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16 18:45:13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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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리아 왕조 미하일 2세 | 테오필로스 | 미하일 3세
마케도니아 왕조 바실리오스 1세 · 콘스탄티노스 | 레온 6세 | 알렉산드로스 2세 | 콘스탄티노스 7세 | 로마노스 1세 · 흐리스토포로스 레카피노스 · 스테파노스 레카피노스 · 콘스탄티노스 레카피노스 | 로마노스 2세 | 니키포로스 2세 | 요안니스 1세 | 바실리오스 2세 | 콘스탄티노스 8세 | 로마노스 3세 | 미하일 4세 | 미하일 5세 | 공동 즉위 조이 · 테오도라 | 콘스탄티노스 9세 | 2차 재위 테오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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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니노스 왕조 이사키오스 1세
두카스 왕조 콘스탄티노스 10세 | 미하일 7세 · 콘스탄티오스 두카스 ·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 로마노스 4세 · 레온 디오예니스 · 니키포로스 디오예니스 | 니키포로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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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겔로스 왕조 이사키오스 2세 | 알렉시오스 3세 | 2차 재위 이사키오스 2세 | 알렉시오스 4세 | 알렉시오스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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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카리스 왕조 테오도로스 1세 | 요안니스 3세 | 테오도로스 2세 | 요안니스 4세 | 미하일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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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팔레올로고스 왕조 미하일 8세 | 안드로니코스 2세 | 미하일 9세 | 안드로니코스 3세 | 요안니스 5세 | 공동 즉위 요안니스 6세 | 2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공동 즉위 안드로니코스 4세 · 요안니스 7세 | 3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2차 재위 요안니스 7세 · 안드로니코스 5세 | 4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마누일 2세 | 요안니스 8세 | 콘스탄티노스 11세
아우구스투스 ·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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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gnotus: 불명
황제 겸 집정관 }}}
201년 202년 202년 보결 203년 204년
루키우스 안니우스 파비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페르티낙스 아우구스투스 티투스 무렌니우스 세베루스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 루키우스 파비우스 킬로 셉티미누스 카티니우스 아킬리아누스 레피두스 풀키니아누스
마르쿠스 노니우스 아리우스 무키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레갈리아누스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마르쿠스 안니우스 플라비우스 리보
204년 보결 205년 206년 206년 보결 207년
루키우스 폼포니우스 리베랄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움브리우스 프리무스 세네키오 알비누스 푸블리우스 툴리우스 마르수스 루키우스 안니우스 막시무스
ignotus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카이사르 루키우스 풀비우스 가비우스 누미시우스 페트로니우스 아이밀리아누스 마르쿠스 카일리우스 파우스티누스 가이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페르
208년 209년 210년 211년 212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파우스티누스 헤디우스 롤리아누스 테렌티우스 겐티아누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스페르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카이사르 퀸투스 헤디우스 롤리아누스 플라우티우스 아비투스 아울루스 트리아리우스 루피누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밀리우스 아스페르
212년 보결 213년 214년 215년 216년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퀸투스 마이키우스 라이투스 푸블리우스 카티우스 사비누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데키무스 카일리우스 칼비누스 발비누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아피우스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 마르쿠스 무나티우스 술라 케리알리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아눌리누스
217년 218년 218년 보결 219년 220년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세베루스 마크리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티투스 메시우스 엑스트리카투스 마르쿠스 오클라티니우스 아드벤투스 퀸투스 티네이우스 사케르도스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코마존
221년 222년 223년 224년 225년
가이우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사비니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페르페투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 티베리우스 마닐리우스 푸스쿠스
마르쿠스 플라비우스 비텔리우스 셀레우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알렉산데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로스키우스 아일리아누스 파쿨루스 살비우스 율리아누스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크리스피누스 세르비우스 칼푸르니우스 도미티우스 덱스테르
226년 227년 228년 229년 230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세네키오 알비누스 퀸투스 아이아키우스 모데스투스 크레스켄티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비리우스 아그리콜라
가이우스 아우피디우스 마르켈루스 마르쿠스 라일리우스 풀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 마르쿠스 폼포니우스 마이키우스 프로부스 카시우스 디오 섹스투스 카티우스 클레멘티누스 프리스킬리아누스
231년 232년 233년 234년 235년
루키우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루키우스 비리우스 루푸스 율리아누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아킬리우스 프리스킬리아누스 마르쿠스 클로디우스 푸피에누스 막시무스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살루스티우스 파일리그니아누스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파테르누스 마르쿠스 무나티우스 술라 우르바누스 루키우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퀸티아누스
236년 237년 238년 239년 240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미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 [루키우스] 풀비우스 피우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아피우스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
마르쿠스 푸피에누스 아프리카누스 막시무스 루키우스 뭄미우스 펠릭스 코르넬리아누스 폰티우스 프로쿨루스 폰티아누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 루키우스 라고니우스 베누스투스
241년 242년 243년 244년 245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아티쿠스 사비니아누스 루키우스 안니우스 아리아누스 티베리우스 폴리에누스 아르메니우스 페레그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클로디우스 폼페이아누스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레피두스 프라이텍스타투스 가이우스 케르보니우스 파푸스 풀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 가이우스 마이시우스 티티아누스
246년 247년 248년 249년 250년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풀비우스 가비우스 누미시우스 아이밀리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메시우스 퀸투스 트라야누스 데키우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알리우스 알비누스 마르쿠스 율리우스 세베루스 필리푸스 카이사르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세베루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나이비우스 아퀼리누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251년 252년 253년 254년 255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메시우스 퀸투스 트라야누스 데키우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비비우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비비우스 볼루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퀸투스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 메시우스 데키우스 카이사르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비비우스 볼루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 발비누스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256년 257년 258년 259년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 아킬리우스 프리스킬리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투스쿠스 (눔미우스) 아이밀리아누스 (덱스테르)
마르쿠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뭄미우스 바수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260년 261년 262년 263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사이쿨라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알비누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도나투스 루키우스 페트로니우스 타우루스 볼루시아누스 눔미우스 파우스티아누스 덱스테르 (막시무스)
동방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풀비우스 퀴에투스 아우구스투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호노라티아누스
264년 265년 266년 267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오비니우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퀼리우스 파테르누스
사투르니누스 루킬루스 사비닐루스 아르케실라우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피아보니우스 빅토리누스
268년 269년 270년 271년
아스파시우스 파테르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에그나티우스 마리니아누스 파테르누스 비리우스 오르피투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피아보니우스 빅토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피아보니우스 빅토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아우구스투스
산크투스
272년 273년 274년 275년
티투스 플라비우스 포스투미우스 퀴에투스 아울루스 카이키나 타키투스 또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유니우스 벨둠니아누스 율리우스 플라키디아누스 카피톨리누스 (아우렐리우스) 마르켈리누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아우구스투스
노빌리시무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276년 277년 278년 279년 280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풀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 (루키우스 율리우스) 비리우스 루푸스 노니우스 파테르누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281년 282년 283년 284년 284년 보결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루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유니우스 티베리아누스 빅토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누메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카이소니우스 오비니우스 루피누스 마닐리우스 바수스 Ⅱ)
285년 286년 287년 288년
티투스 클라우디우스 아우렐리우스 아리스토불루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베티우스 아퀼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폼포니우스 야누아리아누스
동방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서방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 아우구스투스
288년 보결 289년 289년 보결 289년 보결
… a 마르쿠스 마그리우스 바수스 마르쿠스 움브리우스 프리무스 케이오니우스 프로쿨루스
… ivianus 루키우스 라고니우스 퀸티아누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코엘리아누스 헬비우스 클레멘스
브리타니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우사이우스 카라우시우스
289년 보결 290년 291년 292년
플라비우스 데키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티베리아누스 아프라니우스 한니발리아누스
… ninius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시우스 디오 율리우스 아스클레피오도투스
브리타니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우사이우스 카라우시우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우사이우스 카라우시우스
293년 294년 295년 296년 297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카이사르 눔미우스 투스쿠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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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년 299년 300년
아니키우스 파우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카이사르
비리우스 갈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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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25대 황제
{{{#FCE774,#FCE774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트라쿠스는 별명이다. 바바리누스라고도 불렀다. 막시미누스 황제 생전 불린 별명이 아닌, 당대, 후대 로마인 사가들이 사용한 별명이다. 어감상 바바리안과 같은 어원 같은 뜻임을 알 수 있으며 죽어서도 야만족 소리를 들었다.]
MAXIMINVS THRAX}}}
파일:트라쿠스고화질.jpg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미누스 트락스
(Gaius Iulius Verus Maximinus Thrax)
출생 173년
로마 제국 트라키아
사망 238년 (향년 65세)
로마 제국 아퀼레이아
재위 기간 로마 황제
235년 3월 ~ 238년 6월 (3년)
전임자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후임자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부모 아버지 : 미카
어머니 : 아바바
배우자 카이킬리아 파울리나
자녀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
종교 로마 다신교
1. 개요2. 생애
2.1. 로마군 역대 최강의 병졸2.2. 황제
2.2.1. 새 황제와 원로원2.2.2. 계속되는 소모전2.2.3. 후계자 막시무스 카이사르
2.3. 몰락
2.3.1. 암살
3. 평가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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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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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군인 황제 시대를 연 첫 번째 황제로, 이전까지의 로마 황제와 달리, 순수하게 군대 경력만 가진 직업군인 출신 황제이다. 후일의 막시미누스 다이아를 막시미누스 2세, 이 사람을 막시미누스 1세라고 부르기도 한다.

로마 역사상 최장신 통치자이자, 가장 체구가 거대하고 무력이 고강한 황제였다. 동시에 건국 이래 가장 무식하고 무례하며 독선적인 황제로 평가받는 인물로, 당대부터 폭군의 전형으로 불렸다. 본명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미누스(Gaius Iulius Verus Maximinus). 이름 뒤에 붙은 트라쿠스(Thracus), 트락스(Thrax)는 이 사람의 별명이다. 뜻은 트라키아를 정복한 자"(Thracicus)라는 칭호가 아니라, 두 단어 모두 '트라키아 사람'을 부른 말이다. 다만, 이 안의 속 뜻은 트라키아오랑캐이라는 비하의 뜻이 담겨 있었다.[2]

속주민 보조병 출신으로 황제가 된 최초의 사례로, 제위에 오르기 전까지 제4 이탈리카 군단의 대대장으로, 담당직책은 신병훈련 담당관이었다.

서기 235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게르마니아 지방의 모군티아쿰[3]에서 병사들에게 살해된 뒤 제위에 올랐다.

238년 자신에게 반기를 든 원로원을 제압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쳐들어갔지만 아퀼레이아 공방전 실패 후 제2 파르티카 군단 병사들에게 암살당했다.(여섯 황제의 해)

2. 생애

2.1. 로마군 역대 최강의 병졸

이름만 놓고 보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혹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세 황제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가이우스(통칭 : 칼리굴라)에게 자유 혹은 클리엔텔라 관계를 맺어 시민권을 얻은 로마인 같다. 이 부분 연구를 한 역사가 베넷의 설명에서도 통상적으로 "가이우스 율리우스" ,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4], "마르쿠스 안토니우스"[5],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6], "티투스 플라비우스"[7],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8] 등을 앞에 붙여 사용한 속주 출신 로마인들은 거진 본인 일가에게 자유 혹은 시민권을 준 파트로누스의 "개인이름+씨족성씨명"을 본인들의 본래 이름 앞에 붙여 사용했고, 이는 모스 마이오룸을 상식으로 여긴 로마에서 당연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베넷이 지적했듯이, 막시미누스는 이런 로마의 고유명사학 사례의 전형으로 불린 동시대의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고르디아누스 3세와 달리, 기원전 700년부터 서기 3, 4세기까지 유지된 이런 틀과는 전혀 무관하다. 이런 배경적 특징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오직 본인의 노력, 실력으로 로마 시민권을 얻은 1세대 로마 시민임에도 원로원, 로마인 모두 진정한 로마인이나 정상적인 클리엔텔라 의무 아래에서 로마인이 된 케이스가 아닌 반(半) 야만인으로 간주한 이유 중 하나가 됐다.

막시미누스의 출신은 혈통, 고향, 성장 배경 모두 로마 사회에서 가장 낮았다. 제국의 모든 자유민 주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카라칼라의 칙령으로 로마인이 된 사람들보다 낮았다. 그는 여러 고대기록과 현대 연구 모두에서 설명하듯이, 고향은 트라키아, 출신 민족은 트라키아 지방에서도 반야만족 취급을 하던 스키타이-사르마티아[9] 혹은 트라키아의 토착 민족인 게테족이다. 이는 동시대 사람으로 관료이기도 했던 헤로디아누스의 기록이므로 사실일 확률이 높다. 다만, 믿을 수 없는 사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막시미누스는 트라키아 혹은 모이시아에서 고트족 아버지와 일리리아계 로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후자의 주장은 일찌감치 고트족 연구자들과 게르만족 연구에 힘을 쏟은 근대 서양 학자들이 여러 근거를 거론하면서 거짓으로 판명 받아, 일찌감치 '참고용' 사료로만 쓰이고 있다. 물론, 영국과 뉴질랜드의 저명한 로마사 권위자 로버트 사임은 4세기 당시 로마인들이 트라키아 게테족과 고트족을 비슷한 부류로 생각해 뭉뚱그려 표기한 경우가 있다는 점을 이유 삼아, 관습처럼 비슷한 부류의 야만족으로 보고 그리 적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로버트 사임이 이렇게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막시미누스의 출신 및 성장 배경 모두 로마인, 자유민 경계 모두에서 반(半) 자유민, 반(半) 야만인으로 평가된 것은 사실이었다. 게르만족들도 야만족이라고 취급한 사르마티아인이든, 아니면 트라키아의 게테족 출신이든 간에, 막시미누스 부모의 이름은 믹카, 아바바라는 게테족, 사르마티아인들의 언어에서 기원한 야만족 이름이었던 것은 이런 평가가 나온 배경 원인 중 하나였다. 즉, 어머니가 일리리아계 로마인이라고 해도, 부모 중 한쪽은 로마인, 속주 거주 자유민이 최소 아니라는 뜻이었기 때문에 로마시민권자 자녀, 속주 자유민 중 정상적인 세금이나 부역 등으로 지역에 기여한 로마 제국의 일원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이 사람의 별명 "트락스", "트라쿠스"와 관련된 트라키아 일대는 이 당시는 물론, 카라칼라의 안토니누스 칙령에 따라 시민권이 부여된 이후에도 변방의 대명사로 분류된 지방이다. 이 중 막시미누스가 태어나고 자랐다는 동북쪽 일대는 같은 트라키아 속주 내에서도 주민들에게 반야만족 취급을 받던 동네였다. 즉, 원로원과 이탈리아 지역 로마인들이 막시미누스를 반야만족 취급하면서 가짜 로마인이라고 여겼듯, 같은 트라키아 동네에서도 막시미누스는 출신과 혈통 모두 사회 끝자락 태생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막시미누스는 동로마 제국 시대의 요안니스 조나라스 등의 기록까지 종합하면 서기 173년생임이 확인된다. 그는 당시 트라키아 속주에서 가장 발전이 더디고, 변방 중 변방 접경지로 평가된 트라키아 동북부 경계에서 태어났다. 이 동네에서도 최하층 태생 중 최하층 출신. 그것도 로마 제국의 변방 트라키아 국경 끄트머리에 사는 속주민 농부(양치기) 집안에서 태어난 뒤, 산야에서 목동으로 10대까지 로마의 정상적인 지배, 지역 유지와 주민들이 말하는 의무를 온전히 하지 않던 배경 아래 접경지를 오고 가는 자유민 출신이다. 쉽게 말하면 서기 2세기 말 로마 제국 안에 떠돌며 국경 변두리에서 왔다갔다 하는 양치기 자유민 가족 출신으로, 반(半) 로마인과 반(半) 야만인 경계 모두에 해당되는 자유민이 막시미누스였다. 당연한 말인데, 막시미누스의 부모는 애당초 로마시민권을 가진 적도 없는 사람들이고, 친가와 외가 역시 비슷했다. 고향과 태어나고 자란 지역 역시 비슷했다. 트라키아 변경 중 끝자락이고 지명 이름도 불명확해 알 수 없고, 유년기를 함께 한 또래들 역시 모른다. 왜냐하면 변방에서 양치기 생활을 하며 살던 부모 밑에서 양치기 생활을 한 까닭에 일정한 거주지도 없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원로원과 이탈리아 지역 로마인들은 물론, 같은 트라키아 동네와 그 근처의 발칸 출신 로마인, 속주민들에게도 막시미누스는 말 그대로 야만족 내지 반(半) 야만족으로 당연히 인식됐다. 그래서 후대 로마, 동로마 기록에서도 6세기의 동로마 관료 요르다네스는 막시미누스 생전의 동시대 로마에서 사용하지 않던 단어인 "Gothia"로 그를 설명하면서, 그가 어떤 위치의 신분이었는지 설명했다.

