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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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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 4세 |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 | 바츨라프 하벨 |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 | 얀 지슈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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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베리흐 | 얀 후스 | 안토닌 드보르자크 | 카렐 차펙 | 보제나 넴초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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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시 바타 | 에드바르트 베네시 | 오토 비흐테흘레 | 야로슬라프 사이페르트 | 즈데네크 스베라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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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미 데스틴 | 야로미르 야그르 | 마리아 테레지아 | 카렐 크릴 | 밀로스 포먼 | |||||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블라스타 부리안 | 로만 셰브렐레 | 이반 흘린카 | 카렐 하블리체크 보로프스키 | 다니엘 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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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다 호라코바 | 블라디미르 멘식 | 야로슬라프 하셰크 | 알폰스 무하 | 얀 에반겔리스타 푸르키녜 | |||||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파벨 네드베드 | 얀 얀스키 | 프란티셰크 크리지크 | 얀 젤레즈니 | 얀 팔라흐 | |||||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베라 차슬라프스카 | 레오시 야나체크 | 알로이스 이라세크 | 야로미르 노하비차 | 얀 마사리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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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후밀 흐라발 | 얀 네루다 | 요세프 융만 | 그레고어 멘델 | 프란츠 카프카 | |||||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프란티셰크 토마셰크 | 스바티 보이테흐 | 요제프 비찬 | 요세프 카예탄 틸 | 루시에 빌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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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프 라다 | 루돌프 흐루신스키 | 바츨라프 2세 | 마들렌느 올브라이트 | 아네타 랑게로바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오타카르 1세 | 루드비크 스보보다 | 도미니크 하셰크 | 얀 루쳄부르스키 | 밀란 바로시 | |||||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카렐 야로미르 에르벤 | 스바타 즈디슬라바 | 야로슬라프 포글라르 | 라디슬라프 스몰랴크 | 올가 하브로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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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 | 헬레나 루치지코바 | 파벨 티그리드 | 엘리슈카 프르제미슬로브나 | 밀란 쿤데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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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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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지나 보흐달로바 | 밀로슬라프 지메크 | 지그문트 프로이트 | 사모 | 밀로시 제만 | |||||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000><colcolor=#fff> 지그문트 프로이트 Sigmund Freud[1] | |||
본명 | 지기스문트 슐로모 프로이트 Sigismund Schlomo Freud | ||
출생 | 1856년 5월 6일 | ||
오스트리아 제국 모라비아 변경백국 프라이베르크인메렌[2] | |||
사망 | 1939년 9월 23일 (향년 83세) | ||
영국 잉글랜드 런던 햄프스티드 | |||
국적 | [[오스트리아| ]][[틀:국기| ]][[틀:국기| ]]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신체 | 172cm | |
학력 | 빈 대학교 (의학 / M.D.)[3] | ||
수상 | 괴테상 (1930) 왕립학회 외국인 회원 (1936) | ||
직업 |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 | ||
분야 | 신경학, 심리요법, 정신분석학, 생리학, 의학, 심리학 | ||
가족 | 아버지 야코프 프로이트 (1815–1896)[4] 어머니 아말리아 프로이트 (1835–1930)[5] | ||
형제 | 5남 5녀 중 3남[6] | ||
배우자 | 마르타 베르나이스 (1886년 결혼)[7] | ||
자녀 | 3남 3녀[8] | ||
종교 | 무종교 (무신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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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Derjenige, der zum ersten Mal an Stelle eines Speeres ein Schimpfwort benutzte, war der Begründer der Zivilisation.
창 대신 욕을 최초로 사용했던 자가 바로 문명의 창시자이다.
창 대신 욕을 최초로 사용했던 자가 바로 문명의 창시자이다.
오스트리아 제국 모라비아 변경백국 출신의 정신과 의사, 의학자, 생리학자, 심리학자, 철학자이며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이다.[9]
거의 모든 이론을 성적욕구와 연관지어 설명했으며, 인간의 무의식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사람이다.[10][11] 20세기 사상사에서 빠지지 않는 중요한 학자이며, 심리학은 물론이고 근현대 철학에서도 의심의 세 대가로 함께 묶이는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니체와 함께 깊게 다뤄지는 학자로, 현대 인문학 전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학자이기도 하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엘렉트라 콤플렉스란 개념을 만든 사람이 바로 프로이트다. 최면이 당연시되던 정신분석학계에 자유연상을 제안한 것 역시 프로이트의 업적이다. 그 외에도 정신분석학계에서 프로이트가 새로이 도입한 개념은 셀 수 없이 많다.
저서인《꿈의 해석(Die Traumdeutung)》은 여러 사상, 학문 분야에 당대로서는 혁명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의 파장을 불러온 명저다. 성에 관한 이야기도 적혀 있어 프로이트가 꿈을 어떤 대상으로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12]
2. 생애
- 1856년 - 5월 6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프라이베르크인메렌(Freiberg in Mähren)에서 태어남.
- 1866년 - 오스트리아 빈의 김나지움에 입학.
- 1873년 - 빈 대학의 과학부에 들어갔으나, 곧 의학부로 옮김.
- 1877년 - 가재의 신경 세포에 관하여 오늘날의 세포설에 가까운 이론을 발표함.
- 1882년 - 7월, 경제적인 이유로 연구 생활을 그만두고, 빈 대학 부속 병원 수련의가 됨.
- 1884년 - 코카인의 마취 작용에 대한 논문 《코카인에 대하여》를 발표함.
