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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암스트롱/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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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종합 평가
2.1. 파격적인 캐릭터성2.2. 자유와 패권, 미국 그 자체로서의 상징성
2.2.1. '미국'의 상징2.2.2. 사전지식: 미국과 우파 자유지상주의의 관계2.2.3. 나노머신의 의미2.2.4. 암스트롱 사상에 대한 오해
2.2.4.1. 오해가 발생한 근본적인 이유2.2.4.2. 좌파 이념을 긍정할 수 있는 사상이다?2.2.4.3. 강자라면 누구라도 인정하는 사상이다?2.2.4.4. 아나키즘(무정부주의) 계열이다?2.2.4.5. 국민에게 지지받기 어려운 사상이다?
2.2.5. 미국식 자유지상주의 담론의 집결체
2.2.5.1. 미국 헌법2.2.5.2. 잭슨 민주주의2.2.5.3. 사회진화론적 자유지상주의2.2.5.4. 신자유주의2.2.5.5. 미국 보수주의2.2.5.6. 아나코 캐피탈리즘2.2.5.7. 자유지상주의적 트랜스휴머니즘
2.2.6. 니체와 자유지상주의의 절묘한 융합2.2.7. 극우 여부2.2.8. 자유주의를 총망라하는 철학과 강자들을 아우르는 리더십2.2.9. 정교한 미국적 현대이념 체계2.2.10. '강력한 지도자'와 '강자'의 표상2.2.11. 현실주의 정치학적 예언2.2.12. 니체적 '초인'의 은유2.2.13. 사상의 의의
2.3. 완벽한 서사적 기능2.4. 암스트롱을 계승한 라이덴과 제작진들의 메시지2.5. 이상적인 고전적 영웅상의 재해석2.6. 최종보스로서의 위상과 미국적 롤모델의 구현2.7. 계속되는 철학적 메시지2.8. 결론
3. 옹호와 비판

1. 개요

this guy really just came out of nowhere and established himself as one of the most iconic video game villains within 30 minutes of screentime.
이 사람은 정말 뜬금없이 등장해서 단 30분의 출연 시간만으로 가장 상징적인 비디오 게임 악당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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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암스트롱의 평가를 다루는 하위 문서.

2. 종합 평가

2.1. 파격적인 캐릭터성

Don't fuck with this senator!
이 상원의원 앞에서 깝치지 마라!
그의 캐릭터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적인 대사
스티븐 암스트롱은 여태까지의 여러 매체에서 정치인의 이미지를 완전히 깨부수는 여러 의미로 파격적인 캐릭터다. 특히 북미 쪽 플레이어들에게 반응이 폭발적으로 좋았다. 우선 설정상 상원의원[2]임에도 입만 살고 힘은 하나도 못 쓰는데다 염세적이고 무감정할 것 같은 높으신 분 클리셰에서 벗어난 마초 캐릭터라는 미칠 듯한 괴리감에, 생긴 것답게 산전수전 다 겪어온 정예 사이보그 요원인 라이덴을 애새끼 취급하며 태고의 달인 시리즈에서 북 두들기는 것마냥 신명나게 두드려패는 호쾌함을 선보였기 때문이다.[3]

게다가 창작물의 일반적인 문법에서 강력한 육체능력이 부각되는 캐릭터는 단순한 근육뇌이거나, 그가 내세우는 신념이 무지하게 질 낮고 허접한 수준에 머물기 마련이다. 그러나 스티븐 암스트롱은 이러한 클리셰를 완전히 뒤엎는다. 그는 압도적인 신체 능력을 자랑하는 동시에, 풍부한 감정과 유머를 민첩하고 적절히 활용하는 언변과 재치를 뽐내며 자유지상주의에 기반한 심도 깊은 철학적 논리로 주인공 라이덴의 비판을 정면으로 논파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용하는 어휘나 말투도 다분히 마초스럽지만, 동시에 그 속에 담긴 세계관과 이상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이러한 이질적 요소들의 자연스러운 결합이 해당 캐릭터에 강렬한 존재감을 부여했으며, 오죽하면 이 인물 하나 때문에 라이징에 대한 게이머들의 심정이 BADASS MURICA로 확 뒤바뀔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또한 약육강식을 주장하는 다수의 캐릭터들이 최후의 순간에는 자신의 논리를 부정하는 내로남불의 나약함을 보이는 반면, 암스트롱은 완전히 달랐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신나게 두들겨 패던 라이덴이 자신을 쓰러뜨리자, 이를 호쾌하게 인정한다. 오히려 그의 방식과 신념을 존중하며 라이덴의 앞길을 축복하기까지 하며 쓰러졌고 그에 라이덴 또한 암스트롱을 인정하는 모습이 연출된다. [4]

이처럼 자신이 내세운 약육강식과 실존주의의 원칙을 자신에게도 끝까지 적용하며 초지일관한 최후를 맞이한 암스트롱의 모습은, 흔한 '강자 악역'의 클리셰를 깨뜨리는 인상적인 장면으로 평가받으며 큰 호평을 받았다. 여러 모로 클리셰란 클리셰는 죄다 깨뜨리는 역대급 클리셰 브레이커 중 하나이자, 미국이란 나라 그 자체를 훌륭하게 메타포화한 캐릭터로 평가된다.

다만 메탈기어 시리즈 전체 맥락에서 보자면, 암스트롱 역시 시리즈의 클리셰를 완전히 탈피한 이질적인 존재는 아니다. 메탈기어 시리즈는 전통적으로 선역도 완전히 선하지 않고[5], 악역도 절대적으로 악하지 않은 인물들로 구성되는 것이 특징이며[6], 암스트롱 역시 이 클리셰에 충실한 인물이다. 즉, 그는 폭력성과 독단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철학적 일관성과 사회비판적 이상을 지닌 존재로 묘사되며, '선악의 모호함'을 중심 주제로 다뤄온 시리즈의 전통에 자연스럽게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2.2. 자유와 패권, 미국 그 자체로서의 상징성

2.2.1. '미국'의 상징

Armstrong also expressed a desire to actually remake America's position as the most powerful nation in the world and reclaim the American Dream, blithely stating that the Tea Party Movement was not going to succeed due to its unwillingness to make sacrifices, implying that he wanted to bring about another American Revolution, and compared himself to the true Sons of Liberty. Armstrong then dismissed him as he had other matters to attend to, although not before promising to talk to him soon. The conversation was later leaked onto the Internet.[3] That same year, just as was feared by his speechwriter, he was investigated for his ties to World Marshal Inc., the world's largest PMC as well as the largest distributor of cybernetic parts. Despite this, he was still considered a presidential nominee for the 2020 elections, and was even considered to be a "shoo-in."
암스트롱은 미국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다시 만들고, 아메리칸 드림을 되찾겠다는 열망을 드러내며, 티파티 운동이 희생을 감수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태연히 말했고, 자신이 또 하나의 미국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는 암시를 주며 자신을 진정한 '자유의 아들들(Sons of Liberty)'에 비유했다. 그는 이후 다른 일들이 있다며 상대를 가볍게 무시하고 자리를 떴지만, 곧 다시 이야기하자고 약속하긴 했다. 이 대화는 이후 인터넷에 유출되었다. 같은 해, 그의 연설문 작성자가 우려했던 대로, 그는 세계 최대의 민간 군사 기업이자 사이버네틱 부품의 최대 유통업체인 월드 마샬 주식회사(World Marshal Inc.)와의 관계로 인해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2020년 대선 후보로 여전히 거론되었고, 심지어는 당선이 거의 확실한 인물(“shoo-in”)로까지 평가되었다.
https://metalgear.fandom.com/wiki/Steven_Armstrong?utm_source
미국의 대표적 양덕후 위키인 TV Tropes에서는 정치인 관련 만신전(Pantheon of Politicians) 항목에서 스티븐 암스트롱을 최상위 티어로 선정했다. 이는 게임 속 정치인으로서는 대선배 격이며, 게임 외적으로도 플래티넘 게임즈의 원류인 캡콤의 캐릭터라는 점에서 암스트롱의 직계 선배로 볼 수 있는 마이크 해거, 혹은 그 왕좌의 게임타이윈 라니스터, 훨씬 고참인 파워퍼프걸타운스빌 시장보다도 높은 Greater God 티어에 해당한다. 사실 '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한 나라의 무의식적 정체성과 집단적 의지를 집약한 상징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미국의 자유와 힘, 투쟁의 신화를 극단적으로 체현한 암스트롱이 그런 평가를 받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실 하단의 단락에서 후술하겠지만, 스티븐 암스트롱과 그의 나노머신은 단순한 오버테크놀로지 무기가 아니라, 미국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투쟁적 자유의지'와 '국민의 민의'를 극단적으로 상징하는 장치로 해석된다는 것이 아주 유력하다. 암스트롱은 폭력을 통해서라도 스스로의 신념과 자유를 쟁취하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를 구현한 인물이며, 현재는 그의 나노머신 또한 단순한 물리적 방어막을 넘어서, 미국인 개개인의 거침없는 자율성과 투쟁 본능을 응축한 메타포로 받아들여진다. 결국, 이른바 암스트롱 신드롬이라 불릴 정도로 북미 게이머들 사이에서 나타난 열광적 반응과 수많은 밈의 재발굴은, 단순히 한국에서처럼 '과격하고 터프하며 신념이 일관적인 멋진 악역 캐릭터'로 소비되는 차원을 훨씬 넘어선다. 북미에서는 훨씬 더 심층적으로, 미국인들의 무의식 깊숙이 자리한 '자유를 위한 투쟁의 신화'를 가장 노골적이고 직설적이며 집약적으로 구현한 상징적 캐릭터에 대한 당연한 반응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지배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작중 암스트롱이 탑승한 메탈기어 엑셀서스 역시 단순한 전쟁병기가 아니다. 엑셀서스는 극도로 강화된 무력의 상징일 뿐 아니라, 미국이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내세워 자국의 패권과 질서를 관철하고자 하는 제도적 권력의 은유적 구현물로도 해석된다. 나노머신이 미국 국민 개개인의 거침없는 자유의지와 투쟁 본능, 즉 민의를 물리적으로 응축한 장치라면, 엑셀서스는 그러한 민의가 집약되어 거대한 국가 권력으로 실현되는 과정을 상징하는 셈이다. 그리고 암스트롱 자신은 바로 그 모든 것을 통합한 존재, 즉 미국 그 자체와 그 원형적 정신의 총체로 자리매김한다. 즉 암스트롱, 나노머신, 엑셀서스 세 가지는 각각 국가적 정신의 총체, 미국인의 개인적 자유의지와 투쟁 본능, 제도적 권력의 구현을 상징하며,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거대한 정치적 메타포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상징 체계는 단순한 게임 설정을 넘어, 미국이라는 국가의 심층 심리와 정치적 본능을 매우 정밀하게 형상화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한 부분은, 암스트롱과의 전투에서 사용되는 BGM의 제목들이다. 제트스트림 DLC의 암스트롱 2페이즈, 본편에서 엑셀서스와의 전투에서 흐르는 곡의 제목이 바로 "Collective Consciousness"인데, 이는 미국 사회의 집단적 의식, 즉 자유와 투쟁 본능이 정부와 제도라는 거대한 시스템 안에 숨겨지고 포장되어, 미국인들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표출되는 상태를 은유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또한 이는 엑셀서스가 대표적 집단생물인 개미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반면, 암스트롱 본인과의 최종 전투에서 사용되는 BGM "It Has to Be This Way"는 그 집단적 의식이 더 이상 제도나 명분으로 가려지지 않고, 철저한 개인의 힘과 의지를 통해 적나라하게 표출되는, 미국의 투쟁 본능의 가장 순수하고 본질적인 자기 현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두 곡의 대비 자체가 미국이라는 국가의 본질과 무의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구조인 셈이다.

또한 암스트롱이 파키스탄에 전쟁을 선포하는 것을 시작해서, 자신의 철학을 전 세계에 실현하려 했던 방식은 단순히 그를 악역으로 묘사하려는 장면이 아니다. 이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본질적 외교 전략과 매우 깊게 연결되어 있다. 미국은 역사적으로 '자유', '민주주의', '국민의 의지'라는 명분을 내세워 수많은 군사 개입과 전쟁을 정당화하며, 무력, 자본, 기술을 바탕으로 자국 중심의 패권 질서를 국제사회에 관철해왔다. 암스트롱의 행보는 바로 이러한 미국의 전통적 행태를 가장 노골적이고 극단적으로 체현한 사례다. 나아가 그는 단순히 미국의 군사주의만을 대변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근본적 국가 이념인 개인주의, 자유주의, 개척정신, 자본주의를 세계에 확산하려는 충동까지 그대로 구현했다. 그의 철학과 행보는 미국이 외교, 경제, 문화, 군사 등 모든 영역에서 펼쳐온 '자유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세계 재편'의 신화적 재현으로 읽힌다. 결국 암스트롱은 단순한 게임 속 악역으로 머물지 않는다. 그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무의식적 본능과 제국적 야망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 존재이자, 그 자체로 미합중국(USA)이라는 국가의 상징적 화신이라 할 수 있다. 자유, 투쟁, 패권, 그리고 이상이라는 이름 아래 움직여온 미국의 본질적 역동성을, 암스트롱은 누구보다 직설적이고도 극단적으로 구현해냈다.

이는 아래의 옹호와 비판 문서를 살펴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암스트롱을 둘러싼 논쟁은 단순히 게임 속 캐릭터의 행보나 설정을 놓고 벌어지는 유희적 논쟁의 범주를 이미 넘어섰다. 오히려 그가 구현하는 미국적 가치관과 사상, 나아가 자유와 힘, 권력의 관계를 둘러싼 논의는 마치 현실 정치 뉴스의 댓글창에서 보이는 미국에 대한 옹호와 비판의 구도와 매우 유사한 형태로 수렴하고 있다. 즉, 암스트롱에 대한 찬반은 결국 미국이라는 국가 자체의 가치관과 현실 정치에 대한 인식 차이를 투사하는 장으로 확장되고 있으며, 이는 그가 단순한 게임 캐릭터를 넘어서는 '현상'으로 자리잡게 된 이유를 잘 보여준다.

2.2.2. 사전지식: 미국과 우파 자유지상주의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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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트롱의 사상을 심층적으로 탐구하기 전에 먼저 알아두어야 할 점은, 미국의 자유지상주의(리버테리아니즘, libertarianism)는 특수하게도 우파의 성향을 매우 강하게 띤다는 점이다. 자유지상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시장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중시하는 사상으로, 본래는 국가 권력을 최소화하려는 급진적 사상, 즉 당대의 시대상에서는 좌파로 분류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자유지상주의가 강한 우파적 성격을 띠게 되었는데, 이는 미국 정치의 특수한 맥락 때문이다. 미국은 유라시아와 달리 '국가'가 아니라 '국민 개인'에게 더 강한 권한이 있는 채로 건국되었기 때문에, '정부의 개입' 자체가 곧 좌파적 성향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고, 반대로 '정부의 축소'와 '개인 책임 강조'는 우파의 핵심 가치로 여겨진다. 그 결과, 미국의 자유지상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우파 진영과 밀접하게 연결되었으며, 특히 경제 정책에서는 우파와 사실상 동일시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 외 국가들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특이한 현상으로, 국가마다 '좌우파'의 기준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즉, 미국의 우파 자유지상주의(Right-wing Libertarianism)는 미국 사회의 역사적 뿌리와 정체성 깊숙이 자리한 근본 사상에 가깝다. 미국 건국 자체가 '정부의 간섭으로부터의 자유', '무장 저항권', '개인의 자립', '완전 자유경쟁 시장' 등을 핵심 가치로 삼았고, 이는 곧 우파 자유지상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이는 정부가 국민을 보호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구대륙의 보수주의나 복지적 자유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관점이다. 미국인들은 한국인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스스로를 '개척자'와 '자유인'으로 인식하며, 정부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이 매우 강하다. 이러한 정신은 미국 독립전쟁부터 프론티어 개척 시대, 산업화 시대, 그리고 현대 정치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이어져 왔다. 역사적으로도 수많은 대통령들이 '작은 정부'와 '개인 자유'를 외쳤다. 즉, 미국의 우파 자유지상주의는 특정 정치 세력의 전유물이 아니라, 미국 정치문화의 근본이자 국민 정서 그 자체로 기능하고 있으며, 이는 세계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미국만의 독특한 정치적 유산이다.

그리고 스티븐 암스트롱의 핵심 사상은 본질적으로 이 우파 자유지상주의에 깊게 뿌리내려 있다. 그는 국가 권력의 최소화, 투쟁까지 허용하는 개인의 절대적 자율성, 그리고 시장 경쟁의 극대화를 일관되게 주장하며, 사회는 철저한 자유 경쟁과 힘의 논리 위에서 유지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암스트롱의 철학에서는 정부조차도 최소한의 군사력과 외교, 안보만을 담당할 뿐, 개인들의 삶과 경제 활동은 오직 각자의 힘과 선택에 맡겨져야 한다. 그는 강한 자가 스스로의 신념과 힘으로 운명을 개척하고, 약자는 도태되는 것을 자연스럽고 정당한 질서로 여긴다. 이러한 점에서 암스트롱의 철학은 미국 우파 전통 속에서도 특히 극단적 자유지상주의에 가장 가까우며, 미국 건국 이래 꾸준히 이어진 개척주의적 개인주의와도 긴밀히 연결된다.

비록 현실의 미국 정치 제도는 정부 권력의 확대와 각종 규제로 인해 자유지상주의적 이상과는 괴리가 있는 경우가 많지만, 암스트롱처럼 우파 자유지상주의를 정치적으로 천명한 정부와 정치인들은 미국 역사 내내 끊임없이 등장해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후술할 앤드류 잭슨으로, 그는 '작은 정부'와 '인민 주권', '엘리트 타도'를 내세우며 미국식 자유주의의 원형적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이후에도 미국 역사에서는 에이브러함 링컨, 토마스 제퍼슨, 로널드 레이건, 도널드 트럼프 등 다양한 인물들이 각기 다른 형태로 자유지상주의적 기조를 표방해왔다. 즉, 미국에서의 우파 자유지상주의는 하나의 정치 이념이라기보다는 사실상 미국 정치문화 전반에 깊이 뿌리내린 '국민적 정신'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개인의 자유, 정부 불신, 무장 저항권, 개척정신 등으로 이어지는 이 흐름은 미국의 건국 신화와 역사적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내재화된 가치이며,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미국 정치의 기본 정서로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우파 및 보수 성향의 사람들이 암스트롱을 쉽사리 '우파'로 인식하지 못한 것 역시, 바로 이 미국 자유지상주의의 특수성에서 비롯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한국 보수주의는 유교적 전통과 산업화 시대의 국가주의적 가치관의 영향으로, 철저한 공동체주의와 집단 질서 중시 성향을 강하게 지닌다. 한국 보수는 국가의 통제, 가족 중심 가치관, 공동체 유지 등을 우선시하며, 개인주의적 자유보다는 사회적 안정과 국가 발전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미국의 우파 사상은 개척주의 전통과 자유개인주의를 뿌리로 하여, 철저한 개인 책임과 경쟁을 우선시하며,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모든 것을 개인의 선택과 시장의 자율에 맡기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즉, 미국 우파는 자유와 자율, 경쟁을 신성시하는 반면, 한국 우파는 질서와 안정을 우선시하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이로 인해 한국의 보수 성향 게이머들이 암스트롱의 사상을 이해하거나 동일선상에 놓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도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2.2.3. 나노머신의 의미

그런 의미에서 "Nanomachines, son!"이라는 암스트롱의 상징적인 대사는 단순히 그의 강화된 육체를 과시하는 말이 아니다. 이 대사는 철저히 은유적이며, '나노머신'은 미국인의 자유, 투쟁, 자율이라는 이상이 집약된 정신적·기술적 결정체로 기능한다. 즉, 그는 독재자가 아니라, 미국적 원형정신의 구현체로서 존재하며, 이 말을 통해 자신이야말로 인민의 힘을 대변하고, 미국 그 자체가 되었다는 선언을 하는 셈이다. "Son"이라는 호칭은 단순한 조롱이 아니라, 미국의 전통에서 종종 사용되는 민중과의 친밀한 유대와 강인한 아버지적 리더십을 상징하며, 이 순간 그의 육체는 단일한 초인의 육체이자, 미국인 전체의 '의지'가 응축된 공동체의 상징으로 전환된다. 따라서 이 대사는, 미국적 절대자유의 신념 아래 모든 국민이 나노머신을 통해 하나로 결속되는 집단의식을 표현한 것이며, 그의 몸은 단순한 신체가 아니라 '미국 그 자체'라는 상징적 의미를 띠게 된다.