어떤 이름, 어떤 배경으로 살았는지 불분명하다. 그러다가 그는 야망있는 또래 속주민들이 그렇듯이 출세를 위해, 또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출신보다는 능력이 중시되는 로마군에 보조병으로 입대했다.[10][11] 그러니까 막시미누스는 태어났을 때부터 로마 시민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발칸 반도 출신의 속주민,[12] 또는 어쩌면 그 당시 로마인들이 말하는 '문명화된 야만족'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브렌트 쇼의 경우,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가리켜, 3~5세기 동안 집권한 발칸 반도 출신의 하층민 태생 로마 황제들[13]처럼 제국 서방과 동방 출신 로마인들에게 "야만족"이라고 인식된 황제라고 그를 평하면서, 그들처럼 군입대 역시 제국 안에서 시민권을 따고 성공하고자 그랬을 확률이 높다고 말한다. 다만 함께 거론된 이들은 카라칼라의 안토니누스 칙령 이후, 로마시민권을 가진 가정 출신이거나 태어날 때부터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어 굳이 시민권을 얻고자, 군에 입대할 필요가 없었다. 즉, 그들과 비교해도 막시미누스는 이들과 달리 로마 사회에서 출발선이 다른 '야만족'이었다.

낮은 신분으로 입신양명하기 위해 입대한 그는 비록 헬라어(그리스어)는 전혀 알지도 못하고 로마군의 공용어인 라틴어에조차도 지독하게 서툴렀지만, 젊은 시절부터 키가 8피트 6인치라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14]로 체격도 매우 좋고 힘도 좋고 털털하고 친근한 성격에 호쾌한 청년이었다고 한다. 그는 무려 말과 달리기 시합을 해서 이기고, 엄지손가락이 어찌나 굵은지 귀부인의 팔찌를 반지로 써도 될 정도였으며, 마차 한 대쯤은 가볍게 맨손으로 끌었고, 주먹으로 말의 턱을 때리면 말의 이빨이 우수수 털려나왔다고 한다. 과장이 많이 섞이긴 했지만 그야말로 엄청난 괴력과 강건한 신체를 지녔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또한 그냥 힘만 센게 아니라 항우여포처럼 그 힘을 응용한 무기술과 체술, 임기응변, 화술에도 뛰어났던 것으로 보이는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친히 전방부대 시찰을 왔을 대 열린 군단 무투대회에 참가하여 손쉽게 보조병 소속 전종목 우승을 따냈지만 당시 로마군에서는 분란방지를 이유로 군단병과 보조병의 대련이 금지되어있었기 때문에 군단 최강의 칭호는 가지지 못한데 불만을 가지고 황제 앞에 나가서 군단병들과도 대결하게 해달라고 직소를 했다. 분명 일개 병졸이 최고 군통수권자앞에 나선 것은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황제 자신이 보기에도 그 풍채가 매우 그럴싸해보였는지 특별히 예외를 적용해서 군단병과의 대결을 허락하였고, 결국 군단 최강의 칭호는 내로라 하는 군단병들까지 모두 쓰러뜨리고 우승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에게 돌아갔다. 그 무용이 맘에 든 황제는 그를 즉석에서 로마시민권을 주며 황제 직속 경호대원으로 스카웃했다.

그 뒤로 전투력을 인정받아서, 황제 경호대를 거쳐 다시 전방 군단에 백인대장으로 인사 이동했고, 이후 뛰어난 전투력과 야전 능력을 인정받아 카라칼라 시대 후기부터는 대대장까지 오르게 된다. 막시미누스는 이때 게르마니아, 판노니아 일대에서 주로 근무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근무 생활 중 카라칼라가 암살되고 마크리누스를 거쳐, 세베루스 왕조가 재건된다. 그러다가 희대의 성애 중독 황제 엘라가발루스에게 갑자기 로마로 소환되어 "네가 그렇게 힘이 쩔어준다던데, 내 앞에서 여자 수십 명하고 밤새도록 하렘플레이 해보겠는지?" 이라는 성희롱을 듣고는 그대로 군대를 그만두고 귀농해버렸다. 그러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에 비슷한 사례로 군대를 떠난 옛 장교들이 복귀하는 과정에서, 막시미누스 역시 군에 복귀한다. 이때 그는 비슷한 사례의 군인들과 비슷하게 그 전까지 근무했던 지역에 배속되는데, 최전방인 레누스[15] 방어선의 신병교육대장으로 발령받았다. 전설적인 전투력과 경력과 인기와 인맥을 갖췄고, 나이가 당시 기준으로 고령인 점을 떠올리면, 신병 교육 및 실전 투입 모두 가능한 부분이 고려된 결과로 추정된다. 그래서 군단장은커녕 전투대대장으로도 진급하지 못한 채 신병교육대장에 그친 것은 그의 전략이나 행정보급 면에서의 능력이 너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해석하기에는 곤란하다는 평을 듣는다. 막시미누스가 맡은 당시의 제4 이탈리카 군단, 해당 군단의 신병 교육대장의 보직상 분명히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능력은 로마군 내에서 압도적이었다고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레누스 전선 전체의 신병 교육 및 실전 교육을 책임진 중책임에도, 실제 지위와 달리 일반적인 로마군 대대장들보다 그 활용이 제한적이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개인적인 능력은 전투 수행 부분 외에서는 내부적으로 좋은 평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정된 이유 역시 그렇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어와 군사학등 온갖 고급 교양지식을 필요로 하는 상류층 인텔리 보직인 대대장이 아닌 대대 백인대장 짬킹 정도의 입지에 가까웠다는 평 역시 사실이라는 이야기다.

제정시기 로마군에서 대대장의 업무는 기행 참모에 가깝고, 대대급 전투병력의 현장통솔은 대대 선임 백인대장이 담당했다. 어쨌든 라인강 군단의 신병들에겐 백발이 되도록 나이를 먹고도 훈련장에서는 그 무한한 체력으로 혈기왕성하게 덤벼오는 신병들을 모조리 레슬링으로 쓰러뜨리면서도 내무생활 간에는 성격 털털하고 출신 안 따지는 대부 혹은 큰형님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에게 교육받은 후 자대배치 받고 복무중이었던 레누스 일대 군단병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았다. 동시대 역사가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막시미누스는 신병들로 구성된 부대의 지휘관으로, 레누스에서 신병들이 대거 배치되어 훈련과 실전을 병행한 제4 이탈리카 군단의 대대장이었다"고 한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까지 교관으로 뛰면서 병사들의 인기가 대단한 탓에,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가 돈으로 평화를 샀다는 소문이 퍼져 반란이 일어났을 때, 라인 강 방어선의 군단병들 입에서 차기 황제로 언급됐다. 이때 막시미누스를 적극 지지한 병사들은 게르마니아와 모군티아쿰을 군단기지로 삼고 있던 제22 데이오타리아나 군단[16]이었다고 하며, 그가 몸을 담고 있던 제4 이탈리카 군단 등 게르마니아 일대의 레누스 부대들과 동방에서 지원차 합세한 부대들까지 힘을 보탰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막시미누스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황제로 추대됐다. 이때 그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그와 별로 인연이 없던 본국 이탈리아의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까지도 막시미누스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2.2. 황제

2.2.1. 새 황제와 원로원

병사들의 추대로 제위에 오른 직후, 자신을 옹립한 병사들에게 황제 모자와 로마에서 온 원로원 의원들, 고문단 전체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막시미누스는 동시에 로마에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쪽 지지자들을 죽일 병력을 보냈다.

막시미누스의 명령을 받은 병사들은 황제 막사로 쳐들어갔다. 이때 그들은 황제 막사에서 전쟁 전략 회의 중인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모자를 비롯하여 황제의 개인고문, 세베루스 왕조의 황제 고문, 장군, 원로원 의원들을 체포했는데, 병사들은 황제 모자 외의 모든 인사들을 선별해 일부는 그 자리에서 죽이고, 일부는 구금하는 식으로 처리했다. 이에 황제는 병사들에게 억울, 분노, 배신감을 토로했고, 병사들 역시 황제 모자를 알렉산데르 마마이아라고 조롱했을 뿐 실정을 탓하지 않아 일단 처형하지 않는다. 이에 막시미누스는 휘하 백인대장을 처형 명령자로 파견하고, 머뭇거린 병사들의 마음을 다잡게 한 뒤, 이날 새벽 황제 모자를 죽였다. 동시에 그는 자신에게 지지 의사를 표한 장군 등 지휘관들의 협력 아래 원로원에게 승인받는 방법에 몰두한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모자를 죽인 뒤, 막시미누스는 병사들이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율리아 마마이아를 불신임한 뒤 처형한 다음 자신에게 보라색 망토를 입혔다는 즉위 등극 소식을 적어 원로원에 통보한다. 이때 그는 전선에서 자신을 승인한 장군, 원로원 의원들을 보내, 이들을 대리인 삼아 정중히 자신의 즉위가 불가피했다며 군대의 뜻에 따라 추인할 것을 요청한다. 새 황제의 출신, 성장 배경에 대한 불만이 있을 수 있는 원로원에게 내전 가능성을 협박하면서 승인해달라는 압박이었다. 로마 시민도 아닌 트라키아 야만족 출신에 부사관이 즉위 자체가 찬탈형식이나, 병사들이 옹립했다고 통보했고, 갈리아에서는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모자를 불신임한 것이 보고로 올라오는 등 분위기가 심각해, 원로원은 일단 수긍했다. 원로원은 막시미누스를 내켜하지 않았을 뿐 증오하지 않았는데, 이들은 막시미누스의 제위 등극 이후 절차를 모두 수용했다.

허나 막시미누스가 등극 이후 내보인 태도, 상황은 원로원의 불만을 낳았다. 새 황제가 보낸 병사들은 세베루스 왕조의 시리아인 시종들을 잡아 죽이고, 율리아 마마이아가 초빙하거나 기용한 이들을 체포하는데 혈안이 됐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막시미누스는 늘 원로원을 의심했다. 그는 툭하면 꼬투리 잡아 자신들을 숙청하는 상황을 반복했다. 더해 막시미누스는 원로원을 부하처럼 대하면서, 자신이 언제 로마에 올지 통보하지 않고, 대리인들을 보내 원격 통치하고 감시한다. 이런 새 황제의 모습은 협력하되 일단 두고 보겠다는 입장을 고수한 원로윈의 심기를 자극했다. 그러니 원로원은 곧 막시미누스 대리인들을 서서히 미워했고, 막시미누스의 대리인들 역시 원로원을 미워하고 증오했다. 막시미누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대리인들이 고발을 하면 본인이 한술 더 뜨는 식으로 원로원 인사들을 압박하고 처벌했다. 그러니 재위 1년도 못 되어, 양 측의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다.

원로원이 그를 미워하고 내켜하지 않은 이유는 많았다. 먼저 막시미누스 황제는 제위 등극 초기부터 원로원 의원이라고 하면, 증오심을 표출하면서 그들이 음모를 꾸미고 늘 자신을 안 좋게 본다며, 노골적으로 그 적대감을 드러냈다. 그는 로마는커녕, 이탈리아도 방문하지 않았다. 이런 모습은 이전의 트라야누스 사례도 있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집권 이후부터 일반 사병 출신 지휘관들의 등용이 늘어난 원로원에게는 게르만족과의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넘어갈 이유가 많았다. 하지만 막시미누스가 걸핏하면 원로원이 문제가 많다며 씹어대고, 그 비난 수위가 높아지는 것은 원로원의 불만을 낳았다. 양측 감정의 골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졌다.

따라서 재위에 오른 지 1년 만에 원로원 대부분 인사들은 막시미누스를 진짜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원로원 대다수는 그를 교양 하나 없는 반 야만족이라고 비방하지 않았다. 일단 두고 보자, 참고 보자는 식으로 응수했고, 막시미누스의 발언들이 문제가 많더라도 이를 지적하지 않고, 황제를 자극하지 않았다. 하지만 막시미누스는 원로원의 이런 선 넘지 않는 대응에 의심을 품었고, 사소한 보고에도 과민반응했다. 그는 증오심을 표출했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꼬투리잡아 처벌받은 이들 중 첫 희생자가 된 쪽은 원로원 의원 출신 장군과 원로원 집안 출신의 장교들이었다. 이들은 트락스에게 모욕당하거나 징계를 받았다. 일부는 해임 통보를 받지 않고, 추방됐고, 법정에서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는 것마저 통보로 전해 들었다. 또 막시미누스는 진짜 교양 없고 무례했는데, 이는 고대 기록 중 원로원 입장이 아닌 기록들에서도 일관된 것을 볼 때 과장 된 것이 아닌 사실로 보인다.

물론 변방 야만족 출신인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로마군에는 역대로 낮은 신분에서 능력을 증명해 집정관까지 오른 인사가 공화정 이래 많았고, 제정 시대에도 지방도시, 변방 또는 하층민 출신 명장들과 밑바닥부터 출세해 제국의 요직을 차지한 이들이 수두룩했다. 앞세대의 페르티낙스, 트락스가 동시대 경험한 엘라가발루스 시대 당시, 프라이펙투스 우르비, 근위대장을 3년 연속 겸직한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코마존 모두 하층민 태생이었다. 특히 코마존은 후계자 시절 콤모두스와 다른 지휘관들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제국의 최상층부까지 승진한 전형적인 이 부류의 인사였다.