- 1885년 - 가을, 파리에 유학. 샤르코 교수에게 히스테리 이론을 배워 본격적으로 신경증을 연구하게 됨.
- 1886년
- 4월, 빈에서 병원을 열고, 신경증 환자 치료를 시작함.
- 9월, 유대인 마르타 베르나이스와 결혼함.
- 1891년 - 최초의 저서인 《실어증의 이해를 위하여》가 나왔으나, 혹평을 받음.
- 1895년 - 브로이어와 같이 《히스테리 연구》를 펴냄.
- 1896년 - '정신분석'이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함. 가을,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의 정신분석을 시작함.
- 1900년 - 자신의 정신분석과 꿈의 분석을 담은 《꿈의 해석》을 출간함.
- 1901년 - 《일상 생활의 병태 심리》를 발표하여, 우발적 행위의 의미를 명백히 함.
- 1905년 - 《성 이론에 관한 세 논문》과 《위트와 무의식과의 관계》를 집필함.
- 1906년 - 정신분석학의 지지자인 카를 융과 만남.
- 1908년 - 4월, 잘츠부르크에서 제1회 국제 정신분석학 대회를 개최함.
- 1909년 - 9월, 클라크 대학에서 정신분석학을 강연함.
- 1910년 - 국제 정신분석 학회가 정식으로 발족됨.
- 1912년 - 《이마고(Imago)》를 창간하여 〈토템과 터부〉를 연재함.
- 1914년 - 《정신분석 운동사》, 《미켈란젤로의 모세》를 출간함.
- 1915년 - 빈 대학에서 정신분석학 입문 강의를 시작함.
- 1917년 - 《정신분석학 입문》을 출간함.
- 1922년 - 4월, 구개암 수술을 받음. 이후 죽을 때까지 32차례의 수술을 받으면서도 연구와 치료에 힘씀.
- 1923년 - 4월, 《자아와 원초아》를 저술하여, 자아와 원초아의 개념을 제창함.
- 1930년 - 괴테 문학상을 받음.
- 1938년 - 6월, 나치스의 유대인 학살을 피해 런던으로 망명함.
- 1939년 - 9월 23일, 《정신분석학 개론》을 집필하던 중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남.
※ 출처: 만화로 만나는 20세기의 큰 인물 (웅진출판사)
생애를 이론들과 함께 보며 덧붙이자면, 프로이트는 1885년 파리에 유학하며 장마르탱 샤르코(Jean-Martin Charcot) 교수의 수업에서 최면을 접한 이후로 당시 최면치료를 하던 요제프 브로이어(Josef Breuer)와 가까이 지내며 최면을 배워 치료를 진행한다. 안나 오(Anna O)라는 신경증 환자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지만 최면치료는 일시적으로 증상의 호전을 보이고 가능한 대상이 한정적이라는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이후 압박법에서 자유연상법 순으로 치료법을 발전시키게 되고[13]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정신분석학의 틀을 잡는다. 이 과정에서 성에 대한 의견 차이로 인해 브로이어와는 결별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많은 신경증 환자를 돌본 치료자이기도 하였으나, 자신 역시도 불면증과 우울증을 비롯한 수많은 신경증에 시달렸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그의 연구 중에는 자기 자신을 관찰하며 얻은 결론을 토대로 세워진 것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꿈의 상징성에 대한 해석 같은 것들이 그의 아버지 사후 자기관찰을 통해 나온 것들이다.[14] 이 외에도 로마에 맞서 싸운 한니발 장군을 자신과 동일시하여 로마에 갈 수 없어 노년에 자기관찰을 끝내고 나서야 갔다던지 하는 얘기들이 기록되어 있다.
프로이트는 골초였기에 67세이던 1923년에 구강암 진단을 받고 무려 16년 동안 투병생활을 했다. 말년에는 말이 어눌해져서 진료상황을 환자에게 제대로 설명하지를 못하자 딸인 안나가 대신 말해줄 정도. 1939년 9월 21일에 주치의인 막스 슈어(Max Schur) 박사에게 자신의 안락사를 요구해서 9월 21일과 22일에 모르핀을 각각 한 차례씩 투약을 받았고 다음날인 9월 23일에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오스트리아 병합으로 런던으로 떠난 지 1년 만이었다.
3. 정신분석학 제시
19세기 들어 산업화와 자본주의가 시작된 서유럽은 가족에 대한 개념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빅토리아식 가족으로 규정된 이 개념은, 가족을 신성하고 도덕적인 것으로 규정지었다. 성(性)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과거의 문란한 성적 규범들은 비난받기 일쑤였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게 어쩔 수가 없어서, 외적으로는 성을 금기시하면서도 내적으로는 강박적으로 집착하게 되는 이중적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그러나 20세기가 되고, 빅토리아식 가정은 출산율과 영아사망률 감소[15]로 인해 미국식 핵가족화되기 시작했고, 그와 더불어 성에 대한 개념도 양지적으로 변했다. 성혁명이라 불리는 이 현상을 주도한 것이 프로이트이다.