또한 암스트롱이 라이덴에게 던진 대사, "엄청 큰 오믈렛을 만들자는 거다, 잭! 달걀 하나하나에 일일이 신경 쓸 여유는 없어!"는 겉으로는 다소 우스꽝스럽고 유머러스하게 들릴 수 있지만, 실상은 이마저도 매우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정치철학의 요약이다. 여기서 '엄청 큰 오믈렛'은 단순한 국가 건설이 아닌, 그의 사상에서 말하는 자유의지에 기반한 새로운 미국의 창조를 의미한다. 즉, 그것은 자유지상주의적 정신이 실현된 미국의 오랜 유토피아, 즉 '최소국가(야경국가)적 정부', 그리고 개척자의 후예인 다수 미국인들이 자율과 투쟁으로 이룩한 '강자들의 공동체'로서의 미국이다. 반면, "달걀 하나하나"는 그 이상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도태되거나 희생될 수밖에 없는 존재들, 즉 정치적 올바름의 보호 대상이자, 기존 질서에 의존하며 스스로의 힘과 주체성으로는 살아가기 어려운 소수의 약자들을 상징한다. 암스트롱은 냉혹하게도 이들에 대한 개별적 고려는 모두의 이상을 위해 희생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취하며, 이는 니체적 '위대한 목적을 위한 잔인성'이나 미국식 '역사적 개척서사 속 희생의 정당화'와도 맞닿아 있다. 다시 말해, 이 대사는 단순한 강자의 무책임한 발언이 아니라, 자유의지에 의한 신질서 수립이라는 암스트롱의 철학적 세계관을 유머 속에 압축시킨 고도의 은유다.

또한, 암스트롱이 말한 '엄청 큰 오믈렛'이 '모든 오믈렛들의 어머니(mother of all omelettes)'라는 표현은, 묘하게도 미국의 정신적 상징 구조물인 자유의 여신상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자유의 여신상은 미국의 이상인 '자유', '개인의 기회', '개척 정신'을 상징하는 어머니적 존재로 자리매김해 왔으며, 그 아래 모든 미국인이 평등하게 자유를 누릴 수 있음을 선언하는 구조물이다. 반면 암스트롱은 '강자의 질서'를 대표하는 미국적 아버지상 리더십의 구현체이기도 하다. 이 대비는 흥미롭다. 즉, 그가 말하는 '모든 오믈렛들의 어머니'는 '자유와 기회의 공동체'인 '미국의 이상으로서 자유의 여신상'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것을 만들자는 것'은 공동체를 지탱하기 위한 '파괴를 통한 재구성'이라는 '아버지적 논리인 암스트롱 자신'을 드러내는 이중적 은유다. 이는 암스트롱의 사상이 단순히 폭력적이거나 냉소적인 것이 아니라, 미국적 이상을 수호하기 위한 "부정의 철학"과 그 안에 담긴 미국 특유의 가족주의적 서사까지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Are you winning, son?'이라는 이 한때 암스트롱과 라이덴의 관계에 적용되어 유행한 것 역시, 아버지가 아들의 강인한 노력과 성장을 지켜보는 구도로 자연스럽게 해석된 결과라 할 수 있다.
something funny about Armstrong's philosophy: he's an absolute individualist and believes that might makes right, but his strength actually comes from millions of tiny machines which act together to support him. It's kind of ironic.
암스트롱의 철학에는 재밌는 점이 있습니다. 그는 철저한 개인주의자이며 힘이 곧 정의라고 믿지만, 사실 그의 힘은 그를 지탱하기 위해 함께 작동하는 수백만 개의 작은 기계에서 나옵니다. 아이러니하죠.
https://www.youtube.com/watch?v=2l0RMGid6vo 영상에서 2.1만 추천수를 받은 댓글
물론, 이 함의에는 미국 정치에 대한 제작진들의 비판적 시각 역시 함축되어 있다. 암스트롱의 철학은 개인의 힘과 자유를 절대시하면서도, 실제로는 수많은 나노머신들의 집단적 작용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아이러니를 내포한다. 이는 객관적으로 볼 때, 미국 역대 대통령들이 국민의 의지를 대변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국민의 일부인 약자들의 목소리를 배제하거나 희생시켜 온 역사적 현실과 맞닿아 있다. 다시 말해, '국민'이라는 이름 아래 다수의 협력이 필요하지만, 그 안에서 소수는 배제되는 구조적 모순이 암스트롱의 육체적·이념적 구성에 압축되어 있는 셈이다.

2.2.4. 암스트롱 사상에 대한 오해

2.2.4.1. 오해가 발생한 근본적인 이유
한국인들이 암스트롱의 사상을 오해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그의 모티브 중 하나로 강하게 추정되는 서부개척시대를 지배한 미국 대통령 앤드류 잭슨과, 그가 구현한 정치사상인 잭슨 민주주의(Jacksonian Democracy)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혁명적 = 좌파", "엘리트적 = 우파"라는 이분법적 인식이 널리 퍼져 있지만, 미국의 정치 전통은 이와는 크게 다르다.

잭슨 민주주의는 강력한 개인주의, 작은 정부, 기득권 타도, 평범한 백인 남성 유권자의 직접 정치 참여 확대를 핵심으로 하는 우파 자유지상주의이자 동시에 반체제적 정치운동이었다. 이 때문에 암스트롱처럼 급진적 개혁과 체제 전복을 주장하는 인물이 우파적 인물로 설정되는 것은 미국적 맥락에서는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문화에서는 그러한 급진성 자체가 좌파로 간주되기 쉬워 오해를 낳은 것이다. 실제로 현대 미국에서도 이 잭슨적 정치 정서가 좌파적 엘리트 권력층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지며, 그 정치적 계승자로 간주된 인물이 바로 도널드 트럼프였다. 이 때문에 암스트롱과 트럼프를 비교하는 자료들이 그토록 미국에서 쏟아져 나온 것이다. 암스트롱이 미국 내에서 트럼프 지지자들에게 큰 지지를 받는 것도, 그가 단순한 폭력적 캐릭터라서가 아니라, 미국적 우파 반체제 사상의 원형적 구현이기 때문이다.

물론, 암스트롱과 트럼프를 동일선상에 놓기는 어렵다. 암스트롱은 메탈기어 세계관 내에서 실제로 '애국자들'이 남긴 부패한 체제를 타도하려 했던 인물이며, 그가 겨눈 대상은 명백한 억압적 세계 질서와 부패한 기득권 세력이었다. 반면, 트럼프는 현실에서 기존 정치권 내 기득권층과 연대하며 체제 내부의 새로운 보수 기득권을 구축하는 데 더 집중한 정치인이다. 즉, 두 인물 모두 잭슨 민주주의의 정치적 전통을 계승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고 볼 수 있다. 암스트롱은 실제로 급진적인 체제 전복을 위해 잭슨 민주주의의 원형적 정신을 극단적으로 이행한 인물인 반면, 트럼프는 기존 체제를 보존하고 재구성하려는 방향으로 그 전통을 활용한 인물이다.

더 나아가, 자세히 후술하겠지만 이러한 오해의 근본에는 동아시아와 미국의 정체성 인식 차이가 자리하고 있다. 동아시아 사회, 특히 한국은 유교적 전통과 집단주의 문화의 영향 아래에서 개인은 공동체의 일부로서 존재하며, 국가나 집단의 보호를 받는 약자로서의 자기 인식이 매우 강하게 작동한다. 반면, 미국 사회는 서부개척 정신과 자유지상주의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어, 개인을 자율적 주체이자 스스로 개척하는 강자로 인식하는 문화가 깊게 자리잡고 있다. 이 차이는 정치적 이상이나 지도자상에 대한 해석에서도 커다란 간극을 낳는다. 한국인에게 암스트롱의 극단적 자유주의는 비인간적이고 냉혹한 것으로 비춰질 수 있지만, 미국인에게는 오히려 자유와 책임, 강자의 결단이라는 긍정적 가치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암스트롱이라는 캐릭터를 단순히 '극우적 폭력주의자'로 해석하는 것은, 메탈기어의 서사와 미국 정치문화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채 동아시아적 약자 인식 프레임을 무의식적으로 투사한 결과라 볼 수 있다.
2.2.4.2. 좌파 이념을 긍정할 수 있는 사상이다?
여기서 "암스트롱은 힘을 중시하는 인물이니, 힘 있는 자가 공산주의아나키즘을 주장하면 이를 긍정할 가능성도 있지 않느냐?"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미국 전통의 우파 자유지상주의 정신은 개인이 어떤 사상을 가지든 자유롭게 추구하고, 심지어 공산주의나 아나키즘적 공동체를 자율적으로 구성하는 것 자체에는 원칙적으론 반대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 사상이 우파 자유지상주의의 핵심 가치인 '개인의 자유와 자율', '시장 경제의 자유'를 침해하려 할 때다. 이 경우 미국식 자유지상주의는 극도의 적대감을 드러내며, 체제 자체를 뒤흔들려는 좌파 이념에 대해서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다. 즉, 개인의 자유 안에서 좌파적 사상이 존재하는 것은 허용할 수 있지만, 그 사상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국가 개입을 확대해 자유지상주의 자체를 위협하는 순간, 미국 우파 자유지상주의는 본능적으로 강력한 배타성을 보이며 결코 공존을 허용하지 않는다. 즉, 본질적으로 국가 개입의 전면 확대를 추구하는 마르크스주의와 국가 개입의 전면 축소를 추구하는 우파 자유지상주의는 결코 공존할 수 없다. 암스트롱 역시 이러한 미국 자유지상주의의 원리에 충실한 인물로, 개인의 자유를 전제로 한 다양한 사상적 실험에는 무관심하거나 허용할 수 있지만, 자신의 철학을 위협하는 순간 강력한 힘으로 억누를 것은 명백하다.

따라서 암스트롱이 미국의 전통적 우파 자유지상주의 사상을 지닌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미국이라는 국가가 건국 때부터 이어온 개인주의, 자유주의, 개척정신, 그리고 자유 시장 중심의 경쟁 원칙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인물이며, 그런 점에서 미국의 원형적 정신을 가장 충실하게 구현한 상징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은 본래부터 "정부는 최소한, 개인은 최대한"이라는 철학을 정치·경제·사회 전반의 기본 가치로 삼아왔으며, 이러한 우파 자유지상주의의 흐름은 독립 전쟁, 서부개척, 산업 혁명, 냉전기, 그리고 현대 신자유주의까지 미국 역사의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핵심 기조였다. 암스트롱이 지닌 철학 역시 이런 미국적 사상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그렇기에 그를 다른 사상적 틀로 재해석하거나 그 위에 억지로 다른 이념을 덧씌우려는 시도야말로 오히려 매우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암스트롱이 보여주는 세계관은 미국 사회의 심층적 본능이 극단적 형태로 구현되어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것일 뿐이며, 이는 미국 팬덤이 그를 "미국 그 자체"의 상징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2.2.4.3. 강자라면 누구라도 인정하는 사상이다?
또 일각에서는 “암스트롱은 단순히 힘을 추구하는 인물이니, 자신을 능가하는 강자가 나타나면 어떤 사상을 가졌든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본질적으로 부정확한 해석이다. 암스트롱의 사고방식은 단순한 힘의 숭배가 아니라, 철저히 미국식 자유지상주의, 특히 서부개척시대의 강한 우파 자유지상주의 전통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 가치로 삼으며, 개인 스스로 자신의 신념과 힘으로 미래를 개척할 권리를 절대시했다. 그가 라이덴을 끝까지 존중하며 싸운 것도, 라이덴이 솔리드 스네이크의 정신을 계승한 자유주의자였기 때문이지 단순히 강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라이덴 역시 본질적으로 자유를 위한 투쟁자였고, 자신과 동일한 이상을 품고 있었기에 암스트롱은 그를 결투의 상대로 인정하고, 패배 역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역사적으로도 서부개척시대를 지배한 대통령 앤드류 잭슨처럼 결투를 즐겨 하며 '명예'와 '개인의 힘'을 정치적 정당성의 원천으로 삼았던 미국적 정치 전통과 맞닿아 있다. 즉, 암스트롱의 결투주의적 사고방식 역시 단순한 힘의 논리가 아니라, 미국적 자유지상주의와 서부개척 정신의 연장선에 있는 깊이 있는 전통의 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힘을 통한 자기 개척을 긍정하지만, 그 전제는 반드시 '자유'와 '개인의 신념'이어야 했으며, 이는 그가 지닌 철학의 핵심적 기준이었다.

즉, 암스트롱이 말하는 '강자'란 단순히 신체적·물리적 강함만을 지닌 자가 아니다. 그의 철학에서 '강자'란 자유를 추구하며, 오직 자신의 신념과 의지로 삶을 개척하려는 자유주의자를 의미한다. 그는 힘을 숭배하는 인물이 아니라, 철저히 '자유'와 '개인의 책임'을 전제로 하는 강자의 도덕을 신봉했다. 다시 말해, 암스트롱의 강자관은 니체초인 사상과 미국식 자유지상주의의 융합으로, '자유를 위해 싸우는 자'만이 강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철학적 전제를 지닌다. 그는 자유를 지키고자 자신의 힘을 갈고닦으며, 그 자유를 스스로의 손으로 쟁취하려는 자들을 진정한 강자로 존중했다. 그렇기에 암스트롱의 결투와 통치는 무작정 강한 자가 약자를 짓밟는 폭력이 아니라,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책임을 질 각오가 된 개인들의 진검승부로 이해할 수 있다. 암스트롱이 라이덴을 진정한 적수로 인정하고, 자신의 패배를 담담히 받아들인 것도 바로 이 맥락에서다.
2.2.4.4. 아나키즘(무정부주의) 계열이다?
또한 종종 제기되는 "암스트롱이 사실상 완전한 무정부 사회(아나키즘)를 꿈꾸는 것 아니냐"는 해석 역시 본질적인 오해다. 암스트롱의 철학은 무정부주의와는 전혀 다르며, 상기한대로 그의 사상은 철저하게 미국 서부개척시대의 전통적 우파 자유지상주의, 즉 최소국가론(Minimal State Theory)에 기반하고 있다. 이는 거의 모든 개인의 자유와 자율적 무력 행사, 민병대 조직 등을 허용하되, 국가의 핵심 권한인 '군사력(국방권)'과 '화폐 발행권(통화권)'만큼은 절대적으로 정부가 장악해야 한다고 보는 사고방식을 지닌다. 다시 말해, 암스트롱이 이상으로 삼는 미국은 외견상 무정부에 가까운 자유 경쟁 사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국가가 강력한 군사력과 금융 질서만큼은 절대로 손에서 놓지 않는, 극단적 자유지상주의적 최소국가에 가깝다. 이런 점에서 그는 무정부주의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철저한 '보안국가주의적 자유지상주의자', 나아가 '사회진화론적 자유지상주의자'라 할 수 있으며, 미국 정치사에서도 조지 워싱턴, 앤드류 잭슨, 로널드 레이건 같은 강한 군사국가관을 지녔던 인물들과 유사한 사상적 궤적을 보인다. 그의 세계관에서 국가는, 나아가 세계는 강한 힘으로 외적과 내부의 절대적 혼란을 억제하고, 나머지 부분은 완전한 자유 경쟁에 맡기는 존재인 것이다.

이는 암스트롱이 왜 스스로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지를 설명하는 중요한 맥락이기도 하다. 그는 단순히 무력을 숭배하는 인물이 아니라, 국가의 핵심인 군사력과 질서를 유지할 최강자로서의 자격을 스스로 갖췄다고 확신하며, 자신이야말로 그러한 '최강의 권력'을 행사할 유일한 적임자라 믿는다. 그의 논리에서는 국가란 결국 강자의 군사력과 결단력으로 유지되어야 하며, 최고의 권력인 미국 대통령 역시 그 누구보다도 강인한 육체적·정신적 능력과 철저한 미국식 자유지상주의 신념을 겸비한 인물이 맡아야 하는 자리로 규정된다. 즉, 무력적 최강자인 자신이 국가의 군사·안보권을 쥐고 통치하는 것 자체가 그의 사상적 체계에서는 '정상적'이며 '정당한' 질서인 셈이다. 이는 곧 암스트롱의 철학이 단순한 무정부주의나 무력 지상주의가 아니라, '힘을 통한 질서의 수호'라는 강력한 국가론에 입각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는 단지 암스트롱 개인의 독단적 신념이 아니며, 또한 그가 해군 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명백히 미국 정치 전통과 군사철학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실제로 미국은 건국 초기부터 "자유를 지키는 힘"을 국가 정체성의 핵심으로 삼아왔으며, 군사력 우위가 국가 생존의 필수 요소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특히 대통령이 국군통수권자(Commander-in-Chief)로서 강한 군사적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는 전통은 미국 정치의 핵심 축으로 작용해왔다. 암스트롱이 주장한 "강한 자가 국가를 지배해야 한다"는 신념 역시, 미국 내에서 오랫동안 존중받아 온 이러한 군사 중심주의와 '힘에 의한 평화'(peace through strength) 원칙과 맞닿아 있으며, 그의 철학이 단순한 극단적 상상이나 일탈이 아니라는 점을 방증한다.

더불어, 이러한 사고방식은 메탈기어 시리즈의 세계관 자체를 고려하면 오히려 매우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선택으로 받아들여진다. 메탈기어 세계관은 본래부터 무력과 암투, 전쟁이 일상화된 극단적 현실로, 초강대국과 PMC, 비밀조직들이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며 세계 질서를 뒤흔드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힘이 곧 질서이고, 무력의 부재는 곧 패망을 의미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보면, 암스트롱이 주장하는 '힘이 곧 정의'라는 사고방식이나, 최강자인 자신이 군사권과 통화권을 쥔 최소 국가의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은 오히려 세계관 내에서는 극히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즉, 현실 세계의 정치에 대입하면 분명 논쟁이 될 부분이지만, 그의 사상은 단지 비현실적 폭력 예찬이 아니라, 메탈기어라는 극단적 세계관 내 질서의 본질을 누구보다도 정확히 꿰뚫고 체현한 행동 철학이기도 한 셈이다.
2.2.4.5. 국민에게 지지받기 어려운 사상이다?
"암스트롱의 사상은 개인의 파편화를 초래하고, 결국 사회의 단결을 해치며 약육강식 논리 때문에 현실에서는 지지를 얻지 못할 것"이라는 비판이 한국에서는 자주 제기된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미국 사회의 특수한 역사적·문화적 맥락을 고려하면 딱히 그렇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미국인들은, 특히 메탈기어 서사 속 부패에 절어버린 미국 사회에서는 암스트롱과 같은 인물에게 더 열광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 유력하다. 또 이는 미국에서 암스트롱이 폭발적 반응을 이끌어낸 것에서 이미 증명됐다.

