본에서 또다시 농성한다면 이번에는 버티기 어려우니 알주바호타 마을 인근에서 적을 물리치기로 결의했다.

1385년 8월 14일, 험준한 산악 지형을 통과해야 하는 데다 숫자가 워낙 많아서 매우 느린 속도로 진군하던 카스티야군은 알주바호타 고지에서 포르투갈-잉글랜드 연합군을 발견했다. 후안 1세는 즉각 돌격 명령을 내렸지만, 무더운 날씨에 오래도록 행군하느라 지칠대로 지친 기사들과 장병들은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반면에 시원한 고지에서 기다리고 있던 포르투갈-잉글랜드 연합군은 전면에 마름쇠 등 대기병 방어 구조물을 세우고 장궁병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적 기병대를 물리쳤다. 카스티야군은 축차투입을 반복해봤지만 하루종일 적의 전열을 뚫지 못하다가 제풀에 지쳐 퇴각했다. 이에 포르투갈-잉글랜드 연합군은 도망치는 적을 추격해 카스티야군은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알주바호타 전투는 카스티야군의 재앙이었다. 포르투갈-잉글랜드 연합군이 천 명 이하의 손실을 입은 것에 비해, 카스티야군은 5천 가량의 손실을 입었다. 게다가 카스티야군은 본국으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포르투갈인들의 연이은 습격으로 인해 5,000명을 추가로 상실했다.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는 여세를 이어가 1385년 10월 카스티야에 속한 메리다를 공격했고, 발베르데 전투에서 카스티야군 2만 명을 격파하고 적장 페드로 무네스 데 고도이 이 산도발을 주살했다. 이러한 연이은 참패로 인해, 후안 1세는 두 번 다시 포르투갈 왕국으로의 원정을 감행하지 못했다.

1372년부터 아내 콘스탄사가 페드로 왕의 딸인 점을 근거삼아 카스티야와 레온의 국왕이라고 칭하던 곤트의 존은 카스티야 왕국군이 참패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지금이야말로 카스티야 국왕이 될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1386년 5월 9일 주앙 1세로부터 카스티야 국왕이 되도록 지원해주겠다는 서약을 받아낸 곤트의 존은 그해 7월 아내와 딸 캐서린과 함께 갈리시아에 상륙했다. 그는 대다수 갈리시아 귀족들과 일부 레온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오렌세에 궁정을 세우고 왕을 칭했다. 후안 1세는 이에 맞서 세고비아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카스티야 귀족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다시 받고 침략자들로부터 맞설 병력을 제공받았다.

1387년, 곤트의 존은 주앙 1세에게 자기 딸 필리파를 시집보낸 뒤 포르투갈군과 연합하여 카스티야를 향한 원정을 단행했다. 그들은 두에로 강을 따라 남하했지만, 카스티야군이 전투를 회피하고 청야 전술을 구사하는 바람에 식량을 제대로 구하지 못하고 몇몇 요새를 포위하다가 손실만 입었다. 결국 다수의 병사가 굶주림과 질병으로 쓰러지고 곤트의 존과 가까운 친구들과 신하들이 잇따라 사망하자, 곤트의 존은 어쩔 수 없이 갈리시아로 퇴각했다. 1388년 7월 카스티야군이 갈리시아로 진군해오자, 곤트의 존은 포르투갈로 달아났다가 다시 아키텐으로 도주했다.

이후 카스티야 국왕이 되는 것을 단념한 곤트의 존과 아내 콘스탄사는 후안 1세의 화해 제안을 받아들였다. 후안 1세의 아들 엔리케와 곤트의 존과 콘스탄사의 딸 캐서린의 결혼이 성사되었고, 엔리케는 아스투리아스 공에 칭해졌다. 이때부터 스페인 왕위 계승자들은 아스투리아스 공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또한 후안 1세는 1389년 주앙 1세와 휴전 협약을 맺고 양측이 점령한 영토를 서로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3.10. 엔리케 3세

1390년 10월 9일, 후안 1세가 알칼라 데 에나레스 궁전에서 낙마 사고로 사망했다. 톨레도 대주교 페드로 테노리오는 왕의 유해를 깊숙한 장소에 숨긴 뒤 당시 11살이었던 엔리케 왕자가 엔리케 3세로서 즉위하고 섭정이 정해질 때까지 "왕은 그저 가벼운 부상을 입었을 뿐이다"며 사망 사실을 숨겼다. 친모 레오노르는 1382년에 사망했고, 계모 베아트리스는 포르투갈 출신이라서 카스티야 귀족들에게 경원시된 데다 정치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 귀족으로 구성된 섭정 평의회가 국가를 운영하게 되었다.

톨레도 대주교 페드로 테노리오, 산티아고 대주교 후안 가르시아 만리케, 빌에나 후작 알폰소, 칼라트라바 기사단장 곤살로 누녜스 데 구즈만, 히혼과 노레나 백작 알폰소 엔리케스, 알마잔 후작 후안 후르타도 데 몬데사 등 6명이 이 위원회의 구성원이었다. 이후 왕의 행렬이 마드리드에 도착하여 왕과 수행원들이 산 마르틴 교회 내부로 들어갔을 때, 베나벤테 공작이자 후안 1세의 의붓 형제인 파드리케 엔리케스, 트라스타마라 백작이자 파드리케의 아들인 페드로 엔리케스가 군대를 동원하여 교회를 에워싸고 자신들도 섭정 위원회에 넣어달라고 요구했다. 섭정들은 이 압력에 굴복하여 그들 역시 섭정 위원회의 일원으로 들어가게 했다.

1391년, 흉년과 경제적 불안정, 전염병 창궐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때 페르난도 마르티네스라는 설교자가 세비야에서 유대인 때문에 재앙이 닥쳤으니 그들을 응징해야 한다고 선동했다. 이에 선동된 민중이 폭동을 일으켜 유대인 구역을 습격해 많은 이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재산을 약탈했다. 여기에 상류 귀족들이 국가 행정부의 최고 위치에 있는 하급 귀족들을 몰아내고 권력을 쟁취하려는 음모를 꾸몄고, 섭정 평의회 내부에서도 심각한 권력 다툼 끝에 파드리케와 곤살로 누녜스, 페드로 테노리오가 섭정 위원회에서 배제되면서 금방이라도 내전이 벌어질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엔리케 3세는 이런 상황을 유심히 지켜본 끝에 1392년 13세의 나이에 친정을 선포했다. 나이가 아직 어린 데다 줄곧 병마에 시달렸기 때문에, 귀족들은 그가 무력한 행보를 보일 수밖에 없다고 보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그는 조금씩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다. 우선 섭정 위원회에서 배제되었던 귀족들을 다시 불러들여서 귀족들끼리 서로 견제하게 했다. 이후 유대인에 대한 악의적인 비방을 가해 학살을 유도한 페르난도 마르티네스를 비롯한 선동가들을 모조리 체포해 투옥하고 유대인들의 신변과 재산을 보호했다. 여기에 비리를 저지른 신하들을 엄격히 처벌하고 재정을 건전하게 개선하고자 노력했다.