프로이트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의 심리는 3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이드(원초아)와 에고(자아), 그리고 슈퍼에고(초자아)이다. 이드(Id / Es)는 인간이 가진 원초적 본능의 욕구이며, 자아(Ego / Ich)는 이드의 무분별한 욕구를 통제하고, 현실과 조화시키려는 욕구이다. 초자아(Superego / Über-Ich)는 사회적 관념과 도덕 교육을 통해 형성되는 것으로서, 이드와 자아의 욕구를 비판하여 행동을 사회규범의 범위로 이끄는 일을 한다. 즉 이성적 주체라는 개념이 프로이트에 의해 크게 빛이 바랜 것이다. 프로이트는 자아가 외부세계, 초자아, 그리고 이드라는 세명의 주인을 섬겨야 하는 아주 까다로운 상황에 처해있다고 설명한다. 자아는 외부세계로부터의 요구, 이드의 충동적 본능, 그리고 초자아의 엄격한 자기비판을 잘 조율해야 하는데, 이것들이 서로 충돌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리가 인생살이를 어렵게 느끼는 것이라고 한다.
사실 심리학에서 억눌린 욕구 등의 개념을 떠올린 인물로 가장 유명한 정신과 의사일 것이다. 그러나 살아있을 적에는 툭하면 섹스 얘기를 꺼내는 미친 사람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리비도가 단순히 섹스 에너지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발달 에너지를 가리킨 것이란 점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이 또한 말년에 수정한 이론이다.) 말년에는 에로스 말고도 죽음에 대한 욕구(타나토스)에도 신경을 썼다.
프로이트가 그의 히스테리·유아 성욕구를 바탕으로 자신의 이론을 전개했던 이유는 그가 치료했던 히스테리 환자의 대부분이 성적인 문제를 갖고 있었으며, 어린 시절 성적인 폭력이나 유혹을 경험한 적이 있는 것으로 기억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자녀들을 대상으로 한 관찰에 기반하여 아이는 모두 순수할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매우 어린 시절부터 성적인 쾌락을 추구하며 성이론을 만든다고 결론 내렸다. 여기서 성적인 쾌락은 성기뿐만 아니라 구강, 항문, 배설, 가학성 등과 연관된다. 이런 성욕의 다양한 형태가 후에 보편적인 성욕인 '리비도'를 상정하는 근거가 된다.
4. 평가
4.1. 대중들에게
프로이트의 이론은 보통 잡지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등에서 큰 인기를 끈다.프로이트의 책은 '뭐 이런 변태 늙은이가 있나?' 하는 의문을 일으킨다. 실제로, 과도한 성적 해석이 출간 당시부터 지금까지 여러 분야에서 비판을 받는 주요한 이유이다. 특히 '달은 여성의 엉덩이를 상징한다' 같은 부분이 대표적이다. 물론 근거없이 이런 주장을 한 것은 아니고, 독일어 속어의 의미에 기반한 것이다. 언어적 연상은 프로이트 이론의 주요한 근거이며, 그의 저서에서 거듭 강조된다. 이는 후에 언어학과 구조주의 철학에 영향을 미쳤다. 말년에는 자기도 반박에 힘들어하며 인터뷰 중 한 언론인이 "프로이트 박사님이 항상 시가를 피는 것도 구강기적 집착 때문이 아니냐" 질문을 던지자 불쾌한 표정으로 '담배가 언제나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4.2. 과학계에서
- 과학적 방법론
프로이트는 자기 이론을 환자와의 경험보다는 대부분 자기에 대한 공상으로 만들었고,[출처1] 자기 이론을 실험으로 검증하려는 사람에게 내 주장은 많은 관찰로 입증되었기 때문에 굳이 검증할 필요 없다고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출처2]
그가 제시한 무의식, 자아, 초자아 등의 개념들이 반증 불가능한 개념인 탓에, 과학적 방법론이 대세인 현대 심리학에서는 성격심리학, 상담심리학, 임상심리학을 제외하고는 프로이트의 이러한 이론들을 배우는 경우가 거의 없다시피 한다. 프로이트가 주장한 것처럼 관찰적 방법이 주로 쓰이는 탓에 정신분석학은 사례 연구를 하는 학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주장도 있다.
프로이트 자신이 치료했다고 말한 안나 O, 도라, 늑대인간, 한스 등의 사람들이 실제로는 자신들은 전혀 치료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프로이트의 이론을 비판했던 만큼, 그의 이론을 임상적으로 적용하려는 시도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 무의식에 대한 연구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최초로 발견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의식에 관한 가장 중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틀림없다.[18] 때문에 심리학의 기초 이론엔 프로이트의 이론이 남아 있다. 이 탓에 조금이라도 심리학 공부를 해본 사람이라면 융은 몰라도 프로이트는 알 수 밖에 없다.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19]나 라캉 등의 학자들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의의를 무의식을 논할 수 있는 '과학'을 설립한 데에 있다고 평한다.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을 심리학의 일부로 편입시킨 것은 생존의 문제였으며[20], 정신분석학의 가치는 심리학 내에서의 학문적 성과보다는 오인(Misrecognition)의 구조를 이론화시키고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에 있다는 것이다.[21]
- 인류의 보편성을 강조
프로이트주의의 가장 큰 의의는 인류의 '보편성'을 강조한 것으로, 프로이트 이후 다른 분야의 학문에서도 비슷한 관점에서의 연구가 지속되어 다윈의 진화론을 왜곡하면서 만연했던 잘못된 우생학적 사상에 간접적으로 일격을 가했다. 덕분에 우생학에 기초해 세력을 넓히던 나치에게 제대로 찍혔고, 그게 아니더라도 유대인이었기에 말년에 영국으로 피난을 가는 수밖에 없었다.
