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이낙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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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아버지 이두만 · 아들 이동한 | ||
20대 대선 | 대권주자로서의 장단점 · 필연캠프 | ||
비판 및 논란 | 비판 및 논란 (국무총리 시기 · 당대표 시기 · 제20대 민주당 경선 후보 시기) | ||
관련 단체 | 새미래민주당 | ||
기타 | 친낙 · 별명 · 똥파리 · 뮨파 · 이낙연 마이너 갤러리 · 문을 여니 조국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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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낙연의 생애를 적은 문서.2. 어린 시절
1952년 12월 20일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면 용덕리의 빈농가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1] 영광 삼덕초등학교(폐교) 6학년 때 담임교사가 총명함을 알아보고 가난한 부모님을 설득하여 중학교부터 광주로 보냈다. 가난했지만 어머니가 농사일과 채소장사를 하며 뒷바라지를 했다. 광주북성중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45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대학 시절 하숙비를 못 내 친구네, 선배네 자취방을 전전하면서 살았다. 당시 키가 170cm 후반인데 몸무게가 50kg밖에 안 됐을 정도였다고 한다.#대학 졸업식을 며칠 앞둔 1974년 2월 22일 육군에 카투사로 입대하여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동에 있는 주한 미8군 한국군지원단 제21수송중대에서 행정병(일반행정 특기)으로 31개월간 복무했고, 1976년 9월 21일 병장으로 만기전역했다. 전역 후 가정형편상 사법시험을 공부할 처지가 되지 않아[2] 바로 한국투자신탁[3]에 취업하였다가 동아일보에 기자로 입사했다.[4]
3. 동아일보 기자
1979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2000년 정계입문 전까지 21년간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근무했다.[5] 동아일보 입사한 다음해인 1980년, 미술교사인 김숙희 여사[6]와 선을 보고 결혼했다. 아내는 이후 이낙연이 일본특파원으로 파견 나갈 때 교사직을 그만 두었다.
동아일보에서는 입사 이후 정치부 기자로 일했다. 이후 도쿄특파원, 논설위원, 국제부장을 지냈다.
1989년부터 수년간 도쿄 특파원을 지냈다.[7] 이 때문에 일본어를 준 네이티브급으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훗날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국면에서 해당 논란을 두고 경상남도 합천의 민주정의당 지구당 개편대에서 당시 민정당 사무총장이던 권익현의 '위대한 영도자' 발언을 두고 꼬십(풍자 혹은 비꼬는 기사)에 넣은 것으로, 즉 찬양 목적아 아니라 오히려 해당 발언을 비판을 하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었다고 밝혔다. #
정치부 기자로 지내면서 평화민주당 당사를 방문하며 김대중 총재를 알게 되어 친분을 쌓게 되었고, 1990년 국회의원 보궐선거 때 김대중 총재가 전라남도 함평군·영광군에 전략 공천해 줄 테니 정계 입문을 적극 권유했다. 하지만 도쿄 특파원으로 내정되어 있었던 이낙연은 김대중 총재의 국회의원 출마 권유를 거절했다. 나중에 이낙연은 이때 출마 권유를 거절한 이유에 대해 "나는 국회의원보다 도쿄 특파원이 더 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8][9]
김대중은 이낙연을 얼마나 아꼈는지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날 기자회견을 할 일이 있었고, 타 신문사 기자들은 다 모였는데 이낙연 기자가 보이질 않자 시작을 안 하다가, 이낙연 기자가 조금 늦게 도착하니 그제서야 기자회견을 시작했다는 것이다.[10] 그 외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낙연 기자와 식사 중 자기 그릇에 있던 고기덩이를 이낙연에게 건내준 일화, 기자회견에서 발표한 내용과 아예 다른 얘기를 해준 일화 등 다양한 에피소드가 있다. 이낙연 본인도 아버지 다음으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단연 김대중으로 꼽는다.
4. 국회의원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전라남도 함평군·영광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새천년민주당 대변인을 역임하였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새천년민주당 대통령후보 선출 경선에서 노무현을 지지했고,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대변인을 맡기도 했다. 당시 떨어진 지지율을 이유로 후보 교체를 주장하면서 노무현을 흔들고 있던 후단협 소속의원들에게 "지름길을 모르거든 큰 길로 가라. 큰 길을 모르겠거든 직진하라. 그것도 어렵거든 멈춰 서서 생각해 보라."라는 논평을 내었다.
2003년, 친노계 정치인들이 열린우리당을 창당할 때 이낙연은 당을 지키겠다며 따라가지 않았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찬반 논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낙연 노무현 탄핵소추안 찬반 논란 문서 참고.
2006년 02월 13일 광주에서 민주당 원내대표로 이른바 "노무현 정권의 민주당 죽이기 규탄대회"를 개최 하였다.#
2006년 2월 22일, 이낙연 민주당 원내대표는 국회에서 “노무현 정부는 처음부터 사회통합에 역행했다” “이념과 정파를 뛰어넘는 국민통합을 이루지 않고 도리어 편을 갈랐다” “자주를 내세워 미국을 불필요하게 자극하면서도 실제에서는 미국에 속절없이 양보해 왔다”고 지적했다.#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원내대표로 선출되었다.[11] 2005년 새천년민주당이 민주당으로 개칭하면서 민주당 소속이 되었다.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시기 전라남도지사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출마하지는 않았다.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에 참여하여 대변인으로 지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전라남도 함평군·영광군·장성군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당선된 해부터 2010년까지 국회 농림수산식품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10년 민주당 사무총장에 임명되어 2011년까지 역임하였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전라남도 담양군·함평군·영광군·장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태로 민주당이 논란에 휩싸였을 때도 당선되는 등 고향인 전라남도 영광군 쪽 지역구에서 4선 의원을 했다. 민주당에서 5번이나 대변인을 맡아 ‘5선 대변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전라남도지사 출마를 위해 경선에 참여하여 47.6%를 득표해 당시 여수시 을 3선 중진 주승용 의원을 최종 득표율 3.2%p 차이로 누르고 승리하여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전남도지사 선거에 출마하게 되었다. 대국민 여론조사에서는 0.8%p 차이로 근소하게 밀렸지만 선거인단 투표에서 7.6%p 차이로 크게 이겼는데 탄탄한 당내 입지가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초선 ~ 4선 동안 대표발의해 가결시킨 법안들은 다음과 같다.