베나벤테 공작 파드리케, 노레나와 히혼 백작 알폰소 엔리케스, 그리고 트라스타마라 백작 페드로 엔리케스는 이러한 왕의 행보로 인해 자신들의 권력이 제한받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1394년 3월, 그들은 나바라 왕비 레오노르[11]와 공모하여 엔리케 3세를 타도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여기에 톨레도 대주교 페드로 테노리오와 종교적 최고 지위를 놓고 다투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주교 후안 가르시아 만리케도 가세했다. 파드리케는 보병 2,000명과 기병 600명을 시스네로스에 집결시켰고, 후한 가르시아 만리케는 아무스코에 보병 1,000명과 기병 500명을 배치했으며, 페드로 엔리케스는 갈리시아에서 추종자들을 모았고, 나바라 왕비 레오노르는 부르고스 지방의 빌라 로아에 공모자들을 잠입시켰고, 알폰소 엔리케스는 아스투리아스에서 가신을 모았다.

엔리케 3세는 이 음모를 조기에 눈치채고 그들이 형성한 동맹을 깨뜨리기 위해 개별적으로 협상했다. 얼마 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대주교 후안 가르시아 만리케가 바야돌리드로 가서 엔리케 3세에게 충성을 서약했고, 파드리케도 얼마 안가 군대를 해산하고 왕의 자비를 구했다. 엔리케 3세는 후안 가르시아 만리케의 투항은 받아들였지만, 파드리케는 언젠가 다시 반란에 가담할 수 있다고 여기고 그를 체포하여 죽을 때까지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이후 군대를 일으켜 로아로 진군해 그곳에 머물고 있던 이모 레오노르를 억류한 뒤 1394년 11월 나바라 왕국으로 돌려보냈다. 트라스타마라 백작 페드로 엔리케스는 가까스로 빠져나가 갈리시아로 도주했지만, 그곳에서 영영 나오지 못하고 죽었다.

동지들이 잇따라 왕에게 귀순하거나 무너지자, 노레나와 히혼 백작 알폰소 엔리케스는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엔리케 3세는 즉각 군대를 일으켜 아스투리아스로 진군했고, 알폰소는 이에 맞서 히혼의 산 마르틴 성채에서 장기간 버텼다. 엔리케 3세의 토벌대는 장기간 포위 공격했지만 지형이 험준한 곳에 지어진 이 요새 공략에 번번이 실패해 포위가 길어지졌다. 그러다가 겨울이 다가오자, 엔리케 3세는 알폰소와 6개월간의 휴전 협약을 맺기로 합의했다. 이후 전열을 재정비한 엔리케 3세는 1395년 7월 히온 시를 재차 포위했다. 알폰소는 음식과 무기를 비축하여 농성전을 준비한 후 엔리케 3세가 오기 전에 잉글랜드의 도움을 받기 위해 바욘으로 향했다. 이후 알폰소의 아내 이사벨이 한 달 동안 농성했지만, 남편이 좀처럼 구원군을 이끌고 올 기미가 없자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보장받은 후 항복했다. 그리하여 근거지를 잃은 알폰소는 바욘에서 조용히 살다가 죽었다.

1396년, 포르투갈 국왕 주앙 1세가 카스티야 왕국이 혼란한 틈을 타 바다호스 요새를 포위했다. 이에 엔리케 3세는 바다호스 요새에 구원군을 파견하는 한편 카스티야 함대에 포르투갈 해안을 공격하고 포르투갈 선박들을 습격하라고 명령했다. 결국 바다호스 포위를 중단하고 포르투갈로 귀환한 주앙 1세는 엔리케 3세가 어리고 병약하지만 절대로 만만한 군주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1402년 8월 15일 양자간의 평화 협정이 체결되면서, 후안 1세 치세부터 시작된 카스티야와 포르투갈간의 전쟁은 막을 내렸다.

1400년 바르바리 해적의 근거지인 모로코의 테투안 시에 대규모 함대를 파견해 단숨에 제압함으로써 지브롤터 해협의 안전을 확보했으며, 1402년 프랑스 상인이자 모험가인 장 드 베텡쿠르를 카나리아 제도에 파견해 그곳을 개척하게 했다. 베텡쿠르는 카나리아 제도를 단시일에 장악한 뒤 카나리아 왕국의 국왕이자 카스티야 왕국의 봉신을 자처했다. 한편 동방의 정복자 티무르에게 에르난 산체스 데 팔라수엘로스와 루이 곤살레스 데 클라비조가 이끄는 사절단을 잇따라 파견했다. 이들은 앙카라 전투를 현장에서 목격하고 티무르에게 엔리케 3세가 친히 작성한 친선 편지를 전달한 뒤 카스티야 왕국으로 귀환했다. 훗날 루이 곤살레스는 자신이 1402년부터 1406년까지 티무르를 만나고자 사마르칸트로 여행한 이야기를 담은 <티무르 사절단(Embajada a Tamorlán)>을 출간했다.

이 무렵, 그라나다를 근거지로 삼은 나스르 왕조와 카스티야 왕국과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1393년, 무함마드 7세는 선대 타이파 무함마드 5세가 카스티야 왕국과 맺은 휴전 협약을 깨고 4천 병력을 보내어 무르시아 인근을 습격했다. 하지만 이들이 격퇴되자, 무함마드 7세는 카스티야 왕국에 재차 복속을 표하며 사죄했다. 당시 카스티야 왕국의 사정이 좋지 않았기에, 엔리케 3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기사단과 지하드를 자처하는 민병대간의 크고 작은 충돌이 이어졌고,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이 그라나다로 들어와 선교하다가 처형된 사건이 벌어지자, 엔리케 3세는 1404년 아라곤 왕국, 나바라 왕국 군주들을 불려들어 반 그라나다 연합을 맺자고 제안했지만 두 나라 모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면서 실패했다.

