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예루살렘
1. 개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의 성지이다. 각각 통곡의 벽, 거룩한 무덤 성당, 알 아크사 모스크가 그 종교의 상징인 성지.평화의 장이란 이름답지 않게 예루살렘은 옛날부터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로마 시대는 그리스인과 유대인, 중세에는 무슬림과 기독교인, 근대 시대에는 대영제국과 오스만 제국, 현대 시대에는 아랍인과 유대인들이 서로 싸운다. 예루살렘은 역사상 수많은 전쟁을 거치면서 2번[1]이나 완전히 파괴된 후 재건되었고, 그 밖에도 무려 23번이나 공성전을 겪었다.
1,000년간 예루살렘은 배타적인 유대교 지역이었다. 400년간은 그리스도교 지역이었다. 1,300년간은 이슬람 지역이었다. 그 세 종교들 중 어느 것도 칼, 투석기, 또는 곡사포 없이는 예루살렘을 차지하지 못했다. ... 헤롯 시대, 십자군 시대, 영국령 예루살렘 시대의 삶은 언제나 오늘날의 삶과 똑같이 복잡하고 미묘했다.
예루살렘 전기 /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저
예루살렘 전기 /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저
2. 히브리인 이주 이전
고고학자들의 발굴에 의하면 기원전 4000년경에 첫 거주지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도시는 기원전 2000년경에 이집트 중왕국의 문서에서 '루살리뭄' 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언급되었다. 창세기에 의하면 기원전 1700년경에 이사악의 희생 미수 사건[2]이 도시 인근의 모리아 산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예루살렘 지방은 이후 이집트 중왕국을 멸망시키게 되는 힉소스인의 지배를 받게 된다(기원전 1700년경).한편, 힉소스인을 축출하고 이집트를 재통일한 신왕국은 투트모스 1세의 지휘 하에 팔레스타인 일대를 점령하였다(기원전 1500년경). 그리고 이집트의 정복 군주인 투트모스 3세는 도시 인근에 군대 주둔지를 건설하여 시리아 진출의 교두보로 삼았다. 당시에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민족은 가나안 인이었고 이집트의 지배 하에 있었다. 이는 기원전 1330년에 파라오 아멘호테프 4세와 우루살림(예루살렘)의 지도자 간에 주고받은 서신인 아마르나 편지에서 확인되었다.# 이때 예루살렘 지도자는 침략자 하피루(Hapiru, 히브리와 동의어로 보임)에게서 도시를 지킬 지원군을 요청하는데 이 하피루가 히브리인이라는 설도 있고 당시 해당 지역에선 유목민 집단을 지칭하는 일반 명사였을거란 설도 있다. 전자가 맞다면 이 시기부터 가나안 지역에 히브리인들이 이주해오고 영향력이 점점 커져가는 과정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 파라오의 답신은 발굴되지 않았기에 지원군을 받지 못하고 함락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후로도 이집트의 가나안 지방에 대한 영향력이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이므로 자력으로 어떻게든 격퇴해냈거나 도시의 지배 세력만 바뀌고 이집트에겐 계속 복종했던듯 하다.
이집트 신왕국은 람세스 2세의 시대에 절정에 이르렀으나 동시에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후계자인 람세스 3세는 당시 지중해 동부를 휩쓸던 바다 민족을 가나안에서 격파하였으나 너무 많은 국력을 소모한 나머지 가나안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기원전 1178년). 이후로 히브리인들은 점점 다양한 민족이 섞여있던 가나안 지역에서 영향력을 점점 키워가며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해간다.
3.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의 수도
과거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였으며 다윗이 중건했다고 한다. 성경에도 나오지만 다윗이 처음으로 건설한 것은 아니고, 가나안 족속들 중 하나인 여부스 족속에게서 탈취한 곳이다. 그 때문에 다윗 성이라고 불렀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3] 원래 히브리인의 12지파 중 벤야민 지파에게 할당된 곳이었지만 역량 부족으로 여부스인들을 축출하지는 못하고 동거하는 상태였다. 다윗 시절에도 난공불락의 성이어서 다윗은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자를 군 총사령관에 임명하겠다고 선언했다. 심지어 여부스인들은 "맹인&절름발이라도 네녀석따윈 물리칠수 있다"고 야유하였다. 이곳을 함락시켜 짱먹은 것이, 다윗의 조카인 요압이었다. 당시 예루살렘의 유일한 약점은 수원지가 성 밖에 있어서 비밀 통로를 통해 물을 길어오고 있었는데 요압이 그 비밀 통로를 발견하여 진입했다고 한다.[4] 다윗의 후계자인 솔로몬은 성전산에 성전을 세웠다(기원전 962년).솔로몬이 세운 예루살렘 성전.(솔로몬 성전)
4. 바빌론 유수
이스라엘 왕국은 솔로몬 사후 혼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남북으로 분단되었는데, 북부의 이스라엘 왕국은 아시리아에게 멸망당하였다(BC 723).이후 100여년이 흐른 후, 남부의 유다 왕국은 이집트와 연합하여 칼데아를 공격하려 하다가 결국 칼데아 제국(신 바빌로니아)에게 멸망하였다(BC 586).
당시 바빌론의 군주이던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성전을 포함한 예루살렘을 철저히 파괴하였다고 전해진다.