- 초선 ~ 3선
-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법 개정안 (초선): 민주평통의 기능에 통일 여론 수렴 등 추가, 운영 제도 보완
- 항공안전 및 보안에 관한 법률 제50조 2항 (재선): 승객이 항공기 내에서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를 저질렀을 때의 벌금을 100만원 이하에서 500만원 이하로 상향
- 농림어업인 삶의 질 향상 및 농산어촌지역 개발촉진에 관한 특별법 제35조의3 (3선): 섬에 사는 농림어업인이 농축수산물을 육지로 운송할 때 정부 및 지자체에서 운송비를 지원
- 4선
- 조세범 처벌법 제5조: 가짜석유제품을 제조 또는 판매하여 조세를 포탈한 자를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포탈한 세액의 5배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
- 물류시설의 개발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제2조: 물류단지 내에 구매사업 및 판매사업 시설을 설치할 수 있는 대상에 협동조합 및 연합회를 추가
- 소비자생활협동조합법 제33조 4항: 선거운동의 방법을 정관으로 정하도록 한 조문 삭제. 이건 농업협동조합법에 있던 비슷한 규정이 위헌을 받았기 때문이다.
- 민법 개정안: "갈음하다"라고 써야 할 곳에 "가름하다"라고 쓴 부분 교정.
- 국가유공자 등 단체 설립에 관한 법률 개정안: 각 단체 정관에 회원의 권리의무 조항과 이사의 수 조항 추가. 종전에는 이사의 수가 강제되어 있었다.
- 각종 "n년 이하의 징역 또는 m원 이하의 벌금" 조항에서 m값을 n천만원으로 조정. 국민권익위원회의 권고안 및 국회사무처 법제예규의 기준을 따른 것이다. 대개는 물가가 상승한 당시 실정을 감안하여 금액이 올라간 내용이지만, 예외적으로 국방정보화 기반조성법 제28조의 경우는 7년/1억원에서 5년/5천만원이 됐다.
- 2015경북문경세계군인체육대회 지원법 제34조
- 경제자유구역 및 제주국제자유도시의 외국교육기관 설립·운영에 관한 특별법 제22조, 제23조
- 국방정보화 기반조성 및 국방정보자원관리에 관한 법률 제28조
- 6·25 전사자유해의 발굴 등에 관한 법률 제16조
- 군복 및 군용장구의 단속에 관한 법률 제13조
- 군보건의료에 관한 법률 제20조
- 향토예비군 설치법 제15조
- 건설기계관리법 제40조, 제41조
- 공인노무사법 제28조
- 비영리민간단체지원법 제13조: 부정한 방법으로 보조금을 받을 때 처벌을 5년/3천만원 이하, 보조금을 빼돌려 다른 데 썼을 때 처벌을 3년/2천만원 이하로 조정.
5. 전라남도지사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전라남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37대 전라남도 도지사 선거에 출마했을 때 ‘100원 택시’와 ‘찾아가는 영화관’ 서비스 등 이색 공약을 내걸어 눈길을 끌었다. 100원 택시는 전라남도 316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택시를 부르면 그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버스정류장까지 100원을 받고 택시가 운행한 뒤 차액을 지방자치단체에서 지불하는 방식이다. 현재 화순과 보성에서 시범운행 중이다.
전라남도 22개 시군 중 목포, 순천, 여수, 광양에만 영화관이 있는 점을 고려해, 도지사에 당선된 뒤 2014년 고흥과 장흥에 영화관을 세웠다. 임기 안에 18개 시군에 모두 영화관을 세우겠다고 약속했다. 또 섬과 농어촌 지역에도 영상 장비를 들고 찾아가 영화를 무료로 볼 수 있는 행사를 시범운영하고 있다.
일자리 창출 면에서도 좋은 성과를 내 고용노동부로부터 지난해 ‘일자리종합대상’을 수상했다. 다른 시도보다 산업적으로 뒤처져 있지만 일자리 창출을 도정 최우선 순위에 두고 매진한 결과였다.
이렇게 하나 둘 성과를 보이면서 2017년 2월~4월 전국 시도지사 직무수행 긍정평가에서 안희정 충남지사의 뒤를 이은 2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공약이행율 자체에선 부정적 평가를 받았다. 2016년 진행된 "민선 6기 전국 시·도지사 및 교육감 공약 이행 및 정보공개 평가"에 대한 최종결과에서 이 지사는 공약 이행 종합 평가 결과 전국 최저 수준인 B 등급을 받는 데 그쳤다. 당시 B 등급을 받은 광역지자체는 이낙연의 전남을 제외하면 인천광역시가 유일했다.#
2016년 11월 2일에 열린 박정희 기념재단 추진위 출범식에 이낙연 전남지사가 부위원장으로 참여하였다. 당시 전남과 경북에서는 동서화합의 차원에서 박정희, 김대중 기념식에 서로 참여했고 박정희 기념재단도 여기의 일환이었지만, 기념재단에서 광화문 광장에 박정희 동상을 설치하자는 등 지나친 우상화를 시도하자 이 지사는 이에 반발하여 부위원장직을 사퇴했다.
한편 도지사 재임 중간에 새정치민주연합 분당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는데, 이와 관련해 "정치생활을 하며 당적을 바꾼 적이 없었다"라며 탈당할 의사가 없다고 못박기도 했다. 당시 기사 당시 기사
6. 국무총리
해당 문서 참고.7. 21대 총선 국면
2020년 1월 15일,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회에 참석해 공식적으로 당 활동을 할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이 이 전 총리에게 공동선대위원장을 맡길 것이라는 게 사실상 확정이라는 분위기. 게다가 이 전 총리가 서울 종로구 교남동의 어느 한 아파트를 전세 계약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종로 출마 또한 기정사실로 보인다.1월 22일, 이해찬 대표와 회동 이후 공동상임선대위원장 및 종로 출마를 제안받았다는 단독 기사가 나왔다.# 바로 다음날 수락 의사를 밝히면서 "국민께 위로와 희망 드릴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2월 2일, 종로 교남동 이사를 마무리하고 다음 날 공식적으로 종로구의 총선 예비후보로 등록한다고 한다.# 그 이전에도 지속적으로 종로구 전통시장과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 사저를 방문하는 등 지역구 관리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2월 17일에 발표된 민주당의 1차 전략공천 내역에 김두관 의원 등의 인물들과 함께 이름을 올리며 종로구 출마가 공식적으로 확정되었다. 또한 이날 예비 유세를 위해 찾은 부암동에서 기자들로부터 임미리 교수 고발과 관한 논란에 대해 질문받자 향후 선대위원장이 되면 그에 걸맞게 다시 발언할 것이라며 말을 아끼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으나 개인적인 차원의 사과라며 "국민들께 죄송하다." 라며 민주당 내에서는 처음으로 공식석상에서의 사과를 전하는 모습으로 긍정적 반응을 얻었다.
다음날인 2월 18일, 민주당 공관위에서 이낙연의 종로구 전략 공천을 공식적으로 확정지었으며 이틀 후 선대위가 발족하자 이해찬 대표와 함께 공동상임선대위원장 직을 맡았다.