실제로도 작중에서 암스트롱은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기 전까지 노골적인 신자유주의민영화 정책과 무력 외교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는 미국 사회가 본래부터 자유지상주의적 가치관을 국가 정서의 핵심으로 삼고 있으며, 오히려 이런 체제 아래에서 국민들은 더욱 단결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을 명백히 드러낸 설정이다. 즉, 암스트롱식 사상은 미국 사회의 기반인 '자유를 통한 단결'이라는 독특한 국민 정서와 오히려 정합성이 높다. 암스트롱이 작중에서 본심을 숨긴 것은 대중의 눈치를 본 것이 아니라, 부패에 찌든 기득권층을 박살내기 전까지 기회를 노린 것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더 나아가, 실제 현실에서도 암스트롱과 같은 압도적 능력, 카리스마, 강력한 연설력, 단호한 결단력을 갖춘 정치인이 등장한다면 상당한 지지를 얻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미국인들, 특히 주류 백인 남성층과 중산층 이상 유색인종층은 상술한대로, 역사적으로 자신을 '개척자'이자 '자유를 쟁취하는 강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즉, 미국에서는 '강한 자가 자유를 쟁취하며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것'이 단결의 근간이기 때문에, 암스트롱의 철학은 미국식 '자유를 통한 연대'라는 특수한 사회적 조건에서는 오히려 폭넓은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매우 현실적인 사상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즉,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강자를 공격해야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논리는 미국 사회에서는 오히려 정반대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 정치문화에서는 강자가 지지를 잃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그가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시장을 과도하게 통제할 때뿐이다. 특히 앞서 서술한대로 미국 사회의 주류층인 백인 남성층과 중산층 이상 유색인종 계층은 스스로를 강자로 인식하고 있으며, '자유를 쟁취하는 개척자'이자 '자율적 주체'라는 정체성을 매우 강하게 의식한다. 그렇기 때문에 암스트롱처럼 이들의 정체성을 정확히 대변하며,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강력한 지도자상'의 정치인은 미국 사회에서 매우 높은 지지를 얻는 경향이 뚜렷하다. 대표적인 사례로 앤드류 잭슨, 로널드 레이건, 도널드 트럼프를 들 수 있다. 세 인물 모두 시장 자유화, 개인 책임 강조, 정부 축소를 앞세우면서도 강력한 군사력과 결단력을 지닌 지도자 이미지를 적극 활용해 대중의 폭발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 즉, 미국에서는 힘과 자유가 결합된 마초적인 리더십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통치 방식으로 받아들여지며, 암스트롱 역시 이런 미국적 지도자상을 극단적으로 구현한 인물로 평가받을 수 있다. 때문에 그의 철학은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니라, 미국 사회의 깊은 무의식에 내재된 정치적 욕망과 정서를 극단적으로 표출한 사례로 해석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민 다수를 약자로 인식하는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암스트롱의 사상은 협력을 해친다"는 인식이 자연스러운 반응일지 모르지만, 미국에서는 오히려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진다. 미국 사회는 독립전쟁, 서부개척, 산업 혁명, 제2차 세계대전, 냉전 등 역사 내내 "스스로 강자가 되어 자유를 쟁취한다"는 신념을 통해 위기를 돌파해온 국가이며, 국민 다수 역시 스스로를 약자가 아닌 '자유를 쟁취한 강자'로 인식해 왔다. 그렇기에 미국에서는 '강자의 자유와 자율'을 강조하는 사상이 사회를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발적 연대와 협력이 더욱 강화되는 구조가 형성된다. 미국 사회는 처음부터 '강한 개척자들의 연대'를 국가 존립의 근본으로 삼아왔고, 자유지상주의는 그러한 문화를 심화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해왔다. 실제로 미국 역사상 주요 위기에서는 강한 개인들이 스스로의 자유를 위해 결집해 싸운다는 '투쟁적 연대'의 담론과 구호가 정치 아젠다가 된 사례가 많다. 결국 미국에서는 암스트롱식 자유지상주의적 철학이야말로 오히려 사회를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위해 싸우는 강한 개인들의 자발적 협력'을 이끌어내는 이상적 가치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며, 한국에서 흔히 제기되는 비판은 미국의 정치·사회적 현실과는 완전히 엇갈린 평가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암스트롱이 메탈기어 라이징에서 반드시 막아야 할 악역으로 묘사된 이유 역시, 단순히 그의 사상이 극단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이는 메탈기어 시리즈가 제작된 당시 일본 사회의 특수한 정치·문화적 분위기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특히 당시 일본에서는 미국의 패권주의와 군사 개입을 비판하는 반미 정서가 강하게 확산되어 있었으며, 이는 메탈기어 시리즈 전반의 반전(反戰)·반미(反美)적 주제의식에도 깊게 스며들어 있다. 암스트롱이 자신의 철학을 전 세계에 강제로 실현하려 하는 장면은, 위에서 해설한대로 명백히 미국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군사 패권을 행사하며 세계 질서를 재편하려는 현실의 미국 외교 정책에 대한 은유로 해석된다. 특히 제작 당시인 2000년대 후반 일본 문화계는 좌파 성향의 반미 지식인과 창작자들의 영향력이 매우 강한 시기였고, 이에 따라 암스트롱 같은 캐릭터는 자연스레 "반드시 막아야 할 적"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결국 이는 미국 내에서 암스트롱이 오히려 강한 지지를 받는 것과는 대조적인, 문화적 시각 차이에서 비롯된 구조적 연출에 대한 반응 차이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암스트롱이 작품 내에서 '악'으로 묘사된 결정적인 이유는 단순히 그가 악한 정치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외국에 대한 무력 간섭과 개입을 정당화하며 이를 전 세계에 강제로 확산시키려는 태도에 있다. 이는 당시 일본 제작진의 외교관과 세계 질서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특히 일본 문화계에서 뿌리 깊은 반미 감정과 외세 간섭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 강하게 반영된 결과다. 즉, 암스트롱이 악역으로 규정된 가장 큰 이유는 그의 급진적 철학 자체보다는, 외국에 대한 무력 개입을 정당화하고 주권을 침해하려는 미국의 패권적 태도에 대한 일본 제작진의 본질적 반감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2.2.5. 미국식 자유지상주의 담론의 집결체

암스트롱의 속성을 미국 사회의 자유지상주의, 애국성과 반엘리트성, 레이거노믹스, 신자유주의, 아나코 캐피탈리즘, 자본주의적 보수성과 연관지어 비판적으로 분석한 Medium 논평
암스트롱과 트럼프의 사상적 연관성을 지적한 Kotaku 논평
암스트롱의 사상이 근본적으로 사회진화론적 자유지상주의에 기반하고 있음을 분석한 유튜브 자료

암스트롱이 북미권에서 강한 지지를 얻게 된 배경에는, 단순한 캐릭터성 이상의 시대적 분위기가 크게 작용했다. 그가 주목받던 시기인 2010년대 초중반은 미국 내에서 민주당 정부의 정치적 올바름(PC) 정책이 강화되고, 동시에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장기적인 경기 침체가 지속되던 시기였다. 특히 중산층의 붕괴와 경제적 불평등 심화, 그리고 급진적인 사회 규범 변화로 인해, 미국 사회 전반에는 '정부 간섭 최소화'와 '개인 책임 강조'를 내세우는 전통적 자유지상주의 담론이 다시 강하게 부상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암스트롱은 개인의 힘과 책임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며, 국가나 제도의 보호를 거부하고 오직 스스로의 신념과 힘으로 운명을 개척하라는 메시지를 던졌고, 이는 당시의 미국 사회가 느끼던 분노와 좌절감, 무력감에 정확히 부합했다.

결국 그의 인기는 단순한 폭력성과 카리스마 때문이 아니라, 당시 미국 사회가 처한 정치·경제적 위기 속에서 표면화된 불만과 좌절, 분노를 정면으로 건드린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암스트롱이 내세운 메시지는 단순한 자유지상주의적 이상을 넘어, 미국이 건국 이래로 추구해온 전통적 이상인 개인의 자유, 자립, 책임, 그리고 투쟁을 통한 자기 실현을 가장 극단적이고 노골적인 방식으로 체현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인기는 단순한 캐릭터적 매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국 사회의 가장 깊은 무의식 속에 자리한 자유지상주의적 욕망과 미국적 전통의 이상이 결합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암스트롱은 폭력적이지만 솔직한 방식으로 미국인의 원형적 정체성을 투사한 캐릭터였기에, 그의 인기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더욱 강하게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미국인의 정신을 대변하는 암스트롱의 연설은 실제 미국 정치에 대한 불신과 피로감을 느낀 북미권 게이머들에게는 매우 속시원한 내용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암스트롱의 직설적이고 강경한 연설을 본 미국 게이머들이 일본산 게임에서 이렇게 '미국적인 캐릭터'가 나올 줄 몰랐다며 암스트롱의 사상에 진지하게 감정이입하는 경우가 많은 이유가 이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의 연설문은 미국의 전통적 가치들을 매우 훌륭하게 대표하는 명연설문이다. 단적으로 유튜브의 MGR 최종보스전 영상이나 관련 밈 영상의 댓글만 살펴봐도, '수단은 틀렸지만 그 이상 자체는 옳다'는 의견이 다수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는 아시아권에서도 게임 에필로그에서 라이덴이 '자신의 신념에 어긋나는 악은 모두 직접 처단하겠다'고 선언하며 개인적인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결단을 내린 결말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이 많아지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즉, 이 결말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어진다는 점은 곧 암스트롱의 사상 또한 그저 '악역의 명분'으로 소비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라 할 수 있다. 즉, 암스트롱이라는 캐릭터가 남긴 충격과 여운은 단지 게임적 재미나 신선한 설정에 그치지 않고, 그의 사상과 철학 자체가 미국 사회와 전 세계 팬들 사이에서 일정한 공감과 설득력을 획득했음을 방증하는 셈이다.
2.2.5.1. 미국 헌법
스티븐 암스트롱과 그의 철학, 그리고 행보는 미국 사회와 이념, 그리고 정치 문화의 본질을 강하게 투영한다. 먼저, 암스트롱의 인게임 대사인 "정의는 인민의 손에 있다네, 잭!"과 "힘이 곧 정의다!"는 언뜻 서로 상반된 주장처럼 들릴 수 있지만, 사실 이 두 문장은 상반되기는 커녕 근본적으로 깊은 정통성을 공유하고 있다. 이는 미국 정치철학의 뿌리존 로크자연법 사상과 긴밀히 맞닿아 있다. 로크는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생명, 자유, 재산을 지킬 권리를 지니며, 정부는 오직 이 자연권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만약 정부가 그 의무를 저버리거나 권리를 침해할 경우, 인민은 폭력적 저항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정부를 전복할 권리가 있다고 역설했다. 암스트롱의 철학과 후술할 잭슨 민주주의적 혁명론 역시 바로 이 연장선 위에 있다. 그의 "정의는 인민의 손에 있다"는 선언은, 로크가 주장한 것처럼 인민 스스로가 애국자들의 유산을 박살낼 정의의 최종 주체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동시에 "힘이 곧 정의다"는 발언은, 그러한 정의 실현의 최종적 수단은 결국 개인의 힘과 행동(즉, 국민의 민의를 대표하는 암스트롱 자신과 라이덴, 더 나아가 플레이어들)이라는 냉혹한 현실을 직시한 선언이다. 이는 미국 헌법에 깊숙이 내재한 무장 저항권의 논리와 정확히 일치하며, 미국 역사에서 반복되어 온 '폭력을 통한 자유의 쟁취'라는 패턴을 가장 노골적으로 체현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결국 암스트롱의 철학 안에서 힘, 정의, 애국심, 저항권은 결코 모순되지 않으며, 오히려 후술할 체계들과 긴밀하게 맞물려 하나의 거대한 사상적 체계를 이룬다.
2.2.5.2. 잭슨 민주주의
그렇기에 정치 성향을 막론하고 암스트롱의 이상에 공감하는 미국인들은 매우 많다. 이는 단순히 그의 과격한 발언 때문이 아니다. 그의 사상은 미국 정치사의 근간을 이루는 잭슨 민주주의(Jacksonian Democracy)와도 강하게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잭슨 민주주의는 평범한 백인 시민들에게 정치 참여권을 부여하고, 강한 리더십을 내세워 부패한 엘리트와 특권층에 맞서는 정치운동으로 시작되었으며, 강력한 대통령의 권한을 활용해 기존의 의회 권력과 경제 기득권을 해체한 정치사상이었다. 암스트롱 역시 메탈기어 세계관에서 애국자들이라는 절대 권력 기득권 세력의 하수인이었던 기업, 정치권, 미디어를 폭력적으로 타도하고, 국민의 직접적 자유와 자율을 회복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이는 잭슨 민주주의의 인민 주권과 기득권 타도 전통을 현대적으로 강하게 계승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게다가 잭슨 민주주의는 단순히 대중 정치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전통의 자유지상주의 정신과도 깊은 연관을 지닌다. 앤드류 잭슨은 강한 중앙정부를 경계하고, 엘리트 관료제와 금융 귀족들이 장악한 체제를 해체하려 하며, '개인의 자유'와 '자기 책임'의 원칙을 정치 전면에 내세운 인물이었다. 이러한 철학은 미국 사회에 뿌리내린 고유한 자유주의 전통, 특히 정부 권한을 최소화하고 국민 개개인의 자율과 투쟁을 중시하는 사상과 직결된다. 즉, 잭슨 민주주의는 오늘날의 자유지상주의적 우파 정치 담론의 원형적 형태이자, 암스트롱이 구현한 '강한 개인 중심의 자유'라는 이상과도 깊게 맞닿아 있는 미국적 정치 유산인 셈이다.

암스트롱이 미국 우파 커뮤니티, 특히 도널드 트럼프 지지층들 사이에서 매우 강한 지지를 얻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발언들이 도널드 트럼프의 언행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도 한몫하지만, 더 본질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이는 트럼프가 앤드류 잭슨의 정치 노선을 계승한 정치인으로 평가받기 때문이며, 나아가 오히려 암스트롱의 방식이 트럼프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정치 스타일의 원형에 더 가깝다. 암스트롱의 사상은 표면적으로는 트럼프와 큰 차이가 있지만, '대중의 의지를 강하게 대변하는 언사'와 '강하고 결단력 있는 인물' 중심의 통치를 지향하는 그의 방식은, 트럼프의 정치적 노선의 본질을 더 근본적으로 실현하는 미국 정치문화의 뿌리인 셈이다. 즉, 암스트롱이 만약 현실의 정치인이었다면 농담이 아니라, 트럼프 본인과 그의 핵심 지지층이 오히려 그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도 평가된다. 암스트롱의 사상은 미국 헌법에 근거하여 부패한 엘리트들과 억압적 세계 질서에 대한 국민의 심판을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잭슨 민주주의와 정확히 맞닿아 있으며, 이는 트럼프 지지층들의 열광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한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강한 인물 중심 통치'와 '대중의 분노를 정치적 동력으로 삼는 스타일'이라는 점에서 둘은 상당히 닮아 있으며, 암스트롱의 극단적 자유지상주의와 민중주의 역시 트럼프 지지층의 성향과 맞물리는 지점이 적지 않다. 또한 대안 우파 진영 내에는 기존 기성 정치권과 LGBT 커뮤니티에 대한 반감이 강하고, Alt-lite 계열에는 리버테리안 성향도 많아, 암스트롱의 자유지상주의적 언행과 거친 정치철학이 자연스럽게 호응을 얻었다.[7] 따라서 자연스럽게도 그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쪽은 주로 대안 우파와 원수관계를 맺은 SJW 성향의 플레이어들이나 친 SJW 유튜버들이다. 그들은 암스트롱을 혐오 발언과 폭력성을 미화한 인물로 규정하며 비판을 쏟아내지만, 북미권 커뮤니티에서는 암스트롱의 사상이 단순히 트럼프의 아류가 아니라 미국 정치문화의 깊은 원형을 상징하는 독특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2.2.5.3. 사회진화론적 자유지상주의
한편, 그의 연설과 상술한 항목에서도 명시되었듯, 그의 사상이 미국 헌법의 근본 정신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음에 동시에, 암스트롱은 트럼프같은 단순한 보수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정치적 올바름(PC)뿐 아니라 기존 보수 윤리관의 나약한 측면 역시 부정하는, 철저한 사회진화론적 자유지상주의자(Social Darwinist Libertarianism)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는 '시련을 이겨낸 강자의 자유만이 진정한 자유이며, 약자는 도태를 피할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의 논리를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힘과 신념을 지닌 초법적 개인의 자율과 투쟁만이 인류의 진보를 이끈다는 사회진화론적 자유지상주의의 가장 극단적 본질을 망설임 없이 계승한 인물이다. 또한 그의 사상은 집단의 보호를 미덕으로 삼는 현대 사회의 도덕을 철저히 부정하며,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난관을 돌파한 자만이 살아남아 세상을 이끌 자격이 있다는 냉정한 신념을 통해, 인간 본성 깊숙한 곳의 투쟁 본능과 자유의 욕망을 강렬하게 일깨운다. 따라서 암스트롱은 전체주의를 지향하는 고전적 대안 우파와는 명백히 다르고, 자유지상주의적 보수주의를 추구하는 Alt-lite 진영과도 거리가 있다.
2.2.5.4. 신자유주의
또한 그렇기에 그의 철학은 매우 역설적으로, 현대 우파 전반의 지지를 널리 끌어모을 잠재력도 충분히 지니고 있다. 이는 그의 사상이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 본격적으로 확산된 미국 신자유주의의 가장 극단적이고 순수한 형태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암스트롱의 사상은 국가 권력을 철저히 축소하고, 오직 개인의 경쟁과 힘에 모든 책임을 돌리는 신자유주의적 신념 체계를 그 명분과 무자비한 실천을 포함해 가장 노골적이고 거칠게 구현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철학은 국가의 간섭을 배제하고 개인의 자유와 경쟁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신자유주의 사상의 가장 극단적이며 순수한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철학은 단지 과거의 시대상을 투영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미국 우파의 강한 공감과 지지를 얻는 데 유효하다. 실제로 미국 우파 내부에서는 점차 '자유지상주의적 개인주의'와 '힘의 도덕'을 결합하려는 흐름이 강해지고 있으며, 특히 아인 랜드의 철학이나 실리콘밸리 중심의 자유지상주의 문화의 확산 속에서 "정부 간섭 없는 극단적 자유"를 지향하는 신세대 우파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암스트롱은 단순히 트럼프적 포퓰리즘을 초월해, 오히려 현대 우파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신자유주의적 이상을 가장 선명하게 구현한 정치적 상징으로도 읽힐 여지가 있다.

따라서 암스트롱이 주장한 부패한 기득권과 구조를 타파하고자 하는 이상은, 단순한 파괴 충동이나 폭력적 급진주의가 아닌, 자유주의자들의 오랜 유토피아, 즉 일종의 "타락하지 않고 무한히 성장하는 위대한 시장"을 회복하려는 시도로도 해석된다. 그의 세계관에서 부패한 엘리트층과 정치권력, 정부의 과도한 개입과 그런 정부와 유착한 기업들은 모두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억누르는 주범으로 인식된다. 암스트롱이 지향한 사회는 법과 제도, 집단적 도덕을 뛰어넘어 오직 각자의 능력과 신념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는 자들만이 살아남는 완전 자유 경쟁 사회로, 이는 냉전 이후 미국 사회에 깊이 자리 잡은 자유시장주의 신화의 극한적 재현이기도 하다. 즉 그의 이상은, '비정상적 규제와 부패로 인해 뒤틀린 시장'을 정화하고, 개인의 자유와 무한한 가능성에 기반한 원초적 자본주의의 이상향을 복원하려는 극단적 선언으로도 읽힌다.
2.2.5.5. 미국 보수주의
또한 암스트롱의 철학은 표면적으로는 기존의 보수주의 윤리관을 부정하는 듯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오히려 깊은 곳에서 보수주의자들의 심층적 욕구를 마주하게 하는 요소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비록 그는 나약한 전통적 도덕이나 안일한 보수적 관습을 강하게 비판했지만, 동시에 강력한 관념, 즉 애국심, 자본주의, 경쟁, 질서, 국민의 단결, 국가안보 같은 보수주의 세계관의 오랜 전통적 가치들은 그의 철학 속에서 강한 정당성을 부여받으며 더욱 원초적이고 강력한 형태로 재구성된다. 특히 "힘을 통해 질서를 회복하겠다"는 그의 신념은, 혼란스러운 세상을 극복하고자 하는 보수주의자들의 본능적 욕망, 즉 강한 리더십을 통한 국가적 안정과 자본주의적 정복에 강한 고양감과 정당성을 부여한다. 결국 그의 사상은 단순한 급진적 자유지상주의를 넘어, 오히려 '힘의 회복을 통한 보수적 질서 재건'이라는 강렬한 메시지로도 읽히며, 이는 오늘날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그에게 묘한 동경을 품게 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따라서 미국 정치에서 보수주의와 자유지상주의가 자주 결합하는 현상 역시 이러한 속성에서 비롯된다. 미국식 자유지상주의는 단순히 개인의 자유만을 외치는 사상이 아니라, 암스트롱처럼 극단적이고 원초적인 자유지상주의가 강하게 주장될수록 오히려 애국심, 자본주의, 질서, 국가안보와 같은 보수주의의 핵심 가치들이 더욱 강력한 정당성을 부여받게 되는 구조를 갖는다. 이는 '자유의 극단'으로 가면 갈수록, 오히려 '강한 국가'와 '질서'의 가치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미국식 정치 담론의 독특한 역설로도 볼 수 있다. 즉, 자유지상주의가 극단으로 치달을수록 그것은 단순한 무정부적 이상향이 아니라, 힘 있는 국가와 국민의 단결, 그리고 강자의 리더십을 통한 질서 확립이라는, 보수주의자들의 깊은 욕구와 본능적 충동을 더욱 강렬하게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암스트롱 역시 그러한 메커니즘의 정점에 선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즉, 상기했듯이 암스트롱이 실제 인물이었다면, 사상적 일관성보다는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정치 선동으로 움직였던 트럼프와 그의 지지층은 물론이고, 현재의 신자유주의자보수주의자들조차도 결국 그의 가장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을 가능성조차 있다. 비록 암스트롱의 철학은 기존의 보수주의와는 결이 다르지만, 그가 표방하는 극단적 자유주의와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투쟁’이라는 논리는, 오히려 현대 우파 정치의 심층적 욕망, 즉 강한 지도자에 대한 집착, 타락하지 않은 순수 시장의 귀환, 그리고 힘을 통한 질서 회복의 열망을 가장 직설적이고 원초적인 방식으로 충족시키는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2.2.5.6. 아나코 캐피탈리즘
고로 암스트롱의 철학에 따라 그가 집권했을 시의 사회를 미국 팬덤이 예측한 바에 따르면, 그의 미국은 본질적으로 개인 간 자유 경쟁과 자율 무력행사가 정당화되는 완전한 아나코 캐피탈리즘(Anarcho-Capitalism) 사회로, 기업에 지배받지 않는 PMC 간의 결투 사회 혹은 민병대 중심의 자유시민 사회로 수렴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여겨진다. 이는 결국 국가가 최소한의 질서와 국방만을 담당하고, 평상시에는 자유계약과 개인 무력을 통한 문제 해결이 허용되는 일종의 네오 서부개척시대의 재현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사회 역시 완전한 무정부 상태는 아니며, 국가적 위기나 외부 침략이 발생했을 때는 스티븐 암스트롱이라는 최강자이자 강력한 대통령, 그리고 그가 이끄는 군대가 직접 나서 질서를 수립하고 외부 적을 격퇴하는 체계가 작동할 가능성이 높다. 즉, 일상에서는 아나코-캐피탈리즘적 자유와 경쟁, 무장권이 지배하지만, 위기 시에는 대통령이라는 초월적 리더가 등장해 직접 행동에 나서는 이중구조의 사회가 될 가능성이 크며, 이는 미국의 개척시대 전통과도 맞닿은 모습이다.