그 후 수만명의 유대인들은 포로가 되어 칼데아의 수도인 바빌론으로 끌려가 노동력으로 징발되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바빌론 유수이다.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2세에 의해 풀려날 때까지 약 70년 동안 바빌론에서 포로 생활을 했다
5.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시대
키루스 대왕이 바빌로니아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을 허락한다. 세스바살이 이끄는 유대인 4만여 명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으나, 아시리아 제국 문화와 동화된 예루살렘 왕국의 사마리아인들과 계속 갈등과 충돌이 빚어졌다. 아시리아 제국의 영향을 받은 유대인들의 후손인 사마리아인들과 바빌로니아에서 귀환한 유대인들 간에 실랑이가 벌어져 늦어지긴 했지만 성전도 이전의 절반 규모로 재건되었다.(스룹바벨 성전) 유대인들은 기원전 515년 3월에는 바빌론 유수 이후 최초로 유월절을 기념했다.6. 헬레니즘 시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3세가 페르시아를 정복하는 와중에 예루살렘도 정복되었고, 예루살렘과 바빌로니아의 유대인들은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시절 누렸던 권리를 확인받는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이 지역은 알렉산드로스 휘하 장수들이 세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 사이에 각축장이 되며 여섯 차례나 정복당하고 탈환당하기를 반복한다.예루살렘은 15년간 안티고노스의 지배를 받았고, 이후 프톨레마이오스가 점령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가 "이스라엘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유대인들의 권리를 다시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한 후 예루살렘에 진입한 후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납치해 알렉산드리아로 끌고 갔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는 알렉산드리아에 끌려온 유대인 노예들을 해방시켰으며, 타나크를 그리스어로 번역할 것을 지시했다.
기원전 201년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싸워 승리를 거두고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알려진 바와는 달리 처음부터 유대인들을 멸시하고 차별한 것은 아니었다. 안티오코스는 성전과 성벽을 수리하고, 유대인들이 율법에 따라 자치를 누릴 것을 승인했다. 심지어 이방인들이 성전에 들어가거나 말이나 노새, 당나귀나 사자, 여우, 토끼 고기를 예루살렘 안으로 반입하는 것도 금지했다. 대사제 시몬은 예루살렘이 여태 이렇게 너그러운 정복자를 맞은 적이 없었다고 감탄했으며, 예루살렘 주민들은 당시를 이상적인 대사제가 다스리고 이방인들도 괴롭히지 않는 황금시대로 기억했다.
7. 하스몬 왕조의 수도
한눈에 보는 예루살렘 시가지 변천사
헬레니즘 문화가 유대인들에게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는 것을 경계한 유대교 보수주의자들이 셀레우코스 통치자들에 반발하여 일어난 마카베오 반란은 성공하였고, 예루살렘은 반란의 주도 세력인 하스몬 가문의 통치 하에 다시 독립 유다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8. 로마 시대
로마에게 유다 왕국이 멸망한 뒤로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유대인들 덕택에 상업이 매우 발전한 도시였다. 기독교에게는 메시아인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 곳이다. 하지만 지속적인 유대인들의 반란 때문에 기독교가 자리를 잡지 못해 기독교의 중심 교회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가 되었고, 예루살렘 교회는 칼케돈 공의회 때가 돼서야 총대주교로 자리를 잡았다.8.1. 로마의 간접통치
폼페이우스의 정복, 헤로데 왕국. 예수의 일생이 바로 이 시기에 일어났다. 기원전의 예루살렘은 헤로데 대왕이 다스리는 유대 왕국의 도성(都城)이었지만, 기원후의 예루살렘은 로마 제국이 유대 왕국을 대리하여 통치하는 다양한 도시들 가운데 하나로 전락했다.헤로데 대왕이 세운 2번째 성전.(헤로데 성전)[5]
8.2. 로마의 직접통치
서기 70년에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일어났으며 결국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함락되었다. 예루살렘 성전[6]과 도성(都城)을 철저하게 파괴한 로마군은 폐허로 변한 도성의 터에 제10군단의 기지를 조성하였다. 한편 도망친 잔당들은 마사다와 감라에서 결사항전을 꾀했지만, 결국 로마군의 공세로 함락을 앞두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단 자살을 선택하고 말았다.그로부터 60여 년이 흐른 후, 5현제 중 한 명인 하드리아누스가 순행 중 예루살렘 유허를 방문하고는 아일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라는 이름으로 도시를 로마식으로 재건하였다(서기 130년). 이 명칭은 7세기의 이슬람 정복 시까지 이어져 아랍인들은 예루살렘을 일리야 (إلياء)라고 불렀다.[7]
서기 131년, 하드리아누스가 할례를 금지하자 유대인들은 스스로 메시야라고 칭한 시몬 바르 코크바의 지휘 하에 재차 봉기하였다(제3차 유대-로마 전쟁, 132 ~ 135년). 하지만 봉기는 철저히 진압되었고
서기 2세기 말 사마리아인들과 계속 갈등을 벌이던 유대인들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지원하고 그가 황제가 되면서 유대인에 대한 차별 조치가 완화되었다.
Quia consuetudo praevaluit et antiqua tradtio ut Heliae episcopus honoretur, habeat honoris consequentiam, salva metropolitani propria dignitate.
예루살렘의 주교가 존경을 받는다는 관습과 옛 전승이 더 힘이 있기에, 따라서 예루살렘 주교는 수석 대주교에 고유한 품위를 유지한 채 명예를 계승한다.
니케아 공의회 제7조[8]
313년의 밀라노 칙령과 395년의 테살로니카 칙령의 단계를 거치며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자 예루살렘의 중요도가 급상승 하였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예루살렘 주교는 총대주교로 승격되었다.예루살렘의 주교가 존경을 받는다는 관습과 옛 전승이 더 힘이 있기에, 따라서 예루살렘 주교는 수석 대주교에 고유한 품위를 유지한 채 명예를 계승한다.
니케아 공의회 제7조[8]
367년 콘스탄티누스의 조카이자 로마 제국의 기독교 약화와 이교 부흥을 꾀했던 율리아누스 황제가 예루살렘의 성전과 재단의 재건을 허락하였으나, 안티오크와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의 반발로 실패했다. 율리아누스의 유대교 성전 재건은 단순한 관용의 표시가 아니었다. 이는 기독교가 진정한 이스라엘을 계승했다는 주장을 무력화시키고,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는 다니엘과 예수의 예언이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율리아누스 황제가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전사하자, 예루살렘 성전 재건 계획은 백지화되었고 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만을 로마 제국의 유일한 종교로 정하면서 유대인들은 더 심각한 곤경을 겪게 되었다.