이후 대구를 중심으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이 본격적으로 확산되는 상황이 되자 지역구 경쟁 상대인 미래통합당 황교안 대표가 문재인 정부를 상대로 코로나19 확산을 명분으로 세금을 쓸 생각을 하지 말라고 날을 세웠고 이에 대해 이낙연 전 총리는 황교안 대표를 비판하며 세금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라며 추가경정예산 편성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2020년 3월 8일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코로나19재난안전대책위원회’를 ‘코로나19국난극복위원회'로 확대하였고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총선 본격화를 앞두고 상임선대위원장으로 임미리 교수 고발 논란, 민주당의 범진보 비례위성정당 설립 논란 등 선거에 악재가 될만한 요소에 대하여 미리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며 부정적 이슈 확산을 차단하는 데 노력하고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민주당 총선 후보들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적극적인 행보 덕분인지 대권 후보 경쟁자이자 같은 지역구에서 맞붙는 미래통합당 황교안 대표와의 지지율 격차가 선거 종반전으로 갈수록 더 벌어지고 있다. 출구조사에서도 크게 승리했고 개표에서도 내내 크게 앞서가며 당선을 조기에 확정지었다. 더불어민주당도 대승을 거뒀으나, 이낙연 전 총리는 환호나 박수갈채를 자제시키고 압승을 거둔 선거 결과에 대해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하였다. 맞붙었던 황교안 대표는 곧 당 대표직에서 사퇴하며 그야말로 완승을 거뒀다.
결과적으로 5선 고지를 밟음과 동시에 차기 대권주자로서 발판을 마련했다. 특히 제1야당 미래통합당의 대선 후보급들이 이번 총선에서 줄줄이 낙선한 탓에 2022년 대선을 향해 가는 길이 비교적 탄탄해졌다. 당내에서도 소위 이낙연계라고 불리는 인물들이 많이 당선된 것도 당내 기반이 굳건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받는 이낙연 전 총리에게 더 긍정적인 요소이다.
당선 이후 5급 비서관을 구할 때 경쟁률이 무려 111:1이 떴다고 한다. 게다가 자격 요건이 '경제 또는 국제관계 분야 전문가'로 한정해 다소 까다로운 편이었다. 결국 미국 변호사 출신인 하정철이 채용되었다.#
한편 의원실은 의원회관 7층 입주를 희망했는데,# 다선 의원이라서인지 희망이 반영되어 친박계 좌장 최경환 전 의원이 사용했던 746호에 입주했다.#
제4차 전당대회를 앞두고 이낙연이 당권에 도전하는 것을 고심하고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일단 이낙연 본인은 늦어도 다음주까지 전당대회 출마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고심 끝에 5월 27일, 당권에 도전하는 것을 결심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다만 출마 선언은 다음주 초에 할 것으로 보인다.[12] 하지만 돌연 출마선언을 연기하였다.
더불어민주당 코로나19 국난극복위원회 1기에 이어 총선이후 2기도 위원장을 맡았고 6월부터 전국 각지에서 간담회를 진행하고 있다. 위원회 활동 마감인 2020년 6월 24일 이후 공식적으로 당 대표 출마선언을 할 것으로 보인다.#
7월 7일, 21대 국회 개원 후 한동안의 잠행을 깨고 공식적으로 더불어민주당 2020년 전당대회 당대표 경선 출마를 선언했다.#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이 자리에서 이낙연 의원은 어떤 어려움도, 가시밭길도 마다하지 않겠다, '국난 극복을 위해서'라며 출마 이유를 밝혔다. 한편 원래 당대표 경선 출마를 예상했던 송영길, 홍영표, 우원식 등 당내 중진들이 줄줄이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사실상 김부겸 전 행정안전부 장관과의 1대1 대결이 유력해졌다.#
7월 23일, 국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동남권 신공항 문제와 관련하여 확장성 등을 고려하여 가덕도 신공항을 특정하여 지지 의사를 밝혔다.# 총리 시절에는 개인적인 의견을 내기 쉽지 않았지만 개인적인 생각임을 전제로 의사를 명확하게 밝힌 셈인데, 스스로 영남 후보임을 자인하면서도 자신의 지역 기반인 대경권의 눈치를 봐 가덕도 신공항에 반대하는 김부겸 후보와 명확하게 차별화가 되는 지점이 되었다. 바로 전날에는 김경수 경남도지사와 회동하여 지역 현안을 놓고 의견을 나누는 등 정치권 일각의 호남 정치인 프레임을 벗어나 부울경 지역 민심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2020년 제주 지역 정기 대의원대회 및 당 대표 후보 합동연설회에 나선 이낙연 후보 |
8월 17일,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했다가 18일에 자가 격리되었는데 이 날 같은 프로그램 다른 코너에 출연했던 CBS 기자가 코로나19 확진을 받았기 때문.# 확진자와 직접 접촉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확진자가 사용한 마이크 등을 같이 사용했던데다가, 이낙연 의원 역시 전당대회 관련으로 최근 김대중 대통령 추도식 등 여러 행사에 참여하고 정치인들과 접촉하는 등 광폭 행보를 보이고 있었던 터라 정치권으로의 확산 우려가 컸다. 다행히 음성 판정이 났으나, 잠복기 우려로 인해 당분간 자가 격리 상태를 유지한다고 한다.#
8. 제4대 더불어민주당 대표
자세한 내용은 이낙연/당대표 시절 문서 참고하십시오.9. 대표직 사퇴와 20대 대선 국면
2021년 3월 9일, 당대표 취임 192일만에 제20대 대통령 선거 출마 준비를 위해 당대표직을 사퇴했다.# 이후에도 상임선대위원장 직책을 맡아 김태년 당대표 권한대행과 함께 2021년 재보궐선거는 계속 진두지휘하기로 했다.3월 12일, 당대표 사퇴 이후 처음이자 엿새만에 다시 부산을 방문해 김영춘 후보를 지원하며 "가덕신공항을 처음 추진했던 노무현 대통령 꿈을 이어받은 후보(김영춘)와[13] 가덕신공항 계획을 중단시켰던 이명박 정부 사람(박형준)의 대결”이라고 강조했다.#
3월 31일, 결국 선대위원장으로서 여당의 부동산 정책으로 인한 부작용에 대해 죄송하다며 대국민 사과를 했다.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며 지지자들의 결집을 유도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4월 7일 재보궐선거 출구조사에서 서울과 부산 모두 국민의힘에게 패배한다는 예측이 나왔고, 결국 국민의힘에게 역사적인 대참패를 당하면서 대권주자로서도 치명상을 입었다. 참패 직후 당내에서 아예 후보 공천을 하지 말았어야했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등 향후 복귀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5일 복귀해 측근들과 회담을 나누면서 죽어도 문재인 대통령을 지키면서 정권과의 차별화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란 의지를 밝혀 친문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대선에 계속 도전할 것으로 보인다.#