물론, 한국인을 비롯한 동아시아권 게이머들에게는 이 같은 사회상이 무정부적이고 극단적으로 위험한 디스토피아처럼 보일 수 있다. 따라서 일본에서 제작된 게임인 메탈기어 라이징에서 결국 주인공 라이덴이 암스트롱을 막아서는 전개로 흐른 것도, 문화적 차이를 감안하면 어쩌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 볼 수 있다. 이는 미국과 동아시아의 히어로상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른 사상적 기반 위에서 형성되어 왔기 때문이다. 미국의 히어로물은 전통적으로 정부나 국가 권력의 개입을 강하게 경계하며, 개인의 책임과 자유를 앞세운 '자유의지의 영웅'을 선호한다. 반면, 동아시아의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는 히어로가 정부, 공권력, 또는 사회적 기관의 통제를 어느 정도 인정하거나, 심지어 그 지침에 따라 움직이는 경우가 흔하다. 이는 공동체 조화와 질서를 중시하는 동아시아 특유의 가치관을 반영한 것이며, 메탈기어 라이징 역시 일본적 시각에서 '통제되지 않는 사회'를 추구하는 암스트롱을 반드시 제압해야 할 존재로 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미국 내에서는 실제로 오히려 암스트롱이 제시한 사회상이 오랜 신자유주의 및 자유지상주의 전통이 추구한 궁극적 유토피아상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것도 사실이다.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의 최소국가론(Minimal State Theory)이나 머리 로스바드(Murray Rothbard)의 아나코 캐피탈리즘 철학에서 주장한 것처럼, 국가는 최소한의 틀만 유지한 채, 각 개인과 민병대, PMC 등이 자유롭게 경쟁하고 필요할 때는 무력 행사도 정당화되는 사회야말로 '진정한 자유'의 이상향으로 여겨지는 흐름이 미국 자유주의 철학 안에 깊게 뿌리내려 있다. 즉, 찬반을 떠나서, 암스트롱이 구현하려 한 사회는 단순한 광기나 폭력이 아니라, 정말로 미국 사상사의 연장선상에 있는 명백한 이상향이기도 하다. 따라서 미국 팬덤에서는 암스트롱을 단순한 악역으로만 보지 않고, 오히려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는 미국의 원형적 가치관을 가장 극단적으로 구현한 인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일부 팬들은, 암스트롱이 제시한 사회야말로 미국의 본질적 이상에 부합한다고 주장하며, 라이덴이 오히려 '기득권 체제의 대리인'으로서 암스트롱의 이상을 억누른 것 아니냐는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기도 한다. 즉, 미국적 맥락에서는 암스트롱의 사상이 광기가 아닌 정당한 이상으로 여겨질 수 있으며, 이는 문화권에 따른 평가의 깊은 차이를 보여준다.
2.2.5.7. 자유지상주의적 트랜스휴머니즘
암스트롱의 사상에서 주목할 점은 그의 철학이 미국식 자유지상주의를 넘어, 니체적 초인 사유와 트랜스휴머니즘의 결합으로도 해석된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본성과 사회구조가 이미 타락한 권력에 의해 억압되고 있다는 인식 아래, 인류 스스로가 자신의 한계를 돌파해야만 진정한 자유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니체가 말한 "초인의 탄생"과 일치한다. 암스트롱은 이를 단순한 정신적 극복에 그치지 않고 물리적 진화, 즉 인공적 강화와 생체개조를 통해 실현하려 한다. 특히 그가 신체적 약자일 수밖에 없는 아이들조차 강화하여 최소국가적 자유의 세계에 세우려 했다는 점은, 단순한 병기화가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자유를 위한 투쟁능력을 부여한다"는 목적의식을 보여준다. 이는 연민이나 보호가 아닌, 모든 존재가 스스로의 힘으로 운명을 개척할 자격을 가져야 한다는 철저한 능력주의적 해방론이다. 이는 곧, 기술을 통해 인간의 모든 나약함과 '노예 도덕'을 정당화해온 감성주의를 극복하겠다는 메시지로도 해석될 수 있다. 즉, 암스트롱은 인류의 진화를 외부 구조나 선의에 맡기지 않고, 의지와 기술을 통해 스스로 진화해야 한다는 트랜스휴머니즘적 초월론을 실천한 셈이며, 이는 기존 인간상에 대한 근본적 해체이자 철학적·과학적 자유지상주의의 급진적 종합체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암스트롱식 사유는 단순한 허구적 설정이 아니다. 이는 최근 미국 사회에서 실제로 주목받고 있는 사상적 흐름과도 깊이 맞닿아 있다. 특히 실리콘밸리와 미국의 테크 엘리트들 사이에서 부상 중인 "자율적 인간의 강화", "능력주의적 진화", "기술을 통한 자기 초월"이라는 담론은, 전통적 자유지상주의에 트랜스휴머니즘과 니체 철학을 결합한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피터 틸이나 일론 머스크와 같은 인물들이 주창하는 미래 비전 속에는, 약자를 단순히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강화하고 경쟁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이상이 내포되어 있으며, 이는 곧 강화된 개인의 책임과 자유를 중시하는 새로운 형태의 '능력 기반 자유주의'로 이어진다. 암스트롱의 철학은 바로 이러한 흐름을 극단적이고 상징적인 방식으로 선취한 사례로 볼 수 있으며, 가상의 인물이지만 그의 사상이 오늘날 현실 정치와 기술철학의 접점에서 점점 더 현실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동시에, 암스트롱이 자신의 철학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행한 극단적인 방식은, 미국 사회에 대한 제작진들의 근본적인 비판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즉, '자유'와 '책임'을 절대시하며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자기 개척의 의무를 부과하는 사고방식은, 사회적 약자에게조차 경쟁과 투쟁을 강요하는 미국식 자유주의의 그림자를 드러낸다. 암스트롱이 아이들마저 전장에서 싸울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면은, 단순한 극단주의의 상징이 아니라 산업 혁명기 미국이 어린이들을 값싼 노동력으로 동원했던 역사, 그리고 오늘날에도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이 제3세계 어린이들을 착취하며 '자유 시장'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메타포로 읽힐 수 있다. 즉, 자유의 이름으로 약자를 강화시키겠다는 명분 아래, 약자를 치열한 투쟁에 내몰고 착취하는 구조적 모순은 미국 자본주의자유주의의 근본적 모순을 드러내며, 이는 미국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도 바라볼 수 있는 이유다.

2.2.6. 니체와 자유지상주의의 절묘한 융합

이런 맥락에서, 심지어 암스트롱의 철학에서 가장 비판받는 '약육강식' 논리조차도, 실상은 놀라울 정도로 치밀한 사상적 기반과 철저한 논리를 바탕으로 정교하게 작동하고 있다. 이는 그의 발언의 단순한 개인주의적 구호를 넘어, 미국 우파 일각에서 주장하는 전통적인 문명사적 사회진화론 논리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윌리엄 그레이엄 섬너, 프레드릭 잭슨 터너, 머리 로스바드 등 미국의 보수·자유주의 진영 내 일부 사상가들은 오래전부터 "문명의 발전은 '약육강식'의 역사"라고 정의해왔다. 그들은 인류 문명의 발전은 오직 강자의 투쟁과 개척, 약자의 도태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며, 사회적 약자 보호와 평등주의를 문명의 '퇴보'로 간주한다. 암스트롱의 철학 역시 '힘없는 정의는 환상이고, 자유를 지킬 수 없는 평화는 허상'이라는 사상을 반영하며, 오직 강자의 신념과 행동이 문명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철학은 곧 '스스로 싸우고 쟁취하지 않는 자는 자유를 누릴 자격조차 없다'는 사회진화론적 자유지상주의의 신념을 극단적으로 압축한 것으로, 이는 일부 우파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문명은 약자의 보호가 아니라 강자의 투쟁으로 진보한다"는 통념을 게임 내 세계관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구현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결국 그의 발언은, 오늘날 우파 일부가 주장하는 "약자를 위한 평등의 시대는 문명의 쇠퇴기이며, 강자의 시대야말로 인류의 정상 상태"라는, 꽤나 위험하지만 완전히 반박하기도 어려운 문명론적 논리 역시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더해, 암스트롱이 언급한 "모든 인간은 국가, 기업, 도덕을 넘어 각자의 전쟁을 치를 수 있어야 한다"는 사상은, 명백히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 특히 '힘에의 의지'와 '초인(Übermensch)' 사상을 강하게 반영한 것이다. 니체는 인간이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선 기존의 도덕과 질서를 넘어, 스스로의 의지와 힘만으로 삶을 개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니체가 주장한 '노예도덕'과 '강자도덕'의 구도 속에서, 미국의 자유지상주의는 이를 자신들의 정치·사회 체계에 절묘하게 흡수했다. 자유지상주의는 약자의 도덕적 피해의식과 복종을 거부하며, 강자가 자신의 힘과 의지로 운명을 개척하고 사회를 이끄는 것을 정당하고 자연스러운 질서로 받아들인다. 즉, 약자는 국가, 도덕, 사회제도의 보호를 요구하며 '노예도덕'을 따르지만, 진정한 자유지상주의적 강자는 그런 보호를 거부하고, 오직 자신의 힘과 책임으로만 운명을 개척하는 '강자도덕'을 따른다. 나아가 이러한 사고방식을 미국의 문명사적 사회진화론 관점으로 확장하면, 결국 강자들의 의지와 힘으로 구성된 사회가 더욱 강인하게 진화하며 끝까지 생존하고, 반대로 약자의 도덕과 보호만을 의존한 사회는 장기적으로 정체와 쇠퇴를 거쳐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해석으로 이어진다. 이는 미국 내에서 오랫동안 회자된 도전과 응전을 통한 문명의 발전이라는 담론과도 맞닿아 있으며, 국가나 사회 역시 강인한 개인들의 투쟁 본능과 자기 책임 의식을 얼마나 수용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갈린다는 관점으로 귀결된다. 암스트롱의 철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자유지상주의와 니체 사상의 접점을 집약하며, 약육강식의 논리를 '인류 본성의 회복'이라는 이상으로 재해석한 셈이다.

실제로 암스트롱의 연설 중 등장하는 구호인 "그리고 그 잿더미 위에서 새로운 미국이 태어날 것이다. 진화했지만, 길들여지지 않은 채로!"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깊이 연결된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약자 도덕과 부패한 기존 질서를 모두 불태우고, 오직 강자들의 의지와 투쟁을 통해 다시 태어난 '새로운 미국'을 예고하는 발언이다. 여기서 '진화'는 단순한 기술적 발전이나 정치 개혁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강자의 도덕과 자유지상주의적 개인주의를 내면화한 상태로 진보하는 것을 의미하며, '길들여지지 않은 채로'라는 표현은 국가나 제도, 기존 도덕으로부터 억압받지 않고 스스로를 규정하는 개인들의 자유롭고도 투쟁적인 사회상을 암시한다. 이 구절은 곧 암스트롱이 추구한 철학의 핵심, 즉 문명사적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강자들의 새로운 사회질서'를 압축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또한 이러한 철학은 암스트롱의 세계관에서 개인의 윤리를 넘어, 명백히 현실주의 정치학의 차원으로 확장된다. 암스트롱의 사상에 따르면, 니체적 주체성을 회복한 개인들의 투쟁 본능과 자기 책임 의식은 단순히 개인의 자유 실현을 넘어서, 사회 전체의 활력을 유지하고 외적의 침입이나 억압적 권력의 등장도 억제하는 근본적 방어 체계로 작동한다. 즉, 각 개인이 강한 주체성과 자율성을 지닌 사회는 내부적으로 강한 면역력을 지니며, 외부의 위협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반면, 주체성을 상실한 사회는 약자의 도덕을 미덕으로 착각하며, 스스로 억압적 체제나 권위주의를 수용하고 내면화함으로써 자유를 상실하고 점차 무기력해진다. 결국 이러한 사회는 더욱 강한 주체성을 지닌 국가나 집단에게 종속되거나 소멸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 암스트롱의 철학은 바로 이 냉혹한 사회진화론적 정치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개인의 자유'와 '투쟁 의지'가 곧 국가의 존망을 좌우하는 절대적 가치라는 신념으로 귀결된다. 이는 그가 주장한 약육강식의 논리가 단순한 폭력 미화가 아니며, 오히려 인류와 사회의 본질적 생존 본능을 일깨우는 정치적 경고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은 미국 우파 정치·문화 전통에서도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결합되어 왔다. 미국 사회는 초기부터 개인주의, 개척 정신, 자본주의적 경쟁을 핵심 가치로 삼아왔고, 20세기 후반 이후로는 니체의 초인 사상을 '자기 책임'과 '자유 경쟁'의 미덕으로 받아들인 흐름이 점차 강화되었다. 특히 상기한대로 로널드 레이건 시기의 신자유주의 흐름 속에서, 니체의 철학은 미국적 자유주의의 강한 개인주의와 자연스럽게 융합되어 현재의 실리콘벨리 자유지상주의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강화되고 있다. 즉, 암스트롱은 바로 이 초인 사상과 미국적 정체성의 융합이라는 오랜 역사적 전통을 놀라울 정도로 완성도 높게 구현한 존재로 평가된다. 그의 철학은 미국식 자유지상주의와 니체주의가 결합해 탄생한 정치·문화적 흐름의 가장 극단적이면서도 순수한 결정체로, 그야말로 현 시대를 지배하는 '미국'이란 국가의 이상과 야망을 집약한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암스트롱은 미국적 자유주의와 니체적 초인 사상이 오랜 세월 동안 교차하며 만들어낸 '강자의 의지로만 세계를 개척할 수 있다는 냉혹하고도 장엄한 진실'의 집약체라 평할 수 있는 셈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암스트롱의 니체주의적 힘에의 의지 발언과 자유지상주의 철학이 재조명되며, 과거의 논쟁적 이미지를 넘어 '예언자적 캐릭터'로 재평가받는 흐름까지 나타났다. 상술했듯이, 최근 아인 랜드 사상이나 실리콘밸리의 테크 리버테리언 아나키즘, 아나코 퓨처리즘(Anarcho-Futurism)처럼, 우파 자유지상주의와 니체적 '힘의 철학'이 실제 미국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결합하는 흐름이 두드러진다는 점 때문이다. 심지어 암스트롱이 기술력과 과학을 매우 중시하며 이를 통해 개인의 힘을 극대화하려는 사고방식을 보인다는 점에서, 일론 머스크를 비롯한 실리콘밸리 신흥강자 자유지상주의자들과도 철학적 접점을 지닌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암스트롱의 극단적 자유지상주의와 '힘의 도덕'은 단순한 게임 속 과장이 아니라, 오히려 미국 사회의 깊은 무의식을 선취한 예언적 캐릭터로 볼 수 있다. 그는 단지 밈 캐릭터가 아니라, 미국 사회 깊숙이 자리한 현실적 욕망과 이념적 이상을 집약한 하나의 상징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셈이다.

2.2.7. 극우 여부

먼저 알아두어야 할 점은, '진보와 보수' 그리고 '좌파와 우파'는 서로 다른 맥락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는 특정 제도나 체제에 대한 변화의 방향을 기준으로 구분되며, 기존 제도를 개혁·변화시키려는 입장은 진보, 그 제도를 유지·보존하려는 입장은 보수로 분류된다. 반면 좌파와 우파는 현재의 체제 자체에 대한 철학적·이념적 태도를 가리키며, 동일한 체제 속에서도 그 체제를 이상적으로 보느냐, 아니면 비판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나뉜다. 따라서 진보·보수는 좌우파와 무관하게 상황에 따라 위치가 달라질 수 있는 개념이고, 좌파·우파는 체제 자체를 중심으로 한 보다 근본적인 이념적 차이를 드러내는 개념이다. 즉, 무엇이 '진보'이고 '보수'인지는 좌우파를 떠나서 시대나 사회가 어떤 제도를 당연시 여기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8]

암스트롱을 현실 정치에 단순히 대입할 경우, 확실히 극우 포퓰리스트처럼 보일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자유지상주의를 바탕으로, 약육강식의 논리를 주장하며, 폭력 정당화도 서슴지 않는다. 이러한 요소들은 현실 정치에서 극우적 코드로 인식되기 쉬운 특징이다. 특히 그의 발언과 철학은 강한 애국심, 개인의 책임 강조, 자유 경쟁, 그리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냉소적 시각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는 국가주의와 공동체주의를 강조하는 한국의 극우와는 상반되는 특징이지만, 현존하는 아메리카권의 극우 성향 정치인들과 닮은 점이 적지 않다. 표면적으로 보면 그는 '강한 자가 지배하는 사회'라는 명분 아래, 강압적이고 배타적인 사회 질서를 정당화하는 전형적인 극우형 지도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암스트롱의 연설에 강한 거부감을 느끼며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 게이머들 다수가 좌파 성향을 지닌 경우가 많았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우파 자유지상주의와 사회진화론적 경쟁 논리를 정당화하며, 약자의 보호나 평등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체계에 기반하고 있다. 좌파 성향 게이머들은 대체로 사회적 약자의 권익 보호, 복지, 평등한 구조 개선을 중시하는 만큼, 암스트롱의 철학이 제시하는 극단적 자유 경쟁과 강자 중심 질서에 본능적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한국의 좌파 게이머들에게 그가 아무리 위협적으로 느껴지더라도, 메탈기어 세계관 내에서 암스트롱의 위치는 이러한 '극우'라는 단순한 분류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메탈기어 시리즈의 미국은 이미 애국자들(The Patriots)이라는 초국가적 집단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기술독재적이고 철저하게 부패한 권위주의 체제이다. 이 세계관에서는 민주주의조차 껍데기에 불과하며, 군산복합체, 정경유착, 정보 통제, 감시사회가 일상화된 상황이다. 즉, 메탈기어 세계관의 미국은 현실의 자유민주주의 국가와는 전혀 다른, 철저히 기형화된 권위주의 체제의 국가다. 그리고 암스트롱이 처단하려는 상대들은 이미 현실의 극우나 보수층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부패한 지배층으로, 이들은 '전통(보수)적 가치'를 내세워 자신들의 부패한 기득권 구조를 정당화하고 더욱 공고히 하는 세력들이다. 암스트롱은 이 구조를 '폭력'을 통해서라도 뒤엎고자 하는 인물로, 기득권 엘리트들을 모두 쓸어버리고 인민 각자가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사상은 분명 폭력적이고 독단적인 성격을 띠지만, 작품 내 세계관에서는 부패한 독재적 통제 체제를 전복하려는 '급진적 반체제 인물'로 기능한다.