테오도시우스 2세의 황후이자 여성 철학자였던 아일리아 에우도키아가 438년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유대인을 차별하는 규정들을 완화했다. 에우도키아는 당시 시대의 주류이던 기독교 대신에 고대 그리스 종교를 믿고 고대 철학을 공부하면서 반지성주의적인 광신도들에게 종종 위협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심정적으로 동정했던 듯 하다. 시리아의 수도사 바르소마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에 대한 에우도키아의 관용 정책에 불만을 품고 폭동을 일으켰다.
8.3. 로마-페르시아 전쟁
6세기 제작된 '마다바 지도'의 예루살렘 일대
7세기 초 로마-페르시아 전쟁이 발발하고, 614년 샤흐르바라즈 장군이 이끄는 페르시아 군대는 기독교도들에게 차별을 받던 유대인들의 적극적인 호응 하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 티투스가 성전을 파괴한 지 600여 년 만에 다시 예루살렘을 유대인이 탈환할 수 있다는 사실에 유대인들은 페르시아군과 함께 도시에 대한 대대적인 파괴를 자행하였고 기록에 따르면 무려 9만 명의 기독교도가 살해되었다고 한다.
샤흐르바라즈는 예루살렘과 안티오크에서 폭동을 지휘한 유대인 느헤미야에게 티레를 탈환할 것을 지시했으나, 느헤미야가 이끄는 유대군은 티레 탈환에 실패했다. 그러나 유대인과 기독교인간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점령지를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 샤흐르바라즈는 3년만인 617년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서 추방시켰다.
이에 이라클리오스는 반격하여 사산 왕조를 물리치고 성십자가를 돌려받아 다시 예루살렘의 골고타에 봉안하였다.[9]
비록 동로마의 구원자인 이라클리오스가 629년에 예루살렘을 탈환하였지만 콘스탄티누스부터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까지 세워진 수많은 유서깊은 교회들은 이미 대부분 파괴된 후였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이후 복구되지 못하였다. 또한 페르시아에게 내응했던 유대인에 대한 치밀한 보복과 학살도 가해졌다.
634년, 이라클리오스에 의해 예루살렘 총대주교로 임명된 성 소프리니우스는 급한대로 승천 교회와 부활(아나스타시스) 교회를 복구하였다. 당시 동로마와 이란은 긴 전쟁을 마무리하고 전쟁 이전으로 국경을 원상복귀시켰으나, 양측 모두 서로의 수도를 위협하는 총력전을 수십년간 펼친 터라 지쳐 있었다.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신흥 종교 하에 역사상 처음으로 통일된 아랍인들이 대팽창을 준비하고 있었다.
9. 이슬람의 도래
미라즈(한밤 중의 예루살렘 여행)를 경험하는 이슬람의 사도 무함마드. 예수와 대면하고 왔다고도 한다.
밤에 거룩한 마스지드로부터 선조의 사원으로 그의 종을 옮겨다놓은 그를 찬양하라. 우리는 기적을 보여준 그의 순회 여행으로 복을 누린다. 그가 본 자요, 또한 들은 자이다.
쿠란, 수라 17장, 53절 4-10
이슬람교에서는 무함마드가 승천한 도시이자 최초의 기도 대상이었다. 무함마드는 처음에는 예루살렘 방향으로 기도하라고 했고, 나중에 전통세력을 포섭하면서 메카로 바꾸었다. 이후에도 최초 기도 장소이자 무함마드의 승천 장소라는 점 때문에 메카와 버금가거나 동등한 위치로 인정받았다. 메카 다음가는 성지인 메디나조차 따지고 보면 예루살렘보다 아래이다.쿠란, 수라 17장, 53절 4-10
9.1. 정통 칼리파 시대
신의 이름으로 자비와 은총이 있기를. 바이크 알 마크티스(거룩한 집)의 거주자들에게 고한다. 진실로 당신들의 목숨과 재산, 그리고 교회에 대한 완전한 안전을 보장하는 바이다. 저항하지 않는한, 무슬림은 어떠한 희생과 파괴도 하지 않을 것이다.
2대 칼리파 우마르 1세(재위 634~644)가 예루살렘 시민들에게
이슬람 최후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632년에 죽은 후, 내부를 정비한 아랍인들은 칼리파 아부 바크르와 '신의 검' 할리드 장군의 지휘 하에 634년부터 동로마 제국을 침공하기 시작하였다. 기나긴 전쟁 후에 쇠약해져 있었고 단성론 칼케돈파의 대립이 계속되고 있던 터라 로마군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636년에 벌어진 야르무크 전투에서 동로마의 시리아 군대는 괴멸되었고 헤라클리우스 황제도 사실상 시리아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예루살렘 총대주교 소프로니우스는 앞서 도시가 614년에 페르시아군에 당했던 신성모독과 학살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항복하는 길을 택했다.2대 칼리파 우마르 1세(재위 634~644)가 예루살렘 시민들에게
638년 2월, 칼리파 우마르는 성문 앞에서 타고 있던 말에서 내렸다. 누더기를 걸친 까무잡잡한 노인이 예루살렘의 중심부로 나아갈 때에 시민들은 그가 서아시아를 정복해 나가는 이슬람 제국의 칼리파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하였다. 당시 거룩한 성묘 교회에서는 미사가 열리고 있었다.
