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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군/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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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고대3. 후삼국시대 ~ 고려4. 조선5. 일제강점기6. 대한민국
6.1. '홍주'로의 명칭 변경과 시 승격 시도

1. 개요

홍성군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는 문서.

현재의 홍성군 지역의 원래 이름은 홍주(洪州)로, 충청도의 4대 [1] 중의 하나로 조선시대부터 1896년 13도제가 시행되기 전까지 현재의 충남 서부의 고을들을 관할하는 광역행정구역의 중심지였다.

또한, '천고낙지(天鼓落地)'라고 불렸는데, 이는 '하늘에서 북이 떨어진 천혜의 명당'이란 뜻으로 이로 인해 여러 사건들과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2. 고대

홍성군 지역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 알 수 없지만, 지역 내에 구석기 시대(약 3만년 전)로 추정되는 홍성읍 옥암리 유적, 신석기 시대로 추정되는 광천읍 상정리 유적, 청동기 시대로 추정되는 은하면 장척리와 내포신도시 내 유적 및 홍성군 일대에 분포한 지석묘들이 대표적이다.

특히 2012년 7월 내포신도시 주 진입도로[2] 공사 중 발견한 '홍성 석택리 유적'은 국내에서 발견된 최대 규모의 환호(環濠, 취락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도랑) 유적으로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서도 처음 발굴된 매우 중요한 유적"이라고 평가받고 있다.[3]

이후 舊 홍주 지역은 마한 때는 감해비리국이라는 소국이었다가, 백제에 복속되고 난 후에는 고막부리현이 되었고, 舊 결성 지역은 백제 때 '결기군(結己郡)'이었다. 후에 신라가 백제를 멸망할 때, 이 지역을 중심으로 백제부흥운동이 진행되기도 했었다. 당시 부흥 세력의 중심지 중 하나인 임존성이 근처(현 예산군 대흥면)에 있었고, 다른 한 곳인 주류성과 관련해서 홍성군 내 오서산 자락의 장곡산성(학성산성)이 주류성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통일 이후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웅주의 영역이었고, 경덕왕 때 舊 홍주 지역은 '지심주(支潯州)', 舊 결성 지역은 '결성군(潔城郡)'으로 개칭되었다. 통일신라김헌창의 난에 잠시 신라에서 떨어지긴 했었다.

3. 후삼국시대 ~ 고려

후삼국시대에 접어들면서 홍성군 지역은 '운주(運州)'라고 불렸으며, 견훤을 중심으로 한 후백제궁예를 중심으로 한 후고구려, 그리고 궁예의 뒤를 이어 고려를 건국한 왕건과의 치열한 전장이 되었고 이 때부터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당시 홍성군 지역을 대표하던 호족은 '긍준(兢俊)'[4]이란 인물로 그는 처음에는 궁예 쪽에 붙었다가 고려 건국 과정에서의 혼란을 틈타 웅주(지금의 공주시) 등 다른 지역의 호족들과 함께 후백제로 붙었다가 다시 왕건에게 항복한 이력이 있는 인물이다.(출처 : 홍성군지편찬위원회, 『홍성군지』(홍성군, 2016))

어쨌든 홍성군 지역은 920년대부터 고려와 후백제 간 경계에 놓이면서 여러차례 대치했는데, 가장 큰 전투가 934년 9월에 벌어진 운주 전투이다. 당시 고려 태조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운주(運州)'로 진격하자, 후백제견훤도 갑사(甲士) 5천 명을 직접 이끌고 달려왔다. 그러나 견훤은 굳이 왕건과 싸울 마음이 없었던지라 왕건에게 편지를 보내 화친을 제의한다. 왕건도 처음엔 이 제안에 마음이 흔들렸으나 유금필이 화친을 거절하고 싸울 것을 강력히 주장하자 이내 마음을 바꾸고 그에게 선제 공격을 명령했다. 유금필이 정예 기병 수천을 이끌고 급습을 가하자, 견훤은 그 기세와 용맹에 눌려 달아나고 말았다. 유금필이 그 뒤를 쫓아 후백제군 3천 명을 죽이고, 술사 종훈, 의사 훈겸, 백제의 용장 상달과 최필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리며 대승한다. 이 운주성 전투의 승리로 왕건은 견훤과의 힘겨루기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게 되며, 이후 견훤의 후백제는 왕자들의 후계 다툼에서 골육상잔의 비극이 일어나면서 자멸하게 되었다.(일부 출처 : 박영규 著,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웅진닷컴, 2004))

