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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 왕국 발티 왕조 8대 군주 Aiwareiks | 에우리크 | ||
제호 | 한국어 | 에우리크 |
고트어 | Aiwareiks | |
라틴어 | Euric | |
스페인어 | Eurico | |
생몰 년도 | 미상 ~ 484년 12월 28일 | |
재위 기간 | 466년 ~ 484년 12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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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고트 왕국 8대 군주. 남부 갈리아와 이베리아 반도의 패권을 확보하여 왕국의 최전성기를 이룩한 명군이다.2. 행적
서고트 왕국 5대 군주 테오도리크 1세의 아들로, 형으로 토리스문드, 테오도리크 2세, 프레데리크가 있었고, 동생으로 힘네리스가 있었으며, 누이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2명이 있었다. 466년, 테오도리크 2세가 툴루즈에서 부하들에게 칼에 찔러 죽었다. 세비아의 이시도로스는 그가 암살을 사주했다고 주장했다. 6세기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요르다네스는 테오도리크 2세는 자연사했지만 그가 지나치게 서둘러서 왕이 되었기에 의심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기술했다.그는 왕이 된 직후인 466년과 467년에 수에비 왕국, 반달 왕국, 동로마 제국에 사절을 보내 자신이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그들로부터 인정받았다. 다만 467년 동로마 제국이 서로마 제국과 연합하여 반달 왕국을 공격했을 때, 그가 보낸 사절단은 군대를 따라가다가 도중에 귀국했다. 로마와 반달 왕국과의 분쟁에 섣불리 개입하고 싶지 않은 그의 의중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467년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안테미우스는 서고트 왕국의 국력이 신장되는 것에 위협을 느끼고 부르군트족, 브류타뉴인, 갈리아 총독 아에기디우스, 라인 강 연안 지대의 프랑크족과 연합하여 반 고트 전선을 형성하려 했다. 여기에 히스파니아의 친 로마 세력과 수에비 왕국도 끌여들일 계획이었다. 하지만 에우리크는 반 고트 동맹이 결성되기 전에 행동에 나섰다. 468년, 그는 루시타니아를 장악하고 있는 수에비 왕국으로 쳐들어가 대규모의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수에비 왕 레미스문트는 고트족에 대항하기 위해 안테미우스 황제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사절을 보냈다.
얼마 후, 안테미우스는 갈리아의 마기스테르 밀리툼을 맡고 있던 아르반두스가 자신을 상대로 반역을 꾀했다는 고변을 접했다. 이에 따르면, 아르반두스는 서고트 왕 에우리크에게 자신이 제위를 차지할 수 있게 도와준다면 갈리아를 루아르 강을 경계로 부르군트족과 양분해주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불분명했지만, 안테미우스는 즉시 아르반두스를 체포해 처형했다. 이 소동으로 갈리아 방면 로마군이 일시적으로 행동 불능 상태가 된 사이, 브르타뉴의 왕 라이오타메가 1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부르주 인근으로 진군해 로마군과 합세하려 했다. 에우리크는 즉시 이들을 공격해 데올(현재 샤토루 교외)에서 격파했고, 브르타뉴 잔당들은 부르군트족의 영역으로 도피했다.