5월 2일, 전당대회에서 송영길 의원이 당대표로 선출된 후 공식 행보를 재개했는데 5월 8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신복지포럼 창립총회에 참석해 "문재인 정부가 다하지 못한 것을 새롭게 해야 할 책임이 제게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내 삶을 지켜주는 나라를 국가 비전으로 삼아야 한다. 민주당 이낙연도 뛰어야 한다"고 밝혀 사실상 대선 행보에 시동을 걸었다.#
5월 16일, 더불어민주당 광주시당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연초 크게 논란이 되었던 이명박, 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면 발언에 대해 공식 사과하고 국민기본권 강화 및 불평등 완화를 골자로 한 개헌을 새롭게 제안했다. 그 외에도 달빛내륙철도 건설, 경상남도, 경상북도가 공동으로 추진해 예타조사를 통과한 것이라 본인이 통과시킨 건 아니다. 애당초 본인이 언급하기 한 달 전부터 공약 이행 촉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군 공항 이전 등 광주 지역을 맞춘 공약도 새롭게 발표했다.#
6월 29일, 더불어민주당 제20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 예비후보로 등록했다.#
7월 2일, 정부에 셧다운제 폐지를 검토해줄 것을 요청했다. 대선 주자 중 셧다운제 폐지를 주장한 것은 이낙연 후보가 처음이다.#
2021년 7월 5일, 더불어민주당 예비후보 중에는 가장 늦게 20대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슬로건은 '내 삶을 지켜주는 나라'다.#
9월 5일, 경선 첫주차인 충청권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에게 20% 이상의 더블스코어 대패를[14] 당했다. 호남 다음으로 이낙연 후보에게 어느정도 유리할 수도 있다는 평가를 받은 지역이 충청이였기에, 이낙연 캠프 내에서 상당히 충격을 먹었다고 한다. 이낙연 캠프 충격 충격에 빠진 이낙연
9월 15일, 결국 배수진을 치며 경선 도중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
10월 10일, 이재명 후보가 누적 득표 과반을 달성하며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불과 1년 반 전 40%의 압도적 지지율로 대세론을 형성하고 다음 대통령으로 사실상 확정됐다는 설레발까지 나왔던 상황에 본선 낙선도 아니고 경선에서 탈락은 매우 본인에게 굴욕적일 것이다. 결국 경선 규정을 문제삼으며 불복을 선언했다. 이낙연 지지자들은 불복 시위를 벌이며 민주당 당사 앞에서 민주당을 규탄했다. # # # 하지만 정작 이낙연 '본인'은 11일 정오까지 어떠한 입장도 내놓지 않으면서 승복도 불복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결국 이로부터 이틀 뒤인 10월 13일, 더불어민주당 당무위원회에서 이의신청을 기각하자 SNS를 통해 수용 의사를 밝혔다. 이로써 최종 경선 결과가 최종 발표된 지 3일 만에 비로소 민주당 경선이 마무리되었다.
이재명 후보와의 회동을 미루다가 10월 24일, 자신의 전 지역구였던 서울 종로구의 한 찻집에서 만나 회동을 하였고, 이재명 캠프 선대위의 상임고문을 맡기로 합의하면서 둘 사이의 앙금은 일단 봉합되었다.
11월 2일, 공식적으로 이재명 후보의 선대위 출범식에 참석하여 상임고문직을 맡았으나 선거운동에 전면으로 활동을 하지는 않고, 주로 각 지역에 자신의 지지자들을 만나며 잠행했다. 실제로 이재명 후보가 유세차 전남 지역을 방문하였을 때도 따로 충남과 경남에 방문하여 함께하지 않았다. #
12월 23일, 서울 중구에 있는 달개비 식당에서 이재명 후보와 오찬 회동을 가졌고 함께 비전위 공동위원장을 맡기로 합의했다. #
2022년 1월 5일, 이재명 후보와 함께 광주에서 선대위 국가비전·국민통합위원회 회의를 열었다.#
1월 24일, 성남 상대원시장 '매타버스' 유세에 동행해서 지지 연설을 했다.
2월 8일, 이재명 후보의 요청으로 총괄선대위원장으로 합류하였다. 출처.
2월 17일, 선거 운동 과정 중에 큰절을 하는 것이 억지 쇼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당내 인사들에게도 SNS 자제령 등 훈수를 두기도 했다.#
2월 22일, 이낙연은 온라인 상에서 구설이 잦은 어느 초선 의원을 만난 자리에서 직접 구두로 쓴소리를 하는 한편 당 내에도 부동시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며 신중한 언행을 보여줄 것을 당 내 인사들에게 요청하였다.#
선대위가 해산한 가운데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까지 선거 운동을 지원한 후 미국으로 가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10. 8회 지선 국면과 이후
한편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내에서 오세훈 서울시장에 대항할만한 중량급 인사를 후보로 차출해야 된다는 의견이 나오면서, 민주당의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송영길 전 대표, 이재명 전 지사와 함께 종종 거론되고 있다.결국 이낙연은 4월 19일, "서울시장 출마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민주당 지도자 등 몇 분께 말씀드린 바 있다"고 직접 불출마 의사를 밝혔다.#
다만 2선에 후퇴해있는 상황에도 지방선거 및 보궐선거에 출마한 이광재 강원도지사 후보, 허태정 대전광역시장 후보, 오영훈 제주도지사 후보, 김한규 제주시 을 국회의원 후보, 원창묵 원주시 갑 국회의원 후보 등 유세를 지원하고 배우자 김숙희씨와 함께 문재인 전 대통령의 양산 사저를 예방하는 등 정치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2022년 6월 1일,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참패하자 미국 출국 전 페이스북을 통해 선대위원장 역할을 맡았던 이재명 의원과 박지현,윤호중 등 당 지도부를 비판했다. 특히 20대 대선 패배 이후 민주당의 행보를 지목하며 “패자가 할 일은 대체로 이렇다. 패배를 인정하고, 패배의 원인을 분석해 받아들이며, 그 원인된 문제들을 제거하고, 새로운 단계로 발전해야 한다라며 “그러나 민주당은 패배를 인정하는 대신에 졌지만 잘 싸웠다고 자찬하며, 패인 평가를 밀쳐두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런 과정을 정략적으로 호도하고 왜곡했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대선과 지선 연패에 대한 책임을 둘러싸고 이재명계와의 전면전에 대비해 자신의 계파 의원 20여 명과 심야 회동을 가졌다. 이 자리에는 정세균계 의원들도 함께한 것으로 알려졌다.#
6월 7일, 당초 계획대로 미국 워싱턴 DC로 출국했다. 이 자리에서 자신을 배웅하러 나온 지지자들을 향해 "어떤 사람은 경멸하고 증오한다. 이것을 여러분이 존중과 사랑으로 이겨주실 거라 믿는다. 어떤 사람은 저주하고 공격한다. 그것을 여러분이 정의와 선함으로 이겨주시길 바란다"며 "사랑과 정의, 열정과 상식이 승리한다고 저는 믿는다"고 밝혔다.#
조지 워싱턴 대학교 한국학연구소 방문연구원으로 재직하다가 2023년 4월 장인상을 당해 일시귀국했고 조문을 위해 방문한 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다시 만나게 되면서 언론의 관심이 쏠렸다. 이후 2023년 5월부터는 22대 총선 출마설이 나왔다.