1406년 10월, 카스티야 왕국은 나스르 왕조와 2년간의 휴전 및 무역 재개에 합의했다. 그러나 마린 왕조로부터 지원 의사를 전달받은 무함마드 7세가 휴전을 깨고 무르시아를 침공하자, 당시 병세가 악화되어 동생 페르난도에게 국정을 위임했던 엔리케 3세는 페르난도에게 이들을 저지하게 했다. 페르난도는 즉각 군대를 일으켜 하옌 인근의 콜로하레스에서 나스르 왕조군을 격파하고 지브롤터 해협에서 튀니지와 틀렘센의 술탄 편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뒤 자하라(오늘날 카디스) 시를 포위했다.

3.11. 후안 2세

1406년 12월 25일, 엔리케 3세가 그라나다를 친히 원정할 준비를 하던 중 톨레도에서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는 병약한 자신이 곧 죽을 것임을 직감하고, 당시 1살 밖에 안 된 아들 후안 2세를 왕으로 옹립하고 캐서린 왕비와 디에고 로페즈 데 에스투니가, 후안 페르난데스 데 벨라스코, 루이 로페즈 다발로스, 그리고 후안 2세의 동생이자 카스티야 남부 지역을 관할하던 페르난도 왕자에게 아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 보필해달라는 내용의 유언장을 남겼다.

많은 귀족들은 1살 밖에 안 된 갓난아기가 성장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무리라고 여기고 페르난도 왕자에게 카스티야 국왕이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페르난도는 형의 유언에 충실하겠다며 거부하고 조카 후안을 카스티야 국왕으로 받들었다. 그 후 페르난도가 나스르 왕조와의 전쟁을 진두지휘하고 캐서린 왕비와 고위 사제 및 귀족들이 내치를 담당하는 동안, 후안 2세는 세고비아의 알카시르 성에 지내다가 바야돌리드에 있는 산 파블로 수도원에 이송되어 조용히 지냈다. 그는 이 시기에 아라곤 귀족 알바로 마르티네스 데 루나의 아들이며 궁정에서 시종으로 일하던 알바로 데 루나(1390 ~ 1453)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1407년 8월, 나스르 왕조의 타이파 무함마드 7세가 카스티야 왕국이 어린 왕의 즉위로 어수선한 틈을 타 하옌을 포위 공격했다. 이에 페르난도가 하옌 구원에 나서자, 무함마드 7세는 곧장 철수했다. 페르난도는 그해 9월 론다로 남하해 공성포의 활약으로 자하라 델라 시에라와 오르테 시자르를 공략했다. 다만 뒤이은 세테닐 공략에 실패하고 세비야로 회군했다. 1408년 2월, 무함마드 7세는 알카우데테 성을 포위해 공격을 퍼부어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였지만, 수비대의 저항이 극렬한 데다 구원군이 다가오자 결국 철수했다. 그 후 페르난도는 캐서린 왕비와의 정쟁으로 입지가 불안해지자 무함마드 7세가 제의한 휴전 협약을 받아들였다.

1409년 공세를 재개한 페르난도는 1410년 긴 포위전 끝에 안테케라(오늘날 말라가)를 공략하고 '페르난도 데 안테케라'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러던 1410년 5월 31일 아라곤 국왕 마르틴 1세가 왕위를 이을 적자를 낳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아라곤 왕위가 비어버리자, 페르난도는 아라곤 왕위에 도전하여 2년간 경쟁자들과 치열한 정쟁을 벌인 끝에 1412년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1세로 즉위했다. 이후 아들의 섭정을 단독으로 맡은 캐서린은 알바로 데 루냐와 한 자리에서 함께 자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알바로를 지나치게 총애하는 아들을 염려해 알바로를 궁정에서 쫓아내려 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순종적인 아들이었던 후안 2세가 알바로를 지키려고 애쓴 데다 알바로를 후원하는 귀족들이 반발하자 어쩔 수 없이 궁정에 그대로 있게 했다.

1418년 6월, 캐서린 왕비가 사망했다. 그 해 10월 20일에는 페르난도 1세의 딸 마리아와 후안 2세의 약혼식이 거행되었다. 이후 1419년 마드리드에서 열린 코르테스에서, 후안 2세는 자신이 성년이 되었으므로 친정을 시작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1420년 7월 14일, 산티아고 기사단장 엔리케가 정변을 일으켰다. 그는 페르난도 1세의 세번째 아들로, 최고 권력을 놓고 형제 후안과 치열한 정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후안이 나바라 왕국의 왕위 계승자로 지명된 수리아 공주와 결혼하자, 엔리케는 이러다가 자신이 후안에게 밀려날 것을 우려해 정변을 일으키기로 마음먹었다.

후안 2세는 토르데시야스에서 일어난 정변으로 엔리케의 수중에 넘어갔다. 엔리케는 후안을 따르던 관료들을 모조리 경질하고 1420년 8월 여동생 마리아와 후안 2세의 예정된 결혼식을 거행했으며, 코르테스를 소집해 자신의 정변을 승인하게 했다. 한편, 팜플로나에 있던 후안은 툴레도 대주교로부터 쿠데타가 일어날 거라는 경고를 전해듣고 아내를 나바라에 남겨둔 뒤 페냐피엘로 가서 추종자들을 소집한 후 엔리케를 물리치려 했다. 이에 엔리케는 후안 2세를 산티아고 기사단의 영지로 이송시키려 했다.

이때 알바로 데 루냐가 왕을 탈출시키기로 마음먹고 1420년 11월 29일 탈라베라에 구금중이던 왕을 구출한 뒤 푸에블라 데 몬탈반 성으로 데려갔다. 엔리케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군대를 소집해 몬탈반 성으로 쳐들어갔지만, 12월 10일 폭풍이 몰아치는 바람에 공성전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다가 여러 귀족이 왕을 구하러 진군하자 모스톨레스로 철수했다. 엔리케의 형제 후안은 즉각 국왕을 찾아가서 부당한 짓을 저지른 형제에 맞서 왕을 수호하겠다고 맹세했다. 후안 2세는 자신을 구해준 것에 보답하고자 알바로에게 산 에스테반 데 고르메스 백작령을 수여했다.