이후 995년(성종 14)에 '운주도단련사(運州都團練使)'가 되었다가, 1018년(현종 9) '운주(運州)'가 '홍주(洪州)'로 개칭[5]되었고, 그 아래에 결성[6]을 비롯해 3군 11현(현 충청남도 서산시, 당진시, 예산군, 청양군, 홍성군 일대)을 관할했다. 1356년(공민왕 5) 왕사(王師) 보우의 고향이라 하여 '목(牧)'으로 승격했다.[7](출처 : 국역 고려사:지-홍주)

고려 중기 무신정권 과정에서 홍성군 지역에서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는데, 최충헌의 차남 최향이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이 곳으로 귀양을 갔으며, 이후 저항을 하다가 실패해 죽었으며, 여몽전쟁 이후 삼별초가 이 곳까지 와서 저행했으며,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입을 겪었다.

4. 조선

세종실록지리지 홍주목
세종실록지리지 결성현

1413년(태종 13)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각각 '홍주목(洪州牧)'과 '결성현(結城縣)'으로 편성했으며,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읍치를 방어하기 위해 홍주읍성과 결성읍성을 축성했다. 당시 홍주목의 범위는 시대에 따라 달랐지만, 현재의 충청남도 서해안 + 아산시 전 지역과 예산군, 청양군 및 경기도 평택시 일부를 관할했고, 그 중 직할지는 현 홍성군 북동부 및 청양군 서부, 서산시, 당진시 일부였다.

한편 '홍주목'은 충주, 청주, 공주와 함께 충청도 4대 도시였으며, 타 지역에서 반란이나 사건이 벌어졌을 때 '청홍도(청주+홍주)', '공홍도(공주+홍주)', '충홍도(충주+홍주)' 등으로 개칭[8]될 정도로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충주, 청주, 공주, 해미와 더불어 군사 업무를 맡았던 '진관(鎭管)'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였다.[9]

조선시대에도 홍성군 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벌어졌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건을 꼽으면, 조선 초기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회안대군 이방간이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이 곳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임진왜란 와중에는 광해군이 이 곳에서 '분조(分朝)'를 지휘했었으며,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곳도 이 곳이었다. 또한 조선 후기에는 내포지방 천주교 전파의 핵심이 되었던 곳으로 그만큼 가혹한 탄압을 받아 많은 순교자를 배출했으며, 군내에 이를 기리는 홍주순교성지가 조성되어 있다.

1895년 전국이 23부로 개편되자 에서 군으로 개편된 결성을 포함해 충청도 서해안+아산, 청양, 부여(임천, 홍산 지역)의 수많은 군들을 거느리는 홍주부(洪州府)가 설치되어 그 중심이 되었고, 1년 후에 '13도제'가 설치되면서 '홍주군(洪州郡)'과 '결성군(結城郡)'으로 편성해 충청남도에 편입했다.

4.1. 구한말 항일의병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넘어갈 무렵, 이 지역에서는 일제의 침탈에 맞선 항일 의병 투쟁이 전개되었는데, 특히 김복한이 이끈 을미의병(1차 홍주의병)과 민종식이 이끈 을사의병(2차 홍주의병)이 가장 유명하다.
그 중 먼저 일어난 을미의병1895년 일본이 낭인들을 시켜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키고 친일 관료들을 앞세워 단발령이 내려지자 김복한, 이설, 홍건 등의 전직 관료들과 안병찬, 임한주 등 지역 출신 유생들이 앞장서서 일으켰다. 이들은 음력 1895년 12월 3일[10] 김복한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읍성에 진입, 창의소를 설치하고, 홍주부관찰사(洪州府觀察使) 이승우(李勝宇, 1841~1914)[11]와 지방 관리들을 협박해 동참하도록 했다. 이어 홍주부 관할 22개 군과 홍주군 내 27개 면에 통문을 띄워 참여를 독려했으며, 고을 대표들은 집을 방문해 노약자와 독자를 제외하고 각 호에 한사람 씩 응모하기를 청했다.

