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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 왕국 가톨릭 군주 Recceswinth | 레케스윈트 | ||
제호 | 한국어 | 레케스윈트 |
라틴어 | Recceswinth | |
생몰 년도 | 미상 ~ 672년 9월 1일 | |
재위 기간 | 653년 9월 30일 ~ 672년 9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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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고트 왕국 가톨릭 13대 국왕.2. 행적
귀족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고 교회를 통제했으며, 사법 체계를 재정비하여 고트족과 로마인의 통합 정책을 진두지휘한 군주 친다수윈트의 아들로, 649년 1월 20일 아버지와 공동 왕으로 등극했다가 653년 9월 30일 아버지가 사망한 뒤 단독 통치를 시작했다. 그동안 친다수윈트의 탄압 정책에 숨죽이고 있던 귀족들은 이 때를 틈타 반기를 들었다. 스페인 타라코나 공작 프로이아가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켜 사라고사를 포위하면서 바스크인과 프랑크 왕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사라고사 수비대와 주민들이 완강한 저항을 해서 시간을 잡아먹는 사이, 레케스윈트는 진압군을 편성해 사라고사 성벽 아래에서 프로이아와 바스크 동맹군을 상대로 상당한 손실을 입은 끝에 격파했다.그리하여 프로이아의 반란을 진압했지만, 아버지의 강경 정책으로 인해 불온해진 분위기를 수습할 필요성을 느낀 레케스윈트는 653년 12월 16일 제8차 톨레도 공의회를 소집했다. 그는 이 공의회에서 반란군에게 불관용으로 일관하는 이전 공의회의 결정은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왕의 의무에 위배된다고 밝히며, 광범위한 사면령을 발표하고 박해를 받은 사람들은 공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했다. 다만 몰수된 재산의 반환은 허용하지 않았으며, 이 재산은 자신의 재산이 아니라 왕국의 재산으로 간주했다. 그는 자신과 후손들은 친다수윈트가 즉위하기 전에 가졌던 재산만은 상속받을 수 있고, 왕이 된 후에 얻은 모든 재산은 국고에 헌하며, 왕위에 오른 자는 출신과 상관없이 이를 처분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왕이 사망한 뒤 주교와 최고위 관료들의 동의하에 최대한 빨리 새 왕을 선출하기로 했다.
그는 아버지가 시작한 법전 편찬 작업을 지속해 654년 <Liber Iudiciorum(심판의 책)>을 반포했다. 여기에는 역대 국왕들이 제정한 법 324조항, 친다수윈트의 법 99조항, 그리고 자신이 제정한 법 87조항이 포함되었다. 로마인과 고트인의 구분 없이 동등한 조건하에 그대로 적용되었으며, 노예에 대한 신체적 상해를 금지하고, 주인이나 후원자의 명령으로 범죄를 저지른 자유인 및 노예는 처벌받지 않았다. 이 조항에 반감을 품은 귀족들이 분쟁을 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 익명의 알안달루스 무슬림 역사가가 기술한 <754년 연대기>에 따르면, 이후 18년간 혼란이 일어났고 고귀한 이가 많이 죽었다고 한다.
653년 제8차 톨레도 공의회에서 상당부분을 양보했지만, 그는 교회에 더 이상 양보할 의사는 없었다. 655년 제9차 톨레도 공의회와 656년 제10차 톨레도 공의회가 개최되었지만, 오직 교회 문제만 다뤘을 뿐 정치 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이후 그가 사망할 때까지 16년간 공의회는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672년 9월 1일에 살라망카 인근의 게르티코스 휴양지에서 사망했다. 당시 그에게 자녀가 없었기에, 군 사령관 왐바가 새 왕으로 추대되었다.
3. 레케스윈트의 왕관
1858년에서 1861년 사이에 톨레도 근처의 과다무르 시내 후에타 데 구아라자(Huerta de Guarrazar) 유적지에서 서고트 왕국 시기에 제작된 보물들이 발견되었다. 그 중 하나인 레케스윈트의 왕관은 마드리드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되었다. 이 왕관에는 "RECCESVINTHVS REX OFFERET(레케스윈트 왕이 썼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