2023년 6월 3일, "정치는 길을 잃고, 국민은 마음 둘 곳을 잃었습니다. 국가를 위한 저의 책임을 깊이 생각하겠습니다. 대한민국의 생존과 국민의 생활을 위해, 제가 할 바를 하겠습니다."는 글을 남기며 24일 귀국할 것임을 밝혔다.
6월 24일, 예정대로 귀국해서 정치활동 재개를 선언했지만 당분간은 당무에 크게 관여하지 않고 대학 강연 등을 하며 지낼 것이라고 한다. 일단 귀국 직후 사무실은 자택이 있고 과거 자신의 지역구기도 했던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마련했다.#
7월 15일, 서울특별시의 한 결혼식장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소속 어느 기초의원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80대 남성에게 20cm 길이의 흉기로 위협당했다. 이에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했고 스마트워치가 지급됐다.#
8월 15일, 윤석열 대통령의 부친 윤기중 연세대 응용통계학과 명예교수가 향년 91세를 일기로 서거하자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윤대통령과 김건희 여사에게 위로를 전했다.
11월 18일, 한겨레 신문과 단독 인터뷰를 통해 “국가가 허물어지고 있는 것 같다, 두렵다”며 윤석열 대통령과 정부, 국민의힘,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를 모두 싸잡아 비난하며 등판의지를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12월 13일, 신당 창당을 할 거냐는 질문에 “예”라고 답하고, 새해 신당 창당 설이 돌면서 사실상 새해에 신당을 창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또한 이재명 대표와 지도부 총사퇴를 요구하며 통합 비대위로 전환하지 않으면 자신은 탈당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송영길이 더불어민주당 돈봉투 사건으로 구속됐지만 지도부가 이미 탈당한 인물이라며 당과 상관 없는 인물이라고 논평하자 당이 참 뻔뻔하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설상가상으로 대장동 개발 사업 논란을 2021년 8월 31일 자신의 측근이 처음으로 공개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이재명과 더불어민주당과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 것으로 보인다. 이런 행보와는 달리 본인이 대통령으로 모신 문재인은 더불어민주당에 특별 당비 500만원을 납부한 사실을 공개하고 새해 첫날 이재명과 만나기로 하는 등 대놓고 이재명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는 모양새라 문재인과도 정치적으로 갈라설 수 있다.
JTBC의 보도에 의하면 김부겸과 만나 자신을 도와 신당에 합류해준다면 자신은 21대 대선 불출마와 신당의 당권도 차지하지 않겠다고 했다고 한다.
2024년 1월 초에 거취를 표명하겠다고 한다. 이때 탈당을 할 예정이다. 이미 신당 창당을 공언했고, 이재명의 당대표 사퇴 및 통합비대위 전환은 공염불이 되어가는 상황이라 탈당은 예정된 수순이라 보는 시각이 많다.
12월 30일, 이재명 대표와의 조찬 회동을 갖는다고 한다. 통합비대위에 대한 이야기가 오갈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어떤 결론이 나올지 주목되는 부분이다.
다만, 이재명 측은 당대표 사퇴에 대해서는 여전히 반대하는 입장이고 이낙연은 이낙연 측 대로 “그냥 시한 다가오니까 쇼하는 것” 정도로 치부하는 등 양측모두 한치의 양보도 없기에 결국 빈손 회동이 되지 않겠냐는 관측이 많다.#
결국 이재명 대표와의 회동에서 사실상 협상은 결렬되어 1월 초에 더불어민주당에서 탈당할 것으로 보인다. 이낙연은 이제 본인의 갈 길을 가겠다고 말했으며 사실상 탈당 및 신당 창당을 공식화하는 행보로 보인다.
2024년 1월 2일, 이재명이 피습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며 잠시 주춤한 듯 보였으나 재개하는 모습을 보였다.
1월 6일 김대중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서 문재인이 사실상 신당 창당을 반대하는 발언을 했으나[15]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지지하는 발언이라고 생각한다며 자신은 신당 창당의 길을 걸을 것이며 다음주 중반 고별 기자회견으로 더불어민주당과 이별하겠다고 한다.
1월 8일, 더불어민주당 탈당 및 신당 창당 공식 선언을 1월 11일 국회에서 할 계획임을 밝혔다. #
1월 9일, 더불어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중 44%가 전과자라며 본인이 정치 생활을 하면서 당에 전과자가 이렇게 많은적이 없었다면서 더불어민주당을 비판했다. 그러나 잘못된 여론조사를 인용한 것인지 큰 비난을 받자, 41%라고 정정했다.[16]
1월 11일 오후 2시, 기자회견을 열고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며 원칙과 상식 의원들과 함께 신당을 창당할 것으로 보인다.
22대 총선에 불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11. 새로운미래 창당과 첫 낙선
1월 11일, 7년간 몸을 담았던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한다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 ■ 기자회견 전문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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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 11. 이낙연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더불어민주당 당원 여러분,
우리는 2023년 어두운 한 해를 보내고, 2024년 새해를 맞았습니다. 새해에는 가정마다 살림걱정 덜하고, 국가도 세계도 평화를 회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24년 동안 몸담았던 민주당을 벗어나, 새로운 위치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대한민국에 봉사하는, 새로운 길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민주당을 들락날락했지만, 저는 민주당을 한 번도 떠나지 않고 지켰습니다. 그렇게 저에게 ‘마음의 집’이었던 민주당을 떠난다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고민하며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민주당은 저를 포함한 오랜 당원들에게 이미 ‘낯선 집’이 됐습니다. 민주당이 자랑했던 김대중과 노무현의 정신과 가치와 품격은 사라지고, 폭력적이고 저급한 언동이 횡행하는 ‘1인 정당’ ‘방탄 정당’으로 변질했습니다. 민주당의 정신과 가치를 지키고 구현할 만한 젊은 국회의원들이 잇달아 출마를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당내 비판자와 저의 지지자들은 2년 동안 전국에서 ‘수박’으로 모멸 받고, ‘처단’의 대상으로 공격 받았습니다. 저는 그런 잔인한 현실이 개선되기를 바랐지만, 오히려 악화됐습니다. 포용과 통합의 김대중 정신은 실종됐습니다.