따라서 암스트롱은 단순한 극우 정치인이 아니라, 앤드루 잭슨이나 배리 골드워터처럼 미국 역사에서 급진적 전환기를 주도했던 인물들과 유사한, 극단적 자유지상주의 혁명가로 평가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메탈기어 내에서는 그가 오히려 기존의 모든 지배층과 맞서 싸우는 급진 개혁자로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또한 미국은 자유지상주의라는 급진적 혁명 이념을 기초로 건국된 국가이기 때문에, 암스트롱과 성향이 비슷한 잭슨과 골드워터뿐만 아니라 보수 진영에서 로널드 레이건이나 도널드 트럼프와 같이 '우파 혁명가'를 자처하며 기존 권력 구조와 세계 질서에 급진적 개혁을 요구하는 인물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9] 반대로 리버럴 계열의 진보 세력은 점진적 개혁을 추구하며 상대적으로 온건한 노선을 취하는 경향이 강하며, 이러한 타 국가들과 반대인 이념적 역전 구조는 미국 정치사에서 꾸준히 반복되어 왔다. 이는 미국이나 소련처럼 근대 혁명 이데올로기를 '수출 가능한 사상'으로 체계화한 근대 패권국들에서 나타나는 전형적 특징으로, 이것이 시민혁명 이후 등장한 초강대국들이 기존 구대륙의 역사적·정치적 구도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독자적이고 역동적인 이념 구조를 형성하는 근본적인 이유다.[10]

또한 암스트롱이 명백하게 우파적 정치관을 지녔으나 미국 내에서는 흥미롭게도, 암스트롱의 사상에 좌파 성향의 일부 플레이어들조차 일정한 공감을 보이기도 한다. 이는 그가 주장하는 철학이 단순히 극단적 자유 경쟁이나 무력의 정당화에만 머무르지 않고, 인종주의, 금권 정치, 전체주의 같은 전통적인 수구적 요소들과는 완전히 단절된, 매우 순수하고 원초적인 '미국의 본질적 이상'과 '개인의 자기실현 이상'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암스트롱의 철학은 오직 개인의 자유와 책임, 그리고 각자의 힘을 통한 자기 개척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이는 이념을 넘어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고 투쟁하는 인간'에 대한 본능적 동경을 자극하는 지점으로 작용한다. 실제로 좌파 내부에서도 국가 권력이나 기득권 세력에 대한 반감, 기존 체제에 대한 회의, 자기 결정권의 강화 요구가 강한 계층일수록 암스트롱의 투쟁 정신과 자기 책임론에 일정한 긍정적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나타난다. 특히, 그의 철학이 모든 억압적 요소를 배제한 채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만 운명을 개척한다'는 점은 좌파적 자기 해방론의 일면과도 맞물려, 그의 모든 주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일정한 지지를 설명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결국 스티븐 암스트롱이라는 인물의 정치적 위치는 명확한 좌우파 구분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사상적으로 보면, 암스트롱은 개인의 자유와 강인함을 강조하며, 약자는 도태되고 강자가 지배하는 세계를 지향하는 극단적 자유지상주의적 우파 사상을 지니고 있다. 특히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그의 신념은 철저히 개인 책임론에 기반한 전형적인 우파적 가치관이다. 그러나 정치적 행동으로 보면, 암스트롱은 기존 체제의 철저한 전복을 목표로 하는 급진적 반체제 인물이자, 기득권 지배층을 폭력으로 무너뜨리려는 '급진적 혁명가'로 기능한다. 그는 부패한 독재 체제를 무너뜨리고 근본적 변혁을 추구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진보적·혁명적 위치에 서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정리하면, 암스트롱을 현실 사회에 그대로 대입하면 사상적으로 극우적 자유지상주의자이지만, 메탈기어 내의 세계관에서 정치적으로는 기존 체제를 전복하려는 급진적 혁명가이며, 따라서 우파적 가치관을 지닌 급진적 진보주의자로서의 모순적 위치에 놓여 있는 인물이다. 이는 그가 메탈기어 시리즈 내에서 독특한 존재감을 갖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는 흥미롭게도, 미국 정치사에서 상기한 잭슨 민주주의 창시자인 앤드류 잭슨이 걸어온 길과 매우 유사한 구도다. 잭슨은 당시에는 민주당 소속으로, 평범한 백인 남성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고, 기득권 엘리트에 맞서 싸운 '민중의 대통령'으로 불렸지만, 현대 미국에서는 오히려 공화당과 우파 정치인들(특히 도널드 트럼프)이 그를 이상적 정치인의 전형으로 존경하고 있다. 이는 그가 자유방임주의자인 동시에 강력한 중앙 권한과 대중의 의지를 결합한 미국의 원형적 통치구조를 구현했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암스트롱 역시 메탈기어 세계관에서 부패한 체제에 맞서 폭력적으로나마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한 인물로 묘사된다. 만약 그의 개혁이 성공했다면, 초기에는 잭슨처럼 좌파 측에서 '극단적이지만 강력한 개혁자'로 기억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우파 진영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지닌 전설적 인물'로 재평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에는 독재자나 위험한 폭력주의자로 비난받았을지라도, 시간이 지나고 그의 개혁이 남긴 영향이 미국적 가치와 결합된다면, 암스트롱 역시 미국 정치사의 강렬한 상징으로 자리 잡았을 가능성을 충분히 상정할 수 있다. 즉, 어찌 보면 진정한 의미에서 좌우 이념을 초월해, 미국의 원형적 정신을 가장 극단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지도자였던 셈이다. 그가 니체의 초인(Übermensch)을 상징하는 인물로도 자주 해석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더욱 의미심장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그럼에도 상기한 단락에서 알 수 있듯이, 다르게 보자면 물론 암스트롱의 이런 면이 약자에게 잔혹할 정도로 힘의 논리를 강요하는 미국의 현 상태를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으며, 나아가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는 강자만 소위 그 주권자인 '인민'이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사회적 안정성이란 시니컬한 측면에서도 배려가 아예 없는 미국식 자유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이런 이야기가 나와야 할 미국이 아니라 일본에서 만든 게임에 현대 미국 사회의 각종 고뇌나 번민, 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논쟁을 축약하다시피 했으며 긍정적으로 봐도, 개그성 밈으로 봐도, 비판적으로 봐도 너무나 잘 만들어진 캐릭터가 튀어나온 것이다.

사실, 스티븐 암스트롱이라는 가상의 캐릭터를 두고 '극우' 여부를 두고 미국과 한국에서 서로 다른 시각의 논쟁이 벌어진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캐릭터가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된지를 방증한다. 이는 단순히 그의 발언이 정치적으로 자극적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담고 있는 철학과 세계관이 지나치게 현실 정치와 정교하게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메탈기어 라이징의 서사와 메탈기어 시리즈의 철학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암스트롱을 현실 정치의 프레임에 무의식적으로 대입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입체적이고 완성도 높은 캐릭터인지 드러난다. 즉, 암스트롱은 단순한 악역을 넘어, 정치적 맥락을 떠나도 계속해서 논쟁을 낳을 정도로 '현실 정치와 인간 본성의 심연'을 건드린 캐릭터이며, 이 점에서 그의 존재는 너무도 잘 만들어진 사례라 할 수 있다.

2.2.8. 자유주의를 총망라하는 철학과 강자들을 아우르는 리더십

또한 암스트롱은 단지 강한 힘을 가진 정치인이 아니라, 데스페라도 간부들처럼 '산전수전 다 겪은 강자들'조차 그를 충실히 따르고 깊이 공감할 만큼 강력한 신념과 리더십을 지닌 인물로 그려진다. 각 챕터 보스들과 라이덴의 뼈가 있는 대화는 이 점을 잘 보여주며, 암스트롱의 이상이 결코 단순한 권력욕이 아니라, 그들의 다양한 사상과 경험을 아우를 수 있는 철학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그 뼈대를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1. LQ-84i(=블레이드 울프): 본의는 아니지만 웬만해서는 명령엔 조금의 의문도 품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얻을 수 있는 것은 그저 대가를 치뤄야하는 것과 그에 따른 파멸 뿐이다. 그러니 너는 여기서 죽어줘야겠어.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면 그러한 명령에 대한 의무감으로 싸우는 나를 어디 한번 이겨봐라. 애초에 너도 나처럼 행동하지 않은 적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지만.
LQ-84i는 데스페라도 엔포스먼트 소속 시절, 미스트랄의 통제 아래 '명령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내면화하고 있었다. 그의 기억은 명령 위반 시 자동으로 소거되도록 설정되어 있었고, 이는 사실상 자유의지를 봉쇄당한 상태였다. 그는 라이덴과의 대결에서 이러한 조건을 전제로 "명령에는 의문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수행하는 그 명령의 정당성을 강자의 힘에 의해 반박받고 증명되기를 바라는 모순된 자세를 보인다. 이 장면은 신념없이 사는 순응주의의 한계를 드러내는 동시에, 암스트롱의 핵심 사상, 즉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만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논지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LQ-84i는 단순한 전투 인공지능이 아니라, 권위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는 존재가 어떻게 자율적 사고로 전환되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적 사례다. 그는 라이덴과의 싸움, 독토어와 동료들에 의해 목줄이 해제된 경험, 무엇보다 호드리게스의 자유주의적 신념으로부터 점차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로 각성하며, 이는 결국 명령에 복종만 하던 약자조차 자율적 판단력을 통해 '강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드러낸다.

결과적으로, 블레이드 울프는 암스트롱이 말하는 '신념을 갖고 자기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개인'이란 이상을 충족시켜가는 과정 그 자체이며, 작품 전체에 흐르는 자기결정권과 정신적 해방의 철학을 구체적으로 구현해낸 중요한 서사적 장치다.
2. 미스트랄: 전장에서의 싸움의 결과는 약자든 강자든 상관없이 죽음으로 이끌 뿐이지. 너 역시 결국에는 이상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고는 해도 그 시시한 이상에 분수도 모르고 무참한 살육을 동반한 주제에 언제까지고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네 명분은 곧 네 목적이 아닌 폭력의 수단으로 전락할 거야.
미스트랄은 라이덴이 내세우는 '정의'와 '이상'이 결국 전장에서 피로 얼룩지고, 스스로도 폭력을 정당화하는 데 쓰이고 있음을 경고한다. 그녀는 "명분은 곧 폭력의 수단이 된다"는 말을 통해, 도덕적 명분조차 결국 피로 증명되는 세계에서는 이념 자체가 공허한 구실이 되며, 누가 '정의'인가를 따지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냉소주의를 드러낸다. 이러한 발언은 단순한 이상주의 비판을 넘어, 이념이 체계적으로 타락하는 구조, 즉 현실 권력 속에서 이상이 어떻게 왜곡되고 소비되는가를 지적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이데올로기의 내재적 부패 가능성을 경고하며, 명분과 신념조차도 진정한 자아로부터 비롯되지 않으면 타인에 의해 조작되고 휘둘릴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암스트롱이 말하는 '자기 신념을 따르는 강자'란, 바로 이러한 구조에서 벗어나 남이 부여한 이상이 아닌, 자신이 체득한 신념과 힘을 스스로 증명하는 존재다. 미스트랄은 이러한 세계의 잔혹함을 경험한 자로서, 누군가의 정의를 대신해 싸우는 '대리 투쟁'에 대한 허무를 내비치고, 결국 자신만의 방식으로 '현실의 법칙'을 따르기로 선택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대사는 '자기 신념의 외주화'에 대한 경고이며, 이상을 명분 삼아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의 자기합리화에 내재된 위험을 드러낸다. 그리고 진정한 강자란 남의 명분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 우러난 신념에 의해 싸우는 존재임을 더욱 강조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3. 몬순: 아이들 같은 약자들은 지켜야 하고, 어른들 같은 사회적인 인물들은 모두 자기책임이라고? 그들도 각자의 사연과 행복과 인간성이 있어! 너는 그저 법과 권력을 등에 업고 네가 앞세운 활인검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너의 자유와 목숨은 중시하고, 그들의 자유와 목숨을 닥치는 대로 빼앗는 독선적인 위선자에 불과해. 그러니 이제 진실을 받아들이고 죽어라.
몬순은 라이덴의 '어린이는 보호하고 어른은 책임진다'는 도식을 위선이라 지적하며, 명분 아래 저지른 살육을 냉소적으로 조롱한다. 이는 명분을 앞세운 도덕적 이중잣대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즉 라이덴이 '약자는 보호하고 강자는 책임진다'고 외치지만, 실상은 그 기준이 자의적이라는 점을 들추어낸다. 그는 라이덴이 활인검이라는 명분을 들먹이며 법과 권력의 정당성을 주장하지만, 정작 그 법과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의 자유와 생명을 침해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이때 강조되는 것은, 도덕적 명분은 언제든 권력의 언어로 바뀌며, 결국 타인의 삶을 짓밟는 정당화 도구로 변질된다는 통찰이다. 몬순은 이를 통해 형식적인 정의와 현실의 괴리를 폭로한다. 라이덴이 믿는 명분과 도덕은 전장에서 상대를 죽일 수 있는 정당성의 언어로 기능하며, 실제로는 그 누구도 온전히 정의롭지 않다는 '도덕적 상대주의'를 드러낸다. 나아가 그는, 모든 인간은 복잡한 사연과 고유한 삶을 가진 존재라는 점을 상기시키며, 도덕적 선악 이분법의 폭력성을 경계한다. 이는 암스트롱의 철학과도 연결된다. 암스트롱은 '진정한 정의'란 타인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법이나 도덕이 아니라, 스스로의 신념을 증명하는 싸움을 통해서만 입증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몬순의 대사는, '이상과 도덕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폭력'에 대한 회의이다. 진정한 자유란 남의 도덕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신념에 기반한 자율적인 행동과 본성을 받아들이는 결단에서 비롯된다는, 암스트롱 철학의 또 다른 변주라고도 볼 수 있다.
4. 선다우너: 애국자들은 그저 전쟁의 수요와 공급을 조정한 이들일 뿐, 사실 전쟁이나 군대는 그들과 같이 어떠한 나쁜 놈들이 하루아침에 인류에게 내린 저주로 탄생한 것이 아니라, 본래 인류가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집단을 만드는 행위에서부터 시작되어, 결국 자신을 구원하고 상대를 파멸시키고자 하는 욕망에서 출발했지. 집단 자체가 곧 그것을 스스로 수호할 군대로 이어지는 것이란 말이지. 즉, 아이들이 원래부터 잔혹한 본질을 타고난 이유도 바로 그것이라고. 그래서 난 만인에게 자신의 본질을 인정하게 만들 생각이다.
선다우너는 전쟁과 군대라는 개념이 애초에 애국자들 같은 상위 구조나 거대 조직이 만들어낸 '인위적 산물'이 아니라, 인간 존재 그 자체에서 비롯된 본능적 욕망, 즉 "자신을 지키고 상대를 파괴하고자 하는 충동"에서 기원했다고 말한다. 아이들조차 그러한 본능을 타고났으며, 이는 단지 사회에 의해 주입된 것이 아니라, 투쟁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근원적 조건임을 시사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선다우너는 이러한 욕망을 국가나 기업 같은 조직이 관리하거나 통제하는 형태의 전쟁, 즉 '제도화된 폭력'의 형태로 옹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애국자들처럼 전쟁을 수요와 공급의 균형으로 조정하고, 인간의 충동마저 효율과 통제로 환원하려는 시도에 냉소적이며,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인간 본성을 왜곡하고 억압하는 위선적 체제라고 본다. 이는 그가 애국자들의 전쟁 통제 시스템이 무너졌을 때 오히려 해방감을 느꼈으며, 이제는 "투쟁을 원하는 자들이 각자의 뜻대로 살 수 있는 시대"가 왔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따라서 선다우너가 말하는 전쟁은 조직화된 국가폭력의 연장선이 아니라,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자연히 발생하는 갈등과 충돌을 인정하고, 그것을 회피하거나 미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마주하는 것에 가깝다. 이 점에서 그는 암스트롱의 철학에 경도된다.
암스트롱이 주장하는 자유란 조직에 소속된 톱니바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체적인 의지로 힘을 해방하는 '개인'이 되는 것이며, 선다우너 역시 그러한 자유를 추구한다. 즉, 그가 말하는 "모두가 본질을 인정하게 만들겠다"는 말은, 인간의 폭력성과 투쟁 본능을 더 이상 억압하지 말고,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주체적으로 실천하라는 도전이다.
5. 사무엘 호드리게스: 전쟁은 돈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세계의 불황을 해결하기 위해 필수적이지. 애초에 너도 네가 하고 싶은대로 행동해도 괜찮을 것 같은 건 얼마든지 있잖아? 구태여 거창한 이상을 가지지 않고 방황하더라도, 그 행동 자체만으로도 인정을 받으며 묵묵하고 조용히 편안하게 살아가는 삶도 나쁘지 않고 말이야. 그러니 이제 결판을 내자. 누가 옳은지는 역사가 결정할 일이고, 우리는 그저 칼잡이로써 싸울 뿐이니까.
사무엘 호드리게스는 이상이나 명분 없이도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로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믿으며, 최후엔 “누가 옳은지는 역사가 결정할 일”이라 말하며 라이덴과 결투를 벌인다. 그는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진정한 자유의 삶을 상징한다. 이는 곧 이념 없는 자유주의, 개인의 결단과 행동만으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사상이다. 샘은 끝까지 자유로운 결단과 책임을 수반한 전사로서의 삶을 보여준다. 즉 그는 어떤 이념이나 체제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행동과 결단 자체로 의미를 찾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자의 전형이다. 샘은 라이덴에게도 자신의 신념을 강요하지 않으며, 자신의 삶을 관철할 뿐이다. 이러한 태도는 암스트롱의 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샘은 암스트롱과의 철학적 연대 속에서 함께 싸웠고, 그가 암스트롱과 끝까지 함께하지 않았다고 해서 사상적 전향을 한 것은 아니다. 그가 라이덴과의 최종 결투 전 블레이드 울프에게 한 말, "내가 이긴다면, 그걸로 끝이다. 그도 결국 거기까지 밖에 되지 않는 존재일 뿐일테니. 하지만 내가 진다면 그가 그 자신이 맹세한 대로 검 한 자루만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세상까지 바꿀 수 있을지 궁금하다"는 유언은 오히려 라이덴의 가능성을 시험해보겠다는 태도였으며, 검과 밈을 남긴 것은 패자의 인정이자 신념의 계승이었다.
결국 암스트롱의 사상처럼 '강자는 스스로 행동하고, 책임을 지고, 스스로의 길을 간다'는 철학을 실현한 산 증인인 셈이다. 비록 샘은 암스트롱과 싸우고 패했지만, 그 철학은 마지막까지 이어져 라이덴에게까지 계승된다. 명분보다 행동, 이념보다 실천을 중시하는 그의 태도는, 메탈기어 라이징 세계관에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자유주의적 실존주의를 구현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암스트롱은 단순한 권력자가 아니라, 서로 다른 관점과 상처를 지닌 강자들이 "스스로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철학 아래에서 자연스럽게 공감하고 따른 인물이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는 단순한 보스전이 아니라, 각기 다른 밈(MEME)이 충돌하며 하나의 정치철학적 대화를 이루는 구성이기도 하다. 위의 해석들을 읽어보면, 이들 각각의 사상은 암스트롱의 전체적인 철학의 일부분을 담당하며 자연스럽게 하나의 강줄기 같은 흐름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국 라이덴 역시 암스트롱과의 대결을 통해 자신의 모순을 깨닫고 그가 옳았음을 인정한다. 몬순과의 전투에서 잭 더 리퍼로서의 본성을 받아들이며, 암스트롱과의 최종전에서 그가 그토록 부정해오던 '힘으로 법과 도덕을 초월하는 정의'로 귀결된다. 이는 암스트롱의 신념을 전면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서 답을 찾았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그의 철학을 계승한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메탈기어 라이징 리벤전스는 '라이덴이라는 한 정의를 위해 살아온 사이보그 전사가, 암스트롱이라는 또 다른 정의를 대표하는 전사와 충돌하며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심지어 암스트롱이 라이덴에게 동맹을 제안했으나, 라이덴이 그 제안을 거부한 장면은 곧 이 게임이 단순한 수저 논쟁이 아니라 공화주의자유지상주의라는 두 철학 간의 충돌이라는 주제를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2.2.9. 정교한 미국적 현대이념 체계