하지만, 다음날 이승우가 배반하고 김복한, 이설을 비롯한 의병 지도부를 체포해 가두면서 의진은 해산되었다. 당시 이승우는 의병에 나서지 않으려고 했지만, 김복한과 이설 등 의병을 주도한 지역 유림들이 의병에 반대하던 홍주부 참서관(參書官) 함인학(咸仁鶴)을 핍박해 내쫓고 경무관(警務官) 강호선(姜浩善)을 구타하며 이승우를 비난하자 마지못해 응했는데, 이들 몰래 이승우가 중앙의 관리들과 내통하고 지도부들을 체포한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1차 홍주의병은 막을 내렸고[12], 체포된 지도부 23명은 서울로 이송되어 한성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아 이들 중 김복한은 유배 10년, 홍건, 이상린, 송병직, 안병찬 등은 징역 3년, 이설은 곤장 60대에 처해졌으나 고종의 명령으로 전원 석방되었다.
이후 10년이 지난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들은 다시 의진을 일으키기로 하는데, 이 때 일어난 의병이 을사의병이다. 이전 을미의병(1차 홍주의병)에 참여했던 안병찬, 이세영, 채광묵, 박창로 등은 김복한, 이설[13]의 권유를 받고, 을미사변 후 관직을 떠나 정산(定山, 현 청양군 정산면)에 은거하고 있던 前 이조참판 민종식을 찾아가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1906년 3월 15일 대흥군 광수장터(현 예산군 광시면)에서 처음으로 봉기했다.

다만, 첫 봉기 이후 공주 주재 관군과 일본군의 저항에 부딫쳐 일시 해산하다가 다시 재정비해 5월 9일 홍산군 지티(支峙, 현 부여군 내산면 지티리)에서 재봉기해 홍산, 서천, 남포, 보령 등을 거쳐 5월 20일 격전 끝에 홍주읍성을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의병들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구식 화포를 얻었고, 진군 과정에서 발견한 일본인들을 잡아 처단했으며, 지역 유지로부터 군량미를 얻는 등 사기가 올랐다. 읍성을 공격할 때 처음에는 남쪽에서 총격전을 벌였으며, 오후에 서문에 부대를 집결시키고, 일부 인원이 수문을 통해 들어가 성문을 열었다고 전한다. 이에 읍성을 지키던 일본 헌병들은 동문(조양문)을 통해 덕산으로 후퇴하였다. 이처럼 민종식 의진이 홍주읍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식, 안항식, 유호근 등이 참여하자 지도부들은 전열을 1,000여 명으로 재정비하고 일본군과의 전투를 준비함과 동시에 고종에서 사람을 보내 상주문[14]을 보냈다.

한편, 의병에 의해 의병들에 의해 쫓겨난 일본군공주에 있던 병력을 지원받아 다시 읍성을 공격했지만, 오히려 의병에 의해 격퇴되면서 일본인 경찰 3명과 일진회원 2명이 처형되기까지 했다.[15] 결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로 서울의 일본군을 홍주로 집결해 공격하게 하는데, 그 수가 보병 2개 중대에 기병 1개 소대의 절반이었고, 무기도 의병이 가지고 있었던 무기들보다 최신식이었다. 이들은 미리 와 있던 경찰과 헌병들과 합세해 5월 30일 홍주읍성을 포위했고, 다음날 새벽부터 기마 소대 푹발반이 동문을 폴파한 이후 의병 제압에 나서 1시간 30분만에 점령, 제압했다. 이 과정에서 민종식 의진은 참모장 채광묵과 그의 아들인 채규대, 전태진, 서기환 등이 전사했고, 유준근, 최상집, 이식, 이상구, 안항식, 신보균, 문석환, 남규진, 신현두 등 중요 인물 9명은 체포 후 대마도로 유배 생활을 했으며, 후에 이세영, 민종식 등도 체포되어 처벌을 받았다.[16]

이 외에 의병 수 백명[17]을 비롯해 민간인들도 희생을 내면서 단일 전투로는 최대 희생자들을 발생시켰고, 읍성 내와 외곽 10여리가 잿더미가 되었으며, 살아남은 사람들도 이후 일본군의 만행에 피해를 보았다.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을사의병 중 하나인 '2차 홍주의병'은 이후 전국적으로 펼쳐진 의병 봉기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지도부 중 살아남은 이들은 이후 1910년대 독립운동과 3.1운동 등에 참여하는 데까지 이어지면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여담으로, 이 때 희생당한 의병들은 홍성천과 월계천, 남산 일대에 흩어졌다가 1949년 식목행사 와중에 발견되어 한 곳에 모셨는데,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홍주의사총(洪州義士塚)'이다.(국가문화유산포털 - 홍성 홍주의사총)