수십분이 지난 후, 뒤늦게야 칼리파를 알아본 화려한 복장의 총대주교가 성당의 열쇠를 건네며 내부에서 기도할 것을 권했지만 우마르는 그를 거절하고는 예배당 밖의 계단에 걸터앉아 두 손바닥을 하늘로 향한채 신께 감사 기도를 올렸다. 그는 자신의 선례가 후대에 성당을 모스크로 개조할 근거가 될까 두려웠던 것이다.[10] 이후에 비무장 차림으로 입성한 무슬림 병사들도 그를 따라 경건히 기도하였다. 예루살렘이 이슬람 지배하에 놓인 이후로도 성묘 교회는 기독교인의 전용 예배당으로 전속되었다. 무슬림은 동쪽 계단을 차지하였을 뿐이다.[11]
23년전, 페르시아 군대의 잔혹한 점령과 462년 후 1차 십자군의 피로 물든 예루살렘 '입성'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여담으로, 우마르는 500년 전에 제정되었던 트라야누스의 디아스포라 정책을 폐기하여 유대인의 예루살렘 출입과 거주를 허락하였다(예루살렘과 우마르 이븐 알 카타브 #).
9.2. 우마이야 왕조
서기 661년 7월, 무아위야 1세는 예루살렘의 성전산에서 즉위식을 치르며 이슬람 첫 세습 왕조인 우마이야 왕조의 개창을 알렸다. 무아위야 1세는 어렸을 적 유대인들과 같이 자랐고 기독교인과 결혼했으며 개인적으로 기독교인과 유대인 친구가 많았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기독교인과 유대인들을 모두 배려하고 양자 간의 갈등을 조정했다 한다.
서기 690년, 우마이야 조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군주인 아브드 알 말리크는 내전(2차 피트나)의 종결을 기념하여 당시 폐허이던 성전산에 바위의 돔을 지었다.[12] 현재까지도 예루살렘의 랜드마크로 기능하고 있는 그 황금빛 사원이 바로 그것이다.[13] 바위의 돔은 300여 명의 흑인 노예들이 시설을 유지보수하고 20명의 유대인들과 10명의 기독교인들이 이를 관리감독했다. 우마이야 칼리프들은 다마스쿠스가 수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의 바위의 돔 근처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을 선호했다.
오늘날에도 동 예루살렘의 아랍 무슬림들은 인근의 성묘 교회의 초라한 규모를 놀리며 바위의 돔에 대단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9.3. 압바스 왕조
칼리프조의 수도가 바그다드로 옮겨지면서 쇠퇴한다. 우마이야 왕조 칼리프들이 헬레니즘-기독교 문화를 선호하는 취미가 있었던 반면 압바스 왕조는 중앙아시아와-인도 와의 교역과 과학 기술 수입 등을 더 선호했다. 알 만수르 이후 압바스 왕조 칼리프들은 예루살렘을 단 한 차례도 방문하지 않았다.9.4. 파티마 왕조
압바스 왕조의 지방 통제력이 9세기 중반부터 약화되자 예루살렘은 튀르크인 노예병들의 군벌 정권인 툴룬 왕조나 이흐시드 왕조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흐시드 왕조의 창건자인 무함마드 빈 투그즈가 죽자 그가 총애하던 흑인 환관 아불 미스크 카푸르[14]가 이흐시드 왕조의 실권을 잡아쥐고 20여 년간 시리아와 이집트, 팔레스타인을 통치했다. 향수의 대부 아불 미스크 카푸르는 투그즈의 자손들이 모종의 이유로 다 죽어 없어지자 자기가 직접 왕위에 올랐다.아불 미스크 카푸르가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아, 이프리끼야에서 기원한 쉬아 칼리프 제국인 파티마 왕조가 이흐시드 왕조가 통치하던 이집트와 시리아를 정복하면서 969년 예루살렘도 같이 장악한다. 파티마 조는 종종 기독교에 대한 불관용적인 모습을 보이며 예루살렘의 성묘 교회를 파괴하였다(1002년. 이후 1030년에 동로마 제국의 협박(...)으로 복구).[15] 한편, 1054년의 동서 교회의 대분열 때에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는 콘스탄티노플 편에 섰다. 이는 로마 가톨릭 세력에게 큰 충격이었고 십자군의 다양한 원인이 되었다. 파티마 왕조 치하의 예루살렘에서는 유대교 내 소수 종파인 카라임 유대인이 번성했다.
알 하킴이 고용한 트란스옥시아나 출신 이스마일파 신학자 앗 다라지에 의해 드루즈교가 창시되었다. 드루즈교도들은 19세기에는 레바논 산악지대에서 마론파 기독교도들과 대판 싸움을 벌였고 오늘날에는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에 적극 충성하며 순니 무슬림들과 대립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예루살렘을 정복할 당시 파티마 왕조의 재상 이븐 킬리스는 유대교에서 순니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 다시 쉬아 니자리파로 개종한 입지전적의 인물이다.(...)
10. 십자군 시대
십자군 시기에 성당으로 개조되었던 알 아크사와 바위의 돔
예루살렘에 온전히 남은 몇 안되는 십자군 건축물인 성 안나 성당. 1138년 멜리장드가 건설하여 1187년 살라딘이 마드라사로 개조했다가 방치된 후, 1862년 크림전쟁에 대한 감사로 프랑스 측에 넘겨져 다시 성당이 되었다.
약 200년간 계속된 십자군 전쟁의 명목상 목적지였다. 십자군 전쟁 중에는 십자군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기독교 국가인 예루살렘 왕국이 건국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딘이 하틴 전투의 승리 이후에 예루살렘을 탈환하였다. 이후, 6차 십자군을 이끈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 국왕 프리드리히 2세가 외교로 잠시 예루살렘을 찾기도 했지만 얼마 안가서 이슬람 세력이 도로 정복했다. 여담으로 프리드리히 2세는 이교도의 피를 흘리지 않고 성지를 찾았다고 더럽게 씹혔다(...). 사실 성왕 루이 9세를 비롯해서 이후의 십자군에게도 아이유브 왕조가 외교로 예루살렘을 내주고 자기 땅으로 몰려온 십자군을 돌려보내려 한 적이 있었는데 아이유브 왕조의 거점인 이집트까지 정복하려고 거절했다가 전멸당했다(...).