따라서 암스트롱은 정말로 기념비적인 캐릭터다. 그가 작중에서 사용한 "Make America Great Again"(MAGA) 슬로건이 훗날 현실의 도널드 트럼프 정치 캠페인에서 핵심 구호로 쓰였고, 이를 두고 암스트롱이 트럼프의 등장을 예고한 '예언자'처럼 보인다는 평가가 나온 것 역시 전혀 우연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암스트롱 자체가 미국 정치문화의 깊은 뿌리인 "개인의 자유와 강자의 의지, 개척 정신, 패권적 애국심"을 집약한 원형적 캐릭터였기에, 미국 사회가 그의 사상과 언행을 실제 정치현실에서 반복하고 닮아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볼 수 있다. 즉, 암스트롱은 단순히 게임 속 허구의 인물이 아니다. 그는 미국 사회의 무의식적 본능과 국가적 욕망이 집결된 정신적 아키타입으로 기능하며, 미국 정치가 그의 노선을 닮아가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국가의 본질 그 자체가 가진 방향성의 필연적 귀결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앞으로도 반복될 가능성이 크며, 그가 남긴 상징은 미국 사회에서 계속 되살아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즉, 암스트롱의 철학은 더이상 이제 그 누구도 단순한 힘의 논리나 폭력적 독단으로 치부할 수 없다. 게임이 출시된지 시간이 흐를수록, 처음에는 그를 비웃은 이들조차 현재는 그의 논리를 쉽사리 부정하지 못하는 이유 역시 그의 사상이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사실 아주 정교하고 완성된 거대한 체계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합하자면 그의 철학은, 미국 헌법 정신에 내재된 '인민 주권'과 '무장 저항권', 미국 사회의 근간인 개인주의·자유주의·개척주의, 잭슨 민주주의적 혁명론, 프리드리히 니체의 초인 사상과 힘에의 의지, 문명사적 사회진화론과 현실주의 정치철학, 아나코 캐피탈리즘 정책론, 트랜스휴머니즘적 인간 강화론, 그리고 미국적 애국심이 메탈기어 시리즈의 서사와 절묘하게 맞물려 형성된 복합적 이념 체계다. 그는 "국가와 법, 공동체조차 넘어서 각 개인이 자신의 힘과 신념으로 운명을 개척해야 한다"는 이상을 설파하며, 이를 통해 미국 건국 이념의 원초적 이상과 현대 사상, 사회진화론적 사고를 모두 아우른다. 결국 그의 철학은 미국이라는 국가가 무의식적으로 지닌 가장 깊은 본능, 즉 '강인한 개인이 모여 자유를 쟁취하고 국가를 이룩한다'는 미국 건국신화의 현대적 재해석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강렬한 애국심 역시 미국 자체를 '강한 개인들의 투쟁과 도전이 쌓여 만들어진 위대한 문명'으로 바라보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즉, 그의 철학은 독립 전쟁, 서부개척, 산업 혁명, 냉전의 승리까지 미국 역사의 모든 순간이 강인한 개인들의 도전과 응전으로 이룩된 위대한 역사라는 미국적 자의식 위에 세워져 있다. 따라서 암스트롱처럼 강자의 의지와 힘을 통한 자유의 쟁취를 옹호하는 인물이 누구보다도 강렬한 애국심을 드러내는 것은 전혀 모순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애국심은 약자의 보호나 공공의 도덕이 아닌, '자유롭고 강한 개인들이 모여 스스로 건설한 미국'이라는 이상에 대한 충성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미국 사회의 가장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시민 내셔널리즘 감정, 즉 아메리칸 드림과도 맞닿아 있다. 결국 암스트롱의 애국심은 미국이 애초부터 '정부가 아닌 인민이 주인인 국가'로 탄생한 특수한 역사적 맥락을 고려할 때, 너무도 자연스러운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 정도로 정교하고 거대한 이념 체계는, 솔직히 말해 단순한 상업용 게임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다. 실제로 메탈기어 라이징 리벤전스의 암스트롱은 처음 등장했을 때는 그저 '힘을 추구하는 괴짜 악당' 정도로 치부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철학적 배경이 재조명되며 평가가 급격히 달라졌고 이는 그의 인기를 더하는 요인으로도 작용했다. 대표적으로 그의 철학은 인터넷을 중심으로 미국 정치철학, 사회진화론, 트랜스휴머니즘, 아나코 캐피탈리즘, 심지어 니체 철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상과 연관지어 분석되었으며, 실제로 유튜브나 해외 포럼에서도 긍정적인 측에서는 "미국식 자유주의와 사회진화론의 최종 도달점"으로, 비판적인 측에서는 "미국 정신의 왜곡된 화신" 같은 식으로 진지하게 해석하는 사례가 많다. 특히 "인민 각자가 스스로를 강화해 운명을 개척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현대 미국의 자유지상주의트랜스휴머니즘 담론에서도 그대로 통용될 만큼 현실 정치 담론과 맞닿아 있으며, 실제로 미국의 자유지상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암스트롱을 '철학적 상징'으로 소비하는 경우까지 등장했다. 물론 대중적으로는 여전히 으로 활발히 가볍게 소비되고 있기도 하지만, 진지하게 분석하는 일각에서는 현대 사회와 정치 담론을 투영하는 상징으로서 실제로 기능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2.2.10. '강력한 지도자'와 '강자'의 표상

이렇게 좌파 성향의 사람들은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그야말로 미국 우파 철학의 집결체와도 같은 사상을 설파함에도 불구하고, 암스트롱은 미국에서 우파뿐 아니라 SJW와 거리를 둔 온건 좌파 성향의 플레이어들에게도 꾸준한 인기를 끌었다. 이는 그가 리버테리언아나코 캐피탈리즘 계열의 극단적 사상을 지녔음에도, 현대의 미국 정치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강인하고 거침없는 미국식 'Bad Ass' 리더십의 전형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무력으로 이상을 쟁취하는 그의 철학은 일부 전통적 극좌 성향이나 안티파, 일리걸리즘(Illegalism)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의외의 지지를 얻고 있다. 이는 결국 좌우 이념을 막론하고, 강한 지도자에 대한 무의식적 열망이 현대 사회 전반에 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는 분석으로 이어진다. 특히 무능하거나 타협적인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이 깊어질수록, 암스트롱처럼 독자적인 신념과 강력한 행동력으로 현실을 직접 바꾸려는 인물상에 대한 선호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그의 인기는 단순한 캐릭터적 매력을 넘어, 현대 정치가 보여주는 무능과 혼란 속에서 사람들이 갈망하는, "투쟁을 통해 스스로 질서를 창조하고, 동시에 적조차 존중할 줄 아는 강자의 리더십"이라는 근본적 욕망의 투영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어찌 보면 암스트롱이 지닌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려는 진정한 강자의 투쟁적 의지'는 현대 사회의 억압적 질서, 물질주의, 방향성을 잃은 공동체에 염증을 느낀 이들에게 강한 매력을 발휘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는 파이트 클럽의 타일러 더든(Tyler Durden)[11]이나 DC 코믹스피스메이커[12] 같은 '노빠꾸'[13] 니체주의적 강자 캐릭터들이 대중적 인기를 얻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결국 암스트롱은 미국 우파 담론의 집결체인 동시에, 억압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 본성의 강자 추구 욕망과 해방 충동을 가장 직설적이고 원초적으로 각성시키는 상징으로 기능한다고 볼 수 있다.[14]

2.2.11. 현실주의 정치학적 예언

또한, 출시 초기인 2013년부터 2014년까지는, 메탈기어 시리즈가 꾸준히 강조해온 주제의식인 "폭력과 무력, 공포로 이뤄진 평화는 결코 깨끗하지도, 오래 지속될 수도 없다"는 메시지와 암스트롱의 사상이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롯해, 2025년 이스라엘-이란 분쟁, 그리고 양안 갈등 심화, 그로인해 치솟는 첨단무기와 핵무기에 대한 수요 등으로 현실 세계에서 암스트롱이 예고한 세계관, 즉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믿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이유들로 싸우게 될 것이다"라는 그의 유언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그의 철학은 오히려 현실을 정확히 꿰뚫은 예언으로 재평가되고 강한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과거의 논란은 빠르게 묻히는 분위기다.

이는 최근의 국제 정세가, 암스트롱의 철학이 단순한 폭력 미화가 아니라는 것을 방증하는 듯한 정치 현실주의의 모습을 강하게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학에서 현실주의는 국제정치를 '힘의 논리'와 '국익' 중심으로 바라보며, 국가들은 도덕이나 이상이 아니라 냉혹한 생존 본능과 힘의 균형을 위해 행동한다고 본다. 암스트롱이 주장한 "힘이 곧 정의"라는 명제는 바로 이러한 현실주의의 핵심 명제와 정확히 일치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이란 분쟁, 미중 패권 경쟁 등 현대 국제사회는 다시금 힘의 질서로 회귀하고 있으며, 군사력과 경제력이 곧 정의의 기준이 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암스트롱이 남긴 유언인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이유들로 싸우게 될 것이다" 역시, 이같은 현실주의적 세계관을 정확하게 예견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결국 암스트롱의 발언은 단순한 폭력 미화가 아니라, 허상에 불과한 도덕과 평화에 맹목적으로 기대어 힘의 선택을 거부한 자들이 맞이하게 될 필연적 파멸을 예언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그는 "힘이 곧 정의"라는 신념을 통해, 진정한 자유와 평화는 결코 무력과 투쟁을 외면한 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힘없는 도덕과 공허한 이상을 붙잡는 순간 오히려 자유도, 평화도 잃고 결국 강자의 질서에 무력하게 굴복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한 셈이다. 이는 국제 질서에서도 반복되어 온 냉혹한 진실이며, 인류 역사를 관통해 온 철칙이기도 하다. 그의 말은 결국, 스스로 싸울 의지와 힘을 갖추지 못한 이들이 언젠가는 자신들이 부정했던 '힘의 질서'에 의해 재편되는 운명에 처할 것임을 명확히 경고하는 선언으로 남는다.

과거에는 많은 플레이어들이 암스트롱이 주장하는 '힘이 곧 정의'라는 극단적 자유지상주의가 메탈기어 시리즈 특유의 반핵과 반폭력 기조를 훼손한다고 비판했으나, 현재에는 오히려 그의 유언이 냉혹한 국제 정세의 본질을 꿰뚫은 '예언적 경고'로 재평가되며, 그의 철학이 현실 세계와도 깊이 맞닿아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히고 있다. 결국, 힘없는 정의와 자유를 잃은 평화가 그저 환상에 불과하며, 그런 허상을 내세운 명분 뒤에는 언제나 더 거대한 폭력과 억압이 도사리고 있다는 현실을 전 세계가 두 눈으로 목격하고 있다. 특히 현실에서의 ‘애국자들’이라 할 수 있는 중국러시아 같은 전체주의 정권들은, 사람들이 '믿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이상', 즉 '평화', '민족', '공동선' 등의 명분 아래 시민들을 철저히 통제하고, 세계 갈등을 더욱 격화시키며 개인의 자유를 억압해왔다. 또한 이는 비단 전체주의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 역시 '민주주의'와 '석유', '테러와의 전쟁' 같은 명분 아래 수많은 전쟁과 개입을 정당화해왔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자유를 잃고 희생되었다. 결국, 암스트롱의 경고는 특정 진영이나 이념을 넘어선 보편적 현실을 겨냥한다. 그의 발언은 이상을 앞세운 체제들이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고, 갈등을 조장하며, 자유를 말살하는 구조적 폭력의 현실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 이 때문에 점점 더 많은 이들이 '힘없는 평화'가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깨닫고 있으며, 암스트롱이 주장한 '힘 있는 자유'의 논리는 더 이상 단순한 허구적 폭력이 아닌, 냉혹한 현실의 거울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암스트롱의 이 발언은 결코 냉소적 비웃음으로 읽히지 않는다. 그의 연설과 최후를 맞이하는 순간의 비장함을 보면, 그는 결국 스스로 힘을 갖추지 못한 이들의 비극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런 이들이 결국 더 큰 고통 속에 내던져질 것임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경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그런 이들의 나약함을 비난하는 동시에, 어쩔 수 없이 스스로 그들을 두고 가야만 하는 슬픔과 아쉬움을 품고 있었고, 자신의 방식이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것이 최후의 진실'이라 믿고 비장하게 감당한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의 발언은 그래서 더욱 쓸쓸하고 묵직한 울림을 남기기도 한다.

다만, 그렇기에 암스트롱의 마지막 장면은 한층 더 깊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는 이제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 순간 라이덴의 눈 속에서 자신과 동일한 신념을 발견한다. 라이덴 역시 타인의 명령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싸우고, 스스로의 신념에 따라 결단을 내리는 자였다. 암스트롱은 그런 라이덴을 보며, 비록 자신은 이제 사라질지언정 자신의 신념을 계승할 인물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강한 자부심과 안도감을 품는다. 결국 그는 패배를 받아들이면서도,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자들의 의지가 끊어지지 않았음을 확인하며 숨을 거뒀고, 이는 그의 최후가 스스로의 철학을 후계자에게 넘겨주는 숭고하고 장엄한 승화의 순간이었음을 시사한다.

2.2.12. 니체적 '초인'의 은유

동시에, 암스트롱의 최후는 단순한 패배나 죽음으로 보기에 지나치게 상징적이다. 이는 단순히 '약육강식'의 논리를 스스로에게 적용한 결과가 아니다. 이 장면은 니체 철학의 가장 완벽하고 극적인 은유이자, 그의 삶이 완성되는 '자기 신화의 종결'로 해석된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죽음을 오히려 숙명처럼 당당히 받아들이며, 철저히 스스로의 의지와 책임으로 감당했다. 이러한 모습은 니체 철학의 정수인 초인 사상과 영원회귀의 개념을 그대로 반영한다. 니체가 말한 초인은 기존의 도덕과 질서를 넘어, 오직 자신의 의지로 삶을 창조하며, 죽음이나 파멸조차 자신의 신화 일부로 수용하는 존재다. 암스트롱 역시 라이덴과의 최종 결전을 자신의 신화의 장엄한 클라이맥스로 받아들였고, 자신의 죽음을 결코 부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신념을 위해 전력을 다한 끝의 패배를 "자신이 만든 신화의 마지막 조각"으로 삼으며, 자신의 죽음을 하나의 승화의 순간으로 끌어올렸다. 이는 스스로 내세운 '투쟁의 철학'과 '자기 초월의 이상'을 완성한 초인의 자기극복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암스트롱은 육체는 사라졌으나, 자신의 철학과 신념을 끝까지 관철하며 라이덴과 플레이어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을 뿐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죽음을 통해 그 신념을 전파하고 승화까지 완성했다. 다시 말해, 그는 더 이상 단순한 악역이 아니며, 니체 철학의 극단적 구현체이자, 스스로의 신화를 끝까지 완성한 존재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 순간만큼은 암스트롱이 모든 정치적 속성과 논란을 벗어던지고, 그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완벽한 니체적 초인(Übermensch)으로 승화한 순간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스스로의 신념을 위해 끝까지 싸우고, 패배와 죽음조차 자신의 의지와 철학 안에서 의연하게 받아들이며, 자신의 파멸을 하나의 필연적 완성으로 끌어올렸다. 이 장면에서 암스트롱은 단순한 권력 투쟁의 주체가 아닌, 자기 신화의 절정에 도달한 초인의 이상적 형상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는 자신의 생애 전체를 통한 투쟁과 패배마저도 자신이 창조한 '신화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존재를 최후의 순간까지 자기 극복과 초월의 서사로 완성해냈다. 이는 니체 철학에서 말하는 '영원회귀'와 '초인'의 정수를 극적으로 구현한 순간으로, 암스트롱은 이 장면에서 더 이상 국가나 이념, 정치의 대변자가 아니라, 순수한 인간 의지의 극한을 상징하는 존재로 거듭났다고 볼 수 있다.

2.2.13. 사상의 의의

따라서 암스트롱의 철학은 단순한 게임 속 설정이나 일시적 유행으로 가볍게 치부할 수 없다. 메탈기어 시리즈는 몰라도 암스트롱은 널리 알려질 정도로 파급력이 강했던 전세계의 열광과, 이 문서에서 다룬 방대한 논의만 보더라도, 그의 사상이 얼마나 깊고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는지 충분히 드러난다. 그의 철학은 현실 정치와 사회 전반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투쟁과 권력의 역학을 날카롭게 반영하며, 이미 다양한 형태로 현실 세계 곳곳에서 구현되고 있다. 결국 그의 존재 자체와 발언, 그리고 사상은, 일부 비판적 시각이 애써 외면하려는 것처럼 단순한 '개똥철학'이나 '게임 서사의 장치'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관점으로 봐도 그의 연설과 언행, 행동 하나하나의 이면에 압도적일 만큼 방대하고 정교한 사상적 체계가 작동하고 있으며, 그 내용 역시 놀라울 정도로 분석적이고 현실적인 통찰을 담고 있음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분쟁, 양안 갈등, 미중 패권 경쟁 등 오늘날 국제정세의 핵심 갈등 구조와도 놀라울 만큼 정확히 맞아떨어지며, 그의 철학이 단순한 허구를 넘어 현실의 정치와 권력 투쟁의 본질을 꿰뚫는 거울이자 예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와 더불어, 상기했듯이 암스트롱의 철학은 단순한 정치적 논쟁을 넘어, 현대 좌우파 담론의 핵심인 '자유를 위한 투쟁'과 '힘의 정당성'을 집약하며, 더 나아가 인간 본성 깊숙이 자리한 '강한 힘과 강력한 지도자에 대한 원초적 열망'까지 포괄한다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이는 단순한 게임 캐릭터를 넘어, 현실 정치와 사회의 복잡한 권력 심리를 직관적으로 건드리는 상징으로서 그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한다. 결국 암스트롱은 현대 사회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가장 본질적인 질문인 "힘과 자유, 그리고 질서는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를 제기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사상을 그저 극단적 악역의 허무맹랑한 논리로 폄하하려는 시각은 오히려 현실의 냉혹한 권력 구조와 그 안에 내재한 인간 본능을 애써 외면하려는 심리에 가깝다. 암스트롱이 던진 화두는 이미 현실 속 '전쟁의 논리'와 '힘에 의한 질서'라는 숙명적 테마로 확장되어, 단순한 게임 서사라는 틀을 훌쩍 넘어선 독자적 사회 담론의 지위를 획득한 셈이다.