5. 일제강점기

1910년 경술국치를 통해 한국을 강제 병합한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설치해 한반도를 지배했으며, 1914년에는 기존 행정구역들을 없애고 새로 만드는 부군면 통폐합을 시행했다. 이 때 홍주군(洪州郡) 20개면[18] 중 4개면(얼방, 화성, 흥구향, 상전)을 청양군(현 청양군 화성면 및 남양면, 비봉면 일부)으로 이전했고, 나머지 면들과 결성군(結城郡) 10개면, 보령군 청소면 일부를 합해 현재의 홍성군(洪城郡)으로 변경했으며, 면도 11개면으로 획정했다.[19]

이 때부터 현재까지 지역 내에 제기되고 있는 것이 '홍주(洪州)'라는 명칭에 있다. 전통적으로 홍주가 결성보다 훨씬 큰 고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주(州)와 결(結) 두 군에서 한 글자씩 따 '홍성(洪城)'이란 이름을 새로 지었다.[20] 여기와 관련해서 '홍성군청 누리집'에는 '만해 한용운, 백야 김좌진, 홍주의병 등 홍주의 반일 분위기를 잠재우고, 같은 충남 지역에 위치한 공주(公州)일본어의 발음 구별(둘 다 일본어로 '고슈(こうしゅう)'라고 부름)이 어려워 행정적 불편을 피하기 위해 1914년에 군·면의 통폐합 령에 따라 일제에 의하여 홍성으로 개칭'한다고 적어놓았지만, 구체적인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새로 만들어진 홍성군의 중심지는 옛 홍주군의 중심지였던 '홍양면(洪陽面)'으로 1917년 '홍주면(洪州面)'으로 개칭해, 일시적으로 '홍주'라는 이름이 부활했지만, 1941년 해당 지역이 '홍성읍'으로 승격되면서 공식 지명에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21]

한편, 홍양면이 홍주면으로 개칭된 1917년에 옛 결성군의 중심지 지역을 합했던 '용천면(龍川面)'이 '결성면(結城面)'으로 개칭되었으며, 1942년에는 '광천면(廣川面)'이 광천읍으로 승격되고, '고도면(高道面)'이 '갈산면(葛山面)'으로 개칭되었다.

6. 대한민국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검찰청이나 법원, 세무서 등 각급 상급 관공서들과 지역 규모에 비해 매우 다양한 제1금융권 은행 등이 몰려있었던 홍성군은 광복 이후에도 충남 서북부 지역에서 나름 규모가 있는 도시였다.

그러다가 정부 정책이 경부선 위주의 중공업 정책으로 가면서 과거 홍주목 시절 관할했던 지역이었던 보령(대천), 서산, 당진, 아산(온양)이 시로 승격[22]된 반면, 홍성군은 시로 승격되지 못한 채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해 2000년대까지는 '발전 가능성이 없는 시골 동네'에 머물렸다.

그 와중인 1978년 홍성 지진이 발생했고, 1983년에는 서산시 고북면 대사리가 홍성군 갈산면에, 결성면, 홍북면, 홍동면의 일부 지역이 각각 갈산면, 서부면, 홍성읍, 광천읍으로 편입[23]했고, 1989년에는 서산군 안면면에 속했던 죽도리가 서부면으로 편입되었다.

이렇게 정체와 감소를 거듭하던 홍성군은 2001년 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변화의 바람을 맞게 되었으며, 2013년에는 충청남도청이 홍성군 홍북면과 예산군 삽교읍에 조성된 내포신도시로 이전해 오면서, 도청 소재지가 되었다.

이후 인구가 증가해 2017년 1월 5일 인구 10만명대를 회복(당시 인구 100,007명)했으며, 같은 해 8월 1일 홍북면이 홍북읍으로 승격했다.

6.1. '홍주'로의 명칭 변경과 시 승격 시도

상술하다시피 일제강점기 말에 '홍주면'이 '홍성읍'으로 승격되면서 공식 지명에서 '홍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여전히 지역 버스업체나 교육기관(홍주초등학교, 홍주중학교, 홍주고등학교)[24], 체인점이나 지점 명칭에는 '홍주'가 버젓이 사용되고 있다.

여기에 "'홍성'이란 명칭이 일제의 잔재이기 때문에 청산하자."라는 일부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며, '홍성'이라는 지명이 강원도 '횡성'이나 '홍천'과 헷갈린다는 의견도 제시[25]되면서 '홍주'라는 옛 지명을 찾자는 여론이 나오고 있으며, 실제로 2015년 '홍주지명되찾기운동본부'가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으며, 지방선거 및 국회의원 선거에서 일부 후보들이 공약으로 내걸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홍성'이라는 지명이 굳어진 지명으로 자리잡았고, 지명 변경에 따른 비용 부담 등을 이유로 지금은 유야무야된 상태이다.(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관련 기사 3, 관련 기사 4, 관련 기사 5, 관련 기사 6)
'홍주'로의 명칭 변경과 더불어 현재 홍성군의 가장 관심사는 ' 승격'이다.