민주당의 피폐에는 저의 책임도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특히 민주당 소속 시장의 잘못으로 2021년에 치러진 서울시장, 부산시장 보궐선거에 기존 당헌을 고쳐가며 후보자를 낸 것은 제가 민주당 대표로 일하면서 저지른 크나큰 실수였습니다. 대통령선거를 1년 앞둔 시기에 서울과 부산의 공조직을 가동하는 것이 대선 승리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얕은 생각을 제가 떨쳐 버리지 못했습니다. 또한 2020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공동선대위원장으로 일하면서 민주당 지도부의 위성정당 허용 결정에 제가 동의한 것도 부끄럽습니다.
저의 그런 잘못을 후회하면서 국민과 당원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저의 오늘 결정에 대해 저의 아버지처럼 오랜 세월을 보상도, 이름도 없이 헌신하시는 당원 여러분께 이해를 구합니다. 저는 지금의 민주당이 잃어버린 민주당 본래의 정신과 가치와 품격을 지키고 실현하기 위해 새로운 길에 나섭니다. 저는 죽는 날까지 그 정신과 가치와 품격을 지키겠습니다.
저를 이렇게 몰아세운 것은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의 위기였습니다. 저는 이 국가적 위기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안팎으로 추락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암흑기에 들어섰습니다. 윤석열 정부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최악의 정부로 기록될 것이 확실합니다. 윤석열 정권은 국정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전례 없는 퇴행과 난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침몰로 갈 것이냐, 지속가능 국가로 회복될 것이냐의 마지막 기로에 섰습니다.
국가적 위기의 핵심은 정치의 위기입니다. 무능한 정권과 타락한 정치가 각자의 사활에만 몰두하며 국가의 위기를 심화시킬 뿐, 국가 과제의 그 어느 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망국적 정치는 민생의 고통을 덜어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는 국민의 여망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윤석열 정부는 ‘검찰공화국’을 거의 완성했습니다. 민주당은 스스로의 사법 리스크로 ‘검찰폭주’를 제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검찰독재’와 ‘방탄’의 수렁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여야는 그런 적대적 공생관계로 국가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후목불가조(朽木不可雕), 썩은 나무로는 조각을 할 수 없다는 공자의 말씀처럼, 지금의 정치로는 대한민국을 살릴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하려면 정치구조부터 바꿔야 합니다. 무능하고 부패한 거대양당이 진영의 사활을 걸고 극한투쟁을 계속하는 현재의 양당독점 정치구조를 깨지 않고는, 대한민국이 온전하게 지속될 수 없습니다. 서로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혐오와 증오의 양극정치를 끝내지 않고는, 국민이 마음 편히 사실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흑백의 양자택일로 몰아가는 양극정치는 지금 전개되는 다양성의 시대를 대처할 수 없습니다.
정치를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바꿔야 합니다. 저는 미국과 독일에서 1년 넘게 공부하면서 확실히 배웠습니다. 미국은 양당제 속에서 분열의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독일은 다당제로 극단의 정치를 피하면서, 분열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혐오와 증오의 양당제를 끝내고, 타협과 조정의 다당제를 시작해야 합니다. 4월 총선이 그 출발이 되도록 국민 여러분께서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다당제 실현과 함께 개헌을 통해 분권형 대통령제를 도입했으면 합니다. 현재의 대통령제는 검증되지 않은 인물이 집중된 최고권력을 잡을 수도 있도록 돼 있습니다. 그 폐해를 우리는 진저리치며 경험하고 있습니다. 현행 제도를 고쳐, 대통령 후보를 철저히 검증하고 대통령의 권력을 최대한 분산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지금 같은 위험을 줄일 수 있습니다.
특히 ‘특권 없는 정치’와 ‘성역 없는 법치’를 꼭 구현하려 합니다. 정치인 등 누구든 특권을 남용하면 국가 기강이 무너진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했습니다. 우리가 힘들게 이룩한 법치주의마저 권력에 유린되고 있습니다. 정권은 검찰의 칼로 세상을 겁박합니다. 다수당은 의석수로 방탄하고, 대통령은 거부권으로 방탄합니다. 그것이 지금의 대한민국입니다. 그런 현실을 바로잡읍시다. 정치는 모든 특권을 내려놓고, 오직 국민과 국가에 봉사해야 합니다. 법치는 성역 없이 바로서야 합니다.
경제에서는 R&D 지원과 규제 혁파로 기업의 도전을 돕고, 미래기술산업을 집중 육성하는 등 새로운 성장동력을 끊임없이 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복지는 생활에 필수적인 기초 서비스를 국가가 단계적으로 제공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중부담-중복지’로 발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문화에서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김대중 정부의 원칙을 되살려, ‘제2의 한류’를 더 확산시키도록 돕겠습니다. 외교에서는 한미동맹을 중심에 두면서 중국, 일본, 러시아와 우호관계를 정착시키고, 남북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해 평화와 번영을 돕도록 하겠습니다.
전체적으로 최고의 역량을 갖춘 정부를 구성해야 합니다. 허물어지는 대한민국을 다시 세우는 ‘제2의 건국’에 나서야 합니다. 그런 각오로 새로운 정치에 임하고 싶습니다.
그 길로 가기 위해, 극한의 진영대결을 뛰어넘어 국가과제를 해결하고 국민생활을 돕도록 견인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들겠습니다. 무능한 정치를 유능한 정치로, 투쟁의 정치를 생산의 정치로, 부도덕하고 부패한 정치를 도덕적이고 깨끗한 정치로 바꾸도록 힘을 보태겠습니다.
그 길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힘을 모아야 합니다. 저는 우선 민주당에서 혁신을 위해 노력하셨던 의원 모임 ‘원칙과 상식’의 동지들과 협력하겠습니다. 어느 분야에서든 착하고 바르게 살아온 사람들이 그 길에 함께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청년과 전문직의 참여가 필요합니다. 그런 분들께서 정치참여의 기회를 얻으시도록 돕겠습니다.
저는 몹시 가난했지만, 많은 기회를 누리며 성장했습니다. 저는 국가와 사회로부터 크나큰 혜택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것에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제가 국가와 사회로부터 받은 혜택을 국민께 돌려 드릴 때가 됐습니다. 제가 무엇이 되겠다는 마음에서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저의 의무로서 그 일을 하고자 합니다.
대한민국은 정치 때문에 잘못되고 있습니다. 잘못을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 것은 비겁한 죄악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가 대한민국을 더는 망가뜨리지 못하도록 싸우겠습니다.