그런데 막시미누스는 여타 비슷한 환경에서 승진을 거듭한 군대 출신 인사들과 달리, 로마인들 기준에는 황제로 인정하기 힘든 위인이었다. 괜히 원로원이 아닌 일반민중들까지 이름 뒤에 '트라쿠스'[17]을 붙여 비난한 게 아니다. 그는 다른 군인들과 다르게 그리스어는커녕 모국어인 라틴어도 교양있게 하지 못했다. 여타 일반 사병 출신들, 특히 백인대장 이상까지 승진한 이들과 달리, 그는 기본적인 로마법이나 관습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중요시 여기지 않았다.

이는 비슷한 환경에서 태어나 성공한 일반 사병 출신 장교들과 큰 차이가 있었다. 대개의 하층민 출신 사병들은 로마시민으로서 최소한 라틴어는 읽고 쓸 줄 알았고, 기회가 되면 최대한 교양도 갖추고 여러 관습을 숙지해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그들 대부분은 출세를 위해 기본적인 행정실무에 필요한 라틴어, 그리스어를 공부하고 로마법도 숙지했고, 기혼자는 아내와 자녀들도 로마인의 관습을 익히도록 신경썼다. 이는 미혼자도 비슷해, 그들은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면 늦깎이 결혼을 통해 기사계급 이상의 로마인 가정 출신의 가임기 여성과 결혼했다. 더군다나 막시미누스가 청장년기를 보낸 시기는, 아프리카 속주 중 동쪽인 트리폴리타니아 출신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집권 이후였다.[18] 이는 곧, 황제의 권한이 중앙집권화되고 군대 출신들이 대거 관료층에 편입되면서 원로원 역시 어느 정도 이런 변화에 익숙해진 상황이었음을 말한다. 따라서 막시미누스가 보조병 출신으로 본인 대에야 로마시민권을 획득했다고 해도, 본인이 이런 부분에서 신경을 기울였다면 그 평가는 상당히 달라질 여지가 많았다.

물론 막시미누스 입장에서 보면, 로마시민 출신 군인들과의 이런 비교는 억울할 수도 있다. 황제의 총애로 진급한 야만족 출신 귀화인인 그 역시 로마 중류층 출신으로 추정된 아내를 맞이했고, 외아들을 날 때부터 라틴어, 그리스어 모두를 익히게 하고, 큰돈을 쏟아 기사계급 이상 자제가 갖출 모든 교육으로 기르는 등 최선을 다했다. 또 그는 황제 경호원을 거쳐 프라이토리아니 하급 병사를 거쳐 전방에 나가 백인대장, 대대장으로 야전, 행정 경력도 성실히 쌓았다. 그러다가 대대장때 만난 황제가 하필이면 엘라가발루스였고, 엘라가발루스 때문에 경력 단절로 큰 피해를 입었다. 엘라가발루스가 몰락하고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즉위한 뒤, 따로 그를 황제가 일가족 전체를 초대해 용서를 구했을 정도로, 트락스 입장에서는 원로원 입성의 순간 좌절한 증거는 분명히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비난은 어느 정도 막시미누스의 즉위 전 경력도 생각하고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엘라가발루스의 재위기간은 14년도 아닌 고작 4년에 불과했고, 엘라가발루스가 성희롱 하였을 당시의 막시미누스는 이미 적어도 40대 중후반은 되었다. 즉, 엘라가발루스 이전에도 충분히 그가 기회를 받았으나 그만큼 군대나 군행정에서 두각을 보이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더해 막시미누스는 본인이 세베루스의 눈에 띄여 경호원이 된 이래로,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세베루스, 카라칼라 모두에게 군경험과 승진을 하면서 충분히 제국 내에서 출세할 시험을 받아, 그가 원로원 입성 문턱에서 미끄러진 것은 그가 경쟁자 대비 필요한 교양과 경험, 지식을 쌓지 못했다고 해석이 충분히 가능하다. 게다가 엘라가발루스가 살해되고 알렉산데르 치세 때 복귀하여 로마 엘리트로 승격할 기회를 얻을 시간은 13년이나 더 주어졌고, 그가 복직하고 트락스의 아들 막시무스가 알렉산데르에게 귀족용 의복을 받고 기사계급 자제 대우 아래 공직자 명부 입성 기회까지 받은 과거 등을 떠올리면, 세베루스 왕조가 그를 마냥 탄압했다고 할 수는 없다. 즉, 베스파시아누스 같이 커리어를 중간에 끊어먹어도 나중에 복귀하여 장군이나 황제가 된 자도 있고, 본인 역시 복직 후 아들이 황제에게 차기 원로원 새내기 시작인 명부 등록을 허락받는 것을 보면, 트락스 개인의 문제였던 것이다.

막시미누스는 겪은 문명인의 사회생활이란 거칠디 거친 로마군 부사관 경험이 전부였고, 기본적으로 그는 신병들과 부하들에게만 좋은 형일 뿐 다른 직군 종사자들과 인간관계를 깊게 맺지 않을 정도로 꽤 폐쇄적이었다. 이는 그의 아내 카이킬리아 파울리나 역시 남편이 즉위한 이후 로마와 이탈리아를 방문한 적이 없었고 교류도 없다시피한 사람 같아도 최근 발굴된 비문을 통해, 아내의 경우, 문제가 많은 남편과 달리 유순하고 온화했다는 말이 여럿 있고, 아들 막시무스 역시 아버지와 달랐다고 평가받은 점에서 오롯이 그의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더해 막시미누스는 이런 개인적 결점으로 아들의 혼처를 망쳤다거나, 아들의 인기가 높아지는 순간 찬물을 끼얹는 등 저속하고 천박한 행동을 하는 등 행실이 모든 계층에서 두루 좋지 못하기로 유명했다.

막시미누스가 청장년기를 보낸 2세기, 3세기 로마 제국은 공화정 후기, 서기 1세기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플라비우스 왕조 그리고 트라야누스 시대와 달리 여러 부분에서 제국 관료 집단 구성 및 양성 방법이 변화하고, 그 과정에서 원로원 구도 역시 속주[19] 출신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본래 로마 제국의 선출직 정무관과 관료제 아래의 중앙, 속주 관리들의 업무는 기본적으로 건국부터 군대 조직과 민간 조직이 하나로 결합되거나, 함께 처리해야 방식이었다. 따라서 로마 엘리트들은 원로원이나 관료가 되기 전, 군에 들어가 군역의무를 맡으면서 자연스레 군공을 쌓고 여러 행정실무 기술을 배웠다. 이는 황족, 세습 원로원 귀족청년들도 당연히 거쳐야 될 일종의 엘리트 교육 중 필수 교육이었다.[20] 하여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친혈육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성년식을 마친 직후부터 속주 혹은 로마나 이탈리아에 남아서라도 반드시 군업무 보조라도 체험케 하도록 하고, 이 과정에서 병사들 속에 섞여 행정실무를 배우게 했다. 이는 중세 유럽과 동양 봉건왕조 황태자, 왕세자 제왕교육 방식과 유사하게 후계교육을 시작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 예외들도 간혹 있긴 했지만, 콤모두스 역시 카이사르 자리를 공인받은 이후 꾸준히 게르마니아, 판노니아에서 직접 군사교육을 받고 그 과정에서 행정실무를 배웠다. 하여 로마 제국에서 말하는 사회지도계급은 곧 '군대를 정상적으로 다녀온 사람'이었고, 제정 시대 중기 이후에도 제국 안에서 정규집정관, 보결집정관이라도 해먹으려고 하면 군대를 다녀오거나 아예 웅변술, 수사학, 법학 등에서 군계일학이거나, 혹은 가문이 끗발을 날려야 했다. 그런데 하드리아누스 시대때부터,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이런 것을 과감히 축소하고 사실상 폐기했다. 왜냐하면 이런 전통적인 방법으로 문무를 겸비한 엘리트를 양성하는 것으론, 갈수록 방대해지고 전문화되는 로마 제국의 정무직, 관리 부족 문제를 해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재풀은 한계가 있고, 어느 자리에 박아놓아도 제 몫을 하는 사람은 필요한데 세습귀족 중 수대째 권세를 누린 이들은 대가 끊기거나, 남아있는 이들은 고생하지 않고도 어떻게든 의석을 이을 수 있었으니 황제 입장에선 이런 조치라도 취했던 것이다. 하여 하드리아누스의 조치를 원상복귀시킨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역시 이런 이유로 타협적으로 과거처럼 무조건 군복무를 해야 의석을 준다는 식으로 되돌리진 않는다. 이는 막시미누스가 보조병에서 로마시민권을 얻고 황제 눈에 띠어 두각을 나타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어쩌면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막시미누스는 그 혜택을 누릴 절호의 기회를 잡았던 병사 중 한명일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세베루스 황제는 내전 당시, 하드리아누스 이래 이 혜택을 받으면서 원로원 의석을 차지하고 이탈리아에서 부와 권력을 누린 푸닉, 그리스, 시리아, 아나톨리아 출신 원로원과 완전히 척을 지면서 발상의 전환을 했기 때문이다.

세베루스 황제는 이탈리아와 로마 부동산을 사들이고 스스로 이탈리아 귀족으로 자처한 지중해 동부, 푸닉 출신 인사들과 내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원수 사이가 됐고,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제거 후 제대로 보복조치를 하면서 그들과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태였다. 하여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과거 황제들처럼 원로원과 관계 개선에 집중하는 노력을 함에도, 인재 등용 노선을 바꾼다. 이때 세베루스의 조치는 두 가지로 진행됐다. 첫 번째 조치는 원로원 신분과 이탈리아인의 특권적 지위를 동일시하지 않고 분리한 일이었다. 이는 푸닉, 동부 출신 원로원 권세가들이 이탈리아인을 대표한다는 전제 자체를 황제가 부정해버림과 동시에, 황제가 앞으로 로마와 이탈리아 일대를 다른 속주와 동일하게 다루겠다는 선전포고였다. 또한 황제가 권세를 누린 주류 세력[21] 중 찬성파만 기용해주는 것엔 한계가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래서 세베루스 황제는 어차피 소수로 축소된데다 2세기 이래 주류로 올라와 있던 푸닉, 동부 지중해 출신 인사들과 경쟁관계인 본국 이탈리아 혈통 귀족들 편을 들어주면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멸문 후 백년 가까이 소외된 갈리아, 히스파니아 출신들을 황제가 밀어준다. 허나 사실 이 조치는 오래된 이탈리아 출신 귀족 및 서방의 갈리아, 히스파니아 인사들의 숫자가 통계상 40% 정도라고 해도 실상은 그 반절도 못된 현실 때문에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는 해결책이었다. 더욱이 황제와 세베루스 왕조는 공교롭게도 2세기 이래 주류가 되고 있는 지중해 동부와 푸닉 일대가 본적이었고, 처가는 아예 시리아인 까닭에, 2세기 주류 집단과 척을 지려고 해도 완전히 결별하긴 어려웠다. 더욱이 세베루스 황제가 원로원 숫자를 늘리고 매년 반대파를 쳐내고 과거 원로원 의석을 잃었던 오래된 로마, 이탈리아 귀족 가문 후예들과 자신의 친인척, 군 출신 인사들을 집어 넣어도 제국의 권력과 부를 차지한 주류 세력을 완전히 없앨 순 없었다. 즉, 황제가 원로원 900명을 다 물갈이하지 않는다면 이런 방법으론 큰 효과를 거두기 어려웠다.

그래서 세베루스는 이 방법을 쓰면서도 한계에 부딪쳤다. 이에 그는 발상의 전환을 해버린다. 그 조치가 바로 두 번째 방법인데, 황제는 자신이 원로원의 권위를 얻었음에도 제국 각지의 군대와 이탈리아의 프라이토리아니에게 충성과 지지를 받은 것을 공식화한다. 이는 뛰어난 법률가이자 원로원 의원 출신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로마법에서 보장한 원로원과 로마인민 모두의 지지를 확고히 한다는 선언이며 갈수록 제국 방어와 행정 전반에서 역할이 커지는 군대를 존중하겠다는 것을 뜻했다. 따라서 그 핵심 역시 인재풀 해결을 위해 과거 전통적인 방법으로 군행정을 익히고 있던, 또 고도의 훈련을 받고 있는 직업군인 출신 장교들과 하층민 출신 간부들을 끌어쓴다는 새로운 인재 등용이 되었고, 이를 시작으로 세베루스 왕조 이래 로마 원로원에는 전통적으로 군사행정 경험은 많지만 재력과 학력이 높은 기사계급에 밀려 진급이 막혀있던 평민 출신 대대장과 군단 수석 백인대장들이 황제의 추천을 통해 원로원에 다이렉트로 입성한다.[22]

세베루스 황제와 당시 세베루스 왕조 집권세력 입장에서 보면,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 안에서의 관료 숫자가 턱없이 부족하고 황제의 중앙명령을 하달할 관료들의 숫자도 부족한 상황에서, 시간은 없고 원로원이 온전히 자기를 지지하지 않는다면 이 편이 나았던 것이다. 실제 세베루스 황제의 조치는 어떻게 보면 하드리아누스가 해결하려다가 더 악화시킨 관료 인재 부족 및 원로원 무능화를 모두 잡는 해결책이었기에, 당연히 효과가 있었고 평도 좋았다.[23] 더욱이 세베루스는 "사람은 머리와 상식으로 통치하는거다"는 명언을 날린 것처럼 배우는 데 많은 돈이 드는 그리스어니 웅변술이니 수사학이니 철학이나 같은 것은 몰라도 행정실무에 사용할 라틴어와 법률에만 통달하면 문제될 게 없다며 평민 수석 백인대장, 대대장 출신들도 원로원에 꾸준히 충원케 하고 이를 후계자들에게도 적극 실행에 옮기게 한 황제였다.

그런데 이 발상의 전환은 막시미누스 같은 로마군 병사들에게 곧 기회가 된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황제들 시절엔 기사계급도 안 되는 깜냥 취급받던 과거와 달리, 황제가 대놓고 밀어주는 환경이 조성됐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24]은 기본적으로 입대 전부터 간단한 셈법과 모국어인 라틴어 읽고 쓰기를 기본 바탕에 깔고 있었던 행정가들이라서, "발탁=승진=성공"을 의미했다. 실제로 이는 그 효과가 상당했는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이래로 이렇게 기용된 하급 직업장교와 로마군 병사들은 그리스어 실력이 부족하거나 서툴 뿐, 이 자리를 당장 맡아도 될 인재풀로 무척 유용했다. 당장 속주 주둔병사 중 백인대장 이상급들은 군행정과 민정에 당장 투입할 법지식과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고 있어, 무척 유용한 원로원 대체자원인 데다 의석까지 주면 군단장 지휘관으로 활용하기도 편했던 것이다. 따라서 세베루스 왕조 시절부터 이렇게 원로원 의석을 받고 원로원에 편입된 이들이 늘어가게 되는데, 그들은 대개 막시미누스가 근무한 도나우 강 이남을 지키는 달마티아와 판노니아 출신 혹은 근무 장병들이 많았다. 이는 보조병 출신들도 비슷하여, 그들 중 그 능력이 있거나 개선의 여지가 있으면 근위대 장교나 중하위 관료로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헌데 막시미누스는 이런 시대적 변화에서 비슷한 출신들과 달리 관료 지위도, 원로원 의석도, 근위대 입성의 기회도, 하다 못해 군단장으로 승진할 기회도 얻지 못했다. 즉, 세베루스 왕조 이래의 로마 상황에서, 막시미누스는 로마군 내에서 최대 역량이 신병 대대장이 최대치였고 애당초 로마 지도층에게 '함량미달자'로 인식됐다고 해석이 충분히 가능하다. 플라비우스 왕조의 실질적인 개국공신이었으나, 전투력 외 능력이 낮아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전후 수습을 못한 나머지, 베스파시아누스 및 무키아누스 한테 단단히 찍히고 좌천당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 조차도 막시미누스보다 한참 어린 나이[25] 군단장 지위에 있었다. 이는 막시미누스가 즉위 이전엔 올라가지도 못한 지위다. 즉, 30대 내지 40대에 군단장에 오른 사람도 로마의 지도층에게 함량 미달로 인식되어 좌천되거나 하는 사례도 부지기수인 점을 볼때, 원로원이 능력 검증을 수십년 받으며 평이 좋지 못한 막시미누스를 고깝게 보거나 아니꼽게 보는 것은 순식간이었을 것이다.

