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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 왕국 가톨릭 군주 Sisebut | 시세부트 | ||
제호 | 한국어 | 시세부트 |
라틴어 | Sisebut | |
스페인어 | Sisebuto | |
생몰 년도 | 미상 ~ 621년 2월 | |
재위 기간 | 612년 2/3월 ~ 621년 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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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고트 왕국 가톨릭 6대 국왕.2. 행적
서고트 유력 귀족으로, 612년 2/3월 군데마르 왕이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하자 동료 귀족들과 군대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가 왕위에 오른 직후, 아스투리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리퀼라 또는 티우파디 백작이 즉시 이를 진압하러 출정했는데, 반란군의 기세를 꺾기는 했지만 아스투리아스 산맥이 워낙 험준했기 때문에 완전 제압엔 실패했다. 비슷한 시기, 수인틸라 장군은 칸타브리아 부족 로콘 또는 룬콘 부족을 복속시켰다.612년 바스크인들이 왕국의 북쪽 지역을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하자, 시세부트는 613년 최근 창설된 서고트 함대를 친히 이끌고 칸타브리아와 오트리고니아, 바스크, 바르둘리아, 카리스티아 등지의 해안에 상륙하여 칸타브리아-바스크인과 전투를 벌였다. 전투 결과가 어찌 되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바스크인들이 지배하는 산악지대를 평정하지 못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공연 예술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에우세비오 데 타라스코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연극에 관심을 보이는 주교를 질책하고 서신을 전달한 사람을 바르치노의 주교로 봉헌하라고 명령했다. 또한 랑고바르드 왕국의 군주 아길루프의 아들 아달랄드에게 아리우스파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라고 권고하는 등 가톨릭에 대한 신앙심이 투철했다.
612년 8월 2일 부분일식이 이베리아 반도 여러 지역에서 목격되자 각지의 시골에서 이교 관습과 미신이 부활했다. 이에 그는 613년 칸타브리아-바스크 원정 중에 일식에 관한 시를 짓고 세비야의 이시도르 주교에게 보내면서 백성들의 무지와 폭동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또한 614년 1월 13일, 타라코나에서 공의회를 개최해 598년 우에스카 공의회에서 성직자가 평생 독신으로 지내야 한다는 교리를 확정지었다.
614년과 615년에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여 여러 번 승리했으며, 이 무렵에 말라가를 정복했다. 동로마 총독 카르사리우스가 기독교인끼리 피를 더 이상 흘리지 말자고 호소하자, 그는 이에 마음이 움직여 서로 포로를 교환하고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그와 카르사리우스 간에 오간 4개의 편지는 당시의 외교 절차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한편, 시세부트는 유대인에 대한 박해 정책을 펼쳤다. 그는 레카레드 1세의 "유대인은 기독교인 노예를 소유할 수 없다"는 법령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며, 이 법령을 관철하기 위해 일련의 조치를 내렸다.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유대인이 기독교인 노예를 소유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으며, 유대인들이 기독교인 노예와 재산을 기독교인들에게 합리적인 가격에 팔아야 하며, 아프리카나 프랑스에 있는 유대인에게 그들을 팔 수 없고, 거주지 근처에서만 판매가 이뤄져야 한다고 규정했다. 또한 유대인은 기독교 노예를 해방시킬 수 있지만, 해방된 노예는 국가에 귀속되며 이전 유대인 주인의 후원은 금지되었다. 거짓으로 판매한 유대인은 가차없이 처형되었다. 이 법령은 612년 7월 1일에 발효되었으며, 이 날짜 이후에 기독교인 노예를 소유한 유대인이 발견되면 절반의 재산을 몰수하고 노예는 석방되었다.
그는 여기에 더해 기독교인을 유대인으로 개종시키는 것을 엄히 금지했다. 유대인으로 개종한 사람이 가톨릭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 경우엔 공개 장소에서 채찍질을 하고, 끝까지 따르지 않으면 목을 베거나 왕이나 왕이 임명한 사람의 노예로 넘겨졌다. 또한 가톨릭인과 결혼한 뒤 개종을 거부한 유대인은 평생 추방되지만, 개종한다면 노예를 포함한 재산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낳은 자녀 역시 기독교인으로서 세례를 받아야 했다. 615년경에는 일부 유대인들을 상대로 기독교로 강제 개종시키는 정책을 추진했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유대인이 피살당하거나 해외로 망명했다.
시세부트는 문학에 관한 소양이 뛰어난 군주이기도 했다. 그는 61편의 라틴어 시를 집필했는데, 주요 주제는 천문학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시에서 천상에서 발생하는 현상은 신의 의지로 이뤄지는 것이 분명하다며, 이를 집중적으로 연구해 신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게 신실한 신자의 도리라고 밝혔다. 세비야의 이시도르는 그와 편지를 교환하면서 과학에 대한 관심을 품고 천문학과 지리학에 관한 백과사전을 집필했다.
621년 2월 툴레도에서 사망하고 아들 레카레드 2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