내포신도시 조성과 충청남도청 이전, 서해선 복선전철 등 2010년대 이후 홍성군이 새로운 성장 동력들을 얻으면서 인구가 상승하자 2015년 군에서 아예 홍주시 승격 원년을 선포하면서 본격적인 시 승격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상술하다시피 이전부터 '홍주'라는 명칭의 변경부터 홍성군이나 지역에서 공공연히 나오긴 했지만, 이에 따르는 행정비용 때문에 승격 이후로 미룬 상황이다.[26]

내포신도시 개발로 인구가 증가하면 홍주라는 이름으로 승격함으로써 홍주(洪州)라는 지명을 되찾을 예정이며[27] 2017년 인구가 10만 명을 돌파하면서 시 승격의 꿈이 잔뜩 부풀어올랐지만 1년 만에 도리어 감소 추세로 돌아섰고 2020년 하반기에는 인구가 다시 10만명 아래로 내려가면서 2022년까지 장기적 계획으로 전환했지만, 오히려 인구가 더 줄어든 상황이다. 인구가 생각만큼 늘지 않자 '도청 소재지는 인구 수에 상관없이 시 승격시켜 달라'고 건의했지만 행안부가 거부하면서, 시 승격 가능성은 여전히 암울한 처지이다.



[1] 다른 세 곳은 충주, 청주, 공주.[2] 충청남도청 ~ 21번 국도(서산영덕고속도로 예산수덕사IC)[3] 당초 도로 노선에 해당 유적이 통째로 들어갔는데, 결국 일부 보존하면서 해당 구간은 터널화하였다. 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관련 기사 3, 관련 기사 4[4] 학계에서는 왕건의 후비인 '흥복원부인 홍씨(興福院夫人 洪氏)'의 아버지인 '홍규(洪規)'와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5] 2018년이 이 해로부터 딱 1,000년이 되는 해라서 홍성군에서 이를 기념해 '홍주천년' 사업을 시행해 현재진행형이다.[6] 참고로 이 당시까지는 한자가 상술한 '潔城'이었다가 1172년(명종 2) 현재의 '結城'으로 고쳤다.[7] 다만, 이 당시 승격했던 것이 1368년에 지주사(知州事)로 강등했다가 3년 후(1371년) 다시 목으로 승격했다. 현재 홍성군청 앞에 있는 수령 700년의 느티나무 2그루가 이 때를 기념해 심은 것이라고 한다.[8] 이렇게 충청도의 명칭이 많이 바뀌던 것은 당시 이 지역에서 얼마나 많은 반란이나 사건들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참고로 '홍주목'에서 반란이나 사건이 벌어져 강들될 때에는 옛 이를을 따서 '홍양현(洪陽縣)'이라고 했는데, 현재 지역 내 남아있는 선정비 중에는 '홍양현감(洪陽縣監)'이라 적힌 비석들도 있다. 결성현의 경우, 아예 폐지되어 그 영역이 다른 고을로 이관된 적이 있었다.[9] 2023년 현재 8도(道)의 이름에 들어갔거나 들어갔던 고을들 중 오늘날 시로 승격되지 못한 곳은 (남한 한정) 홍성군이 유일하며, 목(牧) 중에서도 성주군과 홍성군 두 곳뿐이다. 참고로, 전라도의 '라'인 나주시는 시로 승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쇠퇴하여 2022년 12월 기준 시가지(舊 나주읍+영산포읍) 인구(30,145명)가 홍성읍 인구(36,714명)보다도 더 적어졌고, 내포신도시 건설로 인구가 급증한 홍북읍(29,274명)과의 격차가 가까워질 정도로 아주 광주의 위성도시가 되어버렸다. 그나마 혁신도시 버프로 인구는 12만명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10] 을미개혁으로 인해 기존 태음력태양력으로 바뀌어서 상술된 날짜를 양력을 환산하면, 1896년 1월 16일에 해당한다.[11] 조선 고종 때의 문신으로 효령대군의 후손이다. 1894년 4월 김기수의 후임으로 홍주목사로 부임해 당시 지역 내에 커지고 있던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한 일로 지역 유림들이 앞다투어 선정비를 세웠다. 1년 뒤 을미개혁으로 지방관제가 개편될 때 '홍주부관찰사'로 유임되었다. 현재 홍주읍성 내 남아있는 '여하정(余何亭)'이 그가 지었다고 전해진다.[12] 물론 당시 청양군수였던 정인희(鄭寅羲, 1849~1917) 같은 인물들이 관군과 전투를 치르긴 했지만, 얼마 못 가 해산하였다.