이런 능력의 한계 못지 않게 막시미누스는 업무 스타일 역시 지나칠 정도로 고집이 강하고 겸손하지 못했다. 그는 본인의 결정이라면 비판도 용납하지 않았을 정도로 꽉 막힌 면이 많았다. 막시미누스는 제위에 오른 직후부터 무슨 일이든 휘하 병사들을 대하듯 처리했고, 정무 방면에서도 늘 강압적이고 직설적인 군대식으로 명령했다. 과격한 논조의 문구가 사용된 데다 직설적이고 저속한 측면이 많았다. 가령 그는 원로원에게 승전보고서를 보낼 때, 상투적인 예의있는 문구는 죄다 빼먹고 "지나가는 곳마다 적들을 박살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모두 쳐부수고 약탈하고 승리를 차지했다", "어떤 로마인도 이루지 못한 승리를 내가 이뤘다" 등으로 적고 자랑만 했다. 따라서 원로원이나 어느 정도 교육 받은 이들은 물론, 일반 민중들도 막시미누스를 매우 저속한 사람으로 인식했다. 사실 꽉 막힌 면이 화근이 되어 살해당한 페르티낙스도 자기 능력으로 해방노예의 후손 출신을 극복하고 명예로운 경력를 충분히 밟았으며 황제가 되기 전까진 유능함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막시미누스와는 달리 페르티낙스는 살해되는 순간까지 원로원 또는 일반 로마시민의 경멸이나 증오는 받지 않았다. 따라서 비록 페르티낙스의 최후가 좋지 않았어도, 이런 점 때문에 나중에 그는 후계황제인 세베루스에 의해 정통성을 인정받고 추존 받았으며, 페르티낙스를 살해 및 사주한 세력들도 세베루스에 의해 응징받았다. 따라서 불통 때문에 페르티낙스를 막시미누스에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에 가깝다.

더 큰 문제는 막시미누스가 자신의 미약한 출신과 조악한 언변에 대해 인지하고 큰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황제에 즉위하자마자 한 일이 공식기록에서 자기 부모의 이름을 지운 것이었다. 이에 대해 후기 로마 제국의 역사가 조나리스는 막시미누스 부모의 이름이 믹카, 아바바였다고 밝히고 있는데, 만일 이 이름이 맞다면 막시미누스가 이름을 듣는 순간 국경 밖 이민족스러운 부모의 이름을 수치스러워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태도는 그가 아들 막시무스에게 대한 태도에서도 같았다. 그는 아들이 자신과 달리 훌륭한 교육 아래 전형적인 원로원, 기사계급 자제로 성장해 원로원에게 평이 좋음을 무척 자랑스러워 했지만, 동시에 아들이 자신과 비교되면서 빛나는 것을 무척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대로 예의를 갖취 원로원, 장군, 관료를 대하는 아들에게 그들 반대편에 와서 앉으라고 명하고, 일어서서 인사하는 것을 혼내는 등 주변이 볼때 이상한 모습이 많았다. 결국, 이런 방어기제의 과도한 발현이 결국 막시미누스의 치세를 어지럽히게 되었다. 심리적으로는 관우와 장비의 결점만 있는 꼴이 된 것이다.[26]

그래서 막시미누스는 자신보다 출신도 훨씬 좋고 학식도 뛰어난 원로원이 정치적 조언을 올바르게 해주더라도, 이를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 적대적으로 대했다. 원로원에서 조세 부과, 전쟁 수행과 관련해 올바른 조언을 하면, 이는 곧 황제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돼 잔혹한 보복으로 이어졌다. 아들에게 원로원이 프린켑스 유벤투티스 칭호를 줬음에도 명예로운 경력은 언급하지 않고, 이들이 정치나 행정 경험을 쌓지 않게 통제하고, 복종을 강요했다. 즉, 그는 정치적으로 세련된 처신은 할 줄 모르고, 지나칠 정도로 원로원이나 지식인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를 개선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매우 귀족적인 집단이라고 해도, 변방이나 하층민 출신들, 특히 실력으로 승부하는 군대의 특성, 황실 정치상황의 특수성 등을 인정할 줄 알던 원로원은 당연히 상식 밖인 막시미누스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원로원이 서기 2세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이래, 과거 이상으로 귀족적인 집단이 됐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로마 원로원은 정치 엘리트가 곧 군사 엘리트인 집단이었다. 때문에 예전에 군단장과 군사령관을 역임한 전직 고위 장성들이 즐비하게 앉아있었고, 각 속주 총독 중에는 군인 출신인 막시미누스의 군사행동이 알렉산데르 정부보다 괜찮다고 생각한 군인 출신 원로원 인사들도 여럿 있었다. 더욱이 로마 원로원은 하드리아누스 시대 이래 군경험조차 없는 세습 의원들이 증가했다고 해도, 군 경력이 별로 필요 없는 명문 출신 원로원 의원들[27]은 거의 대부분 가문의 의석을 세습받기 전까지 최소 대대장으로 의무복무를 마친 자들이 많고 그들이 원로원의 뼈대를 구성 중이었다. 즉, 막시미누스가 적당히 처신만 잘했어도, 원로원이 그를 증오할 이유가 없었다. 이를 증명하듯, 원로원은 서기 235년 마지못해 막시미누스를 새 황제로 추인해주면서 새 황제의 요청을 모두 수용해주고, 그가 취한 새로운 국경수비 전략을 이해해줬다. 그래서 막시미누스의 아내 파울리나를 서기 236년 신격화해 디바 파울리나로 선포해줬고, 막시미누스의 외아들 베루스 막시미누스에게는 프린켑스 유벤투티스라는 칭호를 손수 내려주면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에게는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28]라는 근사한 칭호도 부여했다.

그러나 막시미누스의 태도는 여전히 원로원에게 적대적이었고, 약간의 비판이나 의문제기는 도전으로 인식돼 잔혹한 보복과 협박으로 이어졌다. 허니 원로원으로선 제 아무리 보살처럼 참아보려고 해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 국어 구사능력조차 평균 이하에 가까운 교관 출신 야만족이 원로원에게까지 졸병과 같은 복종과 충성을 강요한다면? 또 조언을 했다는 이유로 쌍욕과 비속어를 섞어 쓴 문장을 보내 죽일 놈 취급을 한다면? 당연한 말인데, 작문은 커녕 웅변도 세련되게 못하고 거친 말이 입에 밴 말년 상사 아저씨, 그것도 귀화한 말년 상사 출신이 단지 장병들 사이에서의 인기로 쿠데타에 성공해 대통령이 되었다고 설치고, 툭하면 자신들을 죽일 놈 취급하니 이 아저씨를 국가원수로 대우할 이유가 없었다.

그 결과, 막시미누스는 재위 2년차부터는 원로원에게 교양없고, 출신도 의문이 들고, 제위 등극 방법도 찬탈과 같다는 이유 등으로 반야만인으로 인식돼 증오의 대상이 됐다.

2.2.2. 계속되는 소모전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등장은 과거 군인 황제 시대, 3세기의 위기, 무정부 시대, 제국의 위기 등으로 불리는 로마 제국의 암흑기 개막 정도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이런 악평에도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즉위하기 전인,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치세 후기부터 제국은 페르시아의 등장과 침공, 라인강과 다뉴브강 일대에 자리잡은 게르만족들의 성장과 발전, 트라야누스 시대부터 시작된 제국의 한계 등이 맞물려 '외부 침략', '내부적 한계', '경제 쇠퇴'라는 세 가지 위기가 동시에 진행 중이었다. 다행이라면 암흑기의 개막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라는 냉혹하고 비열하나 뛰어난 현군의 등장으로 늦춰졌다는 건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사후 세베루스 왕조는 이 사람을 능가하거나 비슷한 능력을 가진 황제 혹은 걸출한 인재들을 배출하지 못하면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암살된 이후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는 238년 터진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반란과 이에 편승한 원로원의 행동이 맞물려 원수정 체제와 로마 제국의 내재적 한계, 모순의 심화로 귀결된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막시미누스의 즉위와 등장이 모든 것의 원흉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얼핏 이 사람 입장에선 억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집권한 235년부터 벌인 대대적인 전쟁들은 인적, 물적 한계를 감안해야 하는 제국을 계속되는 소모전 양상으로 몰았고, 그가 벌인 3년의 실책과 무자비한 행동은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도전과 내전의 심화, 원로원 내 권력투쟁까지 정례화시켜 3가지 위기라는 뇌관이 모두 폭발해버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모자와 황제 자문회의 위원 중 마인츠 병영 안에 있던 이들을 모조리 죽인 직후, 막시미누스는 아그리 데쿠마테스 늪에서 알레만니족과 전투를 치른다. 이 전투에서 막시미누스는 알레만니족을 물리치고, 원로원에게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라는 칭호를 얻어냈다. 이때 원로원은 화해의 손길을 내밀며, 이 무렵 죽은 파울리나를 신격화해주고 막시미누스의 아들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에게 프린켑스 유벤투티스라는 칭호를 내려 막시미누스 일가에게 황족 지위와 정통성을 모두 선물로 줬다. 원로원의 유화적 태도에 고무된 막시미누스는 곧바로 하르즈호른 전투로 불린 베저 강과 그 너머에서 재차 게르만족들과 전투를 벌인다. 이 전투에서 막시미누스는 1세기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라인강 일대 로마군과 퇴역병 후손들에게 전쟁 영웅이자 군신으로 추앙받고 있던 대 드루수스 같은 위상을 끌어올렸다고 착각했다.[29] 베저 강을 돌파해 북해까지 진군해 게르마니아 마그나의 심장부까지 진군한 장군은 대 드루수스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런 착각을 했던건데,[30] 트락스가 전리품보다 물자 소모가 큰 이 전투를 대단히 고평가했다. 허니 그는 이런 보고서를 원로원에 보낸 뒤, 그 해의 정규 집정관에게 우렁찬 목소리로 낭독하게 명했다. 이때 이 보고서는 막시미누스의 두번째 원정 이후 그가 중2병 대사를 늘어놓으며 원로원에게 "어떤 로마인들도 이루지 못한 성과를 냈다"는 식으로 진행됐는데, 정식 보고 내용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그 내용은 최악이었고, 보고서 양도 적고, 전부 황제가 구술한 것을 받아 적은 수준의 질 떨어진 것 뿐이었다.
"원로원 의원들이여, 내가 로마 병사들과 이룩한 일을 무슨 말로 전달해야 할지 모르겠소. 아군은 방위선에서 40, 50 마일[31]이나 깊숙이 진격해 닥치는 대로 게르만놈들의 마을을 불태우고, 가축을 빼앗고, 남자들은 죽이고, 여자들은 포로로 삼았소이다. 아군의 진격을 방해한 것은 게르만족이 아니라 늪지대 뿐이었소. 아마 이 습지대가 방해하지 않았다면, 나와 아군은 유명한 게르마니아의 숲속 깊숙이 진격해 전부 박살냈을 거요."

얼핏 보면 현장감 있게 황제가 전달할 의도로 보낸 서신 같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황제가 개인적으로 친한 원로원 의원, 친구들에게 자랑한 서신이나 원로원에게 비공개적으로 전한 서한이 아니라, 국가 정식 보고서였다. 그런데 막시미누스는 성격, 태도 그대로 이 보고서를 담당해 적는 관료에게 구술 내용만 적게 한 뒤 보내면서, 받아 듣는 원로원과 로마인 모두를 경악케 했다. 따라서 회랑에서 이 보고서를 들은 로마인들은 황제가 이렇게 진짜 적었는지 의심했다가 경악했다. 원로원 역시 비슷했는데, 그들은 얼굴을 붉히면서 이런 황제의 행동을 부끄러워 할 뿐 황제의 보고서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들은 막시미누스가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처럼 페르시아와의 전투 경과와 결과를 과장 섞여 포장하지 않고, 그래도 솔직했다며, 딴죽을 걸지 않았다. 그러니 원로원은 이 보고서 낭독 직후, 로마군의 군공까지 모양새 떨어지게 적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보고에 일단 찬사를 표하고, 그에게 게르마니아를 정복한 사람에게 내려진 존칭 게르마니쿠스를 내려준다. 첫 전투에서 로마군은 막시미누스의 일방적인 밀어붙이기 전법과 명령으로 막대한 희생자를 낸 끝에 알레만니 족을 물리쳤고, 두 번째 원정에서도 개운한 승리보다는 물량을 밀어붙어 얻어낸 승리에 가까웠더라도, 로마군의 사기 증진을 고려한 셈이다.

이런 가운데, 막시미누스는 다음 전투 승리 후, 의기양양해진 나머지 재차 두번째 보고서를 보낸다. 아그리 데쿠마테스 늪에서 벌인 첫 전투에 이은 베저 강 일대에서 벌인 두 번째 전투 역시 같았다. 로마 입장에서 승리했지만, 희생과 물자 소모가 동반된 개운하지 못한 소모전 속 승리였다. 하지만 막시미누스는 첫 보고서 후 원로원에서 예의있게 반응해주고, 로마군의 승리를 칭찬하자, 고무됐다. 원로원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이상 전부 소집됐고, 황제의 요구로 똑같이 이번해의 두 집정관에게 우렁찬 목소리로 읽게 했다. 이후 황제의 요구도 전달됐다. 이때 막시미누스는 첫 보고서와 살짝 다르게, 원로원을 나름 배려해 처음으로 예의를 내보이는데, 그 내용은 전부 본인 칭찬이었다.
"존중하는 원로원 의원 여러분들이여, 내가 즉위한 뒤 지금까지 그 짧은 시간에 내가 치른 전투의 수는 어떤 황제보다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오. 게다가 나는 계속 승리를 거뒀소. 그 승리를 통해 나는 로마인이 누구보다 놀랐을 만큼 많은 전리품을 획득했소. 지금 아군 병사들이 잡아온 게르만족 포로가 너무 많아, 그들을 모두 도시[32]로 보내면 이 광대한 도시도 수용할 수 없을 거요."