그 후 후안 2세는 알바로 데 루냐를 오카냐에 군대를 집결시킨 엔리케에게 보냈다. 알바로는 왕이 그를 만나기를 원한다면서, 만약 기사들을 대동하여 왕을 뵈려 한다면 후안 왕자와 톨레도 대주교를 비롯한 다른 귀족들이 반역으로 간주하고 토벌하려 들 테니 홀로 오라고 권고했다. 엔리케는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을 때까지는 왕을 만날 수 없다며 뻗댔지만, 부하들이 연이어 이탈하면서 군대를 유지하기 힘들어지자 어쩔 수 없이 1422년 9월 23일에 군대를 해산시키기로 했다. 이에 후안 왕자와 톨레도 대주교가 이끄는 왕실군 역시 해산되었다.

1423년 6월 12일, 마드리드로 향하던 후안 2세는 핀토에서 엔리케와 대면했다. 왕은 그 자리에서 엔리케를 즉각 체포하여 모라 성에 감금시키고 그의 가장 저명한 지지자 3명을 체포한 뒤 반역죄로 기소했다. 엔리케의 아내 카타리나와 나머지 추종자들은 왕실군에 잡히기 전에 아라곤 왕국으로 탈출할 수 있었지만, 그들의 재산은 모조리 몰수되었다. 후안 2세는 엔리케에게서 빼앗은 영지와 재산을 그의 형제 후안에게 넘겨주고 알바로 데 루냐에게 카스티야의 근위대장 칭호를 하사했다.

아라곤 국왕이자 엔리케의 형인 알폰소 5세는 엔리케가 모라 성에 구금되고 그의 재산이 몰수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군대를 카스티야와의 국경지대에 배치했다. 이에 후안 2세는 알폰소 5세의 동생 후안 왕자를 알폰소 5세에게 보내 협상하도록 했다. 1425년 9월 3일, 양국은 토레 데 아르시엘 조약을 체결했다. 엔리케는 이 조약에 따라 석방되었고 체포 후 압수된 모든 재산과 수입을 돌려받았으며, 산티아고 기사단장으로서의 지위도 회복되었다.

토레 데 아르시엘 조약 체결 후, 카스티야 고위 귀족 일부가 후안 왕자를 중심으로 연합해 알바로 데 루냐의 왕권 강화 정책에 맞섰다. 후안은 귀족들과 함께 알바로 데 루냐를 궁정에서 추방하라고 요구했고, 후안 2세는 압력에 버티지 못하고 1427년 9월 5일 알바로 데 루냐와 추종자들을 1년 반 동안 추방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후안 2세의 삼촌인 파드리케 엔리케스가 아르호나 공작으로 지명되었지만, 후안 왕자를 중심으로 뭉쳤던 귀족들은 이제 자기들끼리 권력 분쟁을 벌였다. 급기야 일부 귀족들이 파드리케와 후안의 전횡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알바로의 복귀를 요청했고, 후안 2세는 즉시 받아들여 1428년 2월 6일 알바로를 5개월만에 복귀시켜 총독 직위를 맡겼다.

1428년 6월 21일, 후안 2세는 알바로 데 루냐의 조언을 받아들여 후안 왕자와 엔리케 왕자에게 궁정에서 떠나라고 명령했다. 뒤이어 파드리케 엔리케스가 반역 혐의로 체포된 뒤 페냐피엘 성에 감금되어 1430년 그곳에서 사망했다. 이후 1429년 1월 일레스카스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하고 그라나다의 무슬림 토후국을 공격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4천만 마라베디를 거둬들여 군대를 육성한 뒤 엔리케와 후안을 공격했다. 이에 알폰소 5세가 두 동생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1429년에서 1430년 사이에 카스티야 왕국으로 진격하면서 양국의 전쟁이 발발했다.

후안 2세와 알바로 데 루냐는 카스티야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엔리케와 후안이 카스티야 영내에 가지고 있던 모든 영지를 그들에게 골고루 분배했고, 안 그래도 아라곤 왕국을 적대시했던 귀족들은 기꺼이 왕을 위해 싸우겠다고 맹세하고 앞다퉈 아라곤군을 공격했다. 이로 인해 전세가 불리해지자, 알폰소 5세는 자드라케에서 자신의 아내이자 후안 2세의 누이인 마리아의 설득을 받아들여 마자노에서 휴전 협정을 맺기로 했다. 양국은 5년간 전쟁을 벌이지 않으며, 후안 2세는 후안과 엔리케의 소유였던 세구라 성, 알부케르케 성, 알바 데 토르메스 성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두 왕자는 다른 재산을 돌려받지 못했고, 카스티야 왕국에 입국할 수도 없었다. 알폰소 5세는 전세가 불리한 상황에서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판단하고 수용했다.

알부케르케 성에서 여전히 저항하던 엔리케와 페드로는 조약을 수용하길 거부하고 2년간 항전했다. 그러다 1432년 7월 알바로 데 루냐가 페드로를 체포하자, 엔리케는 더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동생을 석방시키는 대가로 카스티야를 떠나기로 했다. 이후 엔리케, 후안, 페드로 형제는 알폰소 5세가 머물고 있던 나폴리로 향했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아라곤 내의 모든 영지와 요새는 후안 2세와 알바로 데 루냐에게 몰수되었다. 이후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아라곤 왕국의 침공이 몇 차례 있었지만 모두 격퇴되었고, 1436년 9월 22일 양국은 톨레도 협약을 맺으면서 최종적으로 화해했다. 이때 평화 협상을 중재한 나바라 여왕 수리아 1세의 딸 수리아 2세와 후안 2세의 아들 엔리케 4세의 결혼이 합의되었다.