[13] 당시 이들 두 사람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병든 몸들을 이끌고 서울로 상경해 상소하면서 부당성 등을 주장하다가 체포, 구금되었다 풀려났다.[14] 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후에 민종식이 체포되고 나서 진술하기를, 을사오적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자신들이 거병한 이유를 들면서 거의(擧義)한 뜻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등의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15] 이 때 처형된 이들을 추모하고자 홍주읍성을 재점령한 일제는 읍성 남쪽 언덕에 '애도지비(哀悼之碑)'를 세웠는데, 김윤식이 지었고, 글씨는 이완용이 썼다고 한다. 해방 이후 해당 비를 땅에 묻고, 그 자리에 '병오항일의병기념비'를 세웠다.[16] 이 중 민종식은 전투 막판 탈출해 그 해 10월 예산 대술에 있던 이남규의 집에 머물면서 의진을 재기하기로 정했지만, 일진회원의 밀고로 인해 신창, 공주 등으로 피신했다가 11월 20일 체포되었다.[17] 일본 측 기록에는 의병 전사자 60명(이후 82명으로 수정 보고), 포로 127명(이후 145명으로 수정 보고)이며 일본군은 경상자 2명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당시 홍주군수 윤시영이나 당시 참여했던 의병장들의 기록을 토대로 보면, 전투 이후에도 일본군이 의병을 참살하면서 전투 당시에는 최대 300명 이상, 이후에도 수십에서 수백 명의 의병들이 일제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18] 본래는 27개면이었으나 1906년 월경지를 정리하면서 월경지에 해당하는 7개면은 각각 면천군(현 당진시)과 해미군(현 서산시)으로 편입했다.[19] 당시 변경된 행정구역과 관련해서는 홍성군 지역의 부군면 통폐합 문서와 위키백과 한국어판 홍성군의 역사 부분을 참고.[20] 비슷한 사례가 양평군이 대표적인데, 여기도 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 이쪽은 대한제국 시기인 1908년에 통합되었다. 이외에도 평군이 통합된 부천군이나 안군천(川)군이 통합된 연백군도 마찬가지이다.[21] 물론 2023년 현재에도 지역 농어촌 버스업체인 '홍주여객'이나 홍성읍 내 교육기관이나 일부 체인점 및 지점 명칭 중에는 '홍주'라는 이름이 들어가있다. 자세한 건 후술되는 내용 참조.[22] 보령(대천)은 광업과 항만을 기반으로 서산과 당진, 아산(온양) 등은 교통과 상업, 중공업 등을 기반으로 로 승격했다. 참고로 시로 승격한 연도는 온양, 대천이 1986년, 서산이 1989년, 당진이 2012년.[23] 홍성군 내 변동된 지역들을 보면, 결성면 와리가 갈산면에, 결성면 중리는 서부면에 편입되었다. 홍북면 내법리와 홍동면 구룡리는 홍성읍으로, 홍동면 대평리, 운용리, 월림리는 광천읍으로 편입되었다.[24] 다만, 홍주초등학교는 공립이고, 홍주중학교와 홍주고등학교는 사립이다.[25] 로마자로 쓰면, '홍성'은 'Hongseong', '횡성'은 'Hoengseong'으로 딱 한 글자(e) 차이라서 더 헷갈리며, '홍천'은 로마자로는 'Hongcheon'으로 다르지만, 비슷하게 들리는 경향이 간혹 있다. 게다가 이 세 지역 모두 한우가 많이 사육되는 지역이기도 하다.[26] 즉, 홍성군을 홍주군으로 개명하면 시 승격할 때 행정비용이 또 들어가서 결과적으로 행정비용이 이중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홍주 개명과 시 승격을 아예 한 큐에 처리하자는 것이다.[27] 지방자치법 설치(승격) 요건에 따라, ①홍성읍의 인구가 5만 명을 넘거나, ②홍성군의 총 인구가 15만 명을 넘고, 인구 2만 명 이상의 시가지 지역이 2개 이상으로서 그들의 합이 5만 명을 넘으면 된다(②에 의할 경우 홍성읍과 홍북읍의 내포신도시가 이 요건을 충족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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