이 보고서 낭독 후, 막시미누스는 원로원에게 자신과 로마군이 승리하고 게르만족 마을들을 불태우고, 게르만 여인과 어린 아이들을 포로로 삼은 장면을 전부 패널 형태로 그려, 로마 도심 회랑에 크게 장식해달라고 했다. 그는 과거 카라칼라가 자신의 승리를 기념해 금과 은으로 만든 무기, 방패, 월계관을 바치라는 수준의 요구를 꺼내지 않았고, 따로 대리석으로 패널 형태 그림을 만들어달라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후에도 전투를 치르고 보고를 올릴 때마다, 습관처럼 자신의 공로로 로마가 평온해졌다며 'pacificatio'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국고 낭비 상황을 보면서 속으로 열이 받는 원로원을 계속 자극했다. 하지만 원로원은 국고 적자를 각오하고, 로마군의 한정된 인적, 물적 자원을 소모하면서 라인강과 다뉴브 강 일대의 전선에 몰빵하는 식으로 승리만 갈구한 막시미누스의 태도를 칭찬하고, 요구 사항을 들어준다. 왜냐하면 로마군의 노고는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원로원도, 회랑에서 이 그림을 보면서 황제의 보고서를 똑같이 들은 주민도 반응은 같았다. 로마인 대다수는 트락스의 위용을 트라야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같은 전공과 같다고 칭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런 모습에 동시대 황실 서기관 출신 관료이자 역사가 헤로디아누스는 로마인 특유의 농담 섞인 비꼬는 투로 "신들께서 그 자에게 몇 년의 생명과 시간을 줬다면, 아마도 레누스와 다누비우스라는 북쪽은 그의 주장처럼 '평온'해졌을 거다."며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평온하게는 했지만 그게 평화냐는 식으로 표현했다.

그래서 황제는 이런 원로원을 철저히 무시하고 자기 할 일이었던 국경 방어, 즉 야만족 격퇴[33]에만 열을 올리는 모양새로 238년까지 도돌이표로 흘러갔다. 막시미누스 황제는 원로원과의 관계가 어찌 되었건 전방의 군단병들은 자신의 무력 하나는 신뢰하고 있었고,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은 어쨌든 패싸움이었으니까. 소모전이라고 해도 이것에만 몰두했다. 상술한 것처럼 베저 강 인근에서 벌어진 두 번째 원정 이후부터는 아예 전선까지 넓히는 모양새로 소모전을 벌였으니 이후 상황은 어떻게 전개됐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하지만 원로원은 막시미누스가 이후 이런 내용의 보고서를 올리더라도, 황제에게 노고가 많았다는 식으로 예의를 갖추면서 박수를 치고, 로마군의 희생과 노력은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혀, 전방의 로마군에게 공개했다. 속으로는 씁쓸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황제의 행동을 혐오하면서도, 로마군에게는 유화적으로 원로원이 대응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막시미누스는 자신이 게르마니아 국경선을 확보했다며 겨울철 숙영지를 세운 뒤, 235년과 236년 국경 밖의 다키아인과 사르마티아인들과 싸웠다. 그런데 이 역시 그 양상은 소모전이었고, 경과 보고서 후의 요구는 또 황제가 승리를 갈구하고 이를 칭찬해달라고 것 뿐이었다.

물론, 게르만족들은 로마인들이 문명화시키기도 어려웠고 게르마니아의 숲과 늪이 즐비한 지형 때문에 회전에서 신묘한 용병술로 무찌르기도 어려웠으며 다만 눈에 보이는 압도적인 '힘'에 굴복하기 때문에 체구가 작은 로마인들을 깔보는 성향이 강하다는 인식이 있어 이 소모전을 마냥 비난할 수 없다는 의견이 있다. 쉽게 말하면, 게르만족을 두들겨 패서 굴복시키는 역할에는 스키피오 같은 전술의 천재나 스틸리코같은 실질 강건한 장군보다는 이런 지치지 않는 거구의 천하장사가 더 잘 맞았다는 얘기다. 트락스 황제 치세에 게르만족을 말 그대로 박살낸 라인 강 전선은 이후에도 그 기능을 오랜 기간 유지했다. 3세기의 위기라 불리는 시기에 침입해 온 게르만족이 공격한 지역 대부분이 도나우 강 방어선이라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하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막시미누스가 이런 소모전을 벌여도 게르만족들은 238년 이후에도 그가 소모전을 벌인 라인 강 전선(특히 라인강 하류인 저지 게르마니아)으로도 잘만 쳐들어 왔다. 이렇게 되니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대 드루수스, 티베리우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34]가 공들여 만들고, 이후 베스파시아누스, 도미티아누스, 하드리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연이어 게르마니아 후방 병참 기지이자 방어선 후방 지원 핵심으로 보강한 북부 갈리아 일대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시대 이후 3세기 내내 가장 많은 피해를 입게 됐다.[35] 즉, 로마 제국이 300년째 노력한 라인강 방어선과 후방기지들이 막시미누스의 계속된 소모전의 수혜를 온전히 입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헤로디아누스가 적었듯이, 로마인들은 트락스가 평화, 평온을 외치는 것을 그들 특유의 농담으로 "몇년 동안 시간만 주어지면 네 말처럼 평온해지긴 하겠지. 북쪽 방어선만."이라는 식으로 대놓고 조소했다.

다행히 시대가 변하면서 게르만족도 군단 주둔지를 피해 말을 타고 달리며 도시와 마을을 약탈하고 도주 하는 등 방어선을 미친듯이 쑤셔대고 있었기 때문에,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같은 무식한 소모전은 쓸모가 있긴 했다. 로마군의 전통적인 강점인 군사학, 토목기술, 공학, 보급능력 등이 더이상 제대로 통하지 않고, 게르만족들이 부족 체계에서 왕국 형태가 되고 전술이 다양해진 측면에서 놓고 보면 적합한 전략일 수도 있었던 셈이다. 그렇기에 황제가 되기에는 군경력이 그렇게 일천한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다른 주력 최전방 방어선의 군단장들이나 군사령관들이 삼황제시대 때 처럼 원로원과 결탁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은 것은, 나약해빠진 세베루스 왕조의 전대 소년 황제들에게 진절머리가 난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미 기존 방식으로는 나날이 발전해가는 게르만족의 침략을 막아내기가 어렵게 된지 오래인 시점에서 로마군 내에 게르만족을 압도할 수 있는 다른 능력자가 없다는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덕택에 황제가 치세 내내 자리를 비웠는데도 군단들이 전혀 반란을 일으키지 않아서 외려 내정이 안정될 수있었다. 성군으로 유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조차도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와 동방군단의 반란을 겪은 걸 생각하면 이것도 나름 대단하긴 한거다.

다만 이렇게 최전방에서 야만족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본국과 후방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 없었다. 먼저 트락스의 군사행동은 실적에 비해 소모적이며 비용이 깨지니 텅 빈 국고를 세금을 올려 메꿀 수 밖에 없었던 탓에 원로원과 민중들의 세금부담은 날이 갈수록 폭발적으로 늘어났다.[36] 따라서 본국 이탈리아와 각 원로원 속주에서는 조세저항이 불같이 일어났는데, 이런 상황에도 승리에 취한 황제는 원로원에 보내는 보고서에도 무슨 중2병 일진의 일기장같이 천박한 폭력과 자기 자랑만 잔뜩 늘어놓았다. 게다가 그때마다 황제는 원로원 측에서 조세저항의 심각성을 진언해도 야만족과의 패싸움을 이유로 강탈하듯 세금을 거둬들였다.

2.2.3. 후계자 막시무스 카이사르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에게는 아내 카이킬리아 파울리나와의 사이에 아들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를 두고 있었다.

막시미누스는 로마인에게 인기가 최악이었고, 교양 없고, 잔인하기로 유명했다. 그렇지만 그의 아들 막시무스는 귀화인과 같은 아버지와 달리 날 때부터 로마인이었고, 좋은 교육을 받았고, 예의 바르고, 잘생긴 것으로 유명했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그는 신체가 강건하고 크면서도 외모가 무척 준수했다. 신체 조건이 좋고, 키가 컸음에도 몸의 비율이 좋고 얼굴이 아름답게 잘 생긴 까닭에, 귀부인과 귀족 여성들이 음탕한 감정을 품으면서 그와 관계를 맺고 아이를 갖고 싶어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잔인하고 포악한 성격의 아버지와는 달리 성품이 온화하고 다정해 주변인들을 잘 대했다고 한다. 그는 조용했고, 떠들썩하게 사생활을 보내는 것 대신 평온한 삶을 매우 좋아했다. 술은 마시지 않았고, 술을 입에 대더라도 취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만, 활동적이었고, 사냥을 확실히 좋아해 멧돼지, 오리, 두루미 사냥을 즐겼고, 자신이 잡은 사냥감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 절제력이 있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숙달했고, 그 수준이 높았는데, 어릴 적부터 웅변, 문법, 수사학에 관해 적절한 교육을 받아 높은 수준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또 잘생기고, 귀족 가문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아 많은 추파를 받음에도 겸손하고 올곧았다. 옷을 잘 입고, 몸의 비율이 좋아, 옷을 잘 입고 꾸밀 줄 아는 것을 높이 평가한 로마 제국 안에서 이 점에서도 평가가 진짜 좋았다. 따라서 이 고대기록에서는 이때 로마인 사이에서 이런 평까지 나올 정도로 젊은 막시무스의 평가가 좋았다고 한다.
"젊은 막시무스는 옷차림에 신경을 많이 써서 세상의 그 어떤 여성도 그보다 더 우아하지 않았다."

이런 평가처럼 막시미누스의 아들은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생전부터 세베루스 왕조, 원로원 모두에게 평가가 좋았다. 알렉산데르 황제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복직한 뒤 그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면서 어린 막시무스가 잘생기고, 키 크고, 교양 높고, 예의 바른 점을 높이 평해, 따로 저녁 식사에 앞으로 입고 갈 좋은 귀족용 의상을 선물로 줄 정도였다. 따라서 트락스의 아들은 236년 아버지가 원로원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내려달라고 부탁했을 당시, 원로원에서 카이사르 칭호에 더해 프린켑스 유벤투티스 칭호까지 더해주면서 그를 아버지 트락스와 달리 원로원의 젊은 지도자로도 인정해줬다. 또 트락스가 이 해, 아들 막시무스를 로마로 보내 거주해 살게 하면서, 그 인기를 끌어올려주고자, 금과 은으로 만든 흉갑, 방패, 칼을 착용하게 하고, 보석 박힌 황금 투구를 쓰게 한 다음, 로마 시가지를 행진하게 했을 때에도 트락스의 아들을 저주하기보다는 귀족적이고 엘리트답다며 좋게 평했고, 그가 로마에서 보인 모습에 관해 늘 호의적인 청년으로 대했다.

트락스는 236년에 카이사르 칭호를 얻게 된 아들이 이렇게 평가받고 있는 것을 무척 자랑스러워 했다. 하지만 트락스는 불행하게도 정치적 역량이 최악이었고, 그는 무례하고 잔인한 행동으로 아들의 인기를 되레 깎아 먹었다. 그는 아들 막시무스가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그대로 연장자와 원로원 의원, 관료들을 배려하고, 이들이 일어설 때 함께 일어선 뒤 인사를 하는 태도에도 아들에게 반대 쪽에 앉게 하고, 본인은 일어서지 않는 등 무례한 모습을 내보여, 겸손한 아들까지 오만한 자존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욕을 먹게 했다. 또 아들의 인기를 높이고, 그가 좋은 엘리트 교육을 받은 점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인기 기반인 일반 사병이 싫어한 귀족다운 모습을 홍보하고, 정작 아들에게 필요한 지위와 경력을 추가로 내리지 않아, 아들이 원로원과 군대 양측 모두에게 공동황제이자 후계자로 인기가 애매모호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트락스의 아들 막시무스 카이사르는 아버지와 달리 선하고 좋은 후계자, 예의바르고 교양 넘치는 로마인이라고 평가받고, 동정을 받았을 뿐, 아버지의 인기 기반인 군대에게는 인기가 없게 됐다.

2.3. 몰락

막시미누스는 원정을 계속 수행하면서, 고생한 대가로 군인의 급여를 두 배로 늘렸다. 이는 여러 군사 원정으로 국고가 적자 상태를 면치 못하는 상황을 악화시킨다. 이렇게 상황이 흘러가니 원로원과 내각은 막시미누스에게 이 문제를 조심히 건의한다. 이에 막시미누스는 "그렇다면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하면 되지 않느냐"며 더 많은 세금 징수를 명했다. 이 조치는 막시미누스의 끊임없는 전쟁 수행과 국경방어전략을 지지하나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보던 이들까지 등을 돌리게 한다. 왜냐하면 막시미누스 치세 아래에서 집행된 세금 징수는 세금 징수원은 폭력적인 방법과 불법적인 몰수가 당연시되는 방법으로 악랄하게 집행됐기 때문이다. 막시미누스의 명령에 따라 세금 징수원들은 부자, 중산층, 서민, 해방노예, 무산자에 상관없이 세금을 이중, 삼중으로 거뒀고, 막시미누스의 명령 아래 예비 국고분으로 편성한 각종 기금까지 모조리 전쟁 물자로 충당됐다. 티메시테우스와 같은 국고 전문가들까지 막시미누스의 강압적인 명령으로 동원됐다. 그들은 막시미누스의 명으로 마치 자발적으로 징세를 돕는 것처럼 동원됐는데, 막시미누스의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풍요로운 소아시아, 근동, 푸닉[37] 일대로 파견됐다. 이렇게 상황이 돌아가자, 자연스럽게 원로원과 로마인 모두는 막시미누스의 명령으로 동원된 전문 관료들을 싸잡아 비난했고, 이때의 조치는 후일 티메시테우스가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가 제위에 오른 뒤, 막시미누스를 제거한 직후 모든 영예와 관직을 박탈당한 뒤 추방되는 원인이 되면서, 고르디아누스 3세 시절에 벌어진 정치 보복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더해 막시미누스는 즉위 이후 로마에서 세베루스 왕조의 핵심 인사들을 없애는 수준을 넘어, 지속적으로 반대파를 색출해 그들을 갖은 방법으로 살해했다. 따라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는 이런 막시미누스의 학정을 이렇게 기술하면서, 재위 1년도 못 되어 그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연이어 벌어지게 됐다고 기술했다.
로마인들은 그의 야만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즉, 그가 제보자와 고발자들을 불러모아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재판에 나온 모든 사람들을 단죄하고, 가장 부유한 사람들을 완전한 가난에 빠뜨리고, 다른 사람들의 파멸 속에서 돈을 아끼고, 많은 장군들과 집정관 계급의 많은 사람들을 죄 없이 사형에 처하고, 다른 사람들을 음식과 음료 없이 마차에 태우고 다니고, 다른 사람들을 감금하고, 간단히 말해서 그가 잔인함에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도 방치하지 않고, 이런 것들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하면서, 그들은 반란을 일으켜 그에게 대항했다.