에우리크는 이제 로마가 장악하고 있는 남부 갈리아로 방향을 돌렸다. 470년 론 강을 건넌 그의 군대는 지중해 연안까지 진군했다. 당시 안테미우스는 서로마 제국의 권신 플라비우스 리키메르와 분쟁을 벌이고 있었지만, 서고트 왕국이 남부 갈리아를 전부 차지하는 걸 내버려뒀다간 서로마 제국은 끝장이라고 여기고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이 군대는 471년 초여름 에우리크에게 섬멸되었고, 안테미우스의 아들을 포함한 모든 지휘관이 전사했다. 이리하여 서고트군은 리옹, 아를, 아비뇽, 오를레앙, 발랑스, 생폴트루아사토까지 접수했다. 부르군트족이 반격에 나서 발랑스 남쪽의 론 강 좌안 지대에서 고트군을 격퇴했지만, 고트군은 후퇴하면서 초토화 전술을 사용했고, 이 지역에 살던 로마인들은 극심한 기근에 시달렸다. 이후 도시 주교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와 아비투스의 아들인 에키디우스가 버틴 클레르몽을 제외한 아키텐 속주 대부분이 서고트 왕국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472~473년, 에우리크가 이끄는 서고트군은 2개 부대로 나뉜 채 히스파니아 남부로 진격했다. 한 부대는 팜플로나와 사라고사를 점령했고, 다른 한 부대는 지중해 해변 도시와 '먼 히스파니아 속주'의 수도인 타라고나를 점령했다. 에브로 계곡의 로마 귀족들이 연합군을 편성해 맞섰지만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리하여 서로마 제국은 히스파니아를 영영 잃어버렸고, 서고트 왕국은 히스파니아 북서쪽의 수에비 왕국과 북쪽의 바스크 지역을 제외한 히스파니아 전역을 차지했다. 히스파니아 정벌을 달성한 뒤, 그는 갈리아로 눈길을 돌렸다. 473년 마르세유를 함락했고, 자신의 지배에 복종하지 않은 로마인들을 탄압했다. 그는 독실한 아리우스파 신자로, 니케아 공의회가 정한 삼위일체론을 신봉하는 자들을 철저하게 박해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그는 사제들을 감옥에 던져넣고 주교들을 추방하거나 칼로 찔러 죽였으며, 교회 입구에 가시를 심으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또한 에우리크가 가혹한 탄압을 가하는 과정에서 보르도, 로데스, 페리괴, 리모주, 자볼스, 코밍게스, 오즈, 바자스, 그리고 오슈 시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475년, 로마 제국의 새 황제 율리우스 네포스로부터 서고트 왕국과 평화 협약을 맺으라는 지시를 받은 파비아 주교 에피파니우스가 툴루즈에 찾아왔다. 에피파니우스는 서고트 측이 로마가 갈리아의 지배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받아들이고 로마의 봉신을 자처한다면, 황제는 그들이 지금까지 확보한 영역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받아들일 생각이 있다고 밝혔다. 이에 에우리크는 자신은 황제를 '주인'이 아닌 '친구'라고 부를 것이라고 답했다. 에피파니우스는 이에 동의했고, 아키텐 속주에서 유일하게 서고트 왕국의 공세로부터 버텼던 클레르몽이 고트족에게 넘겨졌다. 이제 론 강 동쪽과 뒤랑스 강 남쪽 지역만이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 남았다.
이리하여 남부 갈리아와 히스파니아 대부분의 지배권을 확보한 뒤, 그는 더 이상 전쟁을 벌이지 않고 내치에 전념했다. 그는 고트족 내부에서 전해지는 관습법들을 엮은 성문법전을 반포했으며, 나르본의 레오 등 저명한 로마인들을 측근으로 기용했다. 또한 정교를 탄압하는 한편 아리우스파의 교리를 뿌리내리기 위해 점령지 곳곳에 교회를 신설했다. 한편 주변 세력과 사신을 주고받았는데,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에 따르면 사산 왕조의 사절도 이 시기에 툴루즈 궁정에 찾아왔다고 한다.
서고트 왕국은 그의 치세 때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히스파니아 북서부의 수에비 왕국은 지리멸렬했고, 프랑크 왕국은 라인강 연안에 국한되었으며, 부르군트 왕국과 오도아케르의 이탈리아 왕국 역시 서고트 왕국에 한 수 접어야 했다. 그러나 484년 에우리크가 자연사한 후 프랑크 왕국에서 클로비스 1세라는 걸출한 인물이 등장하면서, 강대했던 서고트 왕국은 위기에 직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