그 길은 쉽지 않은 길입니다. 저는 그 길이 쉬워서 가려는 것이 아니라, 어렵더라도 가야 하기 때문에 가려 합니다. 국민 여러분의 이해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앞서 탈당한 비명계 3인방이 준비 중인 원칙과 상식에 합류하는 것이 유력해 보였으나, 비명계 간의 신경전이 이어지며 앞으로의 행보는 미지수다. 이석현 전 국회부의장에 따르면 16일에 신당 발기인대회를 열 예정이고, 원칙과 상식과는 일단 따로 창당하는 계획이라고 밝혔다.
2024년 2월 9일, 새로운미래를 공식적으로 창당했다.[17] 동시에 새로운미래 공동대표에 취임했다.
2024년 2월 29일 "3월 3일 오전 10시 30분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광주 출마 기자회견을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긴급히 조정해야 할 사안이 있다"며 기자회견을 돌연 취소했다가 3월 4일 오후 3시, 기존의 불출마 의사를 번복하고 광주광역시의회에서 광주광역시 출마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광주에서 지역구 후보로 출마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다만 광주 내 지역구 중 어느 지역구에서 출마할 것인지는 아직 밝히지 않았는데, 서구 을이나 북구 갑, 북구 을 또는 민형배 의원이 있는 광산구 을이 이낙연의 출마 예상 지역구로 거론되고 있다.
2024년 3월 10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새로운미래 결의대회에 참석해 광주 광산구 을 출마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로서 지역구 현역 의원이자 친명계로 꼽히는 더불어민주당 민형배 후보와 맞붙게 됐다. 그러나 정권심판론의 여파로 인해 광산을에서 선거비 보존에 실패할 정도로 큰 격차를 보이며 낙선하며 본인이 5선을 올리고 전남지사를 지냈던건 개인기가 아닌 당빨이었다는것이 드러나버렸다.[18] 여론조사 상으로 15% 이상은 득표할 것으로 예견되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도 적은 13.84%를 얻는데 그치며 완패했고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았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옥중 출마로 단 한 번도 본인이 직접 선거운동을 하지 않고 자녀가 대신하여 유세한 송영길 소나무당 후보 (서구 갑, 약 17%)보다도 적은 득표(약 14%)를 거두었다는 점이다.
특히 전통적으로 호남에서 선거비 보전을 받는 것도 어려운데다, 정권심판론 여론까지 겹치며 이번 선거에서 참패했던 국민의힘조차도 전남 순천시·광양시·곡성군·구례군 을의 이정현과 전북 전주시 을의 정운천 2명이 20%대의 득표율로 선거비 전액 보전에 성공했음을 생각하면, 이낙연의 이번 선거에서의 득표율은 지지층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물론 이 2명은 매우 예외적인 사례로, 보수정당이 호남에서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이자 실제로 보수정당 당적을 달고 호남에서 개인기로 당선된 적도 있을 정도로 호남 내에서 지역 기반이 있는 사람들이다.[19] 하지만 5선 중 호남에서 4선을, 전남지사에 국무총리, 민주당 대표를 지냈던 거물급 정치인이 보수정당 후보보다 호남에서 더 낮은 득표율을 얻었다는 점은 아무리 봐도 꽤나 심각한 결과다. 다른 정치인에 비유하자면 홍준표가 대구 서구에 출마했는데 15% 미만으로 낙선한 격이다.
이낙연 본인이 텃밭으로 자부한 광주에서 선거비 절반을 날린 것은 물론, 제3지대 정당 대표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결과를 얻은 셈이 되었다. 본인이 선거를 지휘한 새로운미래는 지역구에서 어부지리로 김종민 의원이 당선되긴 했으나, 전국구인 비례대표에서는 1.70%의 득표율을 기록하였다. 21대 총선에서 새로운미래와 비슷하게 이합집산을 겪었던 민생당이 비례에서 2.71%를 얻었다. 녹색정의당의 심상정 전 대표는 자신의 지역구인 고양시 갑에서 3파전 속 18%에 달하는 득표를 했고, 이낙연과 결별한 이준석 대표는 험지인 화성시 을에서 당당하게 당선되는 이변을 일으키면서 이낙연의 초라한 낙선과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김종민 공동대표를 제외하면 새로운미래 후보자 중에서는 유일하게 반액보전 기준인 10%를 넘겼지만, 이낙연의 과거 위상을 생각하면 참패가 명백하다. 심지어 홍영표, 설훈, 박영순, 전병헌, 유승희 등 다른 거물급 인사들은 10%조차 득표하지 못하며 낙선했다. 본인이 창당한 새로운미래 또한 김종민 의원이 민주당에 복당을 하게될 시 직전 선거의 민생당과 마찬가지로 껍데기만 남을 가능성이 높다. 비슷한 상황에 놓인 심상정이 은퇴 선언을 했기에, 정치생명에 치명상을 입은 이낙연 역시 재기가 쉽지 않아보인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우회적으로 당을 깨는 걸 만류했지만, 분당을 강행해 친명계와 친문계 양쪽에서 비토가 심한 편이다. 일각에서는 이낙연이 강성 비명계를 죄다 끌고 나가준 덕에 이재명이 수월하게 양대 계파를 장악해 민주당을 주도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민주당 내에서 이개호,
애초에 지역구 선택부터 잘못됐다는 지적도 있다. 광산 을 현역 민형배는 광산구청장 시절 83%, 21대 총선에서 84% 득표를 기록했을 정도로 콘크리트를 넘어 다이아몬드 수준의 지역 기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대부분의 후보가 물갈이되던 광주에서 유일하게 재선에 도전하는 후보이기도 했다.
이낙연이 더 굴욕적인 것은 수성구 을에서 출마한 진보정당 후보 새진보연합 오준호 후보는 15%를 넘기며 전액을 보전받았다는 것이다..! 진보 텃밭에서 진보 정당 후보. 그 것도 전직 전남지사 재선에 국무총리까지 역임하고 여당대표에 대선 경선까지 나갔던 자가 15%를 넘기지 못 한 것은 상당히 굴욕적인 셈이다.
국민의힘 안태욱이야 사지에 가깝고 백 번 양보해서 지원 거의 못 받았으니 맨땅에 헤딩을 해서 저렇다지만, 이낙연급의 거물 정치인이 텃밭에서 15%를 넘기지 못 했다는 것은 경산시에서 야인으로 지내던 최경환이 무소속으로 42%를 득표한 것과 비교되어 거품이 많이 낀 정치인으로 조롱받고 있다.