첫 반란은 막시미누스 황제가 게르마니아에서 부교를 놓고 군사작전을 벌일 때 벌어졌다. 235년 전직집정관 출신 원로원 의원이자 장군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 마그누스를 필두로 한 게르마니아 군대의 여러 장교들, 원로원 의원, 재무관 등이 라인강 북쪽 강변에서 군용 부교를 파괴하려고 음모를 꾸몄다. 이 사건은 막시미누스를 라인강 북쪽 기슭에서 강에 빠뜨린 뒤 암살할 계획으로 기획됐는데, 사전에 들통이 났다. 이에 막시미누스는 로마법에서 정해진 사법절차를 모조리 무시하고, 그대로 가담자와 그들과 친분있는 자들을 모두 즉결처형했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막시미누스는 정당하게 항명을 한 장교들에게 까라는 대로 까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그들과 직속부하들까지 모조리 죽였다. 이어 두 번째 음모가 터졌다. 원인은 막시미누스의 의심 속에서 벌어진 황제의 일방적인 보복과 숙청 때문이었다. 막시미누스는 본인 앞에서 계속되는 소모전에 문제를 제기하면 항명했다는 식으로 모조리 죽였다. 자신과 함께 참전 중인 몇명의 원로원 의원들을 의심하더니, 그들이 사람을 심어 황제를 암살을 시도했다가 발각됐다는 식으로 처형을 서슴치 않았다. 이런 숙청은 전장에서 전시 상황을 이유로 벌어진 것이 아니라, 로마에서도 판을 쳤다. 근위대장 비탈리아누스가 이를 막시미누스의 명에 따라 공안 통치를 주도했다. 당대 역사가로 황실 서기관 출신 관료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비탈리아누스는 235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살해되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즉위할 때 근위대장에 된 인사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와 출신 성분이 비슷했고 절친한 친구였다고 한다. 그는 막시미누스의 근위대장이 된 직후부터, 이탈리아와 로마를 담당하면서 변방에 나가 있는 막시미누스의 지시 아래 이탈리아 전역을 담당했다. 이때 그는 황제의 지시에 따라 수많은 인사를 반역죄로 처형하고, 원정에 쓰일 자금 마련을 위해 세금을 악착같이 뜯어냈기에, 원로원과 민중의 증오를 동시에 받았다.

이렇게 변방에서는 막시미누스가, 로마와 이탈리아에서는 비탈리아누스가 암살미수사건이 연이어 터졌다며, 눈에 거슬린 원로원 의원, 장군, 대대장들을 모조리 죽였다.

막시미누스의 꼰대짓과 무자비함은 법과 절차를 모두 생략한 채 집행돼 논란이 상당했다. 하지만 트라쿠스라는 위인은 애당초 이런 비난을 신경쓰는 사내가 아니었고, 자신에 대한 비난은 곧 보복으로 이어져 증오심만 증폭시켰다. 당연히 이런 황제의 행동은 더 큰 불만을 야기해 원로원, 로마 장교집단과의 관계를 회복불능으로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기 235년 혹은 그 직후 동방에서 티티우스 콰르티누스를 옹립하려는 또 다른 정변 시도가 발생했다. 티티우스 콰르티누스는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235년 피살될때 막시미누스에게 재판 없이 강제퇴역조치된 장군이었다. 다행히 메소포타미아 궁수들의 지지 속에 반란을 일으킨 콰르티누스가 마음을 바꾼 반란군 지휘부에게 살해돼 머리가 막시미누스에게 전달되며, 큰 내전은 터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건 직후, 막시미누스는 콰르티누스를 제거한 사람들까지 모조리 죽이라고 명해 그 잔혹성이 제국 전역으로 알려지게 됐다.

이렇게 3년이 흐르게 되니, 모든 로마인들은 독불장군 막시미누스를 진심으로 싫어하고 증오하게 됐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238년 1월 오늘날의 북아프리카 튀니지에 해당하는 아프리카 속주의 현지 농장주들이 높은 전시세금에 반발하여 트락스가 파견한 세리를 살해하고 관공서를 공격한 뒤, 아프리카 속주 총독인 79세의 고르디아누스 1세와 그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를 공동황제로 추대했다.[38] 푸닉 농장주들은 법정에서 자신들을 위해 불법적으로 허위증거를 이용해 도와준 이들 부자에게 제위를 권했다고 하는데,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황제를 참칭하기 전부터 황제 의복, 상징물 등을 구비해놓은 것을 보면 알듯 아프리카 속주 총독 고르디아누스와 공관 레가투스인 아들 고르디아누스는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반란에 편승해 교묘하게 이 일을 꾸몄다.

이 사건 직후, 고르디아누스 부자는 추방자들에게는 추방을 해제해주겠다고 약속하고, 제국의 살인자, 범죄자들에게는 자기를 지지하면 무죄로 방면해주겠다고 선언했다. 이어 이들은 원로원 여러 인사들을 접촉해 "로마와 푸닉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며 도움을 청하고, 자신들을 지지해주면 로마인들과 근위대에게 상상도 못할 위로금을 즉시 주겠다고 약속했다. 로마 최고의 부자였던 이들의 약속에 로마인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환영했는데, 이를 틈타 고르디아누스 가문은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의 명령에 따라 각계에 로비를 벌였다. 같은 시간, 이들은 아프리카 속주 군관 중 건장한 이들을 근위대로 보내 현직 근위대장 비탈리아누스을 암살한 다음,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고르디아누스 부자 이름을 빌려 죽인 양 소문을 낸다. 이어 고르디아누스 가문은 세를 꾸려 로마를 혼란의 도가니로 만든다. 고르디아누스 지지자들은 공무원, 군인, 세금징수대행업자를 보이는 대로 죽여 이들 시신을 하수구나 테베레 강에 던지고, 사적 보복을 한다며 돈을 빌려준 부자나 친구들을 찾아가 막시미누스 트락스 지지자로 몰아 죽이고 그들 재산을 강탈했다. 이렇게 되니 원로원과 로마시는 혼란에 빠졌고, 이 과정에서 고르디아누스 지지자들의 행동을 제지하려고 한 수도 장관 사비누스가 돌에 머리를 맞고 순직하는 일까지 터졌다.

며칠 뒤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황제로 자신들을 승인하고 트락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해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원로원은 고르디아누스 측에게 모든 약속을 이행할 것인지 묻고, 주변 총독들에게서도 인정받은 뒤 벌인 요청이 맞느냐고 물었다. 이에 고르디아누스 측은 진실을 숨긴 채 뻔뻔하게 맞다고 말했고, 이 소식에 흥분한 원로원은 그 즉시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를 승인받은 진짜 황제로 선포했다. 이와 동시에 원로원은 두 사람의 요청에 따라, 현직 황제인 막시미누스를 국가의 적(공적)으로 선포해 버린다. 하지만 원로원 중 일부는 여전히 반신반의했고, 이해에 따라 입장이 갈리는 만큼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황제 등극을 지지했어도, 자신들이 굳이 모든 위험부담을 가지고 갈 생각이 없었다. 따라서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가 발레리아누스 등 원로원 내 중진들에게 비밀리 사람을 보내, 요청한 제안[39] 중 원로원이 받아들인 것은 자신들에게도 위험요소가 될 근위대장 비탈리아누스 제거 합법화, 막시미누스 탄핵, 이들 부자의 황제 승인 정도였고, 그들의 이후 행보 역시 지극히 원로원의 부담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서기 238년 3월 원로원은 공문을 제국 전역에 발송하면서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가 특별히 요청한 카펠리아누스 제거 요청을 소환이라는 협조요청으로 바꿔 전달한다. 이는 원로원이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별 병력도 없는 상태에서 바로 옆의 누미디아와의 공조가 없다면 실패 확률이 높다는 것을 염두에 뒀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 예상처럼 아프리카 속주 바로 옆인 누미디아 속주 총독[40] 카펠리아누스는 원로원의 공문을 과감히 무시한다. 왜냐하면 야전사령관 출신인 이 총독은 막시미누스 쪽 사람은 아니어도 최고 군통수권자인 황제에 대한 복종을 금과옥조로 삼은 천상 군인이었고,[41] 공적인 이유와 개인적 이유 등으로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이중성과 비열함에 극도로 화가 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총독에게 원로원이 보낸 공문은 문자 그대로 강제성 대신 요청문에 가까운 터라, 카펠리아누스 입장에선 굳이 원로원의 공문 내용을 그대로 이행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었다. 도리어 고르디아누스 부자와 사이가 앙숙인 상황에서, 새 황제들이 자신을 제거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으니 이후 상황은 예상 그대로 흘러갔다. 이는 다른 지역 총독들도 비슷했는데, 어떤 총독들은 공문을 전달하려고 온 전령을 붙잡아 감옥에 가뒀고 누구는 고문까지 하면서 뒤에 무언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했다. 이는 카펠리아누스도 비슷했는데, 상술했듯이 그는 공문을 따르지 않겠다는 뜻을 사실상 밝힌다.

그래서 카펠리아누스는 원로원이 공문을 보내면서 “새 황제들이 당신을 해임해달라고 하니, 미안하지만 귀국해달라”는 요청을 깡그리 무시했고, 총독의 임무를 규정한 로마법대로 행동한다. 세습 원로원 의원이자 현직 총독, 제3 아우구스타 군단장이라는 지위를 가졌던 그는, 고르디아누스 측이 자기 후임으로 올 만한 자격도 없는 자가 들어와서 방을 빼라고 하자 이를 무시한다. 이어 그는 자신의 불명예를 회복하고 막시미누스 트락스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고르디아누스 부자와 아프리카 속주를 토벌하겠다며 이를 발표한 뒤, 북아프리카 유목민을 방어하는 병력을 제외한 군단병들을 이끌고 카르타고로 쳐들어갔다.[42] 당연한 말인데, 오랜 실전 경험을 자랑한 군대를 이끄는 노련한 누미디아 총독이 북아프리카 일대의 유일무이한 최정예군대로 밀어붙이니 싸움이 될 리 만무했다. 이런 탓에 치안 경비병에 가까운 1개 군단을 싸그리 모아서 방어하던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는 그대로 패배해서 전사했고,[43] 고르디아누스 1세는 아들의 전사소식과 누미디아 토벌군의 입장을 듣곤 체념 후 허리띠로 목을 매어 자결했다.

2.3.1. 암살

변방에서 야만족 방어를 위해 전선에 나가 있던 막시미누스는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반란을 일으킨 지 열흘이 지나서야, 이를 시르미움 병영 막사 안에서 보고받았다. 그런데 이것도 모자라, 원로원까지 합세해 국가의 적으로 자신을 선포한 것을 듣곤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 따라서 그는 배은망덕한 원로원을 죄다 죽여버리겠다며 전쟁을 멈추고, 판노니아 일대의 최정예 군대를 데리고 그대로 로마로 진군한다.

궁지에 몰린 원로원은 협상을 시도했지만, 이는 먹히지 않았고 증거도 명백해 자기들 중에 혈통, 경력과 실적이 모두 좋은 엘리트 노귀족 둘을 뽑아 공동 황제로 세웠다. 그들이 바로 발비누스푸피에누스다. 하지만 문예지원 등으로 이미지가 좋았던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지지자들은 이를 반대했고, 민중들을 모아 원로원 앞을 둘러쌌다. 그러면서 그들은 “원로원은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마라”며 전쟁을 앞두고 신전으로 향하던 공동황제에게 돌을 던지고 욕설을 퍼부었다. 따라서 두 황제는 고르디아누스 지지자들의 폭동을 멈추기 위해, 집에 머물고 있던 고르디아누스 1세의 (외)손자 고르디아누스 3세에게 마지못해 카이사르 직위를 수여했다.

이래저래 내전이 시작되었지만, 막시미누스 쪽도 본인의 예상과 달리 뜻대로 일이 안 풀리게 되었다. 그는 북이탈리아까지 당도했지만 아퀼레이아를 포위했다가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장기전을 치러야만 했다. 오랫동안 전투에서 잔뼈가 굵은 황제가 이끌고 있는 야만족과의 전투 경력이 풍부한 정예군을 휘하에 거느린데다 반역을 저지른 원로원을 토벌하러 가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트락스는 꽤나 고전했다. 따라서 내부적으로 불만은 쌓일 수 밖에 없었는데, 판노니아 병사들은 본국 이탈리아에서 로마 시민들이 자신들을 외적보듯 대하고 목숨을 걸고 저항하자 동요했다. 따라서 제2 파르티카 군단 병사들은 푸피에누스가 군을 정비해 북상하자 두 황제와 협상 후 국가의 적으로 규정된 탓에 죽여도 되는 황제를 살해해 버렸다. 어중이 떠중이가 한 때의 인기 덕분에 순식간에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가 순식간에 몰락한 케이스. 이때 아들이자 황태자였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도 같은 부대 병사들 손에 살해되었다.

트락스는 아들, 근위대장 아눌리누스와 함께 살해됐는데, 이들의 수급은 라벤나에서 푸피에누스 편 장병들에게 전달되었다. 아퀼레이아 시민들은 수급들을 확인한 뒤 성문을 활짝 열어 칼을 맞댄 옛 막시미누스 병사들을 위로한 뒤 굶주린 병사들에게 식량을 나눠줬다. 이후, 두 사람의 머리는 로마로 보내져, 포로 로마노 광장에 전시됐다가, 온갖 저주를 받고, 테베레 강에 던져졌다. 이 일에 대해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것은 잔인한 아버지에게 합당하지만 선한 아들에게는 부당했던 막시미누스들의 최후였다. 그들의 죽음은 속주민들에게 큰 기쁨을, 야만인들 사이에 깊은 슬픔을 불러일으켰다.

막시미누스는 생전 모든 계층에게 최악으로 평가됐다. 따라서 그는 죽어서도 세야누스 수준으로 저주를 받고, 시신이 온전치 못했다. 막시미누스 부자의 머리는 근위대장 아눌리누스의 머리와 함께 포로 로마노에 잠시 전시되고, 온갖 욕을 먹은 뒤, 테베레 강에 던져졌다. 그런데 막시미누스의 시신은 엘라가발루스와 마찬가지로 절단난 뒤 개들에게 먹이로 던져졌고, 이후 원로원의 명령으로 동상이 철거되고 파괴된 뒤, 저주 가득한 비문까지 세워지는 등 온갖 수모를 다 겪었다. 이런 모습은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기록을 보면 얼핏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아버지처럼 함께 시신이 절단나고 개들에게 먹이로 던져진 것 같아도 사실 이런 수모를 면한 아들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와는 달랐다. 왜냐하면 아들 막시무스 카이사르는 아버지 트락스처럼 인기가 형편없었어도, 그 이유가 트락스의 아들인 이유 때문이었을 뿐, 원로원과 일반 민중에게는 동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때 원로원 귀족들은 막시미누스가 국가의 적으로 공인된 상황에서도, 그 후계자인 아들 막시무스 카이사르를 교육을 받고 사교적인 청년이며, 그를 로마로 보냈다면 원로원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적합했다며 동정했고, 최악의 수모는 피하게 해줬다. 따라서 막시무스 카이사르는 아버지 막시미누스가 사후 동상, 흉상이 파괴되고, 머리는 강에 던져지고, 머리 잘린 시신은 절단난 뒤 개들에게 먹이로 던져진 다음 저주 가득한 비문이 내려질 때, 아버지와 나란히 머리가 로마 시내 한 가운데에 잠시 전시될 뿐 이후 머리와 시신은 머리와 시신이 강에 던져지는 일반적인 반역자 처벌 선에서 수모가 끝났다. 최악의 범죄자, 폭군으로 찍혀 온갖 수모를 겪은 아버지와 비교해, 동상이 철거되고, 그래도 시신이 수습될 기회라도 제공된 점을 보면 직접적인 기록말살형이나 탄핵은 받지 않고, 조용히 잊혀지는 선에서 마무리된 셈이다.