즉, 암스트롱은 단지 힘있는 자만이 살아남는 세계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는 약자들 역시 자신만의 방식으로 투쟁하고, 기여하고, 스스로 독립하거나 강자와 협력함으로써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약자란 반드시 보호받아야 하는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가 선택한 방식대로 싸워 이겨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의 '강자의 자유'는 오히려 약자에게도 자율성과 존엄성을 부여하려는 급진적 선언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약자들이 무조건 희생될 것이라는 비판은 오히려 그 약자들을 무력하게 상정하는 시선에 기반한 것이며, 그 자체가 일종의 위선일 수 있다. 이는 니체의 '강자의 도덕'이 흔히 약자를 무시하거나 짓밟는 것으로 오해되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구조를 가진다. 암스트롱의 철학은 이러한 니체적 사유를 미국적 정치 맥락에 적용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는 약자에게 일방적인 폭력을 행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자 스스로 국가에 대한 복종심과 피해의식에 기반한 도덕(약자의 도덕)을 버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즉, 암스트롱의 주장에 찬성하느냐 여부를 떠나, 논쟁에 앞서 그의 철학이 전제하고 있는 핵심은 '진정한 자유를 통한 자기 초월'에 대한 요청이라는 점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이는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하자는 것이 아니라, 약자에게도 피해자적 도덕을 넘어서 스스로를 초월하라는 급진적 도전을 던지는 사상적 입장에 가깝다. 라이덴과의 대결 또한 단순히 강자가 약자에 폭력을 행사하는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니라, 약자의 도덕을 버리고 강자의 윤리에 참여할 것인가라는 철학적 갈등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2.3. 완벽한 서사적 기능

문화와 국가, 사회에 대한 시선이 미국과는 딴판인 한국, 일본인들이야 암스트롱을 그저 사회를 매드 맥스 시리즈 또는 북두의 권에서나 볼 법한 약자에 대한 보호나 법이 전혀 없는 난장판으로 만들려는 광인으로 느끼는게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게임 출시 초기에는 암스트롱을 비판하는 의견이 우세했고 '우리 라이덴이 이런 미치광이의 신념을 계승하는 결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논조의 견해가 많았다. 반쯤 농담 삼아 당시엔 솔리드 스네이크가 애지중지 키워 겨우 사람 만들어놓은 라이덴이 암스트롱에게 네토라레 당했고, 라이덴 본인도 잭 더 리퍼를 버리질 못했으니 솔리드를 못 뛰어넘는 거라며 결국 배운 게 없다면서 실망하는 사람도 있었을 정도. 이러한 반응은 동양적 공동체 윤리와 약자 보호의 이상이 강하게 뿌리내린 문화권에서는 암스트롱식 자유주의가 지나치게 냉혹하고 파괴적으로 비쳤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15]

그러나 게임을 직접 플레이하고, 옹호와 비판의 다양한 해석을 종합적으로 검토해보면, 라이덴은 단순히 암스트롱의 철학에 휘말려 잭 더 리퍼로 회귀한 것이 아니라, 적들과의 결투를 통해 각자의 신념을 마주하며 점진적으로 정신적 성장을 이룬 인물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따라서 현재는 애초에 당시 비판의 논지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재평가되는 추세다. 특히 당시 가장 큰 비판의 대상이었던 몬순과의 전투는, 오히려 '살인귀'였던 자신의 본성과 외면해온 과거를 직시하면서도 끝내 이성을 유지하는 것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퇴행이 아닌 자기 수용의 출발점이었다. 결말부에서 암스트롱의 사상을 단순히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자기 방식으로 해석하고 통합해 “자신만의 전쟁”을 선언하는 라이덴의 모습은, 그가 내면의 모순과 트라우마를 극복한 끝에 도달한 주체적 결단의 결과로 읽힌다. 따라서 당시의 비난은 그냥 결말이 마음에 안 드니까 그간의 스토리는 다 못 본 척 하겠다는 것과 다름 없다. 결국 암스트롱의 이상을 계승함으로써 자신의 모순, 트라우마, 정신적 방황을 완전히 극복했으므로 분명히 성장을 이뤄냈다고 해석하는 게 맞다. 즉 이 결말은 정신적 성장과 자기 정체성의 완성을 의미하며, 오히려 라이덴을 솔리드처럼 은퇴시키려는 게 아니라면 캐릭터 서사의 논리적 귀결이자 가장 설득력 있는 방향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라이덴의 결말을 두고 "솔리드 스네이크의 신념을 저버리고 암스트롱의 철학에 굴복했다"는 식의 평가가 자주 제기되었고 아직도 일각에서 이에 절망감을 느끼는 팬들이 있지만, 이는 메탈기어 라이징의 서사를 피상적으로 이해한 데서 비롯된 오해다. 라이덴은 단순히 솔리드의 밈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 밈의 한계를 극복하고 정신적 성장을 이루기 위해 암스트롱의 밈을 구성하는 두 토대, 즉 니체주의적 실존과 자유지상주의적 결단의 철학을 받아들인 것이다. 솔리드 스네이크의 신념은 어디까지나 애국자들같은 외부의 억압적 구조를 제거함으로써 자유를 실현하려는 '소극적 해방의 철학'이었다. 그러나 이 철학은 '인간성 회복과 약자 보호'라는 명확한 목적을 제공하면서도, '악의 구조'를 제거한 이후 인간이 어떤 주체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명확히 제시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라이덴은 그것이 진정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인지, 아니면 국가와 법, 대중의 요구로부터 강요된 타자화된 신념인지 확신을 갖지 못한 채 갈팡질팡했던 것이다. 반면 암스트롱은 체제 타파 이후의 인간이 스스로의 신념과 힘을 통해 삶을 증명해야 한다는 '적극적 자유의 철학'을 제시한다. 라이덴은 이 두 사상을 통합해, 억압에 저항하는 솔리드의 정의감을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과거와 내면을 직시하고, 타인이 정해준 사명이 아닌 스스로 선택한 싸움을 통해 진정한 주체가 된다. 결과적으로 그는 솔리드를 비롯한 역대 스네이크들이 한계에 부딪혔던 '밈의 반복'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기결정의 영역으로 나아가며 정신적으로 완성된 자유인의 서사를 완성하는 것이다.

반대로 자유지상주의에 익숙한 북미 팬을 비롯한 서양권 게이머들에게는 상술했듯이 출시 초기부터 특정 성향 유저들을 제외하면 평가가 매우 좋았다는 게 재미있는 부분. 그리고 북미에서는 동양처럼 공동체주의적인 시각으로 해당 시리즈를 해석한 게 아니라 자유주의라는 큰 틀에서 메탈 기어 연대기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주류였기에 딱히 암스트롱과 솔리드 스네이크의 신념이 그렇게까지 상반된다고 여기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물론 유튜브와 커뮤니티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현재는 동양권도 자유주의에 대한 논의가 많이 진척된 데다가 정치권의 무지성 PC, 문화 검열, 애국심 강요 등에 매우 지친 상태라 그런지 신규팬들은 암스트롱의 연설에 열광하는 분위기가 훨씬 강하다. 또 상기했듯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고 현실 세계 정치가 암스트롱이 비판했던, 납득할 수 없는 명분과 사업화된 전쟁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상황과 매우 유사하게 흘러가며 예전의 부정적인 평은 사실상 사장되고 나날이 재평가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만인을 갈라 놓는 부질없는 것들을 허물어 차별 없는 자유로운 세계를 추구한다'는 면에서는 더 보스의 사상과 일치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암스트롱은 더 보스와 직접적으로 아는 사이는 아니고, 완전한 평화를 위해서라면 서로를 해칠 무기를 버려야 한다며 스스로 핵을 짊어지고 물속으로 들어가 이를 실천했던 더 보스의 유지와는 정반대로, 암스트롱은 상당한 폭력성을 더한 자신만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16] 일단 애국자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관련 정보를 다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어떻게 보면 암스트롱도 더 보스의 유지를 이은 자라고 볼 수 있기는 하다. 물론 암스트롱의 방식은 더 보스가 진정으로 원했던 방식과는 정반대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더 보스의 밈을 잇고자 했으면서 더 보스가 원하는 방식과 한참 다른 방식을 제시한 인물들은 이전 작들에서도 꽤 있었다. 대표적으로 기술 독재 체제로 전지구적 질서를 구현하려 한 제로 소령과, 각국을 압도하는 군사 단체로 국경의 의미를 퇴색시켜서 강제적으로 무정부적 세계 평화를 이루려고 한 네이키드 스네이크가 그 예. 때문에 암스트롱이 더 보스의 사상을 안 이었다고 말할 근거가 없기는 하다.

다만, 사실 메탈기어 서사 내에서, 암스트롱은 더 보스의 밈을 계승한다기보다는 동등한 위치에서 뚜렷한 안티테제로서 기능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스티븐 암스트롱과 더 보스는 표면적으로는 철저히 대조되는 철학을 지녔지만, 그들의 이상은 같은 뿌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두 인물 모두 이념, 국경, 시대의 흐름, 집단정체성과 같은 '만인을 갈라 놓는 부질없는 것들'을 허물고, 개인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의 세계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이상적 목표는 동일하다. 그러나 더 보스가 이러한 이상을 공동체적 연대와 평화를 통해 실현하려 했던 반면, 암스트롱은 조직과 연대 자체가 오히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보고, 오직 개인의 힘과 선택만이 정당성을 증명할 수 있다는 급진적 자유주의를 제시한다. 더 보스는 공동체를 지키는 데서 군인의 존재 의의를 찾았지만, 암스트롱은 필요하다면 공동체조차 적이 될 수 있음을 긍정하며 그 자체를 현실로 받아들인다. 이처럼 이들은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정반대의 해법을 제시한 이상주의자와 급진적 현실주의자로 서사 내에서 대비되며, 결과적으로 같은 이상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추구한 '동전의 양면' 같은 존재로 기능한다. 그리고 이 두 철학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우월하다고 보기보다는, 서로가 가지는 장점과 한계를 보완하는 상호보완적 관계로 이해될 수 있다.

아래의 옹호와 비판 문서만 보더라도, 어느 한 쪽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단정할 수 없는 복잡하고 팽팽한 긴장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옹호 측에서는 이렇게 주장한다. 결국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주체적이고 뛰어난 개인들'이며, 역사 속 위인들은 약자들의 집단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와 역량으로 세상을 바꾼 강인한 개인들이었기에 위대한 존재로 평가받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실력 없는 다수는 주체적인 개인들보다 극도로 무능한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았고, 집단지성의 효용성을 주장하는 여러 실험조차 유사과학적 요소가 적지 않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모든 사람의 역량과 위치를 완벽히 평등하게 맞출 방법이 없는 현실에서,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정당성을 부여하고, 잘못된 선택이 벌어졌을 때도 자정 능력만을 기대하는 것은 오히려 개인의 일탈을 비판하는 논리와 근본적으로 모순된다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집단이 아닌 주체성을 회복한 개인들의 결단과 행동이라는 것이다. 반면 비판 측에서는, 아무리 주체적이고 뛰어난 개인이라 해도 결국 약자들의 이타심과 공동체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하고 완성된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또한 한 사람이 아무리 스스로를 엄격히 다스리고 모범을 보인다 해도, 모든 사람이 그와 똑같이 따라갈 수는 없다. 오히려 그런 이상을 강요하게 되면, 따라잡기 위한 경쟁과 불신이 격화될 뿐이며, 결국 남는 것은 끝없는 충돌과 파괴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옹호와 비판 문서에서 제시된 논의 역시, 독자 스스로 어떤 입장을 선택하고, 또 어느 정도까지 상대의 주장을 수용하며 자신의 내적 모순을 보완할지는 전적으로 각자의 몫이다. 이는 마치 라이덴이 자신의 내적 갈등을 직시하고 고뇌한 끝에 내린 결단처럼, 오롯이 개인의 선택과 책임에 달린 문제일 것이다.

2.4. 암스트롱을 계승한 라이덴과 제작진들의 메시지

또 여기서 가장 주목할 점은, 게임 내에서 라이덴과 암스트롱이 처음 등장할 때 입고 있는 복장이 완벽히 동일하다는 점이다. 두 사람 모두 검은 바탕의 정장에 흰색 셔츠에 노란색 넥타이를 매고 등장한다. 이 의상은 단순한 디자인상의 우연으로 보기에는 어렵고, 스토리 전개를 고려할 때 분명한 복선적 의미를 지닌다. 암스트롱은 처음부터 자신이 꿈꾸는 자유와 이상을 위해 싸우는 인물로 묘사된다. 반면, 라이덴은 그 이상을 부정하고 반대하는 위치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라이덴은 점차 암스트롱의 신념과 대면하고, 결국엔 그의 철학과 가치관 일부를 내면화하게 된다. 그 여정의 종착점이 바로 결말부에서 암스트롱의 실존주의적인 이상을 죽는 순간까지 실현했던 사무엘 호드리게스의 검을 이어받아 싸우는 장면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라이덴과 암스트롱이 동일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연출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 둘은 사실상 같은 궤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던 셈이며, 초반의 시각적 유사성은 결국 하나의 이상으로 수렴하게 되는 운명적 관계를 암시한다. 다시 말해, 라이덴은 단지 암스트롱을 '쓰러뜨린'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계승'한 인물이며, 암스트롱이 그에게 남긴 이념적 유산을 실현 가능한 형태로 전환하는 후계자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상징성은 메탈기어 시리즈 특유의 밈(meme)과 유산의 계승이라는 주제와도 맞물린다. 즉, 암스트롱의 옷을 입은 라이덴은, 그가 단순히 암스트롱을 부정하거나 극복한 것이 아니라, 그 안의 의미를 재해석해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이어간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라이덴은 암스트롱의 신념을 자신의 방식으로 계승했다. 게임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독토어와의 통화 중 암스트롱을 간접적으로 언급하며 "그렇지, 역시 수요를 없애기 위해서는 그처럼… 나는 나만의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말을 남긴다. 이 순간 라이덴의 눈은 통각 센서 해제도 없이 리퍼 모드로 빛난다. 이는 단지 강자나 악당만이 아닌,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자라면 누구든, 각자의 사연이나 인간적 고뇌가 있더라도'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결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그는 전쟁경제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모든 사이보그들, 나아가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를 옹호하는 모든 적을 가리지 않고 제거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몬순이 지적했던 딜레마, 즉 어른들에게도 나름의 행복과 인간성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암스트롱식 결단의 실현이다. 이때 비판자들은 그가 암스트롱을 쓰러뜨렸다는 사실만을 근거로 안심하지만, 정작 라이덴은 그 누구보다 암스트롱의 정신을 깊이 체득한 자가 된 것이다. 그는 단순히 암스트롱을 물리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와의 싸움을 통해 외면해왔던 자신의 내면과 진실하게 마주했으며, 약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위선 없는 신념을 관철하는 강자로 거듭났다. 암스트롱이 요구했던 삶의 태도, 즉 허울뿐인 명분과 제도적 권위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는 자유로운 존재로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굳힌 것이다. 이로써 라이덴은 폭력적 수단이 아닌, 의식과 결단을 통해 암스트롱의 핵심 가치인 '자율성과 투쟁의 자유'를 재해석하고 실천한 정신적 계승자로 볼 수 있다.

또한 라이덴이 몸 담고 있던 유한주식회사인 매버릭 시큐리티 컨설팅과, 암스트롱이 소유한 월드 마셜과 데스페라도 엔포스먼트 유한책임회사를 보면 알겠지만, 사실 매버릭의 뜻 자체가 독립성과 개성이 매우 강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국어로 번역하면 무려 독불장군, 또는 이단아가 된다. 그리고 월드 마셜을 직역하면 세계의 보안관, 데스페라도 엔포스먼트를 직역하면 무법자들의 집행국이 된다. 즉 애초에 매버릭도 데스페라도도 모두 사회 일반의 윤리와 질서를 거부하거나 초월하려는 집단이며, 제작진들이 의도한 바 역시 라이덴과 그의 동료들 또한 암스트롱과 그의 부하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모습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2.5. 이상적인 고전적 영웅상의 재해석

보면 알겠지만, 탁월한 두뇌, 미칠 듯한 힘, 뛰어난 실천력과 인정사정없는 잔혹함, 미국이라는 국가를 짊어지겠다는 숙명적 애국심, 거기에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이상적으로 그렸을 법한 강력하고 철저한 개인주의 사상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니체는 거의 모든 저작에서 개인을 나약한 부속품으로 만드는 관료제적 사회를 맹렬히 비판했고, 약자의 이상을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강제하려는 공산주의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가 지향하던 인간사회도 제도와 기득권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하는 고대 그리스 영웅시대였다. 그리고 이것과 비슷하던 것이 바로 암스트롱이 언급한 미국의 초창기와 서부개척 시대이기도 하다.

특히 라이덴이 훼이크를 칠 때 거기에 보기 좋게 넘어가 아주 사람 좋게 대하는 모습은 주로 고대 사회에서 싸움에 이긴 장수가 패배한 장수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때 선보이는 전형적인 호쾌한 고대 영웅의 관용적인 면모와 일치한다. 라이덴이 현대판 '히어로' 상에 가깝다면, 암스트롱은 극단적인 사상과 그걸 행하는 비인간적인 방식을 지녔지만 자신과 맞설 수 있는 강자에 대해선 존중을 아끼지 않는 고전적 '영웅'의 면모를 지닌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동양 군담소설에 나오는 호걸스러운 사나이라고 볼 수 있으며, 특히 강력한 무력과 카리스마로 많은 인물들을 압도했던 항우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항우는 지도자로서 자질이 부족했던 반면, 암스트롱은 정치적 수완과 철학적 통찰력 또한 겸비한 '완성형 정복군주'에 가깝다는 점에서, 더욱 입체적인 현대판 호걸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

본질을 정리하면 고대 중국 혹은 그리스 고전에 나올 법한 군주형 협객 캐릭터가, 세계패권국가로서 쇠퇴와 방황을 겪고 있는 현대 미국 사회의 갈등과 담론이란 문맥에 맞추어 성공적으로 재해석된 인물인 셈. 고로 21세기 미국 사회에 대해 이해하고자 할 때 예시로 들어도 좋다고 할 정도로 옳고 그름을 떠나 미국의 이상을 잘 보여주는 캐릭터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를 쓰러뜨린 주인공 라이덴이 그 이상을 계승하고 자기 식으로 재해석해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장면을 통해, 그의 방식은 틀렸을지언정 그의 이상은 진정 옳았음을 제작진이 피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동서양, 북미와 본토 일본 양쪽에서 이 캐릭터가 가진 호흡력, 캐릭터로서 완성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암스트롱 안티 중에는 아예 그의 기량이 나노머신 빨이라고 내려치기 하는 사람들도 소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가 마음에 안 들더라도 이건 억까에 불과함에 유의. 일단 결정적으로, 암스트롱이 나노머신 빨이라면 라이덴의 개조신체도 암스트롱 못지않게 튼튼했다. 또 라이덴이 계속 일방적으로 처맞다가 무라사마 들고 겨우 이겼다는 점에서 라이덴도 사이보그 몸체와 무라사마 빨이 되어 버린다. 즉 내로남불 논리에 불과하다. 그리고 기량 측면에서도, 라이덴이 게임 내내 보여준 쳐내기 공격이 오직 암스트롱에게는 일절 통하지 않는데, 이는 상술했다시피 독토어의 분석에 따라 암스트롱의 기량이 라이덴과 최소 동급이라는 설정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라이덴과 암스트롱 모두 호드리게스의 무라사마에 팔이 싹뚝 잘렸음에도 불구하고, 라이덴은 통각 센서가 있어서 고통도 안 느끼는 것은 물론에 검을 든 오른팔이 아닌 왼팔을 발도술로 잘렸음에도, 완전히 해결되지 못했던 정신적 불안정성에, 4편 때 트라우마라도 다시 살아났는지 크게 당황해서 호드리게스에게 맞아 죽을 뻔했다. 반면 암스트롱은 발도술에 의해 오른팔이 잘리는 고통을 고스란히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역으로 임기응변을 발휘해 잘린 팔로 오히려 호드리게스의 오른팔을 찍어서 끊어버리며 호드리게스에게서 대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라이덴이 호드리게스와의 첫 대면에서 완패한 것만 봐도 알겠지만, 즉 오히려 암스트롱의 정신력과 경험, 기량이 적어도 호드리게스와 암스트롱이 맞붙었을 시점에서는 라이덴을 넘어서는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사실 암스트롱의 결정적인 패배 원인은 따지고 보면 호드리게스가 멋대로 라이덴을 도울 생각을 했다는 것 때문이다.

사실 한 게임 캐릭터를 두고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옹호하는 팬층과 이에 반박하려는 다양한 안티 팬덤이 공존한다는 사실 자체가, 스티븐 암스트롱이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훌륭한 반동 인물(anti-hero or antagonist)인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SJW(사회 정의 전사)든 대안 우파든, 혹은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성향의 플레이어들 모두가, 암스트롱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마치 실제 정치인처럼 비판하거나 옹호하며 극도로 과몰입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단순한 악역이 아니라, 현대 미국 사회의 이념적 대립과 철학적 긴장을 고스란히 반영한 캐릭터라는 점에서, 그 입체성과 현실성이 매우 뛰어남을 방증한다.