- 신경과학적 연구 시도
프로이트는 젊을 적에 어류와 새우의 신경계를 연구했던 의학도로써, 그 길을 계속 유지했다면 신경과학에 나름대로 족적을 남길 가능성도 있었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젊었을 당시엔 두뇌의 신경 구조에 대한 연구가 초보적인 수준에 불과했었는데, 뇌가 연속적으로 연결된 단위들로 구성된 '연결망'인지, 서로 개별적인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해서 논쟁이 격렬했다. 결국 이 논쟁은 축적된 자료로 인해서 후자가 승리하게 되었고, '뉴런'이란 용어가 탄생하게 되었는데, 프로이트 역시 신경세포는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주장했던 축이기 때문이다.
4.3. 페미니스트들에게
아마 근현대 학자 중에서 현대 페미니스트들에게 가장 많이 까이는 사람일 것이다. 이유는, '여성들은 본질적으로 음경을 선망하는 심리를 가지고 있으며, 여성의 성적인 행동은 그것을 갖지 못하기에 보상심리에서 비롯된다'라고 발언했기 때문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성역할을 확립하는 게 더 어렵다는 주장도 그에게서 나왔다. 그의 이론이 학계에 일으킨 파문과 정신분석학의 시조로서의 의의와는 별개로, 이런 이유로 그의 학문적인 성과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다. 프로이트의 주장은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것이 아니라, 성기의 차이로 인해 스스로를 열등하다고 여길 뿐이다'에 가깝다.사실 프로이트가 오히려 여성학에 기여한 부분이 많은데, 일부 여성학은 그의 이론을 비판하면서 파생된 이론이 많기 때문이다. 즉, 학문적 업적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이론을 학문적으로 비판하여 발전시켜 나갔다. 애초에 모든 발명과 창작이라는 게 기존의 틀이 있어야만 그것을 기반으로 태어나 독자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대부분 여성이었던 히스테리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여성의 열등성이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인식에 의한 것이라는 근거를, 즉 여성이란 실제로 열등한 존재가 아닌 사회적 인식에 의해 열등하다고 규정된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를 마련했다.[22]
4.4. 철학계에서
현대에서 학문적으로 진지한 연구의 대상으로 프로이트가 등장하는 공간은 인문학과 철학사이다. 이 영역에서 프로이트를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그때까지 터부시되었던 성적인 화제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 프로이트의 저작이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는 점, 현대철학의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프로이트를 주제로 한마디씩 했기 때문에 프로이트를 이해하는 것이 그 철학자들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라는 점 때문이다.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엄밀한 과학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나, '경험적으로 관찰된 사실들을 일관된 가설로 설명하려 시도하고, 가설이 사실에 부합하지 않을 경우 수정하여 새로운 이론으로 다듬어나가는' 프로이트의 시도 자체는 일단은 과학적 방법론에 대강 부합한다. 프로이트의 연구 결과는 인간의 정신은 이성적인 의식이 아니라 비이성적인 무의식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리고 동시에 이러한 연구와 논의가 진행되던 시기에 인류가 직면했던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비롯한 참극들로 인하여 인간은 자신의 이성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게 됨으로써 흔히 '이성의 시대'라 불린 근대가 끝나고 현대가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이런 면에서 볼 때 프로이트는 역사의 발전을 정치경제학적인 현상을 통해 설명하고자 했던 카를 마르크스나 생물종의 탄생을 과학적 방법으로 설명하려 했던 찰스 로버트 다윈 등과 함께 근대의 절정기와 현대의 시작을 동시에 상징할 만한 인물로써 철학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23]
현상학파, 실존주의 사상가들 역시 프로이트에 대해 비판적이다. 신학적, 형이상학적 토대를 배격하고 자연과학적 모델이 인간의 영역까지 무차별 적용되는 것에 반감을 갖는 이들에게 프로이트 이론은 신학, 형이상학, 자연과학과 마찬가지인 또 다른 형태의 토대주의(fundamentalism)일 뿐이다.
또한 프로이트는 평생 과학자의 위치를 고수한 철저히 유물론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리비도에 도입한 양적인 개념과 경제적인 원리들 역시 유물론적 사고에 기반한 것이며, 그는 신경과학자로서 언제나 물리적 실체를 가정했다.
회의주의자 사전의 정신분석과 프로이트
4.5. 교육학에서
그의 주장은 교육학에서도 매우 중요히 다뤄지는데, 아동의 발달 단계를 규정하였기 때문이다.교육철학사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며, 교육심리학과 교육철학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때문에 대학 교육학 커리큘럼에서는 몇 번이나 그의 이론이 다루어진다.
다만 그의 주장을 온전히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론과 계승한 학자, 비판한 학자를 모두 배우면서 실제 교육현장에서 상황에 맞게 이론을 사용할 것을 권장한다.