10.1. 11세기의 혼란
셀주크 제국의 튀르크족 전사들이 11세기 무렵부터 파티마 왕조 치하의 팔레스타인 영토를 습격했다. 예루살렘은 1071년 아트시즈라는 셀주크 튀르크 군벌의 수중에 들어갔다. 아트시즈는 정통성 확보를 위해 셀주크 제국과 압바스 칼리파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그는 쉬아파에 대항한 성전을 주장하며 파티마 조의 수도인 카이로를 공격하는 모험을 감행했다가 대실패하였고, 여기에 고무된 예루살렘 시민들은 반란을 일으켰지만 돌아온 아트시즈에 의해 도시가 함락된 후 반란에 가담한 3천여 명의 시민들이 학살되었다. 이때 알 아크사 모스크에 피신한 이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아트시즈를 따르는 튀르크인 전사들이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아르메니아인 기독교도들이나 가톨릭 신자들을 습격하는 일이 증가했다.그러던 1078년, 파티마 군대가 다마스쿠스를 포위하자 아트시즈는 셀주크 제국에게 도움을 청하였는데 그를 돕기 위해 파견된 말리크샤 1세의 동생 투투쉬 1세는 파티마 군대를 격파한 후 아트시즈를 살해하였다. (1079년) 투투쉬는 부관 아르투크를 예루살렘 총독으로 임명하였는데 1091년 그가 사망한 후 두 아들인 일가지와 소크만이 내분을 벌이며 예루살렘은 재차 혼란에 빠졌다. 그러던 1098년, 파티마 왕조가 예루살렘을 수복하기에 이른다. 같은해 안티오크가 1차 십자군에게 함락되었다.
10.2. 예루살렘 왕국
자세한 내용은 예루살렘 왕국 문서 참고하십시오.1090년대에 서아시아가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그레고리우스 7세에 이어 교황으로 즉위한 우르바누스 2세는 1095년에 소집한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십자군 원정을 제창하였다(다만 20세기 이후에 들어 가톨릭 교회가 십자군에 대해 사과하며 클레르몽 공의회는 정식 공의회가 아니게 되었다).[17] 원정의 표면상의 원인은 동로마 제국 측이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제국에게 대패한 후 지원을 요청한 것이지만 교황은 교황권의 확대와 동서 교회의 통합을 염두에 두었고 상속 받지 못한 왕자들은 영지 획득, 농노들은 순교에 대한 희망(...)을 품고 원정에 참가하였다. 원정대는 서로 물어뜯기 바쁜 튀르크 세력을 하나하나 각개 격파하며 나아갔고, 1099년 6월에 성도 예루살렘 앞에 도착하였다.
예루살렘 함락
1099년 7월 15일, 1차 십자군은 파티마 왕조의 수비대의 항복과 함께 도시에 들이닥쳤고, 주민들을 보이는 대로 죽이기 시작하며 '성지 정화' 작업을 실시하였다. 그로써 수천 명의 무슬림/유대교도가 살해되었고 예루살렘의 길에는 장마비라도 내린듯 피가 홍건히 젖어 있었다고 한다. 물론 모든 십자군이 이 광란의 살육에 빠진 것은 아니다. 이후 트리폴리 백국을 세우게 되는 툴루즈 백작 레몽은 일부 주민들을 보호하거나 성 밖으로 피신시켜 주었다.[18] 어쨋거나 예루살렘은 무려 462년 만에 기독교 국가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십자군 국가들은 공국이나 백국[19]을 자처한 것에 비해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에는 예루살렘 '왕국'이 건립되었다. 한편 바위의 돔도 성당으로 개조되었고 과거 솔로몬 성전의 터였음에서 이름을 따와 성전기사단이 창설되기도 하였다.
10.3. 아이유브 왕조
1187년 7월 4일, 살라흐 앗 딘은 프랑크 군대를 하틴의 뿔에서 제압하였고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기를 생포하였다. 그해 9월 20일, 무슬림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재차 포위되자 성 안의 기독교도들은 (1차 십자군이 자행하였던) 1099년의 대량 학살에 대한 복수의 칼이 두려워 몸서리쳤다.
수비를 책임지던 발리앙 드 이벨린은 바위의 돔을 파괴하고 도시를 폐허로 만들겠다며 공격군에 엄포를 놓았다. 이에 살라딘은 공성을 중단하고는 배상금을 받는 조건부 항복을 허락하였다. 라틴 성직자들과 시민들은 몸값을 내고 예루살렘을 떠났다. 살라딘의 동생 알 아딜은 값을 치르지 못하여 노예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된 기독교도 2천 명을 대가도 없이 석방하는 풀어주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살라딘은 감격에 벅차 눈물을 흘렸다. 그는 550년전 칼리파 우마르가 이슬람 역사상 처음으로 도시에 입성하였을 때처럼 성묘 교회에 대한 어떠한 간섭을 하지 않았다. 다만 690년에 이슬람의 성전으로 세워진 바위의 돔 위에 있던 십자가는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
(돔 위의) 십자가를 쳐 넘어뜨리자 프랑크인은 물론이요 무슬림까지 큰 울음을 터뜨렸다. 무슬림들은 '알라후 아크바르!!'라고 울부짖었고 프랑크인들은 심히 괴로워하며 울었다. 서로 외치는 소리가 너무도 커 땅이 흔들리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유일신을 섬기는 두 종교의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바위의 돔의 십자가 조형물이 내려진 이 작지만 큰 사건은 성스러운 도시의 주인이 다시 바뀌었음을 상징하는 작은 변화였고, 이슬람과 기독교 양측의 기록에 남아있다.프랑크인들이 물러가면서 감소한 예루살렘의 인구를 메꾸기 위해 살라흐 앗 딘은 무슬림들 뿐만 아니라 아르메니아인들과 예멘, 모로코의 유대인들을 초청하여 예루살렘에 정착시켰다 한다.