아라곤과의 전쟁에서 사실상 승리하면서 알바로 데 루냐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자, 귀족들은 강한 반감을 품었다. 특히 1437년 8월 13일 대표적인 레온 귀족 페드로 만리케가 알바로의 권고를 받아들인 후안 2세의 명령으로 체포되자, 페드로의 친척과 지지자들이 카스티야 제독 파드리케 엔리케스를 중심으로 뭉쳐 왕을 상대로 내전을 단행했다. 1438년 8월 페드로 만리케는 내전으로 혼란해진 틈을 타 푸엔테 도냐 데 타호 요새를 탈출한 뒤 1439년 2월 파드리케 엔리케스 등 여러 귀족과 함께 후안 2세에게 "알바로 데 루냐와 그의 모든 친척들을 추방하지 않으면 반란을 멈추지 않겠다"고 경고하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반란군은 그해 3월 중순에 바야돌리드를 공략했다. 이에 후안 2세는 아라곤 왕자이자 나바라 공동 국왕인 후안에게 반란을 진압하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후안 왕자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 카스티야 왕국에 들어섰지만, 반란군 지도자들로부터 "우리를 도와준다면 빼앗겼던 영지를 되돌려받게 해주겠다"는 제안을 받자 이내 그들 편에 서기로 마음먹었다. 1439년 6월, 후안은 두 반대 세력의 지도자들을 토르데시야스에 집결시킨 뒤 4개월간 논의한 끝에 1439년 10월 알바로를 6개월간 추방하고 양자가 화해하며 왕은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한 평화 협약을 수립했다. 그러나 알바로를 지원했던 귀족들이 그가 소유했던 영지를 되돌려주기를 거부했고, 알바로 데 루냐는 궁정 내에 있던 자신의 파벌을 통해 왕과 계속 접촉하자, 후안은 알바로를 적대시하는 귀족들과 함께 후안 2세에게 경고장을 보냈다.
우리의 조언 외에는 어떤 것도 듣지 말 것이며 어떤 것도 위반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라.

메시지를 받은 다음날인 1440년 1월 17일, 후안 2세는 아들 엔리케 4세와 알바로 데 루냐 및 지지자들과 함께 아빌라로 탈출했다. 이에 후안 왕자는 중재자로서의 태도를 벗어던지고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 편에 섰고, 그의 여동생이자 후안 2세의 아내인 마리아 왕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여러 도시가 잇따라 반군 편으로 넘어가면서, 후안 2세는 점점 고립되었다. 급기야 반군 세력은 왕이 도피했던 아빌라으로 진군하면서 왕에게 다음의 메시지를 보냈다.
"당신의 근위대장은 당신의 모든 신체와 힘을 악마 같은 마법으로 묶고 있다. 왕권과 명예를 회복하고 싶으면 그와 결별하라."

결국 1440년 5월 바야돌리드에서 열린 코르테스에서, 후안 2세는 알바로 데 루냐와 지지자들을 영구적으로 추방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요구사항을 모두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후안 2세의 아들 엔리케 4세와 나바라 왕의 딸 수리아 2세의 결혼식이 1440년 9월 15일 바야돌리드에서 거행되었다. 하지만 1441년 1월 초, 후안 2세는 엔리케 4세와 함께 또다시 탈출하여 세비야 대주교와 세고비아 주교가 이끄는 알바로 데 루냐의 지지자들을 규합했다. 이후 6개월간 수차례의 전투가 벌어진 끝에, 6월 28일 후안 2세의 근거지인 메디나 데 캄포가 공략되면서 반란 세력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며칠 후, 포로 신세나 다름없던 후안 2세는 반란군의 요구에 따라 알바로 데 루냐를 6년간 추방하기로 했다.

이후 왕을 보좌할 코르테스를 구성할 의원을 놓고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던 1443년 7월 9일, 카스티야 제독 파드리케 엔리케스 등이 정변을 일으켜 후안 2세를 납치한 뒤 라마가 성채에 가두었다. 그들은 알바로 데 루냐가 권좌에 복귀하기 위해 후안 왕자와 엔리케 왕자의 보좌관인 후안 파체코를 체포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며, 이를 막기 위해 예방조치를 취했다고 주장했다. 그 후 후안 왕자의 파벌이 권력을 독점하고 국정을 좌지우지하자, 엔리케 4세는 1444년 3월 29일 카스티야 고위 귀족들을 규합한 뒤 아버지를 불법적으로 납치한 후안과 '외국인'들을 몰아내겠다고 선포했다. 여기에 알바로 데 루냐가 엔리케 4세에게 가담하여 엔리케 왕자와 함께 왕을 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내전은 1년간 이어지다가 1445년 5월 19일 올메도 전투에서 엔리케 4세와 알바로 데 루냐가 이끄는 왕실군이 대승을 거두고 후안 왕자를 아라곤 왕국으로 내쫓으면서 막을 내렸다.

1445년 오빠 후안을 돕다가 유폐와 복귀를 반복하던 마리아 왕비가 사망하자, 후안 2세는 알바로 데 루냐의 조언에 따라 1447년 8월 포르투갈 국왕 주앙 1세의 아들 주앙의 딸 이자벨과 결혼했다. 알바로는 새로운 왕비를 자신의 통제 하에 두려 했고, 십지어 부부 생활까지 간섭했다. 이에 분개한 이자벨은 은밀히 전 왕비 마리아의 아들인 엔리케 4세와 동맹을 맺고 알바로를 질시하는 귀족들을 은밀히 끌여들었다. 그러던 1450년, 아라곤 왕자이자 나바라 국왕 추안 2세와 아들 카를로스 4세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알바로는 이번 기회에 나바라 왕국을 공략함으로써 누구도 자신에게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위상을 끌어올리기로 마음먹고, 나바라 국경지대에 군대를 집중 배치했다.

1451년 8월, 카스티야군은 알바로 데 루나의 지휘하에 나바라 왕국으로 쳐들어가 부라돈 성을 함락하고 카를로스를 에스텔라에 가둬놓고 포위했다. 아라곤의 후안은 아들을 돕기 위해 사라고사로 진군했지만, 아버지를 믿지 못한 카를로스는 카스티야군과 동맹을 맺기로 한 뒤 그들을 돌려보냈다. 이리하여 나바라 왕국의 영토 상당수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 일은 오히려 알바로가 후안 2세의 신임을 잃은 계기가 되었다. 후안 2세는 자신의 허가도 없이 군대를 마음껏 운용한 알바로에게 경계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고, 이자벨은 그런 왕의 마음에 알바로에 대한 의심이 박히도록 유도했다.

1453년 4월, 왕실의 최고 회계관 알론소 페레스 데 비베로가 괴한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알론소 페레스는 왕비의 부름을 자주 받기도 했는데, 알바로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끝에 그가 왕비의 지시를 받들어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단정하고 암살을 사주했다고 한다. 카르바할 연대기에 따르면, 알바로의 아들 후안 데 루나가 알론소 페레스를 살해한 뒤 범죄를 감추기 위해 창밖으로 내던졌다고 한다. 이에 이자벨은 왕국의 고위 관리를 제멋대로 죽여버린 알바로를 고발했고, 후안 2세는 이를 받아들여 알바로를 알론소 페레스 살인 교사 혐의로 체포했다. 그 직후, 이자벨과 엔리케 4세는 왕의 허락을 받고 정변을 일으켜 알바로의 측근들을 대거 숙청했다. 이후 알바로에게 전 왕비 마리아를 독살한 혐의를 추가로 뒤집어씌우고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6월 2일에 바야돌리드 광장에서 참수했다.