5. 가계
- 아버지 야코프 프로이트(1815 ~ 1896) / 어머니 아말리아 프로이트 (1835 ~ 1930)
- 이복형 에마누엘 프로이트 (1833 ~ 1914)
- 이복형 필리프 프로이트 (1836 ~ 1911)
-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 ~ 1939) / 妻 마르타 버네이스 (1861 ~ 1951) - 1886년 결혼
- 마틸데 프로이트 (1887 ~ 1978)
- 장-마르틴 프로이트 (1889 ~ 1967)
- 올리버 프로이트 (1891 ~ 1969)
- 에른스트 프로이트 (1892 ~ 1970)
- 루시안 프로이트 (1922 ~ 2011) 화가
- 조피 프로이트 (1893 ~ 1920)
- 안나 프로이트 (1895 ~ 1982)[24]
- 율리우스 프로이트 (1857 ~ 1858)
- 안나 프로이트 (1858 ~ 1955) - 1890년대 미국으로 이민
- 에드워드 버네이스(1891 ~ 1995) - 저명한 언론인
- 레기나 데보라 (1860 ~ 1942) - 홀로코스트 희생자
- 마리 프로이트 (1861 ~ 1942) - 홀로코스트 희생자
- 에스더 아돌피네 프로이트 (1862 ~ 1942) - 홀로코스트 희생자
- 파울린 레기네 프로이트 (1864 ~ 1943) - 홀로코스트 희생자
- 알렉산더 고트홀트 프로이트 (1866 ~ 1943)
성공한 학자라고 평가받는 프로이트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제각기 다른 분야에서 두각을 보였다. 놀라운 점은 가족들이 프로이트 바로 밑 동생 율리우스랑 딸 조피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80세를 넘거나 80세 가까이 장수하였다. 어머니도 당대에 무려 95세까지 장수했고, 미국으로 이민가서 홀로코스트 피해를 안 받은 여동생도 97세까지 살았을 정도. 홀로코스트 피해를 받아 죽은 여동생들도 80세 언저리까지 장수한 것을 보면 홀로코스트 피해를 받지 않았더라면 1940년대 후반까지 생존했을 것으로 보인다.
슬하 여섯 아이들 중 넷째 에른스트는 건축가로, 막내 안나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자로 유명하다. 한편 프로이트의 여동생인 안나 프로이트[25][26]의 아들, 다시 말해 프로이트의 조카가 언론(public relation)의 창시자인 에드워드 버네이스이다. 그는 심리 분석을 이용한 선동 및 광고에 능하여 프로파간다의 대부로 불렸으며, 심지어 괴벨스마저 그의 방식을 배우려 노력했다고 한다. 근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정신분석학과 언론을 창시한 후덜덜한 집안. 에드워드는 과테말라 전복에도 상당히 관여한 선동가로 히틀러가 그를 섭외하려 노력한 것은 위의 빅데이터가 의미심장하다.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 때문에 영국으로 망명갔을 때 그의 자식과 손자들도 같이 영국으로 넘어갔는데, 그 손자 중 하나가 바로 사실주의 화가로 유명한 루시안 프로이트이다. 그의 작품 중 하나는 생존화가 작품으로 최대가를 찍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안타깝게도 2011년에 사망했다. 루시안의 형제 클레멘트는 정치인이자 방송가, 작가로 Sir 칭호까지 받았다. 프로이트의 증손자 데이비드 프로이트(1950년생)도 영국 귀족원 의원이다.
6.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
- 알프레트 아들러 - 개인심리학 창시자.
- 카를 융 - 프로이트의 후계자로서 차기 빈 정신 분석학회의 학회장을 맡아 이끌 예정이었지만,[27] 프로이트의 성이론이 인간의 정신현상(의식 및 무의식)을 전부 설명하기엔 범위가 좁다고 판단하여 갈라섰다. 카를 융 문서의 프로이트 목록 참고. 그러나 프로이트의 성이론을 전부 부정한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적용 확장시켜 인간의 생물학적 무의식을 설명하는 데 쓰인다.
- 오토 랑크(Otto Rank) - 프로이트의 제자였으나 프로이트 이론이 부성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 인간은 부성보다 모성으로부터 더 강한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했고, 특히 범결정론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이 일방적으로 무의식에 지배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임을 강조했다. 프로이트는 랑크에게 이러한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으나 랑크가 이를 끝내 거부하자 결국 정신분석학회에서 제명시켰다. 때문에 정통 프로이트학파에서는 랑크에 대한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고 있다.
- 자크 라캉
- 에드워드 버네이스
- 안나 프로이트(Anna Freud) - 프로이트의 딸이며 아버지의 이론을 정리하고 발전시켜 방어기제를 발표하였다.
- 에릭 에릭슨(Erik Erikson) -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이론을 긍정했지만 에릭슨은 발달 과정이 전생애에 걸쳐 이루어진다고 보았고, 노년기까지 끝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특히 각 발달과업에서 실패하거나 억제되면 그 과업에 대립되는 감정이 생긴다고 주장했다. 장 피아제와 더불어 발달이론의 주축이며, 안나 프로이트의 연구를 도와줬다.
- 아르투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 - 프로이트는 빈 대학교 의학부 동문이자 대문호(大文豪)인 아르투어 슈니츨러와 교류하며 많은 지적 영감을 주고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28][29]
7. 관련 어록
코페르니쿠스 이후 우리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마르크스 이후 우리는 인간 주체가 역사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인간 주체에는 중심이 없다는 것을 밝혀 주었다.
루이 알튀세르
루이 알튀세르
프로이트는 작가이고 정신 분석은 문학이다. 작가 프로이트의 위대함은 그의 글 속에 드러나 있다.
그에게는 신앙도, 꿈도, 인류의 의미나 임무도 문제되지 않는 광대한 무한까지 나아갈 용기가 있었다.
슈테판 츠바이크
그에게는 신앙도, 꿈도, 인류의 의미나 임무도 문제되지 않는 광대한 무한까지 나아갈 용기가 있었다.
슈테판 츠바이크
그는 새로운 신화를 창조했다. 그의 사상의 매력은 실제 신화의 매력과 닮아 있다. 모든 고통은 단지 기원적인 고통의 반복을 표현할 뿐이라고 단언할 때가 그런 경우이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시인들은 언제나 당신의 편입니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시인들이 당신의 글에서 시를 읽게 될 것입니다.