오늘날의 스페인 남부에 해당하는 알 안달루스 무르시아 출신의 이븐 아라비라는 수피 신비주의 철학자도 아이유브 왕조에 정착했다. 기독교에 영향을 받은 그는 수피즘과 가톨릭 교리를 접목시킨 새로운 사상으로 많은 추종자를 모았으며, 메카에서 성지 순례를 하는 동안 성령과 직접 접견했다고 주장했으며, 1206년 예루살렘에 방문하면서 꿈 속에서 자신이 예언자 무함마드가 천사, 예언자, 성인들과 같이 왕좌에 앉아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주장하는 후일담을 책에 담았다. 그의 주장은 이슬람 세계에서 커다란 논란이 되었으며, 예루살렘은 논란 속에서 알 아라비의 사상을 추종하는 수피들이 메카보다도 더 선호하는 성지가 되었다.
13세기 들어, 5차 십자군을 지휘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시칠리아 국왕 프리드리히 2세는 아이유브 술탄인 알 카밀과 협상하여 예루살렘을 재차 십자군 영토로 복귀시켰다. 다만 수비대 설치는 금지되었으며, 시내의 이슬람교도 역시 안전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이 공존도 30여 년 만에 호라즘 왕조의 개입으로 깨졌고, 예루살렘은 아이유브 조를 멸한 맘루크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0.4. 맘루크 왕조
예루살렘 사자 문에 새겨져 있는 술탄 바이바르스의 표식 (표범)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을 격파한 맘루크 장군 바이바르스가 예루살렘을 탈환한 이후 맘루크 정권은 예루살렘의 수피 교단을 위한 숙소를 지었으며, 줄어든 기독교인 순례자 대신에 수피 순례자들이 몰려들며 계속해서 예루살렘을 통치하는 정권들에게 짭짤한 소득을 안겨주었다. 이븐 아라비를 비롯한 수피들이 예루살렘을 순례하면서 자신이 직접 꿈에서 미라지를 체험했다고 주장하며 예루살렘으로의 성지순례를 부추겼고, 예루살렘은 헤자즈의 메카보다 더 많은 무슬림 순례자들로 북적였다.
한편 맘루크 왕조의 튀르크계 & 체르케스계 맘루크들은 왕조 영토 내에 기독교인 & 유대인 & 아랍인들을 모두 탄압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노란 터번을 기독교인들은 파란 터번을 써야만 했으며, 아랍인들은 튀르크인들한테 자신들이 이슬람의 원조라며 대든다는 이유로 같은 무슬림인데도 불구하고 갑옷을 입지도 못하고 말도 타지 못하게 억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발리파의 율법학자인 이븐 타이미야는 튀르크인들이 좋아하는 수피즘을 공격하면서, 무슬림 공동체가 초기 아랍-이슬람 문화로 복구할 것을 주장하여 많은 아랍인들에게 호응을 얻었다. 맘루크 왕조의 통치자 나시르 무함마드가 예루살렘을 순례하자, 이븐 타이미야는 "예루살렘은 경건한 방문으로서의 지위만을 가질 뿐이며 메카를 방문하는 핫지와 동등한 것이 아니다."라고 직언했다가 감옥에 갇히면서, 그의 저작들이 오히려 유명해졌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 중에는 '하나님의 동반자와 사탄의 동반자'[20]라는 책이 있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동반자는 바로 하디스와 꾸란을 문자 그대로 따르는 사람들이며, 사탄의 동반자는 당시 명망 높은 수피 철학자 이븐 아라비였다.
이븐 아라비와 이븐 타이미야의 성향은 정 반대였다. 스페인 무르시아 출신인 이븐 아라비는 수피 신비주의자로서 쉬아파에 대해 매우 관대한 입장을 취한 반면, 자신의 고향인 알 안달루스가 계속해서 레콘키스타의 위협을 받았던 것에 대한 반감으로 기독교인과 유대인을 비롯한 비무슬림 전반에 대단히 적대적이었다.[21] 이븐 타이미야는 비무슬림에 대해 딱히 관대한 입장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꾸란에 명시된 종교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을 준수하자는 편이었으며, 그는 기독교인이나 유대교인보다도 쉬아파를 더 증오했다.
이븐 타이미야를 추종했던 아랍인 중에는 샤피이파 율법학자이자 역사학자, 가장 유명한 꾸란 주해서를 남긴 저자인 이븐 카시르도 있었다. 가장 권위있는 꾸란 주해서인 이븐 카시르의 주해서에 이븐 타이미야의 시각이 많이 반영되었으며, 이는 결국 훗날 와하비즘의 토대가 되었다.[22]
1267년 스페인에서 예루살렘을 방문한 미즈라힘 랍비 람반은 예루살렘에 주민이 2,000여 명밖에 남지 않은 데다가 그중 기독교인은 300여 명, 유대인은 단 2명에 불과하다는 걸 목격하고 경악했다고 한다. 그 많은 주민이 다 죽은 건 아니고 십자군이 다시 돌아올 것을 경계한 맘루크 왕조에서 일부러 아크레, 야파, 예루살렘 같은 십자군 주요 거점이었던 곳을 일부러 주민들이 정착하지 못하고 이주만 하도록 만들어서 인구를 줄여놓은 것이다.
11. 오스만 지배기
쉴레이만 대제가 세운 성벽 중 가장 보존이 잘된 부분인 다마스쿠스 문
이후 맘루크에 이어 1520년부터 1918년까지 오스만 제국에 400년 통치를 받았다. 오스만 조의 쉴레이만 1세는 인구 6,000 정도의 소규모 도시로 전락해 버린 예루살렘에 대한 대대적인 보강 공사를 지시하였다. 1537-41년에 걸쳐 성벽이 다시 세워졌고 도로가 정비되었는데, 현재 예루살렘 구시가지와 성곽이 이때 비로소 정립되었다. 공교롭게도 예루살렘을 다시금 중건한 쉴레이만은 고대 이스라엘의 명군 솔로몬을 터키어로 음역한 것이다. 솔로몬은 이슬람 경전인 쿠란에 아랍어인 술레이만으로 나오는데, 이를 다시 터키어로 읽어낸 표현이 쉴레이만이다. 현재 터키에서 가장 인기있는 남자 이름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다만 쉴레이만은 성벽이 시온 산까지 포함하지 못한 것에 노하여 설계가 2인을 처형했다 한다.