3.12. 엔리케 4세

알바로를 의심한 끝에 죽이긴 했지만, 어려서부터 깊이 의지하고 총애했던 신하가 한 순간에 사라지자 깊은 상실감과 슬픔에 빠진 후안 2세는 건강을 해쳤고, 1454년 7월 21일 바야돌리드에서 사망했다. 이후 왕위에 오른 엔리케 4세는 포르투갈 국왕 두아르트 1세의 딸 주아나와 결혼함으로써 포르투갈과 결혼 동맹을 맺었다. 그 후 쿠엘라르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하고 나스르 왕조에 대한 레콩키스타를 선포한 뒤 공세를 개시했다. 그는 카스티야 왕국이 아버지 대에 벌어진 심각한 내전으로 인해 대규모 원정을 감행할 여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소규모 기병들이 적의 영토로 쳐들어가서 약탈을 자행하고 적이 반격하기 전에 철수하는 방식의 작전을 구사했다. 그 결과 카스티야 왕국은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나스르 왕조에게 피해를 지속적으로 입힐 수 있었고, 1457년 히네마를 공략했다. 하지만 나스르 왕조 역시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면서 피해를 입은 귀족과 백성들의 불만이 갈수록 커지자, 1457년 나스르 왕조의 타이파 아부 나스르 사드와 휴전 협약을 체결했다.

1458년 나바라의 국왕이자 아라곤 왕자 후안이 형 알폰소 5세의 뒤를 이어 아라곤 국왕 추안 2세로 즉위했다. 그는 엔리케 4세에게 불만을 품은 카스티야 귀족들을 은밀히 후원해 카스티야 왕국이 또다시 내란에 휩쓸리도록 유도하려 했다. 이에 후안 파체코와 벨트란 데 라 쿠에바가 왕의 신임을 받고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 아라곤 국왕과 은밀히 내통했다. 여기에 별 볼 일 없는 하급 귀족이었던 벨트란 데 라 쿠에바가 왕의 신임을 얻어 급격하게 승진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후안 파체코가 추종자들을 끌어모아 벨트란과 권력 투쟁을 벌이면서, 카스티야 왕국에 내전이 또다시 벌어질 조짐이 일었다. 급기야 귀족들이 이복동생인 알폰소를 왕으로 세우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엔리케 4세는 1461년 알폰소와 이사벨 남매를 이자벨 왕비에게서 멀리 떨어진 궁정으로 이송하라고 명령했다. 이때부터 엔리케 4세는 이자벨 왕비와 이복 동생들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병사들에게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감시하도록 지시했다.

1462년, 주아나 왕비가 딸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를 낳았다. 이로써 엔리케 4세는 오래도록 갈망했던 자식을 얻었다. 그는 1462년 5월 9일 마드리드의 산 페드로 엘 비에호 성당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후아나를 아스투리아스 여공이자 왕국의 상속자로 선포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후아나가 벨트란 데 라 쿠에바의 딸이라며 벨트란의 딸이라는 의미인 '라 벨트라네하(la Beltraneja)'라는 모욕적인 별명을 붙였고, 엔리케 4세는 동성애자이며 성적으로 능력이 없기에 자식을 낳을 수 없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한편 1462년 8월 11일 아라곤과 나바라 국왕 후안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카탈루냐 인들은 엔리케 4세를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푸아 백작 가스통 4세가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의 지원하에 카탈루냐 봉기를 진압하러 출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엔리케 4세는 굳이 서유럽의 강대국인 프랑스와 대적하면서까지 카탈루냐를 확보하려 할 이유는 없다고 여기고 개입하지 않았다.

1464년, 그동안 국정을 총괄하던 후안 파체코가 벨트란 데 라 쿠에바와의 정쟁에서 패해 형제 페드로 기론과 함께 실각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후안 파체코는 귀족들을 선동해 1464년 5월 알칼라 데 에나레스에서 귀족 연합을 결성하고 "벨트란의 사생아인 후아나를 인정할 수 없으며, 오직 알폰소만이 왕국의 정당한 후계자"라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엔리케 4세가 유대인과 무슬림을 보호하고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을 위해 귀족에게 해를 끼쳤으며, 과도한 세금을 부과했다고 비난했다. 반란에 가담한 귀족이 워낙 많아서 무력으로 진압하기 곤란해지자, 엔리케 4세는 어쩔 수 없이 그들과 협상하기로 했다. 그 결과 알폰소는 일전에 엔리케 4세에 의해 궁정에 유폐되었을 때 빼앗겼던 산티아고 영지를 돌려받고 후계자로 인정받았으며, 벨트란 데 라 쿠에바는 추방되고 후안 파체코가 권좌에 복귀했다. 다만 후아나는 알폰소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왕의 적출자로 인정되었다.

1465년 1월 16일, 후안 파체코의 주관하에 메디나 델 캄포에서 열린 코르테스에서 귀족들에게 부과된 세금을 대부분 면제하고 무슬림과 유대인의 권리 상당수를 박탈하며, 왕권을 통제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이 체택되었다. 엔리케 4세가 이를 수용하기를 거부하자, 후안 파체코 등은 4월 27일 반기를 들고 알폰소 왕자를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2세'로 옹립했다. 엔리케 4세는 지지자들을 규합해 이들에 맞서는 한편, 후안 파체코의 동생 페드로 기론을 회유하기 위해 이사벨 공주와의 결혼을 제의했다. 페드로 기론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회유가 성공하는 듯했지만, 페드로가 결혼식이 열리기 전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실패했다.

이후 카스티야 왕국은 엔리케 4세 지지 세력과 알폰소 왕자를 내세운 반란군 간의 각축전으로 인해 혼란에 빠졌고, 귀족들 사이에서도 세력 확장을 위한 충돌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각 도시와 마을들은 자경단을 결성하고 중앙 정부의 통제에 따르지 않았으며, 유대인과 개종한 무슬림들을 겨냥한 폭동이 종종 벌어졌다. 1467년 엔리케 4세의 지지자들과 알폰소 왕자의 추종 세력이 올메도에서 맞붙었는데, 양측 모두 승리를 주장했기 때문에 어느 쪽이 이겼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엔리케 4세가 전투가 끝난 후 페드로 아리아스 데 아빌라와 알바 백작의 지원을 잃은 반면, 알폰소 측은 톨레도 대주교의 지지를 얻어냈다.