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
이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 어떤 사람도 프로이트에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예리하고 진부함이 없다. 그리고 그의 모호한 알 수 없는 구석이 그의 첫인상을 결정한다.
카를 융
카를 융
8. 미디어에서
- 1962년 존 휴스턴 감독이 '안나 O' 케이스를 각색하여 프로이트: 비밀스런 열정(Freud: The Secret Passion)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프로이트 역을, 데이비드 맥컬럼과 수잔나 요크가 그의 환자들 역을 맡았다.
넷플릭스 프로이트의 살인해석
2020년 프로이트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프로이트의 살인해석(원제는 Freud)이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배우 로베르트 핀스터가 연기하였는데, 실제 프로이트의 젊은 시절과 싱크로율이 엄청나다.
- 소설 7퍼센트 용액에서 주인공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홈즈와 프로이트 둘 다 코카인 애용자였다는 점에서 착안, 존 왓슨의 부탁을 받고 셜록 홈즈의 코카인 중독을 치료하게 된다. 또한 전쟁을 일으키려는 군수업체 사장을 홈즈가 저지하는 것을 돕고, 마지막엔 홈즈의 트라우마를 듣게 된다.[30] 이 소설은 1976년에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영화 속 프로이트는 앨런 아킨이 연기했다.
- 미국 추리소설 살인의 해석에서는 살인사건을 목격하게 되고 탐정 역으로 활동한다.
- 2023년 Hulu에서 방영한 드라마 《세계사 Part 2》에 등장하며 타이카 와이티티가 연기했다.
- 프로이트와 C.S.루이스와의 대담을 소재로 한 연극 라스트 세션이 있다.[31] 이 연극을 영화화한 게 2024년 8월 21일 한국서도 개봉했다. 프로이트 역은 안소니 홉킨스 경.
9. 여담
- 아편중독자 친구에게 코카인을 권한 후 조금 중독증세가 나아졌다고 생각하자 바로 코카인을 대대적으로 선전해 유명해졌다. 그런데 친구는 아편과 코카인에 함께 중독되어 사망하고 말았다. 프로이트도 담배를 끊기 위해 코카인을 했다가 담배와 코카인에 함께 중독되었다. 다만 19세기 말에도 코카인의 부작용이 보고되었기 때문에 1886년에는 복용을 중단했으나[출처3] 흡연은 해롭지 않다고 여겨서 계속했고, 결국 구강암으로 사망했다.[33]
- 처제인 미나와 부적절한 관계였다는 의심에 시달렸는데 같이 여행을 하면서 다른 이들에게 처제를 아내로 소개한다거나 2006년 호텔의 한 방에서 투숙한 기록이 발견되어 더더욱 논란이 되었다.#
- 프로이트가 쓴 책은 알기 쉽게 쓰여있다고 한다. 하지만 번역판을 보면 이해가 안 되는 난해한 말로 쓰여져 있는데, 심리학자들은 알기 쉬우면 심리학스럽지 못하다면서 용어를 고상하게 바꾸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문제는 최초로 프로이트 전집을 독일어에서 영어로 번역한 제임스 스트레이치(James Strachey, 1887 ~ 1967)에게서 시작되는데, 사실 '자아(Ego)' '초자아(Super-ego)' '이드(Id)'는 올바른 번역이 아니다.[34] 프로이트가 쓴 원문에는 자아는 Ich, 초자아는 Über-Ich, 이드는 Es라고 되어있다. 번역하자면 '나', '초월-나'(Über는 영어의 Over에 해당한다), '그거'이다. 이 단어들은 독일어의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단어들이다. 사실 프로이트뿐만 아니라 독일어로 쓰여진 다른 사상가들의 글은 한국어보다 훨씬 읽기가 쉬운데, 영어나 프랑스어가 고급단어로 갈수록 일상언어보다는 라틴어 어원의 단어가 많아지는 데 반해 독일어의 추상명사 등은 일상어의 조합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35] 딱히 프로이트뿐 아니라 대다수 독일 철학 용어들이 다 그렇다.[36] 이 부분은 한자어로 추상적인 개념어를 정립하려는 학계의 경향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37]
- 빅데이터 인문학의 저자들이 구글 엔그램 뷰어를 이용해 지난 200년 동안 가장 유명했던 사람을 선정했는데 프로이트가 3위였다. 1위 아돌프 히틀러, 2위 카를 마르크스, 3위 지그문트 프로이트, 4위 로널드 레이건, 5위 이오시프 스탈린, 6위 블라디미르 레닌, 7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8위 찰스 디킨스, 9위 베니토 무솔리니, 10위 리하르트 바그너순이었다.[38]
- 그럼에도 정신의학 방면에 문외한인 인문학자들에겐 프로이트의 저작이 융이나 아들러, 라캉의 저작보다는 접근하기가 비교적 쉬운 편이다. 사실 프로이트는 학생 시절부터 돈 키호테를 원문으로 읽고 해석할 만큼 인문학적 소양이 높았고, 인문학자들에게 생소한 정신의학적 용어를 제시하기보다는 신화나 문학 작품 속의 인물에서 개념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인문학 방면에서는 프로이트가 융이나 라캉보다는 더 많이 인용되는 편이다. 그 외에 다른 정신분석학 학자들은 관련 지식 없으면 이해하기 힘들다.
- 정치적으로는 별다른 언급을 남기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사라예보 사건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자 이를 지지하며 암살당한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를 비난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 뒤 오스트리아가 나치에 합병되자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비난을 받고 영국으로 망명했고, 나치는 그의 책을 공개적으로 불태우고 프로이트 학파의 정신분석학을 가르치는 것을 금했다. 반면에 순수 게르만 혈통이던 융의 이론은 아무 제약 없이 가르칠 수 있었다.