오스만 제국에서 유대인들이 아랍인들보다 더 우대받는 상황에 분개한 아랍인 토후들이 17세기 초반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모여 살던 사마리아인들을 학살 혹은 추방하면서, 예루살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과의 오래된 갈등이 끝을 맺었다.
러시아 제국에서 알렉산드르 3세의 즉위 직후 반유대주의가 심화되자[23] 1890년대부터 러시아계, 우크라이나계 아슈케나짐 유대인들 중 하시딤 계열의 근본주의자들은 당시 오스만 제국 영토인 예루살렘으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당시 600~700만 명 정도의 러시아 유대인 중 200만 명 정도가 1888년에서 1914년 사이에 미국, 캐나다, 아르헨티나, 프랑스로 이주하였으며 예루살렘으로 이주하였으며 이 가운데 2~3만 명 정도가 예루살렘에 정착해서 아랍인 주민들과 갈등을 빚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유대인의 이민을 금지하고 유대인은 3개월 이상 팔레스타인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포고령을 내렸으나 당시 오스만 제국 상황이 막장인 관계로 잘 먹히지 않았다.
12. 영국의 위임통치
1917년 12월 11일, 야파문을 통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알렌비 장군
제1차 세계 대전 와중인 1917년 12월, 예루살렘은 시나이와 팔레스타인을 돌파한 영국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에드먼드 알렌비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군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은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배가 끝났음을 의미했다. 당연히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십자군의 재림이라며 프로파간다로 잘 써먹었고, 이때 살라딘의 무덤 앞에서 기독교도들이 예루살렘을 되찾았다고 뽐내기도 했다. 대전 후 30년간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치소(治所)로서 기능을 했다. 1936년 팔레스타인 대반란 당시 아랍인들의 주요 거주지였던 이 도시는 영국군에 의해 1938년 반란군들과 시민들을 강압적으로 제압하게 된다. 1947년의 UN총회의 결의(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위임통치를 철폐)에 따라 영국의 관공서가 모두 철수했고 1948년의 이스라엘 건국전쟁이 시작되었다.
13. 현대 이스라엘 건국과 중동전쟁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1960년대의 베를린 장벽처럼 아주 촘촘한 철조망으로 동서분할했고 악전고투 끝에 서예루살렘을 사수했지만, 동예루살렘은 요르단에게 점령되어 합병되었다. 1967년의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 방위군이 동예루살렘을 해방(?)하면서 서예루살렘과 동서통일(?)하는 절차를 밟았다. 곧이어 1968년부터 1992년까지 중앙정부 관청들의 이전이 진행되었고, 이스라엘 정부의 도시계획에 따라 동서통일한 예루살렘은 명실상부한 행정수도로 탈바꿈했다.
이스라엘 정계를 좌지우지하는 시온주의자 정치인들은 마음 속으로 예루살렘 구시가지에 있는 바위의 돔을 엎어버리고 싶어하는 것 같다(...). 바로 여기가 과거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자리인데다가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던 바위가 있어서 유대교 입장에서는 성스러운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소망은 솔로몬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슬람 입장에서도 위와 똑같은 이유 + 시조인 무함마드가 승천한[24] 자리로서 이슬람에서 성지로 받아들이는 곳이라는 것. 만약 여기를 부숴버렸다가는 전 세계 이슬람 국가들이 남김없이 적으로 돌아서버릴 일이기 때문에 겨우 성전의 모형을 만들어 전시하는 수준이다.[25]
결국 직접 부술 수는 없으니 하레디계 정치인들은 야훼께서 지진으로 이단의 상징인 알 아크사 모스크를 무너뜨릴 때를 기도한다고 하지만 현실은…[26] 오죽하면 여길 방문하여 아랍권의 분노를 일으켰던 아리엘 샤론 전 이스라엘 총리조차도 '이걸 계기로 여길 무너뜨릴 시도를 할 겁니까?'라는 예루살렘 포스트지 기자 발언에 예루살렘에 그냥 핵을 투하해달라고 기도를 하는 것 같구려?란 말 한마디를 하고 가버린 적도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시온주의자들이 솔로몬 성전을 만든다고 큼직한 돌로 기둥을 만들고 직접 이곳으로 끌고갔다가 경악한 이스라엘 정부가 군대를 동원해 가로막았던 적도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냥 통곡의 벽 근처에 그냥 내뒹굴고 있다.
월트 디즈니의 알라딘이 아랍권 개봉할 당시 '예루살렘은 그 어디의 도시도 아니다'라는 홍보를 하여 이스라엘에서 항의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인구가 적어서(600만 명 정도) 불매해봐야 별다른 영향도 없었다.[27] 게다가 당시 디즈니 회장이었던 제프리 캐천버그가 유대인임에도 이런 홍보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캐천버그는 어차피 이스라엘인도 아니니 신경쓸 필요가 없었지만.
2014년에 이스라엘은 유로 2020 분산 개최 후보에 예루살렘을 등록하며 유로컵 개최 희망을 나타냈으나, 예루살렘에서 유로컵이 열릴지는 의문시되는 상황. 7월 들어서 가자 지구 무차별 폭격으로 모든 스포츠 대회가 취소되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종교 국제 만찬이니 뭐니 그런 게 열리는 수준. 결국 유로 2020 최종 분산 개최도시에 뽑히지도 못했다.