결국 전세가 갈수록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에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엔리케 4세는 왕실 재무부의 소재지인 세고비야를 알폰소에게 내주고 아내 주아나를 인질로 내줘야 했다. 주아나는 알라에호스 성에 감금되었고 세비야 대주교 알론소 데 폰세카의 감시를 받았는데, 나중에 대주교의 조카인 페드로 폰세카를 애인으로 사겼고 1468년 11월 30일에 2명의 쌍둥이 자녀 페드로와 안드레스를 낳았다. 이 소식을 접한 엔리케는 배신감에 사무쳐 주아나와의 결혼이 무효라고 선언했다.

1468년 7월 5일, 세고비야에 군림하던 알폰소가 사망했다. 여러 연대기에 따르면, 이자벨 왕비는 아들 알폰소가 15살의 나이에 절명한 이후로 정신병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후 알폰소를 국왕으로 옹립했던 귀족들이 이사벨을 여왕으로 옹립하려 했지만, 그녀는 엔리케 4세가 있는 한 절대 왕위에 오르지 않겠다며 거부했다. 엔리케 4세는 이사벨의 이같은 태도에 감명받고 1468년 9월 18일 또는 19일에 로스 토로스 데 귀산도에서 이사벨과 만나서 그녀를 아스투리아스 여공으로 세우고 왕위 후계자로 지명하며, 귀족들은 엔리케 4세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내용의 협약을 체결했다.

1469년, 엔리케 4세는 이사벨을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5세와 결혼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사벨은 결혼을 신청하러 온 포르투갈 왕의 대리인을 쫓아버리고 아라곤 왕자 페르난도와의 혼인을 독단으로 결정했다. 엔리케 4세가 이에 분노해 그녀를 궁에 감금하자, 이사벨은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 부하들을 데리고 탈출한 뒤 엔리케 4세가 파견한 추격대를 피해 바야돌리드까지 가서 페르난도 왕자와 만났고, 그 해 10월 바야돌리드 시내 성당에서 결혼을 감행했다. 엔리케 4세는 이사벨의 행위에 분노해 이사벨의 어머니 이자벨 왕비를 아레발로에서 쫓아내고 플라센시아 백작 알바로 데 수니가 이 구즈만에게 넘겼으며, 딸 후아나를 카스티야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이에 다수의 귀족들이 왕의 조치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다. 엔리케 4세는 이번 반란을 조기에 진압하는 데 실패했고, 카스티야 전역이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그러던 1473년 11월, 세고비야 요새 지휘관이자 왕의 사령관인 안드레스 카브레아의 중재하에 엔리케 4세와 이사벨과의 휴전이 체결되었다. 이후 엔리케 4세는 1473년 12월에서 1월 사이에 이사벨과 페르난도를 만나 우호적인 대화를 나눴지만, 후아나를 왕위 후계자로 삼는다는 결정을 끝내 바꾸지 않았다. 그 후 마드리드에서 후안 파체코의 보호를 받으며 남은 한 해를 보내던 엔리케 4세는 1474년 10월 후안 파체코의 임종을 지켜본 뒤 12월 11일에 그의 뒤를 따라갔다.

3.13. 스페인의 탄생

엔리케 4세 사후, 카스티야의 대다수 귀족들은 이사벨 1세페르난도 2세를 받들기로 했지만, 톨레도에서 무르시아까지 이르는 카스티야 남부 일대의 방대한 영지를 보유한 비에나 후작 디에고 로페스 파체코와 톨레도 대주교 알폰소 카리요 데 아쿠 등 일부 귀족과 성직자들은 엔리케 4세의 딸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를 지지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력이 이사벨의 지지자들보다 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5세에게 조카 후아나가 카스티야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지원해달라고 요청하면서, 그녀와 결혼하고 카스티야의 공동 국왕이 되라고 제안했다. 아폰수 5세는 이를 받아들여 1,600명의 보병과 5,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국경을 넘어 엑스트레마두라를 거쳐 팔렌시아에 도착해 후아나의 지지자들과 합세한 뒤 1475년 5월 25일 후아나와 결혼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은 포르투갈에 이어 프랑스 왕국이 후아나를 지원하고 아라곤 왕국이 이사벨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국제전의 양상으로 흘러갔다. 그러다 1476년 3월 1일에 벌어진 토로 전투에서 카스티야-아라곤 연합군이 후아나 지지세력과 포르투갈 왕국 동맹군을 격파하면서 전세가 기울었다. 아폰수 5세는 1476년 6월 13일까지 카스티야 왕국과의 전쟁을 이어갔지만, 전세를 뒤집을 가망이 없자 후아나를 데리고 포르투갈로 철수했다.

이후 3년간 국경지대와 해상에서의 간혈적인 전투가 이어지다가 1479년 9월 4일 양국이 알카조바스 협약을 맺으면서 전쟁이 종결되었다. 포르투갈 왕국은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가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공동 국왕이 된 것을 인정하는 대가로 마데이라와 아조레스의 소유권, 와타스 왕조와 기니에 대한 독점적 무역권, 그리고 카나리아 제도를 제외한 대서양 섬들의 소유권을 인정받았다.[12] 또한 후아나는 이사벨의 아들 후안이 성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결혼하거나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 중 하나를 6개월 안에 선택할 기회를 부여받았다. 후아나는 자신이 심한 모욕을 당했다고 여기고 즉시 산타 클라라 데 코임브라 수도원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수녀 서약을 하고 평생 수녀로 지냈다.

내전에서 승리하여 남편 페르난도 2세와 함께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의 군주가 된 이사벨 1세는 페르난도에게 '스페인 왕국은 남편과 공동 통치하지만, 카스티야의 정권에 대해서는 아라곤의 국왕이 간섭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래서 이사벨은 남편의 나라 아라곤에, 페르난도는 아내의 나라 카스티야에 대해 통치자의 배우자로서 관여할 수는 있었지만 공동 통치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통일 스페인 왕국의 기반이 그녀의 치세에 이뤄졌기에, 스페인이 이때 탄생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사벨 1세는 내전으로 피폐해진 카스티야 왕국을 빠르게 재건하고 세제 개혁, 군대 정비, 종교재판소 등 여러 정책을 실시했다. 1492년 1월 2일에 남편 페르난도와 함께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왕국인 나스르 왕조그라나다를 함락시키고 알함브라 궁전에 입성해 레콩키스타를 완료했다. 같은 해 이사벨 1세의 지원을 받고 신항로 개척을 목표로 출항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 이처럼 에스파냐의 많은 업적이 이루어졌던 1492년은 아직까지도 에스파냐 국민들에게 잊혀지지 않고 있다. 반면 스페인에 남은 무슬림들에게 개종을 강요하고 이를 따르지 않은 이들을 죽이거나 강제 추방시킨 점은 여왕의 오점으로 남아있다.