-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모성 역시 자주 언급되는 주제이기 때문에, 반쯤 농담으로 패드립의 화신이 되기도 한다. 프로이트의 사진을 아무 거나 가져다놓은 뒤 그 밑에 “Your mom”만 적어놓아도, 그게 드립이 된다.
- 차우차우종인 '조피'를 반려견으로 키웠다. 그는 상담실에 언제나 조피를 머물게 했다. 환자와 상담을 진행할 때 조피가 프로이트 옆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상담에 도움을 준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기사
[1] 독일어 발음은 국제음성기호 표기 기준으로 [ˈziːkmʊnt ˈfʁɔʏ̯t\](한글 표기에 대응시킬 경우 지크문트 프로이트)에 가깝다. 국립국어원의 규정 용례도 '프로이트, 지크문트'이다.[2] 現 체코 모라바슬레스코주 노비이친구 프르지보르.[3] 현 Medical University of Vienna (빈의과대학교)[4] 모피상으로, 유대인 중에서도 하스칼라(Haskalah) 유대인이다. 하스칼라 유대인은 18세기에서 19세기 사이, 서유럽에 살면서 서유럽 주류 사회에 동화되고자 한 유대인을 말한다.[5] 혼전성은 '나탄존(Nathansohn)'.[6] 나이차가 심하게 나는 (1833년생, 1836년생) 이복형이 2명 있다. 그러니까 어머니 쪽으로는 장남이다.[7] 아내이자 동시에 매제의 여동생이기도 했다. 매제인 일라이 버네이스와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서로의 여동생과 결혼한 겹사돈이다. 참고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조카가 마케팅 분야의 선구자인 에드워드 버네이스이다.[8] 그의 막내딸 아나 프로이트도 유명한 정신분석학자로, 방어기제에 대한 개념을 만들었다.[9] 당시 생리학은 비임상 의학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연구 학문으로의 의학은 생리학과 같은 것으로 보기도 했다.[10] 무의식 개념 자체는 프로이트 이전에도 존재했다.[11] 현대 정신의학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무의식이 기초를 만들어 내고 발전시켰으며, 근대 정신의학과 심리학은 지그문트의 정신분석 무의식이 없었다면 오도 가도 못 가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근대 모더니즘은 이성을 향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이성이 닿을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발견이었던 것. 덕분에 포스트모더니즘 탄생에도 기여했다.[12] 프로이트는 문화와 언어, 개인의 경험에 기반하여 꿈에 등장하는 상징이 형성되는 것으로 보았다.[13] 프로이트는 최면술로 히스테리를 치료하기로 명망이 높았지만 막상 최면에 잘 걸리지 않거나 치료 후에도 재발하는 경우가 심심찮았다고 한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과거에(그 이후로도 꽤나 오랫동안) 빈에서 무시당하던 최면술을 좀 더 연구해보려고 프랑스의 낭시로 유학을 간 적이 있었다. 그 때 현지 의사들이 환자의 이마에 손을 얹고 격려하던 것을 떠올리고, 환자들이 히스테리의 원인이 되었지만 기억해내지 못했던 사건들을 기억해 내도록 격려하여 히스테리를 치료하는 식으로 자신의 치료법을 발전시킨다.[14] 지그문트는 물론 아버지 야코프도 유대인이었는데, 친절하고 겸손한 것은 물론 현명하여 아들 지그문트에게 영향을 줬지만 당시의 극심했던 반유대주의 앞에서는 무력했다고 한다. 상술한 20세기의 큰 인물 시리즈에서는 교수 평가에서 낙방한 청년 시절의 지그문트가 자신이 유대인이어서 그런 거라며 과거를 회상할 때 아버지 야코프와의 일화가 나온다. 야코프가 어린 지그문트에게 "공원에서 산책을 하는데 어떤 사람들이 내 모자를 뺏어서 진흙탕에 던지고는 꺼지라고 욕했는데, 너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으냐"라고 묻자, 지그문트는 혼쭐을 내줬을 거라 대답했지만 야코프는 묵묵히 모자를 줍는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고는 억울해서 우는 지그문트를 달래줬다고 한다.[15] 식량 생산량 증가, 항생제 발명, 위생개념 강화에 기인한다.[출처1] Anzieu, D. (1986). Freud's self-analysis. Hogarth Press and the Institute of Psycho-analysis.; Hardin, H. T. (1987). On the vicissitudes of Freud's early mothering: I. Early environment and loss. The Psychoanalytic Quarterly.; Hardin, H. T. (1988). On the vicissitudes of Freud's early mothering: II. Alienation from his biological mother. The Psychoanalytic Quarterly.; Hardin, H. T. (1988). On the vicissitudes of Freud's early mothering: III. Freiberg, screen memories, and loss. The Psychoanalytic Quarterly.[출처2] MacKinnon, D. W., & Dukes, W. F. (1962). Repression. Psychology in the making. New York: Knopf, p702,[18] 인간 심리에 대한 연구는 프로이트 이전에 요셉 브로이어 등에 의해 시도되었고, 이 과정에서 이미 최면술이나 자유기술법 등이 나타났다. 철학계뿐만 아니라 과학계에서도 무의식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었는데, 이에 관한 선구자격인 인물은 윌리엄 제임스이다. 