비교 대상으로 자주 거론되는 인물 중 하나가 자유지상주의 사상을 공유하는 바이오쇼크 시리즈앤드루 라이언인데, 표면적으로는 비슷한 자유지상주의적 이상을 추구했지만, 그 본질은 사뭇 다르다. 라이언은 '랩처'라는 지하도시를 통해 "노동의 대가를 빼앗기지 않는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겠다는 경제에 치우친 이상을 내세웠지만, 결국 체제에 대한 불만을 가진 자들을 감옥에 수감하며 자유를 억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말았다. 심지어 프랭크 폰테인과 같은 인물의 득세를 사실상 방조한 끝에 도시를 스스로 파괴하는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이와 비교해 암스트롱은 비록 수단은 극단적이었지만, 체제에 순응하기보다는 이를 깨뜨리고 대중에게 자유와 책임을 되돌려주겠다는 방향성만큼은 끝까지 일관되었으며, 그 이상 또한 현실적 문제의식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설득력 있는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결국 '목표는 선하되 수단이 그릇된 자'라는 평가가 더 어울리는 것은 앤드루 라이언이 아니라 오히려 스티븐 암스트롱이며, 그가 왜 시대를 초월해 다양한 정치 스펙트럼의 플레이어들에게 논쟁의 중심이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2.6. 최종보스로서의 위상과 미국적 롤모델의 구현

시리즈 내 다른 최종보스들을 포함한 어지간한 인물들과 비교해도 암스트롱의 위상이 높을 수밖에 없다. 네이키드 스네이크베놈 스네이크는 최종 보스이면서도 주인공인 입체적 인물상이다 보니 암스트롱과 최소 동급 위상이라 비교하기 묘하고, 메탈기어 솔리드 2의 솔리더스 스네이크는 의도한 바가 전혀 아니었지만 결국 애국자들의 계획에 이용당했기에 신념의 빛이 형편없이 바래는 모습을 보여줬다. 메탈기어 솔리드 5의 스컬 페이스복수귀라지만, 명분과 별 관련도 없는 비약적인 논리로 영어 단어 하나조차 아는 사람은 전부 죽이겠다면서도 본인은 거기서 빼는, 대량학살을 저지르려 했으면서 내로남불 행태까지 보여줬기에 팬들의 공감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그나마 유일하게 남은 캐릭터성인 복수심마저도 다른 사람에게 밀려나 거의 페이크 최종 보스가 되어버려 마지막으로 한 줌 남았던 개성마저 사실상 사라지다시피 했다.

그 외에 메탈기어 솔리드 & 트윈 스네이크의 리퀴드 스네이크빅 보스를 뛰어넘겠다면서도 자신이 지금 무슨 언행을 하고 있는건지 잘 모르는 것이 아닐까 하고 여겨질 정도로 충동적인 모습을 보여서 멍청하다는 농담과 함께 찌질하다는 악평을 받았다. 또 리볼버/리퀴드 오셀롯은 다중스파이라 행적이 너무 복잡하여 세 줄 요약이 굉장히 어려우니 시리즈와 캐릭터성을 관통하는 밈 발견이 어려운데다가 이마저도 사실은 빅 보스, 즉 네이키드 스네이크의 의지를 충실히 계승하는 자라서 다른 인물들과 포지션이 자주 겹치기에 캐릭터성이 독창적이지는 않다.[17]

그러나 암스트롱은 캐릭터성과 사상 모두 거의 완벽한 미국인의 우상과 같은 모습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인 최종보스라고 평가받는다. 물론 그가 명문대를 졸업했으며 예부터 미국인들의 유구한 미식축구 사랑을 대표하는 강팀인 텍사스 롱혼스와 연계되어 있기에 금수저 출신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하지만,[18] 만약 정말 어렵고 가난했던 환경을 극복하고 장학금을 받아가며 자수성가에 성공한 사람이었다면 정말 완벽한 미국인의 이상적 롤모델 그 자체가 된다.[19]

사실 게임이 출시된지 시간이 지난 지금은 암스트롱이 자수성가한 인물일 가능성이 더 높다는 해석이 우세하다. 만약 그가 금수저 출신이라면, 오히려 상류층 특유의 여유를 바탕으로 타인에게 베풀며 우수한 인재들을 모으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는 사고방식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하지만 본편에서 암스트롱은 진심과 별개로 철저한 포퓰리스트 정치인으로 위장하며, 자본과 지지율 확보에도 매우 능숙한 모습을 보인다. 즉, 그는 의외로 현실과 양보, 타협을 잘 아는 인물이며, 실제로도 정치적 생존을 위해 충분한 수완을 발휘해왔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암스트롱이 지향한 세계관 역시, 모든 이에게 평등한 기회를 제공한 뒤 최종적으로 승리한 강자들이 자신의 신념대로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또한 일부에서는 암스트롱의 거친 말투가 미국 전통의 상류층 백인 정치인들의 세련된 언행과 맞지 않는다며 비판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의 배경을 고려하면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비록 작중에서 그의 성장 배경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만약 자수성가한 인물이라면 이는 오히려 매우 자연스러운 묘사다.[20]

결과적으로 그의 캐릭터 모티브를 따져보면, 자수성가 출신으로 해석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또한 미국 남부 및 서부 지역의 경우, 상류층조차도 골드러시산업 혁명 시기 서남부로 진출해 광물·석유 산업으로 부를 일군 가문 출신이 많은 탓에, 이쪽 동네에서는 한국인들이 흔히 떠올리는 '점잖은 미국 상류층' 이미지와 달리 오히려 마초적 성향을 강하게 지닌 상류층 인물들도 적지 않을 정도로 분위기가 마초적이다.

2.7. 계속되는 철학적 메시지

여기까지 읽었다면 알겠지만, 암스트롱의 사상을 논파하기 어려운 이유는 굉장히 명확하다. 단순히 파괴, 지배, 복수심을 지향하는 여타 미디어의 대다수 악역과 달리, 그의 사상은 게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결된 철학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대체로 악역들의 신념은, 한국 사회에서 흔히 통용되는 골든 패스, '대중은 항상 약자이며 절대적인 선이다'는 고정관념을 전제로 삼을 경우 비교적 쉽게 논파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미디어를 포함한 대중 담론에서 대중을 기본적으로 피해자이자 약자로 상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암스트롱의 철학은 이 전제 자체를 정면으로 부숴버린다. 암스트롱이 지배하는 미국 사회에서는 오히려 다수가 스스로를 강자이자 개척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그의 세계관에서 대중은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정당성'이라는 명분 아래 다수의 힘으로 상대를 압박하고, 정치적 폭력을 행사하며,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독재자를 옹립하는 실질적 '강자'가 될 수 있는 존재다. 동시에 그에게 대중은 단순한 폭력적 군중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집단사고를 넘어서는 잠재력을 지닌 개개인의 주체적 집합이기도 하다. 즉, 그의 철학에서는 대중은 단순한 약자도 아니고 절대적인 가해자도 아닌, 스스로 각자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잠재적 주체들의 집합으로 규정된다. 이 주장 앞에서 약자의 보호라는 윤리적 명분은 더 이상 절대적인 무기가 될 수 없다.[21]

더 나아가, 이러한 시각은 단지 암스트롱 개인의 일탈적 사고가 아니다. 실제로 프랑스 혁명이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히틀러와 스탈린이 대중의 열렬한 지지에 의해 권력을 얻은 역사적 경험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리고 앨러스터 매킨타이어, 찰스 테일러, 마이클 샌델, 마이클 왈저 등 현대 공동체주의 철학자들조차도 절대적 도덕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니체의 통찰을 일정 부분 수용하고 있다. 객관적인 도덕법칙은 증명될 수 없으며, 이를 고집하는 것은 결국 독선의 다른 말이기 때문이다.[22]

물론 이 강력하고도 위험한 철학은 자유지상주의적 사회는 질서인가, 아니면 질서의 탈을 쓴 혼돈인가 혹은 공화주의적 질서는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는가, 아니면 전체주의의 씨앗을 내포하는가에 대한 격렬하고도 오래된 논쟁을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암스트롱과의 최종 결전은 단순한 액션의 클라이맥스를 넘어서, 현대 사회의 핵심 아젠다들, 예컨데 자유지상주의와 공화주의, 니체적 개인주의와 센델식 공동체주의, 나노머신을 통한 트랜스휴머니즘,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긴장 관계, 그리고 미합중국이란 나라의 건국이념과 본질 등을 정면으로 건드리고 있다는 점에서 철학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의 철학이 옳고 그름을 떠나, 이러한 복잡한 시대적 질문들을 응축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암스트롱이라는 캐릭터는 밈으로든 논평으로든 앞으로도 인터넷에서 오랫동안 회자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8. 결론

이러한 복합적인 이유들로 인해, 암스트롱은 단순한 악역을 넘어, 미국 사회와 정치의 본질적 이상과 모순을 동시에 응축한 상징적 캐릭터로 평가받는다. 그는 단순한 파괴적 폭군이나 권력 지향적 독재자가 아니라, 자유지상주의적 신념, 니체의 위버멘쉬 사상, 개인주의적 이상, 그리고 미국의 사회진화론적 투쟁 철학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인물이다. 그의 철학은 미국인의 무의식 깊숙이 자리한 자유와 개척의 신화, 투쟁과 응전을 통한 자기 실현의 욕망을 가장 적나라하게 구현한다.

특히, 미국이란 국가의 심층적 정체성, 즉 자유를 향한 야망과 그로 인한 피비린내 나는 투쟁, 그리고 그 투쟁이 낳는 빛과 어둠을 모두 품고 있기에 단순한 '게임 속 악역'으로 치부하기에는 지나치게 복잡하고 현실적인 공감대를 형성한, 아주 희귀한 캐릭터가 됐다.

오히려 암스트롱은 마치 현실에 존재하는 정치인처럼, 논쟁을 떠나서 현대 문명과 인간 본성의 가장 위대하고도 어두운 욕망을 직시하고, 그것을 두려움 없이 연설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인물로 받아들여진다.

그의 신념을 긍정하며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조차 희생할수 있는 진정한 자유주의자이자 철학자 니체가 주장한 초인의 현신으로, 그의 신념을 부정하며 거부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겐 자신의 신념 하나를 실현하겠다고 세상을 끊임없이 싸우는 지옥으로 만들려 했던 광인으로 매우 극단적으로 상반된 평가를 받는 등, 그의 철학은 언제든 현실 세계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고 다시 깨어날 수 있는, 누군가에게는 이상이고 누군가에게는 공포일 최종적인 복합체다.

결과적으로 그는 지금도 북미권을 중심으로 팬덤의 끊임없는 재조명과 밈 소비, 정치 진영 간의 끝없는 논쟁을 이끌어내고 있으며, 비디오 게임 역사상 가장 잘 만들어진 악역 중 하나로 평가된다.

3. 옹호와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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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이 동영상에서는 암스트롱만 나오는 게 아니라 메탈기어 라이징 리벤전스에 나오는 주요 캐릭터들이 모두 가사에 걸맞은 모습들을 한 채 나온다.[2] 아예 주인공을 처음으로 두들겨 패고 저 하늘 높이 내던져 버린 뒤 떨어지는 라이덴을 타이밍 맞게 걷어차 날려버리면서 내뱉은 말이 "Don't fuck with this senator! / 上院議員を舐めんじゃねぇ!! / 상원의원한테 개짓거리 하지 마라!"였다.[3] 사실 이러한 모습은 단순한 괴리감만은 아니다. 현실의 미국 정치사에서도 강인한 육체 능력을 갖춘 정치인들이 제법 많았고, 대표적으로 배우 출신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26대 미국 대통령처럼 실력과 강인한 신체를 겸비한 정치인들이 존재했다. 오히려 미국 정치인이 '부드러운 이미지'를 앞세우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로, 특히 서부개척시대냉전기에는 강인한 마초 이미지가 없으면 선출되기 어려웠다. 암스트롱의 캐릭터성은 바로 그 미국 정치사에서 반복되어 온 '강인한 마초 정치인'의 전통을 아주 극단적으로 재현하며 북미권 팬들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낸 셈이다.[4] 이는 단순한 미화가 아니다. 암스트롱은 법과 제도, 명분이 아닌 개인의 의지와 무력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려는 방식을 이상으로 삼았고, 그의 말마따나 라이덴은 그의 철학을 가장 극단적으로 구현해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암스트롱이 라이덴을 두고 "후계자는 잘 만들었다"고 말한 것은 단순한 감탄이 아니라 자신의 철학이 결국 누군가에게 계승되었음을 확인한 자부심의 표현이기도 하다.[5] 인게임상에서 몬순에게 위선을 지적받은 라이덴은 말할 것도 없고, 솔리드 스네이크 역시 오타콘과 함께 MGS4에서 무기 세탁 행위를 하고 시리즈 내내 만악의 근원인 애국자들이 아닌 그 애국자들에게 대항하려는 사람들만 주구장창 사살하고 다니는 모순적인 악행을 벌였다. 추가로 필란스로피라는 극단적인 단체 가입도 서슴지 않았다.[6] 휴이 에머리히조차도 무죄설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들리지 않고, 빅 보스와 제로 소령의 사연과 논리는 허무맹랑한 개똥철학이나 마약에 취한 자의 헛소리가 아니라 층분히 이해가 잘 가는 이야기들이다.[7] 특히 일본판에서 그가 셀럽과 메트로섹슈얼 문화를 비판한 발언이 이들의 공감을 얻은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8] 한국에선 진보=무조건 좌파, 보수=무조건 우파라는 진영논리 말장난이 하도 오래 유지된 덕에 많이들 낯설어 하기 쉽다.[9] 흔히 한국에서 미국의 전쟁을 '민주주의 수출'이라 우스갯소리처럼 말하곤 하지만, 이 농담은 사실 미국의 본질을 꽤 정확히 짚고 있다. 미국은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자국의 혁명적 자유주의 이념을 수출 가능하게 현지화한 형태로 설계하여, 때로는 각국에 강제로 이식함으로써 패권을 유지해왔다. 따라서 미국의 전쟁은 단순한 군사 개입을 넘어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자국의 정치철학을 전파하고 정당화하는 구조적 패턴을 따른다. 이는 소련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그들 역시 전쟁과 개입을 통해 공산주의라는 근대 혁명 이념을 각국에 수출함으로써 세계적 패권을 추구했다. 그렇기 때문에 팬들 사이에서 암스트롱의 주먹질 장면을 두고 "민주주의 맛을 보여주고 있다"고 우스갯소리가 나왔던 것은 사실 미국이라는 국가의 이념적 구조와 패권 실천 방식이 대중의 무의식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기에 가능했던, 꽤 본질을 정확히 꿰뚫은 상징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10] 마찬가지로, 근대적 공산주의 혁명 이념을 바탕으로 세워진 소련이나 중국에서도 보수주의는 혁명가를 자처하며 원리주의적 마르크스-레닌주의 혹은 마오주의를 고수하며 급진적 색채를 띠고, 진보주의는 미하일 고르바초프덩샤오핑처럼 온건한 국가자본주의시장 개혁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이념 수출형 체제에서의 보수-진보 구도는 왕정과 어느정도 연계성을 공유하는 타 국가들의 전통적인 의미와 다르게 전도되는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현재처럼 냉전적 패권 경쟁 구도가 재점화된 시기에는, 미국과 중국 모두에서 보수주의적이면서 동시에 각자의 건국이념과 밀접한 혁명적 성향을 지닌 지도자, 즉 도널드 트럼프시진핑이 서로를 맞상대로 하는 대립 구도가 형성되고 있다.[11] 파이트 클럽을 통해 자신만의 '리틀 암스트롱 월드'를 구축했다고 볼 수 있다.[12] '완전한 자유와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든 제거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무장한 존재이다. 그래서 ‘극심한 애국자’라는 이명으로도 불린다. 이러한 그의 평가는 앞서 언급한 문제점들에 대한 목소리와는 달리, 스트리밍 시리즈에서는 완전히 선역으로 묘사된다. 이전까지 저질렀던 악행들조차 단순히 이 녀석도 사실은 불쌍한 녀석이었어 같은 진부한 동정 클리셰로 끝나는 수준이 아니다.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 당시에 피스메이커가 보여준 태도들은 그야말로 현 미국 정부의 결점 및 패권주의를 집대성해 놓은 수준이었지만, 오히려 "저런 환경에서 자라났는데도 겨우 저 정도로만 망가진 게 기적 아닌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의 행동 모두가 설득력 있게 참작된다.[13] 사실 '노빠꾸' 적인 면 하나만 보면 도덕따위 상관 안하는 부하 선다우너가 훨씬 노빠꾸다. 대놓고 법과 도덕 따위 다 X까고 인간의 잔혹성 그대로 살아가자는 대사가 있다는거 보면. 그런데 이쪽은 너무 평면적인 악역이라서 암스트롱 보다는 인기가 덜하다.[14] 또한 라이덴(메탈기어 시리즈)/작중 행적 문서를 들어가 보면 알겠지만, 라이덴의 에필로그 이후의 성향은 마블 코믹스퍼니셔와 매우 비슷해졌다는 것을 보면 라이덴 역시 암스트롱의 후계자라는 것이 매우 극명하게 드러난다.[15]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서 몇몇 팬들이 '솔리드 스네이크는 라이덴을 사람 만들어준 인물'로 존경하는 한편, 암스트롱이 금수저일 것 같다는 이유로 라이덴에게 미친 긍정적인 영향은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또한 드러난다. 솔리드 스네이크는 11살까지 무서운 아이들 계획에 사용되다 계획이 폐기되고나선 미국을 떠나지 않은 정황상 소년병 출신인 라이덴보다 훨씬 나은 교육 환경과 지원을 받은 인물이었고, 반대로 암스트롱은 설정과 작중 묘사를 볼 때 시골 깡촌 혹은 저소득층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즉 계층으로 분리할거면 완전히 반대로 공격대상을 잡은 것.[16] 스컬 페이스는 약육강식의 자유를 주장한 스티븐 암스트롱과 정반대로 약자에게도 공정한 사회를 만들고자 했으나 그 방식이 세계 공용어인 영어를 쓰는 사람들을 모두 학살하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과 증오를 구현하는 방식이라 수단은 다를 바가 없었다.[17] 그리고 더 보스핫 콜드먼, 제로 소령은 소재가 부족하며, 그나마 도널드 앤더슨시긴트란 이름으로 활동하던 시절, 다시 말해 메기솔3 때의 대사들이 2022~2023년간 막장 플레이의 일종인 "Cursed Guns" 밈에 끼어들면서 잠깐 재조명받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것도 팀 포트리스 2의 엔지니어 대사로 시작한 Nope 밈처럼 단순히 인간 효과음 수준에서 머무르고 있기 때문에 암스트롱에 비할 바는 전혀 못 된다.[18] 명문대와 금수저가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 있으나 미국은 기부입학 제도 때문에 명문대 출신 기업인이나 정치인이면 실제로 맞든 아니든 곧잘 금수저 이미지와 연결되는 일이 잦다. 별 위화감 없이 곧바로 이런 논란이 생겼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이것도 암스트롱이 플레이어들에게 아주 현실감 있는 캐릭터로 다가왔음을 보여주는 부분.[19] 따라서 현재까지도 그의 사상을 이렇다 하게 논파할 방법이 딱히 보이지 않기에 암스트롱의 안티들마저도 상호확증파괴 이론 자체를 부정하고서도 평화로이 살 수 있어야만 깨져나가는 핫 콜드먼의 논리와 더불어, 메탈기어 연대기의 악당들 중 가장 그 주장을 꺾기 어려운 상대라는 것은 인정하는 분위기.[20] 실제 미국 정치사에서도 대표적인 사례로 캔자스 주 출신으로 군에 입대해 미식축구 선수 생활을 거쳐 대통령에 오른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자수성가형 인물로 알려진 해리 S. 트루먼 등이 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정치는 유럽 귀족풍의 상류층 이미지를 벗고, 자수성가형 강인한 인물들이 높은 인기를 끌며 대통령에 오르는 경향이 강해졌다. 암스트롱 역시 해군 출신, 미식축구 선수, 대통령 후보라는 설정을 감안하면, 제작진이 의도적으로 냉전기 대통령들의 강인한 이미지를 투영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21] 작중에서 라이덴의 활인검이 암스트롱의 손에 맥없이 두동강나는 것도 이를 상징하는 것이다. 결국, 암스트롱의 철학에 반대하는 플레이어들에게조차 그의 사상은 '논파'의 대상이 아니라 또다른 사상으로 '응수'해야할 대상이라는 결론에 수렴하며, 그것이 바로 암스트롱이 주장하는 '투쟁'의 의미이자 제작진들이 서사의 이면에 숨겨둔 메시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22] 암스트롱의 철학은 바로 이 니체적 전제인 '도덕적 절대 기준의 부재' 를 받아들이면서, 그 위에 실질적 자유와 정의는 오직 개개인의 신념과 투쟁을 통해 쟁취해야 한다는 해석을 덧붙인다. 니체가 ‘힘에의 의지’를 통해 정신적 강함과 고귀한 인간상(거리의 파토스)을 추구했다면, 암스트롱은 물리적 충돌과 이념 간 논쟁을 통해 자유와 질서를 동시에 다지는 새로운 자유지상주의 원칙을 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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