이사벨 1세가 워낙 강인한 성격이었고 카스티야 왕국의 위세가 아라곤 왕국을 능가했기 때문에, 페르난도 2세는 아내가 살아있는 동안 뚜렷한 존재감을 보이지 못했다. 그러던 1504년 11월 26일, 이사벨 1세가 5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이사벨 사후에는 차녀 후아나 1세가 카스티야 왕위를 계승했지만, 그녀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페르난도 2세와 후아나의 남편 펠리페 1세가 각자 섭정, 공동 왕이 되려고 대립했다. 카스티야인들은 네덜란드 출신이며 후아나를 박대하는 펠리페 1세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2세가 단독 통치하는 것이 더 싫었기에 펠리페 1세를 공동 왕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펠리페 1세는 왕위에 오른 지 불과 2달만인 1506년 9월 24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페르난도 2세는 후아나 1세의 섭정 자격으로 카스티야-레온 연합 왕국의 통치권을 확보했다. 펠리페 1세가 속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펠리페 1세의 장남 카를의 왕위 계승을 주장했지만, 페르난도 2세는 카를이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했다. 또한 1507년 딸 후아나 1세의 정신병이 극심하다는 이유로 토르데시야스 성에 유폐시키고 자신에게 반항하는 카스티야-레온 귀족들을 잇따라 숙청했다.

그 후 페르난도 2세는 나바라 왕국 마저 병합하려 했다. 나바라 공동왕 호아네스 3세카탈리나는 자신들의 아들 헨리케 2세를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의 딸과 결혼시켜서 프랑스 왕국의 지원을 얻어내려 했지만, 페르난도 2세는 나바라 왕국이 프랑스 왕국과 결혼 동맹을 맺는 것을 좌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1512년 7월 25일, 페르난도는 알바 공 파드리케 알바레스 데 톨레도에게 군대를 맡겨 나바라 왕국을 침공하게 했다. 아라곤군은 순식간에 나바라 왕국의 수도 팜플로나를 함락하고 피레네 산맥 이남의 상(上) 나바라를 휩쓸고 아라곤 왕국의 영토로 삼았다. 카탈리나와 호아네스 3세는 적의 공세에 압도되어 피레네 산맥 너머로 도주한 뒤 파우, 오르테즈, 타르베 등 피레네 산맥 이북의 하(下) 나바라만 겨우 건졌다. 페르난도 2세는 한동안 나바라 왕을 자칭하다가 1513년 3월 23일 팜플로나에서 회의를 소집해 모든 귀족들에게 충성 서약을 받아낸 후 1515년 나바라 왕국 자체를 없애고 아라곤 왕국의 직할지로 삼았다.

페르난도 2세는 1506년 제르멘 드 푸아와 재혼하고 아들을 낳아서 아라곤과 카스티야 왕국을 물려주려 했다. 그러나 아들이 끝내 태어나지 않으면서 계획이 틀어졌다. 1515년 외손자 카를이 성년이 되자, 합스부르크 가문은 페르난도 2세에게 카를을 정식으로 후계자로 지명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페르난도 2세는 순순히 권력을 외손자에게 내주려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국제 분쟁이 벌어질 기미가 보이던 1516년 1월 23일 페르난도 2세가 사망했다. 이제 카를이 스페인 국왕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지만, 대다수의 스페인 국민들과 귀족들은 외국 출신에다 스페인어를 할 줄 모르는 이가 새로운 국왕이 되는 것에 대해 상당한 저항감을 표출했다.

스페인 귀족들은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이더라도 스페인에서 출생한 카를의 동생 페르난도를 옹립하려 했다. 하지만 카를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부르고뉴 공국, 교황 레오 10세 등 막강한 세력의 지원에 힘입어 압력을 행사하자, 결국 아라곤 귀족들은 카를을 단독 군주로 받들기로 했으며 카스티야 귀족들 역시 그를 모친 후아나와 함께 공동왕으로 지명했다. 이리하여 카를은 카를로스 1세로서 아라곤과 카스티야 모두의 국왕이 되었고, 그의 아들인 펠리페 2세 대에 이르러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연합 왕국은 스페인 왕국으로 완전히 통합되었다. 그 후 압스부르고 왕조의 역대 국왕들은 카스티야 국왕을 자처했지만,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해 집권한 보르본 왕조는 1707년~1716년 "모든 이베리아 구 행정부를 마드리드 정부에 편입하는" 누에바 플란타 법령을 반포하면서 카스티야 왕국을 정식으로 폐지했다.

4. 역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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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미 당시 카스티야 연합 왕국은 남아메리카 대륙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2] 레온과의 연합 왕국 이전 카스티야 왕으로서는 1217년부터 재위[3] 이때는 아직 스페인인이라는 개념이 정립되기 이전 시절이었다.[4] 페르난도 3세의 아들[5] 알폰소 10세의 아들이자 산초 4세의 동생이다.[6] 교황 마르티노 4세는 마리아가 산초 4세와 가까운 친척이고 산초 4세의 사생아 중 한명의 대모인 점을 문제삼아 결혼을 불허했다.[7] 알폰소 10세의 장남 페르난도의 아들이다.[8] 마린 왕조의 왕자로, 에미르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한 뒤 나스르 왕조로 망명한 후 나스르 왕조의 핵심 장군이 되었다.[9] 알폰소 11세가 페드로를 폐태자시키고, 총애하던 엔리케에게 카스티야 왕위를 물려주려고 한 것은 페드로를 추방시키고, 엔리케에게 제대로 된 후계 교육을 시킨 것으로 보아 정황상 가능성이 매우 높다.[10] 페드로가 블랑슈와 파혼하고 영국과 동맹을 맺으려 했다는 가설 역시 존재한다.[11]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2세의 딸이자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3세의 아내[12] 카나리아 제도는 카스티야 왕국의 수중에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