그는 심리학에 관한 방대한 저서를 남겼으며 물론 무의식에 관한 문제도 다루었다.[19] 푸코의 스승이자 정치철학, 인류학 등에서 이데올로기 이론 연구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특히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Appareils idéologiques d’État, Ideological State Apparatus) 개념이나 호명(Interpellation) 등은 이데올로기와 국가, 정치의 문제를 논하는 데에 있어서 핵심적인 개념 중 하나로 다뤄진다.[20] 기존의 과학이 정신분석학을 때려눕혀서 발언의 기회를 없애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목적과, 학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 소통의 범주에 넣기 위한 노력의 산실.[21] 실제로 '오인'의 개념은 국가와 권력, 정치 등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매우 유용하게 사용된다. 알튀세르의 좀 더 자세한 평이 궁금하다면 '프로이트와 라캉'이라는 그의 짧은 글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22] 실제로 당시 히스테리는 '여자들이나 걸리는 병'이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남성 히스테리가 밝혀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 까닭에 프로이트와 같이 "히스테리 연구"란 책을 냈던 브로이어는 하루아침에 자기까지 사회와 학계에서 지탄을 받자 프로이트와 절연하고 만다. 위에서 연표의 출처가 된 위인전 만화 "20세기의 큰 인물" 시리즈에서는 프로이트의 스승 중 하나였던 테어도어 마이네르트(Theodor Meynert)가 '남성 히스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며 다른 건 다 도와줘도 그것만큼은 철저하게 부정했으나, 노년에 죽음을 앞두자 '사실 내가 남성 히스테리 환자였다'면서 털어놓는 걸로 묘사된다.[23] 말하자면 프로이트의 이론 자체가 유효하다는 것이 아니라, 프로이트의 이론이 가진 한계나 문제점과는 별개로 '인간의 정신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겠다(분석할 수 있다)'는 프로이트의 시도가 철학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수준을 넘어서 프로이트의 이론을 기반으로 인간의 행동과 심리를 분석하겠다고 나대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십중팔구 사기꾼이나 다름없는 말장사꾼일 가능성이 높다. 이미 현대의 정신분석학은 프로이트가 연구하던 시절의 내용과 많이 달라졌다.[24] 평생 아버지의 연구를 돕느라 결혼을 하지 않았다. 여성 파트너 도로시와 40년간 살았다.[25] 결혼 후의 이름은 안나 버네이스. 프로이트와 그 자녀들이 영국으로 이민 가기 전인 1890년대에 미국에 정착했다. 그래서 홀로코스트에서 희생된 다른 여동생들과 달리 목숨을 건졌다.[26] 안나의 남편인 일라이 버네이스는 프로이트의 아내인 마르타 버네이스의 오빠이기도 하다.[27] 이 때문에 프로이트가 융을 하도 밀어주고 융도 정신 분석학의 세계화를 주장하며 이것저것 간섭하자 취리히의 융 파벌과 빈에 있는 프로이트의 다른 제자들이 엄청나게 싸우기도 했다. 결국 양쪽 모두의 중심 인물이었던 빌헬름 슈테켈, 알프레트 아들러, 카를 융 등이 모조리 독립하면서 프로이트만 남았고, 그 재결합의 기회마저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프로이트가 얼마 못 가 사망하면서 날아가고 말았다.[28] 중앙SUNDAY (2020.08.08.) : 슈니츨러·프로이트…지식인 융합 모임, 비엔나 이끌다[29] 프로이트의 대표저서로는 1900년작《 꿈의 해석》이 있으며, 슈니츨러는 1926년 《 꿈의 노벨레》를 집필했다.[30] 어린 시절에 충격적인 가정사가 있는데 이 때문에 홈즈가 코카인에 중독된 것이었다.[31] 프로이트가 죽기 몇 주 전 옥스퍼드에서 온 교수를 만났는데 그게 C.S.루이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즉 연극의 내용은 전부 창작인 셈.[출처3] Masson, Jeffrey M. (ed.) The Complete Letters of Sigmund Freud to Wilhelm Fliess, 1887–1904. Harvard University Press, 1985, pp. 49, 106, 126, 127, 132, 201.[33] 정확히는 더 이상의 치료가 의미가 없다고 여겨 주치의인 슈어 박사에게 안락사를 부탁했고, 슈어 박사는 그것에 동의해 프로이트에게 다량의 아편을 주사했다.[34] 스트레이치는 그래서 나중에 라깡에게 여러모로 까였다. Ego는 라틴어의 1인칭 대명사, id는 영어의 it에 해당하는 라틴어의 중성 3인칭 대명사. 그러니까 멀쩡한 독일어로 써 있는 걸 괜히 라틴어로 바꾼 거다.[35] 예를 들면, 하이데거의 개념 중 하나인 '피투성'은 독일어 원어로는 Geworfenheit. 우리말로 풀어쓰면 '내던져짐(즉 방치)'. 'geworfen'은 일상적으로 쓰이는 '던지다(werfen)'의 과거분사형이다.[36] 다만 독일 철학은 다 이해하기 쉬울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애초에 쓰는 말이 쉽다고 그 사유의 깊이가 줄어드는 것은 아닌 데다가 기존의 개념으로 내 생각을 표현하기 좀 그렇다 싶으면 별 망설임도 없이 새로운 말을 만들어 버린다.[37] 이런 경향은 재야라고 어디 가는 것이 아니어서, 80년대에 숱하게 번역되어 90년대 초까지 출판되던 사회주의 관련 철학서는 차라리 대학교 교재가 읽기 쉬운 면이 있었다.[38]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