하지만 적정선에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흔적을 지우는 선에서 마무리한 푸피에누스, 발비누스고르디아누스 1세의 딸로, 고르디아누스 2세의 여동생이자 고르디아누스 3세의 어머니인 안토니아 고르디아나 등이 일부 프라이토리아니를 이용해 일으킨 궁중 정변으로 몰락한 뒤, 막시미누스는 고르디아누스 3세가 단독 황제로 오르자마자, 보복 차원에서 원로원의 명 아래 두 명의 막시미누스로 묶여 저주 가득한 기념비가 세워졌고, 악마화됐다. 그리고 이런 악담과 저주는 고르디아누스 3세 몰락 뒤에도 철회되지 않았다.

여담으로, 이렇게 어이없게 막시미누스라는 거대한 공적이 사라져버리자, 발비누스와 푸피에누스는 공동 통치로 정권을 유지해 나가긴 커녕 서로를 의심하고, 동료들인 원로원마저 두 황제파로 나뉘어 다투는 사이 고르디아누스 1세의 딸[44] 안토니아 고르디아나와 공모한 병사들 손에 모두 살해되고 만다. 그리고 군인황제 시대에서 그나마 안정적이고 평화적으로 고르디아누스 3세가 뒤를 잇게 되었다. 허나 고르디아누스 3세는 애당초 티메시테우스, 필리푸스 아라부스 형제 등 아나톨리아와 시리아 속주 출신들이 내세운 꼭두각시였고, 소년 황제 역시 고대기록들과 달리 지극히 평범했고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와 너무 비슷했다. 따라서 고르디아누스 3세는 장인 티메시테우스 도움으로 몇 년간 잘 통치한 듯 하면서도, 그 내부는 언제라도 무너질 위기가 가득했고, 이런 우려대로 실권자 티메시테우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 중 급사하자 소년 황제는 모든 실권을 야심가였던 신임 근위대장 필리푸스 아라부스에게 넘겼다가 페르시아와의 전투 중 살해당한다.

3. 평가

역사가 브렌트 쇼가 평가했듯이, 이전 군인 출신 황제인 트라야누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달리 3~5세기 집권한 하층민 출신 로마 황제들과 많이 비슷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막시미누스는 5세기 황제 중 동향 출신의 로마 황제들인 리키니우스, 갈레리우스 등과 많이 비슷해보여도 쇼를 비롯한 학자들의 평가처럼 말 그대로 직업군인 출신 중 제위를 찬탈했기 때문에 즉위 당시부터 정통성 부분에서 자신의 실력이 어느 한 쪽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면 몰락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치 경력이 일천해도 그가 황제로서 인정받거나, 최소한 제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지지가 필요했는데, 불행히도 막시미누스는 순수 군인 출신 황제 중 원로원과의 관계가 가장 험악했고, 관계 개선에도 크게 신경쓰지 않은데다 즉위 과정에서도 민중들에게 평판이 상당히 좋았던 전임자와 그의 가족, 친구 등을 모조리 학살해버렸다.

따라서 학자들의 일관된 평가처럼 그의 전투능력은 굉장히 중요했는데, 막시미누스 트락스는 게르만족과 도나우 강 일대의 야만족들을 상대로는 뛰어난 전사였다고 하더라도,[45] "황제이기 이전에 원로원 의원이었던" 세베루스 황제의 경호병인 걸 제외하면 원로원과 아무런 연줄도 없는 데다가[46] 황제 이전의 지위도 대대장, 그것도 겨우 신병교육대장에 불과했다. 즉, 로마군의 군단 하나를 이끄는 군단장[47]조차 역임하지 못하고 황제가 된건데 그는 지중해식의 공성전에는 전략, 전술적으로 별로였던 것으로 보이고 모든 군경력 역시 특정 민족들을 상대로 벌인 전투에 집중된 모습이었다. 물론 두 전투 방식은 차이점이 있고, 전투방식도 달랐기 때문이라고 변명할 여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약점은 신병교육대장 출신으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암살 뒤 옹립된 막시미누스에겐 분명 치명적 약점이었다. 어찌되었든 이것도 능력은 능력인 만큼 그가 공성전을 벌이면서 장기전에 이르게 해서, 병사들의 불만을 일으켰고 몰락했다.

로마 황제들 중 자의, 타의에 상관없이 즉위한 이들에게 군사적 재능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가이우스 마리우스, 술라, 루쿨루스, 폼페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아그리파로 대표되는 공화정 시대의 장군들 또는 티베리우스, 트라야누스 같은 로마 황제들처럼 탁월한 천재성이 요구되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 황제는 임페라토르이고, 어느 정도 이상의 군사적 재능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런데 막시미누스 트락스는 순수 군인 출신 황제였고 이를 커버해줄 어떤 특장점도 없었기 때문에 압도적인 군사적 재능은 필수적 요소였다.[48] 그래서 이런 이유 때문에 일각에서는 막시미누스 본인이 가진 재능이 부족한 탓에 그가 결국 몰락했다고 보기도 한다. 이는 막시미누스 트락스 본인이 한때 모시고 다녔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크게 대비되는 부분이다. 그의 상관이었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경우에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술라,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트라야누스와 비교 했을때 그에 미치지는 못하였어도, 나름 정치적 군사적 능력이 상당히 뛰어난 황제였다. 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원로원과 사이가 나빴어도 군인 이전에 아테네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 변호사이자 원로원 의원이었고, 주변 친구들 역시 원로원 의원들, 법학자, 철학자 등이 많았다. 그리고 그런 세베루스도 일단 재위 중반부에 원로원이 자신의 지지자들로 채워지면서 원로원과의 적대관계가 어느정도 누그러졌다.

원로원은 분명 귀족적이고 막시미누스를 이런저런 이유로 좋아하지 않은 집단이었다. 허나 막시미누스의 생각과 달리 원로원과 로마인들은 그에게 무조건적인 승리를 바라지 않았고, 그의 승리는 늘 부담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막시미누스는 함량미달의 황제가 분명했다. 워낙 예의를 중요시하고 가문과 혈통을 중시여기는 원로원이야 막시미누스를 미워할 만 하지만, 막시미누스 치세 기간 내내 벌어진 외부와의 전쟁들은 로마에게 손해가 가득했다. 제국의 인적, 물적 자원은 한정적인데다 제국의 경제적 한계와 생산성 악화는 로마 원로원 수뇌부들도 하드리아누스 시대부터 모두 알고 있던 당연한 상식이었다. 괜히 이전 황제들이 게르만족들이 성장하는 가운데, 무작정 군을 이끌고 막시미누스처럼 예방전쟁이라는 명분 아래 전투를 치르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막시미누스가 벌인 전쟁들은 이전의 세베루스, 카라칼라처럼 전쟁 후 투입 대비 산출이 좋은 적과 벌인 것들도 아니었다. 도리어 가난한 게르만족들을 상대로 이겨 전리품을 챙겨도 별볼일 없고, 국고 소모와 피로도는 가중되는 그런 전쟁에 불과했다. 게다가 게르만군이 이미 전력을 상당히 강화한 상태여서 로마군은 전쟁에서 이겨도 피해가 이전보다 커지고 있었고, 재정은 이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말기부터 위기를 보이기 시작해 콤모두스가 전쟁을 일방적으로 끝낼 때 반발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고,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때부터는 페르시아와 게르만을 상대로 한 연이은 전쟁으로 거의 파탄직전이었다. 그런데 이런 전쟁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되고 몰락 전해부터는 도나우강까지 그 전선을 넓혀 싸운다? 그렇다면 원로원이나 로마인들 입장에선 국가 안전을 위해 백번 양보했다고 해도 그를 지지할 이유가 없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더욱이 막시미누스는 필요한 군자금을 쥐어짜내면서 티메시테우스 같은 재정 전문가들을 풍요로운 아나톨리아, 그리스, 푸닉 일대에 보내 강도처럼 강탈하면서도 민심 이반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민심이반으로 인한 임금체불 가능성을 군인들이 의식할 그 시점에 막시미누스의 치세가 끔살로 끝날 확률은 이미 최소 90%를 넘어갔고, 조직적인 반란 없이 소극적인 반발로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기만 해도 군인들의 칼이 결국 어디로 향할지는 뻔한 이야기였다. 따라서 3세기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평처럼 막시미누스는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반란이 아니었어도 여러 위험요소로 인하여 언제라도 무너질 황제에 불과했다.

그래서 막시미누스 입장에서는 어쩌면 제국이 혼란기만 아니었고, 자신을 등용하여 지휘관급으로 만들어준 세베루스 왕조가 유지되었다면, 전선에서 신병들을 토닥이면서 행복하게 살다가 로마 군단장을 거쳐 노년에 원로원 의석을 얻어 수도 로마에서 노후를 보장받고 살았을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또는 같은 3세기 황제 중 데키우스처럼 군단장을 거쳐 원로원 의석을 얻은 상태에서 황제가 되었더라면 군인 황제 시대의 전개가 매우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트락스 몰락의 결정적인 원인은 원로원이 트락스를 매우 싫어했고, 이런 원로원의 태도에 대해 트락스 역시 군대에만 모든 것을 쏟으면서 탄압 등으로 맞대응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원로원 외의 다른 상류층이나 로마 민중들에게 지지를 받았냐고 물으면 이것도 최악이었다. 로마 민중들은 그의 지나친 세금 수탈과 강압적 통치 스타일 탓에 적이 됐고, 상류층들 역시 트락스의 지나친 군비 탓에 그들의 재산을 뺏긴 상태였다. 이런 반감에 대해 트락스는 그들이 자신에게 유화적이지 않다고 해서 또 강경하게 대응했다. 따라서 로마 민중과 상류층 모두 그를 미워했는데, 당시 로마 시민계층이 이미 상급시민과 하급시민으로 분리된 지 오래라는 점과 민중이 상류층 맞아죽는 문제에 거의 신경도 안썼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가 얼마나 민심을 잃었는가를 알 수 있다. 군인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적으로 돌린 트락스는 이런 단점들 탓에 군사적으로 실패하자 결국 몰락했고, 아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어찌되었든 간에 막시미누스 트락스는 그 뒤에 등극할 갈리에누스처럼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고 하더라도, 혼란스러운 군인 황제 시대를 연 인물이자, 최초의 사병출신 황제로서 그 뒤로 등장한 사병출신 군인 황제들의 모델이 된 인물인 것은 분명하다. 브렌트 쇼가 지적했듯,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황제 등극은 곧 등장할 일리리아 하층민 출신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퀸틸루스 형제를 비롯해, 갈리에누스에게 반기를 든 반란자 아우레올루스, 해방노예의 아들 디오클레티아누스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쳐 그들이 군대 경력을 통해 제국 최상층부를 차지하는데 깊은 영감을 줬다.

영국의 역사학자인 에드워드 기번은 그의 저서인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막시미누스 트락스가 만약 고대 시대에 태어났다면, 엄청난 힘으로 인류를 위협하던 무시무시한 괴물의 전설이 되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4. 여담

  • 라인 강에 있는 동안 예상치 못하게 제위에 올랐을 당시, 군대 안이나 세베루스 왕조 주변부에서 유명세를 얻은 것과 별개로, 대다수 로마인이나 제국 관료들에게는 무명의 인물이었다. 그나마 로마인 모두가 구전으로 들어 알고 있던 것은 트락스가 문자 그대로 거인이며, 제국에서 가장 키가 크고 힘이 센 사람이자 전형적인 변방 군인이라는 것 정도였다. 따라서 그를 실제로 본 적이 없던 제국의 화폐도안 기술자와 조각가들은 황제를 직접 보지 못해 골머리를 앓았고, 타협책으로 막시미누스를 진짜 봤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주화, 조각을 만들고 감수받아야만 했다.
그 결과, 트락스는 다른 황제들과 달리 재위 초기와 후기 주화 도안과 초상 조각에서 유독 큰 차이를 보였다. 특히 트락스의 도드라진 특징인 짧게 자른 머리, 튀어나온 눈썹 이마 부분, 크고 부리부리한 눈매, 특유의 크고 주걱 같은 턱이 이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재위 초기의 로마 주화 초상, 흉상을 보다가 실제 모습과 비슷한 후기의 것을 보게 되면, 턱돌이 내지 영화 프랑켄슈타인크리처가 연상된다는 말까지 듣는다. 그렇지만 이런 특징과 변화 과정 때문에, 중세부터 지금까지 트락스는 골동품 수집가와 화폐 수집가 사이에서는 도상학적 개성으로 인기가 높아, 나름 프리미엄까지 붙는 등 트락스는 꽤 대접을 받는다고 한다.
  • 일자무식, 독선, 폭군 등의 행적으로 악명이 높지만, 본인 역시 황제로서 체면이 중요해 결국 주변 의견에 따라 훌륭한 개인 서신 비서관을 임명했다. 그 사람이 당대 로마의 소피스트 중 수사학의 대가로 명성 높고 존경받았던 라벤나의 아스파시우스였다. 아스파시우스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로마에 만든 수사학 학교 교수까지 지낸 사람인데, 트락스의 연설문 담당 비서에 지명받고, 트락스 연설문을 원로원과 로마군에게 공개되기 전 수정하고 다듬는 중책을 맡았다. 그런데 아스파시우스 영입과 비서 임명은 트락스가 한 일 중 제일 낫다는 평을 유일하게 들었다. 왜냐하면 트락스 특유의 솔직하고 직설적인 언행과 수사학적 정갈함이 합쳐지면서, 이후 로마 황제들의 연설문에 활용될 만큼 큰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락스가 기록말살형에 처해지면서, 현재는 호평 받은 트락스 연설문은 형편없는 연설, 서한과 달리 기록으로만 언급되고 있다.