차라리 이낙연 본인의 고향인 영광군이 있는 지역구에 출마했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는데, 그 지역구의 현역 의원이자 민주당 후보인 이개호 의원이 한때 이낙연계로 꼽혔음을 고려하면 이곳에 출마하는 것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아군에게 칼을 꽂는 셈이었다. 거기에 이개호 의원은 이낙연이 나간다는 뉘앙스를 보이자마자 이낙연을 비난하며, 친이재명으로 전향하고 이낙연을 단칼에 손절해버렸다. 이런 이개호한테까지 지는 순간 본인의 굴욕이 더 한 층 심해지는는 셈.
광산구가 영광군과 가까워 영광 출신 주민들이 많아 광주 내 지역구들 중에서는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8회 지선 때 이낙연의 고향 영광군에서 자신이 직접 지원한 김준성 후보가 손혜원이 대놓고 지원한 무소속 강종만 후보에게 밀려 영광군수 선거에서 낙선한 시점부터[21] 호남은 물론 본인의 고향인 영광에서의 영향력도 크게 줄어들었다는 분석을 생각하면 긍정적 요소보다는 결국 상술된 부정적 요소가 더 크게 작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2024년 4월 12일 선대위 해단식에서 "국민의 신임을 얻는 데 실패했다"며 "당과 자신의 미래를 설계, 재구축해야 할 것 같다"고 밝혔다. # 일단은 은퇴설을 일축하고 당을 재정비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4월 17일 총선 패배 책임을 사유로 새로운미래 내 모든 당직에서 사퇴하였다.
9월, 새로운미래의 유일한 국회의원인 김종민이 탈당하면서 원외 정당으로 전락하여 이낙연도 당에 남을 것인지 고민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1] 전주 이씨 완풍대군파의 분파 중 양도공파의 20대손이다.[2] "염치가 없었다. 군 전역 후 한 친구가 월급을 쪼개 고시공부를 지원했다. 하지만 일곱 달 만에 포기하고 말았다. 고향의 동생들과 친구 보기가 부끄러워서다. 전남 영광에서 7남매 맏이로 태어났다. 분유를 쌀뜨물 수준으로 물에 묽게 타먹고 커온 형편이었다. 형제들을 대신해 상경 진학했으니 느긋하게 고시를 준비할 여유가 없었다." - 양재원, <이낙연은 넥타이를 전날 밤에 고른다> #[3] 지금의 한국투자증권[4] 구술-대학 2학년 때부터 하숙비 낼 돈도 없는데 사법시험에 몰두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영양실조에 걸릴 정도였죠. 대학 졸업앨범을 보면 뼈만 앙상해 시신처럼 느껴집니다. 제 키(177cm)에 50㎏ 아래로 떨어졌으니까요. 돈을 벌어야 해서 졸업하자마자 신탁은행에 취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동기들을 만나면 직장, 직업 설명하기가 힘들어요. 신탁은행이 드문 때죠. 그래서 누구나 알아듣는 직장이었던 동아일보의 기자로 들어갔죠. #[5] 여담으로 이동관도 동아일보 기자 출신이다. 공교롭게도 둘의 본관이 같다.[6] 전주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이화여대 교육대학원에서 미술교육을 전공하고 강동구 명일여자고등학교에 재직했다.[7] 바로 이 시기쯤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에 반발하여 발생한 적보대 사건(아사히신문 습격 사건)이 발생하였다.[8] 사실 도쿄, 워싱턴 등 세계 특파원은 예나 지금이나 기자들에게 있어 최고의 요직에 해당하다. 기자로서의 경력을 지속할 생각이 있을 때 도쿄 특파원과 야당 의원을 비교하라면 일고의 가치도 없이 전자를 선택하는 게 지극히 당연했다.[9] 참고로 함평·영광 해당 재보선에서 공천한 사람은 이수인(이수성 전 국무총리 친동생)을 공천하였다.[10] 역으로 김대중은 지하 서재에 있기만 하면 무조건 인터뷰에 응해줬다고 한다.[11] 17대 국회 개원 앞두고 원내총무에서 원내대표 명칭 변경했다.[12] 또한 원조 이낙연계인 이개호 의원 또한 이낙연의 당권 도전에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낙연은 당내 세력이 취약하다는 지적을 항상 받아왔고, 이낙연이 당권을 잡아야 당내 세력 확장이 한결 수월해질 것이라고 발언하였다.[13] 아이러니하게도 과거 김영춘 후보와 친노 진영과의 관계는 좋지 못했다. 실제로 김영춘은 열린우리당 의원 시절에도 유시민을 대놓고 비판하는 바람에 친노와 척을 졌고, 이후에도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은 실패했다며 노무현과 친노를 비판하기도 했다.[14] 대략 28% vs 54% 정도의 차이[15]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직전 참여정부 출신 인사들과 가진 오찬에서 "나는 이제 늙고 힘이 없지만 여러분들이 야권통합을 통해 꼭 정권교체를 이뤄달라"는 당부를 했던 일화를 소개하였다.[16] 그러나 이는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으로 투옥된 것까지 포함이다. 김대중은 없던 전과까지 만들어지며 사형판결을 받았다가 미국과 일본에 의해 구명되었다. 민주화 되기 이전에 민주화운동으로 생긴 전과는 민주화를 거치며 민주화특별법을 통해 많은 이들이 명예회복을 했었고(대표적으로 이철, 유인태 전 의원이 있다.), 보수정당에도 이명박, 이재오, 이인제, 김문수처럼 반독재 민주화운동이나 노동운동으로 투옥된 사람들이 많다. 결국 이낙연의 의도와는 달리 여야 모두를 상대로 어그로를 끌어 큰 비난을 받았고, 되려 이낙연 본인의 전과 기록(전과 2범)만 재조명 되는 역효과를 불러왔다.[17] 원래는 새로운미래(창준위)와 개혁신당이 합당을 선언했으나 내분으로 인해 백지화되었다.[18] 총선 이후 들리는 바에 따르면 홍보를 어떻게 계획했는지 새로운미래가 이낙연의 당인 줄 모르는 유권자가 있을 정도로 중앙당에서 홍보에 무관심했던듯 하다. 이 부분에 있어서 대단히 큰 실책을 범한 듯 하다.[19] 전북과 동부 전남은 광주 및 서부 전남과 달리 인물론이 어느 정도 먹히는 지역이다. 진보정당에서도 강성희, 김선동 등의 당선자를 배출한 곳이다. (물론 진보정당은 후자에서도 국회의원 경력자가 있다. 이를테면 오병윤 등)[20] 계파 정체성이 강하지 않을 뿐, 험지 차출을 자원하는 등 조용한 소신파이기 때문에 애초에 비명으로 볼 이유도 없거니와 그 자신이 이낙연에 붙을 일도 없다.[21] 게다가 영광군 도의원에서는 자기가 지원한 후보가 무려 진보당의 오미화 후보한테 밀리는 굴욕까지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