[1]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예루살렘을 파괴했다는 성경 기록을 포함하면 3번이지만, 이 사건을 기록하는 다른 사료가 없으므로 보통 포함하지 않는다.[2] 유일신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여 둘째아들 이사악을 산 제물로 바치라고 한 사건.[3] 심지어 2018년에는 이스라엘 왕국의 예루살렘 도성(都城)을 다스리는 부윤(府尹)이 사용한 직인을 발굴했다.[4] 후일 히스기야 왕 때 실로암 지하수로를 파서 성 내부에 수원지를 확보하게 된다.[5] 엄밀히 말하면 새로 지은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성전을 증축한 것이다.[6] 유일하게 남은 부분이 통곡의 벽.[7] 다만 이슬람에서도 신성시되며 알 쿠두스 명칭이 이후에 정착하게 되었다.[8] Ignacio Ortiz de Urbina,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Les conciles de Nicée et de Constantinople 324 et 381, 황치헌 옮김, 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8, p.373[9] 그래서 혹자는 이라클리오스가 십자군의 시초라고 보기도 한다.[10] 그러나 성당들이 모스크로 개조되는 일은 후대에 여러차례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하기아 소피아가 그러하고 레콩키스타가 한창이던 스페인에서는 역으로 모스크가 성당으로 개조되는 경우도 있었다.[11] 이 일화 때문에 후대에 바로 그곳에 오마르 모스크가 건립되었고 덕분에 성묘교회는 매우 협소한 앞마당을 갖게 되었다.[12] 하필 옛 성전 터가 있던 성전산에 지어져 이 때문에 오늘날 이스라엘의 성전재건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13] 돔 위에 입힌 금은 요르단 왕가인 하심 가문에서 기증하여 1959-61년과 1993년에 입힌 것이다. 하심 가문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손 집안으로서 성지의 수호자를 자처한다.[14] 미스크와 카푸르는 이슬람의 향수 이름이다. 아부는 아버지라는 뜻. 다시 말해 "향수의 대부"라는 뜻이 이름이다.[15] 다만 비용은 동로마 측이 부담하였다.[16] 원래는 라틴어로 DEVS LO VVLT, 즉 신께서 '그것을' 원하신다이다. 지금의 표기로는 Deus lo(s) Vult. 원래 라틴어에서는 U와 V가 모두 V였다.[17] 2000년 3월 5일 교황청은 <회상과 화해: 교회의 과거범죄>라는 문건에서 십자군을 "교회가 저지른 범죄"라고 공식 인증했다. 또한 같은 해 3월 12일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집전된 미사에서 십자군의 만행을 교황이 주도하였다는 점을 사과하였다.[18] 물론 이는 단순 연민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인 계산도 포함된 것이었다. 예루살렘이 정복되었으니 곧이어 예루살렘의 통치를 누가 할 것인지도 정할 것이었다. 이에 미리 예루살렘 주민들의 민심을 얻고자 한 것이다. 다만, 일이 잘 안풀려 레몽은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이 되는데는 실패하고 대신 트리폴리를 노리게 되었다.[19] 이 십자군 전쟁 당시에만 사실상 처음으로 독립적인 백국들이 등장했다. 일반적으로 왕의 신하라는 지위 내에서 지방에서 할거하던 호족들이 자칭하던 칭호가 백작이었던 만큼 독립 백국은 드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십자군 전쟁 이후에 세워진 백국도 없다. 이것은 우선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던 귀족이 십자군 국가를 세울 때 스스로 왕이나 공작, 후작을 칭할 수 없어서 유럽 본국에서 자신의 가문이 가지고 있던 작위인 백작 작위를 칭해서였고, 둘째로는 십자군 국가들이 형식적으로는 동로마 제국이나 예루살렘 왕국의 봉신으로 행세했기 때문이다. 에데사 백국의 경우 명목 상으로 동로마 제국의 봉신을 자처하는 동시에 튀르크에서도 책봉 받았으나, 두 세력 중 어디로부터 실질적인 영향도 받지 않은 상태가 유지되어 사실상 독립국이 되었다. 그나마도 이것을 백국이라고 부르는 것은 백국 통치자의 모국어였던 프랑스어 기준이고, 당시 동로마의 그리스어 기준으로 군주의 칭호는 둑스, 즉 직역하면 공작이었으니 공국인 셈이었다.[20] 책의 아랍어 제목은 Al Furqan bayna Awliya Ar-Rahman wa Awliya Ash-Shaytan, 번역하면 ‘가장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동반자와 사탄의 동반자를 나누는 기준과 증거’[21] 오늘날의 서구의 수피 교단에서는 이븐 아라비가 기독교와 유대교에 대단히 적대적이었다는 것을 숨기는 경향이 많으나, 정작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의 수피 교단들은 이븐 아라비의 영향을 받아서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에 대한 저주를 대놓고 예배에 집어넣기도 한다.[22]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이븐 타이미야가 이븐 알 아라비보다 오히려 비무슬림들에게 관대한 입장을 보였다는 것. 인도와 중앙아시아 수피들이 비무슬림들에게 관대했던 것과 다르게 지중해와 흑해의 수피들은 오히려 더 과격한 경우가 많았던 것도 있고 이븐 아라비가 당시 레콘키스타에 시달리던 스페인의 무르시아 출신이라는 점도 한몫했다.[23] 그전에 알렉산드르 2세 시해 사건을 둘러싸고 뭔가가 있었다.[24] 무함마드가 가브리엘에게 계시를 받은 장소는 메카이다.[25] 돔의 황금도 요르단에서 기부하여 장식한 것이다. 여기를 부쉈다가는 이스라엘을 인정하는 요르단이 1번으로 전쟁을 벌이자고 할 듯.[26] 물론 실제로 예루살렘을 포함한 이스라엘 일부 지역에서 과거에 한두 차례의 대지진이 일어난 적은 있다. 원래 팔레스타인 지역은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지질대는 아니지만 영국령 팔레스타인 시절에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인터넷 검색 요망.[27] 되려 이 애니메이션 오프닝인 상인의 노래 가사에 나온('낯선 이의 팔을 자르는 곳이라네') 내용에 빡친 아랍권에서 알라딘 불매를 벌인다고 하자 놀란 디즈니가 부랴부랴 수정하며 대조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