[] [2] 케임브리지 고전학 금석학 비문 설명 중 엘리슨 쿨리에 따르면, 트라쿠스 혹은 트락스는 공식 별명으로 본인이 이름 뒤에 아그노멘 등으로 자랑스럽게 쓴 것은 아니다. 즉, 말 그대로 이 사람에게 타인들이 붙인 멸칭인 셈.[3] 오늘날의 독일 마인츠[4]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가 오스티아 항구를 만들며, 피해를 입은 선주 및 제국 동부의 교사, 지역유지들에게 시민권을 주면서 이를 받게 된 사람과 그 후손이 여기에 속한다. 거의 대부분 수혜자들이 그리스어 교육 종사자, 무역상, 건설 담당자, 퇴역 해군, 고대 폴리스 시절부터 내려온 그리스 귀족 가문이 많았다. 따라서 헤로데스 아티쿠스, 폼페이아누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프로쿨루스 등 그리스계 로마인의 전체 이름에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에서 몇 가지를 조합한 이름이 많이 보인다. 서기 2세기, 3세기 동부 출신 그리스 혈통 로마 귀족, 기사계급들이 거의 대부분 이때 이 혜택 아래에서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은 경우가 많았고, 이를 기반으로 막강한 경제력에 기반해 로마 중앙 정계에 도미티아누스 황제 집권기부터 로마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따라서 그들의 후손 및 친척들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절부터는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의 두 아들처럼 성씨 개념으로 쓴 클라우디우스를 넣거나 빼거나,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일가처럼 프라이노멘을 처가 쪽의 것과 조합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이 보여, 클라우디우스를 후대부터는 개인이름처럼 사용했을 수도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5] 3대 황제 칼리굴라의 할머니,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의 어머니인 소 안토니아 및 그녀의 언니인 대 안토니아(5대 황제 네로의 할머니)와 이들 자매의 아버지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서 자유를 얻어 로마시민권을 얻게 된 해방노예와 그 가족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도와준 협력자들의 후손이 여기에 해당된다. 대표적으로는 프리기아 지방의 고르디움이 연고지였던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의 조상 및 네로의 모후 소 아그리피나의 측근 팔라스가 있다.[6] 공화정 시대부터 로마 영향권에 편입된 제국 동부의 시리아, 아나톨리아 출신들이나, 도미티우스 씨족 출신 귀족 및 그들의 클리엔테스로 속주에 정착한 이들의 후손이 많이 사용했다. 대표적으로는 시리아 출신 아랍계 법학자 울피아누스, 현재 알려지기로는 아마도 아카이아 출신일 확률이 높다는 아우렐리아누스 등이 여기에 속한다. 다만,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경우에는 본명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이기 때문에 그 직계 조상이 속주에 정착한 이탈리아 출신 도미티우스 가문 평민 병사일 확률이 높아,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 확률이 농후하다고 평가받고 있다.[7] 플라비우스 왕조 아래에서 로마시민권을 받은 그리스인 자유민 후손, 게르마니아와 판노니아 출신 보조병의 후손이나,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직접 로마 시민권 및 클리엔텔라 관계 설정 후 이름 일부를 받은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유대인 요세푸스,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 등의 로마인이 여기에 속한다.[8] 카라칼라 황제의 안토니누스 칙령 조치 이후의 자유민과 그 후손들인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프로부스 등 서기 3세기 이후의 로마인들이 많았다.[9] 오늘날의 우크라이나[10] 그러니까 시민권이 없었다는 말이다. 카라칼라 황제가 제국 내 모든 자유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기 전까지 로마 시민권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보조병으로 입대해서 만기전역하거나 또는 지휘관으로 진급해서 로마 시민권을 획득했다.[11] 다만 카라칼라 칙령이 반포된 시점에서는 이미 막시미누스는 로마 시민권을 받은 상태다. 카라칼라 칙령 때문에 받은 것이 아니다.[12] 트라키아 문서 참조.[13] 쇼는 리키니우스, 갈레리우스, 막시미누스 다이아, 세베루스 2세,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아우레올루스, 레오 1세를 거론했다.[14] 2미터 60센티미터.[15] 오늘날의 라인 강[16] 아우구스투스, 대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칼리굴라로 이어지는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4대'를 적극 지지한 게르마니아 일대에서도, 아우구스투스 일가에 대한 충성이 대단했던 부대다. 따라서 칼리굴라의 게르마니아 전투, 클라우디우스의 전선 시찰 등에도 적극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고 앞장섰다고 한다.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직계가 네로를 끝으로 단절될 때, 네로가 대 드루수스의 차남 클라우디우스와 그 외아들 브리타니쿠스를 살해하고 능욕했다는 이유로 충성을 거절해 네로의 몰락에 쐐기를 박은 게르마니아 일대 주력부대이기도 하다.[17] 트라키아 놈이라는 뜻의 멸칭[18]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같은 포에니쿠스(푸닉) 지역 출신이었던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와 달리 원로원에게 미움받고, 조롱받은 이유는 그가 지독할 정도로 라틴어, 그리스어 모두 옛 카르타고어 발음과 억양이 있던 사투리가 심했던 것도 컸지만, 무엇보다도 같은 푸닉 지방에서도 도시 세 개를 빼고 볼 것 없고 가난하다고 조롱받은 트리폴리타니아 속주 출신인 점이 더욱 컸다.(괜히 세베루스가 이 두 가지 이유로 모든 경쟁자를 제거하자마자, 자신을 차별하면서 조롱한 원로원 옛 동료들을 살생부까지 만들어 숙청한 게 아니었다.) 트리폴리타니아의 뜻은 "세 도시의 지역"을 의미하며, 오에아(현대 리비아 트리폴리), 사브라타 , 렙티스 마그나를 가리키는데, 매우 부유한 속주 중 한 곳임에도 로마 아프리카에서 가장 도시화가 덜 된 지역으로 평가받아 동향 출신들 사이에서도 일부는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고, 황제들이 범법자들을 추방할 때 활용하고, 주요 수출품도 인신매매를 통한 노예 무역이라서 이미지도 아프리카 속주, 누미디아 속주와 달리 안 좋았다.[19] 특히 지중해 동부와 북아프리카, 도나우강 유역[20]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 장남 티베리우스와 나눈 서신에서도 직접 언급된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양손자, 종손이며 누나 옥타비아의 외손자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훗날의 클라우디우스 1세)의 미래를 걱정하다가, "우리의 사랑하는 아들 티베리우스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소이다. 나 역시 티베리우스처럼 이 아이가 형들과 마찬가지로, 기회를 얻어 정치를 하고 군인이 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소이다"며 고백하며, 로마인에게 군대경험과 군복무가 국가행정 실무와 제국 통치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언급했다.[21] 지중해 동부, 푸닉 출신의 이탈리아 거주 인사들[22] 전통적으로 대대장 진급자들은 기사계급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나마 강력한 재력으로 귀족계급에 준하는 교양을 갖출 수있었기 때문이며 상당한 숫자가 군단장 진급을 하거나 원로원에 들어가기도 했다. 귀족이야 군생활을 처음부터 대대장으로 시작하지만. 저소득층 평민 출신은 대부분 병으로 전역했으며 실력으로 군단 수석 백인대장까지만 진급해도 대단한 명예였고 자력으로 대대장 진급은 노리기 어려웠다.[23] 물론, 비티니아의 헬레니즘 귀족 출신 원로원 의원 디오 카시우스는 이 조치가 시행되자 "거리에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거지꼴이 되고, 관료와 원로원 의원이 된 병졸 출신들은 그리스어도 못하고 귀족의 예의범절도 몰라 천박함만 보여준다"며 이 조치를 씹어댔다. 일단 정신승리에 가까운 로마 제국 시대 그리스인들의 드높은 자부심을 감안하면 반쯤은 깎아들어야겠지만.[24] 직업군인 출신 장교들과 병졸 출신의 정규군 베테랑들[25] 40대 전후[26] 장비는 자기보다 머리좋고 유식한 사대부들은 공경했지만 자기 휘하는 까라면 까라고 억눌렀고, 관우는 휘하 병졸에 대해서는 자애로웠으나 무력 없이 공부만 한 사대부들을 업신여겼다. 그나마 관우는 춘추좌씨전에라도 통달하고 나서 담백하게 사대부의 위선이나 무능을 혐오한 것이었지만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그런 것도 없었다.[27]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생전을 기준으로 여기에 속하는 대표적 인사들로는 훗날 황제가 되는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발레리아누스가 있다. 이중 발레리아누스는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칭제 후 반란을 일으킬 당시, 그들이 서한으로 첫 접촉을 한 원로원 중진의원이었다.[28] 위대한 게르마니아 정복자[29]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바타니아, 갈리아 벨기카 일대에서 대 드루수스와 그 장남 게르마니쿠스에 대한 자발적 추모와 인기는 3세기 후반까지 계속될 정도로 대단했다. 따라서 독일 마인츠에는 아직까지도 드루수스탑이 남아있다. 대 드루수스가 추앙받은 것은 개선식을 앞두고 전투 승리 후 도하 중 낙마사고로 29살의 나이에 요절한 것도 있지만, 로마군들이 드루수스 부자를 진심으로 사랑해 후손들까지 좋아한 이유는 이들 부자가 보여준 실력과 인품, 카리스마 때문이었다. 대 드루수스는 용장이지만 외교술에 능하고, 과감한 정공법과 전술을 곁들인 카이사르 같은 전략가였는데 이런 점은 형 티베리우스, 후임자인 아헤노바르부스와 확실히 차이가 있어 로마군은 대 드루수스를 무척 존경했다. 더욱이 그는 아들 게르마니쿠스처럼 아랫사람들에게도 자상하고 인간적인 인격자라서 로마군과 그 가족, 보조병 후손들까지 미워하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아들 게르마니쿠스가 요절한 뒤 사회적 현상으로 발생한 게르마니쿠스 신화의 토대 중 하나가 됐다.[30] 우격다짐으로 부하들의 희생과 물량 소모로 진격한 막시미누스와 달리, 대 드루수스는 부하들의 희생을 최소화하고 게르만족의 심장부를 단번에 박살낼 요량으로 북해로 배를 띄워 베저 강 너머의 게르만족 심장부를 일격에 박살낸 뒤 그곳 부족장들에게 그들의 아들들을 로마 인질로 받고 친로마파로 만드는 성과를 냈다. 따라서 이 사건 직후 로마군은 자신들이 신들도 허락하지 않은 게르마니아를 거의 정복했다고 생각했고,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에게 자기 아들이 얼마나 큰 성과를 냈는지 공개적으로 자랑했다. 하지만 이런 성과를 내고 1년 뒤 드루수스는 낙마사고로 개선식 직전 요절, 이후 1년도 못 되어 티베리우스가 송환되고 7년간 가출을 하는데(...).[31] 로마 마일이다. 고대 로마군은 행군할 때 발걸음을 이용해 행군 거리를 측정했는데, 로마 시대의 행군단위인 천 걸음마다 말뚝을 박아 거리를 측정했다. 이때, 한 걸음은 두 발자국을 말하며 천 걸음(thousand-pace)은‘mille passus’로 표기했는데, 1 로마마일은 오늘날로 따지면 약 1.48km에 해당한다.[32] 로마 제국의 수도 로마.[33] 를 빙자한 최전방의 패싸움[34] 5대 황제 네로의 할아버지로,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딸 대 안토니아의 남편이다. 즉,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사위이자 옥타비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부부의 첫번째 사위. 게르마니아 전쟁의 3대 야전 사령관으로, 로마군 역사상 드루수스 다음으로 게르마니아 전쟁 속에서 군사적 승리를 많이 거둔 인물이다. 게르마니아 방벽에 세운 보급로와 군사작전 시설, 운하 및 정착 방어촌 개념을 입안해, 10년여 후 바루스가 이끈 로마군이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거의 전멸할 때, 로마의 북부 방어선을 지탱하는데 큰 공을 세워, 절망에 빠진 아우구스투스에게 이때의 공로가 크게 칭찬받았다. 하지만 이런 공로에도 3대 사령관 시절, 시리아, 파르티아와의 외교 전술로 게르만족들에게 외교술을 펼쳐, 친로마파까지 불만을 터트리고, 아우구스투스가 티베리우스를 조기 송환한뒤, 아헤노바르부스의 승리 속에서 속주화 작업이 우선된다며, 다음 해에도 군사작전을 주장한 그를 사실상 경질당한 전례가 있어, 죽을 때까지 이때의 일로 불명예에 시달렸다.[35] 북부 갈리아가 안정화된 것은 갈리에누스 황제가 이 일대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하고 난 이후였다.[36] 아닌게 아니라 게르마니아는 현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도 본국에서 전시세금을 뜯어내면서 울며 겨자먹기로 정복전쟁을 하느라 그야말로 피똥을 쌌던 땅이다. 솔선수범하느라 황궁 살림살이까지 경매로 팔아치워서 군 재정에 보태고 중병을 앓으면서도 치료도 못하고 아편까지 복용해가며 억지로 고통을 참고 춥고 습한 북방 땅에서 병사들을 직접 독려하다가 죽은 황제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다. 후임 황제 콤모두스에 대한 여론이 치세 초기에 마냥 좋았던것도 게르마니아 정복전이 중단되어 전시세금 징수가 멈췄기 때문이었다.[37] 오늘날의 북아프리카 해안[38] 말만 갑작스러운 사건 후 벌어진 추대형식인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 이유는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카르타고에서 반란이 일어난 곳으로 가기 전부터 황제를 상징하는 보랏빛 망토와 각종 장신구를 죄다 구비해둔 상태였고, 칭제 직후 로마에 사람을 보낸 뒤 원로원을 편지 한 통으로 빠르게 포섭한 것 등 때문. 이런 이유로 현대 학자들은 총독 부자의 준비된 반란으로 이를 해석하기도 한다.[39] 원로원 회의를 소집해 중진급 이상 원로원 의원 낭독 하에 자신들을 황제로 승인해 줄 것, 막시미누스 탄핵과 국가의 적 선포, 비탈리아누스를 위시한 로마 내 막시미누스파 암살, 같은 원로원 동료이나 예전부터 사이가 나쁜 카펠리아누스 조기 소환 및 처형 요청[40]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속주 개편 및 총독 대상자 개혁 이후, 누미디아에는 원로원 의원 중 법률가 출신의 야전사령관들이 부임했다.[41] 동시대 사람으로 시리아 속주에 거주 중이었던 헤로디아누스는 “카펠리아누스는 고르디아누스 부자와 개인적 이유 등으로 사이가 최악이었다”며, "그가 고르디아누스 부자를 토벌한 후 아프리카 속주 내 카르타고를 군법에 따라 약탈하도록 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사건 후 그가 트락스에게 가거나 협력했다는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인물이 트락스 쪽 인사인지 여부에 대해 맞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연구자들은 헤로디아누스나 다른 역사가들의 기록들을 종합해볼 때 그가 원로원 권고대로 이 사건 후 책임 차원에서 자리에서 완전히 물러난 것으로 추정한다.[42] 내란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엄연히 이는 국법상 총독의 필수 임무였던 반란 토벌이었다.[43] 고르디아누스 2세는 신참자 가문의 세습 의원임에도 군경력이 뚜렷하지 않은 원로원 의원이라서 군사적 역량, 지휘능력 모두 전무했다.[44] 고르디아누스 2세의 여동생[45] 로마군에게 담뱃불 붙여주던 공화정 및 원수정 초기의 게르만족이 아니다. 로마와의 교류를 통해 오히려 부족체제에서 왕국체제로 전환하는 중이었고, 이전에 비해 훨씬 대규모 병력을 체계적으로 동원, 활용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수만 명을 체계적으로 이끄는 수준이 된다.[46] 세베루스 황제는 2세기 원로원의 주류인 푸닉 태생이었지만, 그를 지지한 이들은 푸닉 지방 일부를 제외하곤 거진 일리리아, 갈리아, 시리아 속주 태생들이었다. 더군다나 세베루스는 고향 푸닉을 비롯하여 그리스, 아나톨리아 혈통의 이탈리아 거주 주류 의원들과 사이가 안 좋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제위경쟁자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나 니게르를 지지했고, 세베루스의 화해 제스처에도 뒤통수 칠 궁리만 하면서 세베루스 제거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베루스는 디오의 주장과 달리, 순수 이탈리아 태생 의원들의 지위를 더욱 보장해주고 지역차별을 받던 갈리아, 히스파니아 출신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면서 푸닉, 그리스, 크레타, 아나톨리아 태생 부자 원로원 의원들을 반역죄로 싸그리 제거했다.[47] 이 당시, 야전사령관인 군단장은 원로원 의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맡았다.[48] 가장 가까운 시대의 실패한 황제 중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 콤모두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들 카라칼라의 숨겨진 아들이라는 주장을 앞세워 즉위한 엘라가발루스만 봐도 알 수 있다.